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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14일 월요일

Double / 출애굽기 34장 1-9절 주일 설교 (설교문)

* Double / 출애굽기 34장 1-9절 주일 설교 (준비 과정)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11/double-34-1-9.html

* 출애굽기 34장 1-9절 설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독점적인 사랑을 받는 민족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친히 이방 땅에 살고 있는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복을 주시며 그와 그의 후손들을 통해서 온 세상이 복을 얻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 그리고 이삭의 아들 야곱을 통해서 가족이 늘어났습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을 이집트의 총리로 만드시고 극심한 기근 가운데 그들을 돌보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집트에서 노예로 고통 당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향한 약속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모세를 보내셨습니다. 여호와께는 오직 그분의 사랑으로 이집트의 모든 우상들을 치시고 바로의 아들을 치시며 결국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밖으로 이끌어내셨습니다. 거대한 홍해 바다를 가르시며 바로와 군사들을 물 안에 수장시고 그분의 능력과 그분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 아래로 이스라엘 백성을 모으시고 시내산 위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그의 백성들이 마땅히 지켜야하는 법칙으로써 그분의 십계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모세가 시내산 위에서 내려오지 않는 것입니다. 40일이 지나도 내려오지 않자 백성들이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모세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신뢰가 흔들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난데없이 여호와에 대한 신앙을 버리고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금송아지를 여호와라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그 여호와의 이름을 모욕하고 그분의 명예에 먹칠을 하고 춤추며 노래하고 음란한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으로 부터 이어진 500년에 가까운 하나님의 사랑은 40일을 기다리지 못한 백성의 배신으로 인해서 철저하게 망가지고 더럽혀진 것입니다.

드디어 산에서 내려온 모세가 그 참혹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모세는 분노하며 십계명의 돌판을 그들을 향해 던져 버렸습니다. 모세는 그들의 배신과 그 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았습니다. 여호와의 모든 사랑과 신뢰를 버린 이것은, 마치 신실한 배우자를 버리고 외도를 한 것과 동일한 것이라고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혹시 성도님들께서는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해 보신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서로가 마음을 나누는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나를 속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배신의 상처를 위로하다" 라는 책의 저자인 이브 우드는 배신 당한 사람들을 위한 책을 쓰면서 자신의 이야기로 그 책을 열고 있습니다.

기도의 응답이라고 생각하며 한 사람을 남편으로 맞이했습니다. 행복하게 시작한 그녀의 결혼 생활은 안타깝게도 순탄하지가 못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마치 지킬 박사와 하이드와 같이 이중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때로는 그녀를 지지했지만 또 어느 순간은 한 없이 그녀를 공격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는 남편의 외도의 결정적인 증거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경험을 이렇게 적어 놓았어 "나의 결혼 생활에 대한 환상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나는 황폐해져버렸습니다"

그리고 저자는 배신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하고 있어 "배신이란 신뢰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당신은 더 이상 당신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 사람이 실제로 과연  누구인지조차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자신이 직접 배신을 당한 사람으로서 그것은 한 사람의 육체적 정신적 모든 부분을 황폐하게 한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하는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보복하는 하나님이다 과연 그 말이 맞는가?

우리가 냉정하게 구약을 평가해 본다면 여호와 하나님은 배신당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다른 누가 아니라 자신의 백성에게 배신 당하고 버림 받은 것입니다. 그분이야 말로 상처 받은 신으로써 우리 앞에 계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저지른 이 엄청난 상처와 배신 앞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목숨을 걸고 중재하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백성 전체가 망하는 것은 겨우 막을 수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들과 앞으로 동행 하는 것을 거절하셨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모세 입장에서도 할 말이 없는 것이지

그러나 우리가 주목할 것은 염치 불구하고 할 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모세가 계속적으로 여호와께 매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3 13절 하반절에 이렇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무슨 의미인가? 이렇게 황당하고 이렇게 악한 백성이라도 주의 백성으로 다시 받아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간구대로 그들과 함께 가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더 간절하게 이렇게 간구하고 있습니다. 33 18절 말씀입니다.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대범한 요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여호와 하나님께 이렇게 요구한 적이 없었습니다. 물론 모세는 이미 하나님의 임재를 여러번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처음 만날 때에 떨기 나무에서 그리고 시내산에서의 임재도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가 요구하는 것은 그런 차원의 임재가 아니라 자신의 두 눈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그 깊은 본질을 보기 원한다, 여호와 하나님 자신을 직접 보고 싶다고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아마도 여호와 하나님께 일종의 보증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의 눈으로 본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약속을 지키실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오늘 말씀 5절에 보니 모세가 원하는대로 여호와께서 강림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여호와께서 모세와 함께 섰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셨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6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4: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나 이상하지 않은가? 첫째로 이상한 것은 모세는 여호와의 영광을 보기를 원했는데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영광을 그에게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이름을 두번 더블로 선포하셨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놀라운 것은 여호와께서 선포하셨다는 것입니다. 선포라는 것은 대화가 아니라 일방적인 것입니다. 선포하는 사람이 그것을 선포하면 그것이 끝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 분위기와는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지금까지 모세는 인간 중보자로 여호와께 매달렸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당신께서 용서해 주셔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처 받은 여호와께서는 쉽게 마음을 돌이키시지 못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대화들을 통해서 모세 때문에 모세를 봐서 이제 겨우 함께 가겠다고 약속하신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완전히 분위기가 바뀌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을 보여 달라는 모세의 요청 앞에서 그분께서 자신의 이름을 선포하시면서 분위기가 반전되고 있습니다. 이제 여호와께서 어떻게 하시는가? 모세의 간구나 모세의 부탁이나 누구의 요청이 아니라 여호와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선포하시는 것이지 스스로 있는 자니라

저는 처음 관심을 가지고 오늘의 본문을 접했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여전히 이 장면을 읽으면 마음이 먹먹합니다. 이 본문이 매우 특별한 것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시며 반복적 더블로 말씀하신 것은 성경을 통틀어서 여기에 한 번 밖에 등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출애굽기 3장에서 여호와께서 자신의 이름을 알리셨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여호와라는 이름 그 자체가 그런 뜻입니다. 여호와는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분이십니다. 우리는 누구로부터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그 어떤 것을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물과 공기와 음식이 있어야 존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호와는 누구이신가? 그분은 우리와 존재 자체가 다른 분이십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과도 본질적으로 다른 분이십니다. 그분은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의지하지 않으시며 오히려 모든 것의 창조자이시며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정말 흥미롭지 않은가? 모세는 여호와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했는데 여호와는 자신의 이름을 선포하십니다. 여호와라 여호와라 라고 말씀하시며 그분의 이름을 두번으로 연속해서 선포하십니다.

이런 마음에 묵상을 하게 되었어 이 여호와라는 더블로 스스로 부르시는 그분의 자기 선포는, 우리의 앞에 펼쳐지는 일종의 광대한 장면이다 라는 것입니다.

예전에 댄버에 살면서, 가을 날에 록키 산맥 안으로 들어간 적이 있었습니다. 산을 넘어 한참을 달려서 산들의 안쪽 어딘가를 지나갈 때에, 그때 너무 아름다운 광경을 보았습니다.

평생동안 단 한번도 보지 못했던 가을의 풍경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인간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절대적인 압도적인 풍경 앞에서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의 말씀의 장면이 마치 그런 것과 같습니다. 지금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사실 얼굴을 들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신에게 버림 받아 마땅하며 그저 하나님께 매달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어떻게 반응하시는가? 스스로 존재하시는 광대하신 여호와를 선포하시며 여호와 자신의 그 본질을 근거로 하여서 이 모든 배신과 분노를 떨쳐 내시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스스로 자신이 누구이신가를 선포하시며 자신이 인간과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분의 위대한 이름과 그분의 위대한 성품이 이 모든 비참하고 슬픈 이야기를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사실상 버림 받아 마땅한 그분의 백성의 운명이 여호와의 이름이 더블로 광대하게 선포될 때에 새로운 빛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분의 백성이 여호와를 배신하고 실망시키고 분노하게 했지만 그러나 그들의 운명이 백성 자신에게 달려 있지 않고, 스스로 계시는 여호와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과 그리고 여기 있는 우리에게 선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그분의 절대적인 선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6절에 계속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라고 말씀하시지

무슨 의미인가? 그분의 성품을 풍성하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들은 이 단어와 표현들과 그 연결들이 바로 이것이 여호와라 부르는 분의 본질입니다.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 영원하시며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시며 인간이라는 존재를 뛰어넘는 그분께서, 모세가 보여달라는 그 분의 영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인간의 언어로 풀어서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자비라는 것은, 부모가 자녀들에게 보여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그 어떤 부모도 자녀의 잘못에 일대일로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모욕을 참고 인내 하는 것입니다. 자녀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그를 버리지 않는 것이 부모입니다.

