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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13일 토요일

책 어디까지 읽어봤니? (16) - 담임목사가 되기 전에 알아야 할 7가지 Part 2 / 설교는 예배의 중심이며,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

 

담임 목사가 되기 전에 알아야 하는 Part1, 교회가 쇠락해져가는 시대에 희망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현실을 충분히 감안하면서 작은 교회로서 살아남기 위한 여러가지 조언들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Part1을 통해서 저는 예배와 소그룹에 대해서 더 고민하게 되었고 그리고 더욱 적극적인 성도들과의 만남의 중요성을 생각하면서 미래를 좀 더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Part2는 설교에 대한 내용입니다. 무려 일곱 개의 짧은 글들이 있었지만, 저에게는 임경근 목사님이 쓰신 설교, 말씀의 봉사!”라는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먼저 가장 좋았던 부분을 인용하고 싶습니다.

설교는 언제나 교회 예배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1517 마틴 루터에 의해 시작된 종교개혁 전에는 설교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초대교회 시대에는 말씀이 중요했지만, 4세기가 지나면서 서서히 예배에 변화가 찾아왔다. 예배는 점차 형식적인 성례(주의: sacramentalism) 전락했다. 예배는 말씀의 비중이 약화되고 눈에 보이고 감각적으로 느낄 있는 형식으로 바뀌어 갔다.

평신도는 예배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말씀이 사라지자, 눈에 보이는 예배당 건물과 그림과 장식에 의존해야 했다. 웅장한 건물은 하늘의 영광이 땅에 내려온 듯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비치는 빛의 아름다움은 마치 천국에 듯한 착각을 주었다. 예배당 안에서는 하나님이 계실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압도할 만큼 높은 천장은 인간을 한없이 작게 만들고 겸손하게 했다. 예배당 이곳저곳에 수많은 성상이나 성화가 걸려 있기에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경건해지고 인격이 거룩해지는 같았다

16세기 종교 개혁가들은 예배에서 설교의 의미를 중심에 놓고 중요하게 여겼다. ‘느끼는 예배에서말하는 예배 개혁했다. ‘보는 예배에서듣는 예배 개혁했다. 종교 개혁 교회는 성찬이 이루어지는 성찬대보다도 설교단을 높게 놓았다. 예배의 중심이 말씀이어야 한다는 것을 건물에 표현한 것이다. 교회 건물에서 성상과 성화를 가능한 없앴다. 건물은 아주 단순하게 설교에 집중할 있도록 지었다. 종교 개혁 교회는 설교단이 제일 높은 곳에 있다.

임경근, 설교, 말씀의 봉사!,” in 담임목사가 되기 전에 알아야 7가지, 초판. (서울시 마포구 양화로 78, 502: 세움북스, 2016), 66.

제가 부분을 인용한 것은, “설교의 변화에 대한 역사적인 인식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초대 교회 시절에 그렇게 중요하게 여겼던 말씀이, 중세 시대로 넘어오면서 점점 형식적인 성례로 바뀌었다고 지적합니다

말씀의 비중은 점점 줄어들고 눈에 보이는 어떤 종교적인 화려함이 말씀을 대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성도들을 무지하게 만들고, 결국 그들이 교회의 잘못된 가르침으로부터 벗어날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종교 개혁가들이 설교를 예배의 중심에 다시 가져다 놓은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런데 제가 우려하는 것은, 요즘 시대의 사람들이 생각할 때에 설교라는 자체가 매우 고리타분하고 재미 없는 것이라 여기면서 그것의 비중을 줄여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듣는 자체를 터부시하며, 마치 교회의 개혁이라는 것이 예배 중에 설교를 최대한 줄이면서 동시에 뭔가 간증이나 소그룹 모임으로 대체하려고 하는 것이 바른 방향인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혹은 예배의 개혁이, 찬양을 늘리고 설교를 줄이는 것이라고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도들이 설교에 대하여 마음에 어려움을 가지는 것을 이해합니다. 성도들은 설교를 통해서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보다는, 목회자의 주관 혹은 경험이 가득 들어간 어떤 것으로 너무 많이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읽고서도, 본문의 이야기는 하지 않고 다른 이야기로 시간을 가득 채운다면, 제가 예배의 자리에 성도로서 앉아 있게 된다고 해도 굉장히 마음이 힘들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설교를 줄이거나 없애는 것이 초대 교회로 돌아가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만약 현시대의 설교가 가장 교회적인 문제가 된다면, 오히려 제대로 설교할 있는 목회자를 키워야 하고 또한 좋은 설교가 무엇인가에 대한 교회적인 공감대를 만들어내는 것이 진정한 해결의 방향입니다. 그토록 어두운 중세 시대를 지나서 종교 개혁 시대에 다시 복귀 시켜 놓은 말씀의 권위는, 시대에도 지역 교회 목회자들의 뼈를 깎는 수고를 통하여 유지되며 강화되어야 합니다.

