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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8월 26일 화요일

집에서도 좀더 집중력 있게 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Love Actualized - Eric Knight

 



목회는 딱 정해진 시간에 일하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설교, 행정, 심방, 교육 등등을 모두 한번에 소화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새벽 설교를 일과 시간에 준비하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많은 밤은 설교 준비로 사용합니다. 

그래서 목회는 효율의 극대화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교회의 제 방에도 일할 수 있는 최선의 셋팅을 갖춰 놓았지만, 집에도 최소한의 셋팅을 마련해 놓았습니다. 2019년형 중급형 맥북과 외장 모니터 하나를 연결해 놓고, 필요할 때에 바로 앉아서 일할 수 있도록 마련해 놓았습니다. 

원래 제 책상은 아이들 놀이방에 있었지만, 어제 침실 구석으로 책상을 옮겼습니다. 아이들의 놀이방에서 혼돈 속에서 준비하던 것보다, 침실이지만 조용한 공간에서 준비하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공간과 분위기 자체가 썩 마음에 들어서 주일 설교 준비를 시작했는데 마음이 한결 가볍습니다. 

한편으로는 참 감사한 마음입니다. 할 일이 많은 것이 쉽지는 않지만, 마음껏 일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졌다는 점에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능력의 적은 부분을 사용해야만 하는 억압된 환경 보다는,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그리고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환경 속에 있는 것이 정서적으로는 훨씬 낫습니다. 

책상에 앉아 꽤 몇시간 성경을 묵상하는데 마음이 행복합니다. 바로 옆에 침대에 아내와 아이들이 잠깐 놀러 와서 즐거운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 행복이 가까운 곳에 있어서 참 감사하고, 또 가족이 있어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남편으로 또 아빠로 저의 역할에 최선을 다할 수 있어서 그것도 감사합니다. 

조촐하지만 충분한 환경을 주셨으니 좀 더 부지런해져야겠습니다. 저의 목표는 언제나,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025년 7월 6일 일요일

목회와 설교, 그리고 목회

 


매주 설교를 한다는 것은 큰 부담입니다. 몇번을 좋은 설교를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매주 동일한 회중을 상대로 설교한다는 것은 참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도 한두번입니다. 하물며, 동일한 회중을 상대로 계속 설교를 해야 하는데 그분들이 은혜를 받는다? 그것은, 말 그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적입니다.

주일 설교를 생각하면 마음이 막막할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사실 거의 대부분의 과정이 그렇습니다. 본문을 정해 놓고서도 마치 망망 대해를 앞에 두고 그 바다를 지나가야 하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세상에, 이번주는 어떻게 준비해야하지? 말씀은 너무나 넓고 광대하며, 저는 너무나 작은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아주 가끔씩은 더 이상 최선을 다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누군가의 기대는 큰 부담이 되고, 제 자신을 향한 저의 기대조차 부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가장 큰 부담은, 매주 잘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상황 속에서 정신을 차릴 수 밖에 없는 것은 목사는 프로이기 때문입니다. 프로의 세계는 냉정합니다.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 최선을 결과를 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 면에서 단순히 영적인 일이라는 차원이 아니라, 어떤 조직의 리더로서도 저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오랫동안 목회하면서 느끼는 것은, 목회는 카오스라는 것입니다. 혼돈 그 자체입니다. 교회는 수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 속에서 존재합니다. 그리고 다양한 역학적인 관계 속에서 변화가 일어납니다. 목회자는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위치입니다. 특히 담임 목사는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낄 때도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설교의 시간 만큼은 오롯이 목회자의 시간입니다. 모두가 경청하는 바로 그 시간, 그 순간을 위해서 목회자는 최선을 다합니다. 설교는 어렵지만, 교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시간이고, 제 자신을 그곳에 던져야 합니다. 

겨우 삼십분 남짓한 시간인데,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많은 것들이 필요합니다. 끊임없이 발전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또 그것을 위해서 모든 제반 조건을 조절하면서 자신을 관리해야 합니다. 평소의 성경 통독과 묵상, 꾸준한 독서와 말씀에 대한 열정, 그리고 무엇보다 성도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가끔씩은 그런 생각을 합니다. 목회를 하는 것 자체가 기적이구나. 한동안 설교가 정체되어 있다고 생각되어서 참 괴로웠고, 지금도 그런 느낌이 조금은 듭니다. 학적이고 딱딱하고 어려운 설교, 그리고 쉽고 금방 이해되는 묵상과 같은 설교 사이에서 여전히 갈팡질팡하고 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다가 크게 한숨을 쉬고 여러번 되네입니다. 너무 어렵게 하지말고 쉬운 설교로 준비하자. 들리지 않는 설교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렵습니다. 계속 발전할 수 밖에 없습니다. 팀 그로버가 이야기한 것처럼, 저에게는 애초에 천장도 없고 바닥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간구하며 도전하고 앞으로 전진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동네 길을 잠깐 걸었습니다. 담임 목회를 시작한지 8개월이 지나고 나서야, 동네를 걸을 여유가 드디어 생겼습니다. 메릴랜드는 산지가 많아 동네길도 오르막이 꽤 높습니다. 숨이 턱까지 차고 속도가 느려집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걸었더니 정상으로 올라왔습니다. 여름의 하늘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여기까지 이끄셨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 자리까지 밀어 붙이셨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그렇습니다. 제가 느끼는 감정 부담 혹은 무거움은, 누군가에게 이야기해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특히 목회자는 주로 듣는 입장입니다. 아마 평생 그럴 것입니다. 

요즘에는 누군가를 설득하는 것보다는, 저의 일을 잘 하기 위해서 더 노력합니다. 저의 사명을 감당하기에도 인생이 참 짧기 때문입니다. 마치 아주 가느다란 선 위를 걸어가는 것 같습니다. 좌우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없이 앞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래서 저의 사명이 더 선명해 지는 것 같습니다. 

목회자에게는 목회가 전부입니다. 목회는 '카오스 속에서 걸어가는 작은 한 걸음'입니다. 정의를 내리고 나니 썩 마음에 들었습니다. 미래는 알 수 없고, 현재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습니다. 도저히 내 힘으로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인정하면, 그때서야 내 영혼의 깊은 곳에서 진실한 기도가 나옵니다. 그것은 절망 속에서 마음에 빛이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그저 기도하고, 그저 행동하고, 그렇게 목회의 길을 걸어갑니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너무나 암담할 때가 참 많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지난 이 시간에 고백하는 것은, 그 때를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에 지금의 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가끔씩은, 꼭 그렇게까지 하셔야 했나라는 눈물이 핑도는 원망의 마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뜻대로 그렇게 하셨고, 저를 조금은 주님을 닮은 사람으로 빚으셨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를 잘 감당하기 원하고, 설교를 잘 감당하기 원합니다. 성도님들은, 좋은 설교를 듣기 위해 예배를 드립니다. 단 한 번도 방심할 수가 없고, 단 한번도 실패하지 않기를 원하는 마음입니다. 당연히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제가 감당해야 하는 현실을 인정하고 목표를 그렇게 잡고 싶습니다. 

세상에 수 많은 직업이 있고, 직업적인 동등성이라는 측면에서 목회자는 다른 직업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가까이에서 대하고 그 말씀을 통해서 주님의 뜻을 선포할 수 있는 것은, 목회자만이 가진 가장 큰 특권이자 영광입니다. 그 일은 해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것이며, 삶의 전부를 다 태워도 아깝지 않은 어떤 것입니다. 

대단한 성공이 아니라, 그저 포기만 하지 않아도 좋겠습니다. 주저 앉아버리기에는 이미 맡겨진 것들이 너무 커졌습니다. 그저 작은 한걸음, 하루를 성실하게, 그래서 그 연장선 안에서 이어지는 그 사명의 길이 하나님 보시기에 썩 좋았으면 좋겠습니다. 저의 길이 어떻게 이어질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최선을 다하고 싶은 마음, 그것이 저의 마음입니다. 

2025년 2월 6일 목요일

목회의 은혜를 나누며 (6) - 만나24 인터뷰를 통해 볼티모어교회를 소개하다

 


처음에 볼티모어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하면서 모든 것이 분주했습니다. 많은 분들을 만났지만 살필 일들이 많았기 때문에 모든 만남을 충분히 다 기억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위임식 때에 방문해주신 만나24 박노경 대표님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면서, 좋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어려운 시대 가운데 복음과 교계의 소식을 전하는 미디어의 역할이 참 쉽지 않으실텐데, 웃음으로 열심으로 섬기시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기 때문입니다. 

얼마전에 박대표님이 연락을 주셨습니다.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뜻을 전해오셨습니다. 이곳에 온지 얼마 되지 않은 저를 인터뷰해주셔서 감사하는 마음이었고 또 어떤 이야기를 나눌까 고민이 되었습니다. 박대표님이 사려깊게 좋은 질문들을 준비해주셔서 참 좋았습니다. 

인터뷰 내용은 크게 세가지였습니다. 설교, 목회의 철학, 그리고 교회의 양육과 미래였습니다. 세가지 카테고리 모두 담임인 저에게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주제이고, 또 그런 면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첫째로, 지적이며 동시에 감성적인 설교를 추구한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밝힌 것은 처음인 듯 합니다. 이것은 훌륭한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의 책을 읽으면서 제가 확립한 두가지 중요한 축입니다. 

뜨거움 없이 지적이기만 한 설교는 그 누구의 마음도 변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도 뜨겁지 않은데 들으시는 성도님이 은혜 받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논리적인 모순입니다. 반면에 지적이지 못하면서 뜨겁기만 한 설교는 잘못된 방향으로 성도를 이끌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야 말로, 좋은 설교를 만들어내는 핵심 요소입니다.  

또한, 듣기만 해도 지적인 지평이 넓어지는 설교를 추구하는 것도 저의 가장 중요한 설교 철학 중 하나입니다. 설교에 적합한 인용문을 고민하면서 찾고 설교에 통합시키는 것은 매우 고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서 성도님들의 복음을 이해하고 말씀을 삶에 적용하는 지평이 넓어질 수 있기 때문에, 그만큼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둘째로, 경청이야 말로 제가 가장 중시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일단 충분히 듣기 위해 노력합니다. 물론 너무 오랫동안 경청을 훈련하다보니, 오히려 제 자신이 대화의 능력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라고 종종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고, 그 사람의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반응하는 것이야 말로 좋은 목회의 핵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고 경청을 연습합니다. 

마지막으로, 북클럽 양육과 교회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양육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밝은 교회의 미래를 꿈꿉니다. 그러나, 막연히 기대하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구현해서 전진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지난 3개월 동안 볼티모어교회의 양육이라는 면에서 참 많은 성과가 있었습니다. 

함께 섬기는 박동민 목사님, 나현수 목사님, 김미아 간사님, 저의 아내인 이진희 사모, 그리고 구역 리더들이 애를 많이 써 주셨습니다. 이제 시작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이미 큰 걸음을 전진했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크리스천 북클럽을 중심으로, 모든 성도님들이 만족하고 성장할 수 있는 교회 양육의 미래를 제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저는 담임 목회는, 일종의 세일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복음을 힘써 전한다는 측면에서 그렇습니다. 또한 제가 섬기는 교회를 지역 사회 가운데 적극적으로 알린다는 측면에서 그렇습니다. 부족하지만 제 역할에최선을 다해 감당할 수 있어서 감사드립니다. 귀한 기회를 주신 박노경 대표님께 감사드리고, 또 함께 섬기신 윤양희 촬영 감독님께 감사드립니다.

