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걸음씩 계속 걸어가는 것에 대하여
- 옵시디언에 독서 명언을 모으기 시작하다
목회를 하면서 많은 기쁨이 있겠지만, 그 중에 가장 큰 기쁨은 직분자를 세우는 것입니다. 이미 교회를 귀하게 섬겨오신 분들에게 직분을 맡기고 더욱 열심히 섬길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드리는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께서 직분을 주시는 것이며, 당회와 목회자는 그 역할을 실질적으로 감당하게 됩니다.
어린 시절부터 제가 두 눈으로 확인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헌신된 사람들을 통해서 세워지고 확장된다는 것입니다. 저의 양가 부모님들도 그렇고 저와 제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직분을 받고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최선을 다해서 섬겨 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직분을 받으시는 분들을 보면 마음에 눈물이 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서 자신을 드리겠다는 그 마음이 너무나 귀하고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볼티모어 교회를 무려 51년 동안이나 돌보셨습니다. 그 안에는 수 많은 분들의 눈물과 수고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네분의 안수 집사님과 열한분의 권사님을 세워지는 것이 참 감사했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억지로 직분을 맡길 수 없고 사람이 사람을 세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귀한 열다섯분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함께 교회를 섬길 수 있는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들로 세우셨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양육의 과정부터 투표까지 참 좋았습니다. 물론 사람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려움도 있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도하셨음을 고백합니다. 특별히 임직하시는 분들이 더 성숙해지시고 헌신의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이 참 좋았습니다. 모든 것이 성령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임직식을 준비하기 위해서 참 많이 기도하면서 고민했습니다. 어떻게 순서를 하는 것이 가장 덕스러울까? 어떻게 해야 임직하시는 분들의 평생에 남을 만한 임직식이 될까? 어떻게 해야 성도님들이 함께 은혜와 기쁨을 누리실 수 있을까? 제 마음 안에 계속 있던 고민이고 기도 제목입니다.
감사하게도 모든 순서가 자연스러웠습니다. 특히 임직패를 전달해 드리는데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제가 목사 안수 받을 때가 생각이 났기 때문입니다. 문구를 정성스럽게 읽어드렸습니다. 한분 한분의 성함을 부르며, 평생을 주님 앞에 신실한 직분자로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라며 임직패를 드렸습니다.
또한 제가 마음을 많이 썼던 부분은 교인 서약입니다. '1. 볼티모어 교회 모든 성도들은, 오늘 임직 받은 안수집사와 권사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직분인 줄 믿고 이들을 주 안에서 존경하며 사랑하기로 서약하십니까? 2. 또한, 이들이 맡은 직무를 잘 감당하도록 기도하며 함께 마음을 모아 협력하기로 서약하십니까?'
이 부분이 중요한 것은, 직분자를 세우는 것이 단순히 그 사람들만 수고하기 위함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마음을 모아서 공동체를 이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을 들인 부분인데 서약할 때에 분위기가 참 좋았습니다. 함께 서약하시는 모든 성도님들의 '아멘'이라는 대답이 참 따뜻하게 들렸습니다.
임직식을 위해서 당회의 장로님들을 비롯해서 모든 성도님들이 수고하셨습니다. 교회 구석 구석에 성도님들의 손길이 있었고 교회 전체가 행복한 분위기였습니다. 이번에 임직 받으신 귀한 안수 집사님들과 권사님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마음껏 일하실 것을 믿고 확신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볼티모어 교회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교회로 더욱 부흥하기를 원합니다.
One of the greatest joys in ministry is ordaining new leaders. For 51 years, God has faithfully cared for Baltimore Church through the tears and labors of many. Building on this legacy, I am deeply grateful for the four deacons and eleven elderesses (Kwon-sas) who have been set apart. It was God who moved their hearts to stand as faithful servants for His kingdom.
From my youth, I have seen the Kingdom of God expand through dedicated individuals, including my own family. This is why I am moved when I see others accept this call; their willingness to offer themselves to the church is truly beautiful. Throughout the process from training to the vote, I saw the Holy Spirit at work, maturing our leaders and fostering a spirit of devotion.
The ordination ceremony was the fruit of much prayer. Presenting the plaques was especially touching; as I read each name, I prayed they would remain faithful to the Lord for a lifetime. The highlight was the "Congregational Vows." Hearing the congregation’s warm "Amen" reminded us that we are one body, committed to supporting our leaders through love and prayer.
