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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3월 17일 화요일

CGN 하루 20분 공동체성경읽기 장별 요약 - (구07)사사기

* 사사기의 배경과 사사의 역할

1) 시대적 배경: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부터 왕정이 시작되기 전까지, 사사들에 의해 다스려지던 시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2) 사사의 사명: 과거 모세가 이집트의 압제에서 백성을 구원했듯이, 사사들 또한 주변 민족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인도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 고통과 구원이 반복되는 이유

1) 하나님을 저버림: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도 고통을 당하게 된 근본 원인은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2) 풍요에 매몰됨: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 주변 민족들의 눈에 보이는 우상과 풍요로움에 마음을 빼앗겼으며, 가나안 문화와 우상 숭배에 동화되었습니다.

3) 반복되는 패턴: 하나님을 잊고 범죄함 → 주변 민족의 압제와 고통 → 하나님께 부르짖음 → 사사를 통한 구원이라는 악순환이 약 350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 사사기를 읽는 올바른 관점

1) 영웅 서사가 아님: 사사들은 대단한 영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사용하신 '도구'에 불과합니다.

2) 불완전한 지도자들: 사사 중에는 '이런 사람도 지도자가 될 수 있나' 싶을 정도의 의문이 드는 불완전한 인물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 특정 사사의 성공 비결을 찾기보다, 신실하지 못한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불완전한 사람을 써서라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에 집중해야 합니다. 궁극적인 구원자는 사사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 3월 18일

* 사사기 1장: 멈춰버린 정복과 위태로운 동거

1) 불완전한 순종: 여호수아 사후 각 지파가 정복 전쟁을 이어가지만, 가나안 주민을 완전히 쫓아내지 못한 채 정복이 멈추게 됩니다.

2) 실리와의 타협: 이스라엘은 영적 승리보다 경제적 실리를 위해 이방 민족과 공존을 선택하며 타락의 단초를 제공합니다.

* 사사기 2장: 단절된 신앙 전수와 심판의 서막

1) 다른 세대의 등장: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다른 세대’가 일어나면서 영적 암흑기가 시작됩니다.

2) 죄의 악순환: 범죄와 징계, 부르짖음과 구원이 반복되는 사사기 특유의 영적 패턴이 정립됩니다.

* 사사기 3장: 남겨진 가시와 구원의 도구들

1) 훈련을 위한 시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연단하고 전쟁을 가르치기 위해 이방 민족들을 남겨진 가시로 사용하십니다.

2) 다양한 도구의 활용: 온니엘, 에훗, 삼갈 등 약점 있는 인간들을 성령의 도구로 부르셔서 하나님의 신실한 구원을 이루십니다.


* 3월 19일 

* 사사기 4장: 드보라, 바락, 야엘

1) 배경: 이스라엘이 다시 죄를 범하여 가나안 왕 야빈과 시스라에게 20년 동안 압제를 받습니다.

2) 하나님의 부르심: 여선지자 드보라가 바락을 불러 다볼 산에서 싸우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합니다. 바락은 드보라의 동행을 요청하고, 드보라는 승리의 영광이 여인에게 돌아갈 것을 예언합니다.

3) 하나님의 승리: 하나님께서 시스라의 군대를 혼란케 하시고, 도망친 시스라는 야엘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4) 의미: 하나님이 전쟁의 주체이시며, 예상치 못한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 사사기 5장: 드보라의 노래

1) 하나님의 임재와 구원: 하나님께서 직접 전쟁에 개입하신 구원의 역사를 찬양합니다.

2) 지파들의 반응: 헌신한 지파(스불론, 납달리)와 방관한 지파(르우벤, 단, 아셀)를 대조합니다.

3) 야엘의 축복과 결론: 야엘의 용기를 칭송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의 회복을 선포합니다. 이후 40년 평안을 누립니다.

4) 의미: 하나님의 일에는 헌신이 요구되며, 공동체의 책임이 강조됩니다.

* 사사기 6장: 기드온의 부르심

1) 압제의 현실: 이스라엘이 미디안에게 7년 동안 고통받으며, 동굴에 숨어 사는 비참한 상태에 놓입니다.

2) 기드온의 소명: 하나님께서 두려움 속에 있는 기드온을 '큰 용사'로 부르시며 사명을 주십니다.

3) 순종과 변화 (여룹바알): 기드온은 바알 제단을 헐고 여호와의 제단을 세우며, ‘여룹바알’이라 불립니다.

4) 확신을 구하는 과정: 양털 시험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재확인하며 점진적으로 믿음이 자라갑니다.

5) 의미: 하나님은 연약한 사람을 부르시고, 과정 속에서 믿음을 세워 가십니다.


* 3월 20일 

* 사사기 7장: 하나님의 방식으로 이루어진 승리

1) 전쟁의 주체: 기드온이 아닌 하나님께서 이루신 전쟁이며, 구원의 주체는 언제나 하나님이십니다.

2) 인간의 자랑을 막으심: 하나님은 수만 명의 군사 중 오직 300명만 남기셔서, 이스라엘이 자신의 힘을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3) 상식을 뛰어넘는 승리의 방식: 항아리를 깨고 외치는 방식으로 전쟁이 이루어졌고, 미디안 군대는 스스로 혼란에 빠져 패배하게 됩니다.

* 사사기 8장: 지도자의 한계와 타락의 시작

1) 지도자의 위치: 사사는 하나님의 도구일 뿐이며, 존중받아야 하지만 결코 절대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2) 이스라엘의 잘못된 반응: 백성들은 기드온을 처음에는 무시하다가, 승리 후에는 왕으로 추대하려 하며 하나님 대신 인간을 의지하려는 모습을 보입니다.

3) 바른 고백: 기드온은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실 것'이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합니다.

4) 타락의 씨앗: 그러나 기드온이 만든 에봇이 결국 우상이 되어, 그의 집안과 이스라엘 전체에 타락의 시작이 됩니다.


* 3월 21일 

* 사사기 9장: 인위적인 권력의 비극

1) 변질된 지도자상: 기드온은 구원의 도구였으나, 점차 왕과 같은 모습을 보이며 아들 70명을 두는 등 사사의 자리가 군림의 모습으로 흐려지기 시작했습니다.

2) 권력욕과 혈투: 아비멜렉은 하나님의 부르심 없이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하여, 세겜 사람들과 불량배들을 동원해 형제 70명을 한 바위 위에서 죽이는 죄를 범했습니다.

3) 심판과 몰락: 하나님 없이 세운 권력은 결국 분열로 이어졌고, 아비멜렉은 세겜 사람들에게 버림받아 한 여인의 맷돌에 맞아 죽으며 집안이 몰락합니다.

* 사사기 10장: 반복되는 배역과 하나님의 탄식

1) 소사사들의 통치: 아비멜렉 이후, 돌라와 야일 같은 기록이 짧은 사사들이 등장해 이스라엘에 잠시 안정을 가져옵니다.

2) 뿌리 깊은 우상숭배: 그러나 백성들은 다시 악을 행하며, 여러 나라의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버립니다.

3) 하나님의 경고: 하나님은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으라”고 하시며 그들의 거짓 회개를 드러내십니다.

4) 회개와 긍휼: 그들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자, 하나님은 그들의 고통을 보시고 긍휼히 여기시며 구원을 준비하십니다.


* 3월 22일 

* 사사기 11장: 버림받은 자를 통한 구원

1) 소외된 자 입다: 창녀의 아들로 쫓겨났던 입다가 이스라엘의 위기 앞에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 사사로 부름받습니다.

2) 하나님 중심의 역사관: 입다는 암몬과의 전쟁을 하나님께 맞서는 일로 규정하며, 여호와를 인류 역사의 참된 재판관으로 고백합니다.

3) 승리와 비극: 큰 승리를 거두지만, 입다의 성급한 서원으로 인해 자신의 무남독녀 딸을 잃는 인간적인 비극을 맞이합니다.

