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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9일 금요일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손과 마음을 가진 "고 박정수 권사님"을 기억하며

 

가끔씩은, 몸이 두 개이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종종합니다. 목회는 다양한 사역을 한꺼번에 감당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선 순위를 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것을 조절해도 어찌할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 마음이 아픕니다. 

고 박정수 권사님은, 저희 교회 성도님의 어머니이십니다. 팔십세가 넘으셨고 몇달 전에 위기가 있었습니다. 그때 잠깐 짬을 내어서 널싱홈에 방문하고 기도해드렸습니다. 그 후에 기적처럼 다시 회복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참 기뻤습니다. 

저는 치매로 소천하신 외할머니의 장례를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영주권 진행중이라 한국으로 갈수가 없었고, 제 마음을 헤아리신 어머니께서 장례를 다 치르고 소식을 전해주셨습니다. 어린 저를 온 정성으로 키워주신 외할머니의 마지막을 함께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참으로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르신들을 향한 마음이 더 애틋합니다. 

다시 권사님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몸이 이제는 더 많이 약해지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다른 일들을 다 재쳐놓고 그곳으로 달려갔습니다. 꽤 먼길이지만 이미 다녀왔던 길이라 별로 낯설지 않았습니다. 

오랜만에 뵈었는데 훨씬 마르셨고 약해지셨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방으로 들어가자 마자 침대 옆으로 다가가 손을 잡아 드렸습니다. 권사님 손은 너무나 따뜻하고 부드러웠습니다. 감사하게도 의식은 있으셔서 살짝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인사를 드렸습니다. "권사님, 저 기억하시지요? 예전에 한번 다녀갔던 정진부 목사입니다."

그런데 권사님께서 제 손을 어루만지시면서 뜻 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추운데 왜 왔어?" 갑자기 울컥해서 잠시 말을 이을 수가 없었습니다. 본인이 이렇게 아프신데도, 본인의 죽음이 바로 앞에 보이시는데도 이분은 이렇게 다른 사람을 걱정하시는구나. 억지로 더 웃으면서 말씀드렸습니다. "권사님, 괜찮아요, 날이 그래도 많이 풀렸습니다. 권사님 뵈러 오는데 날씨가 무슨 상관이 있나요, 권사님이 건강해지셔야죠"

저는 고난 중에 있는 성도님을 찾아뵐 때에 꼭 시편 23편을 나눕니다. 한번은 한 성도님 댁에서 말씀을 나누다가 제가 오히려 펑펑 우는 민망한 일도 있었습니다. 저 역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여러 번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말씀 안에서 제가 누렸던 모든 위로를, 성도님들과 나누기를 언제나 원하기 때문입니다.

박정수 권사님을 위해서 천천히 말씀을 읽어드리는데, 시편 23편을 암송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소리는 너무 작지만, 입을 벌려서 저의 읽는 속도에 맞춰서 함께 암송하셨습니다. 말씀을 읽고 권사님 잘 들으시도록 힘있게 설교했습니다. "권사님, 염려마세요, 주님께서 권사님과 지금 이 시간에 함께 하십니다, 가장 어려운 순간이지만 하나님께서 권사님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위로하고 발걸음을 돌이키며 또 오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권사님은 마치 기다리셨다는 듯이 또 말씀하십니다. "추운데 안 와도 괜찮아" 너무나 따뜻한 권사님 손 한번 더 잡아 드리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에, 권사님께서 주님 품에 안기셨습니다. 

저희 교회 집례가 아니었기에, 조문객의 한 사람으로서 예배당에 앉아 예배를 드렸습니다. 집례하시는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많은 것들을 생각했습니다. 삶에 대해, 죽음에 대해, 따뜻함에 대해, 천사같은 권사님의 얼굴에 대해, 그리고 남을 배려하는 진실한 사랑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권사님이 출석하셨던 교회 성도님들께서 참으로 아쉬워하셨습니다. 믿음의 권사님을 떠나 보낸다는 것은 모두의 슬픔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제 마음도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 온전한 주님의 품에 안기신 권사님을 생각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마음에 위로가 되었습니다. 