I sincerely thank the Session and every member who worked to make this day a celebration. I am confident that God will work mightily through these new leaders. May Baltimore Church continue to flourish as a community that truly delights the heart of God.
* 볼티모어 교회 칼럼, 목회의 은혜를 나누며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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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어릴 때에는, 누구를 만나느냐가 인생을 결정한다는 이야기를 약간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중년의 저는 이것에 너무나 공감합니다. 누구를 만나는가 그리고 누구의 조언을 듣는가는, 사실상 그 사람의 전부입니다.
11년만에 은사를 다시 만났습니다. 용인의 하늘문 교회를 섬기시는 배영진 목사님이십니다. 영국 유학 후에 청년부 담당으로 저를 돌봐주시고 저는 목사님께 북클럽을 배웠습니다.
배목사님은 유학시절에 프란시스 쉐퍼가 세운 라브리에서 직접 쉐퍼의 사위와 대화를 나누고 배웠습니다. 그곳은 방식은 일단 멘토를 붙여주고 그 사람에게 필요한 책을 추천해줍니다. 그리고 만나면서 그 책으로 함께 토론하는 것입니다. 일종의 맞춤형 북클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상 저의 북클럽 정신은 쉐퍼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뵈었지만 참 좋았습니다. 항상 저에게 가르쳐주신 것처럼, 스스로 새롭게 도전하고 훨씬 더 발전하셨습니다. 목회 뿐 아니라 상담사로서 탁월하게 활동하시는 모습이 너무 좋았습니다. 본인을 바라보는 객관성에 있어서도 훨씬 더 깊어지셨다고 느꼈습니다.
마치 어제 만난 친구처럼 그렇게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저는 집중해서 경청했습니다. 평생에 앞으로 몇번 누리지 못할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목사님께서는 중요한 시기에 놓여있는 저에게 가장 중요한 조언 몇가지를 진심을 다해 전해 주셨습니다.
첫째는 ‘위선’의 문제입니다. 위선에 빠져 큰 위기에 처한 몇 분의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한국 교회의 큰 슬픔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들으면서 섬뜩했습니다. 남의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마음을 다 잡았습니다.
만약 목회자가 이중성에 빠지면 스스로 빠져나올 방법이 없다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목회자 개인의 ‘하나님과의 친밀함’ 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설 때 만이 변화의 실마리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나누는 시간이 앞서야 한다고 신신당부 하셨습니다.
둘째는 하나님 앞에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씀을 해주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제 카톡 프로필이기도 합니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 말씀입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영어로 풀어서 다시 한번 설명해 주셨습니다. "even to the point of death" 죽는 순간까지 그 지점까지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목회자에게 원하시는 것은 사역의 크기가 아니며, 신실하게 순종하고 주님을 따르는 것임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신실함에 목적을 두고 목회해야 은퇴 이후에도 허탈함에 빠지지 않는다고 알려주셨습니다.
두가지 말씀이 정말 좋았습니다. 그리고 확고하게 저의 방향을 잡아 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항상 저의 설교의 첫번째 대상이 제 자신입니다. 그러니 부족함을 크게 느껴 개인 큐티 블로그를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아주 좋은 선택이었음을 깨닫고 감사했습니다. 가끔씩 마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그런데 반드시 이렇게까지 해야함을 마음에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신실함 역시 제가 최근에 더 깊이 생각하는 부분이기에 감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점점 더 제 자신을 한계까지 밀어 붙이시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할 수 없는 일들을 하게 하시고, 이제 내가 죽는구나 라는 탄식을 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상황이나 환경과 상관없이 저는 무조건 신실해야 한다고 하루에도 수십번 다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야 말로, 제가 제대로 가고 있다는 것임을 다시 한번 확신했습니다.
세월은 흘러 이제 목사님의 은퇴도 7년 남짓 남았습니다. 헤어지는데 마음이 너무 아쉬웠습니다. 한달에 한번이라도 찾아뵙고 하면 참 좋을텐데 하나님께서는 저를 너무 멀리 보내셨습니다.
헤어질 때 말씀드렸습니다. '목사님 덕분에 제가 이자리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평생동안 그렇게 생각하겠습니다' 제 진심으로 고백이었습니다. 마음이 새로워졌습니다. 제가 다시 목사님을 뵐 때에 더 자랑스러운 모습이 되고 싶습니다. 제자가 스승의 가르침대로 신실하게 목회했고 또 그래서 귀한 열매들이 있었다고 나누고 싶습니다. 그날까지 다시 한번 달려갈 것을 다짐해봅니다.
