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Learning is the fruit of question-asking and answer-seeking."
JOHN PIPER (1975)
미국에 와서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해 이것저것 찾아보았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Ask Pastor John 입니다. 성도님들이 각자의 삶에 정말 진지한 질문들을 가지고 존 파이퍼 목사님에게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님 역시 진지하게 그것에 대해 답해주는 것입니다.
성도의 성숙을 향한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길은, 질문하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물론 일정한 신학적인 지식을 습득해야 합니다. 조직 신학과 교리에 대한 내용들을 알아가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종합하고 내면화 시키는 가장 좋은 길은 질문하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존파이퍼 목사님은 정확하게 바로 그부분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는 APJ를 통해서 성도의 질문을 양분 삼아 자기 자신의 성숙을 추구해 왔습니다. 또한 그 성숙의 열매를 통해서 교회를 진실하게 섬기는 선순환의 길을 평생동안 걸어왔습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의 대답을 들어보면, 한 사람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마치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고 대답을 해줍니다. 그의 대답은 신학적이지만 그러나 우리가 종종 대하는 차갑고 의미없는 신학이 아니라 살아 있는 신학입니다.
아마도 혼전 순결에 대해서 물어본 에피소드로 기억합니다. 파이퍼 목사님의 대답은 논리적이기만 한 감정 없는 그런 대답과 달랐습니다. 그의 깊은 한숨은 영혼에 대한 염려고 가득했습니다. 마치 자신의 친 손자에게 이야기해주는 것처럼 신앙의 선배로서, 그리고 탁월한 신학자이자 목회자로서, 그의 대답은 너무나 진중하고 가치가 있었습니다.
실제로 APJ를 들어보면, 굉장히 논리정연합니다. 어떤 질문에 대한 잘 정리된 강연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하지만 굉장히 마음에 와 닿는 실제적인 내용과 통찰들이 그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특히 넘버링을 해서 하나하나 설명하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따라가기가 쉽습니다. 이론과 실천을 가장 완벽하게 결합한 구조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유명한 팟케스트가 책으로 나왔습니다. 우연히 보고나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꼭 산타의 선물을 실제로 받은 아이처럼 마음이 들떳습니다. 이렇게 좋은 컨텐츠가 책으로 나오다니!
저자인 Tony Reinke는 존 파이퍼와 함께 이 방송을 진행하는 분입니다. 한국에도 번역된 '독서신학'의 저자입니다. 그 책도 잘 쓴 책이고 정말 좋게 읽었는데, 이 책에서는 더욱 그의 능력을 십분 발휘한 듯 합니다.
어느 정도 기대감을 가지고 책의 내용을 살펴보는데, 좋은 의미로 숨을 쉬기가 어려웠습니다. 왜냐하면 이 책이 단순히 방송의 녹취록을 모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웹사이트에 제공하는 스크립트를 한차원 더 업그레이드 하였습니다.
지난 10년간의 방송을 유기적으로 주제별로 묶었는데 정말 탁월하게 정리했습니다. 모든 내용 안에 각주가 들어가 있어서 원하면 그 방송을 찾아서 추가로 더 들어볼 수 있도록 배려해 놓았습니다. 챕터 1인 Bible Reading, Bible Neglect, and BIble Memory 파트만 읽어봐도, 성도가 가져야 하는 성경에 대한 이해와 태도에 대해서 가장 성경적이면서도 가장 실제적인 이야기들로 완벽하게 정리가 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크리스천의 삶의 청사진과 같습니다. 정말 잘 만들어진 청사진입니다. 신학적으로 복잡하고 어려운 설명들이 아니라, 깊고 건전하면서 동시에 내가 실제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정확한 그림입니다.
책 서문에 써 있는 존 파이퍼의 명언이 마음에 깊이 와 닿습니다. "All Learning is the fruit of question-asking and answer-seeking." 이 짧은 한 마디를 통해서 그의 삶 자체가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성도들을 위해서 평생을 질문하고 답하면서 자기 자신을 훈련했습니다. 그리고 그 위대한 결과물을 드디어 우리의 두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이 책을 어떻게 사용하면 좋을까 생각을 했습니다. 첫째는, 제 자신의 성숙을 위해서 사용해야겠습니다. 정독을 하면서 파이퍼 목사님의 성경적 이해와 삶과의 연결성을 계속적으로 학습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영어권 북클럽 교제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 책의 수준을 고려한다면 아마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리더들과 나누어야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지금 당장은 하지 않더라도, 북클럽을 염두에 두고 내용을 함께 준비해야겠습니다.
셋째는, 주제 설교의 자료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주일 강단에서 강해 설교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결국 주기적으로 주제 설교를 해야하는데, 이 책을 통해서 성도님들이 실제로 경험하는 삶의 거의 모든 문제를 설교로 다룰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은 그저 읽기만 해도 감격이 됩니다. 왜냐하면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신 결과이며 한 사람의 노력의 아름다운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존 파이퍼 목사님의 삶을 들어서 지금까지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삶의 마지막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교회를 위해 바쳤습니다.
이 책은 저에게 있어서 축복입니다. 어쩌면 이 책이야 말로 이 시대의 성도로 또 목회자로 바래왔던 모든 것의 총합인 듯 합니다. 그래서 마음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더 정진해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길을 보여주셨기에, 그 길을 마땅히 힘써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저의 작은 소원입니다.
한국에 와서 여러 일정이 있었지만, 예상치 못하던 일정도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로고스 프로그램을 가르쳐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저의 모교와 같은 열린비전 교회를 방문했을 때에 그곳이 목사님들께서 부탁하셨습니다.
사실 제 마음이 울컥했습니다. 왜냐하면, 목회자에게 있어서 뭔가 더 배우고 발전하겠다라는 것이 참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목회지는 학교가 아닙니다. 정말 녹녹치 않습니다. 대부분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막상 목회 속으로 들어가면 무엇인가 더 배워서 자신을 발전시키기 보다는, 그저 현상을 유지하는데 급급할 수 밖에 없습니다.
조심스럽게 부탁하시는데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정을 맞춰보니 밤 시간만 가능했습니다. 어떻게 도와드리면 좋을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한 분이 이미 하신 설교 본문을 가지고, 제가 마치 설교를 준비하는 것처럼 동일하게 로고스를 이용해서 준비한 이후에 비교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제 나름대로 모임의 이름도 지었습니다. '로고스와 설교 포럼' 입니다.
사실 굉장히 고된 작업이었습니다. 여행 중에 틈을 내서 설교를 들어보고 로고스를 띄워서 자료들을 살피면서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참 좋았습니다. 누군가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와 잠깐 통화를 하는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들아, 이제 너는 나눌 때가 되었다, 배우고 익힌 것 아끼지 말고 나누거라'
하루 일정을 마무리하고 피곤한 중에 밤에 찾아뵈었습니다. 목사님들은 저보다 더 피곤한 얼굴로 저를 맞이하셨습니다. 서로 피곤했지만 우리의 마음은 참 좋았습니다. 적어도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교회를 더 잘 섬기고 싶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에 함께하시는 분들도 그리고 제 자신도 참 대단하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저를 부르셨는지 먼저 여쭤보았습니다. 목사님들의 목표는 두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설교를 위해서 로고스를 잘 사용하는 것이고, 또 로고스에 계속적으로 자료를 쌓는 것이었습니다. 준비한대로 잘 말씀드리면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저의 성경 주해 단계부터 스터디 바이블의 효율적인 사용과 필요한 자료 추천, 그리고 원어 검색과 사전의 사용 그리고 주석들까지 연결해서 설명 드렸습니다.
단 한번의 모임이었지만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습니다. 왜냐하면 다시 만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고민했던 것들, 그리고 블로그 안에서 정리했던 것들을 활용해서 두시간 정도의 시간을 강의하고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많은 자료를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에 필요한 자료를 우선 구입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내가 가진 자료의 특성을 파악해서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앵커 기능을 통해서 나만의 해석과 통찰들을 계속 모으시기를 부탁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선순환을 타면서 성경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지고 설교에 능숙해질 수 있다고 설명드렸습니다.