* 사사기 12장: 인간 통치의 한계와 내전

1) 동족 간의 분열: 승리 후 에브라임 지파와 내전이 벌어집니다. 이는 인간 지도자의 한계와 통치 과정에서 나타나는 부작용을 보여줍니다.

2) 갈등의 공동체: 온전하지 못한 인간의 통치가 공동체 내에서 어떻게 갈등과 내분으로 이어지는지 시사합니다.

* 사사기 13장: 나실인 삼손과 새로운 소망

1) 거룩한 구별: 블레셋의 압제 속에 하나님은 마노아의 가정에 태에서부터 구별된 '나실인' 삼손을 약속하십니다.

2) 하나님의 구원 시작: '하나님께 전적으로 드려진 지도자는 어떠할까?'라는 기대를 품게 하며, 여호와의 영이 삼손을 움직여 새로운 구원을 준비하십니다.


* 3월 23일 

* 사사기 14장: 개인적 욕망과 수수께끼

1) 사사로운 욕망에 가려진 사명: 삼손은 나실인으로서의 능력을 공동체가 아닌 자신의 힘자랑과 영달을 위해 사용하는 무지함을 보입니다.

2) 금기를 깨뜨린 나실인: 딤나의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려 하며, 사자를 죽이고 그 시체에서 꿀을 먹는 등 나실인의 거룩한 규례를 어기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 15장: 나귀 턱뼈와 엔학고레

1) 개인적 복수와 인간적 혈기: 블레셋 사람들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심으로 여우 300마리를 이용해 밭을 태우고, 나귀 턱뼈로 1,000명을 죽이는 괴력을 발휘합니다.

2)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삼손이 목이 말라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자, 하나님께서 샘을 터뜨려 주시는 '엔학고레'의 은혜를 경험하며 소생하게 됩니다.

* 16장: 들릴라의 유혹과 최후

1) 유혹 앞에 무너진 영적 권위: 들릴라의 유혹에 빠져 힘의 근원인 머리카락이 잘리고, 눈이 뽑힌 채 맷돌을 돌리는 비참한 처지로 전락합니다.

2) 실패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주권: 삼손의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통해 블레셋을 심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완벽히 이루어집니다.

3) 죽음으로 이룬 마지막 사명: 최후에 삼손은 살았을 때보다 죽을 때 더 많은 블레셋 사람을 죽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룹니다.

* 17장: 미가의 집과 종교적 타락

1) 하나님을 이용하는 신앙: 삼손처럼 하나님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려는 또 다른 인물인 '미가'가 등장합니다.

2) 사사로운 우상 숭배의 시작: 미가는 어머니의 은을 훔쳤다가 돌려준 후, 그 은으로 신상을 만들고 레위인을 개인 제사장으로 삼는 망령된 행동을 합니다.

3) 영적 무질서의 극치: 이는 당시 이스라엘에 왕이 없어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던" 영적 혼란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 3월 24일 

사사기 17장부터 마지막까지의 기록이 시간 순서상의 마지막이라기보다, '사사 시대가 얼마나 타락했는가'를 보여주는 단면입니다.

* 사사기 18장: 단 지파의 타락과 우상숭배

1) 배경: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떠나 제멋대로 행동하던 시대였습니다.

2) 단 지파의 행보: 거주할 땅을 찾던 단 지파는 미가의 집에 있던 레위인 제사장을 자신들의 지파 제사장으로 데려갑니다. 

3) 영향: 개인의 욕심에서 시작된 우상숭배가 단 지파 전체로 확산되었습니다. 레위인은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보다 사람들의 욕망을 따르는 '종교 기술자'로 전락했습니다. 

* 사사기 19장: 레위인의 타락과 끔찍한 범죄

1) 레위인의 타락: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아야 할 레위인이 남들처럼 첩을 두는 등 세속적인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2) 비극적인 사건: 베냐민 지파의 기브아에 머물던 레위인의 첩이 마을 불량배들에게 집단 폭행과 끔찍한 일을 당해 비참하게 희생됩니다.

3) 사회의 붕괴: 가장 약자인 여성이 희생당하는 이 사건은 당시 이스라엘 공동체가 얼마나 하나님을 떠나 타락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4) 결말: 무책임한 남편이었던 레위인은 죽은 첩의 시신을 12토막 내어 각 지파에 보냈고, 이는 온 이스라엘을 충격에 빠뜨립니다. 


* 3월 25일 

* 사사기 20장: 이스라엘 내전과 베냐민 지파의 몰락

1) 사건의 발단: 레위인의 첩이 베냐민 지파의 기부아 사람들에게 악한 일을 당하고 죽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2) 공동체의 분노와 갈등: 분노한 이스라엘 연합군은 범죄자들을 요구하지만, 베냐민 지파는 오히려 범죄자들을 감싸며 나머지 지파들을 적으로 돌려 내전이 발생하게 됩니다 .

3) 내전의 경과: 초기에는 베냐민 지파가 우세하여 이스라엘 연합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4) 하지만 결국 11개 지파 연합군이 승리하게 되고, 분노에 찬 그들은 베냐민 땅의 모든 성읍을 불사르고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여 지파의 씨를 말리려 했습니다.

* 사사기 21장: 베냐민 지파의 보존과 비정상적인 방법들

1) 지파 보존의 필요성: 베냐민 지파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12지파 공동체)이 무너지는 것이자 이스라엘 전체의 실패를 의미했기에, 백성들은 뒤늦게 그들의 명맥을 유지시키기로 결정합니다.

2) 엽기적이고 비정상적인 해결책: 베냐민 지파에게 아내를 만들어주기 위해 공동체는 지극히 비정상적인 방법을 동원합니다.

3)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던 야베스 길르앗 주민들을 몰살하고 처녀 400명만을 남겨 베냐민 남자들과 결혼시킵니다.

4) 여전히 숫자가 부족하자, 실로의 명절 축제에서 춤추는 처녀들을 납치하여 부인으로 삼으라고 방조합니다.

5) 사사기 결론: 이런 끔찍한 방법으로 지파가 존속되는 모습은 당시 이스라엘이 얼마나 어두웠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는 '사람이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기 때문'이라는 사사기의 마지막 구절로 요약됩니다.

* 사사기의 교훈 

1) 우상 숭배의 본질: 당시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듯 보였으나, 실제로는 자기 욕망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습니다.

2) 공동체의 붕괴: 영적 권위가 사라진 공동체는 몰락하며, 하나님 없이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삶은 결국 서로를 이용하고 미워하는 비참한 결과를 된다고 경고하십니다.

* CGN 하루 20분 공동체성경읽기 장별 요약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6/01/cgn-20.html

2021년 12월 3일 금요일

존 파이퍼의 설교 클릭닉_7강 기적을 행하기(Acting the Miracle) / 사사기 16장 15-31절 설교

 


* 이전 글 
- 존 파이퍼의 설교 클리닉_ 6강 설교는 예배다
(Lecture 6: Preaching Is Worship) / 사사기 9장 1-6절 설교

https://jungjinbu.blogspot.com/2021/11/6-lecture-6-preaching-is-worship-9-1-6.html

파이퍼 목사님의 설교 수업은, 내용이 유기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단순히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라는 강의가 아니라, 설교에 대한 정의에서부터 시작하여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방식과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아주 탄탄한 유기적인 논리 가운데 강의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의 내용을 바탕으로 시작합니다. 설교가 예배라면, 다시 말해서 그것이 영적인 것을 보고, 맛보고, 표현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성령님께서 일하시고 만들어가시는 것이라면,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이루어야 하는가라고 질문합니다.

이러한 질문은, 설교자의 본질의 한계로 인해서 등장할 수 밖에 없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의 본질이 초월적인 사람들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인데 어떻게 우리가 설교라는 기적을 행할 수 있는가를 질문합니다.

