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아이를 키우면서 느끼는 것은, 미국은 훨씬 더 개인의 선호를 존중해 준다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에는 조금이라도 별난 모습을 보이면 너는 왜 그렇게 사느냐고 타박을 받곤 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저의 아이들은 그 취향을 존중해 주면서 키우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길을 달리다 보니 광고가 붙어 있습니다. 앵무새 체험관 ‘앵무야앵무야’ 눈이 번쩍 뜨입니다. 첫째 아들이 새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전화를 해보니 심지어 앵무새를 직접 만지고 체험할 수 있다고 합니다. 바로 길을 돌려서 들리기로 했습니다.
아들은 좋아서 어쩔 줄 모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가족 중에 유일하게 첫째만이 새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보호자가 필요해서 어쩔 수 없이 따라들어가기는 했지만 멀찌감치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손님을 너무나 반가워하는 체험장 주인께서, 빨리 저도 해보라고 재촉하십니다. 손사래를 쳤습니다. ‘아휴 저는 새를 정말 싫어합니다’ 결국 억지로 제 손에 올려 주셨습니다.
생각보다 새가 정말 무거웠습니다. 너무 당황했습니다. 전혀 낯선 존재가 바로 눈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사실 웃는 것이 아닙니다. 저의 손가락 바로 위에 올라가 있는 낯선 감각에 기분이 정말 이상했습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생각보다 괜찮았습니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살아 있는 큰 새가 손 위에 있다는 것이 조금은 받아들여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싫은 것도 노력하면 약간은 좋아질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아마 어떤 것이라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앞으로도 저의 경험과 지경이, 좋은 의미에서 조금이라도 더 넓어지기를 원합니다.
누군가의 마음에 행복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이 삶의 가장 큰 의미입니다. 진실한 그 행복은, 우리의 마음에 있는 아픔과 슬픔, 분노와 질투, 그리고 절망과 낙심을 몰아내기 때문입니다.
우연히 만난 청년들입니다. 잠시 한번의 만남으로 스쳐지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해맑은 얼굴들을 보고 있자니 제 마음이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뜨겁고 아팠습니다. 가장 바쁜 시점에 처음 만난 청년들이 자꾸 제 동생들처럼 느껴졌습니다.
'북클럽을 해보는게 어떨까요?' 처음 만난 목사가 갑자기 하는 이야기에, 미친 사람이라고 충분히 생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몇명이 함께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나중에 말하더군요, 북클럽이 뭔지는 몰랐지만 열정적으로 말하는 저의 모습에 끌렸다고, 사실 그날 목이 다 쉬었습니다.
가장 바쁜 시기에 매주 여덞시간 이상을 사용했습니다. 한번의 모임이 그렇게 좋았습니다. 가장 세속적인 자기계발서인 악인론을 가지고 청년들과 진지하게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마치 기적처럼 청년들의 변화를 제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
한국에서 들어온 몇명과 만나기로 했습니다. 저의 모든 일정 중에서 가장 먼저 약속을 잡았습니다. 그만큼 너무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만나서 식사를 했습니다. 함께 커피를 마셨습니다. 이야기 나누는데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영원에 몸을 담근 것 처럼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사랑하는 청년들이 바로 저의 눈 앞에 앉아 있는 것이 실감 나지 않았습니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를 통해, 그리고 우리의 모임을 통해 몰라볼 만큼 변한 모습에 마음이 벅찼습니다. '그래, 이건 꿈을 꾸는 걸꺼야' 우리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웃음이 있었습니다. 삶을 바라보는 태도에 대해서 그리고 학업에 대해서 미래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돌아보는 부분에서 처음 만났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아졌습니다.
정말 정말 헤어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한달에 한번이라도 이렇게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눈물이 났지만 참았습니다. 악수하면서 헤어지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서, 이 기쁨과 감사, 그리고 아쉬움과 다짐을 마음에 담아 둡니다.
물론 영원한 끝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만남은 이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만남이 기적처럼 이루어졌듯이, 비록 당장은 직접 얼굴을 마주볼 수 없어도, 하나님께서 선하게 인도하실 것입니다. 저는 더 좋은 모임으로 준비해서 이들과 함께할 것입니다.
한 청년이 노래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RIIZE의 Love 119입니다. 노래가 참 좋았습니다. 'Nothing but I want it all with you' 이들과 함께 하기로 한 것은, 제 인생에 가장 탁월한 선택입니다. 다시 돌아간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에게 소중한 이들의 삶이 더 풍성해지기를, 그리고 우리의 긴 여정의 한걸음 한걸음이 행복으로 가득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기도합니다.
