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은, 몸이 두 개이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종종합니다. 목회는 다양한 사역을 한꺼번에 감당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선 순위를 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것을 조절해도 어찌할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 마음이 아픕니다.
고 박정수 권사님은, 저희 교회 성도님의 어머니이십니다. 팔십세가 넘으셨고 몇달 전에 위기가 있었습니다. 그때 잠깐 짬을 내어서 널싱홈에 방문하고 기도해드렸습니다. 그 후에 기적처럼 다시 회복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참 기뻤습니다.
저는 치매로 소천하신 외할머니의 장례를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영주권 진행중이라 한국으로 갈수가 없었고, 제 마음을 헤아리신 어머니께서 장례를 다 치르고 소식을 전해주셨습니다. 어린 저를 온 정성으로 키워주신 외할머니의 마지막을 함께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참으로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르신들을 향한 마음이 더 애틋합니다.
다시 권사님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몸이 이제는 더 많이 약해지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다른 일들을 다 재쳐놓고 그곳으로 달려갔습니다. 꽤 먼길이지만 이미 다녀왔던 길이라 별로 낯설지 않았습니다.
오랜만에 뵈었는데 훨씬 마르셨고 약해지셨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방으로 들어가자 마자 침대 옆으로 다가가 손을 잡아 드렸습니다. 권사님 손은 너무나 따뜻하고 부드러웠습니다. 감사하게도 의식은 있으셔서 살짝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인사를 드렸습니다. "권사님, 저 기억하시지요? 예전에 한번 다녀갔던 정진부 목사입니다."
그런데 권사님께서 제 손을 어루만지시면서 뜻 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추운데 왜 왔어?" 갑자기 울컥해서 잠시 말을 이을 수가 없었습니다. 본인이 이렇게 아프신데도, 본인의 죽음이 바로 앞에 보이시는데도 이분은 이렇게 다른 사람을 걱정하시는구나. 억지로 더 웃으면서 말씀드렸습니다. "권사님, 괜찮아요, 날이 그래도 많이 풀렸습니다. 권사님 뵈러 오는데 날씨가 무슨 상관이 있나요, 권사님이 건강해지셔야죠"
저는 고난 중에 있는 성도님을 찾아뵐 때에 꼭 시편 23편을 나눕니다. 한번은 한 성도님 댁에서 말씀을 나누다가 제가 오히려 펑펑 우는 민망한 일도 있었습니다. 저 역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여러 번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말씀 안에서 제가 누렸던 모든 위로를, 성도님들과 나누기를 언제나 원하기 때문입니다.
박정수 권사님을 위해서 천천히 말씀을 읽어드리는데, 시편 23편을 암송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소리는 너무 작지만, 입을 벌려서 저의 읽는 속도에 맞춰서 함께 암송하셨습니다. 말씀을 읽고 권사님 잘 들으시도록 힘있게 설교했습니다. "권사님, 염려마세요, 주님께서 권사님과 지금 이 시간에 함께 하십니다, 가장 어려운 순간이지만 하나님께서 권사님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위로하고 발걸음을 돌이키며 또 오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권사님은 마치 기다리셨다는 듯이 또 말씀하십니다. "추운데 안 와도 괜찮아" 너무나 따뜻한 권사님 손 한번 더 잡아 드리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에, 권사님께서 주님 품에 안기셨습니다.
저희 교회 집례가 아니었기에, 조문객의 한 사람으로서 예배당에 앉아 예배를 드렸습니다. 집례하시는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많은 것들을 생각했습니다. 삶에 대해, 죽음에 대해, 따뜻함에 대해, 천사같은 권사님의 얼굴에 대해, 그리고 남을 배려하는 진실한 사랑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권사님이 출석하셨던 교회 성도님들께서 참으로 아쉬워하셨습니다. 믿음의 권사님을 떠나 보낸다는 것은 모두의 슬픔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제 마음도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 온전한 주님의 품에 안기신 권사님을 생각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마음에 위로가 되었습니다.
곧 다시 권사님을 뵌다면, 그 손을 다시 한번 잡고 싶습니다. 아마도, 이 땅에서 그 몇 번의 순간보다 훨씬 더 따뜻하고 부드러울 것입니다. 건강해지시고 또 아름다워지신 권사님께서 저를 반겨주실 것을 확신하고 기대합니다. 그리고 그때에는 농담으로 말씀드려야겠습니다. "권사님, 그동안 잘 지내셨죠? 이제 날이 안 추워서 권사님 다시 뵐려고 왔어요." 영광스러운 주님 나라에서, 고 박정수 권사님 다시 뵐 날을 기다립니다.
목회자에게 있어서 삶과 죽음은 맞닿아 있습니다. 이것은 그저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그렇습니다. 오늘은 누군가의 탄생을 함께 기뻐하시만, 또 내일은 누군가의 죽음을 함께 가슴 아파하며 유가족을 위로합니다.