파이퍼 목사님은 첫째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가 크리스천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답 안에 속해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인용합니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20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and I no longer live, but Christ lives in me. The life I live in the body, I live by faith in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파이퍼 목사님은, 크리스천의 삶이라는 것은 내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께서 사셔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살아가는 것과, 나의 믿음을 연결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말씀 가운데 그리스도를 신뢰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신앙으로 살아가는 나의 삶 가운데 나타나시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을 우리의 설교 가운데 가지고 들어와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의지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하시기 때문에, 설교라는 기적을 행할 수 있다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우리가 설교라는 기적을 어떻게 행하는가에 대한 두번째 답으로 고린도전서 15장 10절을 제시합니다. 

고린도전서 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15:10 But by the grace of God I am what I am, and his grace to me was not without effect. No, I worked harder than all of them--yet not I, but the grace of God that was with me.

파이퍼 목사님은 이 말씀에서, "내가 누구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지만 그것은 내가 아니었고,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였다" 라는 것이 바로 설교에 적용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설교자는 내가 하기는 했지만 이 설교는 내가 한 것이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이것을 어떻게 행해야 할까요? 여기에서 파이퍼 목사님은 자신이 사용하는 설교 전의 일종의 과정을 상세하게 알려줍니다. 먼저 본인의 교회에서 설교 전 기도 시간에 가장 많이 인용되었던 베드로전서 4장 11절을 인용합니다. 

베드로전서 4: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4:11 If anyone speaks, he should do it as one speaking the very words of God. If anyone serves, he should do it with the strength God provides, so that in all things God may be praised through Jesus Christ. To him be the glory and the power for ever and ever. Amen.

여기에서 "말하려면"이라는 것을, 파이퍼 목사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설교에 적용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설교는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원리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설교에 실행할 수 있는가? 여기에 대해서 파이퍼 목사님은 이미 자신이 다른 곳에서 소개했던 APTAT를 설명합니다. 파이퍼는 이 전략에 대해서 소개할 때에, 사람들이 자신에게 궁금해했던,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께서 파이퍼 목사를 통해서 설교하셨는가에 대한 가장 소중하고 값진 방법이라고 소개합니다. 

먼저 APTAT는 설교 바로 전에 일분 전에 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물론 설교 몇시간 전에 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이것은 설교 직전에 행하는 파이퍼 목사님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중요한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1. Admit (인정하라) : 하나님 앞에 인정해야 합니다. 인정의 내용은 이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나는 숨을 쉬거나, 사람들을 먹이거나, 느끼거나, 청중을 구원하거나 그들을 성화시키거나,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거나, 병든자를 치료하거나, 탕자를 돌아오게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제가 마음에 원하는 그 어떤 영적인 가치를 가진 것도, 저의 힘으로는 행할 수가 없습니다. 

파이퍼 목사님은 이렇게 인정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요한복음 15장 5절 말씀을 인용합니다. 

요한복음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15:5 "I am the vine; you are the branches. If a man remains in me and I in him, he will bear much fruit; apart from me you can do nothing.

다시 말해서 설교자는, 주님이 없이는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라고 강조합니다. 

2. Pray (기도하라) :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가? 이렇게 기도하라고 알려줍니다. 

하나님, 당신이 지금 저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주님이 저를 채워주심으로 담대함과, 겸손함과, 청중에 대한 사랑과, 자의식으로 부터 자유를 주시고, 모든 교만을 물리쳐주시고, 사람들을 회심시킬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치유의 능력과 화해시키는 능력을 주시기를 원합니다.

특별히 이 부분에서는, 지금 청중의 구체적인 상황을 놓고, 그리고 설교자 개인의 상황에서 설교에 집중하기 어려운 것들을 놓고, 이 문제들을 뛰어넘어서 하나님께서 설교 가운데 능력 주시기를 기도하라고 조언합니다.

3. Trust (신뢰하라) : 파이퍼 목사님은 이 부분이 굉장히 결정적이라고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파이퍼 목사님이 여기서 말하는 신뢰라는 것은,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희미한 혹은 애매한 신뢰가 아니라, 하나님의 특정한 약속에 대하여 특별히 신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신뢰를 가지기 위해서는 당연히, 설교자는 바로 이 순간에 사용할 자기의 머리 안에 저장해 놓을 약속들을 찾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예로써 이사야 41장 10절을 듭니다. 

이사야 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41:10 So do not fear, for I am with you; do not be dismayed, for I am your God. I will strengthen you and help you; I will uphold you with my righteous right hand.

파이퍼 목사님은 이 Trust 파트를 굉장히 강조합니다. 설교 해야 하는 바로 그 순간에 진정한 이슈는, 설교자가 과연 이것을 진실하게 믿는가 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사야 55장 10절과 11절을 또 다른 약속으로 인용합니다. 

이사야 55:10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55:10 As the rain and the snow come down from heaven, and do not return to it without watering the earth and making it bud and flourish, so that it yields seed for the sower and bread for the eater, 55:11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55:11 so is my word that goes out from my mouth: It will not return to me empty, but will accomplish what I desire and achieve the purpose for which I sent it.

파이퍼 목사님은, 과연 설교자가 신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에, 그것이 결코 헛되게 돌아오지 않을 것을 진정으로 믿는가라고 심각하게 질문합니다. 그리고 만약 그것을 믿는다면, 설교자의 자유로움, 담대함, 그리고 기쁨 가운데 어떤 기적적인 것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파이퍼 목사님은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약속이라며 하나를 더 추가합니다. 로마서 8장 32절 말씀입니다. 

로마서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8:32 He who did not spare his own Son, but gave him up for us all--how will he not also, along with him, graciously give us all things?

파이퍼 목사님은 이 약속을 매우 소중하게 여깁니다. 왜 이 약속이 항상 너무나 소중한 것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곧 설교해야 하는 바로 이 상황에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의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혈을 흘리신 그것에 달려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 순간에, 설교자 자신이 그 자리에 서기에 가치 없다고 마귀가 설교자를 공격할 때에, 설교자는 자신의 위대함이 아니라 영원한 가치를 지니신 그리스도의 피가 이루신 그 약속에 의거하여, 그 피로 덮여진 설교단에서 설교 할 수 있음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파이퍼 목사님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로 설교자의 메시지와, 그의 믿음과, 예배에서 일어날 모든 선한 것을 구속하셨음을 강조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보혈이라는 궁극적인 약속의 성취에 의지하여 설교하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설교단에 올라갑니다. 

4. Act (설교하라) 이제 준비가 되었으니 설교를 하면 됩니다. 그리고 만약 설교 단에서 흔들릴 때에, 혹시라도 자의식에 사로잡히거나 혹은 설교 원고가 기억나지 않을 때에, 작게 아주 짧게라도 순간 순간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기도하면 된다고 조언합니다.

5. Thank (감사하라) : 그리고 설교가 다 끝난 다음에 내려오면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조언합니다. 설교자가 여전히 살아있고 숨쉬고 있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설교를 통해서 어떤 일을 하실 것을 감사하면 된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설교의 기적을 행하는 파이퍼 목사님의 전략이라고 마무리를 합니다. 

요즘에 제가 자주 느끼는 것은, 동일한 말이라도 "누가 말하는가"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들린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파이퍼 목사님이 제시하는 이 방법은 누구라도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파이퍼 목사님의 강의는,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체험과 진실함이라는 측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이번 강의는 참 쉽지가 않았습니다. 책으로 읽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뉘앙스를 포함한 영어 해석에 대한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굉장히 여러번 들었지만 완벽하게 이해 못한 부분도 여러 곳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파이퍼 목사님 입장에서는 쉽게 암기하라고 약자로 만들어주셨지만, 영어권이 아니기 때문에 저는 암기하는 것이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핵심 내용은 마음에 충분히 남았습니다. 설교자가 설교라는 기적을 행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나를 인정해야 하고, 그리고 채우시기를 간구해야하고, 그리고 약속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의 실채를 드러내어 그것을 가지고 설교할 때에, 그것이 헛되게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정말 신뢰하는가? 라는 그 질문 앞에서 마음이 부끄럽고 숙연해졌습니다. 왜냐하면 의도한적은 없었지만 제 마음의 아주 깊은 아주 깊은 어떤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도 그것에 대한 신뢰가 부족했다는 것을 이번에 분명하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저도 설교 전에 파이퍼 목사님이 조언하시는대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신뢰하기 시작했습니다. 설교 중간 중간에 흔들릴 때 마다, 작게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 속에서, 설교에 대한 확신,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의 태도가 많이 달라진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기적이라는 설교를 감당하기 위하여, 좀 더 변화된 태도로 임한 저의 사사기 설교입니다. 