은혜라는 것은, 도움을 필요하는 자들에게 거저 호의를 베푸는 것입니다. 도움이 필요해서 절박해서 눈물을 흘리는 자에게 모른척하거나 냉정하게 대하지 않고, 내가 굳이 그래야 하는 의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친절을 베푸는 것이 바로 은혜라는 것입니다.

진실이라는 것은, 그분을 신뢰할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께 진실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여호와께서는 자신을 배신한 그분의 백성에게 조차 신뢰할 수 있는 분으로 여전히 기꺼이 존재하시겠다고 선포하십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보여준 그들의 패역한 태도에 대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더 큰 품으심을 보여주는 것이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주님은 더블로 자신의 이름을 선포하시는가? 이스라엘 백성의 배신과 실패가 그분의 이름의 그 광대하심을 넘어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자신들을 버릴까 두려워하며 염려하고 괴로워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과 위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신약 성경에 모세가 다시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수난을 받으시기 얼마전에 그분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 앞에서 변하셨습니다. 얼굴이 마치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눈부시게 희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과연 누구이시길래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가?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 9절 말씀입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오늘 말씀에서 모세가 직접 보기를 갈망하던 그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의 모든 범죄와 배신과 반역을 포용하고 넘어서며 그들을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그 여호와의 이름의 더블로 전해지는 은혜의 선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상 가운데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임하셨습니다. 본질상 성부 하나님과 영원히 동등하신 성자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역사 가운데 섬광처럼 시간을 가로질러 가장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은 가장 빛나는 영광을 가지신 하나님이셨지만, 동시에 두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있는 육체를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그분이 자신의 영광의 작은 부분을 잠깐 드러내셨을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무슨 의미인가? 모세는 율법을 받은 자로서 구약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이 주어졌지만 그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모든 인간이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행하시는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진정한 중보자로 오셨습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모세가 중재자로 등장하기는 하지만 모세는 예수님의 그림자에 불과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백성의 용서를 구하면서 기껏해야 자신의 작은 생명을 걸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영원의 가치를 가지신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기 위해서 죄인을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아담 이후로 모든 인간은 죄를 범하고 자신의 창조자에게 대항하고 그분을 배신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기꺼이 아버지께 순종하시며 인간의 모든 죄의 댓가를 십자가에서 치르시기 위해서 이땅에 오신 것입니다.

모세는 그 날 드디어 본 것입니다.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그 여호와의 영광 그 본질과 아름다움 여호와라 여호와라 선포하시며 인간의 죄악의 배신의 역사를 거스르시는 그 위대하신 여호와의 이름이 이 땅에서 실현 된 것을 본 것입니다.

로마서 3 23절과 24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의미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이라는 죄의 댓가를 치르심으로 자신의 의로움을 그분을 믿는 우리에게 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배신자를 너는 신실한 자라 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반역한 이들을 너는 하나님의 자녀라 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5 8절에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무슨 의미인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에 드러난 하나님의 은혜의 선포와 자비와 긍휼하심과 그 계명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번 한주간도 어쩌면 어제 밤에도 어쩌면 오늘 아침에도, 우리는 여전히 여호와를 배신하며 여호와를 실망시키며 그분께 큰 아픔을 안겨드렸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우리가 좌절하거나 삶을 포기하거나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중보자가 되시며 우리의 도움이 되시며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였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여호와께서 포기하시지 않고 끝까지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라는 것입니다.

저에게 좋은 영향을 준 책들이 많이 있지만, 제 인생을 통틀어 가장 선한 영향력을 준 책은 필립 얀시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책입니다. 거기에 나오는 얀시의 친구 다니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어느 늦은 밤 얀시를 찾아와서 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 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결혼 생활 15년 만에 신실한 아내를 떠나기로 했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신이 한동안 잊고 있었던 살아 있는 느낌을 되찾아 주는 젊은 여자를 만났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이어갔습니다. "오늘 밤 자네를 보자고 한 것은 오랫동안 나를 괴롭혀 온 질문 때문일세 자네는 하나님이 지금 내가 하려는 끔찍한 일까지도 용서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얀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의 질문은 살아 있는 뱀처럼 식탁 위에서 꿈틀거렸고 나는 감히 대답을 하기 전 커피를 석 잔이나 비웠다" 성도님들께서는 이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여호와의 자비하심에 대한 그분의 선포 앞에서 모세가 그분께 "경배"로 반응했다는 것입니다. 8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급히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여호와 앞에서 급하게 속히 바로 반응하면서 엎드렸습니다. 그의 겸손한 반응이 연속된 단어들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라 도대체 왜 그랬을까?

물론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아니 저는 모세가 왜 이렇게 까지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스라엘의 배신이나 혹은 불륜 정도는 뭐 그 정도는 당연히 용서하셔야 되는 것 아닙니까? 은혜와 자비의 하나님이시라면 그렇게 하셔야만 되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질문할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얀시는 어처구니 없는 그의 친구를 너무나 안타까워 하면서, 하나님의 용서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용서란 베푸는 편 못지 않게 받아들이는 자가 있어야 온전한 것이 된다 죄를 인정하지 않는 자는 용서를 받아들일 수 없다"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왜 그렇게 바닥에 엎드려 경배할 수 밖에 없었는가?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그 죄의 심각함을 알았고 마음 아파했습니다그 아픔과 괴로움과 슬픔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그것을 기꺼이 용서하시는 여호와의 용서의 가치를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정도 죄는 마땅히 용서 해야하지 않겠냐는 뻔뻔한 태도를 가지고 결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참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은, 매 순간 죄악된 나의 본질을 가슴 아파하며 여호와께 기도하며, 매 순간 그분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는자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 사람이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여호와께 참되게 경배하는 자이며,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가운데 거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을 보면서 또 하나 우리가 주목할 것은, 여호와께서는 여전히 동일한 십계명을 모세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4 28절 하반절에 이렇게 말씀하시지 “28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처음의 십계명은 다 부서졌지만 다시 십계명을 하나님께서 기록하셨습니다. 사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렇게 십계명을 지키지 못했다면 차라리 한 두개 정도는 제외하고 다시 주시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전혀 물러서실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을 용서하시며 받아주시며 격려하시며 동시에 다시 한번 동일한 십계명을 주시면서 동일한 충성과 동일한 헌신과 사랑을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방식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넘어지고 실패한 이스라엘 백성을 품으시며 그들을 인도하시고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시며, 그분의 신실한 계명과 그 준엄한 말씀 앞에서 다시 한번 도전하며 살아갈 것을 엄숙하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 46-48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정말 놀라운 말씀이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들의 삶의 기준이 어디에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이 바로 너희의 기준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 마다, 저의 전 존재를 부르시는 어떤 신성한 부름을 느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완전한 의로움을 주셨습니다. 그분 앞에 용서를 구하며 나아가는 우리에게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그 완전한 의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더 이상 우리의 구원이라는 것이, 내가 어느 정도의 순종을 보여주느냐에 달려있지 않고 오히려 여호와의 능력에 그리고 그 이름에 달려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여호와는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그분의 자녀로서 그분의 사랑의 은혜에 응답하며 경배하는 자로서 여호와의 그 용서의 가치를 아는 자로서 반응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도대체 아버지의 온전하심이란 것이 무엇일까? 예수님께서는 그 온전하심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자 한번 여기서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도대체 이것이 우리에게 무슨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가? 어떤 분들은 이렇게 이야기하실 수 있겠습니다. 아 목사님 알겠습니다, 그럼 친절을 많이 베풀라는 말씀이군요? 물론 그렇게 이해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지만 사실상 지금 성경이 말씀하고자 하는 바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모세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할 때에 여호와의 그 본질 그분의 그 본성 그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보여달라고 했을 때에 여호와께서 무엇을 선포하셨는가? 여호와의 자비, 은혜, 신실하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분의 그 놀라운 선포가 실제로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셨을 때에 도대체 그리스도의 그 본질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와 그 신실하심이 그대로 유지되어서 이 세상 가운데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 것인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아버지의 온전하심처럼 온전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분처럼 자비, 은혜, 신실하심을 보이고 실천하고 나타내는 것이 결코 변두리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의 근본적인 정체성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그것이 우리의 전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의 본질로서 존재해야 하는 것이며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전념해야 하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최근에 저에게 좋은 영향력을 준 책은 "전념"이라는 책입니다. 애덤 그랜트라는 베스트셀러 저자는 이 책을 평할 때에 21시기에 행복과 성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고 평가를 했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피트 데이비스는 지금 시대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어 액채 근대라는 표현처럼 현대인들은 어느 한 가지 정체성, 장소, 공동체에 스스로 묶어두기를 원치 않으며 그래서 마치 액체처럼 어떠한 형태의 미래에도 맞춰서 적응할 수 있는 유동적 상태에 머무른다. 사람만 그런 것도 아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 역시 액체와 같은 상태를 유지한다. 사람들이 어느 하나의 직업이나 역할, 생각이나 신념, 집단이나 기관에 매달려서 오랫동안 같은 형태에 머무르지 못하는 것처럼, 사회도 우리를 진득하게 품어주지 않는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을 끊임없이 탐색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액체 근대다라고 이 시대를 평가하고 있습니다.

