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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8월 17일 일요일

때로는 모르는 척 넘어가다

목회를 하면, 누군가의 인간 관계가 총체적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과거와 현재가 하나로 연결이 됩니다. 사실 제가 원해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분들이 저에게 여러 이야기를 하기 때문입니다. 퍼즐이 맞춰지듯이 모든게 맞아 떨어지는 것입니다. 때로는 누군가의 삶의 아름다움이 드러나고, 때로는 아쉬운 부분들도 드러납니다. 저의 마음에는 때로는 존경이, 하지만 때로는 깊은 아픔이 있습니다.

저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힘들게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목회만 힘든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살아가는 것 자체가 버겁습니다. 저의 삶이 완전하지 않은 것처럼, 다른 분들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실을 알게 되고, 또 그것이 명확해 지더라도, 누군가의 연약한 점을 굳이 더 파고들어가진 않습니다. 

가끔씩은 성도님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분명히 제가 알고 있는 사실과 다른 이야기를 하실 때도 있습니다. 본인의 잘못이 거의 확실해 보이지만, 본인은 상관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도 넉살 좋게 웃으면서 경청합니다. 저도 가끔은, 제가 잘못하고서도 누군가가 그래도 내 편이 되어 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예, 그러시군요' 알아도 모르는 척 하는 것입니다. 지나간 시간 늘 그래왔고 지나고 보니, 그렇게 한 것이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목회를 하면 할 수록, 날카롭게 공격하는 사람보다는, 부드럽게 받아주고 들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커집니다. 

그래서 적어도 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누군가는, 조금이라도 편안한 마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여전히 부족한 우리를 받아주시고 인내하시고 붙들어주시는 하늘 아버지처럼, 그렇게 교회를 섬기고 싶습니다.

2024년 5월 2일 목요일

경청하는 것은, 세상이 바뀌는 일이다 / 대화의 신

 



저는 퍼즐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큰 그림을 그리면서 인내심을 가지고 조각을 맞추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설프게 모으고 시도했던 저의 작은 조각들 조차 기꺼이 사용하십니다. 

저의 청년 시절, 어떻게든 좋은 리더가 되고 싶어서 읽었던 래리킹의 대화의 신이 그렇습니다. 저는 이제 이십년이 지나 목회자로 교회의 리더로, 저의 경험과 느낀 것들을 마음껏 나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제 순장님들과 '대화의 신'의 일부분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패러다임의 전환입니다. 내가 리더이기 때문에, 내가 순장이기 때문에 당신은 나의 가르침을 듣고 배워야 한다라는 패러다임은 매우 견고한 성과 같습니다. 사실상 대부분의 사람이 평생동안 이 패러다임 속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특별히 목회자들이 그렇습니다.

물론 강의도 필요합니다. 단, 정말 탁월한 강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들으면서 눈을 떼지 못하는 수준의 강의라면 긴 시간의 강의도 정말 좋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대부분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지루한 강의, 들었던 이야기들, 그리고 정리되지 않은 논리들로 채워진 강의들이 넘쳐나는 현실입니다. 

목회자로 교회를 섬기면서, 경청의 힘'을 순장님들이 경험하시기를 항상 바랬습니다. 그래서 대화의 신에서 제가 읽고 좋았던 부분들을 먼저 나눠드리고, 간단한 북클럽 형태로 나누었습니다. 제가 준비한 첫 시작 멘트는 이것이었습니다. "OOO 순장님, 나눠드린 래리킹의 글을 읽으시면서 좀 어떠셨어요?"

저는 '열린 질문'을 좋아합니다. 래리킹이 자신의 책에서 저에게 가르쳐준 그대로 입니다. 열린 질문을 할 때에 그 사람의 이야기를 마음껏 들을 수 있습니다. 좁고 답답한 저의 사고로 그 사람을 한정 짓지 않고, 그 사람의 능력과 경험 그리고 상상력을 마음 껏 펼칠 수 있는 장을 열어줍니다. 

