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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 4일 월요일

목회하기 가장 어려운 사람은 누구일까? 양심에 화인 맞은 자?



저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아내입니다. 그래서 대화하는 것이 즐겁습니다. 저 이상으로 교육과 미래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아내는 저에게 꼭 필요한 것들을 알려줍니다.

얼마 전에 아내가 알려준 영상이 참 좋았습니다. 한양대 대학원에서 교수로 일하시는 박상미 교수님의 영상입니다. 저는 누군가를 처음 알게 되면 그분이 어떤 공부를 하셨는지 꼭 살펴봅니다. 박상미 교수님의 공부하신 이력이 좋았습니다. 저에게 삶의 큰 의미를 준 빅터 프랭클의 로고테라피를 공부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이 분야를 공부하고 실제로 활발하게 활동하시는 분은 처음 보았습니다. 

이분은 오랫동안 교도소 재소자들을 위해서 심리 치료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분의 경험에서 나온 통찰이 저의 관심을 사로 잡았습니다. 절대로 교화가 되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다름 아니가 "사기꾼"이라는 겁니다. 

이들은 거짓이 몸에 밴 사람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들의 특징은 "여전히 자기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사기를 치면서도 자신을 깨닫지 못하고 착각에 빠져 살며, 그런 사람들끼리 서로 속이면서 어울리기를 즐긴다는 것입니다. 

영상을 보고 두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째로, 목회에서 동일한 것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적인 경험의 결과입니다. 자신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자신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놀랍게도 어떤 성도님들은 자신이 문제가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 정도면 잘하고 있고 충분히 선하고 충분히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자인 저의 관점에서는 여전히 너무나 어리고 부족한데, 자신은 충분히 성숙했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이런 분들에게는 어떤 목회적인 조언을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굉장히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 항상 생각하게 됩니다. 교회 생활을 오래하였고 그래서 신앙의 여러 언어들을 구사하지만 그러나 여전히 자신의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다른 사람을 쉽게 비난합니다. 자신은 의롭고 다른 이들은 악하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기에 힘을 씁니다. 남들을 비난하는 바로 그 모습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거의 깨닫지 못합니다.

또 한 부류의 사람은, 자신이 무엇인가 잘못된 상태라고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여전히 성격과 도덕적인 수준에서 문제가 있으며 그것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인식은 신앙 생활의 기간과는 큰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 신앙 생활을 오래한 분들 중에도 혹은 신앙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는 분들 중에도 존재합니다.

이들은 자신의 내면 안에 깊이 존재하는 죄성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기 보다는 자신을 돌아보고 바꾸는데 마음을 쓰는 사람입니다. 자연스럽게 그들의 마음은 겸손해져 있기 때문에 인격적으로 가까이 대할 때에 따뜻함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목회적으로는 바로 이런 사람에게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기 때문에 말씀이 들어갈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목회자의 조언이 그 가치를 발현합니다. 변화의 소망이 존재합니다. 사실상 이런 분들은 영적으로 탁월하게 성장하며 무한히 뻗어나가게 됩니다. 박상미 교수님의 주장을 신학적으로 바꾸자면, 성령님께서 활발히 역사하심으로 양심이 살아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더욱 힘있게 일하십니다.

이 짧은 영상을 보는데, 양심에 화인 맞은 자에 대한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물론 자신의 잘못된 상태를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을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이라고 일대일로 동일 선상에 놓을 수는 없습니다. 양심에 화인 맞았다라는 것은, 가장 최악의 상태로 들어간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것을 잊어버리고 착각 속에 빠져 살아가는 것은, 아주 위험한 상태 속으로 실제로 진입하고 있는 것임은 분명합니다. 디모데전서 4장 2절의 말씀입니다. 

디모데전서  4:2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2 Such teachings come through hypocritical liars, whose consciences have been seared as with a hot iron. (NIV)

4:2 The consciences of the false teachers have been seared (that is, desensitized and rendered ineffective) by their rebellion against the gospel. 거짓 교사들의 양심은 복음에 대한 그들의 반역으로 인해서 화인을 맞았습니다. 그것은 양심이 무감각해지고 무력해진 것입니다.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31.