곧 다시 권사님을 뵌다면, 그 손을 다시 한번 잡고 싶습니다. 아마도, 이 땅에서 그 몇 번의 순간보다 훨씬 더 따뜻하고 부드러울 것입니다. 건강해지시고 또 아름다워지신 권사님께서 저를 반겨주실 것을 확신하고 기대합니다. 그리고 그때에는 농담으로 말씀드려야겠습니다. "권사님, 그동안 잘 지내셨죠? 이제 날이 안 추워서 권사님 다시 뵐려고 왔어요." 영광스러운 주님 나라에서, 고 박정수 권사님 다시 뵐 날을 기다립니다.

간절히 하나님을 원했던 축복의 사람, "고 임종인 장로님"을 기억하며


목회자에게 있어서 삶과 죽음은 맞닿아 있습니다. 이것은 그저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그렇습니다. 오늘은 누군가의 탄생을 함께 기뻐하시만, 또 내일은 누군가의 죽음을 함께 가슴 아파하며 유가족을 위로합니다. 

죽음에 대한 감각을 가지는 것은 참으로 유익합니다. 왜냐하면 삶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오늘이 내 삶의 마지막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그 숭고한 마음은, 오늘 내 설교가 마지막 설교일 수도 있다는 그 절박함은, 우리의 태도의 근본을 뒤흔듭니다. 

임종인 장로님을 처음 뵌 것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 교회를 떠나셨다가 다시 돌아오셨습니다. 연세가 80이 훌쩍 넘으셨지만 예배를 사모하시고 빠지지 않고 나오셨습니다. 다만 섬겨야 하는 성도님들이 여러분이라, 깊은 관계를 가지기 전에는 그분의 마음까지 알 수는 없었습니다. 

어느 날 임장로님께서 속하신 순 모임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제일 연장자이시기 때문에 순장님께서 장로님에게 대표 기도를 부탁하셨습니다. 그때 그분의 진지한 목소리를 처음 들었습니다. 진실하고, 순수하고, 간절하게 기도하시는 그 음성을 처음 들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바로 눈 앞에 계시는 것처럼 기도하시는 그 간절함이 저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참 감사했던 것은, 저를 위해 축복하며 기도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저의 목회를 위해서, 저와 저희 가족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주셨습니다. 손자뻘에 불과한 목회자를 귀히 여겨주시고 또 기도해 주심에 참으로 마음이 기뻤습니다. 목회자는 받는 것을 기대하지 않고 누군가의 안부를 묻는 사람이기에,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주는 분들이 특히 더 고마운 듯 합니다.

암 투병 중이시던 장로님께, 더 이상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댁에서 호스피스 케어를 하시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댁으로 찾아갔습니다. 권사님 혼자 남편을 돌보셔야 해서 집이 정리가 안되어 부담스러워하셨지만, 꼭 찾아뵙고 싶었기 때문에 조금은 무리를 하였습니다. 

그래도 장로님이 의식이 있으셨습니다. 비록 힘이 없어 많은 말씀은 못하셨지만, 권사님께서 장로님이 얼마나 귀하게 그동안 교회를 섬겼는지,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얼마나 선하게 대하셨는지를 알려주셨습니다. 권사님께서 부탁하셔서 면도기로 장로님 면도도 해드렸습니다. 

시편 23편을 천천히 크게 읽어드리고 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아프신 분들을 찾아뵈면 크게 기도합니다. 때론 그래서 목이 상하지만, 그저 잠잠한 기도로는 제 마음의 간절함을 다 표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앞에 두고, 삶의 가장 큰 어려움과 고통 앞에서 어찌 제가 조곤조곤 기도할 수 있겠느냐는 마음에 결단이 있기 때문입니다. 

