시간이 빠르다는 것은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사실적 기술이라는 것을 경험합니다. 마흔 넷이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함께 책을 넘기면서 숫자 놀이를 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앞에 숫자와 뒤에 숫자가 같이 나오면 꽤 좋은 경우입니다. 마흔이 넘어가는 것과, 마흔 넷이 되는 것은 또 다른 마음에 감각을 가져다 줍니다.
며칠 전부터 아이들이 물어봅니다. 아빠 뭐 선물로 받고 싶은거 없어? 자기들의 용돈에서 뭘 살지를 나름 제안을 합니다. 웃음이 흘러나왔습니다. 곰곰히 생각했는데 별로 원하는 것이 없다고 느꼈습니다. 제가 가진 것들 중에 낡은 것도 오래된 것도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쓸만하기에 충분합니다. 삶은 가진 것으로 채워지지 않음을 배우고 있기에, 반은 농담으로 그리고 반은 너무나 깊은 마음으로 아이들에게 말했습니다. 아빠는 너희들만 있으면 충분해
요 며칠 너무 과로를 해서 의도치 않게 늦잠을 잤습니다. 일찍 일어나서 설거지라도 하려고 했는데 아내에게 참 미안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도시락이라고 미역국을 준비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얼마나 고마운지, 잠시 할 말을 잃었습니다.
혼자 앉아서 점심을 먹는데 왠지 마음에 뭉클했습니다. 살아온 시간들이 마치 작은 미역국 한그릇에 다 담겨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미지근하지만 참 따뜻했습니다. 아내의 사랑 덕분에 지금까지 제 삶을 포기하지 않고 걸어올 수 있었습니다.
멘탈리티를 읽으면서 식사를 했습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부분입니다. "천장이든 바닥이든 부딪히기를 걱정하지 않는다. 클리너에게는 애초에 천장도 없고 바닥도 없는 까닭이다." 이 문구를 읽고 제 삶의 많은 부분, 사실은 근본이 변화 되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이지도 않는 한계, 편견, 아집, 눈치, 괴로움에 갖혀 있던가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삶을 지금까지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저는 자유자입니다. 저의 삶의 전부는 오직 주님의 것이며, 주님을 위하여 불태우기 위해 존재합니다. 예전에는 그렇게 부담스러운 고백들이, 이제는 제 마음을 뜨겁게 합니다. 지금 이 순간, 하나님 안에서 살아 있다는 것에 마음이 벅찹니다.
한 성도님의 아버님께서 오늘 소천하셨습니다. 소식을 듣는데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유가족들을 위해서 속으로 기도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생일이, 누군가에게는 삶을 마감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삶과 죽음은 사실 같이 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죽음은 언제나 바로 앞에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를 붙잡고 그 어두운 길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오늘도 좌절하지 않고 전진합니다.
마흔 셋이어도, 그리고 이제 마흔 넷이 되어도 여전히 앞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더 깊어진 저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저의 인생을 붙들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으로 주님의 계획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고통스러웠던 지난 십 년이 열매를 맺는 현재를 보면서, 이제서야 그 걸음을 인도하셨던 주님께 경탄합니다. 주님, 그래서 그렇게 하셨군요, 참 힘들었지만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요즘에 가슴이 자꾸 두근거립니다. 사실 종종 견디기 힘들 정도로 뜨거운 격정에 휩싸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기 때문입니다. 설령, 그것이 제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인내하며 기다려야 한다는 것도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저 가슴 벅차는 삶, 당장 내일이 내 삶의 마지막이라 하더라도 후회하지 않는 그 삶을 달려가고 싶다는 절박하고 간절한 마음만이 저를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마흔 넷의 인생이, 마흔 다섯으로 이어지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더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저의 주인이시기에, 저의 아버지이시기에 감사합니다. 제가 누리는 모든 것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앞으로 살아 있는 동안 작은 저를 통하여 주님의 소중한 일을 이루실 주님을 찬양합니다. 마흔 네번째 생일까지 인도하신 나의 주님께 오직 사랑과 감사를 올려드립니다.
주님, 주님 아시는 것처럼 저는 중요한 결단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주님께 기도하게 되고, 제가 살아온 길을 돌아보게 되고 그 마음을 살펴보게 됩니다.
주님, 주님 아시는 것처럼 저는 쉽지 않은 길을 걸었습니다. 말 그대로 앞이 캄캄하여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간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 마음은 두려웠습니다.
어떤 희망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그 시간을 걷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눈물을 흘렸고 마음도 상했습니다. 그 누구도 이해해 줄 수 없는 시간은 몸서리쳐지도록 외로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시간을 다시 돌이키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제 마음을 보았습니다. 다시는 그런 시간을 경험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입니다. 단 한순간도 그렇습니다. 단순히 고난을 피하고 싶다는 마음이 아니라, 그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보았기 때문에, 저의 본능과 저의 존재는 그것을 피하고 싶다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이 저의 마음에 울렸습니다. 주님, 저는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훌륭한 믿음의 사람을 주님께서 죽이기로 작정한 자처럼 끄트머리에 두시다니... 도대체 바울은 무슨 마음이었을까요? 그는 주의 사도요 성경을 기록한 자입니다. 그는 인간 중에 가장 뛰어난 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기꺼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으시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셨습니다.
죽음을 생각할 때, 예수님이 떠올랐습니다. 나의 주님, 나의 구원자, 믿음의 완성자이시요 독생자이신 그분이 생각이 났습니다. 주님 자신께서 죽음을 향해 걸어가셨다면, 그분을 따르는 자들이 반드시 죽음을 경험해야 하는 것이 새삼스럽거나 놀랄 일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주님, 저는 여전히 그것이 낯섭니다. 마치 제가 가지 말아야 하는 길을 주님께서 보이시는 것 같다는 어색한 마음이 가득합니다.
주님께서 저의 입술을 주장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진실하고 순수한 기도가 터져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두려움과 아픔과 눈물과 외로움을 뚫고, 주님의 뜻이라는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하고 아름답고 빛나고 결연한 그 목표가 솟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저는 저의 짧은 삶이 "주님의 뜻"을 위해서 사용되기를 원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의 뜻을 이루고 싶습니다. 그것이 저의 유일한 소원이 되기 원하고, 그 일을 이룬 이후에 정금처럼 빛나길 원하며, 저의 작은 삶을 통해서 주님의 이름이 드러나길 원합니다.
주님, 주님의 길로 인도해주시기 원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어디로 가든지는 제가 관심을 가질 일이 아님을 고백합니다. 저는 주님만 바라보고, 저는 주님의 뜻만 생각하고, 저의 삶 저체가 오직 그것에 맞춰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주님, 저의 중요한 결단도 오직 주님의 뜻을 이루는 방편이 되기를 원합니다. 부차적인 것을 보지 않고 주님의 뜻과 주님의 때와 주님의 마음과 주님의 깊은 생각을 따라갈 수 있도록, 저의 온 존재를 성령으로 붙들어주시옵소서.
