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다스림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다스림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24년 9월 1일 일요일

삶으로 드리는 찬양 (191) - 다시 밤이 없겠고

 


1. 가사 살펴보기

오늘 우리 삶에 주의 일 행하시네
실수가 없으신 완벽한 일하심으로
마침내 그 날에 주 약속 이루시네
천지를 지으신 온전한 그 말씀으로 

다시 밤이 없겠고 햇빛도 쓸데 없으리
하나님이 우리의 영원한 빛 되시네
다시 눈물 없겠고 슬픔과 고통 없으리
하나님과 우리가 영원히 함께 사네

 

2. 곡 소개

곡은, 2023년도에 발매된 잔치공동체 정규 앨범에 수록된 곡이다. 현실의 고난 가운데에서도 실수 없이 일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을 고백하며, 미래에 반드시 완성될 행복의 극치인 하나님의 나라를 함께  소망하는 너무나 아름다운 곡이다.

 

3. 말씀으로 바라보기

요한계시록 21: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21:3 And I heard a loud voice from the throne saying, “Look! God’s dwelling place is now among the people, and he will dwell with them. They will be his people, and God himself will be with them and be their God.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4 ‘He will wipe every tear from their eyes. There will be no more death’ or mourning or crying or pain, for the old order of things has passed away.”

하나님께서 모든 슬픔과 근심을 멸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음을 이기셨기 때문이며 계시록 20 14절에서 죽음은 근절되었습니다. 육체적인 죽음과 괴로움은 타락과 죄가 인간에게 들어온 것으로 인해 초래된 것입니다.

John D. Barry et al., Faithlife Study Bible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12, 2016), Re 21:4.

 

요한계시록 22: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22:3 No longer will there be any curse. The throne of God and of the Lamb will be in the city, and his servants will serve him. 22: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22:4 They will see his face, and his name will be on their foreheads. 22: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개역개정) 22:5 There will be no more night. They will not need the light of a lamp or the light of the sun, for the Lord God will give them light. And they will reign for ever and ever. (NIV)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마지막 묘사는, 타락 전 에덴 동산의 아름다움과 선함으로 회복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담과 하와가 동산에서 지은 죄는 저주를 가져왔지만, 하나님은 모든 창조물과 그의 백성을 구속하셨기 때문에 다시는 죄나 저주가 없을 것입니다.

Alan S. Bandy, “Revelation,” in The NIV Grace and Truth Study Bible, ed. R. Albert Mohler Jr. (Grand Rapids, MI: Zondervan, 2021), 1802.

밤이 없을 것이라는 말씀은, 이상 악과 어두움 심지어 시간조차 존재하지 않을 것임을 나타냅니다. 도시의 사람들에게는 등불이나 태양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빛을 비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전체 결과가 22 5절에 들어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구속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영원토록 통치할 것입니다

Bruce Barton et al., Life Application New Testament Commentary (Wheaton, IL: Tyndale, 2001), 1272.

 

4. 찬양에 대한 묵상

이 찬양은, 이 땅의 고난 속에서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강력한 소망을 담은 곡이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약속대로 반드시 주님의 완성된 나라를 이루실 것이다. 그곳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와 전혀 다른 곳인데, 더 이상 그 어떤 죄나 죽음이나 고통과 눈물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완전한 임재 속에 거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조차 뛰어 넘는 아름다움의 극치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혹시 이루어질지도 모르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반드시 이루어질 말씀의 약속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반드시 완성될 주님의 나라야 말로 우리에게 가장 강력한 위로가 되며 삶의 동기가 되며, 평생을 포기하지 않고 주님을 위해 살아갈 수 있는 이유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찬양을 부를 때마다, 놀라운 권능으로 우리의 삶을 온전히 이끌어 가시는 주님 안에서, 깊은 위로를 경험하기를 원한다. 또한 영원한 행복을 마음에 깊이 품고,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약속을 이루실 주님을 위하여 살아가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기대한다.

삶으로 드리는 찬양 전체 묵상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06/1_30.html  

2023년 8월 7일 월요일

제자 훈련, 기독교의 생존 방식 3장, 느낀 점

 

* 느낀 점

김형국 목사님의 학문적인 수준은 이미 세계적인 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3장에서 구약의 처음부터 신약까지 연결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개념은, 매우 섬세하면서도 탁월하다. 

그분의 설명처럼 "천국"이라는 번역은 매우 아쉬운 부분이며 나 역시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한다. 사실상 예수님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나라"에 다 들어 있다. 나라라는 개념 자체가 다스림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라는 단어만 집중해도 사실상 기독교의 중요한 진리를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천국"이라는 표현은 너무나 많은 것을 상실하게 만든다. 막연한 혹은 멀리 떨어져 있는, 나와 상관이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상관이 없는 그런 희미하고 추상적인 것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변질시켰다. 