성도님들은 이 내용을 통해서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크리스천의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크리스천이라고 말은 하지만, 성도의 그 본질의 정체성이 무엇인가 거기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처럼 액체처럼 방향 없이 그저 흘러가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이시는 요구하시는 그 본질에 매달리지 않고, 그저 세상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여기 기웃 저기 기웃거리면서 나는 도대체 삶의 방향을 알지 못한다고 한탄하면서 액체처럼 방황하며 세월을 낭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자신에게 질문하고 싶은 것입니다. 과연 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완전하심 그분의 본성인 자비와 은혜와 긍휼과 신실하심을 내 인생의 중심의 본질로 삼고 있는가? 그것이 나의 삶의 목적이며 방향이며 나의 삶의 전부이며 다른 어떤 일이 일어나도 반드시 고수해야 할 나의 모든 것이며 내가 반드시 전념해야 하는 그 삶의 목표라고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실천하고 있는가? 그것을 여쭤보고 싶은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 1-4절 말씀입니다. “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세상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보여주십니다. 과연 은혜의 반대가 무엇인가? 무정한 것입니다. 과연 은혜의 반대가 무엇인가? 원통함을 풀지 않는 것입니다. 과연 신실함의 반대가 무엇인가?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여호와의 이름과 그분의 성품보다, 세상의 모든 쾌락과 즐거움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이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은 하나님의 성품과 정확히 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 여호와라는 그 더블 선포가 의미하는 무한한 여호와의 자비, 긍휼, 신실하심이야 말로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꿈을 이야기하곤 합니다. 세상을 하나님의 뜻대로 변화시키고 싶습니다 교회 안에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도대체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것이 무엇일까?

저는 때론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이 전혀 다르다라는 생각을 종종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말로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다고, 내가 변화되는 삶을 살고 싶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 길에 대해서는 무시하거나 무관심하거나 그 안으로 들어가 전념하기를 주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방법에 대해서 오늘 말씀에 나오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의 더블의 선포가 바로 그 자리로 우리를 이끌어가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미 베푸신 여호와 은혜와 자비와 사랑을 그리고 그분의 진실하심을 우리가 진중하게 받아들이고, 그 가치야 말로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임을 깨닫고 그 길을 기꺼이 걸어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진정한 변화는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배신이 난무하는 끔찍하고 비참한 현장 속에서 여호와라 여호와라 선포하시는 그분의 더블의 선포가 임할 때에 거기에서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여호와의 온전하심이 드러난 곳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운명의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원수를 원수로 갚지 않는 자비와, 베풀 필요도 없지만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은혜와, 남들이 나를 저버린다 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내 자리를 지키는 진실함이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흔들고 그들을 바꾸고 그 누구도 생각해보지 못한 새로운 곳으로 그들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더 많은 것을 그리고 좋은 것을 가지고 여기저기 그럴 듯한 곳을 탐색한다고 해서 나 자신과 세상은 절대 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 안에서 교회 밖에서 어떤 이들이 되어야하겠는가? 여호와의 본질을 소유한 자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자녀로서 우리의 모든 것 우리의 삶의 전부를 걸어서 여호와의 그 이름의 위대하심에 전념하여서 세상 속에 드러내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길을 기꺼이 걸어가는 사람이야, 말로 여호와께서 더블로 광대하게 선포하셨던 그분의 이름의 가치를 알고 하나님의 자녀의 명예를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이번 한 주간 동안 그리고 우리 평생에 여호와의 이름을 묵상하시고 붙드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의 본질을 향하여 전념하시며 추구하시며 살아가시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이 시간에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앞에 추악한 죄인인 저를 기꺼이 구원하시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품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여호와의 놀라운 자비와 그 은혜에 언제나 감사하며 경배하는 참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둘째로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 하나님 저를 붙들어주시기 원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의 깊은 사랑과 은혜와 자비와 진실함이 저의 삶의 본질이 되기 원합니다. 여기저기 방황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하시고 저의 남은 평생을 성도의 본질에 전념하는 제가 되도록 인도하여주시옵소서,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함께 기도하기 원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문" 전체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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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uble / 출애굽기 34장 1-9절 주일 설교 (준비 과정)


저는 다른 사람과 저를 비교하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제가 흔들리지 않는 방향성과 목표가 있는가, 제가 얼마나 충실하게 준비했는가,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가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른 방향인데, 몸은 고달픕니다. :)

이번에 주일 설교로 이 본문을 정한 이유는, 제가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제가 주일 설교를 꾸준하게 해야 한다면 목회적인 부분까지 충분히 고려해야 하지만, 한번 하는 경우에는 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본문을 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목회적인 고려를 넣기로 생각했습니다

이 본문은, 난이도로 따지자면 지금까지 제가 한 설교 중에 최고의 난이도를 가진 본문이었습니다. 일단 자주 다뤄지는 본문이 아니고, 아주 쉽게 풀어낼 수도 없는 본문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저는, 이스라엘의 결정적인 실패 이후에 등장하는 여호와의 이름의 더블의 선포가 제 자신과 성도에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더 충분히 연구하고 설교 안에서 풀어내고자 하는 결심으로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역시나, 쉽지는 않았습니다. 설교 자체를 조금이라도 쉽게 가려면 본문 안에서만 내용을 풀어내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그런데 네러티브는 전혀 다릅니다. 이 본문은 네러티브와 해석의 깊이라는 두가지를 한꺼번에 다 잡아야 하는 본문이었습니다

첫째로 이 본문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중요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부터 이야기 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야만 이스라엘 백성이 배신한 그 장면을 부각시키면서, 성도님들로부터 정서적으로 공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쉽지가 않았습니다. 출애굽기 34장까지 오는 그 모든 과정을 초반에 설명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압축하고 압축해서 초반 7분 정도를 인트로에 사용했습니다. 설교 본문의 body를 만드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무심한 듯 빠르게 지나가는 이 인트로에 공을 많이 들였습니다

해석의 내용을 위해서 살펴본 자료는, 스터디 바이블 뿐 아니라 제가 가진 출애굽기 주석은 모두 살펴 보았습니다. 합쳐서 대략 서른권 정도 될까요? 너무 버거워서 평소처럼 모든 것을 기록하지도 못했습니다. 줄을 치면서 필요한 것들을 최대한 머리 속에 넣고, 동시에 틀을 짜면서 주석들을 읽었습니다

여러 주석들을 한꺼번에 보면 비교가 저절로 됩니다. 평소에는 정말 탁월하다고 생각했던 John Currid의 출애굽기 주석은 너무나 평범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거의 처음으로 제대로 읽어본 Peter Enns의 주석은 탁월했지만, 본문 해석에 있어서 조금은 조심스럽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히려 큰 도움이 되었던 주석은 Exaling Jesus in Exodus Kregel Exegetical Library 출애굽기 주석이었습니다. 물론 주석의 시리즈마다 어느 정도 특징이 있지만, 결국 그 주석을 쓰는 것은 저자이고, 저자가 탁월하면 그 주석이 탁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Spurgeon said, “Why, it is the greatest petition that man ever asked of God” (“View”). Moses wanted to see the radiance and splendor of God. Think about it! He had already seen glory. He saw it at the burning bush, with the 70 elders, on the mountain top, in the tent of meeting, and through all the miracles. Yet Moses longed to see more. Had he not seen enough? No. He had a taste of glory, and it made him long for more.

Tony Merida, Exalting Jesus in Exodus (Nashville, TN: Holman Reference, 2014), 33:18–35:3.

It is no exaggeration to say that Exodus 34:6 is one of the most important verses in the Bible. It is repeated numerous times in Scripture (Pss 86:15; 103:8; 145:8; Joel 2:13; Jonah 4:2). When someone wanted to know what God was like, they could quote this verse. After saying His sacred name “Yahweh,” which God revealed to Moses at the burning bush—denoting His self-sufficiency and self-existence—He explained the meaning of that name more fully by highlighting several attributes of Himself. This could be a sermon in itself, but just consider them briefly for now.