두번째 학기가 끝나고, 드디어 여름 방학을 맞이했습니다. 짧지만 강렬했던 계절학기는, 기대했던 이상의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알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서 배우고, 고민하고 나눌 수 있는 시간을 가진다는 것은, 비록 힘들지만 인생에 있어 큰 행복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내가 혼자 이든이를 보느라 큰 고생을 했다는 점에서, 가급적 계절학기는 앞으로도 피하고 싶습니다.:)
칼빈 칼리지에서 교육학을 가르치는 킬리(Robert J. Keeley) 교수님은 기대보다 훨씬 괜찮은 분이었습니다. 교육 심리학을 전공했지만, 심리학 쪽에 지나치게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 주권적인 신앙에 근거한 교육을 가르치려는 그의 노력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도덕주의적인 교육을 배제하고,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려는 스토리 텔링에 관한 가르침 역시, 신선하고 좋았습니다. 자신의 논리에 대해서 어느 정도 반대하여도 넉넉히 그것을 받아들이고 교류할 수 있는 그의 여유도 부러웠습니다. 한국보다 많은 부분에서 월등한 교육 자료, 건전한 신학을 바탕으로 잘 짜여진 커리큘럼 등도 놀라웠습니다.
긴 방학 동안 무엇을 해야할까 고민하면서, 몇권의 책들을 책장에서 꺼냈습니다. 아직 마음이 조금은 지쳤는지 글이 아른거려 눈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생각을 합니다.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할까?...' 근본적인 질문이고 고민입니다. 제가 이곳에 온 이유, 내가 공부하는 이유, 내가 가야하는 최종 목적지, 그리고 목회자로서의 역할, 그 모든 것을 다시 한번 곰곰히 생각해 봅니다.
어쩌면 답은, 우리 가까이 있는 듯 합니다. 가르치는 사람이든 배우는 사람이든 최종적인 목적은 결국,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신앙인으로서 걸어나가는 것' 이라 생각합니다. 마치 정글과도 같은 세상에서, 각자의 삶의 자리가 다를 수 밖에 없는 다양성 속에서, 그리고 수 많은 주장과 생각이 교차되어 혼란스러운 사회 속에서, '성경으로 근거한 가치관과 태도로 소신있게 인생을 걸어가는 것', 그것을 저는 최종 목적으로 삼습니다. 그것은 목회자 의존적이기보다는, 성경 의존적이고, 교회 집중적이기보다는 좀더 사회속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성숙하고 독립적이며 자립할 수 있는 신앙인을 향한 이상입니다. 그리고 저의 짧은 인생이, 성도님들의 이 목적에 기여할 수 있다면, 참으로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의 미국 교육학계의 화두는 제가 이해할 때에는 'Intergenerational' 입니다. 사실 이 단어를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세대간 교류' 라고 번역하면 될까요? 간단하게 말하면, 현재 연령별로 구분된 교회 혹은 가정의 시스템을, 다양한 세대들이 소통하는 시스템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모와 자녀의 소통, 그리고 교회 안에서 장년과 청소년 그리고 어린이들 등의 다양한 세대간의 소통입니다. 모든 세대가 함께 신앙을 나누고 성숙을 추구하는 것이 'Intergenerational'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학문적으로 뒷받침하고 유의미한 결과를 발견하고 다양한 분야(ex) Intergenerational Worship)에 적용하는 것이 최근의 추세입니다. 많은 연구들은 한결같은 결과를 보여주는데, 신앙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의 공통 분모는, 바로 이 다세대간 교류를 통해서 자란 사람들이란 것입니다.
행정학을 전공한 저의 관점에서 이러한 접근은, 시스템 전체를 바라보는 좋은 통찰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교회는 각 부서별로 분리되어 있고, 특별히 그러한 분리는 연령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비슷한 나이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있기에, 우리보다 인생을 먼저 살아간 신앙의 앞선 분들에게 나타나는,삶 속에서 실천된 신앙의 깊은 경험을 물려받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합니다. 마치 현재의 교회 교육의 상황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소그룹 모임을 가지지만, 그러나 역설적으로 거울을 통해 나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과 비슷합니다.
비록 다양한 사회 속에서 살아가지만, 인생이 경험하는 것들이 비슷하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나보다 연장자이신 어른들에게 신앙을 배우는 것은, 가장 갚진 일 중에 하나입니다. 이러한 소통을 시스템적으로 만들어주고 열어주는 것이 바로 'Intergenerational' 입니다. 이것이 1년동안 배운 핵심 중 하나이고, 앞으로 저의 목회의 하나의 큰 Y축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해할 때에 이러한 접근은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러한 접근이, 이미 조직의 개인 개인들이 충분히 성숙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만약에 우리를 둘러싼 신앙의 연장자들 속에서, 우리가 존경할만한 부분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고 소그룹을 가지는데, 오히려 젊은이들의 마음이 연장자들을 보면서 더 민망해지는 상황이라면, 과연 이러한 시스템적인 접근이 득일까요? 아니면 치명적인 실이 될까요? 물론 그 반대의 상황도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자라나는 세대의 마음 가운데, 자신의 세대에 대한 독선과 오만만이 가득하다면, 다른 세대들이 그들을 위해 소통의 손길을 내민다고 하여도 그것이 효과를 가질 수 있을까요?
교회 전체를 바라보는 시스템적인 접근은 너무나 소중하지만,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것만이 정답이 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조직적인 접근을 통해서 우리가 이끌어내고자 하는 것은, 개인간의 소통이고, 그러한 개인간의 소통 속에서 선한 영향력은, 소통의 주체가 되는 '개인' 으로 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결국, 개인과 개인의 관계가 합쳐져서 조직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의 결론은, 결국 개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또 다른 X 축입니다. 어떠한 Intergenerational 적인 접근이라도, 개인적인 성숙을 전제로 하고 추구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 인식은, 그렇다면 '무엇이' 개인의 성숙을 만들어내는가 라는 더욱 중요한 질문으로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그래서 저의 주된 관심은, '누구에게 무엇을 배울 것인가'가 아니라, '저렇게 훌륭한 신앙인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근래들어 더욱 마음이 아파오는 것 중에 하나는, 많은 이들에게 결국 교육의 질을 결정하는 것이 '자본' 이라는 점입니다. 넉넉한 집안의 사람들은, 가장 앞선 교육을 찾아서 자신을 위해 투자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보다 높은 학위를 향한 추구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은, 가장 낮은 수준의 교육을 받는 것 조차 힘들어집니다. 단순히 성도님들을 향해서 좋은 학교에 들어가야 한다 라는 조언으로는 답이 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한국에 짙게 드리운 불황의 그늘이 마음을 누릅니다.