죽음에 대한 감각을 가지는 것은 참으로 유익합니다. 왜냐하면 삶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오늘이 내 삶의 마지막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그 숭고한 마음은, 오늘 내 설교가 마지막 설교일 수도 있다는 그 절박함은, 우리의 태도의 근본을 뒤흔듭니다.
임종인 장로님을 처음 뵌 것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 교회를 떠나셨다가 다시 돌아오셨습니다. 연세가 80이 훌쩍 넘으셨지만 예배를 사모하시고 빠지지 않고 나오셨습니다. 다만 섬겨야 하는 성도님들이 여러분이라, 깊은 관계를 가지기 전에는 그분의 마음까지 알 수는 없었습니다.
어느 날 임장로님께서 속하신 순 모임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제일 연장자이시기 때문에 순장님께서 장로님에게 대표 기도를 부탁하셨습니다. 그때 그분의 진지한 목소리를 처음 들었습니다. 진실하고, 순수하고, 간절하게 기도하시는 그 음성을 처음 들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바로 눈 앞에 계시는 것처럼 기도하시는 그 간절함이 저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참 감사했던 것은, 저를 위해 축복하며 기도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저의 목회를 위해서, 저와 저희 가족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주셨습니다. 손자뻘에 불과한 목회자를 귀히 여겨주시고 또 기도해 주심에 참으로 마음이 기뻤습니다. 목회자는 받는 것을 기대하지 않고 누군가의 안부를 묻는 사람이기에,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주는 분들이 특히 더 고마운 듯 합니다.
암 투병 중이시던 장로님께, 더 이상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댁에서 호스피스 케어를 하시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댁으로 찾아갔습니다. 권사님 혼자 남편을 돌보셔야 해서 집이 정리가 안되어 부담스러워하셨지만, 꼭 찾아뵙고 싶었기 때문에 조금은 무리를 하였습니다.
그래도 장로님이 의식이 있으셨습니다. 비록 힘이 없어 많은 말씀은 못하셨지만, 권사님께서 장로님이 얼마나 귀하게 그동안 교회를 섬겼는지,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얼마나 선하게 대하셨는지를 알려주셨습니다. 권사님께서 부탁하셔서 면도기로 장로님 면도도 해드렸습니다.
시편 23편을 천천히 크게 읽어드리고 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아프신 분들을 찾아뵈면 크게 기도합니다. 때론 그래서 목이 상하지만, 그저 잠잠한 기도로는 제 마음의 간절함을 다 표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앞에 두고, 삶의 가장 큰 어려움과 고통 앞에서 어찌 제가 조곤조곤 기도할 수 있겠느냐는 마음에 결단이 있기 때문입니다.
잠깐 고민하다가, 장로님의 가슴에 올려진 손을 조심스럽게 꼭 잡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장로님께서 힘을 내서 제 손을 끌어 올리시고는 결국에는 본인 머리에 제 손을 올리셨습니다. 말씀은 안 하셨지만, 안수 기도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장로님의 마지막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평소보다 더 크게 그리고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이 어려운 시간을 오직 목자 되신 주님을 의지할 수 있기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지만 이겨내실 수 있기를, 성령께서 주시는 하늘의 평안으로 가득 채워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기도의 문장이 정지할 때마다 힘을 내어 아멘하시는 그 음성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심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 제 평생에, 장로님의 머리에 안수하고 기도한 것은 처음인 듯 합니다. 그리고 죽음을 앞에 두신 분을 놓고도 그러합니다. 장로님의 그 순간은 단순히 어린 목사의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종을 존대하며 간절히 주님의 은혜와 복을 사모하였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기도가 끝이 나고 장로님과 권사님 격려해 드리며 돌아오는 발걸음이 그래도 조금은 가벼웠습니다. 넘치게 위로하시는 주님의 역사를 함께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집례한 어제의 하관 예배를 마지막으로, 임장로님의 모든 장례 절차를 마쳤습니다. 우리의 육신이 무너져도 성도는 주님 앞에 가장 아름다운 존재라는 저의 설교는, 단순히 설교가 아니라 저의 깊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천국에서 설교를 들으실 장로님에 대한 진실한 고백이었습니다. 간절하게 하나님의 바라고 그분의 복을 사모했고 누렸던 장로님이야 말로, 목회자로서 저의 삶 속에 오래 남으실 것입니다.