때론 마음이 격정에 휩싸일 때가 있습니다. 현재의 상황과 여건은 상관없이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감 혹은 신성한 부르심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는 리딩피플 북클럽이 그렇습니다.
교회라는 울타리를 뛰어 넘어서, 그러나 따뜻함과 행복을 경험할 수 있는 그런 북클럽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몇번의 주저함이 있었지만, 그러나 조심스럽게 그러나 확고하게 걸음을 내딛였습니다. 모든 과정은 쉽지 않았지만, 그 열매는 너무나 달콤하고 사랑스럽습니다.
하나님께서 좋은 분들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사실상 대부분이 제가 처음 만난 분들이었지만,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처럼 느껴졌습니다. 시간이 훌쩍 지나서 여덞번의 모임이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모임을 마무리하고 잠깐 한국으로 들어왔습니다.
마지막 모임 때 참 좋았습니다. 참여하신 분들에게 모임에 대한 소감을 부탁드렸습니다. 리딩피플 북클럽을 하면서 좋았던 점, 그리고 정진부 목사와 하면서 좋았던 점, 그리고 나에게 나타난 변화 이렇게 세가지를 부탁드렸습니다.
한국에서 잠시 여유를 가지고 소감을 읽었는데 정말 좋았습니다. 제가 의도한 북클럽의 모든 장점을 함께 하신 분들이 충분히 누렸다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것을 학문적으로 말하자면 정확한 학습 계획을 따라서 만족스러운 학습 결과를 누린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쉬운 표현으로는, 그저 행복했습니다.
성공이 무엇인가를 정의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성공은 곧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인생에 정말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이 얼마나 있을까요?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의 대부분은 그저 눈물과 후회와 아픔과 비난과 낙심으로 가득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북클럽은 그렇게도 행복합니다 .마치 한주간의 행복을 압축해서 그 시간에 쏟아붓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저 역시 좋은 분들과 함께 하면서 영혼의 회복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좋았습니다. 함께 하기 때문에 외롭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선하게 이 모임을 인도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에게 주어진 최선의 꿈, 저에게 주어진 최선의 노력으로 계속 앞으로 나아가겠습니다.
정말 좋아하는 두분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좋았습니다. 아, 나의 형제여. 굉장히 두근거렸습니다. 사실 제 마음에 제 이야기를 실컷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분의 지친 표정을 보니, 적어도 오늘 만큼은 제가 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분간 오래 뵙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중년이 된다는 것은, 함부러 저의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의 기회가 그렇게 소중합니다. 마음껏 이야기하고 싶을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알았습니다. 오히려 제가 정말 좋아하는 누군가에게는, 제가 그렇게도 경청의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누군가에게는, 잠깐이라도, 작은 위로가 되고 싶었습니다.
두분의 이야기를 힘써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희망과 슬픔의 발라드와 같았습니다. 포기하고 싶지만, 포기할 수 없는 삶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그리고 내가 당신을 듣고 있다고 온 몸으로 표현하며 들었습니다. 손을 꼭 잡고, 허그를 했습니다. 따뜻하고 좋았습니다. 연약한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것은 관계입니다.
헤어지는 마지막이 너무 아쉬웠습니다. 언젠가 다시 십년 후에 뵐 때에, 더 좋은 모습으로 만나자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더 좋은 모습,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저의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제 마음 안에 있는 불안과 아픔과 갈등은 조금 감추었지만, 어쩌면 다시 만날 그 때에도 다시 들을 것 같습니다. 그 때에는 더 넓은 마음으로, 그리고 더 큰 사랑으로.
잠깐 미국에 방문하신 선교사님을 만났습니다. 크리스천 북클럽에 오셔서 한번 교제한 것이 인연이 되었습니다.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 타임머신을 탄 것과 같습니다. 아니 벌써 시간이? 행복은, 절대 시간으로 잴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영혼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북클럽은 영혼을 돌보는 일이고, 선교도 영혼을 돌보는 일이기 때문에 저희의 마음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신나게 이야기를 했는지 목이 다 상할 정도였습니다. 마음이 너무 뜨거워져서 가만히 앉아 있기가 힘들었습니다.