설교가 하나님의 기적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기 원합니다. 나의 무가치함을 인정하고, 능력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전적인 도우심을 구하며, 말씀의 능력을 믿으며, 감사로 영광을 돌리는 설교자로 살기를 소원합니다. 

존파이퍼 목사님의 설교 클리닉에 대한 분석과 적용은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 존 파이퍼의 설교 클리닉_8강 본문 선택하기
(Choosing the Text) / 요한복음 6장 41-59절 설교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01/8-choosing-text.html

* 존 파이퍼 "설교 클리닉" 전체 글 모음 / "설교의 대가"에게 설교를 배우라
https://jungjinbu.blogspot.com/2023/03/blog-post_9.html

2021년 11월 29일 월요일

존 파이퍼의 설교 클리닉_ 6강 설교는 예배다 (Lecture 6: Preaching Is Worship) / 사사기 9장 1-6절 설교

 


* 이전 글 
- 존 파이퍼의 설교 클리닉_ 5강 희열이란 무엇인가?
(What is exultation?) / 사사기 6장 1-10절 설교

https://jungjinbu.blogspot.com/2021/11/5-lecture-5-what-is-exultation-6-1-10.html

파이퍼 목사님은 "설교가 예배"라고 말합니다. 일단 강의를 듣기 전에 질문이 생겼습니다. 도대체 설교가 예배라는 것이 무슨 뜻이지? 혹시 설교 가운데 오직 하나님만 높아지셔야 한다는 의미인가? 그런 질문 의식을 가지고 강의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파이퍼 목사님은, "무엇이 설교가 아닌가"에서 강의를 열기 시작합니다. 설교는 단순히 기독교의 절기 예배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도록 만드는 것을 목표로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설교"가 바로 "예배"입니다. 

파이퍼 목사님은, 본격적으로 논리를 전개하기 위해서, 본인이 정의했던 설교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갑니다. 그것은 Expository Exultation 입니다. Expository는 성경의 실재를 명백하게 드러내어서 그것을 청중들에게 분명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Exultation은 그 실재가 가지고 있는 그 가치에 대하여서 적절한 감정을 경험하며 구체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러한 정의를 바탕으로, 과연 예배는 무엇이며, 이러한 파이퍼 목사님이 정의한 설교의 정의와 예배가 실제로 어떻게 겹치게 되는지를 설명합니다. 

여기서 제가 깨달은 것은, 파이퍼 목사님이 "설교는 예배이다" 라는 의미는 결국 "예배가 가지고 있는 동일한 요소를 설교가 동일하게 함께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럼 계속 갑니다. 

먼저 파이퍼 목사님은, "예배가 무엇인가"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가지신 그 가치를 "보고", "맛보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파이퍼 목사님은 이 세가지 단어를 통해서, 예배와 설교가 어떤 떨어질 수 없는 긴밀함을 가지고 있음을 설명합니다.

첫째로, 예배 가운데 본다는 것은, 영적으로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성경에 신실하게 근거한 설교를 들을 때에, 거기에는 어떤 "분명하고도 구분되는 스스로 그것이 진정한 것임을 보여주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영적인 통찰력"이 존재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무한한 아름다움과 가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보는 것에 대해서 파이퍼 목사님은 요한복음 1장 14절을 인용합니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14 The Word became flesh and made his dwelling among us. We have seen his glory, the glory of the One and Only, who came from the Father, full of grace and truth.

영광이라는 것은, 오직 "은혜와 진리로 가득찬 하나님의 아들"이 가지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직접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 영광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런 면에서 어떤 사람들은 설교를 듣고 성경을 읽지만 어떤 영광도 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는 단순히 "그리스도에 대한 사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영적으로 보는 것"에 근거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고린도후서 4장 4절과 6절을 인용합니다. 여기서 파이퍼 목사님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영어로는 "cannot see"에 포커스를 맞춥니다.

고린도후서 4: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4:4 The god of this age has blinded the minds of unbelievers, so that they cannot see the light of the gospel of the glory of Christ, who is the image of God. 4: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4:6 For God, who said, "Let light shine out of darkness," made his light shine in our hearts to give us the light of the knowledge of the glory of God in the face of Christ.

파이퍼 목사님은, 마귀가 한 사람의 마음과 감정을 동요시킬 때에,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을 볼 수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움직이시고 그의 보지 못하는 것을 열어주실 때에, 바로 그 때에 설교 중에 빛이 비취는 것인데, 예수님이 단순한 역사적 인물이나 혹은 신화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스스로를 증명하시는 신적인 영광으로써 그분을 보게 된다고 강조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가치를 보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둘째로 예배 가운데 맛본다 라는 것에 대하여, 마태복음 15장 8절에서 부터 설명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마태복음 15: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15:8 "'These people honor me with their lips, but their hearts are far from me.

이 말씀을 풀어서 설명할 때에, 우리가 주일 예배 시간에 그 자리에 참석하면서도, 찬양하면서도, 그 마음 안에서 그 진리를 맛보고 음미하는 것에서는 얼마든지 멀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씀합니다.

잘못된 예배 가운데 일어나는 이런 일은 청중들이 설교를 들을 때에도 마찬가지인데, 청중은 설교자 자신, 설교의 태도, 설교의 예화, 설교의 논리 등에 매료되거나 좋아할 수 있겠지만, 영적으로는 아무것도 맛보지 않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라는 것은, 단순히 청중이 노래하거나, 기도하거나, 손을 들거나, 무릎 꿇거나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영적인 실체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보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세번째로 예배는 표현이다 라는 것은, 우리는 예배로 모여서 찬양하고, 서거나 무릎 꿇음으로써, 그리고 손을 들고, 그리고 성경을 읽음으로써, 죄를 회개함으로써, 혹은 눈물을 흘리면서, 혹은 경외감 속에서 침묵으로 표현을 한다고 설명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방금 이야기한 두가지, 다시 말해서 영적으로 보는 것, 그리고 영적인 것을 맛보는 것이 이루어질 때에, 그제서야 우리가 예배 중에 표현하는 모든 것들이 놀랍고 또 달콤한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배란 이렇게 세가지로 표현할 수 있다고 파이퍼 목사님은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바로 여기에서, 설교가 어떻게 이러한 예배에 대한 이해에 상응하는지를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설교는 영적으로 보고, 맛보고, 표현하는 것들을 청중들에게 먹이며, 또한 합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설교의 강해의 영역은,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알고 보는 것을 영적으로 결합하여서 청중들에게 공급하고 먹이는 것입니다. 설교의 희열의 영역 역시,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보는 것 그리고 맛보는 것을을 결합하고 그리고 그것을 더 벅차오르게 만들어서 청중들에게 먹이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사람들은 영적으로 충만한 상태로 예배에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도움을 얻기 위해서 예배에 오는데, 영적인 실재를 보고, 맛보고 그리고 표현하기 위해서 옵니다. 

예를 들어서 예배 중에 찬양은 영적인 각성 그리고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반대로 표현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영적으로 보는 것, 음미하는 것, 그리고 표현하는 것이 바로 찬양을 통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치 이런 것 처럼, 설교도 동일하게 영적으로 보는 것, 음미하는 것, 그리고 표현하는 것을 영적으로 깨닫게 하고 일어나게 하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설교는 예배 이후에 등장하는 어떤 것이 아니고, 혹은 단순히 예배의 목적도 아니고, 설교 자체가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설교는 놀라운 사건이며, 이것은 초자연적인 것이고 기적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존파이퍼 자신, 그리고 설교자가 어떻게 이런 기적을 행할 수 있는가? 어떻게 설교의 기적을 행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파이퍼 목사님은 이것을 다음 강의 때에 다루겠다고 말합니다.