만약에 제가 목회자가 아니라면, 차라리 마음이 편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경영학적으로 말한다면, 소수의 뛰어난 리더들을 세워서 조직을 이끌어가는 것은 어쩌면 덜 어려운 일인 듯 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전체를 생각하고, 힘든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야만 하는 가장 연약한 한 명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 사람의 성숙까지 생각해야 한다면, 이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20대 초반 은사 배영진 목사님을 만나고, 좋은 책들을 접하게 된 것, 그리고 소그룹 독서 토론을 경험한 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계기로 지금까지, 독서에 대해서 고민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이해할 때에 과거의 독서에 대한 이해는, '교양있는 사람들이 가지는 고급한 취미'였습니다. 그러나 현재 저에게 있어 독서는 '개인이 성숙하기 위한 가장 확실하고도 빠른 길' 입니다. 그리고 독서야 말로, '가장 적은 자본으로 가장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입니다. '리딩으로 리드하라'의 이지성씨가 표현하는대로 '천재의 두뇌에 직접 접속하는 것' 이라는 멋진 표현도 있지만, 좀더 소박한 표현으로는 '만남' 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인에게 있어 독서는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나보다 앞선 생각과 고민들을 가진 신앙인들 혹은 일반인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에 동참하고 고민하면서 그들에게 배운 생각과 통찰들을 내 삶에 적용' 하는 것입니다.
유학을 떠나기전 존경하는 이유환 목사님께서 교회에서 강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때 무엇을 마지막으로 성도님들에게 드릴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준비한 것이 '독서 간증' 입니다. 제가 그동안 읽은 책들을 정리해보고, 왜 그것을 읽었는가 이야기하고 또 얻은 유익들을 나누고, 그리고 책들을 왜 그러한 순서로 읽었는가를 설명하는 것, 그것이 독서 간증의 주요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혹시 그것이 성도님들에게 작은 감동이라도 된다면, 그분들 역시 독서를 통한 신앙 성숙의 유익을 얻기를 바랬습니다.
물론 많은 분들이 좋은 책들을 추천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독서라는 것은 결국 어느 정도 순서와 흐름을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적인 배경이 전혀 없이 신앙 서적을 혹은 교리서를 읽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며, 성경과 신앙에 대한 배경과 고민없이 세계관에 관한 책을 읽는 것 역시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양한 책들을 한꺼번에 보기는 했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성경에 본격 접근하기 전에 도와주는) 성경 개관, (신앙의 근본이자 기준과 목적이 되는) 성경 통독, (성경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는) 설교집과 교리 서적, (성경을 삶에 적용하는 측면에서) 신앙 서적, (성경과 삶을 연결해주는 통찰을 주는) 기독교 세계관 정도의 순서로 보았고 그러한 순서가 어느 정도 유익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독서의 과정에 있어, 신앙인의 인생 가운데 그 책이 어떤 역할을 하고 어느 정도의 중요성을 주는지에 대해서도 설명이 필요합니다. 자기 안에만 갇혀서 지식을 쌓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 함께 교류하고, 자기보다 앞선 사람에게 지도를 받는 것은, 제가 이해할 때에 독서 과정 속에서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그래서 교회 전체적으로 분위기와 모임을 조성하고, 목회자가 적극적으로 독서 과정과 방향에 개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독서 간증을 준비한 그때부터 조심스러운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행복한 교회를 향한 소박한 꿈입니다. 제가 읽었던 책들을 엄선해서 5년 정도의 커리큘럼으로 만들어 교회에서 나누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님들이 소그룹으로 함께 모여 읽은 것을 나누고, 고민하고 기도하고, 격려하는 그런 교회입니다. 자유로운 질문과 소통이 존재하는 교회입니다. 함께 신앙을 고민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그 길을 걸어가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목회자와 성도님들이 함께 성숙해 가는 그런 교회입니다. 언제쯤 좀더 주관을 가지고 담임으로서 교회를 섬길지 알 수 없지만, 그때까지 X축과 Y축이 충분히 준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이곳에서 남은 1년이, 미래를 준비하는 소중한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혹시 관심 있으신 분들을 위해서, 강의 했던 자료를 함께 나눕니다. 누군가에게는 대단할 수 있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별것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작은 노력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될 수 있다면, 그것으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Prezi라는 프리젠테이션 툴로 만든 것이라 조금 어지러우실 수도 있습니다. :)
아래 링크를 직접 클릭하시고, 화면이 로딩 된 이후에,
발표 자료의 우측 하단에 화살표를 한번씩 누르시면 진행하실 수 있습니다. 발표 자료가 진행되는 순서가, 제가 책들을 보았던 순서와 거의 일치한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열심히 노력하여 공부하고 있지만, 요즘에는 부쩍, 많은 부분에서 자신감이 없어졌습니다. :) 유학의 기간은, 제 자신의 본모습을 제대로 발견하고 그래서 더욱 겸손해지는 기간인 듯 합니다. 결국 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셔야 함을 알게 됩니다. 저는 연약하고 죄된 인간일 뿐입니다. 뛰어나고 우월하고 앞선 목회자이기 보다, 성도님들 곁에 서서 위로하고 격려하며 함께 걷는 목회자가 되고 싶습니다. 주님께서 선하게 저를 인도하시기를..
너무 어리버리한 저였기에, 군생활은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느린 행동과 부족한 암기력, 배울 것도 그리고 해야할 것도 너무 많았습니다. 욕을 너무 많이 먹어서 더 이상 들을 말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소대 부엌일을 하면서 열심히 바닥을 걸래로 닦는 저를 보고, 지나가던 고참이 한마디 했습니다. '진부는 머리는 참 나쁜데 그래도 부지런한 구석인 있네.' 저의 지나간 군생활을 돌이켜 볼 때, 그때 그 한마디가 가장 소중합니다.
오늘 공식적인 학기의 클래스 수업을 마무리하며, Paper Presentation 시간을 가졌습니다. 한 학기동안 열심히 공부한 내용을, 최선을 다해서 발표 준비를 하고, 15분 동안 교수님과 동료들 앞에서 소신있게 발표하였습니다. 발표하면서 마음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이 paper는 더 이상 논리가 아니라 이제 저의 일부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논리적인 허점도 많이 있었고, 언어적인 한계도 있었지만, 큰 무리없이 무사히 잘 마쳤습니다. 적어도 교수님의 마음 가운데 저의 생각을 공감시킬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If we can not understand contents, it is vain in reality." "Sure!"