선교지에서 아주 간단한 북클럽 셋팅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에 대한 실무적인 이야기들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제 마음이 참 벅찼습니다. 저의 작은 통찰력들이 선교에 도움이 된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면 제 인생에 더 큰 기쁨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교회가 선교사님을 더 잘 도울 수 있는지 여쭤보았습니다. 선교사의 사역에 관심을 가지고 정기적으로 연락을 나누면서 격려해주고, 그리고 가급적 꼭 방문해서 함께 잠시라도 사역하면 그것이 최고라고 알려주셨습니다. 마음껏 재량을 가지고 섬길 자리가 주어진다면, 꼭 그렇게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대화 중에 선교사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정목사님은, 관계 중심이시군요?"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 말이 칭찬이었기 때문에 제가 그런 귀한 칭찬을 들어도 되는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제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사실 저는 어떤 의미에서 굉장히 차가운 사람입니다. 일을 중시합니다. 그런데 어쩌면, 저도 모르게 제가 바뀐 걸까요? 그런데 교회를 섬기면서 깨달은 것은, 사실상 관계가 전부라는 것입니다. 일은 관계가 만들어낸다라는 상투적인 이야기는 진실을 다 보여주지 못합니다. 세상에 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관계'가 전부입니다.
그래서 저는 따뜻한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적어도 제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곳에서는 따뜻함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언젠가 누군가 또 다시 "목사님은 관계 중심이시군요" 라고 격려해 주실 때,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이 선뜻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 맞습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리딩 피플이라는 이름으로 커뮤니티 북클럽을 시작한지 거의 두달이 되었습니다. 사실 제가 느끼는 감정을 글로 적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벅참이라는 두 글자 안에는, 그 모임을 다 담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파네라에서 모이기 때문에 자리를 예약할 수 없습니다. 여섯명이 앉는 소파는 흔하지 않습니다. 저도 서두른다고 서둘러도 겨우 이십분 정도 일찍 가는 정도입니다. 부푼 마음으로 도착해보니 멤버 중 한분이 벌써 자리를 맡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테이블에 크림 치즈를 바른 베이글들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언뜻 보니 꼭 빵들이 활짝 웃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니 이게 왠 베이글인가요?" "같이 먹으려고 제가 미리 와서 시키고 준비했어요, 그리고 목사님 새벽부터 아무것도 못 드셨잖아요."
괜시리 마음이 뭉클합니다. 저를 배려해주시는 것도 참 감사하지만, 그 따뜻한 마음이 참 좋았습니다. 세상은 화려한 것이 마치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실상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작은 배려, 친절, 그리고 미소입니다.
꼭 하나님을 깊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따뜻한 모임이어서 참 좋았습니다. 그저 삶에 대해서 진실하게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민 생활 몇십년 만에 정말 의미있는 시간을 가진다는 말에 잠시 목이 매였습니다. 목사라서 존중해 주십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제 마음에는 목사 정진부가 아니라, 그저 누님들 밑에서 열심히 듣고 있는 정진부로 존재하는 것도 좋았습니다.
저 역시 누군가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차가운 세상, 그 차가움을 이길 수 있는 것은 따뜻한 사랑의 온기입니다. 그 온기 속으로 들어갈 수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저 역시 그 작은 온기에 저의 마음을 보태고 싶습니다.
원래 저는, 사람을 그렇게 좋아하는 성품이 아니었습니다. 주변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신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도 열심히 공부하는데 온 힘을 쏟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이 목회자의 마땅한 방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거의 20년이 지나고보니, 가장 소중한 것이 "사람"입니다. 성도님이 가장 소중합니다. 왜냐하면 목회자는 관계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시고 완성하시기 위해서 주님의 존귀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교회를 섬긴지 만으로 6년이 거의 되었습니다. 이제 며칠만 있으면 그렇게 됩니다. 누군가에게 축하받는 것을 그렇게 원한적이 별로 없었는데, 괜시리 이번에는 누군가 한명은 기억해 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열심으로 섬겼습니다. 지나간 시간은 참 쉽지 않았지만, 행복이 컸고 또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했습니다.
