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el R. Beeke, Michael P. V. Barrett, and
Gerald M. Bilkes, eds., The Reformation
Heritage KJV Study Bible (Grand Rapids, MI: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14), 1522.
시편 33:13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심이여 14 곧 그가 거하시는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들을 굽어살피시는도다
시편 27: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4. 찬양에 대한
묵상
이 찬양은, 논리적으로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첫 부분은, 다스리시고 생명을 주시는 영원한
주님에 대한 확신과 믿음이다. 이 세상에는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과 참된 인생의 의미를 주겠다는 많은
것들이 있지만, 그러나 성도는 오직 하나님만이 영원한 생명이 되시며,
우리의 삶의 의미를 주시고 바르게 인도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 찬양의 후렴은, 오직 하나님께만
사랑의 노래 드리겠다고 결단하고 고백한다. 시편 89편 1절 말씀처럼, 주님의 인자하심은 끝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 주님의 사랑은 영원히 노래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은,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나타났으며,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 용서와 사함을 받고 주님의 자녀가 된 것임을 감사하며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이며, 주님 안에서 늘 거하겠다는 그 마음과 결단이다. 왜냐하면
성도는 주님과의 깊은 친밀함 안에서 천국의 기쁨을 이 땅에서 미리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찬양을 통해서 신실하신 하나님을 새롭게 발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며, 주님을 더욱 바라고 갈망하고
그분과의 사랑의 동행을 누리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기대한다.
하나님의 빛 속에서
그 따뜻한 빛 속에서 모두 고쳐질 나의
모든 죄와 상처 그의 빛 속에서
드러내어 징계함
아닌 드러내어 고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하나님의 빛 드러내어 부끄럽게
하지 않고 더욱 단단히 만들 은혜와 사랑 전하게
할 하나님 그 빛
2. 곡 소개
이 곡은 CCM 사역자인 장윤영 사모님의
곡이며, 최근에 잔치 공동체에서 부르면서 더 많이 알려지게 된 곡이다.
이 곡은 빛이신 하나님 앞에서 모든 죄가 드러나며, 또한 그 빛 안에서 온전한 치유가 일어난다는
아름다운 비전을 담은 곡이다.
3. 말씀으로 바라보기
요한1서 1:5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1:5 This is the
message we have heard from him and declare to you: God is light; in him there
is no darkness at all. 1:7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1:7 But if we walk in the
light, as he is in the light, we have fellowship with one another, and the
blood of Jesus, his Son, purifies us from all sin.
에베소서 5: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5:14 This is why it is said:
“Wake up, sleeper, rise from the dead, and Christ will shine on you.”
아마도 이 구절은, 이사야 26장 19절과 60장 1-2절에 근거한 초기 기독교 찬송일 것입니다. 잠자는 자들과 죽은
자들은 죄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찬송은 불신자들에게, 그리스도께 나아와 그의 생명을 주는 빛을 받으라고 촉구합니다.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Biblical Theology Study Bibl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8), 2124.
베드로전서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2:9 But you are
a chosen people, a royal priesthood, a holy nation, God’s special possession,
that you may declare the praises of him who called you out of darkness into his
wonderful light. (NIV)
4. 찬양에 대한
묵상
이 찬양이 고백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 빛 앞에서 우리의 죄와 허물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드러남이라는 것은, 결국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발견하도록
하며 우리를 영적으로 깨우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이야 말로 어두운 세상 속에 임하신 진정한 빛이시며, 그분을 따르는 모든 자들은 참된 생명의 빛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찬양을 부를 때에, 빛이신 예수님 안에서 그분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가 깨끗해지는 것임을
다시 한번 깨닫고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그의 빛으로 인도하신 것은, 그 빛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세상에 전하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찬양은, 단순히 우리 자신을 위로하는 차원에서만 끝날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서 적극적으로 나아가는 빛의 자녀로서 결단하고 행동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이 찬양을 통해 빛이신 주님의 은혜를 더욱 깊이 경험하며, 그 빛을
세상 속에 비추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소망한다.