김형국 목사님의 글을 처음 접할 때에는, 마치 하나님 나라 복음과 십자가 복음을 대립적으로 설명하는 것처럼 이해하였다. 그러나 이번 3장에서 가장 좋았던 점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나라 라는 주제 "위에" 십자가의 복음이 있다 라는 설명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목적이고, 그것을 이루시고자 하는 가장 결정적인 방법이 십자가이다. 이 두가지 중 어떤 것도 희생하지 않고 녹여낸 탁월한 설명이다. 

신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설명도 좋았지만, 사실 창세기로 부터 등장하는 왕이신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더 좋았다. 나 역시 설교 가운데 창세기를 자주 인용한다. 보통의 접근처럼 아무런 배경 설명도 없이 막연하게 예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라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오직 왕이신 하나님의 창조와 그것과 선명하게 대조되는 인간의 패역과 반역을 설명하는 것을 통해서, 결국 예수님께서 회복시키시는 분명한 목적,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그분의 나라가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어떤 대가라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설명이 좋았다. 그리고 이것은 상식이며 헌신이 아니라는 표현이 좋았다. 혹시라도 가능하다면, "이것이야 말로 가장 탁월한 지혜"라고 덧붙이고 싶다. 하나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는 것, 그분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야 말로 가장 지혜로운 선택이다. 요즘의 표현으로 치면 "가치 투자"이다. 

사실 기독교 세계관이 추구하는 목표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추구하는 목표는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것이며,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 세계관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나에게 하나님의 나라 복음은 전혀 낯설지 않다.

결국 김형국 목사님이 추구하는 것은, "성경적인 복음" 이다. 본인의 설명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잃어버리면 그저 개인주의 영성에 치우칠 뿐이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없는 사회 참여만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번 3장에서는, 성경이 진정으로 강조하는 핵심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그리고 복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풍성한 것이며 우리의 삶 전체를 아우르는 것임을 생각하였다. 목회적으로는 모든 설교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분에 대한 사랑의 강조", 또한 "그것과 더불어 그분의 다스림을 받는" 이 두가지가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다. 

예를 들어서 박영선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보면,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책임이 아주 공교하게 엮어들어가 있는 것을 발견한다. 어쩌면 마치 모순되어 보이는 두가지가 함께 있는 것처럼 보여서 한동안 곤란하게 느껴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그리스도의 한 없는 은혜와 그 은혜 가운데 그분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야 하는 그 책임은 반드시 동시에 존재해야 하며, 평생의 우리의 삶의 목표로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을 이번 챕터를 통해서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 "내가 생각하는 하나복", 그리고 미래 목회 - 하나복 관련 글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3/08/blog-post.html

2022년 11월 25일 금요일

옳은 길을 가는 성도 그리고 참된 복음 / 다니엘 11장 36절 - 12장 4절 새벽 설교

 

미국은 추수 감사 주일을 지났습니다. 가족과 함께,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하나님께 감사하며 좋은 시간을 보내는 날입니다. 비록 새벽 설교이지만 설교 준비는 거의 한주 전에 시작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꼭 가야하는 식사 초대로 인해서 원고로 작성하는 것이 시간이 빠듯했습니다.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껴지면 항상 선택을 해야 합니다. 적당한 수준에서 그칠 것인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정성으로 준비할 것인가? 지나친 이상주의자인 저는 거의 후자를 택합니다. 잠은 줄이면 되지만, 설교의 기회는 너무나 소중한 것이며 큰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설교 원고를 쓰고 다시 그것을 읽으면서 연습하다 보면, 이정도 하면 됐다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 정도 생각이 들면 충분히 한 것입니다. 이번에도 그랬습니다. 얼마전에 팀캘러 목사님의 설교를 보니 손을 아기자기하게 쓰시는 것이 참 귀엽기도 하고 좋아보였습니다. 그래서 손을 이용한 좀 더 디테일한 포즈까지 준비를 했습니다.

아침에 차에 시동을 걸었더니 공기압이 낮다고 싸인이 들어왔습니다. 그 전날 전혀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아마도 날이 추워져서 그런 것이라 생각하고 출발했습니다. 새벽 설교가 훨씬 중요하기 때문에 약간 무리가 된다고 생각했지만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하이웨이를 달리는데 타이어가 이상한 느낌이 갑자기 들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10분 정도를 달리는데 전혀 문제가 없었는데 큰 문제가 생겼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갓길에 차를 세웠습니다. 아마도 무엇인가 날카로운 것에 찔린 것 같았습니다.