이번 강의를 들으면서, 다소 복잡한 이야기였다고 느꼈습니다. 특별히 예배의 세번째 요소인 "표현"이라는 측면과, 좋은 설교의 연결성은 거의 드러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매우 선명한 호소였다고 생각했습니다. 파이퍼 목사님이 강조하고 싶은 핵심은, "설교는 결국에는 예배가 가지고 있는 특징과 목적을 동일하게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 맛보고, 표현하는 것인데, 설교가 바로 그런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본인은 설교가 바로 예배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강의를 들으면서, 예배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가장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배의 핵심이,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영적으로 보고, 그것을 맛보고, 그것을 표현한다라는 이 정의는 매우 탁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칼빈에서 예배학 수업을 들으면서 예배학에 대한 전문적인 아티클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정말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더군요. 학적인 예배학은 어쩌면 저처럼 평범한 사람들과 많이 멀어져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배의 형태, 예배의 순서, 예배의 중요성 등에 대해서는 많이 이야기하지만, 정작 예배가 정말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가? 예배 가운데 우리의 영혼 속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해서는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선명하게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번 파이퍼 목사님의 강의를 통해서, 예배란 무엇인가? 그리고 왜 설교를 예배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가에 대하여 정말 탁월한 정의와 그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이번 강의는, 정말 설교는 무엇인가를 보여준 탁월한 강의였습니다. 특별히 예배 속에서 존재하는 설교라는 측면에서, 저는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파이퍼 목사님의 말씀처럼 본문의 실재를 보고, 맛보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설교에서 이것을 잃어버리면 다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아쉬운 것은, 보통 설교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 얼마나 매력적인 예화를 사용했는가? 혹은 얼마나 논리 구조가 탁월한가? 혹은 얼마나 충실하게 본문을 주해했는가? 등이 더 중요한 주제처럼 다뤄질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이번 강의가 설교자로서는 크게 마음에 부담이 되었습니다. 저는 파이퍼 목사님의 강의가 이렇게 이해되었습니다. "설교자가 그리스도의 영광, 말씀의 실재를 보고, 맛보고, 표현할 수 없다면, 당연히 예배는 실패입니다!"

보통 공예배의 시간이 한시간 정도입니다. 그 중에 설교는 삼십분 정도를 차지합니다. 만약 설교자가, 자신의 설교 가운데 그리스도의 영광을 실제로 보고, 영적으로 충분히 맛보고, 그리고 그것을 표현할 수 없다면, 도대체 우리는 예배의 성공을 어디에서 찾아야할까요? 그리고 설교자가 그것을 본 적도 누린 적도 표현한 적도 없는데, 과연 성도들에게 예배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누군가를 향한 비난이 아니라, 제 자신을 향한 무거운 도전이자 질문입니다. 

이 강의를 듣고 설교를 준비하고 실제로 설교하는데 얼마나 마음이 무거웠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정말 할 수 있는 한 혼신의 힘을 다해서 설교하였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며 그것을 담아서, 그리고 제가 영적으로 보고 맛보고 표현하고자 했던 그 내용을 담아서 설교했습니다.


설교 단을 내려오는데 마음이 참 무거웠습니다. 왜냐하면 설교 본문 자체가 너무나 무거운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뉴스에서 이 본문과 유사한 내용이 나왔다면 아마도 저는 채널을 돌렸을 것입니다. 

인간의 야망과 광인과 같은 집단 살인, 그리고 그러한 일이 일어난 세겜이라는 지역의 과거의 영광을 보면서, 인간의 타락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그리고 우리의 영적인 나태함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보여주는 지를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새벽 설교 후에 한 성도님으로 부터 카톡이 왔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는 카톡이었습니다. 영적으로 교만하여져서 자신이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제가 설교하는 날이라 설교를 들었다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악한 모습을 깨닫게 하셨다는 카톡이었습니다. 자신이 영적으로 정신 똑바로 차리고 신앙 생활 하라고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해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마음에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님이 이야기한 바로 그 부분이, 파이퍼 목사님이 설교를 통해서 달성해야만 한다고 말했던 바로 그 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통해서 성도는 영적인 실재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파이퍼 목사님의 진심의 호소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일을 저의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셨음을 알게하셨습니다.

앞으로도 바로 이런 일이 저의 설교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설교자를 포함한 모든 회중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로 그 예배를 드리고, 그 예배의 속성을 그대로 가진 성경적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설교를 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저의 소원입니다. 

존파이퍼 목사님의 설교 클리닉에 대한 분석과 적용은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 존 파이퍼의 설교 클릭닉_7강 기적을 행하기
(Acting the Miracle) / 사사기 16장 15-31절 설교

https://jungjinbu.blogspot.com/2021/12/7-lecture-7-acting-miracle.html

* 존 파이퍼 "설교 클리닉" 전체 글 모음 / "설교의 대가"에게 설교를 배우라
https://jungjinbu.blogspot.com/2023/03/blog-post_9.html

2021년 11월 19일 금요일

존 파이퍼의 설교 클리닉_ 5강 희열이란 무엇인가? (What is exultation?) / 사사기 6장 1-10절 설교

 


* 이전 글
- 존 파이퍼의 설교 클리닉_ 4강 강해란 무엇인가?
(Lecture 4: What Is Expository?) / 사사기 2장 11-23절 설교

신학을 공부하고 책들을 읽다보면, 수 많은 갈림길을 보게 됩니다.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들이 전부가 아니며, 세상은 정말 넓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곧, 나는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됩니다. 

책을 많이 읽는 것은 매우 유익한 것입니다. 그러나 자칫, 수 많은 선택들 속에서 나를 헤매이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일에 확신을 가지기 보다는 주저하게 만들며, 어떤 것을 끈기 있게 붙들기 보다는 나의 소중한 삶의 궤적을, 수 많은 선택 중에 하나 정도로 폄하하게 될 수 있습니다. 

결국, 목회자는 자신의 길을 하나님 앞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남들이 뭐라고 하더라도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어떤 확신이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가 반드시 평생동안 가야 하는 어떤 길을 발견해야 합니다. 목회는 많이 외로운 것이지만,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내 내면의 외로움 조차 이기게 만들 수 있는 숭고한 목적과 가치를 붙들어야 합니다. 

존파이퍼 목사님의 설교 강의를 들으면서, "차라리 이 강의들을 듣지 않는 것은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잠깐 했습니다. 그의 강의가,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저를 향한 그분의 호소가, 제가 감당하기 어려울만큼 무게가 있고 또 강력했기 때문입니다.

존파이퍼 목사님을 좋게 보는 사람도 있고 또 그분의 보수적인 신학을 실랄하게 비판하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존파이퍼 자신은, 자신이 가야할 길을 확고하게 붙들었고 은퇴하신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소신에 변함이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방향이 성경으로 부터 왔음을 확신하며, 확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는 진실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의 빛나는 눈이, 저의 마음을 놀라게 하고 또 무겁게 합니다. 그의 실룩거리는 환희, 분노 그리고 갈망의 표정들이 저를 누르는 듯 합니다. 설교자로 가야 할 그 방향을 그의 강의를 통해서 찾았다는 기쁨이 저에게 있지만, 그러나 그 길은 정말 힘들어 보입니다. 특히 오늘 강의가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존파이퍼의 설교 철학은 Expository Exultation 입니다. 우연히 이미 발간된 존파이퍼 목사님의 책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지금 제가 보고 있는 모든 강의가 바로 이 책을 바탕으로 한 듯 합니다.