늦은 밤이었지만 그 나눔이 참 좋았습니다. 들으신 분들도 좋아하셨지만 사실 제 마음이 가장 기뻤습니다. 같은 길을 걸어가는 분들을 섬길 수 있다는 것이 저에게 큰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버스 막차를 타고 돌아오는 시간이, 마치 저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사실 제 마음에 한가지 소원이 있었습니다. 비록 제가 설교학 전공은 아니지만 목회자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본인의 설교를 더 업그레이드 하고 싶은 분들과 함께, 설교를 깊이 연구하고 자료를 추천하고 공유하고 피드백을 나누면서 목회에 유익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에 생각지도 못하게, 하나님께서 그 첫 걸음을 내딛게 하셨습니다.
제 블로그에 다양한 분들이 방문하시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읽으시는 목회자들 중에 저의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댓글로 혹은 제 이메일 jungjinbu@gmail.com 으로 언제든지 연락주시면 됩니다. 특별히 설교를 준비하는데 있어 로고스를 사용하기 위해 고민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저의 능력 안에서 작은 도움이라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합신에 처음 들어갔을 때가 생각이 종종 납니다. 저의 마음에는, 이제 드디어 주의 종이 되는 과정에 들어간다는 설레임, 그리고 과연 그 과정을 잘 감당할 수 있을까에 대한 두려움이 공존했습니다.
하지만 공부를 하면 할 수록, 설레임보다는 두려움과 막막함이 더 커졌던 것 같습니다. 교수님 한분 한분은 매우 탁월하셨지만, 그러나 각자가 주시는 메시지와 방향성은 다소 다른 것 처럼 느껴졌습니다. 배우면 배울수록, 내가 정말 목회를 잘 감당할 수 있을까? 또 목회는 무엇일까? 그런 질문들이 늘어났습니다.
저는 정말 좋은 설교학 교수님 두분께 배웠습니다. 정창균 교수님과 박완철 교수님은 모두 설교의 대가이셨습니다. 저의 설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셨고, 그것은 매우 탁월하고 또 성경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설교를 하면 할 수록 설교에 대한 갈급함, 그리고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은 커졌습니다. 그 두분의 방향이 아닌, 결국에는 성경적으로 그러나 충분히 저에게 맞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의미에서 저의 궁극적인 길을 제시해줄 그런 분은 만나지 못하고 지금까지 시간이 흘렀습니다.
거의 10년전에, 아마도 Reformed Seminrary 디민 과정에서 이루어졌던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 세미나 강의안을 우연히 공부했습니다. 그때도 배울 것이 참 많다고 느꼈지만, 그 공부가 저의 설교의 방향성을 궁극적으로 만들어주지는 못한 듯 합니다. 팀켈러 목사님의 책들도 몇권 정독했지만, 그렇게 제 자신에게 크게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우연히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 자체"를 듣게 되었습니다. 아마 예전에도 들어보았겠지만, 완전히 새롭게 들렸습니다. 참 신기합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듯 합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지금까지 제가 성도로, 목회자로 고민하던 부분들을 거의 대부분 채워준다고 느꼈습니다. 사실 설교야 말로 한 사람, 그리고 설교자를 보여줄 수 있는 "정수"입니다. 팀켈러 목사님을 통해, 성경, 그리고 신학, 그리고 목회가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모든 것이 종합되어서 하나의 물줄기를 이룬다고 느꼈습니다.
많은 훌륭한 신학자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다만 제가 생각할 때에 팀켈러 목사님의 최고의 강점은, "대부분의 분야에 대한 탁월함"을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설교라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분야만 잘해서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설교의 내용과 구성부터 시작해서 전달까지 "하나의 하모니"입니다. 특별히 내용을 만들고 전개하는데 있어서, "다양한 분야에 대한 식견과 이해와 종합"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부분에서, 팀켈러 목사님이 다른 분들보다 독보적으로 탁월하다고 느꼈습니다.
틈나는대로 팟케스트를 통해서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설교 원고를 다시 읽으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탁월한 것을 배우고자 하는 눈물나는 고된 노력입니다.
사실 노력이 들어간다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은, 제 마음에 큰 두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이 과정을 견딘다는 것은 제가 많은 것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제 삶의 여유 있는 시간의 대부분은 아마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공부하는데 사용될 것입니다. "과연 그렇게 해도 괜찮을까? 다른 더 좋은 것들이 나에게 있지 않을까?" 솔직한 제 마음입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결국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할 때가 후회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은퇴할 때 쯤 되어서 과거를 돌아보면, 아마 후회는 없을 것입니다. 후회가 없는 선택을 하는 것만이, 후회가 없는 삶을 사는 방법입니다.
보통 설교자들이 세번 설교에 한번 은혜를 끼치면 탁월한 설교자라 부릅니다. 하지만 적어도 저에게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는, 모든 설교가 은혜가 됩니다.
물론 설교의 처음부터 끝까지는 아니지만, 그 설교 안에서 반드시 은혜를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을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계속 공부하면서 탁월함을 배울 수 있다면, 저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좋은 길이 아닐까요?
그래서 배우는 부분을 가능한대로 간단하게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비정기적인 정리이기 때문에 여유가 되는대로 가능한대로 적고 있습니다. 힘들지만 정리하는 것은, 결국 제가 제 말로 정리하는 것이 저의 영혼에 남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함께 이 길을 걸어가는 분들에게, 작은 격려와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결국 목회자는, 자신이 먼저 은혜를 받아야 하는 사람이고, 평생 공부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지치기 쉬운 이 길 속에서, 함께 한걸음씩 전진하면 좋겠습니다.
어떤 대상에 대하여 사랑에 빠지게 되면, 사람이 약간 이상하게 변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상당히 무모해 집니다. 갑자기 큰 이타심을 발휘하기도하고, 예전에 가지지 못했던 용기가 새롭게 솟아나기도 합니다.
궁극적인 아름다움, 그리고 진리에 대한 갈망은 우리의 마음 가운데 본능적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그 진정한 가치를 깨달아 알고 그것을 누리는 것을 포함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 그분의 말씀에 대하여 깊은 사랑에 빠지는 것입니다. 사실상 그것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팀켈러 목사님의 책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일과 영성도, 그리고 센터 처치도 읽고 공부했지만 굉장히 딱딱하다고 느꼈습니다. 제 마음에 보통의 성도님들을 더 마음에 두고 있기 때문에, 저의 개인적인 공부를 위해서는 참 좋았지만, 그렇게 마음에 감격적으로 다가온다는 생각은 별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는 다르더군요, 정말 좋았습니다. 달콤하고 사랑스럽게 들렸습니다. 조금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발을 들여 놓지 말아야 할 곳에 들여 놓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미 하는 일도 분주하고 바쁜데 그분의 설교 까지라니...
처음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듣기 시작하면서 글을 쓴 것이 딱 3개월 전입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네요, 세월은 화살처럼 빠른 것입니다.
현재 공개된 100개 정도 설교 중에서, 20개 정도 들은 듯 합니다. 어떤 설교는 더 잘 공부하고 싶어서 다섯번 이상 들었습니다. 어떤 설교는 너무 완벽하게 짜여진 구조와 내용이라, 책 한권과 버금간다고 느꼈습니다. 들으면서 너무 좋으니, 다섯번 들으면서도 지겨운줄을 몰랐습니다.
좋은 만큼 마음에 원통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내가 영어를 조금만 더 잘했더라면... 영어가 부족해서 이렇게 원통함을 느껴본적이 처음인 듯 합니다. 황홀한 단어와 구조들이 성경적 진리를 드러내면 바로 내 눈 앞에 있는데, 그 뉘앙스와 깊이를 다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 너무 마음에 아쉬웠습니다.