Tony Merida, Exalting Jesus in Exodus (Nashville, TN: Holman Reference, 2014), 33:18–35:3.

רַב־חֶסֶד וֶאֱמֶת (“rich in grace and faithfulness”): On חֶסֶד (“grace”), see below. The word אֱמֶת (“faithfulness”) implies that something is dependable, solid, has integrity, and stands in contrast to something that fails when needed most (the “bruised reed”). In this context, it means that when one needs mercy, one can rely upon YHWH.

וְחַטָּאָה (“forgiving iniquity and transgression and sin”): The verb נשׂא when used with “sin” as its object means to carry away the sin; that is, the word essentially means “forgive.” It is used here with three different terms as its object: “iniquity and transgression and sin.” The point is that YHWH forgives all manner of immorality, disobedience, indiscretion, rebellion, or more generically, sin. There are no degrees or types of sin that are beyond YHWH’s power or willingness to forgive. YHWH forgives sin of every kind and shape.

Duane A. Garrett, A Commentary on Exodus: Commentary, Kregel Exegetical Library (Grand Rapids, MI: Kregel Academic, 2014), 653.

사실 이 본문은 너무 중요해서, 위의 설명에서 보시는 것처럼 구약의 여러 군데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주제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넓게 펼쳐지는 맥락에서 주석가들이 그렇게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물론 주석이라는 틀의 한계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초점을 더 맞춰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을 다룬 아티클까지 더 찾아봤어야 했는데 그것이 아쉽습니다

특히 어느 주석에서 존파이퍼 목사님도 이 본문에 대한 아티클을 쓰셨다고 보았는데 언젠가 확인해 보아야겠습니다. 저는 구약 전공이 아니지만, 이 본문으로부터 풀어나간다면 구약학의 학위 논문도 충분히 나오리라 생각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의 오해는, 마치 주석만 열심히 읽으면 설교가 저절로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주석은 주석일 뿐입니다. 그것은 내용을 만드는 일차적인 재료에 불과합니다. 주석의 내용들을 사용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설교에 사용되는 구조와 흐름과 언어적인 표현들 그리고 전달 등은 결국 설교자가 만들고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가 정말 어렵습니다

원래 준비한 원고는 45분 정도였습니다. 토요일 오전까지 준비한 내용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성도님들이 45분의 설교를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았고, 저도 세번의 설교를 그렇게 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하루 동안, 33분 정도로 압축하고 압축해서 설교를 했습니다심지어, 단어의 반복이나 조사의 사용까지 하나하나 점검하면서 군더더기를 제거했습니다.

먼저 구조적으로 보면, 이 설교는 대략 이런 흐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큰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마치 원 포인트처럼 논리적인 흐름을 가집니다. 1. 이스라엘의 배신 => 책 인용 (배신이란 것의 비참함에 대한 공감) => 상처 받은 하나님 => 모세의 간구 => 여호와의 이름의 더블의 선포의 의미 =>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냄 => 모세와 그리스도 => 그리스도의 은혜

2. 책 인용 (은혜의 남용에 대한 경고 도입) => 참된 성도에 대한 이해 3. 십계명을 다시 주심 => 성도의 의무 => 아버지의 완전하심에 대한 설명과 깨우침 => 책 인용 (성도의 삶의 전념의 필요성) => 도전 4. 결론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논리적으로 너무 아름답다라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습니다. 그 짧은 시간동안 펼쳐지는 논리 구조는 황홀함 그 자체여서, 정말 빠져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금은 성도님들께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저의 설교 안에서도 아름답고 질서정연한 논리 구조를 제시하기 위해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다시 설교의 구조를 돌이켜보면, 그렇게 어려운 내용은 아닙니다. 그러나 굉장히 빠른 전개 속에서 흐름을 따라가야 하는 부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설교자인 제 자신에게 더 부담을 지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설교 중에 버벅이거나 주저하거나 흔들리면, 당연히 성도님들도 설교의 흐름을 놓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설교 원고를 준비하면서, 어느 정도 원고가 완성된 다음부터는 실제로 설교 하는 것처럼 부단히 발음과 어조와 액션 등을 연습했습니다.  

설교를 준비한 사람으로서 설교의 흐름 중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하나님의 영광이 그리스도로 나타나셨다라는 부분, 그리고 모세와 그리스도의 만남을 연결한 부분입니다. 그리스도를 이해하고 설교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감격이었습니다. 그래서 설교 초중반부터 그리스도를 등장시키고 설명하는데 집중했습니다.

예전에는 그리스도의 중요성과 그분에 대한 묵상과 설명을 어느 정도까지 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많았는데,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그 부분을 완전히 해결했습니다. 정말 충분하게, 교리적인 내용을 감동적으로 설명하시는 것을 들으면서 나도 저 정도까지는 풀어서 설명해야겠다는 가이드를 얻었습니다.

설교 안에서 책을 세번 인용했습니다. 평소 때에는 많으면 두번까지 인용하는데 세 번은 처음입니다. 그래도, 흐름상 적절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 인트로에서 인용한 책은 일반 심리학 책인데 이번에 처음 발견했고 내용을 다 읽지는 못했습니다. 번역서는 이미 절판 되어서 아마존 영문판에 공개된 것 정도를 다 읽어 보았습니다. 책 내용이 참 좋아서 나중에라도 꼭 다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사실상 성경에 있어서 죄와 함께 등장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가 배신이기 때문입니다

나머지 두 권은 평소에 좋아하던 책입니다. 저에게 정말 큰 영향을 준 책들입니다. 저는 설교에 꼭 책을 인용해야 한다는 그런 압박감은 없지만, 설교를 준비하면서 평소에 읽었던 책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적절하게 인용할 수 있었습니다

전달이라는 측면에서는, 철저하게 팀켈러 목사님의 스타일을 최대한 사용해 보았습니다. 저는 원래 말이 빠른 편인데 지금까지는 상당히 자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팀켈러 목사님은 쉴 부분은 충분히 쉬지만, 그러나 어떤 부분에서는 마치 속사포와 같은 연속된 논리들은 주저하지 않고 빠르게 말하더군요. 영어라서 그런지 더 멋집니다. 그래서 저도 그분처럼 특정 부분에서는 속도를 매우 빠르게 진행했습니다. 다만 충분한 완급 조절을 위해서 때론 느리게 때론 빠르게 변칙적으로 언어를 구사했습니다

전달이라는 측면에서 이번에 가장 신경 쓴 것은, “인용 성경 구절을 읽을 때의 톤” 입니다. 가급적 저는 설교 안에서 성경 인용을 적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왜냐하면 성도님들이 너무 많은 정보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인용 구절이 많아진다면 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톤을 완전히 바꾸어서 성도님들이 완전히 새롭게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설교에서 처음으로, 굉장히 작은 목소리로 또 낮은 톤으로 성경을 읽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톤이 너무 연기 같거나 혹은 과장 되었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저는 제가 정말 느끼는 그대로, 그리고 성도님들이 더 집중할 수 있도록 그런 차원에서 새롭게 시도해 보았습니다.

제가 이렇게 시도한 것은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여러 번 이런 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구절을 그렇게 읽지는 않지만, 종종 그렇게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약간 무심한 듯이, 그러나 정말 낮은 톤으로, 그리고 빠르게 인용 성경 구절을 읽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것이 너무 좋았고 새로웠고 이번에 저의 설교에 처음으로 시도하면서 저도 좋았습니다

3주 정도 전부터 본문을 정하고 천천히 묵상하면서 준비했습니다. 과연 매주 이렇게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못할 것 같습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평범한 저의 지나친 도전입니다. 들어간 생각들과 고민들을 다 정리하자면 끝이 없을 것 같습니다. 설교에 대한 갈망이 있는 누군가와 한 문장 한 문장 짚어가면서 이야기 나눌 수 있다면, 아마 밤을 샐 듯 합니다. 그래서 아주 핵심적인 저의 고민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설교 원고를 다 마무리하고 방에서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기도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곡의 가사처럼, More of you, Less of me 이것이 언제나 저의 기도이며 목표입니다. 저 같은 사람이 말씀을 전한다는 것이 너무 벅차서, 넘치게 하나님께 감사로 올려드렸습니다.