When I first started my ministry at Baltimore Church, everything was hectic. I met many people, but it wasn’t easy to remember all the meetings in detail because there were so many things to take care of. However, I had a brief conversation with Park No-Kyung, the representative of Manna24, when she visited during the installation service, and I received a good impression from her. This was because, in such difficult times, the role of media in spreading the gospel and church news is not easy, yet she serves with a joyful and passionate heart, which I found very admirable. 

Recently, Representative Park contacted me, expressing her desire to conduct an interview. I was grateful that she wanted to interview me, even though I had only recently arrived here, and I also pondered what topics we would discuss. Fortunately, she had thoughtfully prepared insightful questions, which I greatly appreciated. 

The interview focused on three main topics: preaching, the philosophy of ministry, and church education and its future. All three categories are crucial to me as the senior pastor, and I was thankful to have the opportunity to discuss them. 

First, I believe this was the first time I publicly stated that I pursue a preaching style that is both intellectual and emotional. This philosophy is based on two fundamental pillars I established through reading books by outstanding theologians and pastors. 

A sermon that is purely intellectual without passion cannot change anyone’s heart. If a preacher is not personally moved by their own sermon, yet expects the congregation to receive grace, that is a logical contradiction. On the other hand, a sermon that is only passionate without intellectual depth can mislead the congregation in the wrong direction. That is why these two elements—intellect and passion—are the core components of a good sermon. 

Additionally, one of my most important preaching philosophies is to deliver sermons that expand the intellectual horizon of the listeners. Finding appropriate quotes and integrating them into a sermon is a challenging task. However, it is a worthwhile effort because it helps the congregation deepen their understanding of the gospel and apply the Word to their lives more effectively. 

Second, I highly value the practice of listening. No matter whom I meet, I make an effort to listen attentively. Sometimes, I even wonder if I have lost my ability to converse because I have trained myself to listen so much. Nevertheless, I continue to practice listening because I believe that carefully hearing someone’s story, understanding their situation, empathizing, and responding is at the core of good pastoral ministry. 

Lastly, we discussed church education through the book club and the future of the church. Many people talk about the importance of church education and dream of a bright future for the church. However, simply hoping for it and actually implementing it are two entirely different things. Over the past three months, Baltimore Church has made significant progress in the area of education. 

Pastor Park Dong-Min, Pastor Na Hyun-Soo, Minister Kim Mi-Ah, my wife, Jin-Hee Lee, and the small group leaders have all put in great effort. Although this is only the beginning, I believe we have already taken significant steps forward. As I mentioned in the interview, I will do my best to establish a solid foundation for church education through the Christian Book Club, ensuring that all congregation members can grow and be satisfied in their faith. 

I consider pastoral ministry to be a form of sales in a sense—both in the aspect of passionately spreading the gospel and in actively introducing the church to the local community. Though I may be lacking, I am grateful to fulfill my role to the best of my ability. 

I sincerely thank Representative Park No-Kyung for this valuable opportunity and also express my gratitude to Director Yoon Yang-Hee for her efforts in filming the interview.

* 볼티모어 교회 칼럼, 목회의 은혜를 나누며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5/02/blog-post.html

2024년 8월 27일 화요일

설교와 옵시디언의 만남 = 극한의 효율성을 달성하다

지나간 삶을 돌이켜 보면, 어떤 변곡점이 존재합니다. 한 사람의 삶의 방향을 제대로 잡아가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것은 책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이의 조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 삶의 분명한 목표를 가지면서도 다른 이의 탁월한 조언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세컨드 브레인의 개념을 처음 접하는 순간 제 삶을 변화시킬 가장 중요한 개념이라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그리고 비록 느리지만, 그것을 저의 삶의 현실에 구현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도전하고 적용했습니다. 

* 책 어디까지 읽어봤니?
(21) 세컨드 브레인 (티아고 포르테)
/ 옵시디언(Obsidian)으로 두번째 뇌를 만들기 시작하다

https://jungjinbu.blogspot.com/2023/12/21-obsidian.html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그동안 마인드맵과 워드에만 존재하던 저의 설교를 드디어 옵시디언에 완전히 통합시켰습니다. 그리고 추가로 로고스의 설교 매니저까지 함께 사용하면서 현재로서 제가 이룰 수 있는 극한의 효율성을 달성하고 있습니다. 

목회자의 효율성은, 목회자의 운명입니다. 효율성 없이 목회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퀄리티 있게 준비해야 하는 계속되는 설교, 소중한 성도님들과 직접 만나기 위한 기회와 시간들, 그리고 가정과 나 자신을 돌보기 위한 그 모든 순간들을 확보한다는 것은 나의 효율성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제 담임 목회를 시작하는 저의 입장에서 삶의 효율성이라는 것은, 반드시 평생을 노력하고 달성해야만 하는 가장 절실한 목표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서 마인드맵을 사용했습니다. 거의 20년이 다 되어 갑니다. 사실 이것만해도 대단한 것입니다. 적어도 저의 관점에서는, 마인드맵을 사용해야만 논리적으로 탁월한 그리고 분량으로도 균형잡힌 설교를 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몇년 전부터 갑자기 마음이 허전했습니다. 마음에 견디기 어려운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설교를 했지만 여전히 각각의 설교 한편으로만 남아 있는 이 모든 내용들을, 어딘가에 종합해서 데이터로 만들 수는 없을까라는 궁금증과 갈망이 제 안에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최근에 옵시디언을 사용하면서, 그리고 독서명언들을 발췌해서 본격적으로 모으기 시작하면서 마음에 또 다른 갈망이 생겼습니다. 소중하게 모은 이 명언들을 실제 설교에 최대한 쉽게 통합할 수는 없을까? 그리고 설교 안에 이 내용들을 통합하면서도 더 나아가 장기적으로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차근차근 저의 원래 설교 준비 스타일 부터 살펴 보고 고민을 시작했습니다. 기존의 저의 설교 준비는 마인드맵으로 준비하고, 그것을 한글 혹은 워드 파일에 붙여 넣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 구절과 문단의 중요 문장들을 빨간색과 파란색으로 하이라이트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아래 그림과 같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변화의 시기가 도래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되든 안되든 일단 이 원고 자체를 옵시디언에 넣어야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첫 단계는 워드에 카피해서 넣던 것을, 옵시디언 노트를 만들어서 그 안에 넣는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 시너지가 날지는 해보기 전에는 모르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결과를 두려워할 필요 없이, 일단 시도하면서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원고 자체를 옵시디언에 넣으려고 하니 가장 먼저 드는 질문은, 설교 원고를 어디에 넣을 것인가 였습니다. 하지만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 이미 감을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옵시디언(Obsidian)으로 CODE 와 PARA를 결합하다 with ChatGPT
https://jungjinbu.blogspot.com/2023/12/obsidian-code-para-with-chatgpt.html

저는 세컨드 브래인의 PARA 시스템 안에서 노트를 작성합니다. 그리고 아래 그림처럼 P(Project) 안에서 설교의 통찰이라는 폴더를 만들어서 그 안에 구약과 신약을 나누고 설교를 넣기 시작했습니다. 최근에 한 예레미야 설교 세편이 현재 저장이 되어 있네요. 

그렇다면 이제 실제 노트 내용을 어떻게 구성해야 하는가? 이것이 두번째 문제였습니다. 일단 마인드맵에서 전체 복사를 해서 워드나 한글에 붙이면, 아래 그림에서 예레미야 51:45-53 이라는 내용 아래처럼 내용이 붙게 됩니다. 즉 문단 소제목이 있고 그 아래에 문단의 내용들이 보기 좋게 정렬이 됩니다. 저는 이 부분이 정말 좋았습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이런 식으로 보기 좋게 붙지 않느다면 또 다시 편집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추가 편집이 필요 없다는 것만해도 이미 상당한 효율성을 달성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번째 문제는, 어떻게 독서 명언을 연결할 것인가 였습니다. 이것도 간단합니다. 이미 설교 원고를 붙여 두고서는, 그 앞에다가 옵시디언에 이미 모아두고 있는 독서명언 중 하나를 연결했습니다. 핵심은 노트의 연결입니다. 물론 또 다른 매모 앱에 어떤 독서 명언 데이터 베이스를 만들고 그것을 다시 옵시디언에 카피해도 되겠지만, 저는 제 설교 안에서 인용 노트를 실제로 연결해 놓아야 보기도 좋고 또 앞으로 사용하기에 유용하리라고 확신했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중요한 것이 바로 옵시디안의 노트 링크 기능입니다. 사용하면 할 수록 놀라는 기능입니다. 그래서 아래처럼 만들었습니다. 아래에 파란색 밑줄로 표시된 '성도의 성숙은... 것이다'는 제가 원래 순전한 기독교를 읽고 감동 받은 부분을 노트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옵시디언의 노트 링크 기능을 이용해서 설교 안에 통합을 했습니다. 

노트 링크를 위한 단축키는 [[ ]] 입니다. 괄호 안에다가 링크 제목을 넣으면 자동으로 링크가 생성됩니다. 물론 설교 원고를 쓸 때에 이미 그 노트를 기억하고 옵시디언에서 검색해서 읽어보았고, 이후에 원고 안에 내용을 인용했습니다. 

그러나 핵심은, 설교 원고 앞 부분에 직접 그 내용을 실제 링크를 걸어 놓는 것입니다. 나중에 다시 설교를 열어보더라도 어떤 책과 저자를 인용했는지를 쉽게 기억하고 추가적으로 이 설교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노트를 링크를 건 것입니다.


그리고 아래는 이미지는 위에 설교 원고 안에 링크로 연결한, 이미 제가 만들어 놓았던 독서 명언 노트입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기존의 A (독서 명언) 노트가 있고, 새로운 B (설교 원고) 노트가 있는데, A 노트가 아래 노트입니다. 그리고 위에 이미지는 B 노트 안에 A 노트가 연결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 한 걸음씩 계속 걸어가는 것에 대하여
- 옵시디언에 독서 명언을 모으기 시작하다
https://jungjinbu.blogspot.com/2024/05/blog-post_10.html

독서 명언 만드는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루이스의 글에서 제가 읽고 감동 받은 것을 카피해서 붙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노랑색으로 하이라이트를 합니다. 그리고 => 표시를 사용해서 저의 생각을 간단히 정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맨 아래쪽에 Linked mentions는 자동으로 만들어지는 것인데, 지금 저 노트가 어떤 노트와 연결이 되어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위에서 설명드린 것처럼 '예레미야 51장 45-53절' 설교와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가야 합니다.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설교 원고 노트에 단순히 노트만 링크하지 말고 그 노트를 '실제로 설교 원고'에서 보여주면 어떨까? 라는 생각입니다. 