오늘 아침에 설교를 듣는데 성령의 열매, 그리고 크리스천의 성숙에 대한 설교였습니다. 겨우 설교 초반의 20분을 들었을 뿐인데, 저의 생각을 뛰어넘고 자극하는 전혀 새로운 논리 구조, 그리고 도전적이고 따뜻한 논지들이 너무 좋았습니다. 결국 견디다 못해, 설교집을 구매했습니다. 비용이 너무 많이 들지만, 적어도 3개월 동안 스무편 정도를 들으면서 공부할 열정이라면, 일단 공개된 전체 설교를 충분히 공부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구입하고 오늘 들은 설교의 원고 부분을 읽어 보았습니다. 좋더군요... 역시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배울 것이 너무 많아서 좋았습니다. 그리고 배워야 하는 내용이, 가장 탁월한 수준이라 행복했습니다. 팟캐스트의 설명 부분에, 언제 한 설교인지 그리고 어떤 시리즈에 속한 설교인지 설명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실제 원고를 찾는 것도 너무 수월했습니다.
얼마전에 들은 설교에서는, 팀켈러 목사님이 대략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자신에게 하나의 취미가 있는데, 크리스천으로 회심한 지적으로 탁월한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모으는 것이다."
사실 충격 받았습니다.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보면, 굉장히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 내용들이 하나같이 훌륭합니다. 특별히 단순히 설교를 인용하기 위해서 그 사람들을 공부했다기 보다는, 평소 그분이 그런 내용들을 깊이 고민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한편으로는 혹시 함께 섬기는 목회진들이 내용을 찾아서 제공해 주는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인용 문구를 찾은 수준이 아니라, 평소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항상 이 부분을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드디어 그것의 비밀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공부하고 분석하고 모으고 준비하는 것이, "팀켈러 목사님의 취미"였던 것입니다.
저는 사실 그렇게까지 할 자신은 없습니다. 저의 능력의 한계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공부하면서, 그것을 제 자신의 중요한 취미로 삼아서 (이미 사랑에 빠졌기 때문에) 그분의 성경적인 이해와 논리 전개 등을 저의 영혼 가장 깊은 곳에 새겨 놓고 싶습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제가 성장하고, 또 함께 하는 성도님들이 조금이라도 성장하고 행복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저의 소박한, 어쩌면 제가 꿈 꾸지 말아야 할 원대한 꿈입니다.
저는 다른 사람과 저를 비교하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제가 흔들리지 않는 방향성과 목표가 있는가, 제가 얼마나 충실하게 준비했는가,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가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른 방향인데, 몸은 고달픕니다. :)
이번에 주일 설교로 이 본문을 정한 이유는, 제가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제가 주일 설교를 꾸준하게 해야 한다면 목회적인 부분까지 충분히 고려해야
하지만, 한번 하는 경우에는 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본문을 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목회적인 고려를 넣기로 생각했습니다.
이 본문은, 난이도로 따지자면 지금까지
제가 한 설교 중에 최고의 난이도를 가진 본문이었습니다. 일단 자주 다뤄지는 본문이 아니고, 아주 쉽게 풀어낼 수도 없는 본문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저는, 이스라엘의 결정적인 실패 이후에 등장하는 여호와의 이름의 더블의 선포가 제 자신과 성도에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더 충분히 연구하고 설교 안에서 풀어내고자 하는 결심으로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역시나, 쉽지는 않았습니다. 설교 자체를 조금이라도 쉽게 가려면 본문 안에서만 내용을 풀어내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그런데 네러티브는 전혀 다릅니다. 이 본문은 네러티브와 해석의 깊이라는
두가지를 한꺼번에 다 잡아야 하는 본문이었습니다.
첫째로 이 본문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중요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부터 이야기 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야만 이스라엘 백성이 배신한 그 장면을 부각시키면서, 성도님들로부터 정서적으로 공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쉽지가 않았습니다. 출애굽기 34장까지 오는 그 모든 과정을 초반에 설명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압축하고
압축해서 초반 7분 정도를 인트로에 사용했습니다. 설교 본문의 body를 만드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무심한 듯 빠르게 지나가는
이 인트로에 공을 많이 들였습니다.
해석의 내용을 위해서 살펴본 자료는, 스터디
바이블 뿐 아니라 제가 가진 출애굽기 주석은 모두 살펴 보았습니다. 합쳐서 대략 서른권 정도 될까요? 너무 버거워서 평소처럼 모든 것을 기록하지도
못했습니다. 줄을 치면서 필요한 것들을 최대한 머리 속에 넣고, 동시에
틀을 짜면서 주석들을 읽었습니다.
여러 주석들을 한꺼번에 보면 비교가 저절로 됩니다. 평소에는 정말 탁월하다고 생각했던 John Currid의 출애굽기
주석은 너무나 평범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거의 처음으로 제대로 읽어본 Peter Enns의 주석은 탁월했지만, 본문 해석에 있어서 조금은
조심스럽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히려 큰 도움이 되었던 주석은 Exaling
Jesus in Exodus와 Kregel Exegetical Library 출애굽기 주석이었습니다. 물론 주석의 시리즈마다 어느 정도 특징이 있지만, 결국 그 주석을
쓰는 것은 저자이고, 저자가 탁월하면 그 주석이 탁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Spurgeon said, “Why, it is the greatest petition that man
ever asked of God” (“View”). Moses wanted to see the radiance and splendor of
God. Think about it! He had already seen glory. He saw it at the burning bush,
with the 70 elders, on the mountain top, in the tent of meeting, and through
all the miracles. Yet Moses longed to see more. Had he not seen enough? No. He
had a taste of glory, and it made him long for more.
It is no exaggeration to say that Exodus 34:6 is one of
the most important verses in the Bible. It is repeated numerous times in
Scripture (Pss 86:15; 103:8; 145:8; Joel 2:13; Jonah 4:2). When someone wanted
to know what God was like, they could quote this verse. After saying His sacred
name “Yahweh,” which God revealed to Moses at the burning bush—denoting His
self-sufficiency and self-existence—He explained the meaning of that name more
fully by highlighting several attributes of Himself. This could be a sermon in
itself, but just consider them briefly for now.
רַב־חֶסֶדוֶאֱמֶת
(“rich in grace and faithfulness”): On חֶסֶד (“grace”), see
below. The word אֱמֶת
(“faithfulness”) implies that something is dependable, solid, has integrity,
and stands in contrast to something that fails when needed most (the “bruised
reed”). In this context, it means that when one needs mercy, one can rely upon
YHWH.
וְחַטָּאָה (“forgiving
iniquity and transgression and sin”): The verb נשׂא when used with
“sin” as its object means to carry away the sin; that is, the word essentially
means “forgive.” It is used here with three different terms as its object:
“iniquity and transgression and sin.” The point is that YHWH forgives all
manner of immorality, disobedience, indiscretion, rebellion, or more
generically, sin. There are no degrees or types of sin that are beyond YHWH’s
power or willingness to forgive. YHWH forgives sin of every kind and shape.
사실 이 본문은 너무 중요해서, 위의
설명에서 보시는 것처럼 구약의 여러 군데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주제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넓게 펼쳐지는 맥락에서 주석가들이 그렇게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물론 주석이라는 틀의 한계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초점을 더 맞춰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을 다룬 아티클까지 더 찾아봤어야 했는데 그것이 아쉽습니다.
특히 어느 주석에서 존파이퍼 목사님도 이 본문에 대한 아티클을 쓰셨다고 보았는데
언젠가 확인해 보아야겠습니다. 저는 구약 전공이 아니지만, 이
본문으로부터 풀어나간다면 구약학의 학위 논문도 충분히 나오리라 생각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의 오해는, 마치 주석만
열심히 읽으면 설교가 저절로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주석은 주석일 뿐입니다. 그것은 내용을 만드는 일차적인 재료에 불과합니다. 주석의 내용들을 사용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설교에 사용되는
구조와 흐름과 언어적인 표현들 그리고 전달 등은 결국 설교자가 만들고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가 정말 어렵습니다.