그래서 어제 시간이 참 좋았습니다. 놀랍게도 거의 대부분의 순장님들이 미리 읽고 준비를 해오셨습니다. 저를 잘 아시는 분들이기 때문에, 저의 준비에 대한 그리고 모임에 대한 기대가 엿 보여서 좋았습니다. 역시나 북클럽의 힘은 대단했습니다. 만약에 제가 경청에 대해서 30분을 강의했다면 어땠을까요? 물론 약간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책을 읽고 미리 고민하고 나누는 것은 최소 그것의 10배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래리킹의 조언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면서, 2대 8의 비율을 스스로 정하셨습니다. 듣는 것은 8,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는 2 입니다. 탁월한 결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함께 한 모든 순장님들도 그리고 당연히 저도 이 비율을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어떤 분은 래리킹의 대화 법이 마치 함정을 놓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시기도 했습니다. 직업적으로 이런 대화를 하는 것을 교회에 적용하기는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지만 충분히 일리 있는 분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대화라는 그 깊은 주제 속에서, 생각해볼 만한 중요한 실마리를 찾은 듯 합니다. 

전반적으로 참 좋았습니다. 정말 늦은 시간, 피곤한 가운데 진행한 모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극도로 말을 아꼈습니다. 북클럽을 인도할 수록, 저의 말을 점점 줄이는 것이 좋다는 것을 많이 느낍니다. 목회자로서 저의 목표는, 함께하는 분들의 성장이지 제가 말을 하는 것이 목표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분 한분의 이야기를 경청하면서 그분의 리더십을 가늠하고 그 말들을 분석하면서 들었습니다. 경청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각 순장님들의 필요에 맞는 아주 짧은 그러나 적절한 멘트로 섬겼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당신은 어떠신가요? 당신이 어떤 자리에 있든지 경청의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경청을 통해서 다른 이들을 회복시키고 그들이 마음껏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장을 열어주시면 좋겠습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 짧은 글을 적은 저의 마음 가운데에도 더 할 수 없는 큰 행복이 넘칠 것입니다.

2024년 3월 23일 토요일

나의 형제여, 나는 너에게 귀를 기울인다 / 멜로디 - 김동률

 

정말 좋아하는 두분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좋았습니다. 아, 나의 형제여. 굉장히 두근거렸습니다. 사실 제 마음에 제 이야기를 실컷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분의 지친 표정을 보니, 적어도 오늘 만큼은 제가 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분간 오래 뵙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중년이 된다는 것은, 함부러 저의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의 기회가 그렇게 소중합니다. 마음껏 이야기하고 싶을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알았습니다. 오히려 제가 정말 좋아하는 누군가에게는, 제가 그렇게도 경청의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누군가에게는, 잠깐이라도, 작은 위로가 되고 싶었습니다.

두분의 이야기를 힘써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희망과 슬픔의 발라드와 같았습니다. 포기하고 싶지만, 포기할 수 없는 삶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그리고 내가 당신을 듣고 있다고 온 몸으로 표현하며 들었습니다. 손을 꼭 잡고, 허그를 했습니다. 따뜻하고 좋았습니다. 연약한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것은 관계입니다. 

헤어지는 마지막이 너무 아쉬웠습니다. 언젠가 다시 십년 후에 뵐 때에, 더 좋은 모습으로 만나자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더 좋은 모습,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저의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제 마음 안에 있는 불안과 아픔과 갈등은 조금 감추었지만, 어쩌면 다시 만날 그 때에도 다시 들을 것 같습니다. 그 때에는 더 넓은 마음으로, 그리고 더 큰 사랑으로.

2023년 3월 8일 수요일

듣는 자 (The Listener) / 마태복음 17장 1-13절 주일 설교

 