실제 설교 중간에 저도 모르게 세번 정도, 약간 잘난 척을 하고 싶은 혹은 정신을 집중하지 못하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삼십분이 넘는 시간 동안, 준비한 설교를 멈추지 않고 한다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순간 순간 주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했습니다. 계속 기도하면서 설교를 끝까지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쉽지 않은 설교였습니다. 그런데 일흔이 넘으신 권사님이 은혜 받으셨다고 활짝 웃으시면서 인사하셨습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기뻤습니다. 어린 제가 감히 어르신께 어떤 부분이 은혜로우셨냐고 물어볼 수는 없었지만, 은혜 받으셨다는 것 자체가 참 좋았습니다. 손을 잡아주시는데 손이 따뜻했습니다

아직 신앙이 어린 젊은 집사님 한 분이 너무 좋았다고, 어렵지 않았다고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습니다. 단순히 제가 어느 정도로 설교를 했느냐를 떠나서,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합신을 졸업한지가 이렇게 오래되었는데, 설교학 교수님들의 말씀이 여전히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성도는 주일에 설교 한번 들으러 교회 오는 거라고, 그러니까 정말 정성들여서 잘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일 설교가 강단에서 약해지는 것을 염려하시며 눈물로 학생들에게 호소하셨습니다. 그 절절하고 아린 마음이, 여전히 저에게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좋아지기 위해서, 글도 쓰고 고민도 하고 정리도 합니다. 어려운 고비를 지나고 나니, 힘들게 하던 몸살도 좋아진 것 같은 착각이 듭니다. 며칠동안 계속 먹었던 약기운에 어지러웠는데 이제서야 조금은 머리가 개운합니다. 저의 작은 도전들과 발걸음들을 하나님께서 선하게 사용하시기를 언제나처럼 기도합니다.

* "설교문" 전체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11/blog-post_4.html

2022년 7월 19일 화요일

말씀 묵상 어디까지 해봤니? - 출애굽기 5장 / 순종이라도, 삶은 순탄하지 않다

 

모세는 정말 어려운 길을 내딛었습니다. 두려움과 염려로 떨고 있었지만, 여호와를 의지하여서 이집트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백성들은 그를 통해서 여호와께서 일하심을 보고 여호와께 머리 숙여 경배하였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용기와 위로를 얻었을 것입니다.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모세와 아론은 바로에게 바로 찾아갑니다.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모세가 바로에게 가서 한 이야기가, 하나님께서 처음 그들에게 말하라고 명령하신 내용과 다소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은 "출3:18 그들이 네 말을 들으리니 너는 그들의 장로들과 함께 애굽 왕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임하셨은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사흘길쯤 광야로 가도록 허락하소서 하라" 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장로들과 같이 가지도, 혹은 상황에 대해서 설명하지도 혹은 허락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아주 짧은 내용으로 명령하는 것 처럼 선포할 뿐입니다. 당연히 바로는 거기에 대하여서 콧방귀를 뀌면서 허락하지 않습니다. 

어디서부터 문제가 된 것일까요? 심각하게 상황이 틀어지기 시작합니다. 바로는 백성이 노역을 쉬려는 꾀병으로 이해하고 더 그들의 노력을 심하게 만들어버립니다. 백성이 모세의 말을 거짓말이라고 여기도록 만듭니다. 더 몸을 고되게 만들어서, 딴 생각을 못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백성의 리더들이 바로에게 찾아가 호소하지만 바로는 자신의 뜻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리더들의 분노를 모세와 아론이 뒤집어 쓰게 됩니다. 바로 앞에 장에서는 모세와 아론을 존중하고 그들의 의견을 들었지만, 그러나 일이 틀어져 자신들에게 피해가 가게 되자 리더들은 이 모든 책임이 모세와 아론에게 있다고 주장합니다. 

어디서부터 문제가 된 것일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의 잘잘못을 어찌 칼로 자르듯이 딱 말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모세는 바로에게 친절하게 설명하는 것은 속이 뒤집어지는 일이라 피했는지도 모릅니다. 그저 빨리 자신의 역할을 해치워버리고 싶어서 퉁명스럽게 이야기했는지도 모릅니다. 백성은 자신이 피해를 입게 되자 더 이상 모세와 아론을 지지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부족함을 덮어주기에는 너무나 인내가 부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세 입장에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든 과정이었지만, 여전히 모세는 실수가 있습니다. 완전한 순종이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요? 모세는 순종했지만, 그러나 당장 모세의 눈 앞에는 큰 어려움이 찾아왔습니다. 이 모든 것을 책임지시고 선하게 인도하실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밖에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그분께서 모든 일을 그분의 뜻대로 온전하게 인도하실 것입니다. 

We assume that when we obey God's command, there will be a good conclusion. but, the problem is that our obeying has a lot of errors. we can't figure out every aspect of our life and the effects of our every behavior. 

I think that Moses did his best to obey God's command. but, surprisingly, his mention of Paraho was slightly different. maybe he does not want to have a long conversation with Pharaoh. Maybe Moses's attitude was so rude in the sight of the Paraho. Anyway, Pharaoh made fun of Moses and he ordered Israel to make brick in harsh conditions.  

therefore, the leaders of Israel were angry with Moses and Aron. They don't have the patience to be with Moses to go further. I think that Moses was really embarrassed by this situation. Only God can control this messy situation. He will rearrange and will make right it with his sovereignty. 

2022년 5월 31일 화요일

말씀 묵상 어디까지 해봤니? - 출애굽기 4장 / 주저하는 모세를 계속 격려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그분이 누구이신지, 그리고 그분이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를 모두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그러나 모세는 주저합니다. 자신을 믿거나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너무나 이해가 됩니다. 그는 이미 마음이 너무나 연약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며 그를 격려하십니다. 지팡이로, 손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물이 피로 변하는 이적을 허락하십니다.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께서 "가능성"을 열어 두신다는것입니다. 백성이 어떻게 무조건 할 것이다 라고 하시지 않고, 그들의 반응에 맞춰서 행동할 수 있도록 모세에게 가능성을 열어 두십니다. 

그런데 모세는 여전히 주저합니다. 사실 정확하게 말하면 아주 완고하게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합니다. 자신은 본래 말을 잘 하지 모한다고 말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충분히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집트의 왕자로 자랐던 모세가 과연 말이 부족한 것인가? 모세가 가고 싶지 않은 마음에 끝까지 변명을 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이쯤되면 하나님께서 화를 내실만도 한데, 하나님은 끝까지 격려하십니다. 모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한계와 어려움을 계속 호소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 자체를 그리고 모세 자체를 창조하신 분이 자기 자신임을 말씀하십니다. 인간의 모든 조건과 어려움 조차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한다면, 그 모든 어려움과 조건을 뛰어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도 모세는 보낼 만한 자를 보내라고 말합니다. 그제서야 하나님께서 화를 내십니다. 그리고 다시 모세를 향해서 그의 형 아론을 붙여주시겠다고 약속하시며, 그가 어떤 일을 행할지를 정해 주십니다. 그는 모세의 입이 되어 줄 것입니다. 

모세가 장인 이드로에게, 단순히 가족들이 살아 있는지 보러 간다라고 말한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는 모세를 사랑하는 사람이고 그와 40년을 함께 한 가족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계획을 이드로에게 처음에는 상세하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모세가 이드로에게 이별을 고하고서는 여전히 주저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격려하십니다. 애굽에서 모세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다 죽었다 라고 말씀하시고, 그 이후에야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떠납니다. 모세는 계속 자신의 능력의 부족을 주장했지만, 어쩌면 그가 이집트로 가고 싶지 않았던 가장 큰 깊은 내면의 이유는 생명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인 듯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시고 가라고 명령하셨지만, 갑자기 그를 죽이려고 하십니다. 십보라는 모세의 아들을 할례를 하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놓아 주십니다. 왜 굳이 이 부분에서 할례가 등장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구약 전체에서 보여주는 것은 그 누구라도 감히 할례가 없다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이집트로 돌아가고자 했던 그 모든 과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두려움과 떨림과 주저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씨름하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이적들을 보고, 백성들이 믿고 여호와께 머리 숙여 경배합니다. 앞으로 수 많은 어려움이 여전히 앞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장면을 통해서 모세를 크게 위로하셨을 것입니다.

In this chapter, we see the hesitation of Moses. I understand that he was in the wilderness for 40 years. Surely, this harsh environment has diminished his self-confidence. God understands it and he encourages him with his word, miracles. However, Moses was reluctant to do his mission. 

I assume that he was afraid to lose his life. He fled from Egypt to save his life. So, to enter Egypt, he should endure severe danger to lose his life. But God ease his mind with his word that the people who wanted to kill him were dead.

We see the long struggle of Moses to have a conviction to return to Egypt. But, Moses saw the elders, and all of the Israelites listened to the word of God and worshiped him. Net Bible translated "they bowed down close to the ground." GT study bible emphasizes that this attitude is totally different from Egyptians including Pharaoh. Of course, there will be many hardships to complete Moses' mission. However, I am sure that at this time, Moses was comforted a lot. 

