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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3일 토요일

한국의 봄은, 춤을 추고 싶어라

 


막연히 마음에 상상하던 것이 있었습니다. 한국의 봄거리를 걷는 것이었습니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 여유로운 걸음을 그렇게 원했습니다. '정말 나에게도 그런 날이 올까?' 여러번 스스로에게 질문했습니다.

지하철에서 내려 따뜻한 거리를 누렸습니다. 한걸음 한걸음이 너무 행복해서 마음이 벅찼습니다. 전혀 못하는 것이지만 마치 춤이라도 추고 싶었습니다. 이미 마음은 그랬습니다. 

시간이 꽤 흘렀지만 역시나 길을 헤매는 것은 여전합니다. 지도를 여러번 보고서도 한참을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속으로 웃음이 납니다. ‘나는 아직도 그대로구나’ 많이 걸었지만 마음은 너무나 여유롭습니다. 불안하지도 않습니다. 다리가 아파도 괜찮았습니다. 적어도 오늘 만큼은, 많이 돌아가도 좋다고 느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겠지만 적어도 저에게는, 어쩌면 앞으로의 십년 안에 다시 누리지 못할 행복입니다. 그래서 더욱 감사합니다. 이 시간을 이 순간을, 그리고 이 감각을 마음 깊이 넣어둡니다. 따뜻한 이 봄날을.

2024년 2월 26일 월요일

목회는, 보이지 않는 것 1

 

따뜻함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집니다. 세상은 점점 식어가지만, 그럴 수록 따뜻한 분들의 그 온기가 더 힘을 발휘합니다. 그런 분들 옆에 잠시라도 머물수 있다면, 그 잠깐의 대화가 지친 삶을 행복하게 만듭니다. 

주일에 사역하는 분주한 중에 권사님 한분이 잠깐 말을 걸어 오셨습니다. "목사님, 꿈에 목사님이 나왔어요. 그런데 성도님 차가 많이 망가졌는데 그걸 다 일일이 고치고 계시더라구요. 제가 꿈을 자주 꾸는 사람이 아닌데 목사님이 참 이런 일도 다 하시는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목사님 안보이는데서 열심히 섬기시는구나 생각했어요. 하나님께서 다 기억하시고 갚아주실꺼에요."

무슨 말을 해야할지 잠시 고민했습니다. 사실 약간 마음에 떨림도 있었습니다. 한번도 보시지 않은 저의 사역을 너무나 확신있게 말씀하시는 나이든 권사님이 참 귀여우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꿈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아니지만, 권사님의 따뜻한 한 마디가 참 힘이 되었습니다.

사실 지난 몇 주가 참 분주했습니다. 성도님들 돌아보면서 연락하면서 심방하면서 저의 한계까지 제 자신을 밀어 붙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권사님에게 제가 이런 저런 일을 이렇게 열심히 했다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웃으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셨군요 권사님, 권사님 꿈에 제가 다 나오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겠어요."

주일의 사역이 끝이 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회는, 보이지 않는 것이지" 평소에 잘 알고 있는 명제라고 생각했는데 새삼스럽게 느껴졌습니다. 한 성도님이 교회로 나오기 위해서 수십번의 연락과 인내가 필요했습니다. 한 사람이 세워지기 위해서 긴 시간의 경청과 조심스러운 대화가 필요했습니다. 

예전에는, 사람이 조금 더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속이 참 아팠습니다. 그런데 이제서야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절대로 저의 수고를 누군가 온전히 알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하나님 앞에서, 목회자로서 양심에 따라서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칭찬해 주시기를 소망할 따름입니다. 

목회가 보이지 않는 것이기에, 더 성도님들을 살피고 돌보아야겠습니다. 그래서 사역의 기대치는 무한대로 뻗어나갑니다. 제가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성도님들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은 "열심히 하겠다"라는 말 뿐입니다. 마땅히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에 집중하겠습니다. 그리고 제 삶의 마지막에,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 받는 때를 기다립니다.

2022년 7월 29일 금요일

어두운 터널을 거의 지나 빛을 앞에 두고, 뜨거운 사람이 되기 위해 / 김동률 - 내 마음은

 

지난 몇개월이 참 쉽지가 않았습니다. 거의 반년의 시간을 마음의 어려움을 가지고 지냈습니다. 이유가 무엇인가도 한참을 고민하고, 또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몸부림도 치는 시간이었습니다. 