* 마태복음 17장 1-13절 설교 

저는 모태 신앙으로 태어나서 지금까지 헤아릴 없을 만큼 많은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 저에게 있어서 예배에 대한 태도가 변화되는 결정적 계기가 있었습니다. 군대를 제대하고 저의 교회에서 번째로 예배를 드리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예배는 무엇인가 다르다고 느꼈습니다. 물론 교회 자체는 2 동안 별로 바뀌지 않았습니다. 같은 목사님과 같은 성도님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날은 특별한 집회가 있는 날도 아니었고 평범한 주일의 11 예배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만큼은 예배가 굉장히 특별하게 느껴졌습니다. 뭔가 저의 영혼을 압도하는 어떤 것이 있었습니다. 뭔가 저의 영혼을 감싸는 어떤 영적인 힘을 느낄 있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의자에 앉아 있는 저의 무릎이 모아지면서 겸손하게 되는 그런 영적인 경외감이 있었습니다. 그런 특별한 영적인 체험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후로 예배를 대하는 저의 태도가 완전히 변화가 되었습니다. 모든 예배는 너무나 소중한 것이고 특별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라는 확신을 가질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예수님의 명의 제자의 삶에 있어서 가장 특별한 영적인 체험에 대한 기록입니다. 오늘 1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7: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열두 제자 중에서도 예수님과 각별한 관계 속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느날 이들에게 어디론가 가자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1 말씀에서 "데리시고" 라는 부분은 헬라어 문법으로 현재 형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데 지금 예수님이 그들을 이끌고 가시는 생생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위해서 제자들을 산으로 이끌고 가시는 것일까? 제자들은 너무나 궁금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무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산을 한참을 올라갔어 그리고 그들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제 안정을 취하려고 때에 그들의 평생에 한번도 본적이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2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7:2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얼굴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익숙하게 알고 있던 예수님의 모습이 완전히 변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태양과 같았고 그분의 옷이 빛나는 하얀 색으로 변하였습니다. 제자들은 감히 예수님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도 없었습니다. 그분의 몸에서 놀라운 광채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 때에" 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헬라어 로는 감탄사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보라"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3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해처럼 밝게 빛나시는 바로 자리에서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이 나타났습니다. 모세는 거의 BC 1500 경의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민족의 지도자이고 십계명을 포함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은 사람입니다.

엘리야는 누구인가? 그는 BC 860 경의 사람입니다. 그는 북이스라엘 왕국이 하나님을 떠나 극도로 타락했을 때에 우상의 선지자들과 정면으로 대결하였던 사람입니다. 그는 왕조차도 두려워하지 않고 말씀으로 꾸짖었던 구약의 대표적인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지금 제자들의 앞에서 일어난 일은 시공간을 완전히 초월하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놀라운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놀라운 광경 앞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4 말씀입니다. “4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무엇인가?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라는 부분입니다.

한번 베드로와 제자들의 입장이 되어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그들의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이 느껴졌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신앙의 인물이 나타났다니 바로 자리보다 행복한 자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수님과 모세 그리고 엘리야가 함께 자리에 계속 있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 그리고 저희도 함께 여기에 머무르겠습니다 라는 의미로 이야기를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베드로가 말하던 바로 때에 다른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5 말씀에서 "홀연히" 라는 것도 앞에서와 동일하게 "보라"라는 감탄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5 말씀에 보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구름이라는 것은 구약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상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인도했던 것도 하나님이 보내신 구름 기둥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구름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부 하나님께서 직접 임재하시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5 말씀에 보니이는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포인트는 "이는" 이라는 것이 포인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위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위대한 모세와 엘리야가 있고 예수님이 가장 아끼시는 세명의 제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중에서 예수님만 특별히 지칭하시면서 예수님이야 말로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무나 기뻐하는 사람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 산에서 내려올 시간이 되었습니다. 9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죽은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도대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일까