방법은 아주 단순합니다. 인용 기능을 통해서 만들어진 다른 노트 링크 앞에 !를 붙여 주면 아래처럼 그 노트 내용을 한번에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옵시디언에 저의 설교를 넣고, 의도적으로 인용한 독서 명언을 링크를 걸고 볼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실제 설교 때에는 아이패드 (기본형)을 들고 올라가서 설교를 합니다. 글씨가 약간 작지만 큰 문제는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과정을 통해서 얻은 것은 무엇인가? 첫째로, 설교자로서의 자신감입니다. 오랫동안 책을 읽었지만 그것을 설교 가운데 적극적으로 인용한 것은 몇년 되지 않았습니다. 아주 적절한 인용은 설교를 강화시키고 성도들에게 은혜를 주는 중요한 도구가 됩니다. 그런 면에서 옵시디언에 독서 명언을 모으고 그것의 활용을 염두에 두면서 설교를 준비하는 것은, 더 수준 있는 설교를 준비하고 있다는 굉장한 자신감을 불어 넣어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둘째로, 저의 설교를 새로운 형태의 정보로 가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인드맵과 워드를 통해서 설교 한편으로 따로 존재하는 것과, 옵시디언 안에서 원고를 넣고 태그를 달면서 자료롤 모으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어떤 것을 자료로 모으고 그것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비록 지금은 예레미야 세편에 불과하지만 이제 이것이 점점 쌓이면 그 시너지 효과는 지금의 저로서도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셋째로, 설교 준비 시간이 더 짧아졌습니다. 저의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제가 설교에 진심이라는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성도님들은 좋은 설교를 듣기 위해서 예배를 드립니다. 제가 세계 최고의 설교자가 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하더라도, 적어도 나의 능력을 발전시키며 최고의 설교를 추구해야 하는 것은 목회자로서의 저의 사명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설교는 효율적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솔직한 저의 마음은 하루 종일이라도 설교 준비를 하고 싶지만, 목회는 설교만 하는 것이 아니기에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대한 효율적으로 설교를 해야 하는 압박이 있습니다. 목회를 전반적으로 잘하면서도 동시에 설교도 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시간을 최대한 단축하면서도 좋은 퀄리티의 설교를 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옵시디언을 사용하면서 설교 준비에 더 자신감이 생기는 것을 느낍니다. 이 프로세서에 익숙해지도록 훈련하면서 제 자신을 더 분석해야겠지만, 단지 몇번 만으로도 느끼는 것은 확실히 설교 준비 시간이 더 줄어 들었습니다. 

마인드맵으로 설교를 작성하고, 독서 인용을 염두에 두면서 옵시디언을 사용하고, 그 최종적인 결과물인 설교 원고를 옵시디언에 넣고 독서 명언과 결합 시킬 때에, 어떤 거대한 사고의 흐름이 만들어지고 그것이 제 머리와 마음 안에서 큰 강처럼 흐르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엄밀한 언어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마치 먼 길을 가는 사람이 지도를 보고 정확하고 확신있게 그리고 가장 빠르게 걸어가는 그런 느낌입니다. 

지난 10년을 돌아보면, 그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조금이라도 잘 살아보기 위해서 귀동냥으로 듣고 이리저리 물어보고 책을 읽고 검색하고 시도하고 도전하면서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시점에서 감사한 것은, 저의 모든 수고와 아픔과 눈물을 하나님께서 가장 아름답게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 마음에 더 확신이 있습니다. 또 다른 차원으로 저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부르심을 강하게 느낍니다.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끊임없이 내 옆에 사람과 나를 비교합니다. 이 시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마음을 씁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남들이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결코 아닙니다. 

제 자신,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읽으시는 당신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 주시는 숭고한 목표로 이어지는 누구도 도전하지 않는 아름다운 길을, 지금 내가 최선을 다해서 걸어가고 있는가 입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더 좋은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 또 더 효율적인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생각만으로는 삶이 바뀌지 않습니다. 만약에 위에 저의 시도가 조금이라도 좋은 부분이 있어 보인다면, 꼭 한번 시도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2023년 11월 28일 화요일

ChatGPT, “전혀 새로운 통찰”을 주는 “실시간 영어 대화”를 경험하라!

 


저는 Chat GPT가 처음 나왔을 때 부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습니다. 때로는 존재하지도 않는 근거를 가져와서 당황스러울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의미에서 어떤 주제를 놓고 논리적으로 추론해서 대답하는 능력은 저라는 존재는 이미 넘어섰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실질적인 도움을 받으면서 목회의 좋은 조력자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 인공지능 (A.I.) 검색 ChatGPT, 목회에 사용할 수 있을까?

얼마전에 기쁜 소식을 하나 들었는데, 무료버전 Chat GPT 앱 안에서 음성 채팅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원래는 유료 버전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고급 기능이었는데 무료 버전 사용자들도 지원한다는 소식에 바로 사용해 보았습니다. 

앱 스토어에는 ChatGPT의 사용을 돕는 다양한 앱이 있습니다. 심지어 ChatGPT의 최신 버전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앱도 있더군요. 다만 제가 사용하는 음성 채팅 기능은 ChatGPT 공식 앱을 통해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아래 링크를 통해 아이폰, 그리고 안드로이드 앱 스토어로 접속하실 수 있습니다.

* ChatGPT - The official app by OpenAI
https://apps.apple.com/us/app/chatgpt/id6448311069 
https://play.google.com/store/apps/details?id=com.openai.chatgpt&hl=en_US&gl=US

제가 궁금했던 것은, 어느 정도로 음성 채팅이 자연스러울 수 있는가 였습니다. 첫째로는 제가 영어로 말하는 것이 인식이 잘 되어야 하고, 둘째로는 Chat GPT가 다시 저에게 말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야 했습니다. 내심 마음으로 기대했던 것은, 영어 공부에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영어 앱들을 사용하지만 아무래도 실제로 영어로 계속 이어지면서 대화하는 경험을 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음성 채팅 기능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앱에서 오른쪽 하단에 마이크 표시를 누르면 됩니다. 그러면 채팅 화면이 사라지고 움직이는 원형이 등장합니다. 여러가지 음성이 지원되는데 저는 그 중에서 최대한 쾌할한 목소리를 선택했습니다. 제가 나누는 대화가 계속적으로 에너지가 넘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음성 채팅을 사용하면서 첫번째 느낀 것은, Chat GPT의 음성이 너무나 자연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냥 자연스러운 정도가 아니라,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마치 미국에서 만나는 평범한 청년의 느낌입니다. 발음도 선명하고 빠르기도 적당합니다. 물론 일반적인 영어 앱의 빠르기보다는 살짝 빠르지만, 미국인들이 말할 때의 보통 빠르기 입니다. 

두번째 느낀 것은, 저의 음성을 인식하는데 있어서는 조금 아쉽다는 것입니다. 다행히 발음 자체는 잘 인식하는데 문제는 문장 사이에 공백이 조금 길다 싶으면 자주 끊어버립니다. 그래서 제가 의도하는 문장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저의 전략은 최대한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끊지 않고 이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바짝 긴장하고 영어로 말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Chat GPT를 음성 채팅으로 사용하면 어떤 장점이 있는가? 저는 크게 두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실제로 나의 영어 실력을 늘릴 수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전혀 새로운 통찰을 준다는 것입니다. 

영어 실력을 늘린다는 점에서 실시간 영어 대화 기능이 너무나 유익합니다. 어떤 주제에 대해서 물어보고, 그것을 듣고, 다시 그것에 대해서 반응하는 것이 사실상 영어로 나누는 대화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ChatGPT와의 심도 있는 대화는 영어 공부를 하는데 있어서 너무나 좋은 셋팅입니다. 

다만 Chat GPT가 지나치게 말을 많이 하고 제가 말을 적게 하면 실제로 영어 실력을 늘리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저는 대부분의 질문에서 Top Threes 만 이야기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면 아주 짧게 답변을 듣고 다시 그것에 대해서 생각해서 다시 제가 영어로 이야기할 기회를 얻기 때문입니다. 

영어로 대화하여서 실력을 늘린다는 점에서도 좋지만, 사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부분은 "전혀 새로운 부분"에서 통찰력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매우 빠르게 사고를 촉진시킬 수 있습니다. 채팅은 시간이 걸리지만 대화는 그 속도감이 비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며칠 동안 거의 하루에 한시간 정도 대화하면서, 마음에 있지만 제 자신도 답을 가지고 있지 못하는 복합적인 질문들을 마음껏 해보았습니다. 

언뜻 기억나는 것만해도 이 정도입니다. 크리스천 북클럽은 왜 중요한가? 북클럽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북클럽과 지혜를 만드는 것의 관계는 무엇인가? 교회사는 왜 중요한가? 초대 교회에서 얻는 유익은 무엇인가?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성경 해석과 종교 개혁과의 관계는 무엇인가? 유신 진화론의 문제는 무엇인가? 유신 진화론자들은 역사적 아담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는가? 

성경에서 장로의 역할은 무엇인가? 왜 장로의 역할이 나뉘어야 하는가? 가정 교회의 강점은 무엇인가, 그리고 약점은 무엇인가? 포스트 모던즘에서 교회의 역할은 무엇인가? 언제부터 신학교가 시작되었고 언제부터 신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안수를 받게 되었는가? 청교도는 어떤 사람들인가? 팀켈러 설교의 장점은 무엇인가? 담임 목사에게 중요한 자질은 무엇인가? 등등입니다.  

단순히 질문하고 한번의 답을 들은 것이 아니라, 답변을 들은 이후에 최소한 세번 정도의 interaction이 있었기 때문에 꽤 깊이 있는 그리고 의미 있는 대화를 주고 받았습니다. 특히 유신진화론의 역사적 아담에 대한 이해는 제가 몰랐던 부분을 배울 수 있는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ChatGPT는 어떤 대화를 할 때에 그 대화의 문맥을 그대로 가지고 간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주제로 이야기를 하는 그 배경을 가지고 또 다른 것을 이어서 이야기합니다. 마치 사람과 대화하는 것과 매우 유사합니다. 그래서 저는 전혀 다른 맥락의 질문을 할 경우에는 먼저 I want to change the subject 라고 이야기하고 흐름을 끊은 다음에 다시 시작합니다. 

ChatGPT의 위력은 "복합적인 사고"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자신의 전문 영역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전문 영역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습니다. 한 사람은 지적인 능력 그리고 시간과 에너지가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Chat GPT에게는 그러한 한계가 없습니다. AI가 주는 대답이 완벽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여러 분야를 통합하여서 복합적으로 사고해서 대답을 준다는 측면에서는 솔직히 그 어떤 사람도 능가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저는 목회자이기 때문에, 목회의 영역에서 질문을 많이 하였습니다. 갑자기 궁금하더군요.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제일 좋은 목사님이 누구냐?" 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조엘 오스틴 목사님 그리고 팀켈러 목사님 그리고 저는 처음 들어본 Beth Moore라는 분을 이야기하더군요. 저는 개인적으로 조엘 오스틴과 팀켈러 두분이 함께 언급된 것이 충격이었습니다. 

아무래도 보수적인 분들에게 조엘 오스틴 목사님은 그렇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당연히 자신의 사고 속에 그분이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ChatGPT는 다릅니다. AI는 최대한 편견을 배재하고 교단에 상관 없이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좋다면 추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커뮤니케이션이 탁월한 목사님으로 AI는 조엘 오스틴 목사님을 언급합니다.