체력이 고갈된 부분도 있습니다. 인간 관계의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방향을 잃은 부분도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기도 했고, 또 많은 부분이 섭섭하기도 했습니다. 꾸준히 제가 할 일은 포기하지 않고 해냈지만, 그 과정이 정말 쉽지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저의 내면 안에 있는 가장 깊은 갈등이 원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뜨겁지 않은 사람이 될 것인가, 아니면 뜨거운 사람이 될 것인가"의 갈등이었습니다. 

김동률 노래는 참 깊은 삶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노래를 처음에 들었을 때에 가사가 너무나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뜨겁지 않은 사람이 됐어" 그것이 저도 모르게 제가 처했던 저의 마음의 상태였던 것입니다. 별로 모든 것에 무감각하고, 다른 것에 별로 신경쓰지 않고, 그저 제 자신만 생각하는 그런 마음의 상태로 많이 변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처음에 저에게 주신 그 사랑의 감각을 잊어버리고, 겉보기에는 그래도 괜찮은 목회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뜨거운 사람이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진실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정말 진실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을 대하다보면, 어느 지점을 넘어서면 결국 그 사람의 진심이 보입니다.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 없는 내면이 서로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보고도 보고 싶지 않은, 알면서도 믿고 싶지 않은 그런 순간입니다. 

그런데 제가 만약에 뜨겁지 않은 사람이라면 거기에서 멈추어 버리면 그만입니다. 그만 거기에서 멈추어도 누구도 비난하지 않습니다. 적당히 신앙적으로 둘러대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면, 저도, 그 사람도, 세상도 멈출 뿐입니다.

뜨거운 사람이 되려면, 상처를 많이 받게 됩니다. 이것은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세상은 뜨겁지 않은 사람으로 가득차 있고, 식어 있는채로 살아가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뜨거운 사람들이 사람들에게 회자되며 책으로 남겨진 것은, 그런 사람들이 극히 드물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뜨거운 삶을 산다는 것은, 나의 진심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을 가능성이 다분하며, 오히려 왜 그렇게 순진하게 살아가느냐고 비웃음을 당할 가능성이 많은 길입니다. 사실 동시대에 뜨거운 사람은 그저 허망하게 잊혀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한동안은, 이제 나는차라리 뜨겁지 않은 사람으로 사는 것이 훨씬 실리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삶은, 내면의 극심한 모순을 가져옵니다. 오랜 기간 동안 괴로워하며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뜨거움을 주시고, 진실하게 살아가도록 밀어붙이시는데, 내가 나 하나 편하자고 식어있는 삶을 산다는 것은 잠시는 편할지 모르지만 결국 나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것과 맞먹는 큰 모순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을 부정하면서 온전하게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뜨겁게 사는 한 분을 알고 있습니다. 설교 때 마다, 불타는 초 처럼 녹아서 없어지는 삶을 살고 싶다고 반복했던 분입니다. 어린 시절 그때 그분의 설교를 들을 때에는, 그것을 어떤 추상적인 문학적 장치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저 역시 목회의 길을 조금 걸어보니, 그것은 추상적이고 문학적인 표현이 아니라, 목회자 혹은 성도의 삶 자체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가장 아름답게 드러날 것이고, 우리의 존재 자체는 결국 녹아서 없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 소명을 받고, 목회를 하겠다고 결심한 순간을 생각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신학교 시절의 배움들을 기억하고, 또 유학 시절에 어려운 순간들과 학업과 기도와 아내의 사랑을 생각했습니다. 바랬던 모든 학위들을 마치게 하셨던 것도 기억했습니다. 바라고 소망하던 것들을 매우 더디게 이루시며, 동시에 신실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긴 터널을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저의 삶을 얼마나 놀랍게 인도하셨는가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하셨습니다. 눈물이 나더군요, 저의 삶이 저만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빚어오신 소중한 것이며, 저의 온 가족이 함께 일구어낸 소중한 것임을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책임감이 크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남편이며, 아빠이며, 아들이며 또 목사이기 때문입니다.  