그런데 이렇게 본문이 주어질 때에 늘 고민하게 되는 것은 "과연 설교 본문을 끝까지 다 읽을 것인가" 입니다. 그 이유는 구체적으로 모르겠지만, 많은 분들이 설교 본문이 길 때에 일부분만 읽는 것을 종종 보았습니다. 앞 부분만 읽든지, 뒷 부분만 읽든지, 앞에 조금 뒤에 조금을 읽든지, 혹은 가장 중요한 부분만 읽든지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제가 추측할 때에는, 한정된 예배 시간을 조절해서 조금이라도 설교 시간을 늘리기 위해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 개인적으로 크게 아쉬운 것은, 이렇게 본문의 일부분만 읽는 것은 적어도 제가 생각하는 신앙 혹은 설교의 목표와 상당히 거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 그 자체" 입니다. 어떤 설교자의 어떤 위대한 설교도, 감히 성경 말씀에 비견될 수 있습니다. 오직 성경만이 유일한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저의 설교문 자체보다, 성경 본문 그 자체를 성도님들이 더 중시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제가 성경 본문의 일부분만 읽는다면, 마치 성경은 적당한 부분만 읽어도 저의 설교를 들으면 성경 자체를 대해본 것 보다 훨씬 낫다라는 인상을 성도님들이 받을까 크게 염려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고민은 "혼자 읽을 것인가, 교독할 것인가, 아니면 합독할 것인가"입니다. 이 부분에서도 저에게 어떤 구체적인 이유를 제시한 분은 아직 없었습니다. 보통은 주일 예배 때에는 목회자가 혼자서 봉독을 하고, 다른 예배 때에는 목회자와 성도가 돌아가면서 읽는 교독을 하는 듯 합니다. 최근에는 합독이 드물어진 것 같습니다.
다만 제가 염려하는 것은, "성경 본문을 어떤 방식으로 읽을 것인가"가 예배의 영적인 분위기에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목회자가 봉독을 하는 경우, 마치 예배의 시간이 목회자 혼자서 쇼를 이끌어가는 느낌을 줄까 염려가 됩니다.
성도는 함께 예배드리는 자들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예배의 형태가 성도 자신은 자리에 앉아서 매우 수동적으로, 단지 누군가가 읽어주는 성경을 듣기만 한다면, 자신이 예배자가 아니라 단지 청중이라는 느낌을 자연스럽게 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목회자가 혼자서만 성경을 봉독한다면, 마치 목회자만 예배 중에 혹은 중요한 시간 중에 성경을 소리내어 읽을 자격이 있는 것이며, 성경을 소리내어서 읽는 것이 소수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일이라고 은연중에 마음에 심어줄 가능성도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을 읽는 것이 목회자만의 전유물이 되는 것을 전혀 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교회 전체에 주어진 것이며 목회자를 포함해서 우리는 함께 그 공통된 하나님의 계시를 소유하고 소중히 여긴다는 것을 예배 시간마다 진실하게 함께 확인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성도님들께서 직접 성경을 자신의 입으로 읽으면서 무의식적으로라도 그 의미와 맥락 속으로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한 글자 한 글자 정성들여서 읽으면서, 설교자인 제 자신이 이미 성경을 아주 소중하게 대하고 있다는 인상을 성도님들의 마음 속에 깊이 남기고 싶습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아무리 주어진 본문이 길어도, 처음부터 끝까지 성도님들과 합독을 합니다. 물론 저 혼자서 소리내어 읽으면 훨씬 더 빠르게 읽을 수도 있겠지만, 연세 드신 분들 중에 천천히 읽으시는 분들도 염두에 두고 배려하면서 속도를 적당히 조절합니다. 처음부터 정성을 들여서 읽기 시작하고 마지막 단어가 끝나는 순간까지 최대한 집중해서 읽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만약에 본문이 정말 너무 길다면, 차라리 저의 설교의 길이를 줄여서 전체 예배 시간을 맞추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최근 몇주 동안 본문이 길었는데, 성경 말씀을 함께 읽을 때에 어떤 감동이 있습니다. 온 예배당 안을 울려 펴지는 성도들의 성경을 읽는 소리를, 세상의 그 무슨 소리와 감히 비교할 수 있을까요? 강대상에서 성경을 함께 읽으며 저 역시 그 소리 속에 동참할 때에, 마치 가을의 가장 신선한 바람을 온 몸으로 경험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이것이 너무 흥미롭고 또 좋았습니다. 예배에 모인 분들은 삶의 모든 부분이 다른 각자의 개별적인 사람들이지만, 성경을 함께 읽는 그 시간만큼은 하나의 목소리로 하나인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읽는 것이기에 매우 특별한 경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함께 본문을 읽으면서 공동체의 하나됨을 확인하고 함께 설교를 들을 준비가 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단순히 일반적인 책을 함께 읽을 때에 목소리가 일치하는 것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어떤 깊은 영적인 감동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요즘, 설교자는 단순히 설교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종종합니다. 설교자는 영적인 지도자이고, 영적인 비전과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면에서 "성경 본문을 어떤 태도로 어떤 분량 만큼 어떤 형태로 읽을 것인가" 역시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에게 큰 영향을 주는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요즘에 새롭게 깨닫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특별히 이유가 생기지 않는한 앞으로도 "긴 설교 본문이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합독하여서 본문을 읽는 진지한 시간"을 저의 목회의 중심적인 축으로 삼고 계속해서 가지고 싶습니다.
* 사무엘상 8장 1-22절 설교문
오늘의 말씀은, 늙어가는 사무엘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사 시대가 저물어 가고 새로운 왕정 시대를 열어가는 전환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전체적으로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8장 1절에서 9절까지인데 왕을 요구하는 백성들이라고 소제목을 잡을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10절에서 21절까지인데, 인간 왕에 대한 경고라고 소제목을 잡을 수 있겠습니다. 이 내용으로 함께 말씀 나누기를 원합니다.