원래 준비한 원고는 45분 정도였습니다. 토요일 오전까지 준비한 내용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성도님들이 45분의 설교를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았고, 저도
세번의 설교를 그렇게 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하루 동안, 33분 정도로 압축하고 압축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심지어, 단어의 반복이나 조사의 사용까지 하나하나 점검하면서 군더더기를 제거했습니다.
먼저 구조적으로 보면, 이 설교는
대략 이런 흐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큰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마치 원 포인트처럼 논리적인 흐름을 가집니다. 1. 이스라엘의
배신 => 책 인용 (배신이란 것의 비참함에 대한 공감) => 상처 받은 하나님 => 모세의 간구 => 여호와의 이름의 더블의 선포의 의미 =>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냄 => 모세와 그리스도 => 그리스도의
은혜
2. 책 인용 (은혜의 남용에 대한 경고
도입) => 참된 성도에 대한 이해 3. 십계명을 다시
주심 => 성도의 의무 => 아버지의 완전하심에
대한 설명과 깨우침 => 책 인용 (성도의 삶의 전념의
필요성) => 도전 4. 결론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논리적으로
너무 아름답다라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습니다. 그 짧은 시간동안 펼쳐지는 논리 구조는 황홀함 그 자체여서, 정말 빠져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금은 성도님들께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저의 설교 안에서도 아름답고 질서정연한 논리 구조를 제시하기 위해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다시 설교의 구조를 돌이켜보면, 그렇게
어려운 내용은 아닙니다. 그러나 굉장히 빠른 전개 속에서 흐름을 따라가야 하는 부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설교자인 제 자신에게 더 부담을 지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설교 중에 버벅이거나 주저하거나 흔들리면, 당연히 성도님들도 설교의 흐름을 놓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설교 원고를 준비하면서, 어느 정도 원고가 완성된
다음부터는 실제로 설교 하는 것처럼 부단히 발음과 어조와 액션 등을 연습했습니다.
설교를 준비한 사람으로서 설교의 흐름 중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하나님의 영광이 그리스도로 나타나셨다라는 부분, 그리고 모세와 그리스도의
만남을 연결한 부분입니다. 그리스도를 이해하고 설교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감격이었습니다. 그래서 설교 초중반부터 그리스도를 등장시키고 설명하는데 집중했습니다.
예전에는 그리스도의 중요성과 그분에 대한 묵상과 설명을 어느 정도까지 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많았는데,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그 부분을 완전히 해결했습니다. 정말 충분하게, 교리적인 내용을 감동적으로 설명하시는 것을 들으면서
나도 저 정도까지는 풀어서 설명해야겠다는 가이드를 얻었습니다.
설교 안에서 책을 세번 인용했습니다. 평소
때에는 많으면 두번까지 인용하는데 세 번은 처음입니다. 그래도, 흐름상
적절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 인트로에서 인용한 책은 일반 심리학 책인데 이번에 처음 발견했고 내용을
다 읽지는 못했습니다. 번역서는 이미 절판 되어서 아마존 영문판에 공개된 것 정도를 다 읽어 보았습니다. 책 내용이 참 좋아서 나중에라도 꼭 다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사실상 성경에 있어서 죄와 함께 등장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가 배신이기 때문입니다.
나머지 두 권은 평소에 좋아하던 책입니다. 저에게
정말 큰 영향을 준 책들입니다. 저는 설교에 꼭 책을 인용해야 한다는 그런 압박감은 없지만, 설교를 준비하면서 평소에 읽었던 책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적절하게 인용할 수 있었습니다.
전달이라는 측면에서는, 철저하게 팀켈러
목사님의 스타일을 최대한 사용해 보았습니다. 저는 원래 말이 빠른 편인데 지금까지는 상당히 자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팀켈러 목사님은 쉴 부분은 충분히 쉬지만, 그러나
어떤 부분에서는 마치 속사포와 같은 연속된 논리들은 주저하지 않고 빠르게 말하더군요. 영어라서 그런지
더 멋집니다. 그래서 저도 그분처럼 특정 부분에서는 속도를 매우 빠르게 진행했습니다. 다만 충분한 완급 조절을 위해서 때론 느리게 때론 빠르게 변칙적으로 언어를 구사했습니다.
전달이라는 측면에서 이번에 가장 신경 쓴 것은,
“인용 성경 구절을 읽을 때의 톤” 입니다. 가급적 저는 설교 안에서 성경 인용을 적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왜냐하면 성도님들이 너무 많은 정보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인용 구절이 많아진다면 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톤을
완전히 바꾸어서 성도님들이 완전히 새롭게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설교에서 처음으로, 굉장히
작은 목소리로 또 낮은 톤으로 성경을 읽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톤이 너무 연기 같거나 혹은 과장
되었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저는 제가 정말 느끼는 그대로, 그리고 성도님들이 더 집중할 수 있도록 그런 차원에서 새롭게 시도해 보았습니다.
제가 이렇게 시도한 것은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여러 번 이런 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구절을 그렇게 읽지는 않지만, 종종
그렇게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약간 무심한 듯이, 그러나
정말 낮은 톤으로, 그리고 빠르게 인용 성경 구절을 읽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것이 너무 좋았고 새로웠고 이번에 저의 설교에 처음으로 시도하면서 저도 좋았습니다.
3주 정도 전부터 본문을 정하고 천천히 묵상하면서 준비했습니다. 과연 매주 이렇게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못할 것 같습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평범한 저의 지나친 도전입니다. 들어간 생각들과
고민들을 다 정리하자면 끝이 없을 것 같습니다. 설교에 대한 갈망이 있는 누군가와 한 문장 한 문장 짚어가면서 이야기 나눌 수 있다면, 아마 밤을 샐 듯 합니다. 그래서 아주 핵심적인 저의 고민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설교 원고를 다 마무리하고 방에서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기도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곡의 가사처럼, More of you, Less of me 이것이 언제나 저의 기도이며 목표입니다. 저 같은 사람이 말씀을 전한다는 것이 너무 벅차서, 넘치게 하나님께 감사로 올려드렸습니다.
실제 설교 중간에 저도 모르게 세번 정도, 약간 잘난 척을 하고
싶은 혹은 정신을 집중하지 못하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삼십분이 넘는 시간 동안, 준비한 설교를 멈추지 않고 한다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순간 순간 주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했습니다. 계속 기도하면서 설교를 끝까지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쉽지 않은 설교였습니다. 그런데 일흔이
넘으신 권사님이 은혜 받으셨다고 활짝 웃으시면서 인사하셨습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기뻤습니다. 어린 제가 감히 어르신께 어떤 부분이 은혜로우셨냐고 물어볼 수는 없었지만, 은혜
받으셨다는 것 자체가 참 좋았습니다. 손을 잡아주시는데 손이 따뜻했습니다.
아직 신앙이 어린 젊은 집사님 한 분이 너무 좋았다고, 어렵지 않았다고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습니다. 단순히
제가 어느 정도로 설교를 했느냐를 떠나서,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합신을 졸업한지가 이렇게 오래되었는데, 설교학
교수님들의 말씀이 여전히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성도는 주일에 설교 한번 들으러 교회 오는 거라고, 그러니까 정말 정성들여서 잘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일
설교가 강단에서 약해지는 것을 염려하시며 눈물로 학생들에게 호소하셨습니다. 그 절절하고 아린 마음이, 여전히 저에게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좋아지기 위해서, 글도
쓰고 고민도 하고 정리도 합니다. 어려운 고비를 지나고 나니, 힘들게
하던 몸살도 좋아진 것 같은 착각이 듭니다. 며칠동안 계속 먹었던 약기운에 어지러웠는데 이제서야 조금은 머리가
개운합니다. 저의 작은 도전들과 발걸음들을 하나님께서 선하게 사용하시기를 언제나처럼 기도합니다.