* 강해의 희열 (Expository Exultation: Christian Preaching as Worship)
http://duranno.com/books/view/bookdetail.asp?bcod=6761

일부러 책은 아직 보지 않았습니다. 급하게 공부하고 싶은 마음은 없기 때문입니다. MDIV 시절부터 경험했던 쏟아지는 과제와 미처 소화하지도 못했던 수 많은 신학적 내용들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에게 필요한 것은 깊이이지 속도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설교 시리즈를 듣는 처음 순간부터, Exultation을 어떻게 번역하는 것이 좋은가 오래 고민했습니다. 파이퍼 목사님의 번역서에서는 "희열"이라고 번역했네요. 한번 영영사전의 정의를 한번 살펴보았습니다.

exult

verb show or feel triumphant elation.

—derivatives exultancy noun exultant adjective exultantly adverb exultation noun exulting adjective exultingly adverb

—origin 16th century (earlier (Middle English) as exultation): from Latin exsultare, frequentative of exsilire ‘leap up’.

Catherine Soanes and Angus Stevenson, eds., Concise Oxford English Dictionar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4).

확실히 평범한 단어는 아닙니다. 저는 사실 지금까지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생소한 단어입니다. 영영 사전의 의미는, "승리의 희열감, 기쁨, 의기 양양함" 그런 것이 바로 Exultation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단순히 희열이라는 번역만으로는 파이퍼 목사님의 의도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는 듯 합니다. 

제가 이해할 때에 파이퍼 목사님의 Exultation은 "기쁨, 희열, 감격, 흥분, 두려움, 분노" 등의 "진실한 모든 감정을 포함하는 총체적인 표현"입니다. 그리고 파이퍼 목사님은 이 진실한 감정이, 바로 충실한 말씀 주해로부터 나와야 하는 것임을 오늘 강의를 통해서 강조합니다. 

강의를 시작하면서 파이퍼 목사님은, Exultation은 설교자가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고 자신이 말씀에서 끌어낸 바로 그것이 가지고 있는 그 가치에 대해서, exult over하는 것 혹은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라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서 Exultation은 성경이 가지고 있는 바로 그 가치에 대해서, 그것이 천국이든 지옥이든, 그것이 우는 것이든 혹은 기뻐하는 것이든, 목회자가 바로 그 가치를 감정적으로 구체화시키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저의 이해로는 쉽게 표현하자면, "성경이 드러내는 바로 그 가치에 대해서, 그것과 동일한 충분한 감정으로 구체화시키는 것"이 바로 Exultation입니다. 

그렇다면 왜 파이퍼 목사님은 설교가 마땅히 이렇게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설교에 희열이 있어야만 하는 이유는 첫째로, 복음을 전하는 전달자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할 때에 희열이 존재해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그리고 성령님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크리스천의 삶과 영원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 지옥과 심판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연결성은, 너무나 큰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모든 성경 본문 그 자체가 너무나 중요한 가치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본질적인 특성에 따라서, 설교가 말씀을 다루기 때문에 그것과 연결된 적절한 감정적인 구현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설교에 희열이 있어야만 하는 둘째 이유는, 말씀을 전하는 자(herald)의 특성이 바로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왕이 자신의 너무나 중요한 메시지, 즉 죄를 용서하고자 하는 왕의 갈망과 자비의 메시지를 그의 소식을 전하는 자에게 맡길 때에, 소식을 전하는자가 왕의 마음과 반대되는 태도로 전한다면 그는 신실한 사자가 아닐 것입니다.

만약 신실한 왕의 사자라면, 그의 태도와 그의 감정 가운데, 왕이 말하여서 그가 전하고자 하는 것을 잘 드러내며 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왕의 사자는, 그가 말하는 바에 대해서 지루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파이퍼 목사님은, 지루한 설교자는 거짓말하는 설교자가 틀림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진리를 말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참된 가치를 전하는 것이 전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실재는 가치를 담고 있는데, 그 가치를 말할 때에, 그것에 반대되는 태도로 말한다면 그 사람은 신실한 설교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설교에 희열이 있어야만 하는 셋째 이유는, 설교의 목적 자체가 바로 그 희열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설교의 목적은, 청중들이 영적인 눈으로 본문의 가치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흡족하게 맛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본 바로 그것을 통해서 세상 가운데 하나님을 대표하는 사람들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파이퍼 목사님의 이해는 고린도후서 3장 18절에 근거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개역개정) 3:18 And we, who with unveiled faces all reflect the Lord's glory, are being transformed into his likeness with ever-increasing glory, which comes from the Lord, who is the Spirit. (NIV)

만약 이것이 우리의 설교의 목적이라면, 설교자는 당연히 영광을 보고, 맛보고, 영광을 삶으로 드러내는 바로 그 희열을 설교 가운데 경험하고 보여주어야만 합니다.

결론적으로 파이퍼 목사님은, 설교자가 "단순히" 강해적인 메시지를 전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합니다. 그것은 마귀도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설교자들을 책망하고 도전합니다. 마귀도 아주 분명하게 성경을 인용하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섬뜩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마귀가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말씀에 희열을 경험하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이 부분에서 정말 동의를 하게 됩니다. 절대 마귀는 희열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말씀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설교자가 마귀가 하는 것 처럼 설교하기 원한다면, 분명하게 설명하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면 된다고 심각하게 경고합니다.

하지만 파이퍼 목사님은, 정 반대의 경우도 경고합니다. 그것은 설교 안에 "단순히" 희열만 존재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설교 안에, "강해에 기반하지 않은 희열"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파이퍼가 원하는 것은, 단순히 설교자가 감정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파이퍼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원하는데, "설교자"가 본문의 실제를 보고, 경험하고, 성령으로 변화되어서 "설교자 자신이 바로" 그 본문의 실재 안에서 감정들을(emotions) 경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파이퍼 목사님은, 성경의 실재가 설교자를 각성시키고, 설교자는 그 안에서 영적인 감정들과 애정을 느껴야 하는데, 그것은 진실할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음을 경고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설교자의 설교를 들으면서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금방 눈치챌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리고 파이퍼 목사님은 이 모든 과정이, 전적으로 초자연적인 것임을 우리에게 깨닫게 합니다. 말씀의 실재를 끌어내는 것은, 성령님께서 보여주시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진실한 마음으로 반응하는 것도, 성령님을 떠나서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일이, 설교를 듣는 성도가 앉아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동일하게 일어나는 것도 초자연적인 것임을 말씀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설교 자체가 바로 예배라고 말할 수 있다고 설명하며, 다음 강의를 예고합니다. 

이번 강의를 들으면서, 감격하기도 하고, 간담이 서늘하기도 하고, 울기도 했습니다. 여러번 강의를 듣고 정리한 핵심은, 파이퍼 목사님은 그 누구보다 "설교자 자신이" 본문 안에서 희열을 경험해야만 하는 것을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바로 여기에, 파이퍼 목사님의 진실한 마음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설교자 자신이 본문 안에서 희열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본문의 무한한 무게와 가치를 깨닫고, 그 안에서 감격과 고통과 회개와 눈물과 돌이킴과 반성과 기쁨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사실상 그 사람은 진짜 설교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 역시 차가운 설교에 대한 유혹을 늘 받습니다. 적당히 하고 싶은 유혹입니다. 말씀만 똑바로 논리적으로 전하면 충분하다는 그런 유혹입니다. 말씀을 깊이 묵상해서, 그것이 가진 하나님의 원래의 그 의도를 드러내어 그 안에서 그것을 맛보고 기뻐하고 감격하는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큰 인내와 기도와 희생을 요구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사기 설교를 하면서, 참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파이퍼 목사님의 강의를 듣기 전과는 전혀 다른 태도로 말씀을 대하게 됩니다. 말씀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찾는 것은 이미 과거에도 익히 알고 있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강의들을 들으면서, 그것이 또 다른 차원으로 깊어졌음을 경험합니다. 계속 저 스스로에게 질문합니다. 나는 정말 본문의 가치가 나의 설교 안에서 드러나고 있는가? 