4:2 The consciences of those peddling demonic doctrines have either been “branded” by Satan to show his ownership of them or “cauterized,” leaving them unfeeling and unable to distinguish between right and wrong. 악마적인 교리를 선전하는 사람들의 양심은 사탄이 그들에 대한 자신의 소유권을 보여주기 위해 낙인을 찍혔거나 혹은 화인을 맞아서 옳고 그름에 무감각해지고 그것을 구분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Edward A. Engelbrecht, The Lutheran Study Bible (St. Louis, MO: Concordia Publishing House, 2009), 2074.

이 말씀이 무서운 이유는, "인간의 그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이 바로 그 사람이 어떠한 상태인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겉으로 어떤 말을 하는 것은 사실 결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지적인 능력이 부족하여 자신의 신앙을 언어적으로 잘 표현하지 못하는 분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 사람의 내면의 문제가 바로 진짜 문제이며, 그것은 그 사람의 양심이 제대로 작동하는가 아닌가를 통해서 그 사람의 영적인 상태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저는 다른 분들을 비난하고 평가하기 보다는, 제 자신을 돌이켜봅니다. 죄는 나 자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제 자신에게 다시 한번 다짐하는 것은, 위선적인 거짓말과 위선적인 행동을 어떻게 해서 든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에게 익숙한 상황이 된다면 결국 나는 양심에 화인 맞은 자가 될 것입니다. 도저히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나의 죄성이 나를 완전히 뒤덮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목회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말씀으로 양심을 깨우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제 자신과 성도님들에게 끊임없이 경각심을 가지게 해야 합니다. 복음으로 그 사람의 양심을 깨워야 합니다. 지금 당신에게 무엇인가 잘못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고백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야 말로 목회의 중요한 본질임을 다시 한번 강하게 붙들게 되었습니다.

2021년 12월 1일 수요일

말씀 묵상 어디까지 해 봤니? - 창세기 11장 /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 그리고 아브람의 등장

 

심판의 홍수와 노아로 부터 새롭게 역사가 시작되면서 모든 것이 해결 된 것 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여전히 타락한 본성 그대로입니다. 인간은 언어가 하나였을 분 아니라, 뜻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탑을 쌓아 올려서 신의 영역에 다다르고자 합니다. Grace and Truth 스터디 바이블은, 이것은 아담과 하와라는 두 사람이 아닌 이제는 인류 전체가 여기에 가담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바벨론의 이름의 의미는 "하늘의 관문"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누구인가를 깨닫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아닌, 신이 되고 싶어하는 인간의 탐욕을 보여줍니다. 

말 그대로 거의 모든 생물들이 다 죽임을 당하는 심판 속에서도, 인간의 내면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타락을 생각할 때에, 앞으로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하여 하나님이 이루실 친히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GT 스터디 바이블이 여러 부분에서 탁월하지만, 특히 이번 장에 해설은 연신 감탄을 하게 됩니다. 인간은 탑을 쌓고 너무나 자랑스러워하지만, 그것을 실제로 너무 작은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내려와서 보셔야 했습니다. 인간의 가장 위대한 업적도, 하나님 앞에서는 너무나 초라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흩어버리십니다. 

하나님을 반역하는 인간의 하나됨은 쓸데가 없고 악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진정한 하나됨이야 말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오히려 이번 장에서, 교회의 하나됨의 신비함과 아름다움에 대해서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셈의 족보가 나타납니다. GT 스터디 바이블은 셈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이름"이라는 것을 주목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이름을 내려고 바벨탑을 세웠지만, 하나님께서 새로운 인류의 이름을 보여주시고 있다고 이해합니다. 

셈의 후손을 통해서, 드디어 그 유명한 아브람이 등장합니다. GT 스터디 바이블은 아브람의 형제인 하란의 죽음과 아브람의 아내인 사래의 불임을 통해서 죽음의 권세라는 주제를 드러낸다고 설명합니다. 목회자들은 다양한 상황의 성도님들을 만납니다. 

한번 상상해 보았습니다. 만약 아브람의 가정을 제가 심방했다면, 참으로 마음이 무거웠을 것입니다. 교회에 처음 나온 아브람을 만나고 새가족 심방을 가서 그의 가족 상황에 대해서 물어 보았습니다. 