한 성도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설교에 대한 이런 저런 아쉬움들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저에게도 말씀하시더군요.
“목사님, 목사님은 강해설교 안하면 안됩니까?” 무슨
이야기인가 하는 마음에 제 눈이 저도 모르게 동그라졌습니다. 아마도 설교중에 목회자가 한절 한절 설명하는데
치중하는 것을 의미하시는 듯 했습니다.
한마디 더 덧붙이시더군요. “예전에는 목사님들이 앞에서 설교하시면, 왜 목사님이 내 이야기를
하지? 라고 마음이 찔리면서 집에 갔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그렇게가 잘 안되는 것 같아요. 정말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보다는 그냥 설명만 하는 것 같아서 아쉽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데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저에 대한 혹은 설교자들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하셨지만 그래도 저는 이해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저 역시 설교자로서 또 성도로서 그런 아쉬움을 경험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집사님, 집사님께서 하신 부분은 설교의 가장 수준 높은 차원입니다. 제가
부족하지만 그렇게 되도록 많이 힘을 쓰겠습니다.” 저의 솔직한 마음이었습니다.
요즘에 팀켈러 목사님 설교를 듣는
것이 큰 유익이 있습니다. 논리적인 흐름을 배우는 것도, 그리고
어느 정도 확신을 표현하는 것이 좋은지도 배우고 있습니다. 마치 탁월한 교수님이 저의 설교의 바운더리를
그려주는 것 같은 그런 기분입니다. 참 행복합니다.
팀켈러 목사님 설교를 들으면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설교의 내용이 자유롭다 라는 것입니다. 조금
더 좋은 표현이 있을 것도 같은데, 현재로서는 자유롭다 라는 표현이 저의 한계입니다. 이것이 좋았던 이유는, 저 같은 경우는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내용을 마음으로 먼저 그릴 때에는 굉장히 자유로운데, 막상 원고로 그것을 옮길 때에 그 자유로움을 많이
절제하는 느낌을 스스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정말 마음에 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까지는 설교로 하지 못하고 뭔가 가로막는 듯한 느낌을 스스로 가졌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 아마도 조심스러움
때문인 듯 합니다. 제 마음 깊은 곳에서는 정말 설교의 내용으로 확신있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분명하게
있지만 있지만, 뭔가 성도님들을 대할 때에 제 마음에 조심스러움이 있는 듯 합니다. 여전히 이 부분은 고민중이고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기도해 봐야 할 부분입니다. 어쩌면 이 부분이 제 설교가 더 발전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실마리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부분에서 이번 설교는 의미가
컸습니다. 이번 설교는, 제가 처음에 묵상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발견했던 중요한 부분과 테마들 그리고 목회적으로도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들을 충실하게 담아 냈습니다. 설교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그 부분이 제일 스스로 마음에 들었습니다. 단순히 누군가를 향해서 타겟을 삼는
설교가 아니라, 제 자신이 말씀 앞에 서고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라는 것을 확신 있게 나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이번 설교는 스토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앞 부분은 압축적으로 배경을 제시했습니다. 사실 아브넬이라는 인물을 완벽한 의인으로 이해하기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GT 스터디 바이블의
내용에 따라서 평화를 위하여 온 사자로 좀 더 정형화해서 설교 가운데 묘사하였습니다.
3:22–27 On
three separate occasions the narrator highlights that David sends Abner away
“in peace” (vv. 21, 22, 23). David carries no hostility toward Abner and
desires a peaceful settlement between his house and Saul’s. Again, David shows
commitment to achieving kingship without insurrection. Joab, however, does not
share David’s commitment and is hoping for vengeance for the death of his brother
Asahel. Joab has Abner brought back and then stabs him in the stomach, just as
Abner stabbed Asahel in the stomach (2:23). The author highlights that David is
innocent with regard to Abner’s death.
3:28–39
David rebukes Joab seriously but ineffectively. This is not the last time Joab
will cause problems for David. His actions were extraordinarily unwise and
harmful to David’s cause. Abner had offered David the kingship on peaceful
terms, but Joab ruined that opportunity. David once again shows his loyalty to
Saul’s house by leading his people to mourn for Abner. David proves his
innocence with regard to Abner’s death before all Israel.
Samuel C. Emadi, “2 Samuel,” in The NIV Grace and Truth Study Bible, ed. R. Albert Mohler Jr.
(Grand Rapids, MI: Zondervan, 2021), 385.
저는 어떤 말씀을 인용할 때에, 거의 반드시 그 말씀에 대한 간단한 의미를 덧붙입니다. 그저 인용만하고
그 핵심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사실상 인용의 효과가 떨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빌립보서
2장 말씀을 인용하면서, “종의 형체”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짧게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넷
바이블의 각주를 인용한 것입니다. 진정한 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묵상이 좋았습니다.
Tn
Traditionally, “servants” or “bondservants.” Though δοῦλος (doulos) is normally translated
“servant,” the word does not bear the connotation of a free individual serving
another. BDAG notes that “ ‘servant’ for ‘slave’ is largely confined to
Biblical transl. and early American times … in normal usage at the present time
the two words are carefully distinguished” (BDAG 260 s.v.). The most accurate
translation is “bondservant” (sometimes found in the ASV for δοῦλος), in that
it often indicates one who sells himself into slavery to another. But as this
is archaic, few today understand its force.
Biblical
Studies Press, The NET Bible,
Second Edition. (Denmark: Thomas Nelson, 2019).
저는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때에, 복음에 대한 이해와 이어지는 설명들이 억지스럽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단순히 논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설교자의 깊은 마음 안에 남아 있다는 것이 정말 좋았습니다. 이번 설교는 새벽 설교이기 때문에 시간이 짧아서 더 풀어낼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그 진실한 행동 사랑에 대해서 강조했습니다.
설교는 참으로 큰 특권입니다. 하나님께서 목회자에게 주신 큰 영광입니다. 쉽지 않은 한주와 스케쥴이었지만
그래도 최대한 성실하게 준비했고 성도님들과 함께 나눌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한걸음씩
더 배워가면서 발전하는 목회자가 되고 싶은 마음입니다.
*
사무엘하 3장 27-29절 설교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전혀
다른 동기와 이유를 가지고 살아가는 두 남자의 이야기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계속 이어지는 스토리는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하 1장에서 사울과
요나단이 전쟁에서 전사하였습니다. 다윗의 그들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였고 조가를 지어서 불렀습니다. 생전에 사울과 다윗의 관계가 참 쉽지 않았지만 끝까지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 모두를 진심으로 아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무엘하 2장에서는 다윗이 드디어 유다 족속의 왕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사울의 왕가는 매우 어려워졌지만 사울의 또 다른 아들이었던 이스보셋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보셋 왕의 옆에서는 사울의 군대 장관이었던 아브넬이 실권자로서 정치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보셋이 사울 왕가의 왕이 된지 2년 쯤 이후에 다윗의 장군인 요압 장군과 이스보셋의 아브넬 장군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그 전쟁에는 요압 장군의 형제들이 함께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그
전쟁 중에 한가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아브넬 장군이 전쟁에 물러나고자 도망을 하는데 요압의 동생 아사헬이
그를 집요하게 추격했습니다. 아브넬은 그를 죽이고 싶지 않아서 계속 만류했지만 아사헬이 계속 고집을
부렸습니다. 결국에는 아브넬의 손에 아사헬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부터 요압은 동생의 복수를 다짐했던 것입니다.
아브넬이라는 사람은 매우 복합적인
사람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 장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전쟁의 형세를 제대로
파악했다는 것입니다. 아브넬이 생각하기로는 이제는 다윗이 대세라는 것을 파악한 것입니다.