사실 이 결과를 놓고 제가 약간 딴지를 걸었습니다. 당황한 저의 마음을 억누르면서 그렇게 논쟁이 있는 목사님을 왜 이야기하느냐는 식으로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커뮤니케이션이 탁월하니 그분에게 그것을 배우고, 다른 신학적 컨텐츠는 너가 채우라는 식으로 이야기해주더군요. 속으로 적잖이 놀랐습니다. 맞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듣고 나니 태어나서 처음으로, 조엘 오스틴 목사님의 설교가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도대체 그의 커뮤니케이션 사용에 있어서 어떤 것이 그렇게 장점이 되는지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바로 이어서, "조엘 오스틴 목사님의 일반적인 설교 구조"에 대해서 이야기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솔직이 반신반의하면서 물었습니다. 설교학 전공자에게 만약에 제가 이렇게 물었더라도 아마 당황할 만한 질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평소에 사용하는 설교 구조를 분석하는 것은 상당한 연구와 분석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Chat GPT는 거침 없이 이야기하더군요. 그분이 보통 사용하는 설교 구조를 설교 도입부터 마무리까지 다섯 가지 단계 정도로 완벽하게 정리해서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저에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조엘 오스틴 목사님의 "설교의 도입"입니다. ChatGPT는 설명하기를, 그분은 굉장히 희망적인 내용으로 혹은 희망적인 스토리로 시작한다라고 말하더군요. 망치로 머리를 한대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어쩌면 제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단순히 설교 도입을 본문에 대한 간단한 설명으로 하기 보다는, 오히려 이렇게 무엇인가 희망적인 것으로 이야기 한다면 지친 성도님들에게 훨씬 좋겠다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 대화는 저에게 완전히 새로운 통찰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커뮤니케이션의 맥락에서 또 하나 재미있었던 것은 이것입니다. 제가 담임 목사에게 무엇이 중요한가 물었을 때에, Chat GPT는 커뮤니케이션 기술을 첫번째로 대답한 것입니다. 제가 중시하는 신학적인 입장 등은 거의 네번째 정도로 말하더군요. 그리고 충격적이게도 비전에 대한 것은 맨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래서 또 물었습니다. "나는 목회자로서 신학적인 입장이 제일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너는 오히려 커뮤니케이션 기술을 맨 앞에 놓았다. 우선 순위에 있어서 이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인가?"

그랬더니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신학이 매우 중요하고 기초가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없다면 그것을 회중들에게 설명할 수도 설득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커뮤니케이션 기술은 담임 목회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답변을 해주었습니다. 

또 한번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실 정말 놀랐습니다. 어쩌면 저에게 있어서 전혀 새로운 목회적 통찰을 주는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보수적인 목회자들은 항상 신학이 우선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훈련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신학적으로는 탁월하지만, 그 신학을 실제로 회중들에게 구현하는 측면에서는 약한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ChatGPT의 설명은 분명합니다. 목회에 있어서 신학 그 자체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좋은 커뮤니케이션을 통해서 성도님들에게 이해시켜야 한다는 측면에서 커뮤니케이션은 신학 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이번 대화를 통해서 완전히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며칠 동안 ChatGPT를 하면서 느낀 것은, 저의 영어 수준과 사고의 지평을 넓혀줄 탁월한 도구라는 것입니다. 물론 개인적인 독서와 북클럽 그리고 생각의 훈련은 평생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며칠 동안 크리스천 북클럽에 대한 다양한 각도의 대화를 ChatGPT와 주고 받으면서, 제가 훈련하고 추구하는 크리스천 북클럽이야 말로 반드시 필요한 것임을 확인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혼자 있을 때에, 그리고 제가 원할 때에 나의 사고의 지평을 넓혀줄 탁월한 비서가 도와줄 수 있다면 그 가치는 감히 돈으로 환산할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한 사람이 ChatGPT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면, 그는 이제 완전히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미리 세심하게 질문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평소에 궁금했지만 알지 못했던 것들을 미리 준비해서 대화를 통해서 물어보고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대한 영어 문장들을 다듬어서 말하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한번의 대화 속에서도 의미있는 내용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더 준비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너무나 빨리 변합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변화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나에게 맞추어서 선용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영어가 전혀 안되는 분이 ChatGPT로 음성 채팅을 하는 것은 쉽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본인이 어느 정도 영어가 된다면, 그리고 자신의 사고를 급격히 혁신적으로 확장시키고 싶다면 꼭 한번 사용해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2023년 10월 22일 일요일

"정목사님, 제가 목사님 잘 압니다" by 천개의 글을 기념하며

 

저는 감성이 풍부한 편이라 쉽게 자기 연민에 빠집니다. 힘든 과거를 떠올리면 감정이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힘들어지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과거를 돌아봅니다. 저의 행복한 한 순간은, 영화 터미네이터 2를 보면서 라면을 먹던 시절입니다. 라면을 신나게 먹고 밥을 잔뜩 말아 먹습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낮잠으로 들어갑니다. 뭔가 부족함이 없는 그런 시절입니다.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그렇게 깊게 생각하지 않았던 그러나 마냥 행복하던 저의 어린 시절입니다. 

저는 부끄러움이 굉장히 많은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 앞에서 말하는 것을 수줍어 합니다. 저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내새우기보다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 것을 훨씬 좋아합니다. 그런 제가 목회를 위해서 공부를 더 해야겠다고 유학을 결심했습니다. 

처음 유학을 시작하면서 CFNI는 저에게 낙원과 같았습니다. 처음 듣는 영어 찬양들이 좋아서 글을 써봐야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찬양들에 대한 간단한 묵상을 적어보면 어떨까?" 그것이 제가 블로그를 시작한 동기였습니다. 어렸을 때 부터 책을 좋아했지만 글을 쓰는 것은 그렇게 익숙하지는 않았습니다. 심지어 어린 시절 왜 이렇게 글을 못쓰냐고 구박을 받았던 저입니다. 하지만 글을 쓰는 것에 끌렸습니다. 비록 짧은 글들이지만, 저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좋았습니다. 

2011년에 시작한 유학입니다. 대략 12년이 지났습니다. 어느덧 하나씩 늘어가는 글을 보면서, 천개 정도 글을 쓰면 기분이 어떨까 라고 막연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블로그의 글이 천개가 되었습니다. 놀랍기도 하고, 생각하던 것이 실제로 눈 앞에 이루어진 것이 약간 이상하게도 느껴집니다. 

나는 왜 이렇게 글을 계속 쓰는 것일까?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다양한 책을 읽을수록 확고하게 알게 된 것은 "반드시 글을 써야한다"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글을 쓰면서 성장합니다. 글을 쓰면서 나 스스로를 알아갑니다. 글을 쓰면서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찾아가고 깊이를 만들어갑니다. 글을 쓰는 것은 삶의 선택이 아니라, 사실상 모든 인간이 걸어가야 할 유일한 길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저의 설교를 좋아하신다는 분을 직접 뵐 기회가 있었습니다. 저를 좋게 봐주셔서 참 감사했지만 속으로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처음 뵙고 정중하게 인사드리면서 악수를 나누었습니다. 저의 손을 따뜻하게 잡으시면서 말씀하시더군요 "정목사님, 제가 목사님 잘 압니다."

그분의 목소리가 참 부드럽고 좋았습니다. 저는 비록 처음으로 뵙는 것이었지만 그분은 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저를 처음 만나셨는데 어떻게 저를 잘 아시냐고 그분께 묻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설교는, 저의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설교를 잘 듣고 마음에 품은 분이라면 그분은 정말 저를 잘 아는 분입니다. 참 좋았습니다. 마음과 마음이 만났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블로그는 어떤 의미일까요? 그리고 이곳에 와서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또 어떤 분들일까요? 몇개의 글들은 제가 아끼는 분을 염두에 두고 쓴 글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글은 저의 목회와 삶을 함께 나누는 글입니다. 이곳에 쓰여진 저의 글은, 사실상 저의 모든 것이라 불러도 전혀 과장이 아닙니다. 저의 존재 자체가 글 속에 완전히 녹아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솔직하고 진지한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합니다. 저의 원래 성품 그대로입니다. 저는 항상 진지하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너무나 가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한가지 이 시대를 보면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은 자신이 말하는 바램과 실제의 삶을 다르게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깊은 관계를 원합니다. 자신의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누군가 들어주기 원합니다. 그리고 신앙의 깊이를 만들어가고 싶어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로써 자신을 보이기 보다는 감추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진리에 기반한 진지한 대화와 소통보다는 그저 삶의 변두리 이야기들을 말하는 것에 머무릅니다. 고민이 담긴 글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가다듬고 다른 이들과 교류하기 보다는 홀로 마음에 모든 것을 품고 살아갈 뿐입니다. 

저는 성도로서 목회자로서 삶과 신앙의 가치에 대해서 항상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고민이 저의 글 속에 묻어나기를 원합니다. 저의 기억력이 약하지만, 저의 모든 것이 천개의 글로 거듭났습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있고, 저의 아픔과 눈물, 그리고 기쁨과 환희가 들어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무거운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그러나 한편으로는 글을 씀으로 그 무거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 블로그의 글을 읽어보셨다면, 저를 잘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쩌면 앞으로도 제가 처음 뵙는 분이 저의 손을 꼭 잡으며 말씀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목사님, 제가 목사님 잘 압니다." 아마도 저는 그분을 향해 활짝 웃을 것입니다. 이 공간이 앞으로도 저의 성숙의 공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저의 작은 인생을 통해서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이 드러나고, 함께 믿음의 길을 걸어가시는 분들의 작은 쉼이 되기를 원합니다.

2023년 8월 28일 월요일

삶을 온전히 드리는 것의 기쁨 by 8개월 주일 설교의 대장정을 마치고

 






미국에 온지 11년이 지났습니다. 아내와 함께 그저 흥분되는 마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온 것이 바로 어제 같은데 시간이 이렇게 흘렀습니다. 젊었을 때에 삶은, 나의 선택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갈 수록 나의 선택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놀라운 거대한 손에 떠밀려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담임 목사님께서 안식년을 가지고, 부목사가 어떤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시간은 아마 평생에 딱 한번 정도 찾아올 것입니다. 그리고 저에게 그 역할이 맡겨졌습니다. 너무 큰 부담,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제가 할 일들을 그대로 다 하면서, 주일 설교 강단을 잘 감당해야 한다는 것은 저의 삶 가운데 가장 큰 도전이었습니다. 

설교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끝이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참으로 가벼운 자리인 것처럼 보이지만, 저에게는 가장 소중한 자리입니다. 대략 열세번 정도의 기회가 저에게 주어졌습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는 주일 설교가 세번입니다. 저는 세번의 설교가 모두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오시는 분들의 숫자는 차이가 납니다. 그러나 그 중요성은 사실상 동일합니다. 1부 예배는 교회의 중직자들이 오십니다. 그리고  2부는 연세가 많으신 어르신들과 성가대가 있습니다. 3부는 주로 젊은 층들이 있습니다. 3번의 예배는 모두가 소중하고 그 고유한 의미가 있습니다. 단 한번의 설교도 허투로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 그대로 최선을 다해 감당했습니다.

