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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6월 10일 화요일

삶으로 드리는 찬양 (219) - 창조의 아버지

 

1. 가사 살펴보기

창조의 아버지 그 섭리 보이사
택하신 세대 일으키어 이 땅을 고치소서
주의 크신 능력 만물이 사모하니
성령의 기름 부어 주사 이 시간 임하소서 

열방의 통치자 세상이 보리라
신실한 주의 약속으로 교회는 승리하리
우릴 돌아보사 강건케 하소서
연약함 모두 벗어지고 승리케 하옵소서

주 영광 여기 임하사 열방 향해 그 빛 비추소서
주의 얼굴 구할 때 주의 향기 머무소서 

주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주님의 뜻이 이뤄지이다
이 땅 가운데 하나님 아들 영광 보이소서

 

2. 곡 소개

곡은, Father of creation 이라는 곡을 번안한 곡이다. 그리고, 올네이션스 경배와 찬양 앨범에 수록되면서 잘 알려지게 되었다. 이 곡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인을 구원하시며, 교회를 통해서 주님의 구원과 회복을 세상 가운데 이루신다는 확고한 믿음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곡이다.

 

3. 말씀으로 바라보기

시편 33:6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33:11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에 따라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창조 속에서 하나님의 목적은 항상 이루어졌고, 창조 이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는 권세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존재와 능력을 받기 때문입니다.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977.

시편 22:27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22:28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약속하신 것처럼, 세상의 모든 민족들을 그분의 복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고난 받는 종에게 주신 승리를 통해 세상 모든 나라로 확장될 것입니다.

Joel R. Beeke, Michael P. V. Barrett, and Gerald M. Bilkes, eds., The Reformation Heritage KJV Study Bible (Grand Rapids, MI: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14), 780.

시편 67:1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67:2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이 구절은 신약에서 나타나는 세계 선교의 핵심을 미리 보여준다. 이 시편의 요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축복하셔서, 하나님의 길과 구원의 메시지가 온 세상에 알려지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Earl D. Radmacher, Ronald Barclay Allen, and H. Wayne House, The Nelson Study Bible: New King James Version (Nashville: T. Nelson Publishers, 1997), Ps 67:1–2.

마태복음 6: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에베소서 1:22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며,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습니다.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함 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교회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심으로써, 온 피조 세계를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하게 하시려는 뜻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Joel R. Beeke, Michael P. V. Barrett, and Gerald M. Bilkes, eds., The Reformation Heritage KJV Study Bible (Grand Rapids, MI: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14), 1704.

 

4. 찬양에 대한 묵상

이 찬양은,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한 찬양이다. 비록 인간은 창조주를 배신하고 떠났으며, 이 땅은 죄악으로 물들고 망가졌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통해 기꺼이 죄인들을 구원하심을 인정하면서, 그러한 소망을 가지고 주님을 높이고 있는 찬양이다.

주님께서 그리스도의 발 아래에 세상을 복종하게 하셨고,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기 때문에, 교회는 궁극적인 승리를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회복을 구약에서부터 약속하셨다. 때론 고난 속에서 절망할 수 있겠으나, 그러나 주님의 빛이 교회에 비추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주님께서 열방을 향해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고 계시기 때문에, 모든 성도들은 소망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바라기는 이 찬양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시고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거대한 계획과 그분의 탁월한 능력을 다시 한번 깊이 묵상하기 원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구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면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담대하게 동참하며 전진해 나가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기대한다.

 삶으로 드리는 찬양 전체 묵상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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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25일 일요일

삶으로 드리는 찬양 (190) - 우리는 주의 움직이는 교회

 


1. 가사 살펴보기

우리는 주의 움직이는 교회
이곳은 주님을 위한 자리
내가 기도하는 모든 땅 위에서
하나님 예배받을 그 날을 고대하네 

나의 노래로 주님의 성전을 지으리
높임을 받으소서
이스라엘의 찬송 중 거하신 주님은
거룩하십니다 

두 손 들어 주님의 보좌를 만들고
온 맘 다해 경배하리
그룹 날개 사이에 임하신 것처럼
내 위에 임하소서 

하나님 우리가 이 곳에 섰으니
이 땅을 치유하소서
하나님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주를 높이리다 

열방들아 주님을 송축할지어다
그 발 아래 입맞추라
영원한 통치자 주 예수 그리스도
그는 위대하신 왕 우리 왕 

 

2. 곡 소개

곡은, 예수전도단에서 부르기 시작한 곡으로 2020년에 앨범에 수록 되었고, 최근에 여러 팀을 통해서 불려지면서 더 은혜를 끼치고 있는 곡이다. 이 곡은, 교회의 영적인 본질과 그 역동성에 대해서 노래한다. 교회는 쉼 없이 움직이며 세상 끝까지 나아가는 것이고, 주님은 그분의 교회에 친히 임재 하시며 다스리신다는 성경적인 진리를 힘있는 멜로디에 담아낸 아름다운 곡이다.

 

3. 말씀으로 바라보기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1:8 But you will receive power when the Holy Spirit comes on you; and you will be my witnesses in Jerusalem, and in all Judea and Samaria, and to the ends of the earth.”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이라와 땅끝이라는 것을 통해서, 사도들의 사명의 범위가 전세계를 향해 지리적으로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의 증인이라는 것은, 사도들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즉 그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의 왕국과 주권에 대하여 증거하고 선포하도록 부름 받았음을 보여줍니다.

John D. Barry et al., Faithlife Study Bible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12, 2016), Ac 1:8.

시편 22:3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22:3 Yet you are enthroned as the Holy One; you are the one Israel praises.

놀라운 사실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과 관계를 맺기로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의 거룩함은 두려움보다는 찬양을, 공포보다는 신뢰를 불러일으키는 사랑스러운 거룩함입니다.

Holman Bible Publishers, CSB Disciple’s Study Bible: Notes (Nashville, TN: Holman Bible Publishers, 2017), 807.

에베소서 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13 And you also were included in Christ when you heard the message of truth, the gospel of your salvation. When you believed, you were marked in him with a seal, the promised Holy Spirit, 1:14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14 who is a deposit guaranteeing our inheritance until the redemption of those who are God’s possession—to the praise of his glory.