하나 글에서 좋았던 부분은, 설교는 선포하는 이라는 정의입니다. 저자는 누가복음 24 46-48, 사도행전 2 38, 그리고 로마서 10 14-15절의 주해를 통해서, 설교는 선포하는 것임을 설득적으로 논증합니다. 그리고 한글 성경은 선포가 전파로 많이 번역되어서 아쉽다고 말합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성경의 설교는 설득이라기 보다는 선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사전적인 의미 역시, 선포의 의미를 드러냅니다.

누가복음 24: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개역개정) 47 and repentance for the forgiveness of sins would be proclaimed in his name to all nations, beginning from Jerusalem. (NET)

33.256 κηρύσσωc: to publicly announce religious truths and principles while urging acceptance and compliance—‘to preach.’ πῶς δὲ ἀκούσωσιν χωρὶς κηρύσσοντος; ‘how can they hear if there is no one to preach?’ Ro 10:14

Johannes P. Louw and Eugene Albert Nid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Based on Semantic Domains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1996), 416.

2784. κηρύσσω kērússō; fut. kērúxō. To preach, to herald, proclaim.

(I) Generally, to proclaim, announce publicly (Matt. 10:27; Luke 12:3; Acts 10:42; Rev. 5:2; Sept.: Ex. 32:5; Esth. 6:9, 11; Joel 2:1). In the sense of to publish abroad, announce publicly (Mark 1:45; 5:20; 7:36; Luke 8:39).

(II) Especially to preach, publish, or announce religious truth, the gospel with its attendant privileges and obligations, the gospel dispensation.

Spiros Zodhiates, The Complete Word Study Dictionary: New Testament (Chattanooga, TN: AMG Publishers, 2000).

저자는 현대 교회의 문제점으로, 설교를 설득혹은 나눔정도로 이해하려 한다고 지적합니다. 역시 부분에 있어서 동의합니다. 저는 부분은 결국 설교자가 가장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선포를 하기 위해서는, 설교자 자신이 먼저 말씀에 대한 엄청난 확신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정작 이러한 확신을 자기 자신 안에서부터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충분하고 넘치는 말씀에 대한 묵상과 이해와 스스로에 대한 적용이 필요합니다. 본문의 주해로부터 시작되어서 결과물로 나온 설교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이건 양보 없다라는 그런 확신까지 가야 합니다. 그런데 부분이 결국 부족하기 때문에, 설교가 확신에 선포로 설교로 나오기 어려운 것입니다.

물론 저는 설교에 설득이라는 과정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비록 형상이 죄로 인해서 망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죄인은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고 자신의 삶의 방향을 정할 있는 일반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저는 설교 중에 설득의 과정도 분명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에 이해되지 않으면 전혀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어떤 부분에서는 복음을 설명하고 충분히 그들의 일반적인 이성을 향하여 설득하는 과정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설득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설교자의 태도입니다. 저는, 설교자가 청중을 설득하는 것을 설교의 최종적인 목표로 삼고 자신도 모르게 비굴해지는 것을 너무나 슬프게 바라봅니다. 설득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나, 설득 자체는 결코 설교의 최종 목표가 없습니다. 마치 당신이 이것을 이해하거나 용납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복음이 뭔가 부족한 것이다 라는 식의 설교자의 태도는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설교자는 당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신이며, 진리를 가진 자이기 때문입니다. 설교자가 선포하며 동시에 설득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청중이 설득되지 않는다고 해서 낙심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반응하지 않는다고 해도 설교자가 주눅들 필요도 전혀 없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당당하게 선포하고 당당하게 설득하여야 합니다. 진리는 여전히 진리이며, 어리석은 죄인이 진리를 버리고 밟는 일은 교회 역사 가운데 수도 없이 일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Part2 읽으면서, 설교의 중요성에 대해서 다시 한번 절감했습니다. 너무나 어두웠던 중세를 벗어나서, 종교 개혁자들이 자신의 생명을 걸고 다시 회복시킨 설교의 자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는 모든 수고는, 결코 물러설 없는 가장 위대한 것임을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설교야 말로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며, 앞으로 저의 모든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모든 진리가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아름답게 선포 되기를 원합니다.