서른 번쯤, 그만 포기할까 생각했습니다. 칼빈에 입학한 것만으로 충분힌 것 아닌가 생각도 했습니다. 학구적인 논리적인 글을 쓴다는 것은, 저의 상상이상의 것이었고, 주제를 잡는 것 조차 너무 버거웠습니다. 좀더 쉬워보이는 내용을 좀더 편하게 가고 싶다는 생각도 여러번 했습니다. 사실 졸업에 필요한 평균 학점 이상을 받을 수 있을까에 대한 두려움도 너무 컸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내에게 발표 잘 하고 왔다고 말할 수 있어서 너무 기뻤습니다. 마음에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하철에서 바보처럼 단어를 외우던 시간들이 생각났습니다. 어떻게든 물러서지 않고 영어에 도전했던 시간들이 생각났습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에 격려해 주었던 아내가 생각났습니다. 저자들의 마음과 논리를 헤아리기 위해서 고민했던 시간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냥, 많은 생각이 났습니다.
아직 4주 간의 페이퍼 마무리 하는 시간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저의 첫 학기의 성적은 전혀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오늘까지의 시간 속에서, 저 자신에게 그리고 아내에게, 의미있고 부끄럽지 않은 시간을 가진 것에 감사합니다.
믿음이 비록 반드시 성공을 가져다 주지는 않지만, 하나님을 향한 신적인 끈기와 열심을 가져다 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최선이 비록 반드시 성공을 가져다 주지는 않지만, 자신을 향한 자랑스러움과 누구도 흔들 수 없는 내면의 견고함을 가져다 준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만큼은, 너무 행복하고 즐겁습니다.
또 다시 한걸음 더, 내딛고자하는 용기가 생겼습니다.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절박한 시간이 있다면, 아마도 '수능' 시즌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수능 기도회를 인도할 경우, 말씀 준비가 더 부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시험장에 자녀들을 보내놓고, 어쩌면 그들보다 더 긴장하며 간절히 기도하는 부모님들을 생각할 때에, 더욱 정성으로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자주합니다. 언젠가 수능 기도회 설교를 하게되어, 솔로몬의 지혜에 대한 본문(열왕기상 3장)을 준비했습니다. 특별히 다른 본문이 생각나지 않았고 또 개인적으로 궁금한 본문이었기에 집중해서 살펴보고 싶었습니다.
맨처음 저를 놀라게 했던 것은, 우리가 잘 아는 솔로몬의 재판 이후에 '사람들의 반응' 이었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왕의 심리하여 판결함을 듣고 왕을 두려워하였다' 이상하지요? 그저 우리의 생각으로는, 현명하고 지혜로운 왕의 판결을 백성이 즐거워하고 기뻐했을 것 같은데, 사실은 백성이 왕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하나님의 지혜가 저의 속에 있어 판결함을 봄이더라'
그들이 두려웠던 이유는 이것입니다. 그의 지혜가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것' 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그 사건은 '제3자인 증인' 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범죄자가 왕 앞에 떳떳하게 행동할 정도로, '완전 범죄' 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풀렸습니다. 그러므로 그 이야기는, 세상에 흔하게 보는 '지혜로운 사람' 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누가보아도 '하늘에서 내려온 하나님의 신적인 지혜' 가 드러난 사건이었고, 그것이 사람들을 진실로 두렵게 했던 것입니다. 연약한 인간의 세상에, 우주의 절대자가 등장하심으로,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신을 향한 경외감' 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그 부분을 묵상하고서, 도대체 솔로몬이 어떤 식으로 기도를 했기에, 그런 지혜를 받았는지 너무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의 앞 본문을 통해 그의 대사를 곰곰히 읽어보고서, 그의 '태도' 혹은 '동기' 가 특별함을 발견했습니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you have made your servant king)...'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I am only a little child and do not know how to carry out my duties)' '주의 빼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the people you have chosen)...'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who is able to govern this great people of yours)...'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to govern your people)...' (NIV)
솔로몬의 자기 인식과 그의 태도가 너무 놀라웠습니다. 그의 하나님을 향한 대사는, 정말 한절 한절 마음에 묵상해볼 만합니다. 일국의 왕이 되었음에도, 그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종' 에 불과함을 알았습니다. 모든 백성의 왕임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와 백성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 임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소중한 일이 자신에게 맡겨졌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또 그것으로 인해 고통했습니다.
저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그가 '지혜를 구했던 이유' 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하나님의 일' 을 정말로 '잘' 해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그는 정말 하나님의 일을 잘 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 목적과 동기와 방향이, 자기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향해 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 그리고 그분의 일을 맡아서 어쩔 줄 몰라하는 자녀의 마음, 자신의 부족함을 이해하는 겸손함, 그리고 자신의 순수한 동기로 하나님의 일을 행하기 위한 그 어떤 것을 구할 때, 반드시 주시리라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정말 기뻐하시고, '신적인 지혜' 를 그리고 다른 많은 것들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재판은, '단순한 지혜' 를 논하는 사건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자신의 인생에 주어진 의미와 목표에 대해서 하나님의 사명임을 인식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간절한 소망을 담은 기도에 대한 '확인' 이요 '성취' 입니다.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설교 원고를 다 작성하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 말씀의 내용이, 단순히 수능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우리의 인생의 목표와 방향이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이, 제 인생에 중요한 목표가 되었습니다. 예, 맞습니다. 저는 굉장히 우둔한 사람입니다. 지혜가 너무 없고 어리석습니다. 그러나, 정말 똑똑해 지고 싶습니다. 지혜로워지고 싶습니다. 그것은 제 자신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제가 섬길 성도님들을 위해서 그렇게 되고 싶습니다. 제가 이곳에서 보내는 모든 시간들과 노력들의 동기가 순수하고, 저의 태도가 아름답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받아 주시길 또한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시간들을 통하여 솔로몬에게 그러하셨던 것 처럼, 오직 하나님만이 허락하실 수 있는 '신적인 지혜' 그리고 '필요한 다른 것' 들을 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이 글을 읽으시는, 하루하루 직장과 가정과 인생 가운데 주께서 맡기시는 일들을 묵묵히 감당하고 있는 당신에게도, 바로 이것이 인생의 목표가 그리고 확신과 소망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 야고보서 1장 5절)
만약 우리가 누군가에게, 우리에게 돌아올 어떤 이익을 바라며 '친절' 을 베푼다면, 그것을 '친절' 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순수한 이기심' 의 표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행동의 목적과 동기와 방향은 오직 '자기 자신' 을 향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친절' 이 아니라 '투자' 라고 부릅니다.