잠깐 고민하다가, 장로님의 가슴에 올려진 손을 조심스럽게 꼭 잡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장로님께서 힘을 내서 제 손을 끌어 올리시고는 결국에는 본인 머리에 제 손을 올리셨습니다. 말씀은 안 하셨지만, 안수 기도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장로님의 마지막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평소보다 더 크게 그리고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이 어려운 시간을 오직 목자 되신 주님을 의지할 수 있기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지만 이겨내실 수 있기를, 성령께서 주시는 하늘의 평안으로 가득 채워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기도의 문장이 정지할 때마다 힘을 내어 아멘하시는 그 음성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심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 제 평생에, 장로님의 머리에 안수하고 기도한 것은 처음인 듯 합니다. 그리고 죽음을 앞에 두신 분을 놓고도 그러합니다. 장로님의 그 순간은 단순히 어린 목사의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종을 존대하며 간절히 주님의 은혜와 복을 사모하였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기도가 끝이 나고 장로님과 권사님 격려해 드리며 돌아오는 발걸음이 그래도 조금은 가벼웠습니다. 넘치게 위로하시는 주님의 역사를 함께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집례한 어제의 하관 예배를 마지막으로, 임장로님의 모든 장례 절차를 마쳤습니다. 우리의 육신이 무너져도 성도는 주님 앞에 가장 아름다운 존재라는 저의 설교는, 단순히 설교가 아니라 저의 깊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천국에서 설교를 들으실 장로님에 대한 진실한 고백이었습니다. 간절하게 하나님의 바라고 그분의 복을 사모했고 누렸던 장로님이야 말로, 목회자로서 저의 삶 속에 오래 남으실 것입니다.

임장로님의 관이 내려가는 것을 더 가까이 다가가서 보았습니다. 그 순간이 마치 저에게는 친할아버지께서 하관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멀지 않아 장로님을 뵐 생각에 마음에 위로가 있었습니다. 임장로님을 뵙는 그 날에 더 기쁘게 만나기를 원합니다. 저도 장로님처럼, 누군가를 간절하게 축복하는 삶으로 살았다고 조금은 자랑하고 싶습니다. 장로님 다시 뵐 그 날까지 부끄럽지 않은 목회를 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2023년 2월 9일 목요일

고 이명은 집사님을 기억하며 & 예수님을 담은 질그릇 / 고린도후서 4장 6-7절 장례 설교


* 고린도후서 4장 6-7절 / 고 이명은 집사님 천국 환송 예배 설교

제가 이명은 집사님을 처음 만난 것은 2014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헤브론 교회로 오기 전에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연합교회에서 부목사로 섬길 때에 제가 고인의 교구 담당 목사였습니다. 그때 집사님은 미술 공부를 하고 계시는 상황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공부하시면서 시카고를 자주 왔다 갔다 하셨습니다.

필라델피아에서 처음에 뵙고 안부를 나누면서 제가 받은 인상은 아름다우시고, 친절하시고, 위트가 있으시고, 참 따뜻한 분이다 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때 엄마를 보기 위해서 진우 형제가 방문했을 때에 처음으로 진우 형제도 만났습니다.

그 당시만해도 제가 시카고로 온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던 시절인데 헤브론 교회 당회에서 교회를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도착해서 보니 이명은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계속 교제하고 함께 기도하면서 지금까지 시간을 보냈습니다.

여기 계시는 분들이 모두 아시는 것처럼, 이명은 집사님은 오랫동안 투병 생활을 하셨지만 불굴의 의지로 그 시간들을 이겨내셨습니다. 헤브론 교회에서 사역을 하면서 이명은 집사님의 칭찬을 정말 많이 들었고 옆에서 지켜보면서 존경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고인께서는 한글 학교 교사로 그리고 교장으로 탁월하게 섬기셨습니다. 두 자녀들을 너무나 훌륭하게 아름답게 키우셨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많은 성도님들에게 큰 사랑을 나눠주셨습니다. 탁월한 예술가로서 인간과 자연을 예술 작품으로 남기셨습니다. 기적과 같이 생명을 연장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그 시간을 가장 의미있게 채우신 너무나 아름다우신 분이십니다.

이명은 집사님이 몸이 점점 약해지시는 것을 보면서, 또 가장 강한 항암제를 쓰시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집사님께서 그래도 활동이 가능하실 때에 댁으로 찾아갔습니다. 몇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면서 제 삶에 기억에 남을 만한 최고로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집사님은 본인이 그렇게 아픈 중에도 저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귀기울여 들어 주셨습니다. 저도 집사님의 많은 이야기들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뵜을 때에도 집사님의 죽음이나 장례식 이야기는 전혀 나누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서로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저 역시 굳이 제가 그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잠시 든 생각은, 혹시라도 제가 장례를 맡아야 하면 어떻게 하나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많이 염려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유가족과 조문객들이 그러하신 것 처럼 절대로 그런 날이 오지 않기를 저 역시 너무나 간절히 바랬기 때문입니다.