* "책 어디까지 읽어봤니?" 전체 글 모음 / 당신을 변화시키기 위한 "가장 아름다운 길"
https://jungjinbu.blogspot.com/2023/03/blog-post_6.html

2022년 7월 29일 금요일

책 어디까지 읽어봤니? (13) - 담임목사가 되기 전에 알아야 할 7가지 Part 1 / 교회 쇠퇴의 시대를 걸어간다는 것

 


기독교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 중 하나는, "경험주의" 입니다. 내가 이렇게 경험해 보았더니 그랬더라" 라고 말하며 그것을 절대화 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편협한 경험이 앞서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 치명적인 오류를 불러 일으킵니다. 자신의 경험과 맞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는데 까지 나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기독교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경험" 입니다. 사랑은, 논리일 뿐 아니라 경험입니다. 다른 사람의 어려운 처지를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그 사람의 아픔을 진심으로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면에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가장 숭고한 경험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어떤 고난을 통과한 사람만이, 기독교의 진리를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런면에서 기독교는 진정으로 경험의 종교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이 책은 담임 목회를 준비하는 사람을 위한 책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신앙적인 깊이가 있는 성도님을 위한 책이기도 합니다. 결국 개교회에서 담임 목사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담임 목사에게 필요한 내용들을 읽어보는 것은 결국 교회를 위하여 필요한 내용을 읽어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전체가 7 part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저는 사실 이 책을 그렇게 처음부터 좋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왠지 제목만 보면서 상투적인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좋다고 느꼈습니다. 역사에 기록될 천재들의 책이 아니라면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면에서 모든 책에서는 배울 수 있는 것을 배우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담임 목사라는 말을 들으면 저는 마음이 암담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많은 분들이 어렵게 사역하시고 계시고 저도 그 대열에 머지 않아 동참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교회의 대부분은 작은 교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작은 교회에서 사역해 보면, 큰 교회와 비교할 수 없는 너무나 열악한 목회 환경이라는 것을 드디어 알게 됩니다. 목회는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작은 교회에서 사역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모든 것이 부족한 상황 속에서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심리적인 그리고 경제적인 어려움을 이겨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작은 교회의 목회의 처지에 들어가보지 않았다면, 함부로 그들의 어려움을 말할 수 없습니다.

다행히 이 책의 Part1에서는, 이러한 목회 현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말 그대로 "쇠퇴의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인정하는 글의 서두들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우리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와 능력을 인정하기 때문에 한 없이 낙천적이어야 하지만, 그러나 동시에 현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지금의 인플레이션으로 인해서 모든 경제적인 상황이 급격히 맞물려 변하는 것 처럼,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낙관주의는 결국 절망을 불러올 뿐입니다. 

몇가지 글에서 살펴보면, Part1에서 제안하는 교회 쇠퇴의 시대에 제안은 이렇습니다. 교회는 과거에 행해오던 모든 프로그램의 관습을 벗어나서, 현실적으로 시대상에 맞는 부분으로 변화해야 합니다. 기도회, 선교회, 주일 학교 등등의 모든 것을 대형교회를 모방하는 것을 벗어나서 작은 교회에 맞는 것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례와 교리 교육을 강조해야 합니다. 대형 교회가 쉽게 하기 어려운 성례의 부분을 강조함으로써 예배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특별히 청년들을 염두에 둘 때에 쉽고 그들에게 익숙한 인스턴트식 신앙 교육이 아니라 깊이 있고 꾸준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역설합니다. 그리고 목사가 쇠퇴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교회는 쇠퇴할 수 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목회자는 끊임없이 발전하고 성장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제가 흥미롭게 본 것은, 작은 교회가 무조건 강점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조언입니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 처럼, 대형 교회는 군중 속의 고독을 경험하기 때문에 작은 교회를 찾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조언합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자신이 드러나는 것을 더욱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작은 교회일수록 오히려 더욱 새로운 사람들에게 집중하고 관계를 잘 쌓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작은 교회에 걸 맞는 수준의 것을 시도하라 라고 말합니다. 만약 무작정 대형 교회와 같은 내용과 형식 혹은 규모를 추구하다보면, 그것이 오히려 우스운 모습일 것이라고 냉정하게 조언합니다. 오히려 대단한 교육 부서를 만들 수 없다면, 전 세대 예배에 집중하고 교제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말합니다. 