시카고의 겨울은 너무나 혹독하고, 시카고의 여름은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운 날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기 좋은 때입니다. 저는 지금, 길었던 터널의 끝에 빛의 바로 앞에 서 있습니다. 물론 마음에 결단은 했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 대해서 아주 조금은 주저하고 있습니다. 뜨거운 삶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내 딛으라고 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아마 언젠가 마음에 또 어려움이 심해서 좌절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도 적어도, 하나님께서 지금 주신 마음과, 저에게 주신 비전들을 마음에 붙들고 계속 걸어가야겠습니다.

2021년 10월 16일 토요일

말씀 묵상 어디까지 해봤니? - 창세기 37장 / 그의 꿈이 참으로 이루어지겠는가?

 

야곱의 가정은 어머니가 다른 형제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본질적으로 그들이 화목하기가 정말 쉽지 않았으리라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야곱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요셉은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이야기하는 어떤 의미에서 참 생각이 부족한 동생이었습니다. 당연히 형들은 그에게 편하게 이야기조차 못 나누게 됩니다. 

어느날 요셉이 꿈을 꿉니다. 그리고 굳이 형들에게 그 꿈을 말합니다. 형들은 꿈 이야기를 듣고 단번에 의미를 알아챕니다. 꿈은 요셉이 형들의 왕이 되고 다스리게 될 것임을 알려줍니다. 형들은 말도 안되는 꿈이라며,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나겠냐며 동생을 책망합니다. 형들은 그 꿈을 듣고 더욱 요셉을 미워합니다.

또 요셉이 꿈을 꿉니다. 이제는 아버지와 형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이제는 요셉이 심지어 부모님을 포함하여 온 가족을 다스리는 의미입니다. 그 꿈이 정말 이루어지겠냐고 야곱이 요셉을 책망합니다. 창세기에서 지킨다는 말이 여러번 등장하는데, 창세기 37장에서 마지막으로 이 말이 등장합니다. 야곱은 요셉의 말을 마음에 간직합니다. 

왜 야곱이 요셉을 혼자 형들에게 보냈는지는 여전히 궁금한 부분입니다. 요셉은 확실히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들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형들을 찾게 됩니다. 하지만 형들은 홀로 남겨진 그에게 본색을 드러냅니다. 

형들의 목적은 단순히 요셉을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요셉의 꿈 자체에 대해서 분노하고 있습니다. 과연 요셉이 존귀한 자가 되어 부모와 자신들을 다스리는 위치가 될 것인가? 그런 말도 안되는 일이 과연 일어날 것인가에 대해서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들은 요셉을 구덩이에 던지고 천연덕스럽게 음식을 먹습니다. 잔인함이 극에 달한 모습입니다. 그나마 유다의 개입으로 인해서 요셉은 생명을 잃지 않고 형들은 미디안 상인들에게 요셉을 팔아버립니다. 형들은 마치 짐승에게 죽은 것 처럼 꾸미고 야곱을 속입니다. 야곱은 요셉을 잃은 것으로 인해 깊은 슬픔 속에 빠집니다. 

요셉의 꿈은 요셉이 스스로 꾼 것이 아닙니다. 스터디 바이블의 설명처럼, 그의 꿈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열방을 축복하고 왕을 낳는 그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선택하시고 그리고 축복을 이루어나가십니다. 

놀라운 것은, 그 하나님의 축복이 이루어지는 과정은 인간의 눈에 보기에 단 하나의 희망도 없어 보일 때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요셉이라면 저 같으면 절대로 꿈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형들의 미움을 받을 것이 불 보듯 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 이야기를 굳이 하여서 화를 자초합니다. 