모든 부교역자들이 주일 설교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교회는 여러 이유로 부목사들에게 주일 설교를 잘 맡기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 자리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며, 교회의 영적인 분위기에 지대한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기회가 참으로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일생 일대의 가장 중요한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을 온전히 드려서 모든 것을 걸고 감당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어제까지 저에게 맡겨진 모든 설교를 마쳤습니다. 설교를 위해서 강대상 의자에 앉아 있는데 감사의 기도가 터져나왔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이 모든 기회를 허락하시고 잘 감당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 제가 설 수 있다는 것이 기적처럼 느껴졌습니다. 마지막 설교의 세번은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다시 정리하겠지만, 마지막 설교는 저의 내면에 있는 그동안 갈고 닦은 개혁주의 신학의 종합이었습니다. 저는 한동안 화가 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존귀히 여김을 받지 못한다고 종종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당황스러운 것은, 예배의 모든 요소들이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그분을 받들지만, 설교 안에서는 그리고 성도님들의 사고와 고백과 삶 속에 너무나 그리스도께서 약하다고 느낀다는 것입니다. 마치 잔치의 주인이 구석에 몰려서 소외 받는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분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 자신을 그분께 드리는 것에 대해서 마음껏 설교했습니다. 설교 단에 올라가기 전에 기도했습니다. “주님, 사람들의 인식에서 저는 완전히 사라지기 원합니다, 오직 주님이 나타나시기 원합니다”

기도에 응답하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은혜 받으신 분들도 계셨고, 저를 노려보고 가신 분들도 계셨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반응입니다. 예수님께 당신 자신을 드려야 한다는 가장 직설적인 외침은, 어떤 이들에게는 하늘의 기쁨으로, 어떤 이들에게는 삶의 저주로 느껴질 것입니다. 원래 기독교 신앙은 그런 것입니다. 이제는 더욱 더 주님께 생명을 드리는 자들과, 근심하며 발걸음을 돌리는 자들로 나누어집니다. 

이미 설교 준비를 완벽하게 마쳤기 때문에, 설교 전에는 조용히 루이스의 책을 읽었습니다. 마음이 평안해지고 안정을 찾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합니다. 평범함에 지친 저의 마음에, 가장 탁월하게 주님의 뜻을 알려줍니다. 저의 마음에 직접 들려주는 그의 이야기들은 너무나 달콤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새롭게 합니다. 

저에게 있어서 지난 8개월은 사라진 것처럼 느껴집니다. 지나치게 최선을 다했고 그런 면에서 후회가 없습니다. 아마 다시 돌아가서 해보라고 하더라도, 더 잘 할 자신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소극적으로는 교회에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저의 역할을 잘 감당했고, 적극적으로는 목회자로서 보일 수 있는 최선으로 설교를 감당했습니다. 주님께서 넘치게 저에게 은혜와 기쁨을 주셨고, 분에 넘치는 칭찬을 받았고, 제가 누릴 수 없던 영광을 누렸습니다. 

이제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며칠 전 부터 갑자기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금보다, 열배의 깊이를 가지고 싶다” 이미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수준은 지나갔습니다. 사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저는 배우고 배우고 또 배울 뿐입니다. 배운 것을 실천하고 갈고 닦고 더 나아질 뿐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의 기도입니다. “주님, 열배의 깊이를 허락해 주십시요”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이미 삶의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스스로도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여전히 목이 마르다고 느꼈습니다. 제가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처럼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팀켈러처럼 되고 싶고, 루이스처럼 되고 싶고, 칼빈처럼 되고 싶고, 마이클 호튼처럼 되고 싶고, 박영선 목사님처럼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저의 꿈입니다. 그리고 솔직한 제 내면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들 보다 더 나아야한다고.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저의 개인적인 욕심은 아닙니다. 앞으로 이정도 수준에서 살아도 크게 잘못될 일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주일 설교를 하면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설교를 들으시는 성도님들의 그 진지함과 기뻐함을 보면서, 그렇게 좋아해주시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빛나는 눈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더 잘해야겠다” 

하나님께서는 설교자를 세우시고 그분의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교회의 신비입니다. 예배에 와서 앉아 있다는 것 자체가 사실상 그런 기대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바랄 수 없는 그 어떤 것을 얻고자 하는 그 간절한 마음으로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탁월해야 합니다. 그분들의 기대가 있기 때문에, 저는 앞으로도 더 깊어져야 합니다. 굳이 그것을 수치로 표현하자면, 열배입니다. 

곰곰히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한동안 제 설교가 늘지 않아서 정말 고민했습니다. 그때에도 이미 저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고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새로운 길을 여셨습니다. 저를 더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의 한계를 스스로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주 섬세하고도 확고한 전략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저의 결론은, 루이스와 칼빈을 평생동안 가장 진지하게 그리고 깊게 파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제가 가장 믿을 수 있는 두분입니다. 루이스는 세상을 향해서 가장 탁월하게 기독교를 설명하고 이해한 사람이며, 칼빈은 가장 성경적으로 탁월하게 기독교를 이해하고 밝히 보인 사람입니다.

물론 종종 두 사람의 책을 읽기는 했습니다. 루이스야 원래 좋아했고, 지금도 기독교 강요를 읽고 있습니다. 하지만 태도 자체를 바꾸었습니다. 그들의 것이 완전히 저의 것이 되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데 이렇게 말하더군요. “두주 전쯤에 바로 이 부분에 대해서 루이스가 저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물론 직접은 아니구요” 사람들이 모두 즐겁게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팀켈러 목사님이 얼마나 루이스를 사랑하는지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팀켈러 목사님에게 루이스는 살아있는 사람이고 또 늘 동행하는 존재였습니다. 

칼빈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신학책을 보고 학자들을 살펴보지만, 그러나 가장 성경적으로 탁월하게 설명하는 것은 역시 칼빈입니다. 흔들림 없이 신뢰할 수 있는, 그리고 의지할 수 있는, 성경이 이야기한만큼 성경에 대해서 깊이 있게 이야기하는 분이 칼빈입니다. 칼빈의 모든 태도와 모든 사고와 모든 경건을 저의 것이 되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네이버 밴드를 추가로 두개를 더 만들었습니다. “하루 한번” 루이스, “하루 한번” 칼빈입니다. 멘탈리티에 빠져서 반복해서 읽으면서 얻은 유익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마치 그런것처럼, 평생동안 하루 한번 루이스와 칼빈으로 저를 완전히 변화시키는 것이 목적입니다. 천천히 그러나 깊이 그리고 아주 지나치게 진지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아마 그 길의 언젠가에는, 열배 쯤 깊어져 있는 제가 존재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모든 것은 주님의 은혜입니다. 목회자로서의 저의 여정은, 어떤 의미에서 이제 시작입니다. 마치 저는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 보물이 가득 담긴 바로 그 방의 문을, 아주 살짝 열어보고서 놀라버린 아이입니다. 오 이럴수가! 눈이 부셨습니다. 그곳에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것들이 있었습니다! 제대로 쳐다볼 수 조차 없는 아름다움입니다. 그래서 떨렸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주 조금 맛보았습니다. 그것은 내 삶 전체를 드려도 아깝지 않은 그 어떤 것입니다. 그래서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저의 가진 모든 것과 저의 삶 전체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곳에 쓰여지기 원하고, 저에게 맡기신 성도님들을 잘 섬기시는데 사용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저의, 유일한 소원입니다. 

2022년 12월 27일 화요일

인공지능 (A.I.) 검색 ChatGPT, 목회에 사용할 수 있을까? (2023년 1월 업데이트)

 

"인공지능"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은 시대가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영화나 소설 속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들이 우리의 현실에서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운영하는 찬양 채널의 모든 찬양 커버를, 인공 지능 DALLE2 가 그려주는 그림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매주 한곡씩 커버곡을 준비하면, 특색 있는 그림을 준비하는 것이 도저히 제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주 빠르고 간편하게, DALLE2가 그려주는 그래도 꽤 괜찮은 그림들로 유투브 영상의 커버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고급스러운 느낌의 그림들을 "단 몇초"만에 생성시켜주는 능력은 언제나 놀랍다고 생각합니다.  

* DALLE2

* 페이스 피아노

그런데 얼마전에, 흥미로운 기사를 우연히 보았습니다. "ChatGPT"에 대한 기사였습니다. "대화형으로 검색을 해주는 실험적인 단계의 검색 형태"인데, 그 성능이 너무나 뛰어나서 구글에서 긴장하고 대응한다는 기사였습니다. 심지어, 프로그램 코딩을 수정해 준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놀랍더군요, 이미 현재의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고 말해도 과장되지 않은 구글에서 긴장을 하고 있다고?

바로 찾아보았습니다. 공교롭게도, 제가 늘 사용하는 DALLE2를 개발한 OpenAI의 하위 서비스였습니다, 갑자기 기대감이 생겼습니다. 이미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DALLE2를 개발한 회사에서 검색 엔진을 만들고 있다? 그것도 단순한 검색 엔진이 아닌 마치 사람에게 물어보고 답을 얻는 듯한 결과를 주는? 이건 정말 "새로운 차원의 도전" 이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테스트해 보았습니다. 

현재 접속자들의 폭주로, 구글 검색을 통한 링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일단 아래 블로그로 들어가시면 최상단에 "Introduting ChatGPT research release Try" 가 보입니다. 

* OpenAI Blog
https://openai.com/blog/

"Try"를 누르시면 서비스 접속이 가능합니다. 처음 사용하신다면, 아마 계정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냥 이메일로 계정을 만들면 에러가 종종 납니다. 그래서 "구글 아이디"를 이용해서 접속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듯 합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아래 링크로 접속하게 되며, 실제로 "화면 하단 채팅창"에 검색 내용을 집어 넣고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아래 화면은 데스크탑 접속 화면이고, 셀폰으로도 거의 유사한 화면에서 실행이 가능합니다.

* ChatGPT: Optimizing Language Models for Dialogue - OpenAI
https://chat.openai.com/chat


자, 여기까지 왔는데 사실 마음이 조금 떨리더군요, 무엇부터 물어보면 좋을까? 곰곰히 생각하다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분야로 하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평소에 많이 고민하던 부분에서 나오는 답을 보게 된다면, "그 결과물의 수준을 평가하기에 좋겠다" 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추상적인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있을까?

그래서 첫번째 질문을 던졌습니다. 사실 조금은 무모하다고 생각하면서 큰 기대감 없이 질문을 넣었습니다. "How to develop the reading skill?" 청년 시절 이후로, 지금도 제 마음 속에 있는 가장 거대하고 또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래도 남들보다 조금은 더 고민하면서 살았다고 생각하는 자부심이 있는 분야입니다. 아래 글처럼 답이 나왔습니다. 


답이 나오는데, 마치 사람이 글을 직접 쓰는 것 처럼 순차적으로 번호에 따라서 내용이 나왔습니다. 약 5초 정도 걸린 듯 하네요. 일단, 분량에 너무 놀랐습니다. 사실 제 질문은, "실용적이면서도 상당히 추상적인 질문" 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서 천차 만별의 답변이 가능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읽기 능력을 어떻게 개발할 것인가에 대한 "굉장히 탁월한 내용"을 정리해서, "단 한번"에 보여줍니다. 