예수님께서 어느날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쌓여 있는데 유대인의
회당을 책임지는 야이로 라는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아주 간곡하게 부탁했습니다. 그것이 5장 23절 말씀입니다.
“5:23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라고 예수님 앞에서 간곡하게 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야이로와 함께 바로 그의 집으로 걷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 속에 오랫동안 병으로 아팠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가진것을
다 써서 의사들을 만났지만 도대체 낫지가 않았습니다. 그 여인이 마음에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옷에 내가 손만 대도 병이 나을 수 있을 것 같다” 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몰래 다가가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댑니다.
그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몰래 손을 대자 놀랍게도 여인의 몸이 치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을 무리 중에서 굳이 찾으시고 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마음이 바짝바짝 타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입니다. 왜 그런가? 시간이 지체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빨리 본인의 집으로 가셔야 하는데 빨리 가서 치료해 주셔야 되는데 자꾸 늦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들이 달려 왔어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것이 35절 말씀 하반절입니다.
“5: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라고 너무나 슬픈 소식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야이로의 마음이 무너졌습니다. 왜 그런가? 사랑하는
딸이 결국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죽은 딸을 누가 어떻게 도와줄 수 있겠는가? 사람들이 마치 그런 야이로의 마음을 대변하듯이 이렇게 말을 합니다. “회당장님 이제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이 오신다고 해도 이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더
이상 예수님을 괴롭게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분이 온다고 해서 바뀔 것이 전혀 없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시점에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반응 하셨을까요? “야이로야 미안하다, 내가 좀더 빨리 갔어야 되는데 벌써 너의 딸이 죽었다니 어떻게 하겠느냐? 나는
이제 너의 집으로 가도 소용없으니 다시 돌아가겠다” 이렇게 말씀 하셨을까요?
절대로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말을 들은 척도 안하셨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들의 불신의 말을 무시하신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딸의 죽음의 소식으로 인해 충격에 빠져 어쩔 줄 모르는 야이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영혼 깊이 자리 잡고 있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언제 두려움에 사로잡히는가?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일 앞에서
두려움에 사로 잡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이성과 한계를 뛰어넘는 절망 앞에서 인간은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인간도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도 죽음이라는 그 절대적인
운명 앞에서는 그 어떤 힘도 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께서 야이로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시는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분명한 명령의 말씀입니다. 야이로가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잠식당해서 고통스러워할 것이 아니라 지금 자신과 함께 있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믿고 예수님이야 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진정한 구원자이심을 분명하게 믿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야이로와 함께 도착해 보니 딸의 죽음으로 인해 난리가 났습니다. 그
온 집안에 곡소리가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39절 말씀입니다. “5:3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성경은 사람들의 반응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40절 처음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비웃더라”
저는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지금 야이로가 처한 이 모든 상황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부터 야이로의 상황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딸의 죽음의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의 반응은 무엇인가? 사실상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위대한 선지자일지는 모르겠지만, 수 많은 기적들을 일으킨
사람일지는 모르겠지만, 죽음 앞에서는 무기력한 인간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 불신의 분위기 속에서 그 참담한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야이로를 향해서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불신의 분위기는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도착하셔서
소녀가 자고 있다고 말씀하셨을 때에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예수님을 비웃은 것입니다. 아마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야이로의 볼이 부끄러움을 붉어졌을 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노골적으로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한 것입니다.
아마도 야이로는 방금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마음에 떠올렸을 것입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예수님을 믿을 때에 그 모든 두려움과 비웃음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을 야이로는 그 자리에서 더 절실하게 느꼈을 것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비웃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40절 말씀에 보니 예수님께서는 비웃는 자들을 다 내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그분을 비웃는 자들은 그분과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동행할 수 있는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데려가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아이의 부모와 함께 아이의 시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무릎을 꿇고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원래 구약의 율법에 따르면 시체를 만지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하는 행동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것을 전혀 신경쓰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소녀의 시신을 잡고 말씀하십니다. “달리다굼!”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라는 뜻입니다. 그 말씀을 하시니까 죽었던 소녀가 그 자리에서
살아났습니다. 살아날 뿐만 아니라 곧 일어나서 걸어 다녔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랐다” 왜 그런가?
