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성숙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성숙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26년 5월 8일 금요일

목회의 은혜를 나누며 (35) - 저의 책 '세계관을 변화시키는 크리스천 북클럽'이 출간되었습니다.


* 세계관을 변화시키는 크리스천 북클럽 (정진부 저 / 알라딘 링크)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 있는 것이 참 좋았습니다. 교회는 저의 집이고 놀이터이고, 또 학교였습니다. 주일뿐만 아니라 주중에도 예배가 늘 있었고, 어머니와 함께 장년 예배까지 드리며 신앙을 배웠습니다. 제가 가진 신학과 신앙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태도는 교회로부터 배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자라면서 아쉬웠던 것은, 체계적인 양육이 부족했다는 것입니다. 많이 배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음에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단순히 성경의 정보를 외우는 암기식 교육이 아니라, 성경을 깊이 이해하고 저의 삶에 풍성하게 녹여내고자 하는 갈망이 제 마음 안에 늘 있었습니다. 

성도의 양육과 성장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유학을 시작했습니다. 청년 시절에 접한 크리스천 북클럽의 장점을 구체화시키고 학문적으로 체계를 잡는 긴 여행이었습니다. 공부하는 동안 끊임없이 북클럽을 목회에 적용했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제가 갈망하던 성도님들의 성장과 행복을 많은 순간 발견하였습니다. 

지금 볼티모어교회에서 섬기는 모든 것은, 그간의 저의 고민과 목회적 여정을 담은 결과입니다. 볼티모어교회는 크리스천 북클럽을 기반으로 양육이 이루어지는 교회입니다. 가치 있는 신앙 서적을 함께 나누는 은샘북클럽이 있고, 모든 성도님들이 부담 없이 참여할 수 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이가 있는 북클럽 기반의 구역 모임이 있습니다. 

볼티모어교회에 부임한 이후에, 바로 리더 양육을 시작했습니다. 교회의 부흥과 성장은 담임목사 혼자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님들의 영적 성장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감사한 것은, 모든 구역 리더분들께서 최선을 다해서 자신의 역할을 감당해오셨고 교회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 힘을 써 주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면에서 저희 교회 리더분들이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크리스천 북클럽은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깊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참여자의 역할, 인도자의 역할, 나눔과 피드백 등은 풍성한 신학적 그리고 실제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목회 현장에서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는 없기에, 최소한의 것을 최선을 다해 설명하고 지금까지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3년 동안의 준비 과정을 거쳐 저의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하게 인도하셨고, 이레서원이라는 좋은 출판사의 도움과 격려가 있었습니다. 책 준비만 3년이 걸렸지만, 실제로는 저의 스무살 북클럽이 시작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26년의 여정을 담은 책입니다. 

볼티모어교회 담임목사로서 사랑하는 성도님들과 이 책을 나눌 수 있어서 참으로 감사한 마음입니다. 도서실을 통해서 가능하신 대로 구입하시고 꼭 정독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제 마음에 담아 두었던 모든 것들을 읽어 보실 수 있습니다. 볼티모어교회가 나아가는 핵심적인 방향을 함께 공유하시고 동참하실 수 있습니다. 저와 믿음의 길을 동행하시는 사랑하는 성도님들께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진실한 발걸음을 함께 걸어가기를 원합니다. 

Since childhood, I loved being in the church. It was my home, playground, and school. Through worship and the life of the church, I learned the faith and theology that have shaped who I am today. 

At the same time, I longed for deeper and more systematic spiritual formation—not just memorizing biblical knowledge, but understanding Scripture deeply and applying it to life. 

This desire led me to study abroad and to further develop the idea of Christian book clubs that I first encountered in my youth. Throughout my studies, I continually applied this ministry in the church and witnessed many moments of spiritual growth and joy among believers. 

What we are doing now at Baltimore Church is the fruit of that journey. Our church is built on discipleship through Christian book clubs, including the Eunsaem Book Club and book-club-based small groups where members can grow deeply together. 

When I first came to Baltimore Church, I focused on leadership training because I believe true church growth does not come from the pastor alone, but through the spiritual growth of all members. I am deeply thankful for our leaders who have faithfully served and helped build up the church. 

Christian book clubs are not difficult, yet they carry great depth. Through participation, discussion, and feedback, believers experience meaningful theological and practical growth. 

After three years of preparation, my book has now been published with the encouragement of Ire Seowon . Though the writing process took three years, it reflects a 26-year journey that began when I first started a book club at the age of twenty. 

As the senior pastor of Baltimore Church, I am grateful to share this book with our church family. I hope many of you will read it carefully, as it contains the vision and direction that shape our ministry together. 

Thank you for walking this journey of faith with me. I pray that we will continue to walk forward together with sincerity before God.

- 국민일보 기사
* 배움 넘치는데 삶은 그대로? 북클럽으로 깨워라
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1779943912&code=23111312

- 크리스찬저널 기사
* “크리스천 북클럽, 성도의 세계관을 변화시키는 가장 확실한 통로”
https://www.kcjlogos.org/news/articleView.html?idxno=23717

* <세계관을 변화시키는 크리스천 북클럽> 출간 이야기
https://jungjinbu.blogspot.com/2026/05/blog-post.html

* 볼티모어 교회 칼럼, 목회의 은혜를 나누며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5/02/blog-post.html


2024년 7월 14일 일요일

내 영혼에, 상쾌한 빛이 들어오다 - 순전한 기독교의 짧은 부분들에 대한 작은 생각들

 


저는 어렸을 때 부터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었습니다. '도대체 훌륭한 사람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물론 훌륭한 사람을 보면서 그에게 찬사를 보내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훌륭한 사람이 만들어지는 그 방법을 알 수 있다면, 저도 꼭 그렇게 되고 싶었습니다 

신학을 공부하고 철이 들면서 그리고 다양한 책을 읽으면서 깨달은 것은, 결국 훌륭함은 모방에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즉, 탁월함을 모방하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온전히 소화하는 것이, 훌륭함에 대한 첩경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팀캘러 목사님도 좋아합니다. 팀캘러 목사님은 '21세기의 C. S. 루이스'라고 불리웠습니다. 루이스를 읽고 팀캘러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제가 깜짝 놀란 것은, 그분의 설교 곳곳에 결정적인 부분에서 루이스의 논리와 그의 생각과 글들이 묻어나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팀캘러 목사님의 훌륭함은, 루이스로 부터 만들어진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책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아마도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에 대한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 저에게 왜 루이스를 좋아하느냐고 물어보신다면, '단 두문장만 읽어도 저의 영혼에 상쾌한 빛이 비추이기 때문이다'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세상에는 책이 많이 있습니다. 저 역시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아쉽게도 그 중에 대부분은 지루했습니다. 무엇인가 힘주어 이야기하는 것 같았지만, 정작 마치 미로를 헤매이는 것처럼 저를 제대로 인도해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저에게 루이스는, 아주 짧은 몇 구절만 읽어도 저의 마음을 새롭게 만드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의 책을 읽으면, 심지어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루이스는 다정한 사람입니다. 그의 글과 그의 신앙은 마치 저에게 상쾌한 가을 바람과 같아서, 저의 영혼을 전혀 다른 그 어떤 곳으로 이끌어 갑니다. 그와 함께 거닐다 보니, 하나님의 아름다우심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루이스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고전학과 영문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중세와 르네상스 문학 교수로 섬겼습니다. 그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15세 때에 무신론자가 됩니다. 그러나 신앙 서적과 친구의 영향으로 다시 서서히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31세가 되어, 지적으로 정직한 자세를 가진다면 하나님을 믿을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얻고 진정으로 회심하게 됩니다. 

순전한 기독교는, 제2차 세계대전 시절 평신도와 무신론자들을 위한 라디오 방송에서 그가 발표했던 것을 책으로 엮어낸 것입니다. 루이스 평신도로서 교파를 초월해서 기독교인들이 공통적으로 믿고 있는 것을 다루고, 그러한 믿음의 내용들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충실하게 설명하였습니다.