1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 사무엘이 늙으매 그의 아들들을 이스라엘 사사로 삼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짧은 말씀 안에 굉장히 의미 심장한 내용들이 담겨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누구도 영원히 젊음을 유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무엘도 나이가 들고 사사의 역할을 점점 감당하기 어려워졌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사무엘이 자신의 아들들을 사사로 세웠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이 부분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사사기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우셨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사무엘은 하나님이 사사를 세우시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이 먼저 나서서 아들들을 사사로 세운 것처럼 보입니다. 너무나 안타깝게도 사무엘조차 팔이 안으로 굽는 사람이었습니다. 브엘세바라는 이스라엘의 가장 남쪽 지역에서 자신의 아들들이 사사로 일하도록 세운 것입니다.
성경은 사무엘의 행동에 대해서 평가하지는 않지만, 그 결과가 매우 좋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심으로서 그의 행동을 간접적으로 평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무엘이 원하는대로 자신 아들을 사사로 세웠는지 모르지만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막지 않으심으로 허락하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끔찍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3절에 보니 “3 그의 아들들이 자기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무엘의 아들들은 자신의 아버지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직책과 권력을 사용하는 불량배들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부터 아주 흥미로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4절에 보니 “4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그리고 5절에 보니 “5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뭔가 굉장히 이상한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사무엘의 아들들은 브엘세바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무엘 앞에는 온 이스라엘 장로들이 모인 것입니다. 사무엘을 압박하고 있는 모습이 심상치 않은 모습입니다. 그리고 사실을 아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늙었고 당신의 아들들은 타락하였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이 말씀만 보았을 때에는, 이스라엘의 온 장로들이 매우 지혜롭고 또 이스라엘의 미래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아주 놀라운 이야기가 이어서 나옵니다. 5절 하반절입니다.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 여기서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지금 사무엘과 아들들이 보여준 상황과 이 장로들의 요구가 제대로 연결이 되고 있는가? 하는 것, 그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사실 자연스러운 반응은 이런 것입니다. “사무엘이여, 안타깝게도 당신이 늙고 아들들은 타락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함께 기도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장로들은 금식하면서 당신과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혹은 “사무엘이여, 아무래도 당신의 아들들은 문제가 있습니다. 가족을 세운 것은 성급한 결정이었습니다. 하나님께 간구하여서 새로운 사사를 세우는 것이 이스라엘을 다시 한번 영적으로 강하게 만드는 중요한 도전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장로들의 대사가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이들의 교묘함과 교활함이 아주 놀랍지 않습니까? 이들은 사무엘의 약점과 부끄러움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전혀 이 일과 상관 없는 주장을 들이밀고 있습니다. 마치 짜여진 각본대로 행동하는 범죄자처럼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님들께서는 어떤 사람을 대하는 것이 가장 어려우십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사람을 대할 때에, 마음이 진실하지 않은 사람이 참 대하기가 힘이 듭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은 자신이 하는 말과 그 마음이 전혀 다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말을 할 때에 그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너무나 교활하여서 자신의 말 속에 자신의 마음을 감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 장로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감추고 있습니다. 사실 이 왕정 제도에 대해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후에 언젠가 세워질 것을 하나님께서 이미 예언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 이 상황에서 갑자기 왕을 세우라고 하는 것인가? 도대체 이들의 마음에 무엇이 있길래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달라고 아주 구체적으로 노골적으로 요구하고 있는가 바로 그 질문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저는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할 것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을 가장 두려워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얼마든지 자신의 말로 마음을 감추며 상대방을 기만할 수 있지만, 살아계신 여호와 앞에서는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크게 마음이 상해서 여호와께 기도할 때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장로들의 마음 가운데 있는 그들의 악한 본심을 낱낱이 알려 주셨습니다. 7절 하반절입니다.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의미입니까?지금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이 사무엘에게 온 것은, 결국 그들이 그럴 듯한 말을 하면서 사무엘에게 나온 이유는, 하나님을 버리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필요 없고 하나님 대신에 인간 왕으로 바꾸고 싶어 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마음 깊숙한 본심을 완전히 꽤 뚫어보셨습니다. 이스라엘 장로들과 백성들 전체가 여호와 하나님께 반역을 꾀하며 그분을 버리겠다고 공공연하게 선포를 한 것입니다.