그 자리에 있던 그 누구도 설마 죽었던 아이가 살아날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이라도
죽은 사람은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분은 죽음 조차 다스리시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권능의 말씀 단 한마디로 죽은 딸을 살리심으로 자신은 살아계신 여호와의 아들이시며 생명의 주인이심을
친히 증명하셨습니다. 그분은 죽음을 조차 이기시는 분이시며 생명 그 자체이심을 바로 이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기적의 사건이 일어난지 벌써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지금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쪽은 믿음의 사람들이 있고 또 한쪽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렇게 비웃는 것입니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다, 어떻게 죽음 이후에 생명이 있는가? 어떻게 죽은 이를 잔다고 부를
수 있는가?”
그러나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삶의 모든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는 이들에게 그리고 심지어 죽음을 앞두로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을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왜 이 말씀이 중요한가?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우리의 믿음을
지킨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살아가는
이들을 비웃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봐야 아무 소용 없다 도대체 왜 그렇게 어리석게 살아가는 것인가? 왜 굳이 손해를 감수하고 살아가는 것인가? 그래봐야 무슨 이득이
있다고 저러는 것인가? 정말 우리가 진실한 크리스천으로 살아간다면 이러한 비웃음을 당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심지어 때로는 우리의 마음에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내가 굳이 이렇게 까지
해야 하는가? 좀 대충 순종하면서 살아도 괜찮지 않겠는가? 세상의
비웃음과 조롱 속에서 우리의 마음이 약해지면서 우리의 믿음도 연약해진다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장 6절에서 9절에 이렇게 말씀하시지 1: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1: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오늘 이 기적의 사건 가운데 예수님 바로 옆에서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비웃던 수 많은 이들의 조롱을 바로 옆에서 함께 받았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을 이렇게 격려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여러 시험으로 잠깐 근심하게 되지만 그러나 진심으로 기뻐하라, 왜냐하면
우리 앞에 영원한 기쁨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험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오히려 연단을
받는 것이다. 주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많은 칭찬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있다는 그 사실이, 그분이 우리의 마음을 감격시키시고 넘치는 행복으로 지금 우리에게 부어주시고 계시다는 그 사실이, 우리가 믿음을 가진 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러한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오심과 그분을 향한 우리의 믿음과, 그리고 그분이 주실 그
칭찬과 영광과 존귀가 왜 그렇게도 중요한 것인가? 그것은 만약 우리에게 그 미래가 없다면 현재의 삶에
대한 의미를 잃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서 마지막까지 살아 남았던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은, 그 안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인간의 본질을 꿰 뚫는 중요한 진리를 발견했습니다.
강제 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은 그 환경 자체가 그들의 모든 희망을 빼앗아가 버렸습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으니 현재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미래의 나를 보지 못하는 사람은 삶을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말 그대로 이성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미래의 목표를 볼 수 없어서 몸과
마음이 시들어가는 사람은, 과거의 생각에 파묻혀 살게 됐다. 그들은
강제 수용소에서의 시련을 내적 힘을 기르는 시험으로 여기지 않았다. 삶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업신여겼다. 그들은 두 눈을 감고 과거에서만 살려고 했다.