그는 주저하며 말을 꺼냅니다. 그의 아내는 불임이며, 그의 형제는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표정에서 암담함이 보입니다. 가장 절망스러운 상황 속에서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의 가정에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비추어 우리의 삶을 바라볼 때에, 우리는 가장 어두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얼마든지 기대할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창세기 11장에서는, 창세기 12장과는 약간 다른 관점으로 아브람의 우르에서의 출발을 설명합니다. 아버지인 데라가 살아 있을 때에는, 아브람은 아버지의 리더쉽 아래에 있었을 것이며, 데라는 자신의 어떤 이유로 인하여서 우르에서 출발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유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데라 일행은 중간에 하란에서 머물게 되고, 데라는 하란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When we meditate on Genesis 11, we should be surprised by the unchangeable nature of depraved humans. They saw and heard about God's severe judgment for their sin. However, they became one as the desire to make a great building to show their fame, to build their empire, and to reach God's domain. 

God did not please their trial because it was based on their sinful nature. The purpose of the human is to obedience to God and serve him according to his will. They divided human languages and scattered them.

But we see hope in the followed story about Abram. He was the descendent of Shem. The study bible shows that the shadow of death covered his family. Abram's brother died and his wife was barren. However, God will use him and unfold his great plan of salvation ultimately through the cross of Jesus Christ soon.

2021년 11월 29일 월요일

존 파이퍼의 설교 클리닉_ 6강 설교는 예배다 (Lecture 6: Preaching Is Worship) / 사사기 9장 1-6절 설교

 


* 이전 글 
- 존 파이퍼의 설교 클리닉_ 5강 희열이란 무엇인가?
(What is exultation?) / 사사기 6장 1-10절 설교

https://jungjinbu.blogspot.com/2021/11/5-lecture-5-what-is-exultation-6-1-10.html

파이퍼 목사님은 "설교가 예배"라고 말합니다. 일단 강의를 듣기 전에 질문이 생겼습니다. 도대체 설교가 예배라는 것이 무슨 뜻이지? 혹시 설교 가운데 오직 하나님만 높아지셔야 한다는 의미인가? 그런 질문 의식을 가지고 강의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파이퍼 목사님은, "무엇이 설교가 아닌가"에서 강의를 열기 시작합니다. 설교는 단순히 기독교의 절기 예배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도록 만드는 것을 목표로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설교"가 바로 "예배"입니다. 

파이퍼 목사님은, 본격적으로 논리를 전개하기 위해서, 본인이 정의했던 설교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갑니다. 그것은 Expository Exultation 입니다. Expository는 성경의 실재를 명백하게 드러내어서 그것을 청중들에게 분명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Exultation은 그 실재가 가지고 있는 그 가치에 대하여서 적절한 감정을 경험하며 구체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러한 정의를 바탕으로, 과연 예배는 무엇이며, 이러한 파이퍼 목사님이 정의한 설교의 정의와 예배가 실제로 어떻게 겹치게 되는지를 설명합니다. 

여기서 제가 깨달은 것은, 파이퍼 목사님이 "설교는 예배이다" 라는 의미는 결국 "예배가 가지고 있는 동일한 요소를 설교가 동일하게 함께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럼 계속 갑니다. 

먼저 파이퍼 목사님은, "예배가 무엇인가"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가지신 그 가치를 "보고", "맛보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파이퍼 목사님은 이 세가지 단어를 통해서, 예배와 설교가 어떤 떨어질 수 없는 긴밀함을 가지고 있음을 설명합니다.

첫째로, 예배 가운데 본다는 것은, 영적으로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성경에 신실하게 근거한 설교를 들을 때에, 거기에는 어떤 "분명하고도 구분되는 스스로 그것이 진정한 것임을 보여주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영적인 통찰력"이 존재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무한한 아름다움과 가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보는 것에 대해서 파이퍼 목사님은 요한복음 1장 14절을 인용합니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14 The Word became flesh and made his dwelling among us. We have seen his glory, the glory of the One and Only, who came from the Father, full of grace and truth.

영광이라는 것은, 오직 "은혜와 진리로 가득찬 하나님의 아들"이 가지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직접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 영광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런 면에서 어떤 사람들은 설교를 듣고 성경을 읽지만 어떤 영광도 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는 단순히 "그리스도에 대한 사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영적으로 보는 것"에 근거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고린도후서 4장 4절과 6절을 인용합니다. 여기서 파이퍼 목사님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영어로는 "cannot see"에 포커스를 맞춥니다.

고린도후서 4: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4:4 The god of this age has blinded the minds of unbelievers, so that they cannot see the light of the gospel of the glory of Christ, who is the image of God. 4: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4:6 For God, who said, "Let light shine out of darkness," made his light shine in our hearts to give us the light of the knowledge of the glory of God in the face of Christ.