기독교는 언제나 '마음의 중심' 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리고 '동기' 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물어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8장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주님 앞에 호소했던 그들이, 결코 주님의 이름을 모르는 자들이 아니었음을, 그리고 그들이 한 일이 결코 작은 일들이 아니었음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쩌면 그들은, 자신들의 시대에서 가장 큰 일들을 했던 사람들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정작 주님 앞에 섰을 때에 그들의 행했던 수 많은 업적들이, 실상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아.. 진실로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말씀은 이것 뿐입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놀랍게도 많은 분들이 이 구절을 가지고 적용하며, 우리가 더욱 선행을 행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저는 그것을 오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책망받는 자들은, 행함의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또다른 그 어떤 기준에 대하여 책망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아버지의 뜻' 이라는 것은 언제나, 철저하게 세속적인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하는 그 어떤 것입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태복음 5장)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결국 우리의 인생이 여기에 달려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세상을 거스르는 진리입니다. 도저히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황금과 같은 인생의 길입니다. 틀림없이 그 문은 좁고, 찾는 이가 아주 적을 것입니다. 많이 사랑하셨습니까? 많이 선을 베풀었습니까? 그렇다면 그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리고 그 중심에 존재하던 우리의 동기는 무엇이었습니까?
제 자신을 돌이켜 봅니다. 그리고 앞으로 제 인생을 예상해 봅니다. 예 그렇습니다. 저에게 유익이 되는 자에게만, 친절과 사랑을 베풀었던 행동들을 진심으로 돌이키고 눈물로 회개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저의 인생 가운데, 저의 작고 연약한 손길이, 세상에서 더 이상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그런 이들에게 향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것이, 주님 앞에 큰 칭찬이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당신이 이번주에 참석한 예배는 어떠셨나요? 은혜를 많이 받으셨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러나 혹은 어느 정도 실망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처럼 모태 신앙인 평범한 성도가 서른셋까지 드리는 예배의 횟수를 대략 계산해 보았습니다. 한주에 두번, 1년에 백번으로 잡아도, 대략 3천번 정도가 됩니다. 돌이켜보면 그렇게 많은 예배에 참석했지만, 예배가 나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고민해 본적은 참 적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예배의 하나하나의 과정을 묵상해보고 의미를 생각해보는 것은 성도님들에게, 사실은 제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과정이라 생각됩니다. 그런 맥락에서, 미국의 장로교 교회 안에서 인정받는 리디머 처치의 예배를 참석하고 고민해 보는 것은 저의 인생 가운데, 그리고 읽으시는 당신의 인생 가운데도 중요한 분기점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본격적으로 성경을 통독한 것은 아마 대학교에 입학한 이후 부터입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늘 마음에 궁금했던 던 한가지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과연 '우상숭배' 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과연 '현재'를 살아가는 나에게 '우상숭배' 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물론 우상 숭배라고 생각하면 금방 구약이 떠오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앞에서 춤을 췄습니다. 하나님은 십계명 가운데 우상을 만들지 말라 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우리는 '우상을 섬기지 마라' 라는 당위적인 명령을, 구약을 본문으로 한 설교에서 듣습니다. 아주 단순하게 말한다면, 그것은 불교의 부처상 혹은 사람들이 섬기기 위해서 만든 여러 종류의 우상들 혹은 조상들을 모셨다는 명절의 제사상 앞에 절하지 않는 것입니다.
구약을 다루는 설교에서 우상 숭배가 중요한 주제가 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징계를 받고 나라가 망하게 만든 결정적 죄이기 때문입니다.
자 그렇다면 신약은 어떻습니까? 곰곰히 생각해보면 신약 속에서는,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혹은 설교를 들을 때 우상숭배가 그렇게 강조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우상 숭배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주제로 나타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약을 다루는 설교에서는 흔히 '예수님', '성령님', '교회', '공동체', '하나님의 나라', '선교', '구제' 라는 주제 등을 사용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때때로 우리는, 한가지 중요한 '논리적인 단절'을 경험하게 됩니다. 즉 구약과 신약의 단절입니다. 구약에서 성도들에게 우상숭배를 금하라 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주제였다면, 이제 신약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주제는 아니게 되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현대 교회에서 저를 포함한 성도님들이 드리는 예배는, 암묵적으로 우리가 의식하든지 의식하지 않든지 몇가지 분명한 목적을 가지게 됩니다. 즉 그 예배를 드린 이후에, 우리의 마음이 성령님으로 뜨거워지며, 교회가 흥황하며, 공동체가 든든해지며, 선교에 대한 열정이 살아나고, 구제에 더 힘을 쏟게 되는 것들이 우리가 참된 예배를 드렸는가에 대한 아주 중요한 척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설명하지만, 구약은 구약일 뿐입니다. 그 시대에는 우상 숭배가 가장 큰 주제였다면, 이제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변화되었습니다. (저는 결코 선교나 구제나 공동체 등등을 반대하는 사람이 아님을 기억해주시길 바랍니다)
아주 흥미로운 것은, 팀캘러 목사님이 그의 글 가운데 바로 이 부분을 지적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설교의 적용의 부분에서 구약의 역사를 '우상숭배' 라는 관점으로 정리한 이후에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 Sum : So, the OT is understood grid of idolatry. God is king, but we tried to keep control and power worshiping and serving created things. They in turn, set up a kingdom of darkness that blinds and enslaves. The prophets say that someday, the King will return and free us. But we can't read the NT through the grid of idolatry, can we? It is seldom mentioned. And moreover, idolatry is not relevant at all for us today, is it? - 'getting down to earth 3' of Preaching the Gospel in a Post Modern World / Edmund P. Clowney, Timothy J. Keller
- 요약 : 즉 구약은 우상숭배로 점철된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하나님은 왕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에 불과한 것들을 섬기거나 경배하는데 힘을 쏟거나 조작하기 위해서 노력해 왔습니다. 그것들은(우상들은) 교대로, 사람들을 노예로 삼거나 눈을 멀게 만드는 어둠의 왕국을 세웠습니다. 선지자들은 언젠가, 진정한 왕이 돌아오셔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실것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신약에 속한) 우리는 우상 숭배의 만연이라는 관점으로 신약을 읽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방식은 거의 언급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우상숭배라는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전혀 적절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하 정목사 해석)
이것이 바로 팀캘러 목사님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 입니다. '구약에서 우상 숭배는 그토록 절대적이고 또한 하나님의 백성을 파괴하는 적이었는데, 이제 신약에 있어서 그것은 어디로 갔습니까?' 라고 우리에게 진지하게 도전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의 탁월한 점입니다. 그는 신약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 역시, 구약과 동일하게 '우상숭배' 임을 논증합니다. 그리고 그는, 제가 이해하기로 사실상, 복음을 인생에 적용하는 그의 탁월한 설교 가운데 우상숭배라는 주제를 가장 '핵심적인 도구' 로 사용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글에서 요약하여 좀더 인용해봅니다.