하나님께서 진리의 말씀으로 그리고 성령을 통해서 구원하신 이 모든 것은 단순한 사실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 모든 것을 이루신 하나님의 영광을 적극적으로 찬양하는데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신 우리의 구원의 목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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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2: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2:15 so that you may become blameless and pure, “children of God without fault in a warped and crooked generation.”[a] Then you will shine among them like stars in the sky

하나님의 자녀들은 아직 온전히 소유하지 못한 어떤 것을 향해서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흠이 없다는 것은 때문에 비난 받지 않는 것이며, 순전하다는 것은 죄가 섞이지 않은 순수한 삶을 의미합니다. 빛들로 나타내며 라는 것은 당신은 빛나야 합니다라고도 번역할 있습니다. 마치 어둠 속에서 태양과 달과 별이 빛나는 것처럼 성도는 자신의 성품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John F. MacArthur Jr., The MacArthur Study Bible: New American Standard Bible. (Nashville, TN: Thomas Nelson Publishers, 2006), Php 2:15.

고린도후서 6: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개역개정) 6:16 What agreement is there between the temple of God and idols? For we are the temple of the living God. As God has said: “I will live with them and walk among them, and I will be their God, and they will be my people.” (NIV)

고린도에는 이방인의 신전이 많았기 때문에 성도들은 바울의 의도를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특별한 건물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사람들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성도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들이 어디에 사는가가 아니라 그들 자신이 누군가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

Tyndale, Chronological Life Application Study Bible, ed. Susan Perlman, Second Edition. (Carol Stream, IL: Tyndale House Publishers, 2023), 1670.

 

4. 찬양에 대한 묵상

이 찬양은, 하나님이 임재하신, 그리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교회의 본질에 대해서 탁월하게 드러낸 찬양이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임재하신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과 그분의 은혜로 죄인을 부르시고 거듭나게 하셨고, 더 나아가 주님의 자녀들 안에 친히 거하시며 언제나 그들과 동행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두려움과 좌절도 넘어서는 영적인 위로와 권능을 언제나 공급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하신 전능자께서 기꺼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언제나 감격하며, 또한 오직 그분께 찬양을 올려드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교회는 주일에 한 곳에 모이기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전진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주님이 명하신 것처럼 땅 끝까지 전진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그분의 왕 되심을 선포하고 드러내는 사람들인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세상 가운데 빛이 되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살아가는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의 왕 되심을 인정하며 주님을 따르고 주님께 순종할 때에 참된 빛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찬양을 부를 때 마다 우리의 정체성을 새롭게 깨닫고 감격하기를 원한다. 이 힘있는 찬양 속에서 성경적인 교회됨을 새롭게 발견하고 세상을 향해 힘있게 전진해 나가기를 원한다. 비록 세상은 어둡고 슬픔이 가득하지만, 주님의 자녀 된 우리를 통하여 주님의 정의와 공의 사랑이 세상 속에 드러나고 세상을 치유하는 아름다운 역사가 풍성하게 일어나기를 바라고 기대한다.

삶으로 드리는 찬양 전체 묵상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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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12일 월요일

삶으로 드리는 찬양 (188) - 함께

 


1. 가사 살펴보기

우리는 예수님의 보배 피로써
성령 안에 하나 된 하늘의 가족
우리가 복음으로 말미암아
영원토록 하나 되었네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한
우리들은 하늘의 가족 

함께 아픔과 기쁨을
함께 복음을 위하여
함께 생명을 나누는
우리들은 하늘의 가족

 

2. 곡 소개

곡은, 한마음 찬양 워십팀의 2019년도 앨범에 수록된 곡이다. 이 곡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 된 교회의 놀라운 정체성에 대해서 고백하는 곡이다. 또한 가장 좋은 것들을 기대하고 함께 누리고 나누는 것이 바로 교회임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곡이다.

 

3. 말씀으로 바라보기

에베소서 2: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2:12 remember that at that time you were separate from Christ, excluded from citizenship in Israel and foreigners to the covenants of the promise, without hope and without God in the world.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2:13 But now in Christ Jesus you who once were far away have been brought near by the blood of Christ.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정결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이방인들을 가까이 하시며 언약 안에 포함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용서는 오직 예수님의 희생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죄에 대한 벌을 치르셨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하나님께 속한 자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Tyndale, Chronological Life Application Study Bible, ed. Susan Perlman, Second Edition. (Carol Stream, IL: Tyndale House Publishers, 2023), 1745.

에베소서 3:6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3:6 This mystery is that through the gospel the Gentiles are heirs together with Israel, members together of one body, and sharers together in the promise in Christ Jesus.

바울은 비밀의 내용을 설명합니다. 그것은 이방인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그리고 함께 동등한 상속자로서 하나님의 새로운 가족 안에서 하나로 연합되었다는 것입니다.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66.

고린도전서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개역개정) 13 For we were all baptized by[c] one Spirit so as to form one body—whether Jews or Gentiles, slave or free—and we were all given the one Spirit to drink. (NIV)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 이것은 성도가 성령에 의해서 거듭나고 그의 몸의 일부로서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 그리스도 안에서는 민족적 또는 문화적 구별이 없습니다. 종이나 자유인이나 : 그리스도 안에서는 사회적인 구별이 없습니다.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모든 백성에게 그들 안에 거하시도록 성령을 주시고, 그들의 삶이 성령의 열매로 넘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Kenneth L. Barker, ed., NIV Study Bible, Fully Revised Editi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20), 2020.

 

4. 찬양에 대한 묵상

이 찬양은, 교회의 본질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찬양이다. 교회는 단순히 인간적인 모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의 역사 가운데 하나가 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며 자격이 없는 자이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의 댓가를 치르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분의 사랑을 받는 자들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의 특징은 무엇인가?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공동체이기 때문에 아무리 세상적으로 뛰어난 사람이라도 자랑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서로의 빈부 혹은 사회적 신분의 격차가 크다 하더라도, 우리는 서로를 존중하며 아끼며 돌보는 공동체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시며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되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 조건 없이 나의 가족들을 돌보고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찬양을 부를 때 마다, 우리를 하나로 만드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다시 한번 묵상하고 마음에 새기기를 원한다. 그리고 우리를 한 몸으로 부르신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서로를 향한 사랑이 새로워지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기대한다.

