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디 더 덧붙이시더군요. “예전에는 목사님들이 앞에서 설교하시면, 왜 목사님이 내 이야기를 하지? 라고 마음이 찔리면서 집에 갔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그렇게가 잘 안되는 것 같아요. 정말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보다는 그냥 설명만 하는 것 같아서 아쉽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데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저에 대한 혹은 설교자들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하셨지만 그래도 저는 이해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저 역시 설교자로서 또 성도로서 그런 아쉬움을 경험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집사님, 집사님께서 하신 부분은 설교의 가장 수준 높은 차원입니다. 제가 부족하지만 그렇게 되도록 많이 힘을 쓰겠습니다.” 저의 솔직한 마음이었습니다.
요즘에 팀켈러 목사님 설교를 듣는 것이 큰 유익이 있습니다. 논리적인 흐름을 배우는 것도, 그리고 어느 정도 확신을 표현하는 것이 좋은지도 배우고 있습니다. 마치 탁월한 교수님이 저의 설교의 바운더리를 그려주는 것 같은 그런 기분입니다. 참 행복합니다.
팀켈러 목사님 설교를 들으면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설교의 내용이 자유롭다 라는 것입니다. 조금 더 좋은 표현이 있을 것도 같은데, 현재로서는 자유롭다 라는 표현이 저의 한계입니다. 이것이 좋았던 이유는, 저 같은 경우는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내용을 마음으로 먼저 그릴 때에는 굉장히 자유로운데, 막상 원고로 그것을 옮길 때에 그 자유로움을 많이 절제하는 느낌을 스스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정말 마음에 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까지는 설교로 하지 못하고 뭔가 가로막는 듯한 느낌을 스스로 가졌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 아마도 조심스러움 때문인 듯 합니다. 제 마음 깊은 곳에서는 정말 설교의 내용으로 확신있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분명하게 있지만 있지만, 뭔가 성도님들을 대할 때에 제 마음에 조심스러움이 있는 듯 합니다. 여전히 이 부분은 고민중이고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기도해 봐야 할 부분입니다. 어쩌면 이 부분이 제 설교가 더 발전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실마리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부분에서 이번 설교는 의미가 컸습니다. 이번 설교는, 제가 처음에 묵상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발견했던 중요한 부분과 테마들 그리고 목회적으로도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들을 충실하게 담아 냈습니다. 설교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그 부분이 제일 스스로 마음에 들었습니다. 단순히 누군가를 향해서 타겟을 삼는 설교가 아니라, 제 자신이 말씀 앞에 서고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라는 것을 확신 있게 나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이번 설교는 스토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앞 부분은 압축적으로 배경을 제시했습니다. 사실 아브넬이라는 인물을 완벽한 의인으로 이해하기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GT 스터디 바이블의
내용에 따라서 평화를 위하여 온 사자로 좀 더 정형화해서 설교 가운데 묘사하였습니다.
3:22–27 On
three separate occasions the narrator highlights that David sends Abner away
“in peace” (vv. 21, 22, 23). David carries no hostility toward Abner and
desires a peaceful settlement between his house and Saul’s. Again, David shows
commitment to achieving kingship without insurrection. Joab, however, does not
share David’s commitment and is hoping for vengeance for the death of his brother
Asahel. Joab has Abner brought back and then stabs him in the stomach, just as
Abner stabbed Asahel in the stomach (2:23). The author highlights that David is
innocent with regard to Abner’s death.
3:28–39
David rebukes Joab seriously but ineffectively. This is not the last time Joab
will cause problems for David. His actions were extraordinarily unwise and
harmful to David’s cause. Abner had offered David the kingship on peaceful
terms, but Joab ruined that opportunity. David once again shows his loyalty to
Saul’s house by leading his people to mourn for Abner. David proves his
innocence with regard to Abner’s death before all Israel.
Samuel C. Emadi, “2 Samuel,” in The NIV Grace and Truth Study Bible, ed. R. Albert Mohler Jr. (Grand Rapids, MI: Zondervan, 2021), 385.