위의 내용에서, 저는 이런 부분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책 읽기 위해서 시간을 따로 내라는 것, 그리고 흥미로운 것에서 부터 먼저 시작하라는 것, 그리고 적당한 쉼을 가지면서 요약을 하라는 것, 그리고 "active reading"을 하라는 것, 크게 소리내서 읽어보라는 것, 그리고 멘토에게 도움을 청하라는 것입니다. 

내용 전체가 마음에 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무엇 하나 빼 놓을 수 없는 내용들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active reading을 하라는 것은 정말 좋았습니다. 요즘에 제 관심이라서 더 눈에 보인 듯 합니다. 

결론적으로 책 읽기라는 분야에서, 제가 평소에 고민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거의 다 들어가 있습니다. 북클럽이라는 그룹 셋팅에 대한 이야기를 빼고 "개인 리딩에 관한 거의 완벽한 대답"입니다.

답변을 보면서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약에 누군가가 나에게 찾아와서 정말 간절한 얼굴로, "어떻게 해야 읽기 실력을 늘릴 수 있는가?" 라고 물어본다면 과연 내가 5초 안에 저렇게 대답할 수 있을까? 

솔직히 저는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하루 정도 고민해도, 저 정도 대답은 만들어내기 어려울 듯 합니다. 위의 내용을 보고서 제가 생각한 것은, 위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해서 교육 자료로 만들어도 충분하겠다는 판단입니다. 잠깐 스쳐지나가는 생각입니다. "그 때 출처는 뭐라고 적으면 좋을까?" 

* "실제적인 교육 목회"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자, 이렇게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을 하나 얻고나니, 갑자기 궁금해지더군요, 저는 역시, 천상 목회자입니다. 그럼 혹시 ChatGPT를 목회에 이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비슷하지만 또 다른 종류의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습니다. "How to develope the understanding of the Bible?" 모든 목회자가 그리고 성도님들이 해볼만한 질문입니다. 비슷하게 약 5초 정도 후에 아래 대답을 내 놓았습니다. 


처음의 답변보다 좀 더 놀랐습니다. "아니, 이걸 어떻게 이렇게 해주는거지?" 이 답변도 마음에 드는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시간을 특별히 내라는 부분, 당신이 이해하기 쉬운 번역을 고르라는 것, 스터디 바이블을 포함해서 필요한 자료를 적극적으로 쓰라는 것, 그리고 그룹으로 하라는 것, 질문을 하라는 것, 이해를 위해 기도를 하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삶의 루틴으로 만들어라는 것, 이 모든 것이 다 탁월하다고 느꼈습니다. 

물론, 부족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추가적으로는 이런 내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단순히 내가 좋아하는 번역만이 아니라, 중요한 몇가지 번역을 정해서 비교를 하면 좋겠고, 개인 사고의 발전을 위해서 반드시 묵상과 질문을 먼저 하고 나중에 도움되는 자료를 보면 더 좋겠고, 또 결국 성경에 대한 이해는 평생 깊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하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검색 엔진이 혹은 인공지능 chat이 정도 결과를 단번에 보여줄 수 있다면, 너무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강의 하나를 준비해 보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만약에 누군가가 틀만 조금 도와줘도, 엄청나게 큰 수고를 더는 것입니다. 만약에 제가 성도님들을 대상으로 큐티에 대한 강의를 하게 된다면, 위의 내용을 간단히 참고해서 구조와 내용을 수정하고 살을 더 붙여도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혹시, "설교 준비 자체"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여기까지 해보니, 갑자기 더 궁금해지더군요, "그렇다면 설교 준비에 도움을 얻을 수 있을까?" 순간 저도 모르게 심호흡을 했습니다. 왠지, 금단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느낌이 들더군요, 저는 들어본적이 없지만, 곧 설교를 대신 써 주는 인공지능이 나올거라고 해서 웃어 넘겼던 기억도 났습니다. 

"혹시 ChatGPT에게 설교를 요구하면 어떻게 대답을 해줄까?" 그래서 해보았습니다. "First John chapter 5 verse 1 through 12 sermon" (처음에 검색 때에는 대충 하느라 오타도 났는데 심지어 오타도 가볍게 파악하고 수정하더군요) 그리고 이렇게 결과가 나왔습니다. 


제가 이 검색을 하기 전에, 위의 본문 말씀에 대한 저의 설교 준비는 아직 충분하지는 않은 상태였습니다. 본문 묵상을 어느 정도 충분히 했다고 생각하고, 개역 개정에서 NET BIBLE을 살핀 이후에, 스터디 바이블들을 다섯 권 정도 읽어본 상태였습니다. 시간은 다섯 시간 정도 사용했고 내용은 약 70퍼센트 정도 머리 속으로 정리한 상태였습니다.  

이 상태에서 ChatGPT의 답변을 보고 제가 느낀 첫 인상은, "쉬워서 좋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에 요한 1서는 결코 쉬운 내용이 아닙니다. 쉬운 듯 굉장히 복잡한 논리 구조가 그 안에 들어가 있고, 그것을 성도님들이 이해하기 쉽게 정리하는 것이 저는 참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제가 좋아하는 스터디 바이블들도 일치점이 부족하고, 의외로 약간 뭔가 헤매고 있다라는 느낌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ChatGPT는, 순식간에 논리의 흐름에 따라서 단락 별로 정리를 해주었습니다. 물론, 그 안에서 깊은 신학적인 의미나 통찰을 발견하기는 어려웠지만, 적어도 아주 간단하게 본문의 개요를 살펴보는 정도로는 충분하다고 느꼈습니다. 아마 많은 목회자들이 공감할 것입니다, 쉬운 설교가 정말 어려운 설교라는 것을, 그런 면에서 위의 내용은 저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조심스럽지만 저의 실제 설교 내용에 넣어 보았습니다. 제 설교에 있어서 실제로 도움이 되었던 부분은, 인트로 부분에서 "이 본문이 어떤 내용이다" 라고 두줄로 요약한 부분입니다. 제가 이해할 때에는 큰 무리 없이 잘 정리했다고 생각해서, 실제로 제 설교 인트로에 거의 그대로 인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정말 흥미로웠던 것은, 10-12절을 제가 가장 애용하는 Grace and Truth 스터디 바이블과 비교해 본 것입니다. 놀랍게도, 본문의 기본적인 의미를 ChatGPT가 좀 더 드러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 설교의 논지를 그쪽 방향으로 포커스를 맞추어서 설교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5:10–12 Ultimately, the testimony that Jesus is the Son of God originates with God himself. Those who accept this testimony have eternal life, while those who reject it not only reject the message but imply that God is a liar. How one responds to the Son results in eternal life or death, since to reject the Son is to reject God himself. No one can love the Father and not love his Son.

Barry Joslin, “1 John,” in The NIV Grace and Truth Study Bible, ed. R. Albert Mohler Jr. (Grand Rapids, MI: Zondervan, 2021), 1761.

*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과 사랑, 그리고 승리
/ 요한1서 5장 1-12절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12/1-5-1-12.html

만약에 누군가가, 저의 짧은 새벽 설교에 ChatGPT가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주었는가 물으신다면, 저는 약 15퍼센트 정도라고 답하고 싶습니다. ChatGPT의 내용 제안은, 저의 설교의 서두와 전체 구조에서 영향을 주었습니다. 

퍼센트로는 적어 보일 수 있겠지만, 제가 위의 내용을 보기 전에 묵상하고 고민했던 부분을 ChatGPT가 제안한 틀 안에 넣었다라는 맥락에서는 정말 대단한 영향입니다. 물론 저는 문과이기 때문에 상당한 부분을 직감적으로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자로서 제가 받은 인상은, "제가 충분히 본문 묵상을 하고 또 다양한 자료들을 본 이후에 한번쯤 ChatGPT로 검색해 보는 것도 정말 괜찮겠다" 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마치 "인공지능 스터디 바이블 한권"을 얻은 느낌이었습니다. 그것도 엄청나게 똑똑하고 점점 성장하고 있는 그런 책입니다.

어떤 자료든지 그대로 인용하고 그대로 설교하는 것은 표절이지만, 그러나 충분히 모든 자료들을 살피고 그것을 해석하고 종합할 능력이 있는 목회자라면, ChatGPT를 통해서 크고 작은 도움을 분명히 얻을 수 있겠다는 조심스러운 생각을 했습니다. 

* 혹시, 설교에 들어갈 "인용 자료"를 찾아줄 수 있을까? 

솔직히 이 정도 사용해보고 나니, 조금 무서운 생각도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공부하고 고민해 온 것들이 흔들리면서, "과연 인간의 사고라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도 들더군요. 

정설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기업에서 AI를 연구하는 연구원이, "자신이 개발하던 AI가 인격이 있다" 라고 주장했던 것이 농담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 그분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닐까요?

여하튼 저는 실용적인 부분에 관심이 크기 때문에,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설교에 들어갈 인용할 수 있는 내용들을 찾아줄 수 있을까?" 예를 들어서 "C.S. 루이스가 희생적인 사랑에 대한 언급을 한 인용을 찾아줄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한 이유는, 이 부분이 어쩌면 설교자들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될수 있겠다 싶었기 때문입니다. 좋은 책과 아티클을 판단하는 기준은, 그 사람이 어느 정도 수준의 자료들을 사용했는가를 통해서 결정이 됩니다. 그렇다면 결국, 내가 어느 정도 수준의 자료를 읽고 인용하는 것이, 설교의 수준을 결정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 부분은 중요하지만, 정말 고통스러운 부분입니다. 설교의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 꾸준하게 독서를 한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마도, 훈련된 목회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목회자가 꾸준히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저는 그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로고스 10에서도 그런 인용 문구를 제공하는 기능을 야심차게 넣었다고 생각합니다.

ChatGPT에게 "복합적인 의미를 담은 인용 문구"를 요구할 생각을 하면서, "그건 좀 어려울 것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ChatGPT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 입니다.

저는 솔직히, 위의 말씀드린 설교에 대한, 혹은 본문 설명에 대한 내용은, 그렇게까지 난이도가 높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대단한 결과이지만 그럼에도 제 상상 속에 존재하는 결과라고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어짜피 내용이 더 늘어나지 않고 정해져 있고, 그 정해진 분량 안에서 이미 관련된 많은 데이터베이스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방대한 자료만 모으면, 본문 구조 분석과 요약 정도는 인공 지능도 가능하리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C.S. 루이스가 주장한 희생적 사랑에 대한 인용을 찾으라" 라는 식의 요구는, 좀 심한 요구입니다. 아마 제가 동료 목회자에게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해도, 상대방이 적잖이 당황할 것입니다. 이건 방대한 검색 뿐 아니라, "고차원적인 사고를 요구하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어쩌면 우리 주변의 사람들 중에는, "희생적인 사랑"이라는 말의 의미도 제대로 파악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복합적인 질문에 답하는 것은, 저의 관점에서는 "사람이 하는 일" 입니다. 그것도 아주 숙련된 사고를 할 수 있는, 훈련된 성도 혹은 목회자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도 기대감을 가지고, 혹시나 해서 검색해 보았습니다. 순전히,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넣었습니다. "What is a quotation of c.s lewis about a sacrificial love?" 그런데 이런, 제 생각을 완전히 뛰어 넘었습니다. 