2022년 5월 25일 수요일

말씀 묵상 어디까지 해봤니? - 출애굽기 3장 / 거룩하신 여호와가 자신의 백성을 구하러 찾아오시다

 

이집트의 왕자 모세는 이제 다른 모세가 되었습니다. 그는 양 떼를 치는 사람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성경은 야속합니다. 40년의 시간이 지나고 모세가 완전히 잊혀진 사람이 된 그 시간을 언급조차 하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모세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시작합니다. 

그런데 잊혀진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타는 불로 떨기 나무 가운데 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십니다. GT 스터디 바이블은, 가죽 신발이 생명을 죽이고 만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와 맞지 않는 것이라 그렇게 하셨다고 설명합니다. 죽은 인생과 같던 모세에게 생명의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떠나계시고 무관심하신 줄 알았던 여호와께서는 백성의 모든 아픔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처음부터 가장 완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심을 선언하십니다. 가나안 땅이라는 분명한 목표를 제시하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그 계획을 위하여 모세를 보내겠다고 하십니다. 

모세는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로 가는가 반문합니다. 너무나 당연한 반응입니다. 스스로의 능력으로 백성을 구하겠다고 했던 모세는 보잘것 없는 자리에서 40년을 살았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기대와 희망은 완전히 사라졌을 것입니다. 자기는 감히 바로 앞에 설 수 없는 사람이라고 당연히 생각할 것입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약속은, 모든 것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보증은,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분이야 말로 온 우주의 창조자이시며 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존재하시는 "스스로 있는 자" 이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 이 대화가 이루어지는 이 산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것입니다. 

백성이 나오는 길은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는 결코 한번에 굴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가지 이적이 있어야만 이 위대한 일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세는 그 과정 중에서 많이 절망할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라는 약속이 더 크게 느껴집니다. 모세의 삶에 전혀 새로운 장이 이제 펼쳐지려고 합니다. 

Moses' life is totally changed. He was the prince of glorious Egypt but he was shepherding the flock in the wilderness. There is a tremendous gap of 40 years. However, it seems that the Bible doesn't care it seriously. 

God appeared in flames of fire in the middle of a bush. God said that he has seen all the affliction of his people and told his plan and vision for Israel which is his covenantal people. God will use Moses to deliver his people. However, Moses said, "Why me?" I like this translation of the Message Bible. It seems that God abandoned him even after 40 years. Now he is just an old shepherd. Why did God come to him in this timing of his weakness? 

His answer is so simple. "I'll be with you". We do not know the reason for God's works. However, we know surely he is with us to achieve his vision and plan. This is our unwavering hope in the Bible. 

2022년 3월 26일 토요일

말씀 묵상 어디까지 해봤니? - 출애굽기 2장 / 인생 최악의 상황에서 정체성을 붙들다

 

파라오가 모든 남자 아이를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성경은 이 상황 속에서 한 가정에 집중합니다. 어떻게든 아들을 살리고자 하는 부모의 처절한 노력이 등장합니다. 석 달 동안 아이를 숨겼지만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습니다. 결국 갈대 상자를 만들어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둡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 슬픈 장면입니다. 부모의 마음이 찢어지도록 아팠을 것입니다. 그들의 행동이 어떤 미래를 이 아기에게 열어갈지를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아기의 누나가 그 아기 옆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봅니다. 그런데 성경은 가족의 아픈 마음과 아기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매우 담담하게 기록하는 것 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 바로의 딸이 등장합니다. 바로의 딸은 상황을 바로 이해했습니다. 그녀는 아기를 보고 히브리 사람의 아기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아버지와 다르게 그녀는 자비가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불쌍히 여겼다"라는 단어는 구약 성경 안에서 거의 스무번 가깝게 하나님께서 주어로 사용된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바로의 딸을 통하여 이 아기에게 보여졌습니다.

지혜로운 누이가 그 때 등장합니다. 사실 굉장히 당돌한 발언입니다. 유모를 불러주겠다고 제안합니다. 이집트사람 중에 유모가 없었을까요? 당연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 유모를 제안하였고 그 제안이 받아들여집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자라서 바로의 딸의 아들이 됩니다. 그리고 그녀가 그 아들에게 "모세"라는 이름을 붙여 줍니다. 

그 모세가 장성하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모세가 의롭고 정의로운 사람이라서 동족을 위하여 행동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은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저는 항상 그런 생각이 듭니다. 도대체 모세는 장성하기까지 무엇을 했는가? 입니다. 모세는 오랫동안 왕궁에서 자랐습니다. 매우 긴 시간 동안 동족들은 이미 핍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늘 보고서도 그에게 큰 감흥을 주지 못했던 동족의 핍박이, 어느날 모세에게 큰 아픔으로 느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이야말로 자신의 형제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동족을 죽이려는 이집트 사람을 쳐서 죽입니다.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모세의 뜻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습니다. 히브리 동족들은 모세를 자신들의 재판자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세의 폭력과 살인을 모든 이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파라오에게까지 그 소식이 들어갑니다. 모세는 미디안 땅으로 도망합니다. 

이집트의 왕자에서 하루 아침에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영화에서도 보기 어려운 진정한 추락입니다. 모세의 입장에서는 큰 용기였고 정의로운 행동이었지만 그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의 삶 자체가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미디안 땅 어느 낯선 우물 옆에 앉아 있을 때에, 그곳 제사장의 딸들을 도와줍니다. 낯선 곳에서, 전혀 낯선 누군가를 도와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딸들의 이야기를 아버지가 듣습니다. 아버지는 딸들이 그렇게 귀한 은인을 버려두고 왔다고 책망합니다. 모세를 집으로 초대합니다. 

저는 21절에 "모세가 그와 동거하기를 기뻐하매"라는 말씀이 너무나 크게 보입니다. 르우엘은 모세를 인정해 준 사람입니다. 그를 칭찬해준 사람입니다. 그의 가치를 알아봐준 사람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 너무 좋았습니다. 타인의 가치를 무시하며 칭찬에 인색한 삭막한 이 시대에 적용될 수 있는 너무나 따뜻한 말씀입니다. 

모세는 르우엘의 딸과 결혼합니다. 자신의 가치를 알아봐준 사람이 장인 어른이 된 것입니다. 아들의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합니다. 모세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자신은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다는 것을 아들의 이름을 통해 나타냅니다. 

사도행전 7장 30절을 보니, 광야에서 모세는 40년이 훌쩍 지나갑니다. 성경이 시간을 기록하고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과정은 때론 너무나 야속하고 잔인하게 느껴집니다. 40년이라니... 이 시간 동안 모세를 찾던 파라오는 죽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은 끝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상달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우신 그분의 언약을 기억하십니다. 성경에서 기억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주제는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도 히브리 민족을 돌아보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모세도 버려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의 삶을 다 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그들을 기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끊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입니다. 

In Exodus 2, we see the newborn baby at risk. because the pharaoh ordered to kill every boy, one of the Hebrew families chose to hide his baby putting the papyrus basket among the reeds along the edge of the Nile. 

in god's grace, this baby was rescued by the daughter of the pharaoh, and even he adapted to her son. amazingly, when this boy was fully grown up, he realized and see Hebrews as his brothers. he had great brave and sense of justice to kill the Egyptian beating his brother. however, the Hebrew people refuse to accept Moses as their leader or helper. 

so, Moses should flee to the Midian. coincidently Moses helped some women and he found a good man to acknowledge his value. however, Moses has felt that he is a foreigner there. 

even 40 years passed. maybe Moses felt that he was abandoned by everyone and Israelites felt too. however, God saw them remembered his covenant, and started to act to save them.

2022년 3월 22일 화요일

말씀 묵상 어디까지 해봤니? - 출애굽기 1장 / 여호와의 백성이, 악한 왕 바로의 핍박을 받다


출애굽기의 시작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요약하며 시작합니다. 야곱은 자신의 가족들을 데리고 애굽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동시에 하나님이 지어주신 이름 "이스라엘"로 불립니다. 

시간이 흘러 요셉과 그 시대 사람들은 다 죽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과 그분의 능력은 멈추지 않습니다. 위대한 야곱과 요셉의 죽음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너무나 큰 일이었지만 하나님께서 해결하지 못할 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자손은 번성합니다. 매우 강하게 되고, 온 땅을 채웁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입니다. 