성도님들과 새벽 기도회를 하고, 같이 아침 식사를 나누었습니다. 한 권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본인은 목회자들과 헤어지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새로 오시는 목사님들 이름도 안 외우려고 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목회자들이 떠나서 마음이 많이 무너졌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면서 들었습니다. 하지만 차마 드리지 못한 말씀은, "목회자들도 그만큼 힘들다" 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성도님들이 내 가족처럼 여겨질수록, 아니 내 가족이 될수록, 목회자는 마음이 더 아픕니다. 왜냐하면 언젠가는, 가족들과 헤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많이 아프신 성도님을 심방하면서, 시편 23편을 읽어드리고 기도하였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삶의 현실이 되어버린 그분에게, 이 말씀을 읽어드렸습니다. 말씀을 읽어드리는데 자꾸 눈물이 나서, 성경을 읽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펑펑 울면서 기도하였습니다. "주님, 주의 아들이 이 길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함으로 사역의 기간이 찰 수록, 안타깝게도 헤어질 시간이 가까워 온다는 것이 실감이 납니다. 결국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런 시간이 오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런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때 저는 어떤 마음으로, 다시 그 시간들을 이겨내야 할까요?
이미 천국으로 먼저 가신 성도님들을, 가슴에 묻어 두었습니다. 손을 잡고 기도하던 분들이 아름다운 꽃 사이에 말 없이 누워계신 것을 보면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우리의 생을 살아가는 날 동안, 헤어짐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영원한 주님의 관점에서, 그리고 그분의 넓은 품 안에서 영원히, "우리"라는 존재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것이 목회자로서 그리고 성도로서, 저의 영혼의 소망입니다.
좋은 설교는 어떤 것일까요? 항상 설교에 대해서 고민하지만, 여전히 그 답을 찾아가는 중입니다. 분명히 “전통적인 답”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급변하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본질은 항상, “새로운 옷”을 입게 됩니다. 저는 항상 꿈을 꿉니다. 충분히 성경적이면서, 충분히 적용적이고 시대에 걸 맞는 설교에 대한 꿈입니다.
지난 번 The Healer가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너무 좋아하신 분들도 계셨습니다. 반면에 비판적인 분도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책을 많이 인용한 것에 대하여 부작용이 있었던 듯 합니다. 책 인용으로 인해서, 설교에 대한 집중력이 오히려 약해졌고 또 산만했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장기적으로 보자면, 설교자로서 제가 발전하는 과정이기에 감내해야 하는 것이지만, 비판의 이야기는 결코 달콤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저는 성숙해져가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다양한 이야기들을 듣고 단점을 계속 보완해나가야 합니다.
* 책을 인용하는 것의 의미
독서를 오래하면, 마치 “저자와 대화를 나누는 듯한 수준”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십대 중반부터 그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그것이 좋았습니다. 한 없이 혼자 길을 걸으며 책을 읽고 줄을 치고, 잠시 벤치에 앉아서 독서를 멈추고 생각을 정리하는 그 행위 자체가 좋았습니다. 책을 읽고 마음에 담은 순간 만큼은, 전혀 외롭지 않았습니다. 저라는 인간이 맛볼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이었습니다.
목회자가 되고 나서도, “인간의 궁극적인 행복의 본질에 대한 소신”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대화를 잃어버린 시대에, 누군가의 깊은 대화를 통해서 그 사람의 생각을 파악하고, 또 그 사람에게 나의 마음을 털어 놓으며 길을 찾아가는 것은 "성숙한 성도의 태도"라고 항상 생각했습니다. 저는 저의 설교도 그렇기를 바랍니다. 설교자와 성경과 책들이 대화를 나누고, 성도는 그 자리에 함께 동참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책을 인용하는 것에 대하여 거부감을 가지는 것은, "일반 은총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합니다. 일반 은총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하나님께서는 일반 은총을 통해서도 주님의 진리를 우리에게 알려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일반 은총이야 말로 “현실의 컨텍스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실을 살아가는 성도에게 현실을 이야기할 수 없다면, 그것은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만 인용하고, 성경만 이야기하고, 성경에서만 모든 설교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불완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탁월한 세상의 진리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결국에는 성경의 진리가 가장 탁월한 것임을 드러내는 것이 항상 저의 목표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함께 나누는 것이야 말로, 성도에게 가장 좋은 적용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 설교의 구성
이번 설교는, 산상 수훈의 일부분입니다. 보통의 주석들과 스터디 바이블들은 그렇게 특별한 내용을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본문을 다각도로 오래 묵상하고 생각하고 자료들을 찾으면서, 제 마음에 이 본문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두가지는 이것입니다.