저는 이십대 초반에 순전한 기독교를 처음 읽었습니다. 물론 그때도 참 좋았지만 역시나 루이스의 글을 충분히 이해하기에는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루이스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내면 안에 새로운 깊이를 만들어 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담임 목사님의 안식년 동안 잠시 주일 강단을 섬기면서, 저의 부족한 부분을 절감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앞으로 저의 삶을 다져나갈 방법을 고민하던 중에, 루이스를 아주 천천히 읽기로 결심했습니다. 아쉽게도 이 시대는 속도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저는 반대로 접근하고 싶었습니다. 아주 천천히 다시 새롭게, 기독교 신앙의 탁월한 내용을 저의 영혼 안에 새겨 넣고 싶었습니다.  

순전한 기독교는 전체적으로 네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째로는 우리가 살아가는 우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옳고 그름이라는 선과 악이라는 개념을 반드시 전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그렇게 발견한 절대 선 앞에서 자신에 대해서 절망하게 될 때에야 결국 하나님을 발견하고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로는, 그렇게 하나님을 믿게 된 이들이 어떻게 신앙 생활을 하는가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삼위 일체 하나님의 개념을 바탕으로 참된 성도됨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면서, 새로운 생명을 얻은 새 사람으로 적극적으로 살아갈 것을 권면합니다. 

저의 짧은 글 쓰기로는 이 책의 깊이와 감동을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다만 가장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익숙한 것을 새롭게 보는 것이야 말로 신앙 생활의 원동력을 가져다 준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모태신앙으로 자라서 수도 없이 복음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복음은 어떤 의미에서 매우 단순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단순한 진리를 아는 것과, 이것의 깊이와 충격을 온전히 이해하고 내 삶에 근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저는 그런면에서, 루이스 그리고 순전한 기독교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루이스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사실 단순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가치를 온전히 드러내며 동시에 너무나 신선하고 감동적으로 전해주기 때문에 그가 탁월한 신앙인으로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루이스가 순전한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자연법에 대한 것은, 기독교를 이해하고 변증하는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겉으로는 절대적인 진리 혹은 법칙을 부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사람들이 행동해야 한다는 본능을 내면에 가지고 있다고 설명하고 증명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명확하게 그것을 어기고 있임을 지적하며 인류 전체를 몰아갑니다. 

물론 위의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 평범하게는 이렇게 접근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며, 죄인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정도로 논리를 풀어가도 괜찮을 것입니다. 그러나 루이스는, 인간에 대한 철저한 관찰에 기반하여 우주적인 관점으로 인간의 합리성을 존중하면서도,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중요한 이유들에 대해서 설득적으로 논증하고 있고, 바로 이런 부분이 루이스의 탁월함입니다.

최근에 순전한 기독교 천천히 읽기를 반년 만에 끝냈습니다. 다시 책을 열어보니, 책의 거의 대부분이 줄과 메모들로 가득합니다. 이 모든 것을 한편의 글로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만 제가 설교에 인용했던 몇가지 구절 정도, 그리고 저에게 영감을 주었던 몇 부분들을 인용하고 저의 짧은 생각들을 나누고 싶습니다. 

루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용서를 약속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회개할 일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 자신에게 용서가 필요하다고 생각지 않는 사람에게는 기독교가 아무 의미도 가질 수 없습니다.' 

저는 이 부분이야 말로,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잘 짚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저를 포함한 우리는, 나의 죄성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없이 살아가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주 거칠게 말하자면, 내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깨닫는 것이 바로 신앙의 성숙의 척도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가치와 소중함은, 그저 내가 처음에 기독교의 문 안에 발을 들여 놓을 때만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의 평생을 살아가면서 그것의 깊이를 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첫 순간에 회개를 하고, 그리고 평생 회개를 합니다. 우리는 회개할 수록 용서를 받고, 회개하면서 그리스도를 알아갑니다. 그래서 저는 회개와 기독교를 완전히 결합하여 성경적으로 드러내는 루이스가 참 좋았습니다. 

또 루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탄이 우리 옛 조상들의 머리속에 불어넣어 준 생각은 그들도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 마치 스스로 자신을 창조하기라도 한 양 자존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다, 하나님 밖에서 하나님과 상관 없이 스스로 행복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죄의 근본이 무엇인가를 잘 드러낸 부분입니다. 죄의 본질은 내가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내가 어떤 도덕적인 잘못을 하는 것을 넘어서서, 혹은 내가 나 중심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넘어서서, 나 자신이 '신'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목적, 방향, 내용 등을 철저하게 내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저는 성도로 또 목회자로서, 이렇게 무섭고 또 무거운 죄에 대한 개념을 항상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 

왜 이것이 그렇게 중요할까요? 왜냐하면 이러한 루이스의 죄에 대한 설명 혹은 논리는 우리의 성화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성화는 단순히 예배를 열심히 드리거나, 혹은 성경을 열심히 읽는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대적하는 맥락에서의 나는 없고 오직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그것은 나의 삶의 전 존재를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맞추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창조주이시며 왕이신 그 지위를 온전히 회복하시고, 나는 호흡 한번 조차 오직 그분께 모든 것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우리의 구원에 '나'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존재하시며, 우리는 그분의 극진한 사랑을 받은 자들로 그리고 오직 그분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생의 목적을 선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에, 저는 루이스를 좋아합니다.

루이스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적들의 점령 지역, 이것이 현재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기독교는 합법적인 왕이 이를테면 변장을 한 채 어떻게 이 지역에 상륙했는가에 관한 이야기로서, 우리 또한 이 거대한 파괴 작전에 참여할 것을 촉구합니다. 교회에 가면 동지들의 비밀 무전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적들이 우리를 교회에 못 나가게 하려고 그토록 노심초사하는 것입니다. 적은 이 일을 위해 우리의 자만과 게으름과 지적 허영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팬데믹 이후에 교회의 정체성에 대해서 많은 혼란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마치 교회가 사교 모임인 것처럼 생각하는 분들도 종종 계셨습니다. 현대화 되어 버린 교회에 출석하다 보면, 교회의 정체성이 매우 희미해 지는 듯 합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매일 교회에 나오는 목회자인데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루이스의 글을 통해서, 교회의 본질에 대한 상상력이 가득한 그리고 가슴 벅찬 묘사를 만납니다. 우리는 일종의 비밀 결사대와 같습니다. 우리는 변장한 왕을 모시고 있고 그분은 반드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우리는 비밀 무전을 통해서 우리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우리의 미래를 가늠하면서 그것을 가슴에 품고 살아갑니다. 

저는 교회에 대한 평범한 설명을 싫어합니다. 그저 무감각하게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 마음이 많이 상합니다. 그러나 루이스의 설명 속에서 새로운 기쁨을 발견합니다. 성도에게 주어진 교회 생활 이라는 것이 이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는 진실한 신앙의 동료이며 저의 친구입니다. 그를 통해 교회에 대한 참된 영적인 감각과 기쁨이 제 안에 살아나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저는 루이스를 좋아합니다.

루이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사람이 기도하고 있는 대상-그가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입니다. 또한 그가 기도하도록 밀어주고 있는 주체-원동력-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이 사람이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길 내지는 다리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한 평범한 사람이 기도하고 있는 평범한 작은 침실 안에서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삼중적인 생명 전체가 실제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지금 이 사람은 좀더 높은 종류의 생명-제 표현대로라면 조에, 또는 영적인 생명-속으로 들어 올려지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 안에 이끌려 들어가고 있는 동시에, 여전히 자기 자신으로 남아 있습니다."

