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19일 금요일

존 파이퍼의 설교 클리닉_ 5강 희열이란 무엇인가? (What is exultation?) / 사사기 6장 1-10절 설교

 


* 이전 글
- 존 파이퍼의 설교 클리닉_ 4강 강해란 무엇인가?
(Lecture 4: What Is Expository?) / 사사기 2장 11-23절 설교

신학을 공부하고 책들을 읽다보면, 수 많은 갈림길을 보게 됩니다.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들이 전부가 아니며, 세상은 정말 넓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곧, 나는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됩니다. 

책을 많이 읽는 것은 매우 유익한 것입니다. 그러나 자칫, 수 많은 선택들 속에서 나를 헤매이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일에 확신을 가지기 보다는 주저하게 만들며, 어떤 것을 끈기 있게 붙들기 보다는 나의 소중한 삶의 궤적을, 수 많은 선택 중에 하나 정도로 폄하하게 될 수 있습니다. 

결국, 목회자는 자신의 길을 하나님 앞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남들이 뭐라고 하더라도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어떤 확신이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가 반드시 평생동안 가야 하는 어떤 길을 발견해야 합니다. 목회는 많이 외로운 것이지만,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내 내면의 외로움 조차 이기게 만들 수 있는 숭고한 목적과 가치를 붙들어야 합니다. 

존파이퍼 목사님의 설교 강의를 들으면서, "차라리 이 강의들을 듣지 않는 것은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잠깐 했습니다. 그의 강의가,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저를 향한 그분의 호소가, 제가 감당하기 어려울만큼 무게가 있고 또 강력했기 때문입니다.

존파이퍼 목사님을 좋게 보는 사람도 있고 또 그분의 보수적인 신학을 실랄하게 비판하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존파이퍼 자신은, 자신이 가야할 길을 확고하게 붙들었고 은퇴하신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소신에 변함이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방향이 성경으로 부터 왔음을 확신하며, 확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는 진실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의 빛나는 눈이, 저의 마음을 놀라게 하고 또 무겁게 합니다. 그의 실룩거리는 환희, 분노 그리고 갈망의 표정들이 저를 누르는 듯 합니다. 설교자로 가야 할 그 방향을 그의 강의를 통해서 찾았다는 기쁨이 저에게 있지만, 그러나 그 길은 정말 힘들어 보입니다. 특히 오늘 강의가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존파이퍼의 설교 철학은 Expository Exultation 입니다. 우연히 이미 발간된 존파이퍼 목사님의 책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지금 제가 보고 있는 모든 강의가 바로 이 책을 바탕으로 한 듯 합니다.

* 강해의 희열 (Expository Exultation: Christian Preaching as Worship)
http://duranno.com/books/view/bookdetail.asp?bcod=6761

일부러 책은 아직 보지 않았습니다. 급하게 공부하고 싶은 마음은 없기 때문입니다. MDIV 시절부터 경험했던 쏟아지는 과제와 미처 소화하지도 못했던 수 많은 신학적 내용들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에게 필요한 것은 깊이이지 속도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설교 시리즈를 듣는 처음 순간부터, Exultation을 어떻게 번역하는 것이 좋은가 오래 고민했습니다. 파이퍼 목사님의 번역서에서는 "희열"이라고 번역했네요. 한번 영영사전의 정의를 한번 살펴보았습니다.

exult

verb show or feel triumphant elation.

—derivatives exultancy noun exultant adjective exultantly adverb exultation noun exulting adjective exultingly adverb

—origin 16th century (earlier (Middle English) as exultation): from Latin exsultare, frequentative of exsilire ‘leap up’.

Catherine Soanes and Angus Stevenson, eds., Concise Oxford English Dictionar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4).

확실히 평범한 단어는 아닙니다. 저는 사실 지금까지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생소한 단어입니다. 영영 사전의 의미는, "승리의 희열감, 기쁨, 의기 양양함" 그런 것이 바로 Exultation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단순히 희열이라는 번역만으로는 파이퍼 목사님의 의도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는 듯 합니다. 

제가 이해할 때에 파이퍼 목사님의 Exultation은 "기쁨, 희열, 감격, 흥분, 두려움, 분노" 등의 "진실한 모든 감정을 포함하는 총체적인 표현"입니다. 그리고 파이퍼 목사님은 이 진실한 감정이, 바로 충실한 말씀 주해로부터 나와야 하는 것임을 오늘 강의를 통해서 강조합니다. 