첫째로는, 예수님께서 “단순히 원수에 대해서만” 다루고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이 본문을 접근할 때에, "원수가 과연 누구인가? 그리고 그 원수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라는 것이 보통의 접근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원수 뿐만 아니라, "나와 가장 친한 사람에 대한 나의 태도"까지 한꺼번에 언급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친근한 관계에서 원수까지 나아가는 "인간 관계의 넓은 스펙트럼"이라는 관점으로 본문을 접근하였습니다. 이번에 처음 시도한 접근인데, 저는 이러한 이해가 성도의 현실에 훨씬 부합된다고 느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완전하시다 라고 부른 적이 없는데, 여기에서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처음으로 언급하고 있다라는 Carson의 주해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A
better understanding of the verse does justice to the word teleios but also notes that the form of the verse is exactly like
Leviticus 19:2, with “holy” displaced by “perfect,” possibly due to the
influence of Deuteronomy 18:13 (where the NIV renders LXX teleios by “blameless”; cf. Gundry, Use of the Old Testament, 73–74). Nowhere is God directly and
absolutely called “perfect” in the OT: he is perfect in knowledge (Job 37:16)
or in his way (Ps 18:30), and a man’s name may be “Yahweh is perfect” (so yôtām [Jotham], Jdg 9:5; 2 Ki 15:32).
But here for the first time perfection is predicated of God (cf. L. Sabourin,
“Why Is God Called ‘Perfect’ in Matthew 5:48?” BZ 24 [1980]: 266–68).
D. A. Carson, “Matthew,” in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Matthew–Mark (Revised Edition), ed. Tremper
Longman III and David E. Garland, vol. 9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0),
194.
그렇다면, 결국에는 “우리의 모든 인간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온전하심”은 드러나야 하며, “성숙의 차원”에서 우리는 그 자리까지 나아가야 하며, 그리고 “성숙을 위한 구체적인 전략”까지 설교자는 제시해줄 수 있어야 한다 라고 설교에 대한 논지를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그 전략은 결국 “가장 작은 수준에서 습관을 만들어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책들과 성경을 통해서 논증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작게 시작한 사랑의 습관으로부터 관계의 폭을 넓혀서, "결국에는 원수를 사랑하는 수준까지" 나아가야 하며,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뻐하시고 상을 주신다라는 구조로 마무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 설교의 자료 준비
설교가 단순히 “주해의 모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팀캘러 목사님의 설교들을 공부하면서 경험한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적이고 적용적인" 설교의 이상향은, 주해 이상의 것을 목회자에게 요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자료들을 폭 넓게 찾고 다루는 것이 항상 필요합니다.
이번 설교는 의도적으로 "기브앤테이크" 책을 읽으면서, 일종의 “설교자의 대화 상대”로 삼았습니다. 이 책은 제목이 너무 좋아서 우연히 읽기 시작했는데, 책 자체가 워낙 탁월했습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설교 본문과 잘 연결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애덤 그랜트는 “인간 관계에서 주고 받는 사람의 본질”에 대하여서 굉장히 잘 파악했기 때문입니다. 설교 제목인 The Giver 역시 이 책에서 따 온 것입니다.
"진정한 기버이신 하나님" 이라는 논지까지 내용을 끌고가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설교 처음부터 애덤 그랜트의 용어들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이후에 설교에 대한 피드백을 받아보니, 설교 전체에서 Giver라는 말을 너무 많이 사용해서 어색했다라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한글 설교를 하면서, 주로 사용된 용어는 정작 R발음이 계속 들어가서 어색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어떤 용어라도 “좀 더 한글 자체로 풀어서” 설교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친밀한 관계에서만” 기버가 되는 것은, "성경의 문맥상"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전혀 미치지 못하는 것임을, 기브앤테이크와 루터 저작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저는 루터 전집을 로고스로 가지고 있지 않지만, 루터란 스터디 바이블이 루터 전집에서 인용하고 있어서 그것을 사용하였습니다. 스터디 바이블 하나로 primary source까지 바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큰 특권입니다.
Luth
“Do you see now how pious you are if you are friendly and kind only to your
friends? You are just about as pious as the thieves and the scoundrels, as the
whores and the criminals, or as the devil himself” (AE 21:127).
AE Luther, Martin.
Luther’s Works. American Edition.
General editors Jaroslav Pelikan and Helmut T. Lehmann. 56 vols. St. Louis:
Concordia, and Philadelphia: Muhlenberg and Fortress, 1955–86.
Edward A.
Engelbrecht, The Lutheran Study
Bible (St. Louis, MO: Concordia Publishing House, 2009), 1589.