그들의 삶은 의미가 없어졌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그 어떤 인간도 넘어서지 못한 죽음이라는
절망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기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죽은 소녀에게 다시 생명을 주심으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친히 죽음을 이기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불신의 시대에, 그저 자기 탐욕을 채우는데 급급한 이 시대 속에서, 고아와 과부를
돌보며 선을 행하며 손해를 보며 주님의 뜻을 행하며 우리의 삶을 기꺼이 주님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미래에
반드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이루실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모든 눈물을 친히 닦아주시며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고 칭찬하실 그 날을 마음에 흔들림
없이 품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가장 근본적인 원동력이며, 주님의 자녀의 정체성의 전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모든 고난 속에서도 위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고통과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당당하시기를 바랍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붙드시기를
바랍니다. 전능자이시며 역사의 주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기꺼이
오늘도 주님을 위하여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마지막 날에 사랑하는 주님을 뜨겁게 그리고
온전히 만날 것을 사모하면서, 우리의 모든 삶을 주님을 위하여 살아가시는 모든 사랑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이 몸에 무슨 소망이
있나 이 삶에 무슨 희망있나 아무것 의지할 것
없네 예수의 보혈 그것 뿐일세
서러워 울던 나날도
애타게 목말랐던 날도 이제는 모두 잊을
수 있네 예수의 보혈 그것 뿐일세
나 이제 담대하게
나가네 예수의 보혈 공로로 이제는 의지할 것
하나뿐 예수의 보혈 그것 뿐일세
주의 보혈 주의
보혈 어린양의 귀한 보혈 나의 죄 희게 하는
예수의 보혈 그것 뿐일세
2. 곡 소개
이 곡은, 찬양사역자 김도현님의 “성령이 오셨네” 앨범에 수록된 곡이다. 이 곡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독점적인 능력 그리고 소중함을 탁월하게 표현한 찬양이다. 어떤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하여 그의 삶은 의미 있는 삶이 된다. 어떤 죄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하여 용서함을 받는다. 성도에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야 말로 그의 전부임을 담아낸 탁월한 곡이다.
3. 말씀으로 바라보기
이사야 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Come now, let us settle the
matter,” says the Lord. “Though your sins are like scarlet, they shall be as
white as snow; though they are red as crimson, they shall be like wool.
1:18reason together. Repentance begins by
learning a new way of thinking from God. Scarlet
and crimson represent sin as being of
the deepest dye, the stain of which cannot be removed except by the grace of
God. He offered cleansing from all their sins (1 John 1:7, 9). 우리가서로변론하자: 회개는하나님으로부터새로운사고방식을배움으로써시작됩니다. 주흥색과진홍색은가장짙은염료로죄를표현하며, 그얼룩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제거될 수 없습니다. 그분은 그들의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
Joel
R. Beeke, Michael P. V. Barrett와/과Gerald M. Bilkes, 편집자, The Reformation Heritage KJV Study Bible (Grand Rapids, MI: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14), 959.
히브리서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9:14 How much
more, then, will the blood of Christ, who through the eternal Spirit offered
himself unblemished to God, cleanse our consciences from acts that lead to
death, so that we may serve the living God!
9:13–14
Whereas the Old Testament sacrifices could cleanse the outside, the blood of Christ can cleanse our consciences from dead works so
that we can serve the living God (9:14). And if you’re clean on the inside,
it can work its way out so that dead works that formerly sought to earn God’s
favor become good works that are the result of our response to God’s favor. 구약의제사가겉을깨끗하게하였던반면, 그리스도의피는우리의양심을죽은행실에서깨끗하게하여우리가살아계신하나님을섬기게할수있습니다. 그리고만약당신의내면이깨끗하다면, 과거에하나님의 은총을 구했던 죽은 행실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응답의 결과로 선한 행실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1:5 and from Jesus
Christ, who is the faithful witness, the firstborn from the dead, and the ruler
of the kings of the earth. To him who loves us and has freed us from our sins
by his blood,
1:5a John
gives three descriptions of Jesus Christ. (1) As the faithful witness, Jesus is our model for proclaiming the
Good News of salvation (1:2). (2) The truth that Jesus was the first to rise from the dead
is foundational to Christian faith (1 Cor 15:14, 17). (3) As ruler
of all the kings of the world (see also 17:14; 19:16), he is the
absolute Lord of everything. Inhabitants of the Roman world were expected to
declare Caesar as absolute lord; many early Christians died for their
conviction that Jesus alone holds that position. 요한은예수그리스도에대해세가지로묘사합니다. (1) 신실한증인이신에수님은구원의기쁜소식을선포하는우리의모델이되십니다. (2) 예수님께서죽은자들가운데에서먼저살아나셨다는진리는기독교신앙의기초입니다. (3) 세상의모든왕의통치자로서그분은모든것의절대적인주인이십니다. 로마세계의주민들은카이사르를절대군주로선포해야만했습니다. 많은초대교회기독교인들은오직 예수님만이 그 지위를 가지고 계신다는 확신 때문에 죽었습니다.