특별히 마지막 부분은 청년들을 염두에 둔 챕터입니다. 말씀과 성례와 신앙 고백에 충실한 사역, 세대와 세대가 서로가 경청하며 소통하는 사역, 그리고 인내함으로 사역해야 한다고 저자의 사역의 경험에 바탕하여 설명합니다. 

저는 작은 교회를 꿈꿉니다. 글쎄요, 작은 교회가 어느 정도의 규모를 말하는 것일까요? 한가지 확실한 것은, 작은 교회는 결국 현실의 수준에 맞는 것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화려한 영상과 음향을 꿈꾸기는 힘듭니다. 모든 것은 비용이 들어갑니다. 그러나 제가 할 수 있는 부분에서는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깊이 있는 예배, 경험적인 예배, 말씀을 깨닫고 함께 깊이 기도할 수 있는 예배, 공동체성을 누릴 수 있는 성찬과 세례입니다. 목회자로서 저의 꿈입니다.

제가 사역하면서 느끼는 것은, 교회의 에너지를 한 곳으로 모으는 것은 쉽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에너지가 한 곳에 모이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목회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기존에 운영되던 어떤 모임과 형식이 있으면, 그것을 백업하는데에만 실질적으로 많은 에너지를 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목회자의 모든 에너지를 예배와 설교와 찬양에 오롯이 집중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저의 예배에 대한 철학은, 일단 예배가 시작되면 숨도 못쉴 만큼의 긴장감과 영적인 어떤 놀라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영적으로 숨이 막혀야 합니다. 결국 평소에 경험하지 못하는 그 어떤 것을 주일 예배 가운데 경험해야만 그 작은 교회에 나오고 싶은 마음이 들 것입니다. 

온 세대가 함께하는 예배 가운데 쉬운 찬양을 손을 잡고 부르면 어떨까요? 부모가 자녀의 머리에 손을 얹고 통성으로 기도해주면 어떨까요? 자녀를 함께 끌어안고 기도해주면 어떨까요? 성찬을 둥글게 서서 할 수는 없을까요? 꼭 찬송가만 불러야 할까요? 단순히 찬송가가 아니라, 아주 부드러운 건반과 패드 사운드를 가지고 친숙한 ccm을 부르면 어떨까요? 담임 목사만 성경 구절을 읽을 것이 아니라, 온 성도가 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성경 구절을 합독할 수는 없을까요?

그리고 모든 에너지를 활발한 소그룹 모임에 집중하면 어떻게 될까요? 저는 담임 목회를 생각하면서 한주에 최소 네 번 이상의 소그룹을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현장도 좋고 줌도 좋습니다. 낮도 좋고 밤도 좋습니다. 만약 작은 교회라면 담임 목사가 온 성도를 모두 함께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결국 주도적인 목회의 우선 순위의 조절이 필요합니다. 경험상 최소 열번 이상 소그룹 안에서 만나면 그 사람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해서 알고 인격적인 관계가 있어야 어떤 일을 이루어 나갈 수 있습니다. 사실 일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도의 존재 그 자체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기존의 모든 틀을 다시 점검하고 작은 교회에 걸맞는 틀을 찾아내야만 할 것입니다.

결국 제가 직접 성도를 만나고, 그들과 대화하고, 그들의 신앙과 교감해야만 그것이 목회를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작은 교회 목회는 결국 소그룹이 전부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그 소그룹을 준비하기 위한 북클럽과 모든 컨텐츠를 만들고 공유하기 위해서 저의 시간을 사용하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제 마음 안에 깊이에는, 교회 쇠퇴의 시대를 걸어간다는 현실이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저도 모르게 두려움이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역사속의 교회가 항상 그러했던 것 처럼 교회의 주인 되신 주님께서 모든 것을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왕 되신 주님을 의지하여, 교회 쇠퇴의 시대를 오늘도 담대하게 걸어가기를 원합니다.

* "책 어디까지 읽어봤니?" 전체 글 모음 / 당신을 변화시키기 위한 "가장 아름다운 길"
https://jungjinbu.blogspot.com/2023/03/blog-post_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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