저는 기도에 대한 루이스의 이 설명을 읽을 때 마다, 마음에 전율합니다. 물론 기도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 라는 아주 단순한 표현도 진리입니다. 그러나, 루이스는 다릅니다. 저는 다른 그 어떤 기도에 대한 설명보다 루이스의 설명을 제일 좋아합니다. 루이스는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기도의 목표, 기도의 원동력, 그리고 기도의 길이라고 설명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안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이보다 더 탁월하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기도는 너무나 아름다운 것입니다. 어쩌면 세상이 거들떠 보지도 않는 연약한 우리들이, 우리의 거칠고 아픈 손을 모아 주님 앞에 기도할 때에, 그것이 영적으로 얼마나 충격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고 또 얼마나 아름답게 영원에 맞닿아 있는 것인지를 그는 보여줍니다. 마치 보이지 않는 하늘을 활짝 열어 젖히고 그 비밀을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저는 루이스를 읽을 때 마다 이런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저는 루이스를 좋아합니다.

루이스는 그의 책의 마지막에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을 포기하십시오. 그러면 진정한 자아를 발견할 것입니다. 자기 새명을 버리십시오. 그러면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찾으면 결국 미움과 외로움과 절망과 분노와 파멸과 쇠퇴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찾으면 그를 만날 것이며, 그와 함께 모든 것을 얻을 것입니다."

루이스는 불신자들에게, 그리고 어쩌면 신앙의 생명력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저 신앙의 논리나 멋들어진 말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자체가 지금 그리고 궁극적으로 나아가야 하는 우리의 실재적인 운명입니다. 그래서 저는 루이스의 책을 그저 논리로 읽지 않습니다. 이 모든 내용이 저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저는 한없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루이스가 이야기한 것처럼 단 하나도 남기지 않고 저의 모든 것을 포기하기를,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찾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저의 모든 것이 되는 그 궁극적인 상태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렇게 저를 결단하게 만들고 바로 잡아 주기 때문에 저는 루이스를 참 좋아합니다. 

글을 맺어야겠습니다. 지금 저의 기분은, 마치 보석이 가득 담긴 보물 상자를 품에 안고서는, 작은 손에 그 보물 중에 몇개를 잡고서 꺼내 자랑하고 있는 어린아이 같습니다. 너무 반짝이고 행복한데, 이 보물을 다 설명할 재주가 저에게 없어서 한 없이 아쉬울 뿐입니다. 

루이스를 읽은 저의 벅찬 마음을 온전히 드러낼 수 없어서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짧은 글을 통해서 루이스를 잠시 접하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만족합니다. 

언젠가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의 이 글을 읽으신 누군가와, 선선하고 아름다운 날에 따뜻한 커피 한잔을 마시며 루이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마음이 하나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이 저의 인생에 가장 큰 기쁨일 것입니다.

2024년 7월 7일 일요일

큐티를 지도하면서, '큐티 북클럽'의 목회를 꿈꾸다

 

* 목회자의 기쁨

목회자로서의 저의 기쁨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도의 행복과 성장'을 보는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것이 전부일 것입니다. 

한 성도님과 통화를 나누는데 마음이 저렸습니다. 말씀에 대한 그분의 간절함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작년 한해 여러 어려움이 있었던 분이라 그저 안부 연락을 드렸던 것인데, 대화의 방향이 다르게 흘러갔습니다. 

나름대로 성경 통독도 열심히 하고 있고, 또 구글로 궁금한 것을 찾으면서 성경을 읽어보지만 여전히 성경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솔직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을 잘 알고 싶은데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 지 방향을 잡고 싶은데 여전히 해매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최근의 제 설교를 들으시고서는 잘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씀하시면서, 저의 설교만 유독 잘 이해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도 궁금해하셨습니다. 


* 손을 내민다는 것

사실 그냥 지나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좌충우돌하다 보면 좋은 날이 올 거라고 막연하게 이야기 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아팠습니다. 지도해주는 사람 없이 해매던 저의 어린 시절이 생각이 났기 때문입니다. 만약 조금만 더 도와드린다면, 말씀 안에서 충만한 기쁨을 누리는 날이 훨씬 더 빨리 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집사님이 저의 설교를 잘 이해할 수 있었던 이유는, 숨겨진 저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단순히 설교자 만이 아니라, 모든 성도에게 충분히 적용할 만한 말씀 묵상 방법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기본적으로 말씀을 관찰하는 것 자체가 정말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나의 부족한 생각을 뛰어 넘는 말씀 해석에 대한 가이드가 필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신뢰할 만한 스터디 바이블 한권 정도는 반드시 꾸준하게 읽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본문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작은 관점과, 성경 전체를 바라보는 큰 관점이 동시에 필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나를 안내할 필수적인 성경 사전 하나 정도가 있어야 하며, 더 나아가서 나의 성경 해석의 관점을 견고하게 만들어줄 신앙 서적을 읽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 도와드리는 방법

저의 이야기를 경청하신 이후에 집사님께서는 혹시 자신을 도와 줄 수 있는지 물어보셨습니다. 당연히 가능하지만 조건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실제적으로 세가지를 부탁드렸습니다. 첫째, 제가 안내해드리는 방법인 '큐티 쉽게 하는 법'을 잘 읽어보시고, 거기에 따라서 말씀을 묵상해 보시기를 부탁드렸습니다. 

* 이것이, '큐티 쉽게 하는 법'입니다 WITH 갓피플성경앱
https://qtchangesme.blogspot.com/2024/02/blog-post_23.html

둘째, 에브리데이 스터디 바이블을 구입하시기를 부탁드렸습니다. 전자책으로도 거의 80불의 비용이 들지만, 꼭 구입하셔야 한다고 설득했습니다. 그리고 절대로 내용을 먼저 읽어보지 말고, 본인이 먼저 말씀을 충분히 묵상하신 이후에 해당하는 부분을 읽어보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셋째, 아주 작은 반복의 힘의 중요한 부분을 출력해서 드리고 읽어보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 로고스 어디까지 써봤니?
- 드디어 나온다! 해석과 적용의 든든한 동반자
Life Application Study Bible! (=에브리데이 스터디 바이블)

https://jungjinbu.blogspot.com/2023/09/life-application-study-bible.html

그리고 만약에 이 세가지 숙제를 통해서 저와 대화를 할 준비가 되신다면, 그때에 제가 잠깐이라도 뵙고 말씀 묵상에 대해서 가르쳐드리고 도와드리겠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 모임을 위해 준비하다 from 마태복음 1장 18-25절

집사님을 지도하기 위해서는 저 역시 모임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저는 집사님과 함께 할 이 시간을, 일종의 북클럽처럼 이해했습니다. 큐티를 지도한다고 해서, 굳이 제가 모든 것을 다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북클럽의 모든 모임이 그러했던 것처럼, 오히려 집사님께서 준비해오시는 것을 바탕으로 그분에게 꼭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먼저 저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해 준비 했습니다. 북클럽 인도 때와 마찬가지로, 비록 제가 사용하지 않을 내용들과 자료들이라 할지라도 충분히 넓게 모임을 준비했습니다. 제가 넓게 깊게 준비할 수록 모임의 완성도가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먼저 집사님께 부탁드린 것과 동일하게, 저 역시 갓피플 성경 앱으로 충실히 묵상하고 관찰하고, 또 중요한 질문들과 핵심적인 내용들을 간단하게 메모하였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올리브트리 바이블 프로그램 안에서 구입한 Life Application Study Bible 3판 (에브리데이 스터디 바이블의 원래 영어 버전)을 꼼꼼하게 읽어보고 제가 놓친 부분들, 그리고 집사님과 나눌 만한 부분들을 중요도에 따라서 하이라이트를 치고 생각을 정리하면서 메모로 넣어서 저장했습니다. 하이라이트는 노랑은 일반, 빨강은 중요, 그리고 보라는 적용이라는 의미입니다.