그리고 강해를 넘어서서, 강해를 통한 희열을 경험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또한 스스로에게 질문합니다. 하나님의 진짜 마음이 나의 설교 안에 들어가 있는가? 나는 정말 하나님의 말하고자 하는 바로 그것을, 하나님의 마음을 충분히 담아서 전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나의 설교를 들으시면서, 정말 제대로 나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고 생각하실 수 있는가? 나는 하나님이 기뻐하실 때에 충분히 함께 기뻐하고, 하나님이 슬퍼하실 때에 충분히 함께 슬퍼하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의 사신으로서 그분의 영광스러운 직분을 감당하고 있는가? 그것을 끊임없이 질문하면서 설교를 준비하고 또 설교하였습니다. 


저는 항상, "주님께서 저에게 보여주신 저의 길을 신실하게 걸어가야겠다" 라는 생각을 자주합니다. 저는 제가 시대에 기억될 만한 탁월한 설교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 앞에서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하고 있는가 묻는다면, 부족하지만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저의 평생의 목표입니다.

파이퍼 목사님의 강의를 통해서 더 성장하고 싶고, 앞으로 저의 모든 설교 가운데 진정한 희열이 존재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제가 먼저 변하고, 함께 말씀의 실재의 가치와 능력을 경험한 성도님들이 변하게 되는 하나님의 기적을, 평생동안 경험하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 

존파이퍼 목사님의 설교 클리닉에 대한 분석과 적용은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 존 파이퍼의 설교 클리닉_ 6강 설교는 예배다
(Lecture 6: Preaching Is Worship) / 사사기 9장 1-6절 설교

https://jungjinbu.blogspot.com/2021/11/6-lecture-6-preaching-is-worship-9-1-6.html

* 존 파이퍼 "설교 클리닉" 전체 글 모음 / "설교의 대가"에게 설교를 배우라
https://jungjinbu.blogspot.com/2023/03/blog-post_9.html

2021년 11월 6일 토요일

존 파이퍼의 설교 클리닉_ 4강 강해란 무엇인가?(Lecture 4: What Is Expository?) / 사사기 2장 11-23절 설교

 


* 이전 글
- 존 파이퍼의 설교 클리닉_ 3강 설교란 무엇인가?
(Lecture 3: What is Preaching?) / 출애굽기 39장 22-43절 설교

https://jungjinbu.blogspot.com/2021/10/lecture-3-what-is-preaching.html

존파이퍼 목사님의 설교에 대한 철학은 일관적입니다. Expository Exultation 입니다. 설교란 무엇인가를 강의 영상마다 초반에 계속적으로 반복하면서 듣는 우리의 마음을 집중시킵니다. 

오늘의 내용은 Expository를 다룹니다. 그리고 존 파이퍼 목사님은, "설교자가 강해를 통해서 보게 된 것을 크게 즐거워하는 것이 설교"라고 설명합니다. 

강해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명백하게 텍스트의 의미를 드러내는 것, 그리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보이는 것" 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몇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첫째, 모든 설교는 메시지와 포인트는 하나나 여러개의 성경적인 텍스트로부터 와야 함을 의비합니다. 강해라는 것은 설교자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한구절 한구절 설교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강해라는 것은 어떤 길이의 혹은 어떤 성경의 구절로 설교 본문을 잡든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 본문의 진정한 의미를 청중들을 위해서 끌어내어서, 청중이 그들의 마음으로 분명하게 그것과 씨름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파이퍼 목사님이 설교를 설명할 때에, 그가 사용하는 "의미"라는 단어의 뜻은,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과 인간이 청중과 소통하기 위해서 의도된 실재(reality)"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파이퍼 목사님이 말하는 의미라는 것은, 단순히 본문의 단어들의 문법적인 내용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또한 제가 이해하기로는, 설교자는, 저자들이 사용한 단어들과 논리들을 가지고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그 실재"를 우리의 언어로 담아서 청중들에게 전해야 하며, 청중들이 그것을 이해하고 그것으로 도전 받도록 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존파이퍼 목사님은 이번 강의에서 "실재"라는 단어를 계속 사용합니다. 이 영상의 후반부까지 충분히 그것에 대해서 설명하시지만 영영 사전에서 그 의미를 찾아보았습니다. 

reality

noun (plural realities)

1    the state of things as they actually exist, as opposed to an idealistic or notional idea of them.

Catherine Soanes and Angus Stevenson, eds., Concise Oxford English Dictionar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4).

사전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reality의 의미는, 어떤 사물이 이상주의적이거나 관념적인 적인 상태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상태를 실재라고 표현하는 듯 합니다. 조금 더 실감나게 이해하자면, "어떤 대상이 다른 어떤 형태가 아니라, 정말로 그 대상이 존재해야 하는 바로 그 모습으로 존재하는 바로 그 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 듯 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제가 이해할 때에, 파이퍼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실재라는 것은, 말씀이 정말로 의미하는 것, 말씀이 정말로 드러내서 소통하고자 하는 중심 내용, 말씀이 반드시 드러내고자 하는 그 어떤 것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파이퍼 목사님의 설교론에서 강해라는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설교자의 강해를 통해서 청중이 "본문의 실재"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것에 직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의 예로서 드는 것이 골로새서 1장 4-5절입니다. 

골로새서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1:4 because we have heard of your faith in Christ Jesus and of the love you have for all the saints-- 1:5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1:5 the faith and love that spring from the hope that is stored up for you in heaven and that you have already heard about in the word of truth, the gospel

여기서 파이퍼 목사님은, 성도의 사랑이란 하늘에 쌓아 둔 소망 때문임을 말씀의 핵심으로 강조합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서 설교자가 이 부분을 설교할 때에, "서로 사랑해야 하며, 사랑은 소망에 뿌리를 두고 있을 때 일어나는 것이니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가집시다"라는 식으로 설교해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설교하지 말아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러한 설교는 "사랑이 무엇인지", "사람들이 행하고 느끼기 원하는 그 사랑이 무엇인지", "그리고 정말 소망이 무엇인지" 그런 것에 대하여서 설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설교자에게 자신이 많이 들어왔던 단어들을 설교 중에 듣지만, 그러나 그것이 "정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설교자가 단순히 "소망으로 인해서 사랑해야 한다"라고만 말한다면, 그것이 과연 이 세상이 가지고 있는 소망과 무엇이 다른가를 성도들에게 설명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이 원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과연 그것이, 말씀과 그 논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알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들이 이런 실수를 하는 이유는, 아직 설교자가 본문의 실재를 다루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말씀을 통하여 사랑이 무엇인지, 소망이 무엇인지를 다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재를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을 풀어서 설명하면서, 설교자가 성경적으로, 경험적으로, 심리학적으로 이 세상에서 다시 말해서 청중의 가장 실제적인 자리에서 그 실재가 작동하는 것을 밝혀내지 못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존파이퍼 목사님은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씀의 실재를 명백하게 드러내는 것" 이것이 바로 설교를 살아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만약 설교자가 단순히 본문의 구조 등에 혹은 친숙한 단어들 논리 구조들, 그것들을 종합해서 결론을 이끌어내는 식의 설교를 한다면, 본문의 실재를 놓치는 것입니다. 청중들은 실재를 살아가고 있고, 성경 역시 실재를 다루고 있으며, 그러므로 강해 설교는, 의미 혹은 실재를 본문으로 부터 반드시 끌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부분에 대해서, 설교의 구조를 언급하며 추가적으로 설명하십니다. 존파이퍼 목사님의 설교의 구조에 대한 철학이 조금 등장합니다. 파이퍼 목사님에 따르면, 성경 본문의 구조는 설교의 구조를 지배해야(govern) 하지만, 그것은 완전히 동일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 구절의 단어들이나 논리 구조를 따라서, 동일하게 설교를 구성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정 반대의 순서로 구성을 짜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강해 설교라는 것은, "성경 본문의 구조를 따라가고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그 본문의 실재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아마도 파이퍼 목사님은, 보통 생각하는 강해 설교, 다시 말해서 성경의 한구절 한구절은 반드시 순서에 따라서 모든 단어와 구조를 설명하면서 내용을 이끌어가는 그런 강해설교를 염두에 두고 염려하시는 듯 합니다. 