삶으로 드리는 찬양 전체 묵상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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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14일 일요일

내 영혼에, 상쾌한 빛이 들어오다 - 순전한 기독교의 짧은 부분들에 대한 작은 생각들

 


저는 어렸을 때 부터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었습니다. '도대체 훌륭한 사람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물론 훌륭한 사람을 보면서 그에게 찬사를 보내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훌륭한 사람이 만들어지는 그 방법을 알 수 있다면, 저도 꼭 그렇게 되고 싶었습니다 

신학을 공부하고 철이 들면서 그리고 다양한 책을 읽으면서 깨달은 것은, 결국 훌륭함은 모방에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즉, 탁월함을 모방하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온전히 소화하는 것이, 훌륭함에 대한 첩경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팀캘러 목사님도 좋아합니다. 팀캘러 목사님은 '21세기의 C. S. 루이스'라고 불리웠습니다. 루이스를 읽고 팀캘러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제가 깜짝 놀란 것은, 그분의 설교 곳곳에 결정적인 부분에서 루이스의 논리와 그의 생각과 글들이 묻어나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팀캘러 목사님의 훌륭함은, 루이스로 부터 만들어진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책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아마도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에 대한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 저에게 왜 루이스를 좋아하느냐고 물어보신다면, '단 두문장만 읽어도 저의 영혼에 상쾌한 빛이 비추이기 때문이다'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세상에는 책이 많이 있습니다. 저 역시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아쉽게도 그 중에 대부분은 지루했습니다. 무엇인가 힘주어 이야기하는 것 같았지만, 정작 마치 미로를 헤매이는 것처럼 저를 제대로 인도해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저에게 루이스는, 아주 짧은 몇 구절만 읽어도 저의 마음을 새롭게 만드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의 책을 읽으면, 심지어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루이스는 다정한 사람입니다. 그의 글과 그의 신앙은 마치 저에게 상쾌한 가을 바람과 같아서, 저의 영혼을 전혀 다른 그 어떤 곳으로 이끌어 갑니다. 그와 함께 거닐다 보니, 하나님의 아름다우심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루이스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고전학과 영문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중세와 르네상스 문학 교수로 섬겼습니다. 그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15세 때에 무신론자가 됩니다. 그러나 신앙 서적과 친구의 영향으로 다시 서서히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31세가 되어, 지적으로 정직한 자세를 가진다면 하나님을 믿을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얻고 진정으로 회심하게 됩니다. 

순전한 기독교는, 제2차 세계대전 시절 평신도와 무신론자들을 위한 라디오 방송에서 그가 발표했던 것을 책으로 엮어낸 것입니다. 루이스 평신도로서 교파를 초월해서 기독교인들이 공통적으로 믿고 있는 것을 다루고, 그러한 믿음의 내용들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충실하게 설명하였습니다.

저는 이십대 초반에 순전한 기독교를 처음 읽었습니다. 물론 그때도 참 좋았지만 역시나 루이스의 글을 충분히 이해하기에는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루이스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내면 안에 새로운 깊이를 만들어 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담임 목사님의 안식년 동안 잠시 주일 강단을 섬기면서, 저의 부족한 부분을 절감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앞으로 저의 삶을 다져나갈 방법을 고민하던 중에, 루이스를 아주 천천히 읽기로 결심했습니다. 아쉽게도 이 시대는 속도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저는 반대로 접근하고 싶었습니다. 아주 천천히 다시 새롭게, 기독교 신앙의 탁월한 내용을 저의 영혼 안에 새겨 넣고 싶었습니다.  

순전한 기독교는 전체적으로 네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째로는 우리가 살아가는 우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옳고 그름이라는 선과 악이라는 개념을 반드시 전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그렇게 발견한 절대 선 앞에서 자신에 대해서 절망하게 될 때에야 결국 하나님을 발견하고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로는, 그렇게 하나님을 믿게 된 이들이 어떻게 신앙 생활을 하는가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삼위 일체 하나님의 개념을 바탕으로 참된 성도됨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면서, 새로운 생명을 얻은 새 사람으로 적극적으로 살아갈 것을 권면합니다. 

저의 짧은 글 쓰기로는 이 책의 깊이와 감동을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다만 가장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익숙한 것을 새롭게 보는 것이야 말로 신앙 생활의 원동력을 가져다 준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모태신앙으로 자라서 수도 없이 복음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복음은 어떤 의미에서 매우 단순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단순한 진리를 아는 것과, 이것의 깊이와 충격을 온전히 이해하고 내 삶에 근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저는 그런면에서, 루이스 그리고 순전한 기독교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루이스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사실 단순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가치를 온전히 드러내며 동시에 너무나 신선하고 감동적으로 전해주기 때문에 그가 탁월한 신앙인으로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루이스가 순전한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자연법에 대한 것은, 기독교를 이해하고 변증하는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겉으로는 절대적인 진리 혹은 법칙을 부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사람들이 행동해야 한다는 본능을 내면에 가지고 있다고 설명하고 증명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명확하게 그것을 어기고 있임을 지적하며 인류 전체를 몰아갑니다. 

물론 위의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 평범하게는 이렇게 접근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며, 죄인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정도로 논리를 풀어가도 괜찮을 것입니다. 그러나 루이스는, 인간에 대한 철저한 관찰에 기반하여 우주적인 관점으로 인간의 합리성을 존중하면서도,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중요한 이유들에 대해서 설득적으로 논증하고 있고, 바로 이런 부분이 루이스의 탁월함입니다.

최근에 순전한 기독교 천천히 읽기를 반년 만에 끝냈습니다. 다시 책을 열어보니, 책의 거의 대부분이 줄과 메모들로 가득합니다. 이 모든 것을 한편의 글로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만 제가 설교에 인용했던 몇가지 구절 정도, 그리고 저에게 영감을 주었던 몇 부분들을 인용하고 저의 짧은 생각들을 나누고 싶습니다. 

루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용서를 약속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회개할 일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 자신에게 용서가 필요하다고 생각지 않는 사람에게는 기독교가 아무 의미도 가질 수 없습니다.' 

저는 이 부분이야 말로,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잘 짚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저를 포함한 우리는, 나의 죄성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없이 살아가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주 거칠게 말하자면, 내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깨닫는 것이 바로 신앙의 성숙의 척도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가치와 소중함은, 그저 내가 처음에 기독교의 문 안에 발을 들여 놓을 때만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의 평생을 살아가면서 그것의 깊이를 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첫 순간에 회개를 하고, 그리고 평생 회개를 합니다. 우리는 회개할 수록 용서를 받고, 회개하면서 그리스도를 알아갑니다. 그래서 저는 회개와 기독교를 완전히 결합하여 성경적으로 드러내는 루이스가 참 좋았습니다. 