이집트를 다스리는 새로운 왕은 이스라엘 백성을 두려워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 땅 안에 살고 있지만 그러나 그들의 정체성은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습니다. 9절에 보니 성경은 의도적으로 바로가 "그(의) 백성에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출애굽기 전체를 흐르는 중요한 테마입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그리고 바로와 그의 백성의 대결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억압은 11절에 다시 드러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단순히 노역을 한 것이 아니라 "바로를 위하여" 성을 건축하게 됩니다. 처절한 굴욕감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세상의 악한 왕을 섬겨야 하는 비극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학대에도 불구하고,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갑니다. 감히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능력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바로는 새로운 전략을 가지고 접근합니다. 아예 이스라엘 민족의 근원을 없애 버리겠다는 전략입니다. 히브리 산파를 불러 아들이면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신과 같은 존재였던 바로의 명령을 받았지만 산파들은 그를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남자 아이들을 살립니다. 

산파는 지혜로운 대답으로 모숨을 부지하고 하나님은 오히려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산파들이 여호와를 경외하였다는 것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참되게 살아계신 능력의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만이 인간이 가져야 하는 바른 반응입니다. 

바로는 자신의 잔인함을 은밀하게 사용하려고 했지만, 이제는 노골적으로 온 나라에 드러냅니다. 22절에 보니 그는 "그의 모든 백성에게" 명령합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이 오직 하나님의 것이며 바로의 것이 아님을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악한 왕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모든 태어나는 아들을 죽이라는 끔찍한 명령을 내립니다. 여호와의 백성과 바로의 백성 사이의 갈등은 크게 고조되며 출애굽기 1장이 마무리가 됩니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이 오직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고백하며 살아가는 것이 성도입니다. 우리의 삶은 오직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나의 삶을 붙들고 계심을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 속에 동화 되어서 아무런 긴장감 없이 살아가는 것은 평화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병든 것입니다. 저와 당신은 어떤 모습으로 어떤 믿음과 그리고 어떤 긴장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In Exodus 1, we see the severe tension between the new Pharaoh and the Israelites. As God promised, the Israelites were flourished and the Egyptians were afraid for that. the Pharaoh insist that the Israelites were his people. He made the people of God build his castle and facilities. I think that this big burden gives humiliation to the people of God. 

The Pharaoh conspired that he will kill every boy to diminish the Israelites. But the Hebrew midwife was wide and disobey to him. They were afraid of the Pharaoh but Jehova. 

In Exodus 1, we see the sovereignty of God for his people. He reigns his people and leads to his purpose. Because we are the people of God, inevitably, we should have the pressure from the secular world. What pressure do we have? What faith do we have? Do we live according to God's will as his sacred people?

2022년 3월 21일 월요일

말씀 묵상 어디까지 해봤니? - 출애굽기를 시작하며 & GT 스터디 바이블 출애굽기 저자 T. D. Alexander 소개

 

신학교 졸업 여행을 성지 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이집트, 이스라엘 그리고 요르단을 방문하였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집트가 가장 좋았습니다. 끝도 없이 펼쳐진 모래 사막과, 두 눈으로 보고서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던 피라미드가 좋았습니다. 우리의 삶이 광야 그 자체이기 때문에, 모래로 가득한 그곳을 두 눈으로 직접 보니, 그 안에서 실제로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출애굽기를 좋아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구원을 받고 그분의 인도함을 받는 여정이 너무나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구원 받은 백성의 좌절과 기쁨, 배반, 절망 그리고 환호가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넘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은혜가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는 우리의 인생 그 자체입니다.

출애굽기 묵상을 시작하면서 GT 스터디 바이블을 함께 읽기 시작했습니다. 보통 어떤 책을 읽을 때에 저자에게 크게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두 가지 경우입니다. 내용이 너무 좋던가, 아니면 내용이 별로 좋지 않던가 입니다. 아쉽게도 이번에는 후자의 경우였습니다. 

제 기준에서는 너무나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그리고 굉장히 문학적으로 탁월한 구성이라고 생각했던 출애굽기 1장을 너무 평범하고 무미 건조하게 정리해 놓았습니다. 출애굽기 편의 저자가 누구인지 살펴보았습니다. T. D. Alexander라는 분이었습니다. 

일단 찾아보니 이분은 복음 연합에 속해 계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보수적인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겠습니다. 그리고 살펴보니 좋은 주석 시리즈로 평가 받고 있는 Teach the Text Commentary 에서 EXODUS의 저자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역시 좋은 주석 시리즈로 평가 받고 있는 Apollos Commentary의 Exodus 저자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 T. D. Alexander

* Exodus (Teach the Text Commentary Series)

* Exodus (Apollos Old Testament Commentary Series, Volume 2)

사람은 첫 인상이 매우 중요한 듯 합니다.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C.S.루이스나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정말 말 그대로 한줄만 읽어도 생각이 바뀌는 경험을 자주했습니다. 그 한 문장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여러번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GT 스터디 바이블의 출애굽기 편을 시작하면서 1장 전체에 대한 내용을 읽었지만 감동이 크게 없었습니다. 특별히 통찰력을 발견하지도 못했습니다. 창세기와 마태복을 통해서 크게 유익을 얻었기 때문에 출애굽기의 시작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왜 그럴까 고민을 해 보았습니다. 이미 저명한 주석 두권의 저자라는 것은 탁월한 분이 틀림없을 것인데 저의 마음이 왜 이렇게 답답한지에 대해서 많이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Chita라는 분의 아폴로 주석의 아마존 서평을 읽으면서 작은 실마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This is one of my two mistakes I have made by buying commentaries immediately after their release.

If I am going to teach a Book of the Bible in a few months, I expect to get some help in seeing certain things from a commentary whose author has spent 5, 10, 15, 20 years on it but sadly, that is not often the case with many commentaries.

I read through Alexander’s “From Paradise to the Promised Land” and I wasn’t very impressed. He handled critical issues very well but when it came to surveying the teaching of the Pentateuch, he wasn’t as helpful or as insightful as Hamilton’s Handbook to the Pentateuch. Hamilton did a superb work on the text (literary sensitive) and its theological implications (in my view his survey is better than his commentary on Genesis).

I expected Alexander's Exodus to be better and a great Biblical-Theological commentary but I was wrong. He seems more concerned about answering questions raised by critical scholars than questions raised by the text itself. He mastered a lot of material on Exodus but he strikes me as not having much mastered the text and more importantly, been mastered by the text.

He did not so much make use of the modern literary methods and thus often missed many connections between Exodus and Genesis, and the rest of the Pentateuch. For example he does not pick up on how Exodus both looks backwards and forwards in the Moses birth narrative. One of my favorite texts is Exodus 32-34 because it is foundational to both OT theology and NT theology. He says very little about its influence in both Testaments. I expected to see his biblical-theological skill at this point but I was disappointed.

I look for literary theological exegesis in a commentary, inter-textual and intra-textual sensitivity. For me literary structure is critical to understanding the theological message of a book. He analyzes a few proposed structures of Exodus but he never offers his. This makes it difficult to see how he understands Exodus was put together or how it works. His explanation sections fell flat for me: they are not biblical theologically insightful and neither are they helpful in applying the text.

But since Alexander is a world expert on the Pentateuch his commentary is academically sound and moderately and wisely conservative. Therefore, it is good for some 'dry' academic or traditional exegetical work but the preacher or the literary-theological exegete needs to look elsewhere. It cannot compete with Fretheim (Int.), Stuart (NAC), Garrett (KEC), Bruckner (UBCS) or even Brueggmann’s little commentary in the NIB.

제가 이해할 때에 이분의 서평의 핵심은, T. D. Alexander는 본문이 주는 그 핵심의 의미와 그 가치를 다루기 보다는, 비평적인 학자들이 제기하는 여러 질문들에 답을 하는데 관심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자체를 다루는데 전문가라기 보다는, 본문을 다루는 여러 학자들의 이야기들을 다루는데 전문가라고 저자를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출애굽기를 이해하는 문학적인 구조의 틀에 대해서 큰 관심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고, 저자 자신만의 구조들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문제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수 많은 강력한 메시지들을 드러내기에는 저자의 관심이 충분히 집중되지 못했기 때문에 감동이 부족한 것입니다. 공부를 많이 했고, 또 아카데믹한 영역에서는 인정 받은 분이지만, 오히려 역설적으로 말씀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은 가지지 못한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다시 한번 말씀의 묵상의 중요성을 생각해 봅니다. 글쎄요, 말씀 묵상이 무엇일까요? 이런 사람이 이런 이야기, 저런 사람이 저런 이야기를 했다는 것을 종합하는 정도가 과연 말씀 묵상일까요? 

말씀을 공부하고 묵상하고 배우고 익히고 적용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언제나처럼 그것은 "말씀 자체에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오직 성경만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우리의 온 마음을 쏟아서 "그 안으로 들어갈"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서 세상이 감히 줄 수 없는 감격과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많이 실망했습니다. 하지만, T. D. Alexander는 믿음 안에서 형제입니다. 이분의 저작에 대하여 실망한 제 마음을 너무 솔직하게 적은 것은 아닌가 마음에 죄송스러운 마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또한 배울 것이 있을 것입니다. 위의 부분들을 감안하면서 GT 스터디 바이블의 출애굽기 편과 함께, 출애굽기의 여정을 이제 시작해 봅니다.