* 탁월한 준비로 저를 놀라게 하신 집사님 from 마태복음 1장 18-25절

물론 집사님께서 말씀을 배우고 싶다고 선뜻 말씀하셨지만, 저는 약간 염려가 되었습니다. 말씀을 배우고 싶다고 단순히 말하는 것과, 그 모든 과정 속에 실제로 들어가고 실천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너무 부담을 드리면 중도에 그만둘 수도 있기 때문에, 부담없이 최소한으로 준비하고 오시라고 여러번 부탁을 드렸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세가지를 부탁을 드렸지만, 솔직히 그 중에서 한가지만 해 오셔도 좋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첫 만남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집사님께서 아래처럼 준비를 해오셨습니다 (참고로 빨간색 글씨는 제가 이야기를 나누면서 추가로 필요한 부분들을 적은 것입니다).




준비오신 내용을 보고 너무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준비해오신 결과물이 너무 탁월했기 때문입니다. 아직 서리집사님이시지만, 그리고 신앙의 여러 약점들이 있지만 그 모든 불리한 조건을 뛰어 넘어서 최선을 다해서 충실하게 준비해오셨습니다.

핵심은 제가 드린 가이드라인을 잘 따랐다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목회자에게 조언을 구하지만, 그러나 그 조언을 따라서 실천하는 분은 참으로 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 집사님께서는 저의 조언을 경청하셨고 그것을 따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추가해서 아주 창조적으로 준비해오셨다는 것입니다. 모임 전에 계속 강조해 드렸습니다. 말씀 묵상의 핵심은 관찰이고 또한 질문하는 것임을 안내해 드렸습니다. 제가 관찰과 질문을 강조하는 이유는, 결국 이 두가지를 통해서 말씀에 깊이 다가갈 수 있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집사님께서는 주중에 여러번 집중적으로 말씀을 읽으면서 중요한 질문들을 준비하셨습니다. 나름대로 말씀을 분석하고 글을 쓰고 생각을 정리하면서 본인의 궁금증을 스스로 명확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질문에 대해서 스스로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자세히 조사까지 해오셨습니다. 

또 하나 놀라웠던 것은, 제가 드린 '아주 작은 반복의 힘'의 내용을 잘 읽고 이해하고 적용해 보셨다는 것입니다. 읽으면서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과 적용의 내용을 준비해오셨습니다. 지금의 작은 첫 모임의 의미를 스스로 파악하실 수 있도록 숙제를 내 드린 것인데, 정확하게 저의 의도를 이해하시고 책을 읽고 준비를 해오셨습니다.


* 실제 모임

먼저 간단히 안부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한주 동안 별일 없으셨는지 여쭤 보았습니다. 저는 항상 안부를 물어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서 상대방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고, 또 실제 모임에서 제가 어떤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지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충분히 인사를 나눈 이후에, 일단 준비해 오신 내용을 저에게 발표해 주시기를 부탁드렸습니다. 십오분에서 이십분 정도 본인이 준비하신 내용을 발표하셨고 저는 경청했습니다. 내용이 굉장히 논리 정연하고 진지했습니다. 본인은 학창 시절에 공부를 잘 못하셨다고 하셨는데 전혀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충분히 경청하면서 집사님이 어떤 부분이 강점이고 또 약점인지 저는 속으로 분석하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미리 준비한 내용과의 접점을 가늠하면서, 어떤 식으로 이후에 추가 설명드리면 좋을 지 고민하면서 또 주님께 속으로 여러차례 기도하였습니다.

다 듣고나니 마음이 벅찼습니다. 먼저 정말 잘하셨다고 격려해드렸습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준비해오신 질문들을 보니, 제가 추천해 드렸던 에브리데이 스터디 바이블과 연관된 부분들이 많았습니다. 스터디 바이블을 모두 읽지는 못하셨기 때문에 그 질문들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미리 준비한 내용을 짚어가면서, 집사님이 궁금하셨던 부분들을 설명해 드렸습니다. 

그리고 대화 중에 제가 발견한 집사님의 약점들에 대해서 짚어 드렸습니다. 물론 일방적인 강의는 아니었습니다. 제가 제대로 들었는지 질문도 드리면서, 그리고 중간 중간 저의 코멘트에 대한 집사님의 생각을 다시 들으면서 이야기를 진행해 나갔습니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믿음과 행위의 연관성, 그리고 그리스도의 필연성 혹은 중심성에 대해서 설명해 드렸습니다. 집사님이 가지신 신앙의 사고 속에서 약점을 짚어 드리고 그런 부분을 어떻게 강화하면 좋을지에 대해서 서로의 생각을 나누었습니다. 


* 하나님의 일하심에는 한계가 없다 

거의 두시간 동안의 발표, 경청, 그리고 깊은 대화를 가졌습니다. 참 좋았습니다. 말씀에 대한 진지함이 좋았고, 그 누구의 강요가 아닌 스스로 간절한 마음으로 준비해오신 그 내용이 좋았습니다. 저의 지도에 따라서 충실하게 준비하신 것이 좋았고, 스스로의 창조성을 십분 발휘해서 일상적인 큐티의 한계를 뛰어 넘은 것이 정말 좋았습니다. 

일반적으로 큐티는 관찰, 해석, 적용의 단계를 사용합니다. 혹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답을 찾아가는 형식입니다. 둘 다 좋은 틀이지만 저는 그 이상의 깊이가 항상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큐티 교제와 함께 제공되는 해설들이 유익하지만, 그것보다는 더 좋은 가이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번 경험이 좋았습니다. 일반적인 큐티의 형식이지만 좀 더 깊이 본문 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철저한 관찰과 질문하는 것에 더 초점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에브리데이 스터디 바이블이라는 이미 세계적으로 공인된 스터디 바이블을 읽어보고 적극적으로 활용하도록 권면함으로써, 단순히 해설을 읽는 수준이 아니라 뭔가 더 창조적인 본인만의 작품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 큐티를 넘어서는, '큐티 북클럽'을 꿈꾸며

단지 첫 모임을 했을 뿐인데, 제 자신에게 큰 유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미래 목회에 대한 새로운 구상이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큐티 북클럽'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나눈다는 점에서는, 얼마든지 이것을 큐티 모임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좀 더 집중적이 관찰과 질문들, 그리고 스터디 바이블을 활용해서 자신만의 컨텐츠를 만들고 나누고 강한 시너지를 불러 일으킨다는 점에서는, 기꺼이 이것을 북클럽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만약에 교회의 핵심 멤버들이 이런 식으로 성경을 묵상한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들이 많이 일어날까요? 서로의 창조적인 준비를 보면서 도전이 되고, 또 치열한 나눔과 질문과 대답 속에서 얼마나 탁월하고 견고한 신학적인 소양이 만들어질까요? 

그저 하나님께서 인도하여 주시기만을 원합니다. 어떻게든 성도의 성숙을 일으키기를 원하는,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저의 작은 바램과 시도들 속에서, 하나님의 일들이 풍성하게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2024년 6월 28일 금요일

20대의 나를, 드디어 떠나 보내다 / Slow Jam - Euge Groove

 


얼마전에 ChatGPT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미국에 사는 남자의 평균 수명이 어떻게 되나? 칠십 육세입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언뜻 제 생각에 팔십세는 넘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많이 낮았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상당히 압박이 되었습니다. 지나온 시간이 이렇게 빨리 지나갔는데, 앞으로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아무리 아껴도 하루가 짧아서 마음이 상합니다. 심호흡을 한번 해 봅니다. 그저 하루가 성실하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아내를 이십대 초반에 만났습니다. 그리고 오래 연애하고 결혼했습니다. 그래서 참 좋은 점은, 아내의 생각을 깊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연애하고 초반에 많이 싸웠습니다. 전혀 다른 세계에 살던 두 사람이 만났기에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함께 한 시간이 정말 길어졌기 때문에 크게 싸우거나 다툴일도 없습니다. 둘다 부드러운 마음으로 서로가 힘을 합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늘 감사한 마음입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제 마음에 풀리지 않는, 정말 어려운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거의 십년 이상을 부등켜 안고 살았던 고민입니다. 그것은 저의 마음이, 저의 생각과 정신의 상태가 여전히 이십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내를 처음 만났던 그 때입니다. 한편으로는 너무 순수하고 행복했던,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한없이 철이 없고 미숙하고 이기적이던 때입니다. 