아브넬은 사울왕 쪽에 속했던 장로들과 사울의 지파였던 베냐민 지파 지도자들까지 설득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호의적인 태도를 잘 모아서 다윗을 찾아와서 자신과 언약을 맺기를 요청했습니다. 다윗을 향하여서 충성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거기에 필요한 일들을 추진한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찾아온 아브넬과 부하들을 환대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아브넬이 다윗에게 말하기를 이제 자신이 모든 지파를 모아서 다윗의 통치와 리더쉽 안에 들어오게 하겠다 라고 말한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의 마음에 얼마나 큰 기대가 있었을까요? 다윗은 오랫동안 사울을
피해서 도망을 다녔습니다. 그는 수 많은 전쟁을 치뤄야만 했던 사람입니다. 여전히 정치적인 대결 구도 속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토록
꿈꾸던 평화가 그리고 자신이 왕으로서 모든 지파를 다스리는 날이 바로 목전에 있는 것입니다. 그가 그
자리에 오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가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는 언제나 억울하게 당하는 입장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복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늘 생각했던 사람이고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기 위해서 노력했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진정한 평화의 시대를
눈 앞에 두고서도, 도저히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요압 장군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는 다윗의 가장 중요한 장군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다윗의 측근으로서 있었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의 비참함과 온 나라의 어려움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아주 놀라운 것은, 요압은 다윗에게 말할 때에 마치 자신의 마음이 다윗을 너무나 위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한다는 것처럼 포장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25절에 보면 순수하게 평화를 위해서 찾아 온 아브넬을 마치 첩자의 목적으로 왕을
감시하기 위해서 온 것처럼 몰아세웠습니다. 그리고 아브넬이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을 덥쳐서 다시
헤브론으로 그를 끌고 돌아왔습니다.
요압은 사람을 속이는 것에 매우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27절에 말씀하십니다. “요압이 더불어 조용히 말하려는 듯이 그를
데리고 성문 안으로 들어가 거기서 배를 찔러 죽이니 이는 자기의 동생 아사헬의 피로 말미암음이더라” 라고
말씀하십니ㅏ.
결국 요압이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그는 평화를 위해 찾아온 사람을 죽였어 무슨 의미인가? 지금 요압이라는
사람의 마음 가운데 복수로 가득차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지금 어떤 자리에 있는지, 그가 지금 무슨 역할을 해야 하는지,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요압은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것은 오로지 "복수" 하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거짓 간계를 통해서 그 복수를 결국 이룬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일을 과연 다윗은 알았는가? 다윗은 이 일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는 어떻게든 평화를 위해서 노력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평생을 자신을 힘들게한 사울 조차도 품었던 다윗이었는데 그러한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될 위기에 놓인 상황입니다. 그때 다윗이 어떻게 반응하는가? 28절에
이렇게 다윗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넬의 아들 아브넬의 피에 대하여 나와 내 나라는 여호와 앞에 영원히
무죄하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번 요압과 다윗을 비교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요압을 계속적으로 움직이고 그에게 힘을 불어 넣었던 것은 그가 가지고 있던 말도 안되는
복수심입니다. 그의 동생이 죽은 것은 순전히 동생의 책임입니다. 거기다가
전쟁 중에 죽은 것이기 때문에 그 상황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마음을 복수심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요압이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의 마음에 가득차고 그를 움직인
것이 "복수"라면, 과연 다윗의 마음에는 무엇이 가득차 있는가? 그의 말 속에 답이
들어 있어 "여호와 앞에 영원히 무죄하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가장 중요한 분이 누구셨는가? 여호와 였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가 처한 모든 현실 속에서 여호와를
의식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살아계시다라는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있던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결코 이 잔인한 범죄에 가담한 적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리고 29절 말씀에 보니 모든 죄의 결과는 반드시 요압에게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지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다윗은 여전히 자신의 진실함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행동으로 그것을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다윗이 지금 무엇인가 행동하는데 있어서 편안한 환경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31절에 말씀하시기를 “다윗이 요압과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의 마음이 얼마나 괴롭겠는가? 다윗이 얼마나 배신감을 느꼈겠는가? 다윗은 자신의 모든 평화에 대한 노력을 망치고 자신을 눈 앞에서 망하게 한 요압을 지금 눈 앞에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압이 너무나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어서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현재 상황에 낙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성경은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다윗의 행동 다윗이 슬퍼하면서
했던 행동들이 어떻게 나오고 있는가? 31절에 말씀하시기를 다윗 왕이 상여를 따라갔다 그리고 32절에 보니 왕이 소리를 높여 울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의미인가? 다윗은 자신의 처한 상황에서 자신의 마음을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한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왕이라는 체면에 얽매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슬픔을 표현하는데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오히려 아브넬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보여주는 진실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35절에
보니 다윗은 심지어 그날 하루를 하나님 앞에서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그렇게 결심까지 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진실한 그의 행동을 보고 나서야 36절에 보니 “온 백성이 보고 기뻐하며 왕이 무슨 일을 하든지 무리가 다 기뻐하였다” 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37절에 보니 “이 날에야 온 백성과 온 이스라엘이 넬의 아들 아브넬을 죽인 것이 왕이 한 것이 아닌 줄을 아니라” 라고 말씀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다윗이 자신의
진실한 행동으로 보여주기 전에는, 백성들은 다윗에 대해서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가 아브넬을 죽인 것 같다는 소문이
돌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가 사울을 여전히 미워하고 전쟁을 좋아한다라는 온갖 소문이 돌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가십 거리를 만들어내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윗에게 의심을 품고 그를 뒤에서 비난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다윗이 무엇을 하였는가? 그는 자신의 결백을
밝히면서 자신의 상황에서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진실한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가 보여준 모습은
꾸며낸 모습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진심으로 아브넬의 억울한 죽음을 고통스러워했고 그의 아픔에
대해서 깊은 슬픔을 가지고 울었습니다. 마치 사울과 요나단을 위해서 그러했던 것 처럼 아브넬을 위해서도
조가를 지었던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말씀은 아주 선명한
대조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압이라는 악한 장군은 끝까지 자신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자신의 의도를
숨긴 사람입니다. 마치 왕을 위하는 것 처럼 자신을 포장하는 거짓으로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오직 거짓된 복수를 위하여 움직인 것입니다.
반면에
다윗은 어떠한가? 그는 자신의 마음 속에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누구에게 호소하기 이전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의도를 숨기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 앞에 진실하며 또 아브넬을 아꼈다는 것을 자신의 진실한 행동들을 통해서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오늘 말씀을 보면서 "과연 나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는가?" 에 대해서
매우 진중하게 살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어떤 의미에서 참으로 간교하다 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얼마든지 우리의 내면에 있는 진짜 동기를 감추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마치 신앙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 처럼, 혹은 겉으로는 그
사람을 위하는 것 처럼 이야기하지만, 얼마든지 속으로는 다른 생각과 다른 동기를 가지고 상대방을 속이는
대화를 끌어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요압은 매우 철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왕인 다윗조차 대범하게 속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평화를
위하여 찾아온 아브넬조차 속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무엇인가? 성경은 그의 동기를 가장 정확하게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심중에 무엇이 있는지를 정확하게 아셨습니다. 27절 하반절에 “이는
자기의 동생 아사헬의 피로 말미암음이더라” 그리고 반복이 되고 있어
30절에 “요압과 그의 동생 아비새가 아브넬을 죽인 것은 그가 기브온 전쟁에서 자기 동생
아사헬을 죽인 까닭이었더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요압을 움직이는
것은 철저한 이기심이었고 분노와 복수심이었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야 말로, 한 사람의 그 중심이 아니라 결과에 대해서 집착하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통해서 어떤 결과를 이끌어내야만 그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라고 평가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무엇인가? 사실상 다윗은 아주 오랫동안 아무런
결과 없이 방황하는 것 처럼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광야에서 도망치는 사람이었어 그리고 그는 여전히
지금 이 시점에서도 유다 지파의 왕일 뿐인 것입니다.