그것은 당시 사람들의 마음에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기적을 일으키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로마 제국을 뒤엎을 정치적인 영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놀랍게 변화되신 예수님의 모습을 사람들이 듣게 된다면, 예수님에 대한 오해가 커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대화를 주고 받을 때에 제자들이 이렇게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10 말씀입니다. “10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라고 여쭤보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산에서 엘리야를 보았기 때문에 말라기 4 5절을 떠올린 같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에 예언된 엘리야와 같은 역할을 하기 위해서, 세례 요한이 이미 왔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엘리야가 어려운 시대에 담대하게 사역했던 것처럼 세례 요한도 담대하게 사역하였습니다. 하나님과 멀어진 그분의 백성에게 경고하며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결국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12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땅에 오신 예수님조차 핍박과 고난을 받으실 것을 말씀하시며 오늘 말씀이 마무리가 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첫번째 적용은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라" 입니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오늘 말씀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특별한 영적인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경험 속에서 뭔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간 예수님께서는 원래 자신이 가지신 영광의 일부분을 그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시지만, 동시에  모든 능력과 권세와 그분의 본질이 성부 하나님과 하나이시며 동등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예수님 역시 절대자이시며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자신의 영광을 조금 드러내시자 그분 자신이 찬란하게 빛을 뿜어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러한 예수님의 영광을 제자들의 반응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은 어디에 감탄했는가?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것에 감탄을 것입니다. 이들은 초막을 셋을 짓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조상이자 신앙의 위대한 영웅들에게 감탄하면서 예수님과 그들을 동급으로 놓고 있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인간의 연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는 사람의 위대함이 보일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누구는 어떤 위대한 사역을 했다고 하더라 어디에서는 사람을 통해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고 하더라 이렇게 말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의 위대한 인물들을 쳐다보느라 정신이 없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처럼 오늘 말씀과 동일한 음성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십자가의 고난을 앞에 두고 동일한 음성이 들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은 한결 같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실 주인공은 누구이신가? 그분은 모세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 17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율법과 선지자라는 것은 구약 성경 전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가 바로 구약 성경 전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의 모든 여정 자체가 구약의 말씀들을 이루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8 6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8:6 그러나 이제 그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에서 모세는 하나님께 제사 제도를 받았습니다. 구약 시대는 용서를 받기 위해서 인간 제사장과 동물의 제물이 필요했습니다. 사람이 동물에게 자신의 죄를 넘기고 동물을 대신 죽임으로 용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물을 드리는 제사는 완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은 끊임없이 반복해서 동물을 죽여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원한 가치를 가지신 자기 자신이 친히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분의 본질은 태양처럼 빛나고 완전하고 아름다우며 감히 인간이 측량할 없는 존귀한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참혹한 십자가에서 자기 자신을 온전한 제물로 성부 하나님께 드리심으로, 죄의 댓가를 요구하시는 의로우신 성부 하나님을 만족시키신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야를 비롯하여 많은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을 뿐이었습니다. 사실 구약의 이스라엘 전체 역사가 보여주는 것은 인간은 하나님 앞에 완전하게 순종할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모든 순종을 홀로 감당하셨습니다.

로마서 5 19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19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같이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 역사상 홀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모든 요구를 완벽하게 순종하신 것입니다예수님께서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서 완전히 의롭다고 하나님 앞에 인정 받은 유일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의 전환이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8절의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8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떨며 엎드렸다가 다시 그들이 눈을 들어 보았을 때에는 오직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없었던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그토록 바라고 갈망하던 유일한 , 구약의 모든 인물들이 바라고 갈망하시던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만이 그들 앞에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은, 예수님 이외에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쳐다보고 있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진정으로 어디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지는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누구를 통하여 구원을 얻는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정말로 누구를 의지해야 하는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과연 어떻게 자리에 있을 있는 것인가? 죄인이 감히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되었는가? 그것은 오직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의 댓가를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말씀에 순종하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그분의 의를 입히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있게 것입니다

우리의 과거가 우리의 마음을 힘들게 하고 나의 모든 잘못들이 마음을 짓누르고 괴롭게 때에 어떻게 감히 우리가 위로를 얻고 새로운 미래를 꿈꿀 있는가?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완전히 용서하시며 우리의 주인과 우리의 삶의 진정한 인도자가 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확인하는 것인가? 우리가 바라고 갈망하고 마음에 원하고 사랑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이시다 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 2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2:2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넷바이블이라는 영어 성경은 2 부분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Keeping our eyes fixed on Jesus” 다른 곳을 쳐다보지 말고 우리의 눈을 오직 예수님께 고정하라는 말씀입니다. 마치 제자들의 눈에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 보이셨던 처럼 이제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의 눈은 오직 예수님만께만 고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경험하고자 하는 목표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모든 생각 그리고 모든 감각이 오직 예수님께만 집중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 그분의 위대하심 그분이 사랑 그분의 은혜, 그것이 우리를 압도하여서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그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기는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독점적인 위대하심과 그분의 영원한 가치를 확인하고 발견하고 기뻐하시는 참된 예배자로 변화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이 온전히 새로워져서 가장 존귀하신 예수님만 더욱 사랑하게 되는 복된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적용하면서 두번째 적용은 "오직 그분의 말씀을 들으라" 라는 것입니다. 혹시 성도님들께서는 누군가의 말을 경청하시는 편입니까? 저와 아내는 교회에서 만난 커플입니다. 저는 제가 스물네살 아내가 스무살때 처음 연애를 시작했습니다. 그때 아내는 청년부 새내기였지만 저는 이미 청년부 안에서 최고 리더 중에 한명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차이가 차이도 아닌데 그때에는 저도 모르게 아내가 많이 어리다고 생각하면서 말을 별로 귀담아 듣지 않았던 같습니다.