물론 제가 사회적인 관계나 목회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저의 마음이 이십대의 시절에 머물러 있어서, 때로는 스스로 생각할 때에 지나치게 낭만적이고, 혹은 지나치게 유치하다 라는 생각을 종종했습니다. 저는 이미 어른이 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겉 모습만 어른인 것처럼 느꼈습니다. 몸은 훌쩍 컸고 그래서 더욱 성숙한 성인으로 걸어가야 하는데, 여전히 제 마음은 너무 어리고 미숙해서 스스로를 다시 과거로 끌어당기는 듯한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특별히 목회자로서 저의 역할이 더 커질 수록, 저의 내면 안에 있는 모순이 커진다고 느꼈습니다. 자신의 역할을 잘 감당하는 성도로 그리고 목회자로서, 제 마음 한쪽에는 거침없이 자라고 있는 제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과거에 사로잡혀서 마냥 어린아이처럼 구는 제 자신이 동시에 존재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큰 모순이라고 느꼈고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우연히 그 고민이 풀렸습니다. 돌이켜 보니 그 계기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셀폰 용량이 너무 작아서 영상을 정리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제 아이들의 오래된 영상을 셀폰에서 보았습니다. 저와 아이들의 짧은 대화들 그리고 작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작고 어린 두 아들들의 영상을 보는데, 너무 사랑스러웠습니다. 저에게 잠깐 찾아온 천사를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해, 부리나케 영상으로 남긴 것 같은 착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귀한 아이들이 제 인생에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제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제가 아이들에게 잘못했다는 생각이 너무 크게 들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최선은 다했습니다. 험한 미국에서 단지 우리 네 식구로 살아가야 하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사랑하는 두 아들을 잘 키우기 위해서 정말 많이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 보니, 제가 많이 잘못했고 또 때로는 너무 모질게 아이들을 대했습니다. 저의 유치함으로, 저의 부족함과 이기적인 부분 때문에,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것이 너무 부끄럽고 또 슬펐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저의 생각이 아내에게 미쳤습니다. 저는 당연히 아내를 사랑합니다. 최선을 다했고 제 나름대로 노력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또 돌이켜보니 많이 부족했습니다. 제가 마땅히 해줘야 할 것들을 충분히 하지 못했고, 아내가 헌신적으로 섬기는 모든 것들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아내는 오랜 시간 저의 가장 든든한 친구이자 동반자였는데, 저는 오히려 아내의 작은 어깨에 너무 많은 짐을 짊어지게 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생각해보니, 저의 어린 자아는 피난처였습니다. 세상이 힘들고 맡겨진 짐이 무거울 때에, 저는 잠시 그곳으로 몸을 피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도망간 것입니다. 돌이켜보니, 삶이 사역이, 그리고 아빠로서의 역할이 힘들다는 핑계로 자주 도망갔습니다. 적어도 그곳에서는 아직 어린 저이기에 얼마든지 유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일 수도 있었습니다. 제 자신만 생각하면서 투정도 부릴 수 있었습니다. 

이제서야 제 자신을 정직하게 돌아보았습니다. 모든 상황이 정확하게 보였습니다. 이제는 정말, 어린 제가 사라져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기적이고 투정 부리고 나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그저 막연하게 낭만에 빠져사는 어린 저는 더 이상 숨어 있을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때가 되었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오랜 시절부터 함께 했던 이십대의 저의 어린 자아에게, 마지막 작별 이사를 고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조용히 위로해 주었습니다. '아쉽고 미안하지만 이제는 안녕이야, 잘 지내기를 바래' 다시 만날 수 없는 또 다른 제 자신을 향해, 어른이 된 저의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막상 작별을 고하니 아쉬웠습니다. 제가 현실에 지쳐서 피할 수 있는 그 위로의 공간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후련했습니다. 모든게 새로워졌습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성숙한, 그리고 더 성숙해져야만 하는 저의 자아만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이십대의 저는, 제 인생을 방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는 유치한 태도와 삶도, 막연히 숨어 버리는 비겁한 제 자신도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별것 아닌 듯 한 작은 깨달음이 제 자신을 많이 바꾸었습니다. 이제서야 진짜로 한 아내의 남편이, 그리고 두 아이의 아빠가 된 듯 합니다. 용기가 조금 생겼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보였던 최대치를 훨씬 넘어서 마음을 넓게 가져 봅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성숙한 제 자신이 되었고, 그리고 앞으로 그렇게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감사하게도 훨씬 더 부드러운 아빠가 되었습니다. 훨씬 다정한 남편이 되었습니다. 목회자로서 더 인내를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서야 제 나이에 걸 맞는 그런 마음이 된 듯 해서,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제야, 삶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쌓아갈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작은 발걸음을 내 딛어 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저의 삶을 힘 있게 붙드시기를, 그분의 뜻 가운데 선하게 인도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2024년 6월 11일 화요일

목사님, 어떻게 이런 블로그를 하는 건가요? / 대답을 위해 나의 마음으로 깊이 들어가 변명하다

 




아끼는 목사님이 물어 보았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이런 블로그를 하는 건가요?’ 사실 가볍게 대답했습니다. ‘아, 그… 며칠에 하나씩 쓰다보니까 여기까지 왔어요.’ 솔직한 저의 고백입니다. 정말 며칠에 하나 정도씩 글을 쓰다 보니 여기까지 왔습니다. 아주 단순한 대답이었지만 스스로 제 마음 속에 들어가 보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삶의 많은 부분은 글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표면적으로는, 어떤 의미 있는 것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습니다. 처음에 CFNI에서 공부할 때에 영어로 부르는 찬양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묵상을 해보면 어떨까 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짧은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이 블로그의 시작입니다. 지금보니 The Rest of You는 문법적으로 틀렸지만, 누군가에게 작은 휴식이 되고 싶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본다면, 저의 발전을 위해서입니다. 저는 어떤 부분에서 탁월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더 깊은 저의 내면에서 저의 부족함을 항상 절실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 절실함은 아마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가진 책임에 비해서 저는 너무나 부족합니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영혼을 가다듬기 위해서입니다. 삶을 조금이라도 더 정돈되게 만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맡은 역할을 더 충실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글쓰기야 말로 제 자신을 발전시키기 위한 가장 빠른 방법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번 더 내면으로 들어가 본다면, 누군가의 유익을 위함입니다. 어느 순간 제가 쓰는 글이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힘들게 정리해 놓은 어떤 것이, 다른 사람의 삶 속에서 작은 휴식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의 목회와 신학과 사고들을 종합한 그 어떤 것들이 타인에게 유익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주제이든지 글을 쓸만한 것이 있다면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연결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서 저의 글들을 보내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 도달해 본다면, 저는 글쓰기를 통해서 저의 존재의 해방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분의 형상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글을 통해서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셨습니다. 역사 속에 일어난 수 많은 기적들과 사건들은 그 순간을 영원으로 만들어 글로써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그래서 글을 쓰면 시간을 초월하여 나의 손가락으로 감히 영원을 만지게 됩니다. 어떻게 그럴수가? 그래서 글쓰기 자체가 신의 행위임을 의미합니다. 글 쓰기는 우리의 존재가 영원하신 하나님과 만나는 자리입니다. 

어느 순간에는 마음이 너무 아파서, 제 자신을 스스로가 추스를 수 없을만큼 아파서 글을 썼습니다. 그런데 저의 내면과 정직하게 만나는 것이 저에게 큰 위로가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쓰는 행위 자체가 위로 이상의 어떤 것을 저에게 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픔을 동일한 크기의 위로로 메꿀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타인에 의해서 할퀴어진 아픔을 위로하기 위해서는, 존재론적으로 그것보다는 훨씬 큰 어떤 것이 필요했습니다. 