저는 어떤 말씀을 인용할 때에, 거의 반드시 그 말씀에 대한 간단한 의미를 덧붙입니다. 그저 인용만하고 그 핵심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사실상 인용의 효과가 떨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빌립보서 2장 말씀을 인용하면서, “종의 형체”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짧게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넷 바이블의 각주를 인용한 것입니다. 진정한 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묵상이 좋았습니다.
Tn Traditionally, “servants” or “bondservants.” Though δοῦλος (doulos) is normally translated “servant,” the word does not bear the connotation of a free individual serving another. BDAG notes that “ ‘servant’ for ‘slave’ is largely confined to Biblical transl. and early American times … in normal usage at the present time the two words are carefully distinguished” (BDAG 260 s.v.). The most accurate translation is “bondservant” (sometimes found in the ASV for δοῦλος), in that it often indicates one who sells himself into slavery to another. But as this is archaic, few today understand its force.
Biblical Studies Press, The NET Bible, Second Edition. (Denmark: Thomas Nelson, 2019).
저는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때에, 복음에 대한 이해와 이어지는 설명들이 억지스럽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단순히 논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설교자의 깊은 마음 안에 남아 있다는 것이 정말 좋았습니다. 이번 설교는 새벽 설교이기 때문에 시간이 짧아서 더 풀어낼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그 진실한 행동 사랑에 대해서 강조했습니다.
설교는 참으로 큰 특권입니다. 하나님께서 목회자에게 주신 큰 영광입니다. 쉽지 않은 한주와 스케쥴이었지만 그래도 최대한 성실하게 준비했고 성도님들과 함께 나눌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한걸음씩 더 배워가면서 발전하는 목회자가 되고 싶은 마음입니다.
* 사무엘하 3장 27-29절 설교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전혀 다른 동기와 이유를 가지고 살아가는 두 남자의 이야기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계속 이어지는 스토리는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하 1장에서 사울과 요나단이 전쟁에서 전사하였습니다. 다윗의 그들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였고 조가를 지어서 불렀습니다. 생전에 사울과 다윗의 관계가 참 쉽지 않았지만 끝까지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 모두를 진심으로 아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무엘하 2장에서는 다윗이 드디어 유다 족속의 왕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사울의 왕가는 매우 어려워졌지만 사울의 또 다른 아들이었던 이스보셋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보셋 왕의 옆에서는 사울의 군대 장관이었던 아브넬이 실권자로서 정치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보셋이 사울 왕가의 왕이 된지 2년 쯤 이후에 다윗의 장군인 요압 장군과 이스보셋의 아브넬 장군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그 전쟁에는 요압 장군의 형제들이 함께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그 전쟁 중에 한가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아브넬 장군이 전쟁에 물러나고자 도망을 하는데 요압의 동생 아사헬이 그를 집요하게 추격했습니다. 아브넬은 그를 죽이고 싶지 않아서 계속 만류했지만 아사헬이 계속 고집을 부렸습니다. 결국에는 아브넬의 손에 아사헬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부터 요압은 동생의 복수를 다짐했던 것입니다.
아브넬이라는 사람은 매우 복합적인 사람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 장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전쟁의 형세를 제대로 파악했다는 것입니다. 아브넬이 생각하기로는 이제는 다윗이 대세라는 것을 파악한 것입니다.