- It is typical to think that “idolatry” is mainly an Old Testament phenomenon, but closer examination shows that it is not. A couple of texts provide clues to the fact that pervasive human idolatry was assumed by the New Testament writers.
- 우상숭배가, 주로 구약에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이 전형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나 면밀한 관찰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몇개의 성경 구절들은, 만연한 인간의 우상숭배가 신약의 저자들에 의해서 이미 가정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 1. Idolatry is at the root of all sin--in fact, it is the only way to understand sin.
우상숭배는 모든 죄들에 근원입니다. 사실 그것은 죄를 이해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입니다.
- 2. Idolatry is at the root of every heart--it is the only way to understand motivation
우상숭배는 사람의 모든 마음의 근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즉 그것은 사람들의 동기를 이해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입니다.
- Sum: This means then, that idolatry is always the reason we ever do anything wrong. Why do we ever lie, or fail to love or keep promises or live unselfishly? Of course, the general answer is “because we are weak and sinful”, but the specific answer is always that there is something besides Jesus Christ that you feel you must have to be happy, something that is more important to your heart than God, something that is spinning out a delusional field and enslaving the heart through inordinate desires. So the secret to change (and even to self-understanding) is always to identify the idols of the heart.
- 요약 : 그러므로 이것은, 우상숭배는 우리가 무엇인가 잘못된 행동을 하는 바로 그 이유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우리가 거짓말하고 혹은 사랑하는데 실패할까요? 또한 약속을 지키는데 그리고 이기적이지 않게 살아가는데 실패할까요?
물론, 일반적인 대답은 우리가 연약하고 죄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구체적인 대답은 항상 이것입니다. 즉 당신에게, 당신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반드시 가져야 한다고 느끼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어떤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보다 당신의 마음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그것입니다. 그것은 지나친 탐욕들을 통해 당신을 현혹시키는 영역을 유지하는 그리고 당신의 마음을 노예처럼 만들어버리는 어떤 것입니다.
- 3. Idolatry is at the root of all unbelief and, to some degree, every culture.
우상숭배는 모든 불신앙과 어느 정도에서는 모든 문화의 뿌리입니다.
- Sum: At the root of all problems (personal or social), and of all non-Christian philosophies and ideologies is the elevation of some created thing to the place of ultimate worship and ultimate arbiter of truth and meaning.
- 모든 문제들 (개인적인 것이든, 혹은 사회적인 것이든) 의 뿌리는, 그리고 모든 불신자들의 철학들과 사상들의 뿌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것들을 궁극적인 예배의 자리에 그리고 진리와 의미에 대하여 궁극적인 조정자의 자리에 올려 놓는 것입니다.
자, 이제 팀캘러의 생각이 어느 정도 갈피가 잡힙니다. 그는 인간의 삶과 철학과 모든 문제들에 대하여, 그것의 어그러진 그 근본에 우상숭배가 있음을 간파합니다.
우상숭배는 단순히 어떤 형상 앞에 절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외의 그 어떤 것에 대하여 탐욕을 부림으로 가장 큰 가치를 두는 것, 그리고 바로 그것에 의하여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이 판단되고 움직이는 것, 바로 그것이 모든 인간이 본질적으로 행하고 있는 '예배' 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에는 두가지 예배 밖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바로 '우상숭배' 그리고 '참된 예배' 입니다.
그렇다면, 리디머 처치의 예배는 어떻게 다를까요? 예배가 시작되기 전 울려퍼지던 모든 아름다운 음악이 끝났을 때, 예배를 진행하는 목회자가 소박한 보면대 앞에 서서 했던 멘트가, 바로 위의 그 내용을 압축한 것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오전 예배와 오후 예배 진행자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멘트는 아주 유사했습니다. 즉석에서 단순히 분위기를 만들어내기 위한 멘트가 아니라, 리디머 교회가 예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깊은 생각의 결과를 짧은 몇 문장 안에서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다른 표현으로는, 지난 글에 설명해 드린 주보의 Reflection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었습니다.)
대충 기억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당신이 만약에 다른 어떤 것들, 당신의 젊음이나 지성이나 다른 어떤 것들을 예배한다면, 당신은 언제나 실망하고 공허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자리에서 우리는 유일한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을 섬깁니다.
예배란, 하나님 당신만이 내가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고, 당신 안에서는 절대로 실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는 것을 고백하는 자리입니다. 예배 드리러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다 같이 일어설까요?'
정신이 번쩍들었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참된 예배'였구나! 단순히 뜨거운 열정을 드리는 자리도 아닙니다. 그저 종교적인 의식 중 하나도 아닙니다. 그저 내 감정을 고양시키는 자리도 아닙니다. 무작정 공동체성을 기르거나 선교를 다짐하는 자리도 아닙니다. 단순히 우리의 행위를 변화시키기 위한 자리도 아닙니다.
그것은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나타나는, 타락한 인간과 사회의 자연적인 예배를 거절하고 그것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물들을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섬기는 타락한 예배를 회개하고 통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오직 예배 받기 합당한 한분에게 모든 것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지난 십년 동안의 어려움과 고민들이 이제서야 많은 답을 찾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참된 예배'가 있습니다. 당신은 어떠신지요? 저와 당신은 늘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이제서야, 우리의 예배가 조금은 더 달라질 것 같습니다.
처음에 이들과 함께 모였을 때에,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주제를 하자는 의견에 적잖이 당황하였습니다. '왜 기독교의 다양한 교단과 분파들이 하나가 될 수 없는가?' 신학을 전공하지도 않은 아이들에게 강의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거기다가 영어로 설명할 자신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좋은 결과물이 나왔습니다. :)
전체 내용은, UNITY란 주제로 모여서 토의를 했지만, 토의하는 사람들조차 유니티를 이룰 수 없는 우리의 안타까운 현실이 주제였습니다. 물론 철저하게 각본대로 만든 시나리오이므로, 유니티를 이루지 못하는 격렬한 토론의 모습도, 사실은 사전에 기획된 장면입니다.(마치 영화 인셉션처럼 :)
전체 모임을 인도한 메이건의 리더쉽이 있었고, 좋은 아이디어를 제공하신 이승찬 목사님의 통찰력이 있었고, 각본을 짜고 영상을 직접 만든(FINAL CUT PRO 이용) 벤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이곳 CFNI를 같이 다니는 에런이, 아빠의 모든 장비를 다 빌려온 덕에 :) 좋은 카메라와 렌즈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CANON 7D) 처음으로 조명에 대해서 배우고 사용해 보았습니다. 저는 주로 촬영을 했고 제 카메라(CANON 600D)도 한몫 단단히 했습니다. 마르셀로의 천연덕스러운 연기도 한몫을 했고, 신디의 시니컬한 표정도 좋았습니다.