그리고 "최종적인 적용 부분"을 끌어내기 위해서, 진정한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은 "실천을 통한 우리의 습관의 변화"가 필요하며, 그리고 그 습관을 이루기 위해서는 "아주 작은 반복"부터 필요하다는 것을 책 두권 그리고 성경을 통해서 논증하였습니다.
실천과 습관에 대한 신학적 의미에서 가장 앞서가는 사람은, 제가 이해하기로는 제임스 스미스입니다. 제임스 스미스는, “지성 중심의 인간관”에 도전하면서, 인간은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되는 것이 필요한데, 그 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덕에 대한 실천 그 자체"가 필요하다 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 실천은 반드시 "사랑의 습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 내용을 압축하여서 이번 설교에 인용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덕을 실천함에 있어서, 어떤 식으로 어떤 전략을 가지고 습관을 만들어야 할 것인가?” 라는 질문이 필연적으로 따라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주 작은 반복의 힘"을 인용하였습니다. 실질적인 임상 결과도 그렇고, 저에게 스스로 적용할 때에도 성도의 변화에 대한 거의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 이 설교가 저에게 주는 의미, 그리고 반응
이 설교는, 저에게 있어서 너무나 큰 의미를 가지는 설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변화에 대한 지금까지 저의 모든 고민과 답”을 담았기 때문입니다. 디민 논문을 쓰면서 기독교 세계관을 연구해 본 결과, 한 사람의 세계관이라는 것이 "단순히 지식으로"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은 반드시 실천을 필요”로하고, 또한 “실천은 습관”을 만들어야 하며, 그렇게 “평생”을 달려가는 것이 성도의 삶 입니다.
설교에 대한 반응은 이번에도 다양했습니다. 은혜 받았다고 따로 연락 주신 분들도 계셨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쉽게도, 들으시는 분들 중에 지루해 하시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이번 설교 때에는 유독 세분 정도가 눈에 띄었습니다. 그래서 설교 중에도 마음이 아팠습니다. "내가 좀 더 잘 준비했으면 좋았을텐데, 혹시 너무 지루했던 것일까?" 그렇게 스스로를 책망하는 마음도 가졌습니다.
사실 설교자로서 이번에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현재로서는 주일 설교 세번이 저에게 무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정서적으로 잘 제 자신을 다스리고 충전하려고 해도, 이미 두번의 설교를 하면 정서적으로 육체적으로 거의 소진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세번의 설교 모두에 온 마음과 정성을 담고 싶은데, 그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모든 설교에 최선을 다하고 싶지만, 전체 설교라는 관점에서는 제 자신의 힘을 더 잘 안배해야 할 듯 합니다.
* 여전히 끝나지 않은 길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은,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며,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길은, “한걸음 전진”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저의 모든 고민과 연구를 담아서 The Healer, 그리고 The Giver 라는 두번의 설교를 할 수 있었습니다. 조금은 전통적인 설교의 형식에서 벗어나서 탁월한 책들을 적극적으로 인용하며, 성도님들의 마음과 현실의 삶 가운데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설교를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저의 최선을 다할 수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이제 주일 설교자로서 저의 상황은, 좀 더 전통적인 설교 형식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저의 생각을 뛰어넘으시고, 또 제가 알 수 없는 어떤 길로 인도하시며, 저는 그 길에 순종할 따름입니다. 제가 전하는 말씀은 성도님들을 향하기 전에 언제나 제 자신을 향해야 하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저에게 요구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계속, 한걸음 그리고 한걸음 더 전진할 수 있을까요? 오늘도 포기하지 않고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책을 읽고 공부하는 이 모든 것이, 혹시 헛된 것은 아닐까요? 제가 꿈꾸는 설교의 이상향으로 더 나아가고, 주일 예배 이후에 활짝 웃으며 집으로 향하시는 성도님들의 행복을 계속 지켜볼 수 있을까요? 제 능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저의 능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의지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지하고, 진실한 설교자의 길을 계속 걸어가기를 기도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들어 있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세상 사람으로 부터 버림을 받을까봐,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잃어버릴까봐, 우리는 두려움 속에 살아갑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남의 눈에
들기 위해서 노력하고, 어떻게 해서든 뭔가 있어보이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어합니다.
물론 모든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서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행복을 누립니다.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고 내 생각만 주장하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일을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어필하는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것 중에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된 믿음이라는 것은 세상의 기준과 판단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붙들고 그분을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설교는 제 자신에게 더 중요한 설교입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그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