아브넬은 사울왕 쪽에 속했던 장로들과 사울의 지파였던 베냐민 지파 지도자들까지 설득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호의적인 태도를 잘 모아서 다윗을 찾아와서 자신과 언약을 맺기를 요청했습니다. 다윗을 향하여서 충성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거기에 필요한 일들을 추진한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찾아온 아브넬과 부하들을 환대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아브넬이 다윗에게 말하기를 이제 자신이 모든 지파를 모아서 다윗의 통치와 리더쉽 안에 들어오게 하겠다 라고 말한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의 마음에 얼마나 큰 기대가 있었을까요? 다윗은 오랫동안 사울을 피해서 도망을 다녔습니다. 그는 수 많은 전쟁을 치뤄야만 했던 사람입니다. 여전히 정치적인 대결 구도 속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토록 꿈꾸던 평화가 그리고 자신이 왕으로서 모든 지파를 다스리는 날이 바로 목전에 있는 것입니다. 그가 그 자리에 오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가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는 언제나 억울하게 당하는 입장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복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늘 생각했던 사람이고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기 위해서 노력했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진정한 평화의 시대를 눈 앞에 두고서도, 도저히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요압 장군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는 다윗의 가장 중요한 장군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다윗의 측근으로서 있었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의 비참함과 온 나라의 어려움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아주 놀라운 것은, 요압은 다윗에게 말할 때에 마치 자신의 마음이 다윗을 너무나 위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한다는 것처럼 포장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25절에 보면 순수하게 평화를 위해서 찾아 온 아브넬을 마치 첩자의 목적으로 왕을 감시하기 위해서 온 것처럼 몰아세웠습니다. 그리고 아브넬이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을 덥쳐서 다시 헤브론으로 그를 끌고 돌아왔습니다.
요압은 사람을 속이는 것에 매우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27절에 말씀하십니다. “요압이 더불어 조용히 말하려는 듯이 그를 데리고 성문 안으로 들어가 거기서 배를 찔러 죽이니 이는 자기의 동생 아사헬의 피로 말미암음이더라” 라고 말씀하십니ㅏ.
결국 요압이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그는 평화를 위해 찾아온 사람을 죽였어 무슨 의미인가? 지금 요압이라는 사람의 마음 가운데 복수로 가득차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지금 어떤 자리에 있는지, 그가 지금 무슨 역할을 해야 하는지,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요압은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것은 오로지 "복수" 하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거짓 간계를 통해서 그 복수를 결국 이룬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일을 과연 다윗은 알았는가? 다윗은 이 일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는 어떻게든 평화를 위해서 노력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평생을 자신을 힘들게한 사울 조차도 품었던 다윗이었는데 그러한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될 위기에 놓인 상황입니다. 그때 다윗이 어떻게 반응하는가? 28절에 이렇게 다윗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넬의 아들 아브넬의 피에 대하여 나와 내 나라는 여호와 앞에 영원히 무죄하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번 요압과 다윗을 비교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요압을 계속적으로 움직이고 그에게 힘을 불어 넣었던 것은 그가 가지고 있던 말도 안되는 복수심입니다. 그의 동생이 죽은 것은 순전히 동생의 책임입니다. 거기다가 전쟁 중에 죽은 것이기 때문에 그 상황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마음을 복수심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요압이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의 마음에 가득차고 그를 움직인 것이 "복수"라면, 과연 다윗의 마음에는 무엇이 가득차 있는가? 그의 말 속에 답이 들어 있어 "여호와 앞에 영원히 무죄하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가장 중요한 분이 누구셨는가? 여호와 였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가 처한 모든 현실 속에서 여호와를 의식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살아계시다라는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있던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결코 이 잔인한 범죄에 가담한 적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리고 29절 말씀에 보니 모든 죄의 결과는 반드시 요압에게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지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다윗은 여전히 자신의 진실함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행동으로 그것을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다윗이 지금 무엇인가 행동하는데 있어서 편안한 환경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31절에 말씀하시기를 “다윗이 요압과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의 마음이 얼마나 괴롭겠는가? 