오히려 설교자는, 본문의 실재를 나의 설교에 담아서, 나의 설교의 구조를 "청중들의 위하여서" 자유롭게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중요한 것은, 본문의 실재를 드러내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합니다. 

강해에서, "명백하게 의미가 드러났다는 것은", 설교자가 강조하는 포인트들이 성경으로 부터 온 것임을 분명히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의 중요성에 대해서 파이퍼 목사님은 설교자들에게 호소합니다. 

특히 젊은 목회자들이 설교를 위해서 많은 공부를 하지만, 그리고 설교 중에 좋은 것들을 말하지만, 청중들은 설교자가 그들을 돕기 전에는 진정한 말씀의 실재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자신이 말하는 바가 말씀에서 왔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두 가지 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첫째로, 왜냐하면 설교는, 설교자의 권위나 아이디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설교자가 설교를 할 때에, 정작 청중들이 성경 본문과 설교의 내용을 연결시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결국 설교자가 자신의 목소리에 청중들이 의지하도록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고 지적합니다. 설교자는 청중들이 설교자가 아니라 말씀에 집중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청중들이 "말씀을 어떻게 읽는가를 훈련 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설교자의 올바른 강해를 통해서", 청중들은 그들 스스로, 성경에 어떤 실재가 있는가를 배우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파이퍼 목사님은, 강해라는 것이 "두 실재의 만남"임을 강조합니다. 강해는, 설교라는 것은 명백하게 본문의 의미 실재를 성경으로 부터 끌어내는 것인데, 그것을 청중을 위하여 아주 분명하게 언어적으로 만들어서, 그것을 가지고 청중들의 삶 속에 깊게 파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중들이 그것을 가지고 씨름하도록 하고, 성경의 실재와 청중의 삶이라는 두 실재가, 삶이 변화되는 그 순간에 함께 모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 하나님께서 설교자 뿐 아니라 청중들이 큰 기쁨 가운데 들어가게 하시는 Exultation이 됩니다. 

파이퍼 목사님의 이 강의에 대해서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사실 강의를 여러번 들으면서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젊은 목회자들에게 하시는 그 호소에서는 눈물이 쏟아 졌습니다. 설교에 대한 진지함, 설교를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확신, 그리고 성경적으로 정립한 확고한 설교에 대한 철학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설교를 가르쳐 주신 박완철 교수님께서 항상 강조하셨던 "말씀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존파이퍼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실재"이구나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제대로 배웠고 또 그 방향대로 부족하지만 지금까지 추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참 그 길이 쉽지는 않습니다. 적당한 수준에서, 어디에서 들어본 말들로, 피상적이고 좋은 말들로 설교를 채워놓고 싶다라는 생각이 가끔 듭니다. 왜냐하면, "말씀의 실재"를 청중들의 언어로 아주 선명하게 만들어내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존파이퍼 목사님이 "청중"들을 굉장히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이 저는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보통 강해 설교라고 하면, 어려운 원어, 그리고 복잡한 구조들을 밝혀내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성도님들이 대부분 알아듣지 못하지만, 그렇게 설명을 했다는 사실 자체로 만족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존파이퍼 목사님은 그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영어를 제가 정확하게 이해했는지는 의심이 있지만, 적어도 제가 이해할 때에 파이퍼 목사님은 성경의 언어 구조 등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말씀의 실재는 아니라고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또 동시에 그런 어어와 구조등이 사용되기는 해야 합니다. 그럼녀서도 성경의 실재, 다시 말해서 말씀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청중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해야 합니다. 엄청나게 대단한 비전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에 파이퍼 목사님의 설교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목회자에게는 중요한 현실적인 작업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성경의 실재를 이해하는 것, 둘째는, 청중의 실재를 이해하는 것, 셋째로는, 청중의 언어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세가지 중에 하나라도 약화된다면, 성경적인 설교와는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설교의 구조를 살짝 언급하시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저는 파이퍼 목사님의 책과 설교들을 통해서 주해적인 도움은 종종 받았지만, 구조적인 부분은 따로 분석해 본적이 없습니다. 이 설교 클래스를 다 마무리하고 나면 한번 시도해 보아야겠습니다. 다만 제 스스로 추구하는 "퓨전 설교"의 형태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 설교, 이렇게 내용을 준비하고,
이렇게 구성하고, 이렇게 전달하라! (제 2편 : 설교 구성)
https://jungjinbu.blogspot.com/2020/07/2.html

파이퍼 목사님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퓨전 설교는 본문의 실재를 목회자가 이미 파악한 다음에, 서론과 본론 초반에서는 살짝 그 실재를 보여주면서 흥미를 돋웁니다. 그리고 본문의 중요 구성에서는 "본문의 실재"와 "청중의 실재"가 만나는 장으로 "적용"을 강조합니다. 

앞으로 이 강의를 어떻게 풀어내실지 모르겠지만, 저에게는 이 강의의 마지막 부분, "두 실재의 만남"을 강조하시는 것이 참 흥미로웠습니다. 그것이 강해 혹은 설교입니다. 물론 말씀에서 실재를끌어내는 것을 강해라고 설명하지만, 마지막 부분에서는 그 개념을 확장시킵니다. 

설교 안에서는 말씀의 실재와, 청중의 실재가 반드시 만나야 합니다. 말씀의 실재가 청중에게 다가가야 하고 그것이 그들에게 도전이 되고 그것과 씨름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면에서 저는, 저의 퓨전 설교가 강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본문의 긴 부분을 적용에 할애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것이 성도님들에게 설득력있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본문의 실재라는 것을 목회자가 충분히 이해하고, 그것을 염두에 두고 성도님들의 실재를 가지고 함께 씨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할 때에는, 사실 설교의 적용 파트를 길게 두는 것이 훨씬 난이도가 높습니다. 단순히 전반부에 충분히 본문에 대해서 해설을 하고, 그리고 이후에 적용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말씀과 성도의 실재의 두 존재를 염두에 두고 고민하게 됩니다.

그리고 퓨전 설교는 의도적으로 간단한 배경, 본문의 구조 등을 꼭 설명을 드립니다. 그리고 설교의 논리를 풀어갈 때에 그것이 단순히 설교자인 저의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라, 충분히 본문에 근거한 것임을 최대한 드러내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것은 존파이퍼 목사님이 강조하시는대로 성도가 스스로 말씀을 보는 법을 익힐 수 있도록 돕는 저의 배려이기도 합니다.

보통 금요일에 설교하기 때문에 주일 저녁 정도에는 이미 그 다음주 설교를 준비하면서 파이퍼 목사님의 강의를 듣습니다. 이번 강의는 들으면서 마음이 굉장히 무거웠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기쁨도 있습니다. 이번 본문인 사사기를 준비하면서, 본문의 실재에 대해서 참 많이 생각을 했습니다. 

사사기가 참 어려운 것이, 영적으로 추락하는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본문의 실재를 어떻게 드러내는가를 바로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여기 보세요, 이 사람들이 지금 영적으로 추락하고 있습니다!"라는 명제의 반복은, 사실상 아무것도 이야기 하지 않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 됩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영적인 추락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싶으신 것일까요? 그리고 현대와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인 우리에게, 이스라엘의 영적인 추락의 이 말씀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런 고민을 가지고 설교를 준비해 보았습니다. 

또 앞으로 기대가 됩니다. 한걸음 한걸음 다시 설교를 배우면서, 그리고 그동안 고민하고 공부했던 것들을 다시 확인하고 점검하고 수정하면서, 그렇게 좀 더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설교자로 걸어가야겠습니다. :)

존파이퍼 목사님의 설교 클리닉에 대한 분석과 적용은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 존 파이퍼의 설교 클리닉_ 5강 희열이란 무엇인가?
(What is exultation?) / 사사기 6장 1-10절 설교
https://jungjinbu.blogspot.com/2021/11/5-lecture-5-what-is-exultation-6-1-10.html

* 존 파이퍼 "설교 클리닉" 전체 글 모음 / "설교의 대가"에게 설교를 배우라
https://jungjinbu.blogspot.com/2023/03/blog-post_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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