글을 쓸 때에 어떤 황홀함을 느낍니다. 그것이 저를 치유했고 치유하고 있습니다. 가늠하기 어려운 저의 영혼의 밑바닥 가장 깊은 곳에서 느끼는 기쁨입니다. 바로 그 부분에서 이어령 선생님께서, 죽음 조차도 자신의 글로 쓰기를 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한없이 작고 비참한 나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느끼고 경험했던 그 수준과 경지를, 어쩌면 저도 아주 조금은 경험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라는 질문에는, 왜라는 이유에 대한 대답을 먼저 하는 것이 적절할 듯 합니다. 단순히 글을 쓰라는 말로는 글쓰기의 깊이를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악인론의 저자의 말처럼, 글을 쓰면 성공한다는 것에 사실 너무 공감합니다. 그러나 그 말만으로는 글쓰기의 깊이를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글쓰기는, 내 영혼의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으로 저는 글 쓰기를 통해서 저의 자아를 초월하여 영적인 세계로 들어갑니다. 그것이 제가 경험하는 글쓰기의 신비입니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글을 쓰는 순간 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 저녁입니다. 마치 한 없이 펼쳐진  빛나는 들판에서 두 손으로 풀들을 훑으며 걸어가는 것 같습니다. 그 감각이 저를 감격하게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 감각이 저를 몰아갑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라는 것에 대답할 차례입니다. 마케팅적인 측면에서는 저의 글의 초점을 더 좁히는 것이 더 좋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저의 존재 자체를 완성해가는 측면에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저의 존재 자체가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는 것입니다. 

물론 이곳은 정보적인 글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 프로그램과 그리고 레코딩, 그리고 독서에 대한 수 많은 이야기들이 얽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하나로 모아져, 한 인간을 구성합니다. 마치 흩어졌던 작은 혈관들과 미세한 근육들이 하나로 모아지는 것 같습니다. 육체에 갇혀 있는 저의 작은 생각과 마음은 글을 통해서 세상을 향해 뻗어 갑니다. 그 과정은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그러나 놀랍게도 선명하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급적 자주 쓰려고 합니다. 쓰는 것 자체가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남의 평가나 남의 생각, 저를 향한 비판과 무관심, 그 모든 것을 초월하여 저는 글을 씁니다. 글을 쓰면서 저의 존재를 발견하고 완성하고, 그것을 채워가고 다듬어 갑니다. 그래서 생각이 나는 것들은 기록을 합니다.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더라도, 그것이 가치 있는 것임을 확신한다면 글로 엮어 나갑니다. 그 행위 자체가 나 자신과 세상의 고통을 이기는 저의 대범한 저항입니다. 

저는 가장 깊은 글 쓰기는, 더 이상 그 어떤 사람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는 글쓰기라고 생각합니다. 니체를 읽어보니, 그가 바로 그것을 원했던 것 같습니다. 루이스의 글쓰기는 친절하고 따뜻하고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성향 자체는 니체를 닮은 듯 합니다. 저의 마음 속에 고독한 자로서 홀로 우뚝 서고 싶은 마음, 그러나 오직 하나님 앞에서 저의 무릎을 꿇고 엎드리고 싶은 그런 마음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도 읽을 수 없는 글을 쓰고 싶은 마음과, 그러나 따뜻한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될까요? 가보지 않은 길이라 알 수가 없습니다. 제 책이 나오게 되면 어떤 것이 달라지게 될까요? 책을 쓰면서 저의 글 쓰기가 얼마나 부스러기와 같은 가를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겸손할 것입니다. 여러가지가 변화할 수도 있겠지만 제가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 눈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그 날까지, 그리고 더 이상 키보드의 자판을 두드릴 힘이 없어지는 그 날까지, 저는 글을 쓸 것입니다. 

처음에 글 쓰기가 아주 작은 시작이었던 것처럼, 여전히 모든 것은 저의 작은 걸음입니다. 이 글도 그런 맥락에서 아주 작은 글입니다. 여전히 부족하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지나치게 멋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전진하지 못할 것 같았던 한 인생이, 단어와 문장과 문단의 기적과 같은 연결을 통해서 자신의 삶에 조금 더 용기를 가질 수 있다면, 저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리고 누군가 저의 글을 읽고, 삶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이겨낼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제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그리고 감당하기 어려운 하늘의 축복일 것입니다.

2024년 4월 26일 금요일

나 자신의 변화, 교회의 문제를 풀어가는 단 하나의 길

 

제가 어릴 때에는 목회가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목회를 하면서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깨닫습니다. 목회는 종합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매우 복합적인 것입니다. 여러가지의 상황들이 실타래처럼 얽혀있고, 때로는 그러한 맥락 속에서 많은 어려움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문제를 어디에서 부터 풀어야 할까요? 만약에 누군가가 저에게 교회의 어려움을 어떻게 풀어야 하나고 물어본다면, 저는 '나 자신부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 말은 내가 바로 문제의 근원이라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의인의 고난이 심한 법입니다. 모든 문제를 한 사람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나 자신부터'라는 것은 확고한 진리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은 나 자신이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쉽게 다른 사람을 비난합니다. 마치 나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다른 사람이 문제라는 식으로 말을 합니다. 물론 많은 경우에 그것은 사실입니다. 내가 하지 않은 잘못을 내가 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책임감 있는 진짜 리더라면, 그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적극적으로 찾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얼마나 문제가 많은가, 혹은 내가 속한 공동체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이야기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과연 이 상황 속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찾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나의 작은 몸부림으로 변화의 단초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이 바로 그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성화'라고 부릅니다.

며칠동안, 교회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현실의 교회가 겪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깊이 생각할 수록 답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나 자신의 변화'입니다. 내가 더 성숙한 사람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감화를 끼치는 것, 그리고 단 한사람이라도 변할 수 있도록 섬기고 살피고 돕는 일이야 말로 교회를 세워가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나, 그리고 더 나아가 함께하는 한 사람의 변화면 충분합니다. 반드시 그 변화는 확장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도 누군가를 비난하기 보다는 제 자신을 살피겠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야 말로, 교회의 문제를 풀어나가는 단 하나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2024년 4월 3일 수요일

그래도, 아주 조금은 너가 좋아졌다

 

미국에서 아이를 키우면서 느끼는 것은, 미국은 훨씬 더 개인의 선호를 존중해 준다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에는 조금이라도 별난 모습을 보이면 너는 왜 그렇게 사느냐고 타박을 받곤 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저의 아이들은 그 취향을 존중해 주면서 키우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길을 달리다 보니 광고가 붙어 있습니다. 앵무새 체험관 ‘앵무야앵무야’ 눈이 번쩍 뜨입니다. 첫째 아들이 새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전화를 해보니 심지어 앵무새를 직접 만지고 체험할 수 있다고 합니다. 바로 길을 돌려서 들리기로 했습니다. 

아들은 좋아서 어쩔 줄 모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가족 중에 유일하게 첫째만이 새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보호자가 필요해서 어쩔 수 없이 따라들어가기는 했지만 멀찌감치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손님을 너무나 반가워하는 체험장 주인께서, 빨리 저도 해보라고 재촉하십니다. 손사래를 쳤습니다. ‘아휴 저는 새를 정말 싫어합니다’ 결국 억지로 제 손에 올려 주셨습니다. 

생각보다 새가 정말 무거웠습니다. 너무 당황했습니다. 전혀 낯선 존재가 바로 눈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사실 웃는 것이 아닙니다. 저의 손가락 바로 위에 올라가 있는 낯선 감각에 기분이 정말 이상했습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생각보다 괜찮았습니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살아 있는 큰 새가 손 위에 있다는 것이 조금은 받아들여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싫은 것도 노력하면 약간은 좋아질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아마 어떤 것이라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앞으로도 저의 경험과 지경이, 좋은 의미에서 조금이라도 더 넓어지기를 원합니다.