파이퍼 목사님은, 마귀가 한 사람의 마음과 감정을 동요시킬 때에,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을 볼 수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움직이시고 그의 보지 못하는 것을 열어주실 때에, 바로 그 때에 설교 중에 빛이 비취는 것인데, 예수님이 단순한 역사적 인물이나 혹은 신화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스스로를 증명하시는 신적인 영광으로써 그분을 보게 된다고 강조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가치를 보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둘째로 예배 가운데 맛본다 라는 것에 대하여, 마태복음 15장 8절에서 부터 설명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마태복음 15: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15:8 "'These people honor me with their lips, but their hearts are far from me.

이 말씀을 풀어서 설명할 때에, 우리가 주일 예배 시간에 그 자리에 참석하면서도, 찬양하면서도, 그 마음 안에서 그 진리를 맛보고 음미하는 것에서는 얼마든지 멀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씀합니다.

잘못된 예배 가운데 일어나는 이런 일은 청중들이 설교를 들을 때에도 마찬가지인데, 청중은 설교자 자신, 설교의 태도, 설교의 예화, 설교의 논리 등에 매료되거나 좋아할 수 있겠지만, 영적으로는 아무것도 맛보지 않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라는 것은, 단순히 청중이 노래하거나, 기도하거나, 손을 들거나, 무릎 꿇거나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영적인 실체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보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세번째로 예배는 표현이다 라는 것은, 우리는 예배로 모여서 찬양하고, 서거나 무릎 꿇음으로써, 그리고 손을 들고, 그리고 성경을 읽음으로써, 죄를 회개함으로써, 혹은 눈물을 흘리면서, 혹은 경외감 속에서 침묵으로 표현을 한다고 설명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방금 이야기한 두가지, 다시 말해서 영적으로 보는 것, 그리고 영적인 것을 맛보는 것이 이루어질 때에, 그제서야 우리가 예배 중에 표현하는 모든 것들이 놀랍고 또 달콤한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배란 이렇게 세가지로 표현할 수 있다고 파이퍼 목사님은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바로 여기에서, 설교가 어떻게 이러한 예배에 대한 이해에 상응하는지를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설교는 영적으로 보고, 맛보고, 표현하는 것들을 청중들에게 먹이며, 또한 합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설교의 강해의 영역은,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알고 보는 것을 영적으로 결합하여서 청중들에게 공급하고 먹이는 것입니다. 설교의 희열의 영역 역시,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보는 것 그리고 맛보는 것을을 결합하고 그리고 그것을 더 벅차오르게 만들어서 청중들에게 먹이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사람들은 영적으로 충만한 상태로 예배에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도움을 얻기 위해서 예배에 오는데, 영적인 실재를 보고, 맛보고 그리고 표현하기 위해서 옵니다. 

예를 들어서 예배 중에 찬양은 영적인 각성 그리고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반대로 표현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영적으로 보는 것, 음미하는 것, 그리고 표현하는 것이 바로 찬양을 통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치 이런 것 처럼, 설교도 동일하게 영적으로 보는 것, 음미하는 것, 그리고 표현하는 것을 영적으로 깨닫게 하고 일어나게 하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설교는 예배 이후에 등장하는 어떤 것이 아니고, 혹은 단순히 예배의 목적도 아니고, 설교 자체가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설교는 놀라운 사건이며, 이것은 초자연적인 것이고 기적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존파이퍼 자신, 그리고 설교자가 어떻게 이런 기적을 행할 수 있는가? 어떻게 설교의 기적을 행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파이퍼 목사님은 이것을 다음 강의 때에 다루겠다고 말합니다.