사실 오늘 말씀이 정말 놀라운 것은, 오늘 사무엘상 8장 앞에 있는 7장 때문에 더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7장에서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회개의 운동이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오직 여호와께 돌아오고 그분을 섬기기 위해서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친히 싸우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7장 13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3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의 회복이 있었고 그들은 우상을 버렸고 하나님께 돌아왔으며, 그들은 오늘 말씀의 이 시점에서 놀라운 평화의 시기를 경험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안타깝게도 과거의 악한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고 만 것입니다. 이들은 비록 겉으로 보이는 바알과 아스다롯 우상은 버렸는지 몰라도, 마음 안에서 새로운 우상을 다시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왕이라는 새로운 우상을 의지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나라처럼 왕만 있다면 그들의 나라가 더 부강해 질 것이라고 착각한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과 때는 전혀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 이것을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왕의 제도에 대해서 자세히 가르칠 것을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왕정 제도를 택하지 않도록 이스라엘 백성이 정신차리고 다시 하나님을 찾도록 그렇게 설득하고 있는 것을 말씀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사무엘은 11절 부터 인간 왕정 제도의 특징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왕정 제도의 부정적인 부분을 아주 적나라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 왕은 어떤 존재인가? 백성의 어떤 것을 다 가져가는 존재이다 라는 것을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절에 “너희 아들들을 데려다가”, 13절에 “너희 딸들을 데려다가”, 14절에 “너희 감람원에서 제일 좋은 것을 가져다가”, 15절에 “소산의 십일주를 거두어”, 16절에 “소년과 나귀들을 끌어다가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17절에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끌어다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왕이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가져가고 자기를 위하여 백성과 재산을 사용할 것이라고 말해도, 장로들과 온 백성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입니다. 19절과 20절에 이렇게 말씀하시지 “19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이르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20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하는지라” 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온 백성이 자신의 욕심으로 인하여 눈이 완전 멀어버렸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하여 평화의 시기를 누리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을 위하여 싸워줄 왕이 필요하다 다른 나라처럼 우리도 왕이 있어야겠다 라면서 억지를 부리고 있습니다. 이들은 여호와를 버리기로 작정한 사람들이고 여호와의 다스림을 거절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이 아닌 또 다른 왕이라는 우상을 섬기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그 어떤 사무엘의 호소와 조언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모든 상황을 다시 한번 하나님께 고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왕을 세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그것은 인간의 죄악 된 본질은, 참된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끊임없이 우상을 찾아나선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7장에서 참된 회개와 영광스러운 부흥이 기록된 이후에, 어쩌면 이스라엘 백성은 안심 했는지도 모릅니다. “자 우리를 한번 보라 너무 대단하지 않은가? 우리는 바알과 아스다롯의 모든 우상을 버렸고 부흥을 맛보았다, 그리고 우리에게 드디어 평화의 시기가 찾아왔다, 정말 우리는 대단한 사람이지 않은가?” 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 땅의 부흥이라는 것이 결코 영원하지 않다는 것과, 인간은 얼마든지 옛날의 습관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성경이 보여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겉으로 보이는 명백한 우상은 버렸을런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기를 거절하고 그분을 멀리하는 마음이 그들을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겉보기에 번지르르한 왕을 찾는 그들의 행동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이 땅에서 경험하는 영적인 부흥이라는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며, 죄인은 끊임없이 핑계를 대면서 하나님을 멀리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말은 그럴 듯 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사무엘이 늙었습니다 큰일입니다, 지금 사무엘의 아들들이 타락했습니다 큰일입니다, 온 나라가 너무나 걱정이 됩니다 라고 청산유수처럼 말하면서, 정작 하나님을 멀리하고자하는 자신의 탐욕을 은근 슬쩍 들이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인간의 타락한 마음과 이중성을, 오늘의 말씀을 통해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번 상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사무엘을 찾아갔던 장로들이 집으로 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 속으로 크게 기뻐했을 것입니다. 