또 루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탄이 우리 옛 조상들의 머리속에 불어넣어 준 생각은 그들도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 마치 스스로 자신을 창조하기라도 한 양 자존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다, 하나님 밖에서 하나님과 상관 없이 스스로 행복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죄의 근본이 무엇인가를 잘 드러낸 부분입니다. 죄의 본질은 내가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내가 어떤 도덕적인 잘못을 하는 것을 넘어서서, 혹은 내가 나 중심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넘어서서, 나 자신이 '신'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목적, 방향, 내용 등을 철저하게 내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저는 성도로 또 목회자로서, 이렇게 무섭고 또 무거운 죄에 대한 개념을 항상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 

왜 이것이 그렇게 중요할까요? 왜냐하면 이러한 루이스의 죄에 대한 설명 혹은 논리는 우리의 성화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성화는 단순히 예배를 열심히 드리거나, 혹은 성경을 열심히 읽는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대적하는 맥락에서의 나는 없고 오직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그것은 나의 삶의 전 존재를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맞추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창조주이시며 왕이신 그 지위를 온전히 회복하시고, 나는 호흡 한번 조차 오직 그분께 모든 것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우리의 구원에 '나'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존재하시며, 우리는 그분의 극진한 사랑을 받은 자들로 그리고 오직 그분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생의 목적을 선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에, 저는 루이스를 좋아합니다.

루이스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적들의 점령 지역, 이것이 현재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기독교는 합법적인 왕이 이를테면 변장을 한 채 어떻게 이 지역에 상륙했는가에 관한 이야기로서, 우리 또한 이 거대한 파괴 작전에 참여할 것을 촉구합니다. 교회에 가면 동지들의 비밀 무전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적들이 우리를 교회에 못 나가게 하려고 그토록 노심초사하는 것입니다. 적은 이 일을 위해 우리의 자만과 게으름과 지적 허영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팬데믹 이후에 교회의 정체성에 대해서 많은 혼란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마치 교회가 사교 모임인 것처럼 생각하는 분들도 종종 계셨습니다. 현대화 되어 버린 교회에 출석하다 보면, 교회의 정체성이 매우 희미해 지는 듯 합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매일 교회에 나오는 목회자인데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루이스의 글을 통해서, 교회의 본질에 대한 상상력이 가득한 그리고 가슴 벅찬 묘사를 만납니다. 우리는 일종의 비밀 결사대와 같습니다. 우리는 변장한 왕을 모시고 있고 그분은 반드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우리는 비밀 무전을 통해서 우리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우리의 미래를 가늠하면서 그것을 가슴에 품고 살아갑니다. 

저는 교회에 대한 평범한 설명을 싫어합니다. 그저 무감각하게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 마음이 많이 상합니다. 그러나 루이스의 설명 속에서 새로운 기쁨을 발견합니다. 성도에게 주어진 교회 생활 이라는 것이 이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는 진실한 신앙의 동료이며 저의 친구입니다. 그를 통해 교회에 대한 참된 영적인 감각과 기쁨이 제 안에 살아나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저는 루이스를 좋아합니다.

루이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사람이 기도하고 있는 대상-그가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입니다. 또한 그가 기도하도록 밀어주고 있는 주체-원동력-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이 사람이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길 내지는 다리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한 평범한 사람이 기도하고 있는 평범한 작은 침실 안에서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삼중적인 생명 전체가 실제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지금 이 사람은 좀더 높은 종류의 생명-제 표현대로라면 조에, 또는 영적인 생명-속으로 들어 올려지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 안에 이끌려 들어가고 있는 동시에, 여전히 자기 자신으로 남아 있습니다."

저는 기도에 대한 루이스의 이 설명을 읽을 때 마다, 마음에 전율합니다. 물론 기도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 라는 아주 단순한 표현도 진리입니다. 그러나, 루이스는 다릅니다. 저는 다른 그 어떤 기도에 대한 설명보다 루이스의 설명을 제일 좋아합니다. 루이스는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기도의 목표, 기도의 원동력, 그리고 기도의 길이라고 설명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안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이보다 더 탁월하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기도는 너무나 아름다운 것입니다. 어쩌면 세상이 거들떠 보지도 않는 연약한 우리들이, 우리의 거칠고 아픈 손을 모아 주님 앞에 기도할 때에, 그것이 영적으로 얼마나 충격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고 또 얼마나 아름답게 영원에 맞닿아 있는 것인지를 그는 보여줍니다. 마치 보이지 않는 하늘을 활짝 열어 젖히고 그 비밀을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저는 루이스를 읽을 때 마다 이런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저는 루이스를 좋아합니다.

루이스는 그의 책의 마지막에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을 포기하십시오. 그러면 진정한 자아를 발견할 것입니다. 자기 새명을 버리십시오. 그러면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찾으면 결국 미움과 외로움과 절망과 분노와 파멸과 쇠퇴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찾으면 그를 만날 것이며, 그와 함께 모든 것을 얻을 것입니다."

루이스는 불신자들에게, 그리고 어쩌면 신앙의 생명력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저 신앙의 논리나 멋들어진 말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자체가 지금 그리고 궁극적으로 나아가야 하는 우리의 실재적인 운명입니다. 그래서 저는 루이스의 책을 그저 논리로 읽지 않습니다. 이 모든 내용이 저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저는 한없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루이스가 이야기한 것처럼 단 하나도 남기지 않고 저의 모든 것을 포기하기를,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찾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저의 모든 것이 되는 그 궁극적인 상태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렇게 저를 결단하게 만들고 바로 잡아 주기 때문에 저는 루이스를 참 좋아합니다. 

글을 맺어야겠습니다. 지금 저의 기분은, 마치 보석이 가득 담긴 보물 상자를 품에 안고서는, 작은 손에 그 보물 중에 몇개를 잡고서 꺼내 자랑하고 있는 어린아이 같습니다. 너무 반짝이고 행복한데, 이 보물을 다 설명할 재주가 저에게 없어서 한 없이 아쉬울 뿐입니다. 