다윗이 얼마나 배신감을 느꼈겠는가? 다윗은 자신의 모든 평화에 대한 노력을 망치고 자신을 눈 앞에서 망하게 한 요압을 지금 눈 앞에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압이 너무나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어서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현재 상황에 낙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성경은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다윗의 행동 다윗이 슬퍼하면서 했던 행동들이 어떻게 나오고 있는가? 31절에 말씀하시기를 다윗 왕이 상여를 따라갔다 그리고 32절에 보니 왕이 소리를 높여 울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의미인가? 다윗은 자신의 처한 상황에서 자신의 마음을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한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왕이라는 체면에 얽매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슬픔을 표현하는데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오히려 아브넬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보여주는 진실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35절에 보니 다윗은 심지어 그날 하루를 하나님 앞에서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그렇게 결심까지 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진실한 그의 행동을 보고 나서야 36절에 보니 “온 백성이 보고 기뻐하며 왕이 무슨 일을 하든지 무리가 다 기뻐하였다” 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37절에 보니 “이 날에야 온 백성과 온 이스라엘이 넬의 아들 아브넬을 죽인 것이 왕이 한 것이 아닌 줄을 아니라” 라고 말씀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다윗이 자신의 진실한 행동으로 보여주기 전에는, 백성들은 다윗에 대해서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가 아브넬을 죽인 것 같다는 소문이 돌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가 사울을 여전히 미워하고 전쟁을 좋아한다라는 온갖 소문이 돌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가십 거리를 만들어내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윗에게 의심을 품고 그를 뒤에서 비난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다윗이 무엇을 하였는가? 그는 자신의 결백을 밝히면서 자신의 상황에서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진실한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가 보여준 모습은 꾸며낸 모습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진심으로 아브넬의 억울한 죽음을 고통스러워했고 그의 아픔에 대해서 깊은 슬픔을 가지고 울었습니다. 마치 사울과 요나단을 위해서 그러했던 것 처럼 아브넬을 위해서도 조가를 지었던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말씀은 아주 선명한 대조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압이라는 악한 장군은 끝까지 자신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자신의 의도를 숨긴 사람입니다. 마치 왕을 위하는 것 처럼 자신을 포장하는 거짓으로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오직 거짓된 복수를 위하여 움직인 것입니다.
반면에 다윗은 어떠한가? 그는 자신의 마음 속에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누구에게 호소하기 이전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의도를 숨기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 앞에 진실하며 또 아브넬을 아꼈다는 것을 자신의 진실한 행동들을 통해서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오늘 말씀을 보면서 "과연 나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는가?" 에 대해서 매우 진중하게 살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어떤 의미에서 참으로 간교하다 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얼마든지 우리의 내면에 있는 진짜 동기를 감추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마치 신앙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 처럼, 혹은 겉으로는 그 사람을 위하는 것 처럼 이야기하지만, 얼마든지 속으로는 다른 생각과 다른 동기를 가지고 상대방을 속이는 대화를 끌어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요압은 매우 철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왕인 다윗조차 대범하게 속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평화를 위하여 찾아온 아브넬조차 속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무엇인가? 성경은 그의 동기를 가장 정확하게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심중에 무엇이 있는지를 정확하게 아셨습니다. 27절 하반절에 “이는 자기의 동생 아사헬의 피로 말미암음이더라” 그리고 반복이 되고 있어 30절에 “요압과 그의 동생 아비새가 아브넬을 죽인 것은 그가 기브온 전쟁에서 자기 동생 아사헬을 죽인 까닭이었더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요압을 움직이는 것은 철저한 이기심이었고 분노와 복수심이었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야 말로, 한 사람의 그 중심이 아니라 결과에 대해서 집착하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통해서 어떤 결과를 이끌어내야만 그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라고 평가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무엇인가? 사실상 다윗은 아주 오랫동안 아무런 결과 없이 방황하는 것 처럼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광야에서 도망치는 사람이었어 그리고 그는 여전히 지금 이 시점에서도 유다 지파의 왕일 뿐인 것입니다.