이번 강의를 들으면서, 다소 복잡한 이야기였다고 느꼈습니다. 특별히 예배의 세번째 요소인 "표현"이라는 측면과, 좋은 설교의 연결성은 거의 드러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매우 선명한 호소였다고 생각했습니다. 파이퍼 목사님이 강조하고 싶은 핵심은, "설교는 결국에는 예배가 가지고 있는 특징과 목적을 동일하게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 맛보고, 표현하는 것인데, 설교가 바로 그런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본인은 설교가 바로 예배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강의를 들으면서, 예배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가장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배의 핵심이,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영적으로 보고, 그것을 맛보고, 그것을 표현한다라는 이 정의는 매우 탁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칼빈에서 예배학 수업을 들으면서 예배학에 대한 전문적인 아티클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정말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더군요. 학적인 예배학은 어쩌면 저처럼 평범한 사람들과 많이 멀어져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배의 형태, 예배의 순서, 예배의 중요성 등에 대해서는 많이 이야기하지만, 정작 예배가 정말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가? 예배 가운데 우리의 영혼 속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해서는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선명하게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번 파이퍼 목사님의 강의를 통해서, 예배란 무엇인가? 그리고 왜 설교를 예배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가에 대하여 정말 탁월한 정의와 그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이번 강의는, 정말 설교는 무엇인가를 보여준 탁월한 강의였습니다. 특별히 예배 속에서 존재하는 설교라는 측면에서, 저는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파이퍼 목사님의 말씀처럼 본문의 실재를 보고, 맛보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설교에서 이것을 잃어버리면 다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아쉬운 것은, 보통 설교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 얼마나 매력적인 예화를 사용했는가? 혹은 얼마나 논리 구조가 탁월한가? 혹은 얼마나 충실하게 본문을 주해했는가? 등이 더 중요한 주제처럼 다뤄질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이번 강의가 설교자로서는 크게 마음에 부담이 되었습니다. 저는 파이퍼 목사님의 강의가 이렇게 이해되었습니다. "설교자가 그리스도의 영광, 말씀의 실재를 보고, 맛보고, 표현할 수 없다면, 당연히 예배는 실패입니다!"

보통 공예배의 시간이 한시간 정도입니다. 그 중에 설교는 삼십분 정도를 차지합니다. 만약 설교자가, 자신의 설교 가운데 그리스도의 영광을 실제로 보고, 영적으로 충분히 맛보고, 그리고 그것을 표현할 수 없다면, 도대체 우리는 예배의 성공을 어디에서 찾아야할까요? 그리고 설교자가 그것을 본 적도 누린 적도 표현한 적도 없는데, 과연 성도들에게 예배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누군가를 향한 비난이 아니라, 제 자신을 향한 무거운 도전이자 질문입니다. 

이 강의를 듣고 설교를 준비하고 실제로 설교하는데 얼마나 마음이 무거웠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정말 할 수 있는 한 혼신의 힘을 다해서 설교하였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며 그것을 담아서, 그리고 제가 영적으로 보고 맛보고 표현하고자 했던 그 내용을 담아서 설교했습니다.


설교 단을 내려오는데 마음이 참 무거웠습니다. 왜냐하면 설교 본문 자체가 너무나 무거운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뉴스에서 이 본문과 유사한 내용이 나왔다면 아마도 저는 채널을 돌렸을 것입니다. 

인간의 야망과 광인과 같은 집단 살인, 그리고 그러한 일이 일어난 세겜이라는 지역의 과거의 영광을 보면서, 인간의 타락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그리고 우리의 영적인 나태함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보여주는 지를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새벽 설교 후에 한 성도님으로 부터 카톡이 왔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는 카톡이었습니다. 영적으로 교만하여져서 자신이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제가 설교하는 날이라 설교를 들었다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악한 모습을 깨닫게 하셨다는 카톡이었습니다. 자신이 영적으로 정신 똑바로 차리고 신앙 생활 하라고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해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마음에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님이 이야기한 바로 그 부분이, 파이퍼 목사님이 설교를 통해서 달성해야만 한다고 말했던 바로 그 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통해서 성도는 영적인 실재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파이퍼 목사님의 진심의 호소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일을 저의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셨음을 알게하셨습니다.

앞으로도 바로 이런 일이 저의 설교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설교자를 포함한 모든 회중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로 그 예배를 드리고, 그 예배의 속성을 그대로 가진 성경적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설교를 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저의 소원입니다. 

존파이퍼 목사님의 설교 클리닉에 대한 분석과 적용은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 존 파이퍼의 설교 클릭닉_7강 기적을 행하기
(Acting the Miracle) / 사사기 16장 15-31절 설교

https://jungjinbu.blogspot.com/2021/12/7-lecture-7-acting-miracle.html

* 존 파이퍼 "설교 클리닉" 전체 글 모음 / "설교의 대가"에게 설교를 배우라
https://jungjinbu.blogspot.com/2023/03/blog-post_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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