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를 하면, 누군가의 인간 관계가 총체적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과거와 현재가 하나로 연결이 됩니다. 사실 제가 원해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분들이 저에게 여러 이야기를 하기 때문입니다. 퍼즐이 맞춰지듯이 모든게 맞아 떨어지는 것입니다. 때로는 누군가의 삶의 아름다움이 드러나고, 때로는 아쉬운 부분들도 드러납니다. 저의 마음에는 때로는 존경이, 하지만 때로는 깊은 아픔이 있습니다.
저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힘들게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목회만 힘든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살아가는 것 자체가 버겁습니다. 저의 삶이 완전하지 않은 것처럼, 다른 분들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실을 알게 되고, 또 그것이 명확해 지더라도, 누군가의 연약한 점을 굳이 더 파고들어가진 않습니다.
가끔씩은 성도님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분명히 제가 알고 있는 사실과 다른 이야기를 하실 때도 있습니다. 본인의 잘못이 거의 확실해 보이지만, 본인은 상관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도 넉살 좋게 웃으면서 경청합니다. 저도 가끔은, 제가 잘못하고서도 누군가가 그래도 내 편이 되어 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예, 그러시군요' 알아도 모르는 척 하는 것입니다. 지나간 시간 늘 그래왔고 지나고 보니, 그렇게 한 것이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목회를 하면 할 수록, 날카롭게 공격하는 사람보다는, 부드럽게 받아주고 들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커집니다.
그래서 적어도 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누군가는, 조금이라도 편안한 마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여전히 부족한 우리를 받아주시고 인내하시고 붙들어주시는 하늘 아버지처럼, 그렇게 교회를 섬기고 싶습니다.
저는 퍼즐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큰 그림을 그리면서 인내심을 가지고 조각을 맞추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설프게 모으고 시도했던 저의 작은 조각들 조차 기꺼이 사용하십니다.
저의 청년 시절, 어떻게든 좋은 리더가 되고 싶어서 읽었던 래리킹의 대화의 신이 그렇습니다. 저는 이제 이십년이 지나 목회자로 교회의 리더로, 저의 경험과 느낀 것들을 마음껏 나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제 순장님들과 '대화의 신'의 일부분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패러다임의 전환입니다. 내가 리더이기 때문에, 내가 순장이기 때문에 당신은 나의 가르침을 듣고 배워야 한다라는 패러다임은 매우 견고한 성과 같습니다. 사실상 대부분의 사람이 평생동안 이 패러다임 속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특별히 목회자들이 그렇습니다.
물론 강의도 필요합니다. 단, 정말 탁월한 강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들으면서 눈을 떼지 못하는 수준의 강의라면 긴 시간의 강의도 정말 좋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대부분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지루한 강의, 들었던 이야기들, 그리고 정리되지 않은 논리들로 채워진 강의들이 넘쳐나는 현실입니다.
목회자로 교회를 섬기면서, 경청의 힘'을 순장님들이 경험하시기를 항상 바랬습니다. 그래서 대화의 신에서 제가 읽고 좋았던 부분들을 먼저 나눠드리고, 간단한 북클럽 형태로 나누었습니다. 제가 준비한 첫 시작 멘트는 이것이었습니다. "OOO 순장님, 나눠드린 래리킹의 글을 읽으시면서 좀 어떠셨어요?"
저는 '열린 질문'을 좋아합니다. 래리킹이 자신의 책에서 저에게 가르쳐준 그대로 입니다. 열린 질문을 할 때에 그 사람의 이야기를 마음껏 들을 수 있습니다. 좁고 답답한 저의 사고로 그 사람을 한정 짓지 않고, 그 사람의 능력과 경험 그리고 상상력을 마음 껏 펼칠 수 있는 장을 열어줍니다.