2023년 8월 28일 월요일

삶을 온전히 드리는 것의 기쁨 by 8개월 주일 설교의 대장정을 마치고

 






미국에 온지 11년이 지났습니다. 아내와 함께 그저 흥분되는 마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온 것이 바로 어제 같은데 시간이 이렇게 흘렀습니다. 젊었을 때에 삶은, 나의 선택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갈 수록 나의 선택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놀라운 거대한 손에 떠밀려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담임 목사님께서 안식년을 가지고, 부목사가 어떤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시간은 아마 평생에 딱 한번 정도 찾아올 것입니다. 그리고 저에게 그 역할이 맡겨졌습니다. 너무 큰 부담,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제가 할 일들을 그대로 다 하면서, 주일 설교 강단을 잘 감당해야 한다는 것은 저의 삶 가운데 가장 큰 도전이었습니다. 

설교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끝이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참으로 가벼운 자리인 것처럼 보이지만, 저에게는 가장 소중한 자리입니다. 대략 열세번 정도의 기회가 저에게 주어졌습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는 주일 설교가 세번입니다. 저는 세번의 설교가 모두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오시는 분들의 숫자는 차이가 납니다. 그러나 그 중요성은 사실상 동일합니다. 1부 예배는 교회의 중직자들이 오십니다. 그리고  2부는 연세가 많으신 어르신들과 성가대가 있습니다. 3부는 주로 젊은 층들이 있습니다. 3번의 예배는 모두가 소중하고 그 고유한 의미가 있습니다. 단 한번의 설교도 허투로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 그대로 최선을 다해 감당했습니다.

모든 부교역자들이 주일 설교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교회는 여러 이유로 부목사들에게 주일 설교를 잘 맡기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 자리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며, 교회의 영적인 분위기에 지대한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기회가 참으로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일생 일대의 가장 중요한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을 온전히 드려서 모든 것을 걸고 감당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어제까지 저에게 맡겨진 모든 설교를 마쳤습니다. 설교를 위해서 강대상 의자에 앉아 있는데 감사의 기도가 터져나왔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이 모든 기회를 허락하시고 잘 감당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 제가 설 수 있다는 것이 기적처럼 느껴졌습니다. 마지막 설교의 세번은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다시 정리하겠지만, 마지막 설교는 저의 내면에 있는 그동안 갈고 닦은 개혁주의 신학의 종합이었습니다. 저는 한동안 화가 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존귀히 여김을 받지 못한다고 종종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당황스러운 것은, 예배의 모든 요소들이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그분을 받들지만, 설교 안에서는 그리고 성도님들의 사고와 고백과 삶 속에 너무나 그리스도께서 약하다고 느낀다는 것입니다. 마치 잔치의 주인이 구석에 몰려서 소외 받는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분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 자신을 그분께 드리는 것에 대해서 마음껏 설교했습니다. 설교 단에 올라가기 전에 기도했습니다. “주님, 사람들의 인식에서 저는 완전히 사라지기 원합니다, 오직 주님이 나타나시기 원합니다”

기도에 응답하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은혜 받으신 분들도 계셨고, 저를 노려보고 가신 분들도 계셨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반응입니다. 예수님께 당신 자신을 드려야 한다는 가장 직설적인 외침은, 어떤 이들에게는 하늘의 기쁨으로, 어떤 이들에게는 삶의 저주로 느껴질 것입니다. 원래 기독교 신앙은 그런 것입니다. 이제는 더욱 더 주님께 생명을 드리는 자들과, 근심하며 발걸음을 돌리는 자들로 나누어집니다. 

이미 설교 준비를 완벽하게 마쳤기 때문에, 설교 전에는 조용히 루이스의 책을 읽었습니다. 마음이 평안해지고 안정을 찾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합니다. 평범함에 지친 저의 마음에, 가장 탁월하게 주님의 뜻을 알려줍니다. 저의 마음에 직접 들려주는 그의 이야기들은 너무나 달콤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새롭게 합니다. 

저에게 있어서 지난 8개월은 사라진 것처럼 느껴집니다. 지나치게 최선을 다했고 그런 면에서 후회가 없습니다. 아마 다시 돌아가서 해보라고 하더라도, 더 잘 할 자신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소극적으로는 교회에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저의 역할을 잘 감당했고, 적극적으로는 목회자로서 보일 수 있는 최선으로 설교를 감당했습니다. 주님께서 넘치게 저에게 은혜와 기쁨을 주셨고, 분에 넘치는 칭찬을 받았고, 제가 누릴 수 없던 영광을 누렸습니다. 

이제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며칠 전 부터 갑자기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금보다, 열배의 깊이를 가지고 싶다” 이미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수준은 지나갔습니다. 사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저는 배우고 배우고 또 배울 뿐입니다. 배운 것을 실천하고 갈고 닦고 더 나아질 뿐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의 기도입니다. “주님, 열배의 깊이를 허락해 주십시요”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이미 삶의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스스로도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여전히 목이 마르다고 느꼈습니다. 제가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처럼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팀켈러처럼 되고 싶고, 루이스처럼 되고 싶고, 칼빈처럼 되고 싶고, 마이클 호튼처럼 되고 싶고, 박영선 목사님처럼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저의 꿈입니다. 그리고 솔직한 제 내면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들 보다 더 나아야한다고.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저의 개인적인 욕심은 아닙니다. 앞으로 이정도 수준에서 살아도 크게 잘못될 일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주일 설교를 하면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설교를 들으시는 성도님들의 그 진지함과 기뻐함을 보면서, 그렇게 좋아해주시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빛나는 눈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더 잘해야겠다” 

하나님께서는 설교자를 세우시고 그분의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교회의 신비입니다. 예배에 와서 앉아 있다는 것 자체가 사실상 그런 기대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바랄 수 없는 그 어떤 것을 얻고자 하는 그 간절한 마음으로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탁월해야 합니다. 그분들의 기대가 있기 때문에, 저는 앞으로도 더 깊어져야 합니다. 굳이 그것을 수치로 표현하자면, 열배입니다. 

곰곰히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한동안 제 설교가 늘지 않아서 정말 고민했습니다. 그때에도 이미 저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고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새로운 길을 여셨습니다. 저를 더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의 한계를 스스로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주 섬세하고도 확고한 전략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저의 결론은, 루이스와 칼빈을 평생동안 가장 진지하게 그리고 깊게 파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제가 가장 믿을 수 있는 두분입니다. 루이스는 세상을 향해서 가장 탁월하게 기독교를 설명하고 이해한 사람이며, 칼빈은 가장 성경적으로 탁월하게 기독교를 이해하고 밝히 보인 사람입니다.

물론 종종 두 사람의 책을 읽기는 했습니다. 루이스야 원래 좋아했고, 지금도 기독교 강요를 읽고 있습니다. 하지만 태도 자체를 바꾸었습니다. 그들의 것이 완전히 저의 것이 되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데 이렇게 말하더군요. “두주 전쯤에 바로 이 부분에 대해서 루이스가 저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물론 직접은 아니구요” 사람들이 모두 즐겁게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팀켈러 목사님이 얼마나 루이스를 사랑하는지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팀켈러 목사님에게 루이스는 살아있는 사람이고 또 늘 동행하는 존재였습니다. 