요한계시록 7: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7:14 I answered, "Sir,
you know." And he said, "These are they who have come out of the
great tribulation; they have washed their robes and made them white in the blood
of the Lamb.
7:14
great tribulation. Many identify the “great
tribulation” with a final period of persecution shortly before the second
coming. But tribulations for Christians occur throughout the church age, so
that the whole age can also be characterized as a time of tribulation (2 Thess.
1:5, 6; 2 Tim. 3:1, 12), which will worsen at the end of time. The passage was
intended to comfort first-century Christians as well as those in the final
crisis. See note on 11:2. 큰환난: 많은사람들은“큰환난”을재림직전의박해의마지막기간과동일시합니다. 그러나그리스도인을위한환난은교회시대전체에걸쳐서발생하기때문에, 인간의전체역사가환난의때로특징지을수있고, 마지막때에가서더힘들어질것입니다. 이말씀은1세기의그리스도인뿐아니라마지막환난에처한모든 신자들을 위로하기 위한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They
have washed their robes in the blood of the Lamb: This
description symbolizes Christ’s redeeming death for them. • made
them white: This description expresses their victory over sin and death
and their acceptance by God into eternal life. “어린양의피에옷을씻었다”는묘사는그들을위한그리스도의구속의죽음을상징합니다. “희게하였다”라는묘사는, 죄에대한그들의승리와그들이하나님께 받아들여짐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었음을 표현합니다.
요한계시록 12:11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12:11 They overcame him by
the blood of the Lamb and by the word of their testimony; they did not love
their lives so much as to shrink from death.
12:11blood of the Lamb. The Church’s victory
over Satan was achieved through the blood shed by Jesus on the cross (1Jn 1:7).
and by the word of their testimony.
Though Jesus’ death is the effective cause of salvation, the Gospel testimony
is the means by which this deliverance is received and spread. 어린양의피: 사탄에대한교회의승리는예수님께서십자가에서흘리신피로이루어진것입니다. 자기들이증언하는말씀으로써:
예수님의죽음이구원의효과적인원인이지만, 복음의증거는이구원이 받아들여지고 또 전파되는 수단입니다.
Edward A. Engelbrecht, The Lutheran Study Bible (St. Louis,
MO: Concordia Publishing House, 2009), 2219.
blood
… word. Believers’ ultimate victory comes through Jesus’ death
(1:5) and their witness, which motivates patient endurance and hope for
suffering Christians (see note on 1:9; see also Introduction: Purpose). 피, 말씀:
신자의궁극적인승리는예수님의죽음과그들의증언으로이루어지며, 이것은고통받는그리스도인들에게인내와 희망을 주는 동력이 됩니다.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Biblical
Theology Study Bibl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8),
2297.
4. 찬양에 대한
묵상
이 찬양은,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가
가진 참된 소망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인간은 죄를 지음으로, 자신의
창조주로 부터 분리되고 영원한 죽음의 형벌을 받게 되었다.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그 지옥의 형벌로 부터 인간을 구원해 줄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그분을 믿는 모든 이들의 죄를 완전하게 없애 주며 깨끗하게 씻어 주시는
것이다. 소망 없던 죄인이 이제는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며,
죄에서 해방되어 마음껏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된 것이다.
성경은 성도를 부를 때에,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 이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다” 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피로 마귀를 이기시고 승리하셨고, 승리하신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신 자들은 그 어떤 것도 흔들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그러므로 지금 시점에 있어 가장 어두운 시절을 걸어가고 있는 성도라 할지라도, 여전히 그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영원하고
존귀한 그리스도의 피와 그분의 희생이 우리에게 용기를 주는 것이며, 극심한 고난 속에서도 최후의 유일한
소망으로서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것이다. 이 찬양을 부를 때 마다, 존귀한
보혈의 능력과 그분의 고귀한 희생이 새롭게 우리의 마음을 채우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한다.