하지만 이루어질 것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핵심은,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질 것인가"에 대한 심각한 질문과 "그 꿈에 대한 비난과 조롱" 입니다. 형들도 그리고 심지어 야곱도 그 꿈이 이루어질 것인가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 삼으신 것, 그리고 앞으로 이루실 우리의 온전한 구원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때론 하나님의 일하심은 전혀 우리가 알아챌 수 없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과연 존재하시며 다스리시는가에 대한 심각한 질문을 던지는 상황이 일어납니다. 다른 사람의 비난은 둘째 치더라도 나 스스로조차 전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을 때가 찾아옵니다. 요셉이 구렁텅이에 빠져서 울부짖었던 것 처럼, 우리의 삶이 그렇게 절망할 때가 언제나 존재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결국 다시 한번 진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질문하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의 내용과 의미에 대해서 가장 깊은 수준에서 질문하게 됩니다. "하나님, 과연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축복과 계획은 저에게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2020년 10월 2일 금요일

금요찬양교실 (4) 주님이 내게 / 함께

 

1. 가사 살펴보기

주님이 내게 다가온 후에  사랑을 알게 됐지요
나의 마음에 가르쳐  것은 함께하는 소중한 사랑 

주님을 멀리 떠나온 후에 그리움을 알게 됐지요
기다려주고  품어주었던  사랑을 잊을  없어
 
주님이 곁에 있어준다면 나의 가는  함께 걸어간다면
 사랑이 나에게 꿈을 주지요 다시 시작할  있도록


2.  소개

이 곡은, 하스데반 목사님의 곡으로, 2004년에 출시된 “전하세 예수 15집”에 있는 곡이다. 먼저 1절의 가사는, 신앙의 시작을 다루고 있다. 주님께서 은혜 가운데 찾아오시고, 먼저 사랑을 부어 주셨음을 강조하고 있다

2절의 가사는, 신앙의 회복을 다루고 있다. 주님을 믿은 이후에 한때 멀리 떠났지만, 주님의 사랑이 없다면 자신의 인생에 진정한 만족이 없으니 돌아오겠다 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후렴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여 주시기 때문에, 바로 그것이 성도인 자신에게 확고한 소망이 된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어. 그러므로 혹시 죄로 넘어지더라도, 언제든지 다시 일어나겠다 라는 믿음 안에서 회복을 강조하고 있다.

 

3. 말씀으로 바라보기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5:8 But God demonstrates his own love for us in this: While we were still sinners, Christ died for us.


우리가 무력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많은 일을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있습니다. 우리는 경건하지 않았고, 여전히 죄인이었으며 그분의 원수였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사람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라고 번역된 헬라어 “휘페르”는, 대체하여 라는 문맥에서 사용되는 전치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선택하셨고, 그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치를 부여해 주십니다.

Paige Patterson, Salvation in the Old Testament, in CSB Study Bible: Notes, ed. Edwin A. Blum and Trevin Wax (Nashville, TN: Holman Bible Publishers, 2017), 1789.


시편 37:23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37:23 If the LORD delights in a man's way, he makes his steps firm; 37:24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개역개정37:24 though he stumble, he will not fall, for the LORD upholds him with his hand. (NIV)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 성도는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기 때문에, 유혹을 받고, 돌아서며 실제로 죄를 범하므로 구덩이에 빠집니다.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악인은 죽은 것들을 의지하고, 반면에 의인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의인은 일으켜졌습니다.

Edward A. Engelbrecht, The Lutheran Study Bible (St. Louis, MO: Concordia Publishing House, 2009), 881.

 
4. 찬양에 대한 묵상

곡은, 십자가에 대한 명시적인 복음의 내용은 부족하지만, 감성적인 면에서 복음을 경험하는 것에 대한 묘사가 탁월하다. 거듭난 성도가 하나님을 만나고, 감정적으로 경험하는 풍성한 영적인 만족, 그리고 그분과의 관계가 소원해질 때에 느끼는 깊은 공허함이 나타나 있다.

말씀이 가르치시는 것처럼, 우리의 구원은 우리로 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찾아오시고 구원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의 영혼의 가장 깊은 갈망을 채우시고 만족하게 하셨다.

그런데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죄의 본성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그러나 비록 죄로 인해 넘어지고 실패하더라도 반드시 일어설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이미 자녀로 삼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과, 예수님을 통한 완전한 용서를 믿고 붙들어야 한다. 죄로 넘어진 것에 집착하며, 실패 의식에 빠져 있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진실하게 자신의 죄를 통회하며, 여전히 자녀를 기다리고 계시는 자비의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오늘도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열심에 의지하여서, 다시 한번 죄를 돌이키며 용기를 얻고 그분과 동행하는 믿음의 삶을 힘있게 걸어가야 하겠다.

* 삶으로 드리는 찬양 전체 묵상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06/1_3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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