칼빈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신학책을 보고 학자들을 살펴보지만, 그러나 가장 성경적으로 탁월하게 설명하는 것은 역시 칼빈입니다. 흔들림 없이 신뢰할 수 있는, 그리고 의지할 수 있는, 성경이 이야기한만큼 성경에 대해서 깊이 있게 이야기하는 분이 칼빈입니다. 칼빈의 모든 태도와 모든 사고와 모든 경건을 저의 것이 되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네이버 밴드를 추가로 두개를 더 만들었습니다. “하루 한번” 루이스, “하루 한번” 칼빈입니다. 멘탈리티에 빠져서 반복해서 읽으면서 얻은 유익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마치 그런것처럼, 평생동안 하루 한번 루이스와 칼빈으로 저를 완전히 변화시키는 것이 목적입니다. 천천히 그러나 깊이 그리고 아주 지나치게 진지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아마 그 길의 언젠가에는, 열배 쯤 깊어져 있는 제가 존재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모든 것은 주님의 은혜입니다. 목회자로서의 저의 여정은, 어떤 의미에서 이제 시작입니다. 마치 저는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 보물이 가득 담긴 바로 그 방의 문을, 아주 살짝 열어보고서 놀라버린 아이입니다. 오 이럴수가! 눈이 부셨습니다. 그곳에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것들이 있었습니다! 제대로 쳐다볼 수 조차 없는 아름다움입니다. 그래서 떨렸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주 조금 맛보았습니다. 그것은 내 삶 전체를 드려도 아깝지 않은 그 어떤 것입니다. 그래서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저의 가진 모든 것과 저의 삶 전체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곳에 쓰여지기 원하고, 저에게 맡기신 성도님들을 잘 섬기시는데 사용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저의, 유일한 소원입니다. 

2023년 7월 26일 수요일

하나님나라복음으로 교회 세우기 공개강좌 3강 / 요약 및 느낀 점

 

요약

 

하나복 DNA 어떻게 출발을  것인가목회는 매우 어려운 것이다그러므로 평생 준비하는 것이다사역자에게 필요한 5가지 영역이 필요하다하나님 나라 복음 신학이 분명해야 하고 그것으로 성경을 보는 눈이 깊어져야 한다그리고 사람의 영적 성숙에 대한 그림이 있어야 한다이러한 영적 성숙은 건강한 교회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것이다이런 공동체를 세워야 한다교회가 사이즈가 커갈 수록 좋은 영성을 담을  있는 자기들의 시스템을 개발해야 한다그리고  네가지를 기초해서 설교하고 가르칠  있는 목회자가 필요하다

 

가장 필요한 것은 “전도와 회심”이다한국 교회에서 회심이 없으면 게임이 끝난 것이다교회 안에도 회심   사람들이 많이 있다회심한 이후에 사람들을 키워야 한다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제자도이다그리고 이후에 하나님 나라 복음의 공동체를 세워야 한다그리고 이미 준비된 자료들을 가지고 성도들이 스스로 복음을 전하도록 해야 한다풍삶기를 통해서 제자도를 가르치게 되면 결국 목회자 자신이 변하게 된다왜냐하면 영혼을 만지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강의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의 중요성”이다지난 한달 동안 불신자를 만나서 한시간 이상 이야기해본 적이 얼마나 있는가목회자가 제일 잘하는 영역인데 목회자가 안하면 누가 복음을 전하겠는가이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교회 안에 머무르고 교회 운영만 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교회 속에 고립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고의도적으로 불신자를 만나야 한다목회자가  일을 하지 않으면 다른 교회 성도들이 오기만을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의 핵심은 “복음 전도”이다복음 전도는 훈련해야 개발이 되는 것이고 은사가 아니라 명령에 대한 순종이다기독교의 목표는 세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이다그러므로 성도들이 친구들과의 관계를 서서히 회복해야 한다불신자를 만나야 한다그리고 교회 안에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회심하면 성장할  있다그런데 성장하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비정상이다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성장하지 않은 사람은 회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교회 안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라처음에는  받아들일 만한 사람에게 시도하고 점점 난이도를 높이는 것이 좋다

 

과거에는 권위그리고  외운 내용을 가지고 전도를 했지만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다진정성을 가진 사람이 전도할  있는 것이다대면식으로 전도하는 것은 점점 상황이 쉽지 않고현재에는 인격적이고 관계 중심적인 생활 방식으로서의 복음 전도가 필요하다사람을 사랑하고 복음을 제대로 전달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다

 

물론 결정적인 순간에  정리된 복음을 전할  있어야 한다 사람에게 맞게 결정적인 상황에서 반드시 복음을  전할  있어야 한다마치 집안에 아이들이 태어나면 기쁜 것처럼 새로운 생명이 교회 안에서 계속 탄생해야 한다그러므로 관계 전도로 가다가 결정적인 복음을 전하도록 훈련해야 한다풍성초에 인도자반 강의에전도에 대한 내용이  정리되어 있다

 

전도에는  단계가 있는데전도 이렇게  단계이다오늘날에는 “전 단계”를 잘해야 한다복음을 만나기 전까지 장애물들이 많이 있는데크리스천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지적인 질문들그리고 삶의 고통 등이 있다그러므로 이러한 것들을 먼저 치워줘야 복음을 들을  있는 단계가 되는 것이다다시 말해서 먼저 불신자의 마음을 만져야 하는 것이다복음을 전하려고  때에 나오는 질문들은 거의 정형화 되어 있고 거기에 대한 답을 www.imseeker.org 정리해 놓았다그리고 복음 전하고   후에 과정이 풍성한 삶의  걸음 이다

 

복음을 받아들일  있도록  단계부터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지만 한편으로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서 그가 리서치 하는 것을 도와주어야 한다 사람의 고민과 풀리지 않는 부분을 풀어주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그리고 요한복음을 통해서 스스로 예수님을 발견할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특별히 무신론자로서 지적 질문이 많거나상처가 깊은 사람은 예수님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이런 사람들이야 말로 주님의 잃어버린 양이고 포기하지 말고 같이 걸어가줘야 한다

 

결국 복음 전도는 배우는 것이다실패해도 괜찮다복음 전도는 성령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책임은 선명하게 전하는 것이고 믿는 것은 상대방의 책임이다복음 전도는 계속 일어나야 하는 것이고 그것을 꿈꿔야 한다교회가 건강한가를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교회를 통해서 몇명이 회심하였는가 이다회심하지 않으면  세대를 넘어갈  없다주님의 칭찬을 받을  없다.  

 

 

느낀점

 

마지막 공개 강좌도  좋았습니다저는 김형국 목사님의 접근법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목사님에게는 무엇이 교회의 본질이며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한 확고한 답이 있습니다그리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서 목회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은연 중에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어떤 목회자가 있고 교회가 거기에 맞춰가는 것입니다그러나 사실교회가 필요한 것을 목회자가 사명감으로 채우고 이뤄나가는 것이야 말로 성경적입니다아마도 김목사님이 이렇게 열정적으로 사역을 계속   있는 것도자신이 교회를 위하여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항상 어떤 주제를 설교할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이 많았는데, 하나님 나라, 영적 성숙, 공동체, 영성을 담는 시스템이라는 큰 틀을 제시하시고 그것을 담은 설교를 해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너무나 좋은 조언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을 탁월하게 해 낼 수 있을 것인가는 여전히 큰 부담입니다

 

불신자와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언제인가라는 질문은 저의 마음을 아프고 부끄럽게 합니다믿지 않는 사람을 만날 기회를 거의 만들지 않고 기존에 성도님들을 돌보는 것에 급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교회 안에도 여전히 회심하지 않은 분들이 계시다는 것은  도전입니다 부지런하게 성도님들과 연락을 나누고그들의 영적인 필요를 채우고 어떻게든 그분들의 마음을  주님과 가까워지도록 만들어야 하는  책임감을 느낍니다

 

저는 김형국 목사님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좋았습니다결국 목회는 영혼을 사랑하는 것이  본질이기 때문입니다영혼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것이 원동력이 되어서 끊임없이 훈련하고 방법을 만들고 책을 쓰시는 모습이본질에 근거한 목회자의 바른 방향을 보는  같아서 귀감이 되었습니다 역시 제가 섬기는 영혼들을 더욱 사랑하고 그분들을 섬기고 성장하게 만들어 교회를 세우게 하는 성경적인 목회자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 "내가 생각하는 하나복", 그리고 미래 목회 - 하나복 관련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3/08/blog-post.html

추천 글

로고스 프로그램으로, 평신도 성경 공부하기 with 스터디 바이블 노트 Study Bible Notes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시 119:103) 누구나 성경을 열심히 읽으라는 말은 듣습니다. 그리고 성경이 꿀보다 달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 ...

리딩 크리스천 독서 묵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