강의를 시작하면서 파이퍼 목사님은, Exultation은 설교자가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고 자신이 말씀에서 끌어낸 바로 그것이 가지고 있는 그 가치에 대해서, exult over하는 것 혹은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라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서 Exultation은 성경이 가지고 있는 바로 그 가치에 대해서, 그것이 천국이든 지옥이든, 그것이 우는 것이든 혹은 기뻐하는 것이든, 목회자가 바로 그 가치를 감정적으로 구체화시키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저의 이해로는 쉽게 표현하자면, "성경이 드러내는 바로 그 가치에 대해서, 그것과 동일한 충분한 감정으로 구체화시키는 것"이 바로 Exultation입니다. 

그렇다면 왜 파이퍼 목사님은 설교가 마땅히 이렇게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설교에 희열이 있어야만 하는 이유는 첫째로, 복음을 전하는 전달자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할 때에 희열이 존재해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그리고 성령님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크리스천의 삶과 영원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 지옥과 심판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연결성은, 너무나 큰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모든 성경 본문 그 자체가 너무나 중요한 가치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본질적인 특성에 따라서, 설교가 말씀을 다루기 때문에 그것과 연결된 적절한 감정적인 구현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설교에 희열이 있어야만 하는 둘째 이유는, 말씀을 전하는 자(herald)의 특성이 바로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왕이 자신의 너무나 중요한 메시지, 즉 죄를 용서하고자 하는 왕의 갈망과 자비의 메시지를 그의 소식을 전하는 자에게 맡길 때에, 소식을 전하는자가 왕의 마음과 반대되는 태도로 전한다면 그는 신실한 사자가 아닐 것입니다.

만약 신실한 왕의 사자라면, 그의 태도와 그의 감정 가운데, 왕이 말하여서 그가 전하고자 하는 것을 잘 드러내며 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왕의 사자는, 그가 말하는 바에 대해서 지루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파이퍼 목사님은, 지루한 설교자는 거짓말하는 설교자가 틀림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진리를 말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참된 가치를 전하는 것이 전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실재는 가치를 담고 있는데, 그 가치를 말할 때에, 그것에 반대되는 태도로 말한다면 그 사람은 신실한 설교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설교에 희열이 있어야만 하는 셋째 이유는, 설교의 목적 자체가 바로 그 희열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설교의 목적은, 청중들이 영적인 눈으로 본문의 가치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흡족하게 맛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본 바로 그것을 통해서 세상 가운데 하나님을 대표하는 사람들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파이퍼 목사님의 이해는 고린도후서 3장 18절에 근거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개역개정) 3:18 And we, who with unveiled faces all reflect the Lord's glory, are being transformed into his likeness with ever-increasing glory, which comes from the Lord, who is the Spirit. (NIV)

만약 이것이 우리의 설교의 목적이라면, 설교자는 당연히 영광을 보고, 맛보고, 영광을 삶으로 드러내는 바로 그 희열을 설교 가운데 경험하고 보여주어야만 합니다.

결론적으로 파이퍼 목사님은, 설교자가 "단순히" 강해적인 메시지를 전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합니다. 그것은 마귀도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설교자들을 책망하고 도전합니다. 마귀도 아주 분명하게 성경을 인용하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섬뜩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마귀가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말씀에 희열을 경험하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이 부분에서 정말 동의를 하게 됩니다. 절대 마귀는 희열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말씀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설교자가 마귀가 하는 것 처럼 설교하기 원한다면, 분명하게 설명하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면 된다고 심각하게 경고합니다.

하지만 파이퍼 목사님은, 정 반대의 경우도 경고합니다. 그것은 설교 안에 "단순히" 희열만 존재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설교 안에, "강해에 기반하지 않은 희열"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파이퍼가 원하는 것은, 단순히 설교자가 감정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파이퍼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원하는데, "설교자"가 본문의 실제를 보고, 경험하고, 성령으로 변화되어서 "설교자 자신이 바로" 그 본문의 실재 안에서 감정들을(emotions) 경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파이퍼 목사님은, 성경의 실재가 설교자를 각성시키고, 설교자는 그 안에서 영적인 감정들과 애정을 느껴야 하는데, 그것은 진실할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음을 경고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설교자의 설교를 들으면서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금방 눈치챌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리고 파이퍼 목사님은 이 모든 과정이, 전적으로 초자연적인 것임을 우리에게 깨닫게 합니다. 말씀의 실재를 끌어내는 것은, 성령님께서 보여주시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진실한 마음으로 반응하는 것도, 성령님을 떠나서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일이, 설교를 듣는 성도가 앉아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동일하게 일어나는 것도 초자연적인 것임을 말씀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설교 자체가 바로 예배라고 말할 수 있다고 설명하며, 다음 강의를 예고합니다. 