심지어 그는 그토록 바라던 평화의
조약을 바로 눈 앞에서 완전히 놓쳐버린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보자면 참으로 지지리도 복도
없고 고생만 하고 아무런 소득도 없는 불쌍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무엇을 주목하시는가?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당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마음과 그
동기를 모두 아시는 하나님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비록 정치적으로는 세력이 약해서 자신의
장군 조차 어떻게 하지 못하는 형국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앞에서 무죄하다라고 선포함으로써
그 누구도 감히 범접하거나 다다를 수 없는 가장 완전한 평화와 안정감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시편 139편에 다윗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139:1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139:2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라고 고백합니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마음의 가장 깊은 곳까지 다 아시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편의 24절 마지막절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윗은 그의 마음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진실함을 고백하면서, 어떻게든 자신의 길을 하나님의 길로 인도해 달라고 그분의 영원한 길로 이끌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기는, 우리 역시
우리 자신을 살펴보며 돌이키기를 원합니다. 우리 안에 감추어진 이기심과 복수심과 악한 마음들을 하나님께
내어 놓고 진심으로 회개하며, 오직 여호와의 길을 추구하는 사람이 되기를 간구하며, 그 길을 걸어가시는 사랑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또 하나 저는 오늘 말씀을 보면서 "진정한 리더쉽은 어떻게 세워지는가" 에 대해서
깊이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이
꼭 아브넬의 상여를 따라가야만 했을까? 혹은 꼭 다윗이 그렇게까지 소리 높여서 울어야했을까? 혹은 꼭 다윗이 그렇게까지 금식까지 하면서 자신을 절제해야 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성경은, 그러한 다윗의 모든 행동을 일일이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진실한 마음으로 리더로서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 진실한
행동의 결과입니다 그저 겉치레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정말 자신의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아브넬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것을 애통해 할 때에 그때서야
백성들의 오해가 풀렸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서야 모든 백성이 왕을 좋게 여겼다는 것은 그의 진실한
모든 행동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어떤 규모이든 어떤 공동체이든 그것이 가정이든 직장이든 혹은 교회 공동체이든 리더의 모습은 그 사람의 행동이
진실하여야 하는 것이고 반드시 그 진실함이 동반되어야만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8절까지
이렇게 말씀하힙니다.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제가 생각할 때에 사람들의 가장
큰 오해는, 마치 기독교를 지적인 종교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저 논리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만히 앉아 계시고 그분이 그저 말씀으로만 내가 너희를 용서한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 내가 너희를 돌본다 이렇게 하신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행동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진실하게 행동하시는 분이십니다. 성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동등 되시지만 도저히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이 낮아지셔서 직접 인간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자신이 누리시던 모든 영광과 기쁨을 다
포기하시고 우리와 동일한 인간이 되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것에 대하여서 말씀하시기를,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종이라는 것은 내가 그냥 자유롭게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된다 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상대방에게 종으로 판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낮아진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철저하게 상대방을 섬기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저 논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역사 가운데 사랑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기꺼이 종이 되셨고 그럴
필요가 없으셨지만 기꺼이 자신을 낮추심으로써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내시는 진정한 구원자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부분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높은 사람이 높은 자리에 있을 때에 아무런 감동도 느끼지 않습니다. 높은 사람이 그 모든 권세를 포기할 때에 큰 감동을 느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진심으로 자신을
낮추는지 혹은 그저 위선적으로 행동하는지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진실하시며 그분의
모든 사랑은 거짓된 것이 아니라 진실한 것이며 진정으로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삶과 공동체를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양한
자리에서 리더의 역할을 맡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진실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신 것처럼 기꺼이 나를 낮추고 참된 리더쉽을 가지고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을
섬기고 있는가에 대해서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우리의 삶이 어디에서든 진실하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기뻐하시는 리더쉽으로 섬김의 모습으로 진실한 공동체를 이뤄가시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기도하겠습니다. 첫째로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 하나님 저의 내면에 있는 악한 것들을
버리기 원합니다, 중심을 보시는 여호와 앞에 부끄러운 것들을 모두 남김없이 버리게 하시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과 주님을 가까이하고 주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거룩한 열망을 부어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둘째로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진실한 마음과 진실한 행동을 저에게 주시옵소서, 거짓과 가식이 아닌 진실한 모습을 주시고, 주님께서 그렇게 섬기신
것처럼 다른 이들을 진실하게 섬기며 공동체를 세워나가는 리더로서 교회와 세상을 섬기는 제가 되도록 주님께서 오늘도 저를 붙들고 인도하여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저의 청년시절을 돌이켜 보면, 수련회에서 항상 은혜의 정점을 맛보고, 그리고 다시 침체되는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분들과 이야기를 나눠봐도 마찬가지인 듯 합니다. 우리는 보통, 은혜의 정점을 맛보고 그것이 사라지는 것을 다시 경험합니다.
그런데 저의 삶 가운데 언제부터인가, 꾸준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유는 정확하게 모르겠습니다. 아마 몇년 동안 집중적으로 NIV 드라마 성경을 듣고 다닌 것이 전환점이 된 듯 합니다. 그때 부터 제가 깨달은 중요한 한가지는, 은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부어주심이지만,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정말 치열한 은혜를 향한 갈망과 추구가 매일마다 새롭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그런 생각을 종종 합니다. 은혜를 많이 받는 것이 정말 좋은 것일까? 넓은 바다 앞에서 발만 담그고 살았는데, 이제는 다리까지 이제는 허리까지 은혜의 바다 속에 들어간 듯 합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에 은혜를 크게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만큼 마음에 고통도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육체적인 고통 이상의 심적인 아픔입니다. 삶에 대한 불만족, 그리고 세상에 대한 불만족, 하나님의 부어주시는 그 사랑에 비할 때에 저는 여전히 부족하다는 마음과, 어떻게든 그 간격을 좁혀 보고자 하는 열심이 가득차 있습니다. 마치 능력이 부족한데 한계를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혹은 온 마음을 다해서 부단히 애를 쓰는 그런 형국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요즘, 은혜 받은 제가 완전히 빠져 있는 것은, "언어 자체의 신비"입니다. 자음과 모음이 모아져 글자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러한 글자가 모아져서 결국 문장이 되고 그 문장이 함께 하여 논리 구조를 만들어집니다. 글자를 살아 있는 것입니다. 저의 마음 속에 있는 그 어떤 생각과 느낌과, 정확하게 말하면 "저라는 존재 자체"가 글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기록되고 동시에 살아나게 됩니다. 이것보다 더 놀라운 일이 어디에 있을까요?
그리고 더 나아가서 제 마음을 완전히 빼앗아 버린 것은, "설교의 문단과 문단 사이에 존재하는 논리적인 흐름의 신비" 입니다. 완전히 여기에 빠져있습니다. "신비"라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과연 논리란 무엇일까? 왜 설득적으로 들릴까? 왜 감동적으로 들릴까? 왜 이렇게 흐름이 부드러울까? 왜 여기서는 그렇게 논리를 전개하는 것일까? 누군가의 설교를 들을 때 마다, 수 많은 궁금증들 속에서 신비를 누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목회자의 설교의 그 흐름과 연결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로 다 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그 위대하심을, 살짝 엿보는 기분입니다.