집사님과의 대화들을 기억하면서 오늘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집사님과 나눈 대화의 대부분은 신앙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집사님께서 어떻게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는지, 고인의 시아버지 되시는 고 옥한음 목사님의 설교가 본인에게 얼마나 큰 은혜가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본인이 고통 중에도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목회자인 저의 눈에도 참으로 놀랍고 감격적이었던 것은, 이명은 집사님의 육신은 눈에 띄게 연약해져 갔지만, 그 내면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그 믿음과 사랑이라는 것은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깊어졌다는 것입니다.

이찬수 목사님께서 주일에 헤브론 교회에서 설교하실 때에, 하나님과의 친밀함 Intimacy 에 대해서 강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명은 집사님과 대화하면서 느낀 것이 정확하게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본인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어떻게 기도하는 지 또 무슨 내용으로 기도하시는지 들려주시는데, 마치 딸이 아빠에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렇게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이명은 집사님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아버지 하나님의 신실한 딸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인으로 모신 분이심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하시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6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만드신 신이며 절대자이십니다. 세상은 존재하지 않던 아무것도 없던 그 때에 그분은 말씀으로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며 빛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은 가장 완벽한 곳이었지만 인간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그분에게 대적하여서 결국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인간이 죄인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 죄 때문에 모든 인간은 영적으로 병들었고, 그 마음은 마치 어두움이 가득한 것처럼 처음부터 하나님을 미워하고 대적하고 싫어하는 상태로 이 땅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저를 포함하여,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동일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지 못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며 죄를 짓는 죄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놀라운 말씀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어두움 속에 찬란한 빛이 직접 찾아오는 것입니다. 마치 태초에 하나님이 세상 속에 빛을 만드신 것처럼,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찾아오시고 우리의 영혼을 살리시고 생명을 주시고 밝히심으로, 우리의 병들고 어두운 영혼을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죄인에게 비치는 하나님의 빛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의 독생자 아들이시며, 오직 그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이 나타나고, 오직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는 그 믿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7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야 말로, 성도의 삶의 본질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가 건강하고 고난이 없고 형통한 삶을 살기를 원하지만, 그러나 모든 인간은 마치 질그릇과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명은 집사님처럼 강철과 같은 의지를 가진 분조차도, 결국에는 육신이 연약하여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과연 하나님의 자녀는 무엇이 다른가?" 라고 우리에게 질문하시며 "그는 보배를 가진자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의미인가? 우리의 영혼 안에 가장 가치 있는 보물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존귀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을 위하여 친히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동시에 인간으로오셔서, 우리가 저지른 모든 죄의 댓가를 홀로 감당하셨습니다. 그 어떤 죄도 없으신 순결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서 십자가에서 가장 잔인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는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자신이야 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과 같은 절대자이심을, 수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고 역사 가운데 증명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사실을 믿는 이들에게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그 사람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분을 믿는 자와 영적으로 연합하시며, 그에게 영적인 생명과 능력을 공급하시며, 죽음을 이기는 영원한 생명이 되시며, 그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명은 집사님의 삶의 마지막 모습은 너무나 성경적이고 또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고인은 자신의 육체가 연약해지고 이 땅에서 생명이 거의 끝나가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붙들고 사랑하였고, 자신에게 구원을 베푸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확신하며 의지하는 분이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너무나 슬프고 마음이 힘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에 가장 큰 위로가 되는 것은, 고인이야 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담은 질그릇"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약속하시는대로, 집사님께서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안겨 하늘 아버지의 나라로 들어갔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고인께서 누리셨던 그 놀라운 영광의 빛이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의 마음에도 가득하기를 원합니다. 오늘의 예배의 이 거룩한 시간이 우리의 영적인 모든 어두움이 물러가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영광스러운 빛이 우리의 영혼 깊은 곳으로 들어오고 하나님 앞에 범죄한 모든 죄들을 돌이키며 용서 받고 고인이 그러신 것처럼 하나님의 복된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시는 구원의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간절히 바라기는, 고인이 평생동안 그러하셨던 것처럼, 내 안에 모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가까이하시고, 보배이신 그분을 가장 소중히 여기시며, 사랑하며 그분과 동행하시며 믿음의 길을 걸어가시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또 조문객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 "설교문전체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11/blog-post_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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