드디어 자신들도 왕을 가지게 되었다고, 그리고 더 나아가서 더 이상 하나님께 얽매일 필요 없다고 자신들의 뜻이 이루어졌다고 매우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이들의 운명은 소용돌이 속으로 빠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앞으로 많은 왕들이 세워질 것인데 그들 중에 정말 백성을 아끼고 위하는 왕은 거의 없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사무엘의 경고처럼 백성을 자신을 위하여 부려먹고 사용하는 왕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이것을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경우에는 아주 강권적으로 우리의 삶의 앞길을 인도하시지만,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우리의 자유로운 의지와 선택을 사용하십니다. 놀랍게도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인생이 술술 풀리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크게 축복하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 하십니까? 시편 106편 15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5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그들에게 주셨을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쇠약하게 하셨도다” 라고 말씀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뜻대로 다 이루어졌다고 그것 자체만 가지고 기뻐할 것이 아니라, 정말 내 영혼의 갈망과 삶의 선택들이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것인지를 말씀에 비추어 깊이 고민하고 그것을 위하여 힘써 노력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오늘 말씀 속에서 크게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갈망하게 합니까? 진정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놀라운 사랑과 다스림과 그 가치를 갈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착각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하나님이 계획하셨던 왕의 모습과 그들이 주장하던 다른 나라의 왕과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왕은 본질적으로 백성의 것을 가져가고, 인간의 왕은 그 백성을 궁극적으로 책임져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왕이신 자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 아들의 죽음을 통하여 죄인을 구원하시며, 그 아들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고, 그 아들을 통하여 완전한 다스림을 받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 말씀 안에서, 인간 역사상 그 누구도 이룬 적 없는 가장 완벽한 왕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와 영광 중에 거하시며 모든 것을 다 가지신 분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영광스러운 자리를 포기하시고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삶 전체와 피 한방울 아끼지 않으시고 죄인을 대신하여서 다 쏟아 부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진정한 왕이 되신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빌립보서 2장 10절과 11절입니다.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도는 누구이며 교회는 무엇입니까? 죽으시고 부활하신 진정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충성을 맹세하며 무릎을 꿇는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 12장 26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의 요구는 분명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공허한 말이 아니라, 실제로 왕이신 주님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라가며 그분을 섬기는 자를 주님께서 귀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명예롭게 여기시며 존중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왜 감히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며 그분을 따르겠습니까? 그것은 세상의 다른 왕과 전혀 다르게 친히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분만이 진정한 왕으로 자신을 증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분만이 한 없는 사랑으로 참된 샘명의 길로 우리를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기는 오늘도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이 새로워지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어떤 위치에 있든지, 오직 우리가 섬길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시라는 것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을 유혹하고 침범하는 우상을 다시 한번 물리치고, 진정한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그분을 섬기며 그분과 힘써 동행하시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에 말씀을 놓고 기도하실 때에 이렇게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저의 입술과 저의 마음을 정결하게 하셔서 거짓과 기만을 버리게 하여주시옵소서. 여호와를 멀리하려는 온갖 그럴듯한 변명을 버리게 하시고 저의 마음 속에 있는 악한 것들을 돌이켜서 오직 왕 되신 주님 앞에 나오게 하여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둘째로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 하나님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을 따라가기를 원합니다. 나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이미 희생하시며 아낌없이 사랑을 부어주신 주님을 기억하며 다시 한번 그 은혜의 깊이를 회복하며 주님 앞에 제 자신을 내어 놓기를 원합니다. 적극적으로 주님의 다스림을 받는 복된 성도 복된 교회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 "설교문" 전체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11/blog-post_4.html