그래서 어제 시간이 참 좋았습니다. 놀랍게도 거의 대부분의 순장님들이 미리 읽고 준비를 해오셨습니다. 저를 잘 아시는 분들이기 때문에, 저의 준비에 대한 그리고 모임에 대한 기대가 엿 보여서 좋았습니다. 역시나 북클럽의 힘은 대단했습니다. 만약에 제가 경청에 대해서 30분을 강의했다면 어땠을까요? 물론 약간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책을 읽고 미리 고민하고 나누는 것은 최소 그것의 10배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래리킹의 조언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면서, 2대 8의 비율을 스스로 정하셨습니다. 듣는 것은 8,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는 2 입니다. 탁월한 결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함께 한 모든 순장님들도 그리고 당연히 저도 이 비율을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어떤 분은 래리킹의 대화 법이 마치 함정을 놓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시기도 했습니다. 직업적으로 이런 대화를 하는 것을 교회에 적용하기는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지만 충분히 일리 있는 분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대화라는 그 깊은 주제 속에서, 생각해볼 만한 중요한 실마리를 찾은 듯 합니다.
전반적으로 참 좋았습니다. 정말 늦은 시간, 피곤한 가운데 진행한 모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극도로 말을 아꼈습니다. 북클럽을 인도할 수록, 저의 말을 점점 줄이는 것이 좋다는 것을 많이 느낍니다. 목회자로서 저의 목표는, 함께하는 분들의 성장이지 제가 말을 하는 것이 목표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분 한분의 이야기를 경청하면서 그분의 리더십을 가늠하고 그 말들을 분석하면서 들었습니다. 경청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각 순장님들의 필요에 맞는 아주 짧은 그러나 적절한 멘트로 섬겼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당신은 어떠신가요? 당신이 어떤 자리에 있든지 경청의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경청을 통해서 다른 이들을 회복시키고 그들이 마음껏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장을 열어주시면 좋겠습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 짧은 글을 적은 저의 마음 가운데에도 더 할 수 없는 큰 행복이 넘칠 것입니다.
정말 좋아하는 두분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좋았습니다. 아, 나의 형제여. 굉장히 두근거렸습니다. 사실 제 마음에 제 이야기를 실컷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분의 지친 표정을 보니, 적어도 오늘 만큼은 제가 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분간 오래 뵙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중년이 된다는 것은, 함부러 저의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의 기회가 그렇게 소중합니다. 마음껏 이야기하고 싶을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알았습니다. 오히려 제가 정말 좋아하는 누군가에게는, 제가 그렇게도 경청의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누군가에게는, 잠깐이라도, 작은 위로가 되고 싶었습니다.
두분의 이야기를 힘써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희망과 슬픔의 발라드와 같았습니다. 포기하고 싶지만, 포기할 수 없는 삶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그리고 내가 당신을 듣고 있다고 온 몸으로 표현하며 들었습니다. 손을 꼭 잡고, 허그를 했습니다. 따뜻하고 좋았습니다. 연약한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것은 관계입니다.
헤어지는 마지막이 너무 아쉬웠습니다. 언젠가 다시 십년 후에 뵐 때에, 더 좋은 모습으로 만나자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더 좋은 모습,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저의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제 마음 안에 있는 불안과 아픔과 갈등은 조금 감추었지만, 어쩌면 다시 만날 그 때에도 다시 들을 것 같습니다. 그 때에는 더 넓은 마음으로, 그리고 더 큰 사랑으로.
예수님이해처럼밝게빛나시는바로그자리에서이스라엘역사상가장중요한두인물이나타났습니다. 모세는거의 BC 1500년경의사람입니다. 그는하나님의백성을이집트에서이끌어낸민족의지도자이고십계명을포함해서하나님의말씀을직접받은사람입니다.
엘리야는누구인가? 그는 BC 860년경의사람입니다. 그는북이스라엘왕국이하나님을떠나극도로타락했을때에우상의선지자들과정면으로대결하였던사람입니다. 그는왕조차도두려워하지않고말씀으로꾸짖었던구약의대표적인선지자였습니다. 그러므로우리가주목할것은지금제자들의눈앞에서일어난이일은시공간을완전히초월하는일이었다는것입니다.
이것보다더놀라운일이어디에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