루이스를 읽은 저의 벅찬 마음을 온전히 드러낼 수 없어서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짧은 글을 통해서 루이스를 잠시 접하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만족합니다. 

언젠가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의 이 글을 읽으신 누군가와, 선선하고 아름다운 날에 따뜻한 커피 한잔을 마시며 루이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마음이 하나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이 저의 인생에 가장 큰 기쁨일 것입니다.

2024년 6월 17일 월요일

그리스도인으로 불리다 / 사도행전 11장 19-26절 주일 설교 (설교문)

 


- 기도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아름다운 주님의 날에 주님 앞에서 예배를 드리며, 주님의 음성을 들을 있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반석이시며 산성이십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위로이시며 소망이십니다. 말씀을 통하여 주님을 만날 때에, 우리의 영혼이 뜨거워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바로 오늘의 시간이 우리의 삶에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되도록, 주님께서 친히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 한국에서의 만남 

한국에서의 여정 이번에 11년만에 한국을 방문하면서 좋은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너무 오랜만에 방문했기 때문에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중요한 미션이었습니다. 그래서 만나야 하는 분들과 미리 약속을 잡았습니다. 중에 한분이 '광주 교회' 섬기고 있는 전의진 목사님 입니다

제가 사우스웨스턴 신학교에서 공부하면서 만난 분입니다. 저와 동갑이고 믿음과 설교가 탁월한 분인데 미국에서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개척했는데 코로나가 터진 것입니다. 중간에 전화 통화를 몇번 했는데 마음이 많이 무거웠습니다. 얼마나 어려움이 있을지 충분히 예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에 들어가기 전에 연락을 드렸습니다. 목사님, 제가 광주에 한번 내려가겠습니다 이렇게 연락을 나누었습니다.


-  쉽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한국에 들어가니까 쉽지가 않았습니다. 일단 해야 일이 너무 많고 만나야 하는 분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반드시 광주를 가야 한다 라는 생각을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방문이 그분에게 의미하는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분은 정말 저의 격려가 필요한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하루를 남기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미국 들어오기 한주 금요일에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수서에서 SRT 열차를 예약을 했는데 새벽 첫차였습니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버스가 없었는데 택시를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걸어갈 생각을 하고 새벽 네시쯤 일어났습니다. 장모님 댁에서 40 정도 수서역까지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기차를 타고 2시간 정도 걸려서 드디어 광주송정역에 도착을 했습니다.

거의 6 만에 만났는데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르니다. 바로 어제 만난 친구처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물론 저는 주로 듣는 입장이었습니다. 고난 중에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선하게 인도하셨는지를 들었습니다. 사실은 당연히 제가 식사를 대접하려고 내려갔는데, 자기 나와바리에 왔으니까 자기가 대접해야 한다고 주장하셔서 혹시라도 개척교회 하시는 목사님 마음에 상처가 될까봐 그냥 감사하다고 밥을 얻어 먹었습니다. 그리고 헤어지는데 마음이 너무 뭉클했습니다. 만약에 제가 가지 않았다면 아마 평생을 후회했겠다 라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

오늘 말씀에 보니 여러 사람들의 여행의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11 19절에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11:19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마 성도님들께서는 스데반 집사님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 믿음과 성령의 충만함으로 가장 탁월한 사람 한명이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설교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진정한 구원자이시고 왕이시라고 설교했을 때에, 메시지에 분노한 유대인들이 그를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죽였습니다. 참으로 끔찍한 일이었고 교회의 아픔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죽음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스데반의 사건 이후에 교회가 핍박을 받으면서 결국 성도들이 흩어지게 것입니다.


도망자

혹시 성도님들은 도망자의 위치에 처해보신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 속에서 흩어지는 성도들의 마음을 능히 짐작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아마도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것조차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생명의 위협 속에서 흩어진 이들이 무엇을 하였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19 하반절과 20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1:19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11:20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예수를 전파하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안디옥이라는 곳은 굉장히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왜냐하면 로마 제국에서 세번째로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국제적인 무역 도시였고 정치의 중심지였고 핫플레이스였습니다. 유대인들을 포함해서 다양한 사람들이 몰리는 곳이었고 그래서 도덕적으로 방탕한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흩어진 사람들은 바로 이곳에서 예수를 전파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단순히 유대인들 이라는 하나님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는 사람에게만 전한 것이 아니라, 헬라 사람들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이방인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 그리고 주의 손이 함께 하셨다

그런데 21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1: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누가는 지금 로마의 중심 도시에서 일어난 놀라운 일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손이 함께 하셨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행을 떠날 밖에 없었던 이들의 상황을 돌이켜 보시길 바랍니다. 이들은 고향을 강제로 떠났어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생명을 염려해야 했습니다. 교회가 무너지고 성도가 흩어지고 서로의 생사도 확인할 없는 절박하고 힘든 상황 속에서 일이 제대로 풀리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러한 극심한 고난 속에서 보여주는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자신의 환경에 굴하지 않고 자신들이 마땅히 해야 혹은 옳은 자체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인종이 다르고 환경이 다른 많은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이었겠는가

그런데 초대 교회 성도들이 바로 일을 감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들 자신도 일어날 결과에 대해서 당연히 예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저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을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그들의 열심과 그들의 도전 가운데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열매를 맺게 하신 것입니다.


- 바나바를 보내다

안디옥에서 일어난 엄청난 소식이 예루살렘 교회에까지 퍼졌습니다. 사도들은 소문을 파악하기 위해서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냈습니다. 혹시 성도님들께서는 바나바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는 초대 교회에서 좋은 소문이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팔아서 넉넉히 베풀었던 사람입니다. 원래 이름은 요셉인데 그가 워낙 탁월하게 위로하고 격려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나바라는 이름을 얻은 것입니다

24절은 그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11: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그는 착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착하다 라는 말은 딱히 정의하기가 어렵지만, 분명히 있는 것은 사람이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보면 어떤 느낌이라는 것이 있는 같습니다.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고 자꾸 보고 싶은 사람이 있고, 그래서 사람을 만나면 내가 힘을 얻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나바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의 부분이 저의 마음에 깊이 닿았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말씀에서 착한 사람이라는 것과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것을 하나로 연결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성령이 충만하다 믿음이 충만하다라는 것을, 우리의 성품과 태도와 분리시켜서 자주 생각하는 같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성품이 매우 좋고 자신을 희생할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도들은 그를 파송해서 상황을 살피도록 하는 것입니다