2022년 3월 9일 수요일

삶으로 드리는 찬양 (72) - 주님의 숲

 

1. 가사 살펴보기

어느 날 문득 당신이 찾아온 푸르른 저 숲 속에
평온하게 쉴 수 있는 곳을 찾아
당신이 지나온 이 거리는 언제나 낯설게 느껴
그 어디에도 평화 없네 참 평화 없네

당신이 느꼈던 지난날에 슬픔의 기억들은
생각하고 잊어버리고 또 생각하네

그렇지만 당신의 앞에 펼쳐진 주님의 숲에
지친 당신이 찾아온다면 숲은 두팔을 벌려
그렇게도 힘들어했던 당신의 지친 어깨가
이젠 쉬도록 편히 쉬도록 여기 주님의 숲에 우


2. 곡 소개

곡은 CCM 그룹 사랑 이야기2집에 수록된 곡이다. 사랑 이야기는 김현중과 김재중 두 형제가 결성한 그룹이다. 이 곡은,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영혼의 쉴 곳을 찾아 헤매고 있는 누군가가, 주님의 숲에 들어와 드디어 진정한 쉼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아름다운 멜로디와 세련된 가사로 풀어낸 탁월한 곡이다.


3. 말씀으로 바라보기

출애굽기 20: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20:8 "Remember the Sabbath day by keeping it holy.

20:8 Remember the Sabbath day. The OT Sabbath was the seventh day of the week. Keeping that day holy meant setting it apart and making it different from other days. No one was to work. Instead, they were to use it as a time of rest from normal activity and to worship and honor God. Their focus was to be on spiritual and eternal things (vv. 9–11; cf. Ge 2:2–3; Isa 58:13–14). (1) The Israelites were expected to follow the example God himself set when he rested after six days of creation (v. 11; Ge 2:2–3). God set this day aside for our own good, to provide a day of spiritual, mental and physical refreshment. (2) The Sabbath was a sign that they belonged to God (31:13). (3) It also reminded them of their miraculous rescue from slavery in Egypt (Dt 5:15; see Mt 12:1, note). 안식일을 기억하라 : 구약의 안식일은 그 주의 일곱째 날이었습니다. 그 날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은, 그것을 구별하고 다른 날과 다르게 만드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날에는 일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대신에, 그들은 오히려 일상의 활동을 쉬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경외하는 시간으로 사용해야 했습니다. 그들의 초점은 영적이고 영원한 것들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창조하신 후에 안식하실 때 친히 보여주신 본을 따라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해 이 날을 따로 떼어서, 영적, 정신적, 육체적으로 새롭게 되는 날로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은 그들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표징이었습니다. 또한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기적적으로 구출된 것을 생각나게 하였습니다.

J. Wesley Adams and Donald C. Stamps, Fire Bible (Springfield, MO: Life Publishers International, 2011), 20:8.

이사야 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40:31 but those who hope in the LORD will renew their strength. They will soar on wings like eagles; they will run and not grow weary, they will walk and not be faint.

40:29–31 The source of strength is in the realm not of the physical but of the spiritual. The argument is exactly the same as that in ch. 30 (see note on 30:1–18). Those who rush to rely on the strength resident in creation (“youths,” v. 30) will inevitably fail, but those who “hope in” (v. 31) the Lord, the Creator, will discover reservoirs of strength and endurance of which the world knows nothing. 힘의 근원은 육체적인 영역이 아니라 영적인 영역에 있는 것입니다. 피조물 안에 있는 힘에 의지하려고 달려가는 사람은 틀림 없이 실패할 것이지만, 창조주이신 주님을 앙망하는 사람들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힘과 인내의 저수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D. A. Carson, ed., NIV Biblical Theology Study Bible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8), 1235.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11:28 "Come to me, all you who are weary and burdened, and I will give you rest.

11:28–30 Come to Me, all who are weary and heavy-laden. There is an echo of the first beatitude (5:3) in this passage. Note that this is an open invitation to all who hear—but phrased in such a way that the only ones who will respond to the invitation are those who are burdened by their own spiritual bankruptcy and the weight of trying to save themselves by keeping the law. The stubbornness of humanity’s sinful rebellion is such that without a sovereignly-bestowed spiritual awakening, all sinners refuse to acknowledge the depth of their spiritual poverty. That is why, as Jesus says in v. 27, our salvation is the sovereign work of God. But the truth of divine election in v. 27 is not incompatible with the free offer to all in vv. 28–30. 이 구절 안에는 첫 번째 팔복의 메아리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듣는 모든 사람을 위한 공개적인 초대입니다. 그러나 초대에 응답하는 유일한 사람은, 자신의 영적 파산과, 율법을 지킴으로써 자신을 구원하려는 짐에 눌린 사람들이라고 표현되었습니다. 인간의 죄악 된 반역의 완고함은 하나님의 주권적으로 부으시는 영적 각성이 없으면 모든 죄인들이 영적 빈곤의 그 깊이를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John F. MacArthur Jr., The MacArthur Study Bible: New American Standard Bible. (Nashville, TN: Thomas Nelson Publishers, 2006), 11:28–30.

히브리서 4: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4:9 There remains, then, a Sabbath-rest for the people of God; 4: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4:10 for anyone who enters God's rest also rests from his own work, just as God did from his. 4: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4:11 Let us, therefore, make every effort to enter that rest, so that no one will fall by following their example of disobedience.

4:10 rest from his own work: This may refer to the rest believers will enter in when they finish their work for God’s kingdom on this earth (see Rev. 14:13). 안식할 때가 : 이것은 아마도 신자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그들의 모든 일들을 마칠 때 들어갈 안식을 가리키는 듯 합니다.

4:11 us: Including himself as well as his readers, the author exhorts believers to be diligent, a phrase meaning “make every effort.” to enter that rest: The rest is not automatic. Determined diligence is required. The danger is that believers today, like the Israelites of the past, will not stand, but fall in disobedience.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 저자는 자신과 독자를 포함하여 신자들에게 모든 노력을 기울이다를 의미하는 부지런함을 간곡히 권면합니다. 안식은 자동적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결의에 찬 부지런함이 필요합니다. 오늘날의 신자들에게 위험이라는 것은,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했던 것처럼, 바로 서 있지 못하고 불순종에 빠지는 것입니다.

Earl D. Radmacher, Ronald Barclay Allen, and H. Wayne House, The Nelson Study Bible: New King James Version (Nashville: T. Nelson Publishers, 1997), 4:10–11.


4. 찬양에 대한 묵상

이 찬양은, 현대인들이 가장 갈망하는 휴식의 이미지인 숲이라는 주제를 찬양 가운데 풀어낸 아름다운 곡이다. 성경은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참된 쉼을 주시는 분이심을 일관되게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시고 쉬셨으며, 하나님께서 쉬신 것처럼 안식일을 기억하여서 거룩히 지키라 명하셨다.

하나님께서 쉼을 명하시고, 특별히 한 날을 구별하셨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쉼이라는 개념은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이 아니다. 인간은 단순히 육체적인 쉼을 통하여서 온전한 회복을 추구한다. 물론 육체적인 쉼은 너무 중요하지만 그것 만으로는 완전한 쉼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 그런 맥락에서 이 곡은, 가장 친숙한 거리에서도 평화를 얻지 못하는 그리고 과거의 아픈 기억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노래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자기에게 오라고 초대하신다. 오직 예수님을 믿을 때에만, 스스로의 인생을 반드시 책임져야 하는 엄청난 압박감과, 나의 영원한 운명을 확신할 수 없는 끔찍한 두려움이 사라진다. 나의 가장 괴로운 기억 조차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선으로 만들어 버리시는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쉼을 얻게 된다. 나의 죄를 인정하며,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되시며, 나의 구원자가 되심을 인정할 때에, 죽음조차 극복하는 진정한 쉼이 찾아온다.

결국, 인간의 진정한 쉼과 행복은 우리의 영혼의 회복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우리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아버지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할 때에, 우리의 삶에 진정한 쉼이 찾아온다.

안타깝게도, 이 땅 가운데에서 완전한 쉼을 누릴 수는 없다.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어려움과 괴로움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는 쉼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모든 삶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할 때에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쉼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면서, 완전한 쉼을 기대하면서, 오늘 하루를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기를 힘써야 한다.

삶으로 드리는 찬양 프로그램 전체 곡의 묵상을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06/1_3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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