아내가 피아노를 전공했기 때문에 어느날 좋은 음악회 표를 구해 왔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같이 가자고 말을 했습니다. 아내가 저에게 자세하게 이야기를 주었습니다. 굉장히 좋은 공연이다 그러니 옷은 세미 정장 이상은 입어야 한다 세종 문화 회관에 몇시까지 와라 좋은 자리에 좋은 표니까 준비해 와라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저는 마음이 너무 교만한 상태라서 아내의 이야기가 들리지가 않았습니다. 분명히 세미 정장을 입고 오라고 했지만 답답한 정장 스타일의 옷을 입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유행하던 제가 제일 좋아하던 짙은 파란색 잠바와 청바지를 입었습니다 

그렇게 입고 집에서 출발을 했습니다. 그리고 지하철을 타고 한참을 가서 역에서 내렸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문을 열고 세종 문화회관 안으로 들어갔는데 순간 당황을 했습니다. 제가 한눈에 봐도 파란색 계열의 옷을 입은 사람은 한명도 없었습니다. 아내가 말한 처럼 대부분 세미 정장 혹은 정장 차림이었습니다. 애써 당황한 마음을 감추면서 아내 손을 잡고 함께 자리를 찾아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내가 저를 끌고 가는데 넓은 에서 자꾸 앞쪽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까 저의 자리가 앞에서 거의 두번째 중앙 자리였습니다. 아내가 우리 둘을 위해서 특별히 준비한 자리였던 것입니다. 분명히 저에게 좌석에 대한 이야기도 했었겠지만 교만한 저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저는 너무 부끄러운 마음에 어쩔줄 몰라하며 의자에 최대한 몸을 파묻고서는 연주회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세계적인 지휘자인 정명훈씨가 무대 왼쪽에서부터 등장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필 들어오면서 저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아마도 파란색 잠바가 눈에 띄었던 같습니다

정명훈 씨가 걸어들어오면서 저와 눈이 마주친 것은 대략 5 정도의 시간이었는데 인생의 가장 길고 민망하고 고통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벌써 20년이 되어서 오래전 일이지만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식은땀이 나는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들께서는 오늘의 말씀에서 하이라이트가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5절의 마지막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사실 모든 영어 성경들은 listen to him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원문에 가까운 번역이라고 말할 있겠습니다. 단순히 사람으로 부터 나온 말만 듣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존재 자체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아내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렇게 부끄러운 일을 당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단순히 말을 듣지 않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존재 자체를 충분히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성도로서 목회자로서 교회를 때에 염려하는 것이 있는데,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의 특별함을 우리가 종종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 단순히 성경에 있는 자체를 지키는 , 다시 말해서 마치 좋은 책을 읽고 책에 쓰여 있는 이야기를 따라가는 정도로 생각하는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기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예수님과 우리의 특별한 관계를 말씀하시고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이번에 제가 새롭게 깨달은 것은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라라는 것과 9절의 말씀이 중요한 연결이 있다는 것입니다. 9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죽은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가? 그것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라는 것을 전체적으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예수님의 일하심을 온전히 이해할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이해할 없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2 20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말씀은 평범한 말씀이 아닙니다. 단순히 물리적인 관점에서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원래 우리 인간 개개인은 분리된 존재입니다. 다른 사람과 나와의 존재는 물리적으로는 하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 사도는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의 하나됨에 대해서 영적인 연합에 대해서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렇게 중요한가?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됨의 특징이 무엇인가?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안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나와 영적으로 연합하여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존재가 나와 떨어질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그저 우리와 손을 잡고 걸어가는 정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그저 우리의 등을 만져주시는 정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며 지금 우리와 하나가 되시며 우리를 품으시며 안으시며 우리는 그분 안에 있으며 세상에 누구도 감히 이루지 못한 가장 내밀한 관계를 지금 우리에게 만들어내셨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파리의 연인"이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너무나 유명해진 대사가 있습니다. “ 안에 있다 속에 너가 있다 라는 대사입니다. 사랑의 극치를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대사의 깊이를 수가 있습니다. 인간의 사랑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 그분의 형상에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히 인간이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 누군가에게 당신이 안에 있다 라고 말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야 말로 성경적인 대사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꿈꾸는 가장 아름다운 관계를 우리와 만드시고 그러므로 이제는 관계 안에서 너희는 나의 말을 들으라 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저는 이번에 말씀을 묵상하면서, 성경을 통틀어서 가장 중요하다고 말할 있는 예레미야 31 33절이 새롭게 이해가 되었습니다. 말씀은 이제 신약의 시대가 열리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렇게 변할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선포하시며 예언하시는 장면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1:33 그러나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백성이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라고 말하십니다.