- 바나바의 태도 : 은혜를 기뻐하다

그리고 23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1:23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안디옥에 도착하자 마자 바나바가 보인 첫번째 반응이 무엇이었는가?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말씀이 마음에 깊이 닿았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마음에 생각하는 것을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똑같은 상황을 보고서도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것입니다. 만약에 길을 걷는데 내가 지금 집을 구입하거나 렌트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길을 가면서 주변에 있는 집들만 사람의 눈에 들어올 것입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도착하자 마자 무엇을 보았는가?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나바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자신에 대해서 관심이 넘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주로 자신이 가지고 싶은 것으로 마음을 채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완전히 반대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그곳에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고 계시는가 라는 하나님 중심적인 갈망으로 가득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도착하자 마자 하나님의 역사를 보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순수한 이방인들을 그렇게 혐오했는데, 이방인들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변화된 것을 보면서 크게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바나바의 태도 2 : 겸손하게 권면하다 

그리고 그가 무엇을 이야기했는가? 모든 사람에게 말하기를,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혹시 성도님들께서는 권위적인 사람을 만나보신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권위적인 사람은 굉장히 대하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권위가 있는 사람과 권위적인 사람은 다른 것입니다. 권위적인 사람은 힘으로 누군가를 억누르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상대방 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나이나 연륜이나 학력이나 지식을 은근히 내세우면서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대하면 굉장히 불편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면에서 바나바의 모습은 정말 놀라운 것입니다. 그는 지금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로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위치와 역할이 얼마나 대단한 것입니까? 그의 신앙의 수준이나 평판이나 모든 것이, 얼마든지 그가 거들먹거리거나 혹은 교만하게 혹은 권위적으로 대할 있는 모든 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가 한가지를 지속적으로 강조했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라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안디옥 성도들을 사랑했고 그들의 상황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필요한 조언을 있었습니다. 화려한 도시의 거친 환경 속에서 그들의 믿음이 흔들리기 쉽기 때문에, 오직 주님을 소중히 여기고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라고 간곡히 간구하는 것입니다


- 바나바의 결과

그래서 결과는 무엇인가? 24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에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약에 성도님들께서 바나바의 사역을 평가하신다면 어떻게 평가하실 있을까요

저는 바나바야 말로 위대한 사역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성품이 참으로 좋은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새롭게 탄생하는 교회 가운데 엄청난 영적인 동력을 불어 넣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도착한 이후에 놀라운 일들이 벌어진 것입니다. 바나바를 통해서 무리가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사실 여기까지만 보더라도 충분히 성공한 사역이라고 부를 있는 것입니다. 


- 사울을 찾으라 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25절에 정말 뜻밖의 말씀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누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11: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미 충분히 부흥하고 있는 안디옥 교회 가운데 전혀 새로운 인물을 등장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 성도님들께서는 사울이 누구인지 기억하십니까? 사울은 스데반이 잔인하게 죽임을 당할 때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7 58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7:58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앞에 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8 1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8:1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그리고 3절에 “8: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한마디로 사울은, 초대 교회를 핍박했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7장과 8장의 말씀을 읽으면서 굉장히 소름 돋는 부분은, 그렇게 잔인하게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장면에서 그리고 교회가 핍박을 당하는 슬프고 아픈 장면에서 사람의 실명이 등장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시다

그러나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어느 그를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그가 성도들을 잡아 들이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가다가 하늘로 부터 홀연히 빛이 비추인 것입니다. 그가 땅에 엎드러져 소리를 들었습니다. 사도행전 9 4 말씀입니다. “4 ...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은 그를 향한 사랑과 책망을 담고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긍휼히 여기시며 돌이키시는 음성을 들은 이후에 사울이 완전히 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즉시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하기 시작하였어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사울이 변한 것을 놀라워하면서도 아무도 그를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제까지 교인들을 잡아 가두던 사람이 바뀌었다고 말한다면 사람들이 과연 그를 쉽게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런데 바로 그때 사울을 도와주었던 사람이 바나바입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데려다가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같이 갔습니다.그리고 바울의 회심과 그의 진심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회심한 사울에게 다시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다가 살해의 위협을 당하면서 고향인 다소로 피신할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 다시 사울을 부르다 

그리고 나서 오늘 말씀까지 대략 8 정도가 흐른 것입니다. 학자들은 동안의 사울의 행적에 대해서 여러가지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사도행전은 그것에 대해서 전혀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19 말씀에 이렇게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19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은 스데반 하면 누가 떠오르십니까? 저는 거의 자동반사적으로 사울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아마 말씀을 기록한 누가도 마찬가지이지 않았을까요? 지금 안디옥에 복음을 전하러 사람들이 거기까지 떠밀려 갔는가? 원흉은 사실상 사울이라는 것입니다. 사울 때문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고향을 등졌습니다. 사울 때문에 어떻게 보면 그들의 삶은 완전히 망가진 것입니다. 성도님들 같으면 괴로움과 아픔을 잊을 있겠습니까 

그런데 바나바는 지금 무엇을 하는가? 사울을 데려오겠다고 다소로 찾아가는 것입니다. 다소는 안디옥에서 100마일이 넘는 거리에 있습니다. 혹시 성도님께서 바나바의 입장이라면 굳이 거리를 여행하면서 사울을 찾아가시겠습니까

아니면 깊이 들어가서 사울을 자신의 사역 속에 끌어들이고 싶겠습니까? 이미 충분히 성공적이고 이미 많은 이들이 주님께로 돌아왔는데, 물론 사울이 능력이 탁월하고 주님께로 확실히 회심했다고 말하지만 과연 그를 안디옥의 새로운 공동체로 데리고 오는 것이 공동체에 정말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리고 사울의 입장에서도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사울이 바나바를 만났을 때에 그가 얼마나 깜짝 놀랐을까요? 사울은 아마도 자신의 삶에서 어두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을 것이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복음을 전하는 자로 사용하시겠다고 말씀하셨지만, 회심한 사울을 믿는 사람은 처음에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가 열심으로 사역하고 복음을 전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오히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고향으로 도망갔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8년이 지났습니다.

사울이 마음에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요? 아마도 자신의 인생이 실패했다고 느끼지는 않았을까요? 아마 자신에게는 이상 어떤 희망도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거기다가 안디옥에 같이 가야한다는 바나바의 말을 들으면서 자신 때문에 도망가야 했던 사람들이 거기 있다면 그들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 심적으로 부담은 아니었을까요?