저는 원래 원래 출퇴근 시간에는 Core Christianity를 항상 들었는데, 탁월한 프로그램입니다. 개혁주의 관점에서 성도님들의 수 많은 신앙에 관한 질문들에 대해서 답을 해주고 상담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의 ask pastor John 보다 더 대중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거의 3년을 듣고 다녔더니 그것의 한계가 어느 정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래도 한정된 시간에 여러가지 질문을 받다 보니, 깊이 있는 답변을 듣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반복되는 질문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답변이 이제 어느 정도 방향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좀 더 다른 방법으로 저의 출퇴근 시간을 사용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저는 토니 에반스 목사님도 굉장히 좋아합니다. 깔끔하고 탁월한 논리력, 그리고 성도님들의 언어로 풀어내는 성경의 말씀이라는 면에서는 존경할 만한 분입니다. 그래서 스터디 바이블도 계속 사용하고 있습니다. 한동안 이분 설교를 먼저 들었습니다. 좋았지만 또 한계가 보였습니다. 매우 보수적인 목사님이시지만 아무래도 개혁주의라고 부르기는 어렵기 때문에, 설교 가운데 핵심적인 논리를 펼쳐 나가는데 있어서 어떤 한계점이 보였습니다. 그때 팀켈러 목사님이 떠올랐습니다. 바로 찾아 보았습니다.
원래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는 구입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혹시나 해서 팟 케스트를 찾아보니 거의 100편의 설교가 무료로 공개되어 있었습니다. 가장 옛날 것부터 들어보니 거의 10년전 설교입니다. 그래도 저는 이보다 좋을 순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는 Core Christianity 를 구글 팟 케스트로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구글 팟 케스트 앱은, 특정 에피소드를 다운로드 받은 이후에 90일이 지나면 자동으로 삭제가 되더군요. 데이터 사용에 상관 없이 팀켈러 목사님 설교 100편 정도를 모두 셀폰에 넣고 가지고 다니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앱을 찾아 보았습니다. 광고가 붙지 않고 깔끔하게 화면을 볼 수 있는 팟케스트 앱을 찾았습니다. 기능면에서도 구글 팟 케스트 앱에 비교했을 때에 뒤쳐지지 않습니다.
안테나팟은 안드로이드 앱에서 검색하면 바로 나옵니다. 설치를 하면 아래의 화면처럼 셀폰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단의 검색창에다가 Tim Keller라고 검색하면 그 아래의 그림처럼 GOSPEL IN LIFE 에서 제공하는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다섯편 정도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원래도 워낙 설교를 잘하신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유명하실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완전히 다르다고 느꼈습니다. 제가 영어가 조금은 더 늘어서 그런 것일까요? 아니면 좀 더 신앙적인 면에서 깊이를 가져서 그런 것일까요? 과거와는 또 비교할 수 없을만큼, 들으면서 너무 행복하고 좋았습니다.
잘하는 설교는 어떤 설교일까요? 저는 요즘에 그런 생각을 합니다. "성도를 사랑하는 설교자가 하는 설교가 좋은 설교이다" 멋있는 설교는 별로 어렵지 않은 듯 합니다. 그런데 잘하는 설교는 정말 어렵습니다. 이상하게 제 마음에 자꾸 그런 느낌이 듭니다. 어떤 분이 설교를 하는 것을 들으면, "아, 저분은 정말 성도를 사랑하시는구나" 그런 마음이 듭니다. 그래서 심지어 책망하는 설교라 할지라도 그것이 달콤하게 들립니다. 사랑은 보이지 않지만 느낄 수 있습니다.
팀켈러 목사님 설교를 듣는데, 조금 과장하자면 "숨소리"도 은혜롭게 들렸습니다. 제 스스로 놀랐습니다. 아니 숨소리 조차 따뜻하게 들리다니? 이건 거의 사랑에 빠지는 것 아닌가? 뭐랄까요, 꼭 이 이야기를 성도들에게 해주고 싶을때 나오는 그런 조금은 긴장되지만 기대감에 가득한 의미 있는 숨소리라고 느껴졌습니다.
사실 설교는, 목회자 한명의 모든 것을 쏟아 붇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모든 것"입니다. 그 사람의 신학, 삶, 목회, 인생, 눈물, 기쁨, 고민, 환희 그 모든 것이 그 설교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팀 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것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 설교 안에 그분의 모든 것이 들어 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설교 본문의 단어 하나에 집중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이 문장으로 넓혀지고, 문단으로 넓혀지고, 성경 전체로 넓혀지고, 그것이 우리의 인생까지 넓혀져서 품고 설교한다는 것은, 아마도 극소수의 목회자들만 가능한 경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이제 겨우, 단어에서 문장으로 문단으로, 그리고 성경 전체에서 조금 더 그리고 삶에서 조금 더 넓히는 수준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팀켈러 목사님 설교를 들으면서 참 좋았습니다. 큰 스승이라고 느꼈습니다. 충분히 그리고 충격적으로 집중된 원포인트 설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리 구조에 딱히 구애 받지 않는다고 느꼈습니다. 어떻게 원고를 준비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어떤 받은 영감 자체를 그대로 말하는 것 처럼 느꼈습니다.
설교를 들을 때에, 필요한 주해에서 부터 시작해서, 성도님들에게 꼭 필요한 삶의 전체에 대한 조망까지 자유자재로 다루시는, 혹은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그 집중력이 좋았습니다. 사실, 보통의 목회자들과는 차원 자체가 다르다고 느꼈습니다. 이분은 적어도 나와는 다른 우주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철학자들과 당대의 학자들의 논리의 허점들을 지적하면서, 왜 성경이 진리인가, 왜 하나님만이 참된 분이신가를 논증하는 것이 너무 좋았습니다. 사실 논증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딱딱한 것인데, 그것조차 굉장히 부드럽게 들렸습니다.
책으로 읽어보면, D.A. 카슨의 영어는 너무 어렵습니다. 마이클 호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팀 켈러 목사님의 영어는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내용이나 논지 자체는 복잡하더라도 언어 자체를 쉽게 사용하시는 편입니다. 그래서 더욱 설교가 마음에 와 닿는 듯 합니다.
단지 다섯편을 들었을 뿐인데도, 배우고 얻은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C.S. 루이스가 사용했던 논리들이 설교 안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들이 좋았습니다.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저 역시 다시 루이스의 책을 꺼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조건성과 무조건성에 대한 이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의 성경적인 이해, 다면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에 대한 이해, 논리를 어느 정도로 펼쳐나가야 하는가에 대한 이해, 어느 정도 예화를 논증적으로 써야 하는가에 대한 이해 등을 단지 다섯편의 설교를 통해서 배웠습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 나도 정말 이분처럼 설교를 잘하고 싶다.
자연스럽게 "언감생심"이라는 말이 생각 났습니다. 감히 쳐다도 보지 못할 분이라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가끔씩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표절하는 분들이 있는데 조금은 이해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좋기 때문입니다. 도덕적으로는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분이 너무 좋아서 그랬다면, 저는 조금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입니다. 설교는 결국 문단의 구조들로 연결되는 최종적인 결과물이기 때문에 단순히 한 문장 한 챕터 정도를 가져와서는 그 감동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그런 이유 때문에, 전체 설교 한편을 그대로 표절하는지도 모르겠다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의 신학교 처음 시절은, 마이클 호튼의 논리와 생각들로 제 마음을 채우던 시기입니다. 사실상 호튼의 신학과 논리 구조를 거의 가져다가 설교에 사용했던 시기입니다. 그런데 이제 팀 켈러 목사님의 설교로 제 마음을 채워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얼만큼 배울 수 있을지, 또 얼만큼 그것을 적용할 수 있을지, 과연 그것들이 제 설교에 깊이 있게 영향을 줄 수 있을지 전혀 현재로서는 감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그 방향이 맞다면 전진하는 것만이 제가 좋아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글쎄요, 일단 100편의 설교를 두번 세번 정도 반복해서 듣고 난다면, 뭔가 그때에는 더 길이 보이지 않을까요? 일단 2년 정도 들어보면 더 좋은 방향이 나오지 않을까요? 행복한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또 다른 목표를 저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저, 선물로 주신 오늘 하루 동안에, 저에게 주신 길을 묵묵히 걸어갈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