임장로님의 관이 내려가는 것을 더 가까이 다가가서 보았습니다. 그 순간이 마치 저에게는 친할아버지께서 하관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멀지 않아 장로님을 뵐 생각에 마음에 위로가 있었습니다. 임장로님을 뵙는 그 날에 더 기쁘게 만나기를 원합니다. 저도 장로님처럼, 누군가를 간절하게 축복하는 삶으로 살았다고 조금은 자랑하고 싶습니다. 장로님 다시 뵐 그 날까지 부끄럽지 않은 목회를 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주만이 나의 영혼을
이끄시며 캄캄한 발 아래
빛을 비춰주시네 주만이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하시며 사망의 골짝길을
하늘길로 만드시네
아버지여 오랫동안
원했던 나의 평생소원 주님의 나라에서 주의 자비와 인자하심
바라보며 주와 함께 주의
뜰에 거니는 것
오 나의 인생의
길이 가시밭길이라도 주만 함께 하신다면 주만 함께 하신다면 아버지의 품안에서
사랑을 노래하리 내 아버지의 품안에서
사랑을 노래하리라
2. 곡 소개
이 곡은
김명식 1집에 수록된 곡이다. 이 곡은 기본적으로, 시편 23편을 더욱 풍성한 문학적인 언어로 풀어낸 곡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제목이 강조하는 것처럼, 오직 주님이신 여호와
하나님만이, 성도에게 빛과 바른 길과 인자하심과 그리고 사랑을 주시는 분이심을 고백하는 매우 서정적이며
아름다운 찬양이다.
3. 말씀으로 바라보기
이사야 44:6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44:6 "This
is what the LORD says--Israel's King and Redeemer, the LORD Almighty: I am the
first and I am the last; apart from me there is no God.
44:6–8 Yahweh’s status as
true God, King, Redeemer, and Deliverer of Israel is declared again, and
compared with the utter futility of belief in handmade idols. Most of this
imagery has been used in chs. 40–43, but it is brought together in these three
verses to lead into the sarcastic and detailed description of the work of an
idol maker. 이스라엘의참하나님, 왕, 구속자로서의여호와하나님의지위가다시한번선언되고, 손으로만든우상을믿는것의완전히헛됨과비교가됩니다.이러한이미지들의대부분은이미앞에장들에서사용되었지만, 이세구절에합쳐져우상을만드는사람의일에대한냉소적이고상세한묘사로이어집니다.
John
D. Barry et al., Faithlife Study Bible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12,
2016), 사
44:6–8.
44:6 A long
argument against idols begins with an assertion of the uniqueness of God. The
words I am the first and I am the last
are used of Christ in Rv 1:17; 2:8; 21:6; 22:13. 우상에대한긴논쟁은, 하나님의유일성에대한확신으로시작됩니다. 나는처음이요나는마지막이라라는말씀은예수그리스도에대해사용되었습니다.
Tremper
Longman III, “Isaiah,” in CSB Study Bible: Notes, ed. Edwin A. Blum and Trevin Wax
(Nashville, TN: Holman Bible Publishers, 2017), 1106.
시편 23: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23:2 he refreshes my soul. He guides me along the right paths
for his name’s sake.
23:3 God met
David’s directional needs. Sheep are
prone to wander and become lost; they need guidance. Many cars today have
navigational systems to warn you to return to the right road when you deviate.
Through his Word and his Spirit, God leads us along the right paths in life—and
reroutes us when we foolishly become wayward. Why? For his name’s sake—that is, so that others can hear us say, “My
God has brought me here.” 하나님께서는다윗의삶의바향에대한필요를충족시키셨습니다. 양은방황하거나길을잃어버리기쉽습니다그래서그들은인도가필요합니다. 요즘의많은자동차에는길을이탈했을때올바른길로돌아가도록경고하는내비게이션시스템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그분의말씀과그분의성령을통해, 우리를인생의올바른길로인도하시며, 어리석게도방황할때에우리를다시인도하십니다. 왜그렇습니까? 자기이름을위하여그렇습니다. 즉, 다른이들이우리로부터“나의하나님께서나를여기까지인도하셨다”라는들을수있도록하기위함입니다.
시편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23:4 Even though I walk
through the valley of the shadow of death, I will fear no evil, for you are
with me; your rod and your staff, they comfort me.
23:4valley of the shadow of death. Or, “very
deep shadow of death.” Even in life’s most frightening situations, we can be
confident of God’s guiding presence. Indeed, when God is with us, the valley of
the shadow of death is one of the “paths of righteousness.” with me. The Good Shepherd does not send
His sheep into places He will not go; He leads and is with us always (Mt
28:20). rod. A club c 2 ft long. staff. A long, straight walking stick
used to guide the sheep and pull down leafy branches for them. 사망의음침한골짜기혹은“죽음의아주깊은그림자” 인생의가장두려운상황에서도우리는하나님이인도하시는임재를확신할수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이우리와함께하실때에, 사망의음침한골짜기도“의의길” 중하나입니다. 나와함께하심이라“ 선한목사는그가가지않을곳으로그의양을보내지않습니다. 즉, 그분은우리를인도하시며항상우리와함께하십니다. 주의지팡이: 약2피트길이입니다. 막대기: 양을인도하고양을위해잎이무성한가지를잡아당기기위한, 길고곧은걸을때사용하는지팡이입니다.