1. 가사 살펴보기
Happy
birthday, Jesus
I'm so glad it's Christmas
All the tinsel and lights
And the presents are nice
But the real gift is You
Happy
birthday, Jesus
I'm so glad it's Christmas
All the carols and bells
Make the holiday swell
And it's all about You
Happy
birthday, Jesus
Jesus I love You
예수님 생일을 축하합니다
저는 크리스마스라 너무 기뻐요
크리스마스 장식에 반짝이는 것들과 불빛들이 좋아요
하지만 진정한 선물은 예수님 당신입니다
예수님 생일을 축하드립니다
저는 크리스마스라 너무 기뻐요
모든 캐롤과 종소리는
이 날을 풍성하게 만들지만
이것들은 모두 당신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 생일을 축하드려요
예수님 사랑해요
2. 곡 소개
이 곡은, The Brooklyn Tabernacle Choir의 크리스마스 앨범에 수록된 곡이다. 이 곡은 아주 심플한 가사 속에서,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하는 성경적인 찬양곡이다.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은, 다른 누구나 어떤 것이 아니라 오직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인정하며, 그 예수님께 사랑을 고백하는 너무나 아름다운 곡이다.
3. 말씀으로 바라보기
마태복음 2:9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2:9 After they had heard the
king, they went on their way, and the star they had seen in the east went ahead
of them until it stopped over the place where the child was. 2:10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2:10 When they saw the star,
they were overjoyed. 2: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개역개정) 2:11 On coming to the house,
they saw the child with his mother Mary, and they bowed down and worshiped him.
Then they opened their treasures and presented him with gifts of gold and of
incense and of myrrh. (NIV)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 헤롯과 온 예루살렘은 다윗 혈통의 왕의 소식을 듣고 근심했지만 박사들은 기뻐했습니다.
Joel R. Beeke, Michael P. V.
Barrett, and Gerald M. Bilkes, eds., The
Reformation Heritage KJV Study Bible (Grand Rapids, MI: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14), 1357.
동방 박사들이 도착했을 때 마리아와 요셉은 마구간이 아니라 집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동방 박사들이 드린 선물은 왕에게 어울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이 이러한 경배를 드린다는 것은, 구약의 예언이 이루어진다는 중요성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John F. MacArthur Jr., The
MacArthur Study Bible: New American Standard Bible. (Nashville,
TN: Thomas Nelson Publishers, 2006), 마 2:11.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 경배한 최초의 사람들은 이방인이었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유대인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을 위해서 오셨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그 아이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지만, 베들레헴이 10마일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찾기 위해서 애쓰지 않았습니다. 예물로 드리니라 : 선물을 드리는 것은 충성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Lyman Coleman, ed., Life
Connections Study Bible (Nashville, TN: Holman Bibles, 2019), 1530.
4. 찬양에 대한 묵상
이 찬양은, 예수님이야 말로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탁월한 곡이다. 마치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주인공이 되는 것처럼 예수님은 누구보다 가장 중요한 분이시기 때문에 당연히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이 되신다.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탄생의 소식을 듣고 예수님과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되던 이방인 동방 박사들이 먼 길을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들은 인류의 진정한 왕, 인간 역사의 진정한 주인공이 누구인가를 알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기꺼이 예수님을 찾아와, 왕에게 합당한 예물을 바치며, 가장 크게 기뻐하며 그분을 경배했다.
크리스마스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기쁘고 즐거운 날이다. 그것 만으로도 참으로 행복하고 감사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주인공을 놓쳐버린다면, 순간의 즐거움을 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진짜 주인공, 진정한 왕이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께 경배하며 그분을 사랑하게 된다면,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그분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크리스마스는, 이 날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만나며, 그분을 사랑하게 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기도한다.
* 삶으로 드리는 찬양 전체 묵상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06/1_3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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