심지어 그는 그토록 바라던 평화의 조약을 바로 눈 앞에서 완전히 놓쳐버린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보자면 참으로 지지리도 복도 없고 고생만 하고 아무런 소득도 없는 불쌍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무엇을 주목하시는가?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당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마음과 그 동기를 모두 아시는 하나님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비록 정치적으로는 세력이 약해서 자신의 장군 조차 어떻게 하지 못하는 형국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앞에서 무죄하다라고 선포함으로써 그 누구도 감히 범접하거나 다다를 수 없는 가장 완전한 평화와 안정감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시편 139편에 다윗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139:1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139:2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라고 고백합니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마음의 가장 깊은 곳까지 다 아시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편의 24절 마지막절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윗은 그의 마음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진실함을 고백하면서, 어떻게든 자신의 길을 하나님의 길로 인도해 달라고 그분의 영원한 길로 이끌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기는, 우리 역시 우리 자신을 살펴보며 돌이키기를 원합니다. 우리 안에 감추어진 이기심과 복수심과 악한 마음들을 하나님께 내어 놓고 진심으로 회개하며, 오직 여호와의 길을 추구하는 사람이 되기를 간구하며, 그 길을 걸어가시는 사랑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또 하나 저는 오늘 말씀을 보면서 "진정한 리더쉽은 어떻게 세워지는가" 에 대해서 깊이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이 꼭 아브넬의 상여를 따라가야만 했을까? 혹은 꼭 다윗이 그렇게까지 소리 높여서 울어야했을까? 혹은 꼭 다윗이 그렇게까지 금식까지 하면서 자신을 절제해야 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성경은, 그러한 다윗의 모든 행동을 일일이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진실한 마음으로 리더로서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 진실한 행동의 결과입니다 그저 겉치레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정말 자신의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아브넬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것을 애통해 할 때에 그때서야 백성들의 오해가 풀렸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서야 모든 백성이 왕을 좋게 여겼다는 것은 그의 진실한 모든 행동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어떤 규모이든 어떤 공동체이든 그것이 가정이든 직장이든 혹은 교회 공동체이든 리더의 모습은 그 사람의 행동이 진실하여야 하는 것이고 반드시 그 진실함이 동반되어야만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8절까지 이렇게 말씀하힙니다.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제가 생각할 때에 사람들의 가장 큰 오해는, 마치 기독교를 지적인 종교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저 논리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만히 앉아 계시고 그분이 그저 말씀으로만 내가 너희를 용서한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 내가 너희를 돌본다 이렇게 하신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행동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진실하게 행동하시는 분이십니다. 성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동등 되시지만 도저히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이 낮아지셔서 직접 인간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자신이 누리시던 모든 영광과 기쁨을 다 포기하시고 우리와 동일한 인간이 되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것에 대하여서 말씀하시기를,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종이라는 것은 내가 그냥 자유롭게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된다 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상대방에게 종으로 판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낮아진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철저하게 상대방을 섬기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저 논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역사 가운데 사랑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기꺼이 종이 되셨고 그럴 필요가 없으셨지만 기꺼이 자신을 낮추심으로써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내시는 진정한 구원자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부분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높은 사람이 높은 자리에 있을 때에 아무런 감동도 느끼지 않습니다. 높은 사람이 그 모든 권세를 포기할 때에 큰 감동을 느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진심으로 자신을 낮추는지 혹은 그저 위선적으로 행동하는지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진실하시며 그분의 모든 사랑은 거짓된 것이 아니라 진실한 것이며 진정으로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삶과 공동체를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양한 자리에서 리더의 역할을 맡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진실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신 것처럼 기꺼이 나를 낮추고 참된 리더쉽을 가지고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을 섬기고 있는가에 대해서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우리의 삶이 어디에서든 진실하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기뻐하시는 리더쉽으로 섬김의 모습으로 진실한 공동체를 이뤄가시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기도하겠습니다. 첫째로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 하나님 저의 내면에 있는 악한 것들을 버리기 원합니다, 중심을 보시는 여호와 앞에 부끄러운 것들을 모두 남김없이 버리게 하시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과 주님을 가까이하고 주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거룩한 열망을 부어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둘째로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진실한 마음과 진실한 행동을 저에게 주시옵소서, 거짓과 가식이 아닌 진실한 모습을 주시고, 주님께서 그렇게 섬기신 것처럼 다른 이들을 진실하게 섬기며 공동체를 세워나가는 리더로서 교회와 세상을 섬기는 제가 되도록 주님께서 오늘도 저를 붙들고 인도하여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문" 전체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11/blog-post_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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