누가가 강조하는

이러한 어려움과 갈등 속에서 26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년간 모여 있어 무리를 가르쳤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혹시 성도님들께서는 어디에 포커스를 맞추시고 싶으십니까? 언뜻 보면 우리는 무리를 가르쳤다 라는 것에 포커스를 맞추고 싶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르침이야 말로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런데 흥미로운 것은, 무리를 가르쳤는데 중요한 안디옥 교회에서 가르친 내용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가르침의 내용은 분명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5 42절은 이렇게 말씀하시지 “5:42 ...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는 여러 곳에서 사도행전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쳤다는 것을 확실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미루어 짐작할 있는 것은, 분명히 안디옥 교회에서의 가르침이라는 것도 예수님의 말씀과 그분이 하신 일에 대하여 가르친 것입니다.

그런데 안디옥에서는 뭔가 다른 맥락으로 일이 흘러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오늘 말씀의 흐름을 한번 기억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누가는 안디옥 교회가 세워진 과정 자체에 굉장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여행과 사람들의 움직임과 사람들의 선택을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바나바 그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과연 그가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어떤 일을 했는가? 심지어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다소까지 가서 누구를 데려왔는가? 그리고 결국에는 사람이 어떻게 마음이 합쳐져서 사역했는지를 의도적으로 더욱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 안디옥 교회의 분위기 

그런 면에서 한번 상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안디옥 교회의 분위기가 어떠했을까요? 정확하게 말하면 함께 한몸처럼 사역하는 바나바와 사울을 보면서 사람들은 어떤 것을 그들의 영혼 속에 경험했을까요? 아마도 그들은 바나바를 통해서 어떤 따스함을 지속적으로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는 권위적인 사람이 아니라 섬김의 사람이었고 마음이 진실하고 선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사울은 어떠한가? 사실상 안디옥 교회 성도들 앞에 사울이라는 사람이 있다는 자체가 마치 소설과 같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울은 어떤 의미에서 원수 중에 원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원수가 자신들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있다는 것은, 기적이라는 말로도 표현할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바나바가 그런 사울을 데리고 왔다는 또한 기적입니다. 만약에 바나바가 사울을 돌보지 않았다면, 교회의 가장 핍박자요 죄인이었던 그에게 친절과 은혜를 베풀지 않았다면 과연 사울이 자리에 있을 수나 있었겠습니까?

사람들은 바나바와 사울을 만나고 교제하면서 하나님의 복음의 무엇인가에 대해서 깊이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설명하는 복음을 들으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받을 자격 없는 자에게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도대체 어디까지 뻗어나갈 있는가를 실제로 눈으로 보고 경험하면서 깊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안디옥까지 보내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게 하신 목적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 속에서 안디옥 교회를 생각할 때에, 사람들이 단순히 가르침만 받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 이들은 바나바와 사울이라는 어떤 창을 통해서 복음을 배운다는 것입니다. 바나바와 사울이라는 사람의 인격과 삶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바나바와 사울이라는 사람 자체가 바로 복음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정말 흥미로운 것은, 바로 여기 안디옥의 믿음의 성도들이 그리스도인 이라고 처음으로 불림을 받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입니까?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무리이다 라는 이야기를 교회 밖에서 부터 듣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사도행전을 읽을 마다 부분이 제일 감동적입니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도대체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림을 받았을까 그것이 마음에 있던 가장 중요한 질문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오늘 설교가 중요한 질문을 향한 답변이며, 바로 내용을 성도님들과 함께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 북클럽의 시작

작년 정도에 갑자기 마음에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교회 안에서만 양육 프로그램을 하지 말고, 혹시 교회 밖에서도 북클럽을 한번 해보면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와 지역 커뮤니티를 연결할 어떤 연결고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성도가 그렇게 많다고 하는데, 신앙이 없거나 혹은 교회를 떠나버린 누군가를 만날 있는 그런 기회가 있다면 정말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연말에 교회가 얼마나 많이 바쁩니까? 저에게 맡겨진 감당하는 것도 벅차던 시기입니다. 그런데도 마음 한켠에는 뭔가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자꾸 커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담임 목사님께 상의를 드렸습니다. 함께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우연히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목사님, 제가 때에는 선교적인 측면에서도 이런 모임이 필요해 보입니다, 제가 목사라는 것을 밝히지만 부담 없는 일반 소설로 모임을 이끌면서 일반적인 북클럽 형태로 교회 밖에 사람들을 만날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담임 목사님께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고민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이런 부분에 공감하시고 한번 해보라고 격려해주셨습니다. 그때 부터 저의 다른 사역이 시작된 것입니다.

어떤 책으로 하면 좋을까 굉장히 고심을 했는데, 기독교적인 색체를 가지고 있지만 일반 소설인 불편한 편의점으로 책을 잡았습니다. 사람들을 모아야 하기 때문에 제가 직접 광고도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이 있도록 리브인 시카고 사이트에 올렸습니다. 그리고 광고지를 출력해서 H마트에도 직접 가져다가 붙였습니다. 그리고 저와 같이 양육 프로그램을 성도님들에게, 혹시 이런 필요가 있는 분이 있다면 연결해 달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열심히 준비를 하면서도 기도를 하면서도 마음 안에 여전히 의심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과연 이것이 어떻게 것인가? 과연 목사가 하는 일반 북클럽에 교회 밖의 사람이 것인가그런데 정말 기적적으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님의 소개를 받고, 그리고 광고를 보고 모임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올해 1 중순에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분으로 시작했는데 그중에 한분만 제가 아는 분이고 세분은 저도 완전 처음 만나는 분들이었습니다.  모임은 일반 북클럽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신앙적인 배경 같은 것은 물어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중에야 어떤 분들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한분은 기초적인 신앙은 있지만 교회에 안나가는 분, 두분은 그래도 기독교 신앙이 어느 정도 있는 분, 한분은 카톨릭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아주 가끔씩 성당을 나가시는 분이셨습니다. 