Edward
A. Engelbrecht, The Lutheran Study Bible (St. Louis, MO: Concordia
Publishing House, 2009), 865–866.
시편 23: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23:6 Surely goodness and love will follow me all the days of my
life, and I will dwell in the house of the LORD forever.
23:6 The verb pursue is commonly used for attackers,
but here the Lord’s goodness and faithful
love are personified as the ones who chased the psalmist throughout his
life. As long as I live represents
the Hebrew “for the length of days.” This is equivalent to the parallel all the days of my life. Though some
translate this as “forever,” it is nowhere else used that way but always refers
to one’s earthly life (91:16; Pr 3:2, 16). Dwell
(Hb yashav) is similar to the word
for “return” (Hb shuv). In this
verbal form, it differs only in the vowels. It is possible that the request is
to return to the sanctuary of the Lord throughout one’s life, although the
preposition in argues for the idea
of “dwell.” 나를따르리니: 이동사는보통공격하는이들에게사용되지만, 여기에서는주님의선하심과신실한사랑이시편기자를평생쫓는것으로의인화됩니다. 영원히살리로다: 이단어는돌아오다라는단어와유사합니다. 이동사형태에서는모음만다릅니다. 비록전치사인“in”이거주하다라는개념을주장하지만, 평생동안주님의성소로돌아가라는요구일가능성도있습니다.
Kevin
R. Warstler, “Psalms,” in CSB Study Bible: Notes, ed. Edwin A. Blum and Trevin Wax
(Nashville, TN: Holman Bible Publishers, 2017), 837–838.
이사야 46:3 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 집에 남은 모든 자여 내게 들을지어다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 46:3 "Listen to me, O
house of Jacob, all you who remain of the house of Israel, you whom I have
upheld since you were conceived, an have carried since your birth. 46:4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 46:4 Even to
your old age and gray hairs I am he, I am he who will sustain you. I have made
you and I will carry you; I will sustain you and I will rescue you.
46:3, 4 all the remnant
of the house of Israel. The God of Israel is not helpless like idols.
In His strength He has sustained and will sustain helpless Israel through every
circumstance. In v. 4, the Lord uses the first person pronoun 6 times to
emphasize His personal involvement in delivering Israel. 이스라엘집에남은모든자여: 이스라엘의하나님은우상처럼무력하시지않습니다. 그분의힘으로, 무력한이스라엘을지탱해주셨고또지탱해주실것입니다. 4절에서주님은1인칭대명사를여섯번사용하여서, 이스라엘을구원하시는일에그분께서인격적으로관여하고계심을강조합니다.
이 곡이 그러한 것처럼,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참 신이심을 선포하고 있다. “오직 주만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며 우리에게 모든
것을 공급하시고 인도하신다.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역시, 처음이자 나중이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그분을 믿을 때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영원한 영적인 연합으로 하나가 되며, 주님의 품 안에서 거하는 자가 된다.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며,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 마음껏
부르는 놀라운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다윗은 가장 위대한 신앙의 사람이었지만, 그
역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어려운 시간들을 반드시 지나야만 했다. 고난이 없다는 것은 거짓 신앙에
불과하다. 성경은 그 어떤 사람이라도 고난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 가운데에서도 반드시 여호와께서 그 자리에 함께 하신다고 위로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동행하시며,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가장
선한 길로, 그리고 의로운 길로 인도하신다. 지금 당장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 있더라도, 성도는 언젠가 반드시, 여호와께서
나를 이렇게 선하게 인도하셨다 그분의 아름다운 뜻을 이루셨다 라고 진심으로 고백하는 날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을 매일 더 깊이 알아가는 것이다. 아버지는 우리를 품으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우리가 그려보고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아버지보다 자비로운 분이시며, 또한 위엄이 넘치는 분이시다. 성도가 너무나 암담하고 어두운인생을 걸어간다 하더라도, 가장
위대하시며 가장 사랑이 넘치시는 그 아버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우리의 두려움은 물러날 것이다. 이 찬양을 통해서, 고난 가운데에서도 위로를 받기를 원하며, 세상 그 어떤 것과도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주님의 소중함과 그분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기를 기대한다.
히브리서 9:14 하물며영원하신성령으로말미암아흠없는자기를하나님께드린그리스도의피가어찌너희양심을죽은행실에서깨끗하게하고살아계신하나님을섬기게하지못하겠느냐
(개역개정) 9:14 How much more, then, will
the blood of Christ, who through the eternal Spirit offered himself unblemished
to God, cleanse our consciences from acts that lead to death, so that we may
serve the living God! (N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