외국인 아이들 속에서 많이 버거웠지만, 그래도 즐거웠습니다. 속으로는 여러번 모임에서 물러서고 싶었지만, 최대한 버텼습니다. 다른 조로 가려고 했는데, 이승찬 목사님이 격려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살아남아야, 다른 곳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태어나서 메이건처럼 말 빨리하는 외국인은 처음 만났습니다. :) 20대 젊은 아가씨의 친절하고 활발하고 능동적이고 의욕이 넘치는 모습이 정말 좋았습니다. 메이건의 꿈은, 언젠가 헐리우드에 진출해, 기독교적인 영향력 있는 영화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나름의 프러덕션까지 이미 만든 훌륭한 사람입니다.
뉴욕에서 왔다는 제이슨은, 정말 말이 빠르기 때문에, 사실 아직까지 무슨 말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마르셀로를 비롯한 브라질 친구들은, 자기나라 말도 잘하고 영어도 너무 잘해서, 정말 부러웠습니다. 비록 여전히 부족하지만, 적어도 영어라는 관점에서는, 제 나름대로 도전이었고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
한학기의 목표인 이 영상을 위해서, 정말 많은 모임을 가졌습니다.돌이켜보니, 훌륭한 친구들 속에서, 기대하던 것 보다 훨씬 많은 것을 경험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행복 :)
가장 비천한 것을 아름답게 치장하려 한다면, 그것은 매우 비참한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것을 더욱 빛나게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은 진실로 기쁜 일입니다. 교회가 가진 것,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오직 복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오기까지 이끌 수 있는 어떤 것이 있다면,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그것이 저에게 있어 '영상' 의 의미입니다.
저번 학기 때에, 금요일 게스트 스피커(guest speaker) 시간에, 왠 긴 레게머리를 한 흑인이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할 강의의 내용을 적은 5장 정도의, 정말 성경 말씀으로 빽빽하게 적힌 강의안을 나눠주었습니다. 그날의 주제는 성령의 기름부으심이었습니다. 무려 세시간 동안의 열강, 저는 단 한가지를 강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진실로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진실로 성령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재능 가운데 성령님께서 역사하시길 너무나 강하게 갈망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날이, 제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성령님의 기름부으심 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 날이었습니다. 물론 저는 보수적인 장로교 목사이며, 그 개념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방식에서 사용되는 것이 아님을 조심스럽게 접근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그 개념이, 성경적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저에게 있어 그 강의의 날은, 진심으로 성령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어떤 뮤지션과의 만남 속에 일어난, 영적인 감동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이 사람이 무얼 하는 사람인지도 몰랐습니다. 물어물어 알아보니, 드러머(drummer)라고 했습니다. 충격이었습니다. 정말 놀라서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 뮤지션이라니! 그 사람이 한번도 악기 연주를 한 것을 못 봐서가 아닙니다. 그 사람이 너무나 성경을 사랑하고 진실했기 때문에, 그것이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어제 다시 한번, 게스트 스피커로 강의를 하러 왔습니다. 물론 여러가지로 그 강의 내용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민하는 신앙인이었습니다. pride라는 주제를 가지고 두시간 동안 열강했습니다. 교만한 인간의 위험성과, 겸손한 그리스도인이 가지는 참된 복들을 강의했습니다. 그의 눈에서는 불이 나오고 있었고, 그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가 강의 중에 높이 들어 흔들었던, 너무 읽어 낡아버린 자신의 성경, 시대에 맞지 않는 어두운 촌스러운 표지의 두꺼운 그 성경은, 그의 마음 안에서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는 말씀 한구절 한구절을 곱씹어 삼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미묘한 난관을 알고 있었고, 자신의 재능을 하나님앞에 어떻게 드려야 하는가에 대한 분명한 주관이 있었고,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문화와 인종을 초월하는 힘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강의는, 제가 아는 그 어떤 복음주의권의 목사님보다, 훨씬 더 조리있고 따뜻하고 재미있고 감동적이었습니다. 그의 드럼 연주를 워십 영상으로나마 봅니다. 영상의 마지막에, 스틱을 던져버리고 기도하는 그의 모습, 아무리 봐도 눈물이 나오고 마음이 터질 것 같습니다. 그는 실수로 그것을 놓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격으로 스틱을 던져버리고, 그 순간 하나님 앞에 엎드리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틀림없습니다. 그는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 엎드려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의 강의를 들었기에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입니다. 드러머 Keith Banks, 그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을 사랑하는 불타는 열정 안에, 자신의 재능을 담아내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오늘도 바래 봅니다. 그래서 행복.
장로교에서 세례가 참으로 감격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래도 침례가 더 극적으로 보이는 것을 충분히 인정하고 또 좋아합니다. 그것은, 죄인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함으로, 이제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 가운데서 살아간다는 기독교의 핵심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불타는 죄에 대한 욕구와, 분노와 절망과 슬픔을 우리는 다 죽인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그 죽은 것들을 향해서, 더 이상 너희가 생명 없음을 선포하고,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 순종하기를 힘 씁니다. 이 영상의 백미는 뒷부분의 찬양입니다. I have decided to follow Jesus, no turning back.. 영상적으로는 수업 시간에 겨우 하나 알아들었습니다. '저 같으면 물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장면을 super slow 모드로 잡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야 말로, 세례의 진정한 의미를 마음에 새기고 있는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영어로 소통한다는 것은, 그 나라의 문화와 배경에 접근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어는 참 어렵습니다. 단순한 생활 영어는 어렵지 않지만, 그것이 무엇인가 사고를 나누고 접근하기 시작하면, 언제나 큰 벽을 느낍니다. 이 영상의 의미에 대해서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대사가 잘 안들리고, 들리는 부분도 해석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엇인가, 자아 안에 갇힌 현대인의 외로움과 고통,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듯 합니다. 언젠가 이런 고급스러운 영상과 내용도, 자연스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언젠가 합신 특강 시간에 총신의 신국원 교수님이 초청되었습니다. 대중문화를 전공하셨다는 그분의 이력을 듣고 잔뜩 기대했다가, 파워포인트 한장 없는 지루하기 그지 없는 강의 속에서 거의 정신을 잃고 쓰러질 때 쯤, 그분의 천둥과 같은 한마디가 저의 마음을 때렸습니다. '저는 파워포인트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사고를 제한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책 그리고 또 다른 경로들을 통해, 결국 인간이 만든 미디어라는 것은, 실용주의라는 철학에 바탕을 도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러한 것들을 이용하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신중하게 접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곳에서 미디어를 가르쳐주는 분들의 공통된 철학은 저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이제 설교는 사람들이 듣지 않습니다. 지루한 설교보다 단 몇분의 영상과 화면이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확실하게 잡을 수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교회의 핵심이 설교가 아니라 영상이 되기 시작했고, 보이는 것이 교회를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잠깐 보이는 그 실용적인 결과물이, 시간이라는 양분을 먹고 자라는 영원한 가치들을 대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귀에 들리는, 책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 그분의 계시를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와 그것을 풀어 설명하고 하나님을 드러내는 설교는, 주님 오실 때 까지 계속 될 것이며 교회의 핵심으로 존재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상과 미디어를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비록 이것이 완전하지는 않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효과 있는 도구라는 점입니다. 이것이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유용합니다. 오늘 수업시간에 소개받은 잘 만들어진 영상입니다. 아마도 교회 새신자 초청잔치(굉장히 올드한 느낌이 들지만, 이 제목이 전 늘 좋습니다)에 사용되는 영상인 듯 합니다. 언젠가 우리가 만든 좋은 영상을 통해, 이미 세상의 아들들이 되어버린 잃어버린 영혼에게, 좀더 다가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래 봅니다.