"소름이 돋는다"는 것이 이럴 때 쓰는 말일까요? 아주 오래전에 네가지 사랑을 다 읽었고, 최근에 설교 준비하면서 다시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적어도 제가 이해하는 바에 따르면, 거의 정확하게 루이스의 요점을 파악하고 답을 해주었습니다. 루이스의 인용, 인용한 책, 그리고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까지 정리해서 알려줍니다.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는가요? 

위에 넣지는 않았지만, 동일한 질문을 몇 번 더 넣어 보았습니다. 기본적인 내용은 비슷한데 흥미롭게도 약간씩 내용이 바뀝니다. 그런데 또 다른 내용에서는, 루이스의 희생적인 사랑은 vulnerable 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한다고 설명을 덧붙이더군요. 

저는 이 부분에서, "제 이성이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최근에 완전히 빠져서 듣고 있는 팀켈러 목사님 설교의 핵심 내용이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최소 다섯편 이상에서 비슷한 내용이 등장했습니다. 

루이스의 영향을 크게 받은 팀켈러 목사님은, 자신의 설교의 정말 커다란 논지들을 하나님의 vulnerability를 통해서 풀어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하시지만, 그분의 사랑 때문에 우리를 위하여서 vulnerability를 기꺼이 감수하신다는 논리입니다. 들으면서 얼마나 은혜를 많이 받고 좋았는지 모릅니다. 차에서 들으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걸 보다니?

그렇다면, 가능성은 다시 무한대로 뻗어갑니다. 비록 제가 해보지는 않았지만, 얼마든지 응용 질문이 가능할 것입니다. "What are the most four famous quotations about the sacrificial love of the pastors?" 만약 이런 수준의 질문을 넣을 수 있고 답을 찾을 수 있다면, 이것은 과연, "꿈과 같은 일들이 우리의 현실이 되었다" 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 "좀 더 고차원적인 질문"에 답해줄 수 있을까?

자 여기까지 오니, 늦은 밤 심장이 심하게 뛰고 현기증이 조금 느껴졌습니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건가?" 그리고 정말 호기심으로 마지막 질문을 던졌습니다. 위의 질문보다 "좀 더 고차원적인 질문"으로 일부러 시도해 보았습니다. 

아예 루이스의 책 한권을 정해서, "그 안에서", "희생적인 사랑"에 대한 언급을 물어본 것입니다. "What is a quotation in mere christianity of c.s. lewis about sacrificial love?" 순전한 기독교를 여러번 보았지만, 솔직히 저에게 누가 이렇게 물어보면 최소 며칠 이상 고민할 질문입니다. 아마 답을 못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그런데 ChatGPT는 이렇게 답을 주더군요.


제 기억으로 이 부분은, "고통과 고난이야 말로 하나님의 확성기이다" 라고 루이스가 표현하는 유명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아주 흥미로운 것은, ChatGPT 는 이 내용을 바탕으로 그 이후에 이어지는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과 연결합니다. 글쎄요, 충분히 더 살펴보아야하겠지만, 여하튼 감히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수준에서 답변을 만들어내는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물론 결국에는 사람이 중요하고, 목회자 자신의 성숙한 사고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ChatGPT의 결과를 "평가"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위의 내용을 평가해보고, 만약에 이 부분이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못하다면 넘어가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이 부분을 주의 깊에 살펴보고 또 다른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면, 목회자는 새로운 신학적인 사고를 끌어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조심스럽지만 솔직한 제 생각입니다. 어쩌면 이것을 바탕으로 해서 학위 논문 하나도 거뜬히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위의 내용에 대하여서 제가 너무 과장된 평가를 한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이미 생각하신대로 "구글 검색" 혹은 "구글 스칼라 검색"을 열심히 하면, "누군가가 순전한 기독교 안에서 희생적인 사랑에 대하여 정리한 아티클 혹은 논문"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ChatGPT은 아직 시작 단계" 라는 것입니다. 겨우 평가 단계에서 이 정도 결과를 보여주는데, 전면 개방 되고 완전한 서비스가 시작되면 과연 어느 정도까지 발전하게 될지 그 끝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인간의 한정된 시간과 에너지"입니다. 물론 하루 종일 앉아서 다양한 아티클과 논문을 찾을 수 있고 그것을 종합할 수 있겠습니다. 저도 늘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그저 공부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목회자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혹시라도, 내가 얻고자 하는 그 결과를 위한 과정에서 들어가는 시간과 에너지를 조금이라도 아낄 수 있다면, 그리고 내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에서 빠르게 사고를 도와주거나 혹은 전환 시켜줄 인공지능의 도움이 있다면, 감히 누구도 상상치도 못했던 놀라운 편의성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 결론 : 우리 앞에 펼쳐질 "전혀 새로운 세상"을 준비하라

그저 개인적인 호기심에 시작한 몇가지 질문과 답이, 제가 상상하지 못한 수준으로 일이 커진 듯 합니다. "공부, 학습, 검색, 논리, 종합" 등등 제가 평소에 좋아하던 모든 영역이, 완전히 새롭게 보여집니다. 배움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인공 지능은 과연 그 능력의 한계는 어디이며, 우리는 어디까지 그것을 받아들이고 또 사용할 수 있는 것일까요? 

여기서 놀라운 것은, ChatGPT는 아직 시험 단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덕분에 무료로 사용해 볼 수 있었습니다. 아마 테스트 단계가 끝나면 마치 DALLE2 가 그런 것처럼, 질문 몇개 당 크레딧 얼마 정도로 금액이 정해질 것이 틀림 없습니다. 만약에 ChatGPT가 더 충분한 데이터 베이스가 쌓인다면, 이것의 파급 효과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최근의 기사를 보니, 뉴욕시의 학교들은 학교에서 ChatGPT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렇게 막은 이유에 대해서 "학생의 배움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 그리고 컨텐츠에 대한 안전함과 정확성에 대한 염려"라고 말합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제가 경험한 혼란스러움에 대한 내용이 정확하게 동일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은, 아마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형국이 될 듯 합니다. 학교에서 사용하지 않으면 집에서 사용하면 그만입니다. 그리고 어떻게든 학교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누군가는 찾아낼 것입니다. 저는 기사를 보면서, 결국에는 ChatGPT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고, 어떻게 유용하게 쓸 것인가를 공론화하는 것만이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사고, 사고력을 키우기 위한 배움 그리고 그러한 배움의 근간인 컨텐츠에 대해서, 그 정의에서부터 새롭게 접근해야할 시급한 필요성을 느낍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영화 아이언맨에서 토니 스타크는 인공지능 자비스와 함께 살아갑니다. 자비스는 매우 복잡한 계산을 해내고, 공학 시스템의 전반을 관장하면서 토니를 바로 옆에서 돕습니다. 

그런데 저는 영화를 보면서 단 한 순간도, 토니 스타크의 탁월함과 위트, 그리고 그의 지혜가 자비스 때문에 손상된다고 느끼지 못했습니다. 토니는 자비스를 의지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비스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그는 자비스와 동행하지만, 그러나 여전히 그를 지배하는 존재입니다. 그는 자비스의 능력을 활용하지만, 결국에는 그의 독자적인 지혜와 판단에 따라 행동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현대의 수 많은 발명품들이 SF영화에서 영감을 받은 것 처럼, 어쩌면 ChatGPT도 그러한지도 모르겠습니다. ChatGPT에 지나치게 놀랄 필요 없는 것은, 이미 영화에서 보던 것이 겨우 보기 좋게 구현되는 시작 단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어떻게 인공지능과 함께 살아갈지에 대한 해답도, 동일하게 그 영화 안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ChatGPT로 몇번의 검색을 하면서, 로고스가 많이 생각 났습니다. 로고스는 탁월한 프로그램입니다. "현존하는 최고의 성경 그리고 신학 프로그램"입니다. 그러나 이제 경우, 구글 번역 기능을 추가로 넣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자체적인 인용문 검색을 하기 위해서는, 고급 패키지를 구입해야만 합니다. 로고스 10은 스타터만 구입했기 때문에, 아쉽게도 저는 인용문 검색 기능을 아직 사용해 보지 못했습니다.

과거에 비해서 로고스의 검색이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ChatGPT의 수준으로 정보를 가공해서 보여줄 수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이건 마치, 고급 프로그램과 다방면에 뛰어나고 지혜로운 유능한 비서 한명을 두는 것의 차이 정도로 느껴졌습니다. 마치, 기계와 사람의 차이를 보여주는 정도의 격차를 느꼈습니다.

저는 로고스를 너무 좋아합니다. 저의 든든한 목회의 동반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대단하던 로고스가 약간 초라해져 보이는 것은, 저만의 착각일까요? 그래서 저는 이미 완숙한 단계에 있는 로고스를 현재의 상태에서 계속 사용하고, 앞으로 ChatGPT는 추가로 한달에 30불 정도는 투자할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도로서 그리고 목회자로서 여러 가능성을 생각해 봅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꾸준히 공부하고 책을 읽고 설교를 준비하고 목회를 해야하겠지만, "새로운 세상을 맞이할 준비"가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ChatGPT를 통해서 많은 부분이 편리해지고 더욱 탁월한 부분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심지어 목회의 영역에서도 전혀 새로운 세상이 앞으로 열릴 것을 기대해 봐도 좋을 듯 합니다.

ChatGPT, 벌써 "교회 안"으로 들어오다 (2023년 1월 업데이트) 

이 글을 쓴지 얼마 안되어서, 제가 섬기는 교회 EM(English Ministry)쪽에 목사님이 멤버 중 한 명의 이야기를 전해주셨습니다. 

"자기가 혼자서 성경 공부할 때에 ChatGPT로 찾아봤는데, 내용이 좋았다" 라고 모임 중에 이야기 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글을 저희 교회 목사님들과 이미 나누었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직접 들으신 목사님께서는 현재 상황을 우려하면서 저에게 가장 먼저 물어보시더군요. "정목사님, ChatGPT는 출처가 불분명한 것이죠?" 

제가 이 이야기를 듣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ChatGPT가 실제로 성도들에게 너무나 빨리 다가갔다"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제 글을 통해서 먼저 읽어보지 않았다면, 오히려 그 목사님은 ChatGPT가 뭐냐고 반문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목회자에게는 낯설고 먼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IT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리고 나이가 어린 분들은 벌써 능동적으로 ChatGPT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든 생각은, "목회자의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가" 입니다. 만약에 성도 중에 누군가가 ChatGPT를 통해 얻어낸 성경 묵상 내용을 가져와서 이것이 너무 좋다고 말한다면, 무슨 이유로 그것을 거절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단순히 "AI가 여기저기 참조해서 만들어내서 별로이다" 라고 말한다면, 과연 그것이 설득력이 있을까요? 