이번 강의를 들으면서, 감격하기도 하고, 간담이 서늘하기도 하고, 울기도 했습니다. 여러번 강의를 듣고 정리한 핵심은, 파이퍼 목사님은 그 누구보다 "설교자 자신이" 본문 안에서 희열을 경험해야만 하는 것을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바로 여기에, 파이퍼 목사님의 진실한 마음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설교자 자신이 본문 안에서 희열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본문의 무한한 무게와 가치를 깨닫고, 그 안에서 감격과 고통과 회개와 눈물과 돌이킴과 반성과 기쁨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사실상 그 사람은 진짜 설교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 역시 차가운 설교에 대한 유혹을 늘 받습니다. 적당히 하고 싶은 유혹입니다. 말씀만 똑바로 논리적으로 전하면 충분하다는 그런 유혹입니다. 말씀을 깊이 묵상해서, 그것이 가진 하나님의 원래의 그 의도를 드러내어 그 안에서 그것을 맛보고 기뻐하고 감격하는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큰 인내와 기도와 희생을 요구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사기 설교를 하면서, 참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파이퍼 목사님의 강의를 듣기 전과는 전혀 다른 태도로 말씀을 대하게 됩니다. 말씀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찾는 것은 이미 과거에도 익히 알고 있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강의들을 들으면서, 그것이 또 다른 차원으로 깊어졌음을 경험합니다. 계속 저 스스로에게 질문합니다. 나는 정말 본문의 가치가 나의 설교 안에서 드러나고 있는가? 

그리고 강해를 넘어서서, 강해를 통한 희열을 경험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또한 스스로에게 질문합니다. 하나님의 진짜 마음이 나의 설교 안에 들어가 있는가? 나는 정말 하나님의 말하고자 하는 바로 그것을, 하나님의 마음을 충분히 담아서 전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나의 설교를 들으시면서, 정말 제대로 나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고 생각하실 수 있는가? 나는 하나님이 기뻐하실 때에 충분히 함께 기뻐하고, 하나님이 슬퍼하실 때에 충분히 함께 슬퍼하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의 사신으로서 그분의 영광스러운 직분을 감당하고 있는가? 그것을 끊임없이 질문하면서 설교를 준비하고 또 설교하였습니다. 


저는 항상, "주님께서 저에게 보여주신 저의 길을 신실하게 걸어가야겠다" 라는 생각을 자주합니다. 저는 제가 시대에 기억될 만한 탁월한 설교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 앞에서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하고 있는가 묻는다면, 부족하지만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저의 평생의 목표입니다.

파이퍼 목사님의 강의를 통해서 더 성장하고 싶고, 앞으로 저의 모든 설교 가운데 진정한 희열이 존재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제가 먼저 변하고, 함께 말씀의 실재의 가치와 능력을 경험한 성도님들이 변하게 되는 하나님의 기적을, 평생동안 경험하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 

존파이퍼 목사님의 설교 클리닉에 대한 분석과 적용은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 존 파이퍼의 설교 클리닉_ 6강 설교는 예배다
(Lecture 6: Preaching Is Worship) / 사사기 9장 1-6절 설교

https://jungjinbu.blogspot.com/2021/11/6-lecture-6-preaching-is-worship-9-1-6.html

* 존 파이퍼 "설교 클리닉" 전체 글 모음 / "설교의 대가"에게 설교를 배우라
https://jungjinbu.blogspot.com/2023/03/blog-post_9.html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추천 글

로고스 프로그램으로, 평신도 성경 공부하기 with 스터디 바이블 노트 Study Bible Notes (2023년 9월 업데이트)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시 119:103) 누구나 성경을 열심히 읽으라는 말은 듣습니다. 그리고 성경이 꿀보다 달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 ...

리딩 크리스천 독서 묵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