무슨 의미인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 안에서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인격으로 땅에 오셨음을 말씀하십니다. 진리이시며 말씀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제는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시며 영원히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놀라운 신비이며 감격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말씀을 묵상하면서 참으로 흥미로운 것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오늘 본문 앞에 있는 마태복음 16 24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서제자라는 호칭이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마태는 계속해서그들이이라는 표현만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 다시 제자라는 말이 등장하는가? 오늘 5절에 말씀에이는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그리고 나서 6절에 드디어 다시 제자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듣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의미인가? 누가 예수님의 참된 제자들인가? 누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자들인가? 부활하신 예수님이 안에 계시며 그분과 하나된 사람들, 존귀하신 그분의 말씀을 기울여 듣는 사람들, 예수님으로 인해 마음이 변화되어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 바로 사람들이야 말로 예수님의 참된 제자들이다 라고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들께서는 자신이 영적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무엇을 통해서 확신하고 계십니까? 저는 청년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저의 삶을 돌이켜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무겁게 느껴지는 " 바로 그것이 저에게 있어서 가장 변화인 같습니다.

어렸을 부터 들었던 말씀이지만 말씀이 가지는 무게감이라는 것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말이 아니라 절대자인 신의 음성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원하며 존귀하며 결코 쇠하지 않는 무게와 영광을 지닌 것입니다. 말씀이 너무나 무거워서 너무나 소중해서 너무나 진중해서 그것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고 나의 생활을 사로잡고 나의 마음을 회개시키고 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린 저의 예배의 특별한 경험이라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말씀의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말씀의 무게를 놀랍게 새롭게 경험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의 모든 초점을 예수님께 맞춘 사람,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는 자만이 그분의 말씀의 무게와 영광을 경험할 있게 되는 것입니다 

보석과 같이 존귀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며 나의 전부가 되시며 나를 품으시며 안으시는 바로 그분의 안의 임재와 역사를 경험하며 갈망할 때에 그제서야 참된 제자인 우리가 이렇게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겠습니다, 우리가 주의 음성을 듣는 자가 되겠습니다, 주의 말씀이 마음에 새겨진 자로 살아가겠습니다 라고 고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친히 이끌고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영광을 보이셨고 제자들이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도록 하셨습니다. 성도의 구원도 그리고 삶의 여정을 걸어가는 모든 힘과 능력과 이유도 우리의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신 놀라운 일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분의 영적인 임재와 능력을 이해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눈이 오직 그분께만 집중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시며 더욱 가까이 하시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참된 제자로서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분의 말씀이 우리에게 너무나 사랑스러워지고 진중하고 무거워지는 영적인 깊이와 경지를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주님의 음성을 내가 기꺼이 듣겠나이다 라고 고백하는 깊은 영적인 고백으로 평생을 걸어가시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시간에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 하나님,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원합니다나의 구원이시며 나의 의로움이시며 능력이시며 사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갈망하며 주님을 갈망하며 주님을 의지하는 복된 성도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둘째로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 하나님, “오직 주의 말씀을 듣기를 원합니다 안에 살아계신 주님의 존귀한 말씀이 저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되기 원합니다, 영원한 주의 말씀이 저에게 있어 가장 무거운 것이 되며 저의 삶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것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주의 자녀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문전체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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