- 북클럽의 추억

모임을 시작하려고 파네라에 앉아서 기다리는데, 얼마나 마음이 두근거렸는지 모릅니다. 과연 모임이 도대체 어떻게 진행이 것인가? 같이 하겠다고 오시는 분들은 도대체 어떤 분들일까? 목사라는 밝히고 모이는데 혹시 모임이 잘못되는 것은 아닐까? 온갖 생각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처음에 한분이 카페에 들어오실 때에, 그분이 주저하던 모습이 생각이 납니다. 사실 그분은 자신은 이런 모임 안할꺼라고 이야기 하러 오신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얼굴이나 한번 보고 말해야겠다 라는 심정으로 오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한분이 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눈빛이 범상치가 않았습니다. 목사에 대한 불신 때문에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오신 것입니다. 처음에 그분의 눈빛을 보는데 저도 마음이 얼어붙는 같았습니다. 그저 마음으로 속으로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선하게 인도해주시기만 바라면서, 가급적 밝게 활짝 웃으면서 그들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첫날부터 하나님께서 정말 놀랍게 인도하셨습니다. 북클럽 샘플을 진행하기 위해서 제가 준비해간 자료를 너무나 마음에 들어하셨습니다.

사실 자료를 준비하기 위해서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일반 심리학 책에서 준비해간 짧은 아티클이 그날 히트를 쳤습니다. 함께 대화를 나누는데 서로 마음이 통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처음에 시간을 예상하고 갔는데 모임을 거의 두시간을 함께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가장 기뻤던 것은, 처음에 목사를 향한 의심으로 가득했던 그분의 눈이 모임을 마칠 때에는 너무나 따뜻한 눈빛으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모임을 여덟번 정도 모이면서 한국 가기 전에 한권을 끝냈습니다. 모임을 마치고 소감문을 적어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처음에 의심의 눈으로 참여하셨던 그분께서 이렇게 소감문을 적어주셨습니다 “목사님만이 가지고 계신 남의 말을 경청해주시고 호응하시는 추임새는 정말 따뜻했습니다. 움추려든 마음에 힘이 실리고 저도 배울점이 많아 너무 좋았어요” 라고 적어주셨습니다.

글을 읽는데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그저 하나님이 주신 마음에 따라서 모임을 시작했을 뿐인데, 역시 마치 천국을 경험하는 같은 아름다운 시간들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음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회에서 상처 받아서 교회를 나가지 않는 그분이 적어도 목사에 대한 좋은 마음을 가질 있게 되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저에게는 감사와 기쁨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인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안디옥 교인들이 스스로를 지칭하는 이름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오히려 도시 사람들이 성도들을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랬을까? 그것은 그들에게 어떤 특별한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안디옥 사람들은 복음의 선명한 메시지를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세상의 창조주이신데, 하나님을 대적하고 배신한 죄인들을 위하여 기꺼이 땅에 오셨다는 복음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분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지만, 오직 그분 자신의 은혜와 사랑으로 인하여서 죄인을 대신하여서 잔인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그분은 놀랍게도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그분을 믿고 따르는 자들을 영원히 사랑하시고 다스리시고 보호하시며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복음의 복된 소식은 단순히 논리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가장 착하고 겸손한 사람으로 격려의 사람으로, 그리고 사울을 안디옥 교회에 데리고 와서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실제로 보여주는 사람으로서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사울은 그리스도를 핍박했던 흉악한 죄인이었는데, 자신의 핍박으로 흩어진 사람들로 인해 세워진 바로 교회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사람들은 거기에 있는 사울이라는 존재가 지금 그가 이야기하고 있는 복음 자체라는 것을 몸으로 전율 가운데 매일 바라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렇게 그리스도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들을 이끌고 은혜가 그들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때에, 안디옥의 시민들은 그들을 기꺼이 그리스도인이다 라고 부르게 것입니다. 


- 작은 그리스도 

작년 말에 개인적으로 하나 결심한 것이 있었습니다. C.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를 읽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읽은 책이지만 아주 천천히 읽기로 결심했습니다. 거기에서 정말 감동 깊게 읽은 부분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교회는 오직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이끌어 작은 그리스도로 만들기 위해 존재합니다. 일을 하지 않는다면 교회 건물도, 성직자도, 선교도, 설교도, 심지어 성경 자체도 시간 낭비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목적은 하나뿐입니다. 우주 역시 다른 목적을 위해 창조되었을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라고 루이스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저의 설교를 준비하면서 생각을 했습니다. 과연 나의 설교는 사람들을 작은 그리스도로 만드는 설교인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자신을 돌아보면서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과연 작은 그리스도로 자라가고 있는 사람인가? 그리고 시간에 성도님들께 이렇게 여쭙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께서는 과연 한번의 예배를 통해서, 그리고 삶의 과정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있는가? 바로 그것을 여쭤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인인 것을 알리라

요한복음 13 34절과 35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4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제자인 알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있을 때에, 다시 말해서 단순히 주님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있을 때가 아니라 주님의 베풀어주신 은혜가 우리의 가운데 살아 있을 때에, 세상 사람들은 기꺼이 우리를 크리스천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2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은혜를 경험한 바울 사도는 우리는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아마도 자기 자신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나타나신다는 것을 기독교 역사상 가장 절실하게 느끼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확실하게 있는 것은, 우리가 어떤 향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명예가 바닥에 떨어진 시대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존귀함이 짓밟히고 있는 시대 속에서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여기에 있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존재를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여기에 이렇게 있는 자체가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사랑과 주권으로 우리를 영적으로 살리시고 인도하심으로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대는 은혜를 잃어버린 시대입니다.  세상은 당한 것을 갚고야 마는 세상이고, 끝까지 찾아가 잔인하게 복수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기를 원합니다.  험악하고 타락한 세상 속에서 작은 그리스도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에, 특히 교회 밖에서, 나의 직장에서, 나의 비지니스에서, 나의 인간 관계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를 나의 삶으로 증명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은 마지막 때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지만 기꺼이 누군가가 우리를 보았을 때에, 사람은 정말 예수에게 속한 사람이구나 라는 가장 값진 명예로 살아가시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 기도 

시간에 말씀을 가지고 같이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기도하실 때에는, 아버지 하나님 저의 삶에 일어나는 많은 고난의 의미를 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인도하심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바라보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지혜롭게 걸어갈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둘째로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 하나님 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친절하고 따뜻하고 은혜가 넘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사람으로써 오직 주님의 아름다움을 세상 속에 드러내는 복된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하여주시옵소서, 이렇게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문전체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11/blog-post_4.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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