시편 1편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악인과 의인의 대조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시대는 악인과 의인의 경계를 점점 허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의인에게도 악한 면이 있고, 악한 사람도 의로운 부분이 있다고 사람을 이해합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완전한 기준 앞에서는 모두 악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의를 입은 자만이 의인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무리에 동참하지 않습니다. GT 스터디 바이블은 악인들은 걷고, 서고, 앉음으로서 그들의 악행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의인을 설명할 수 있는 수 많은 비유들이 있겠지만,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것, 그것 하나로 모든 것을 담아 냅니다. 의인의 모습은 말씀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기쁨 그리고 주야로 라는 말을 통해서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매우 인격적이며 자발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복을 받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어떤 직업을 가지는지, 그 사람이 어떤 취미를 가지는지, 혹은 그 사람이 어떤 인종인지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외로 묵상이라는 문자적인 의미를 모르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GT 스터디 바이블은 "낮은 톤으로 중얼거리는 것"이라고 아주 명확하게 정의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진리로 인해서 완전히 그 마음에 풍성해진 그런 마음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고 설명합니다. 제가 영어를 잘 못하지만, David Gundersen의 묵상은 정말 따뜻하고 멋집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자는, 풍성한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광야 지역에는 제대로 된 나무가 자라기 힘듭니다. 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물만 옆에 있으면 나무는 풍성하게 자랄 수 있습니다. 말씀이야 말로 우리가 풍성해 지기 위한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형통이라는 말에서 잠시 멈추게 됩니다. 예수님 잘 믿는데 고생하는 분들은 어디가서 자기 이야기도 잘 못하십니다. 우리의 본능이 그렇습니다. 하나님 믿으면 무조건 잘 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미 창세기에서 요셉의 형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세상 만사 자기 뜻대로 풀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심" 입니다. 성도 안에 내주하시는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말씀을 묵상할 때에 그 하나님을 확신하며 의지하며 바라보는 수준은 감히 비교할 수 없을만큼 올라갑니다. 그것이 형통입니다.
악인은 심판을 당하게 됩니다. 제가 생각할 때에, 현대인들은 더 이상 심판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심판을 이야기합니다. 악인의 운명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 걸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운명은 지옥입니다.
그러나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알고 인정하시는 걸입니다. 말씀으로 인해서 풍성하고 심지어 고난 가운데에서도 행복을 누리는 의인은 생명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악인은 그 최종적인 길은 심판과 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삶의 여정 속에서, 말씀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시편 1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생명과 죽음을 가르는 바로 그 척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완전히 압도된 그 삶이 바로 생명의 삶인 것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평생을 추구해 나가기를 원합니다.
In Psalm 1, we see the big contrast between the blessed one and the wicked. The wicked are walking their evil way and they make their path hard more and more. However, the blessed man meditates God's word all the time with delight.
The blessed man is described by a tree planted by flowing streams. This shows the flourish of the spiritual blessing. The psalm says that he succeeds in everything. I want to define the succeeds according to Joseph's story. He was in prison but he was successful because God was there with him. The people of God could have the hardship. But, they could overcome with God's word.
I saw God's judgment in this chapter. Psalm 1 shows evidently there will be the final judgment in our last time. I think that people of the present society do not believe this. However, the Bible shows clearly judgment. Only the people of God who in Jesus Christ and love the word of God will go enter God's eternal kingdom.
고린도후서 5:14 그리스도의사랑이우리를강권하시는도다우리가생각하건대한사람이모든사람을대신하여죽었은즉모든사람이죽은것이라5:14 For Christ's love compels
us, because we are convinced that one died for all, and therefore all died. 5:15 그가모든사람을대신하여죽으심은살아있는자들로하여금다시는그들자신을위하여살지않고오직그들을대신하여죽었다가다시살아나신이를위하여살게하려함이라5:15 And he died for all, that those who live should no longer
live for themselves but for him who died for them and was raised ag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