중고 CD가게가 유행하던 한때, 자켓에 남자 4명 정도만 포즈를 취하고 있으면 가슴이 떨려 무조건 구입하던 때가 있었다.(물론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음악이 나오기도 했지만) 이상하게도 남자들이 만들어내는 화음을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따뜻해진다. 정말 아쉬운 것은, 함께 나누고 싶은 크리스마스 곡들을 골라보지만, 사실 마음에 썩 드는 곡이 없다는 것이다. 나의 음악적인 식견이 좁은 것을 탓해 본다. 구관이 명관일까? 대중적이지만, 그러나 오랫동안 나를 충분히 행복하게 해 주는 NSYNC 앨범 중에서.
IMF 이후에, 그토록 화려하던 크리스마스의 거리의 장식들이 사라졌다. 경제적으로 나라가 어려워지고 마음이 흉흉해지자, 실용적인 관점으로만 접근하던 그들에게 있어서 더 이상 크리스마스는 매력적인 아이템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 우리의 상황과 조건에 상관없이, 그분의 오심은 영원히 기억되어야 하고 영원히 찬양받아야 한다. 오직 깊은 절망 속에서 신음하던 모든 죄인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다. 이땅에서의 가장 슬픈 마음이라도, 그분을 통해 약속받은 구원과, 미래와, 그분의 자녀됨과, 영원 속으로 들어가는 감격은, 언제나 우리 마음 속에 있다. 그분은 구원자이시며 구원이시다. 아름다운 만남은, 언제나 예기치 못하게 찾아오는 것 처럼, 사랑스러운 음악은 언제나 예기치 못하게 찾아온다. 인간의 목소리만큼 아름다운 악기가 있을까? 아카펠라는 언제나 나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놀랍게도 우연히 찾은 아름다운 영상과 음악. 그토록 수 많은 캐롤이 있었지만, 이 한곡이야 말로 주님을 말하고 높이고 바라보기에 합당할 만큼 너무 아름답다. 주의 날을 기다리며 소망하는 작은 나에게 주신, 주님의 선물일까..
나는 극단적인 경험부정주의자이다. 어쩌면 정신을 따라가지 못하는 몸 때문에, 몸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멀리해왔다. 오직 지성으로! 이것이 나의 모토였다. 그러나 어쩌면 나의 이러한 태도는, 새로운 영지주의, 이원론의 발현인지도 모른다. 주님은 언어로 지성으로 존재하시지만, 그는 실제로 나를 만지시고 대화하시며 진실로 함께 하신다. 그는 나의 영혼을 충만케하시는 구원자이시지만, 그는 나를 오늘도 치료하시고 호흡케하시며 나에게 육체적인 힘을 주신다. 주님은 그런 편향되고 연약한 나에게, 이곳 먼 땅에서 새로운 것들을 보게 하신다. 귀한 승록 전도사님 부부와 함께 Prestonwood Baptist Church 의 The Gift of Christmas 라는 공연을 보고 왔다. 말로만 듣던 미국의 mega church. 넓고 넓은 미국 땅에, 진실로 풍요로운 디자인으로 세워진 교회였다. 두시간의 공연 시간 동안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완벽한 조화. 교회가 보여줄 수 있는 공연의 가장 높은 수준의 공연이었다. 주님이 주신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능력 '창조성'을 통해 보여지는, 예술과 복음에 대한 이해와 표현은, 진실로 내가 이곳에 온 댓가를 갚고도 남을만큼 감동적이었다. 나는 대형교회에만 복음이 있다는 말은 믿지 않지만, 모든 대형교회가 이단이라는 말도 믿지 않는다. 나는 멀티 미디어에만 복음이 있다는 말은 믿지 않지만, 멀티미디어로는 복음을 설명할 수 없다는 말도 믿지 않는다. 나는 언어로만으로는 복음을 설명할 수 없다는 말은 믿지 않지만, 언어 안에만 복음이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인간의 몸짓이, 영상과 소리가, 영감이 하나가 되어서 아름다운 작품이 되는 이 순간을 경험했다는 것이 너무나 행복하다. 물론 한계는 있다. 너무나 아쉬웠던 설교, 그렇게 화려한 공연은 결국 마지막 calling의 시간을 위해서 존재했지만, 그러나 그 calling이 너무나 계면쩍었다는 것은 나만의 느낌이었을까? 그리스도가 오심을 들으며, 그렇게 우리가 눈물 흘리는 것은, 그토록 인간의 삶이 죄로 인해 아프고 절망이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이 공연에는, 주님이 당신을 사랑한다는 메시지는 너무나 강력했지만, 당신이 죄인이라는 메시지는 너무나 희미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그분은 사랑을 구걸하시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탄생의 신비는, 우주의 왕의 인간이 되심이며, 그분에게 전혀 의무가 없지만, 그럼에도 부으시는 그분의 주권적 사랑이다. 우리가 받을 자격이 진실로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때, 복음의 아름다움이 드러난다. 가장 화려한 예술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가장 깊은 말씀에 대한 이해와 철학이 존재해야하고, 결국 그 두가지가 만날 때에, 일반은총은 일반 은총의 아름다움이, 그리고 결국 그것을 이해하고 아름답게 하는 것은 주의 은혜와 말씀이라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 장로교 신학의 아름다움은, 세상의 모든 것을 포용하고 이해하고 넘어서는 큰 틀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그런 교회를 꿈꾼다. about this video ○ Copyright(c) 2011 Prestonwood Church.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