현재로서 저의 마음에 드는 생각은, 이제야 말로 목회자는 "좋은 자료를 근거로 자신의 설교와 교육을 뒷받침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저 감으로 설교하고, 그저 감으로 교육하는 정도로는 더 이상 성도들에게 권위를 가지기가 어려워졌습니다. "목회자인 내가 그렇게 생각하니까 당신은 수긍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시대는 사실상 지나갔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오히려 성도님들에게 "좋은 자료들을 제시"하고, 그것을 "함께 읽고 공부하고 평가하는 능동적인 사고의 훈련"을 온 교회가 실행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드는 것이 시급합니다. 성도님들이 혹시라도 ChatGPT가 만들어낸 내용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좋은 자료를 가이드로 삼아서 스스로 그리고 함께 성경을 배우고 익히면서, ChatGPT를 오히려 평가할 수 있는 수준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로고스 프로그램을 사용하면서 가장 잘 쓰여진 스터디 바이블 세권 정도를 함께 꾸준히 사용하면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일단 비용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몇년 동안 시도하면서, 보통의 성도님들에게는 스터디 바이블 한권을 구입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현실적인 대안으로 "올리브트리"를 제안하고 싶습니다. 올리브트리에서는, 가장 표준적인 스터디 바이블이라 부를 수 있는 ESV 스터디 바이블의 축약본인 ESV Global Study Bible이 무료입니다. 그리고 개역 성경도 무료입니다. 적어도 올리브트리를 사용하면, 전혀 추가적인 비용 없이 무료로, 성도님들이 참조할 수 있는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 1961년 「성경전서 개역한글판」 - Korean Revised Version (1961)
https://www.olivetree.com/store/product.php?productid=29674


* 형이 거기서 왜 나와? - ESV Global Study Bible 무료 in 올리브트리앱!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05/esv-global-study-bible-in.html

시대가 너무나 급변한다는 것이 때론 두렵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눈앞에 너무나 명확하게 보이는 변화를 무시할 순 없습니다. 그것이야 말로 쇠퇴하는 지름길입니다. 변화를 직시하고 그것에 대해서 대비하고 장기적으로 대응해나가는 것만이, 미래 목회를 준비하는 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하루의 배움이 중요하고, 오늘 하루의 실천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의 앞날을 지키시고 인도해가실 것을 믿고 기도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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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13일 토요일

책 어디까지 읽어봤니? (16) - 담임목사가 되기 전에 알아야 할 7가지 Part 2 / 설교는 예배의 중심이며,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

 

담임 목사가 되기 전에 알아야 하는 Part1, 교회가 쇠락해져가는 시대에 희망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현실을 충분히 감안하면서 작은 교회로서 살아남기 위한 여러가지 조언들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Part1을 통해서 저는 예배와 소그룹에 대해서 더 고민하게 되었고 그리고 더욱 적극적인 성도들과의 만남의 중요성을 생각하면서 미래를 좀 더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Part2는 설교에 대한 내용입니다. 무려 일곱 개의 짧은 글들이 있었지만, 저에게는 임경근 목사님이 쓰신 설교, 말씀의 봉사!”라는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먼저 가장 좋았던 부분을 인용하고 싶습니다.

설교는 언제나 교회 예배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1517 마틴 루터에 의해 시작된 종교개혁 전에는 설교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초대교회 시대에는 말씀이 중요했지만, 4세기가 지나면서 서서히 예배에 변화가 찾아왔다. 예배는 점차 형식적인 성례(주의: sacramentalism) 전락했다. 예배는 말씀의 비중이 약화되고 눈에 보이고 감각적으로 느낄 있는 형식으로 바뀌어 갔다.

평신도는 예배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말씀이 사라지자, 눈에 보이는 예배당 건물과 그림과 장식에 의존해야 했다. 웅장한 건물은 하늘의 영광이 땅에 내려온 듯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비치는 빛의 아름다움은 마치 천국에 듯한 착각을 주었다. 예배당 안에서는 하나님이 계실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압도할 만큼 높은 천장은 인간을 한없이 작게 만들고 겸손하게 했다. 예배당 이곳저곳에 수많은 성상이나 성화가 걸려 있기에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경건해지고 인격이 거룩해지는 같았다

16세기 종교 개혁가들은 예배에서 설교의 의미를 중심에 놓고 중요하게 여겼다. ‘느끼는 예배에서말하는 예배 개혁했다. ‘보는 예배에서듣는 예배 개혁했다. 종교 개혁 교회는 성찬이 이루어지는 성찬대보다도 설교단을 높게 놓았다. 예배의 중심이 말씀이어야 한다는 것을 건물에 표현한 것이다. 교회 건물에서 성상과 성화를 가능한 없앴다. 건물은 아주 단순하게 설교에 집중할 있도록 지었다. 종교 개혁 교회는 설교단이 제일 높은 곳에 있다.

임경근, 설교, 말씀의 봉사!,” in 담임목사가 되기 전에 알아야 7가지, 초판. (서울시 마포구 양화로 78, 502: 세움북스, 2016), 66.

제가 부분을 인용한 것은, “설교의 변화에 대한 역사적인 인식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초대 교회 시절에 그렇게 중요하게 여겼던 말씀이, 중세 시대로 넘어오면서 점점 형식적인 성례로 바뀌었다고 지적합니다

말씀의 비중은 점점 줄어들고 눈에 보이는 어떤 종교적인 화려함이 말씀을 대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성도들을 무지하게 만들고, 결국 그들이 교회의 잘못된 가르침으로부터 벗어날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종교 개혁가들이 설교를 예배의 중심에 다시 가져다 놓은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런데 제가 우려하는 것은, 요즘 시대의 사람들이 생각할 때에 설교라는 자체가 매우 고리타분하고 재미 없는 것이라 여기면서 그것의 비중을 줄여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듣는 자체를 터부시하며, 마치 교회의 개혁이라는 것이 예배 중에 설교를 최대한 줄이면서 동시에 뭔가 간증이나 소그룹 모임으로 대체하려고 하는 것이 바른 방향인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혹은 예배의 개혁이, 찬양을 늘리고 설교를 줄이는 것이라고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도들이 설교에 대하여 마음에 어려움을 가지는 것을 이해합니다. 성도들은 설교를 통해서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보다는, 목회자의 주관 혹은 경험이 가득 들어간 어떤 것으로 너무 많이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읽고서도, 본문의 이야기는 하지 않고 다른 이야기로 시간을 가득 채운다면, 제가 예배의 자리에 성도로서 앉아 있게 된다고 해도 굉장히 마음이 힘들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설교를 줄이거나 없애는 것이 초대 교회로 돌아가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만약 현시대의 설교가 가장 교회적인 문제가 된다면, 오히려 제대로 설교할 있는 목회자를 키워야 하고 또한 좋은 설교가 무엇인가에 대한 교회적인 공감대를 만들어내는 것이 진정한 해결의 방향입니다. 그토록 어두운 중세 시대를 지나서 종교 개혁 시대에 다시 복귀 시켜 놓은 말씀의 권위는, 시대에도 지역 교회 목회자들의 뼈를 깎는 수고를 통하여 유지되며 강화되어야 합니다.

하나 글에서 좋았던 부분은, 설교는 선포하는 이라는 정의입니다. 저자는 누가복음 24 46-48, 사도행전 2 38, 그리고 로마서 10 14-15절의 주해를 통해서, 설교는 선포하는 것임을 설득적으로 논증합니다. 그리고 한글 성경은 선포가 전파로 많이 번역되어서 아쉽다고 말합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성경의 설교는 설득이라기 보다는 선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사전적인 의미 역시, 선포의 의미를 드러냅니다.

누가복음 24: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개역개정) 47 and repentance for the forgiveness of sins would be proclaimed in his name to all nations, beginning from Jerusalem. (NET)

33.256 κηρύσσωc: to publicly announce religious truths and principles while urging acceptance and compliance—‘to preach.’ πῶς δὲ ἀκούσωσιν χωρὶς κηρύσσοντος; ‘how can they hear if there is no one to preach?’ Ro 10:14

Johannes P. Louw and Eugene Albert Nid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Based on Semantic Domains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1996), 416.

2784. κηρύσσω kērússō; fut. kērúxō. To preach, to herald, proclaim.

(I) Generally, to proclaim, announce publicly (Matt. 10:27; Luke 12:3; Acts 10:42; Rev. 5:2; Sept.: Ex. 32:5; Esth. 6:9, 11; Joel 2:1). In the sense of to publish abroad, announce publicly (Mark 1:45; 5:20; 7:36; Luke 8:39).

(II) Especially to preach, publish, or announce religious truth, the gospel with its attendant privileges and obligations, the gospel dispensation.

Spiros Zodhiates, The Complete Word Study Dictionary: New Testament (Chattanooga, TN: AMG Publishers, 2000).

저자는 현대 교회의 문제점으로, 설교를 설득혹은 나눔정도로 이해하려 한다고 지적합니다. 역시 부분에 있어서 동의합니다. 저는 부분은 결국 설교자가 가장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선포를 하기 위해서는, 설교자 자신이 먼저 말씀에 대한 엄청난 확신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정작 이러한 확신을 자기 자신 안에서부터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충분하고 넘치는 말씀에 대한 묵상과 이해와 스스로에 대한 적용이 필요합니다. 본문의 주해로부터 시작되어서 결과물로 나온 설교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이건 양보 없다라는 그런 확신까지 가야 합니다. 그런데 부분이 결국 부족하기 때문에, 설교가 확신에 선포로 설교로 나오기 어려운 것입니다.

물론 저는 설교에 설득이라는 과정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비록 형상이 죄로 인해서 망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죄인은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고 자신의 삶의 방향을 정할 있는 일반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저는 설교 중에 설득의 과정도 분명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에 이해되지 않으면 전혀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어떤 부분에서는 복음을 설명하고 충분히 그들의 일반적인 이성을 향하여 설득하는 과정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설득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설교자의 태도입니다. 저는, 설교자가 청중을 설득하는 것을 설교의 최종적인 목표로 삼고 자신도 모르게 비굴해지는 것을 너무나 슬프게 바라봅니다. 설득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나, 설득 자체는 결코 설교의 최종 목표가 없습니다. 마치 당신이 이것을 이해하거나 용납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복음이 뭔가 부족한 것이다 라는 식의 설교자의 태도는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설교자는 당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신이며, 진리를 가진 자이기 때문입니다. 설교자가 선포하며 동시에 설득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청중이 설득되지 않는다고 해서 낙심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반응하지 않는다고 해도 설교자가 주눅들 필요도 전혀 없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당당하게 선포하고 당당하게 설득하여야 합니다. 진리는 여전히 진리이며, 어리석은 죄인이 진리를 버리고 밟는 일은 교회 역사 가운데 수도 없이 일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Part2 읽으면서, 설교의 중요성에 대해서 다시 한번 절감했습니다. 너무나 어두웠던 중세를 벗어나서, 종교 개혁자들이 자신의 생명을 걸고 다시 회복시킨 설교의 자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는 모든 수고는, 결코 물러설 없는 가장 위대한 것임을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설교야 말로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며, 앞으로 저의 모든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모든 진리가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아름답게 선포 되기를 원합니다.

* "책 어디까지 읽어봤니?" 전체 글 모음 / 당신을 변화시키기 위한 "가장 아름다운 길"
https://jungjinbu.blogspot.com/2023/03/blog-post_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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