이번에 두번째 하이웨이에서 차를 세웠는데 여전히 무섭습니다. 급하게 보험 회사에 전화를 하고 40분을 통화한 끝에 road assistant 서비스 스케쥴을 잡았습니다. 한시간을 기다리라고 하더군요. 공교롭게도 같은 날 차의 배터리가 죽어 버렸습니다. 시동도 비상등도 들어오지 않는 침묵 속의 차 안에서 떨면서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연결이 되었다는 토잉 업체 기사가 연락이 왔습니다. 멀어서 갈 수가 없으니 다시 보험 회사에 전화해서 다른 회사를 찾으라고 하더군요. 목소리에는 귀찮아 하는 분위기가 역력했습니다. 시동은 걸리지 않고 마냥 기다리고 있는 저의 상황을 다 알고 있지만, 자기가 오지 않아도 법적인 책임이 없다고 판단한 것 같았습니다.

달리는 차들 옆에서 또 다른 토잉 업체를 기다리는데, 생명의 위협을 느꼈습니다. 만약에 정말 더 추운 겨울에 더 깊은 곳에서 문제가 생겼다면 실제로 그랬을 것입니다. 제 혼자 힘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한 사람의 책임감의 무게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번 설교는 평소 때와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고민했던 설교였습니다. 11장과 12장의 연결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묵상했습니다.

창조주이신 여호와께 순종하지 않는 것은, 죄라는 말로는 부족합니다. 그것은 부끄러운 것이고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 돌아오며 순종하며 회개하는 것은, “옳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옳은 회심이라는 것은, 11장까지 보여지던 적그리스도 혹은 악한 왕의 모습을 벗어 던지고, 참된 겸손과 돌이킴의 모습을 요구하는 것임을 설교를 통해서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시간이 있었다면,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들이 궁창의 빛, 별처럼 빛나게 한다는 것도 강조했을 것입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자기 자신을 통하여 죄인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하신 가장 빛나는 분이십니다. 꼭 이 부분을 넣고 싶었는데 일단 물러 섰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이해와 감격은, 다음 기회로 미루었습니다.

미래에 대한 예언이기 때문에, 본문 해석의 기술적인 부분들이 나뉜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렇게 중요하게 다루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적절한 수준에서 성도님들께 설명하고, 정말 강조하고 싶은 것을 드러내는 것이 설교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1:36 the king: Many ancient and modern interpreters have concluded that at this point a new person, the Antichrist, is introduced. This king is distinguished from the king of the North (v. 40); therefore he cannot be Antiochus Epiphanes.

11:37 The king of v. 36 will cast aside the God of his fathers, the worship of his ancestors. The desire of  women is usually taken to be either a female goddess or the desire of every Jewish woman to be the mother of the Messiah.

Earl D. Radmacher, Ronald Barclay Allen, and H. Wayne House, The Nelson Study Bible: New King James Version (Nashville: T. Nelson Publishers, 1997), 11:36–38.

36–45절은 안티오커스 4세의 새로운 통치 행적이나 적그리스도에 대한 기록이라기보다는 앞에서 기록했던 그의 악행과 통치를 강조하여 요약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물론 2차적으로 그의 행적은 적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이다.

김성수, 구약의 , 3 ed., 바이블 키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생명의 양식, 2017), 249.

특별히 무신론자이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를 이용하며 종교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는 악한 왕 혹은 적그리스도에 대한 아이디어는 아래 내용을 통해서 얻은 것입니다.

11:39 strange god. God of a foreign land. Although atheistic, he will use religion to his advantage to advance his cause.

Joel R. Beeke, Michael P. V. Barrett, and Gerald M. Bilkes, eds., The Reformation Heritage KJV Study Bible (Grand Rapids, MI: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14), 1222.

정말 정성으로 준비했는데, 설교하지 못해서 아쉬웠습니다. 사고가 나서 고생을 한 것 보다 설교를 못한 것이 더 속이 상했습니다. 그래도 그것 역시 하나님의 뜻임을 받아들였습니다. 한치 앞도 바라보지 못하는 인간이기 때문에, 더 겸손해야겠다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일을 보장할 수 없는 저는 그저, “옳은 것을 위하여 묵묵히 걸어갈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된다면, 저는 그저 그것만으로도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 다니엘 1136– 124절 설교

다니엘 11장은 실제로 존재했던 역사적인 내용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앞 부분에서는 헬라 제국의 알렉산더 대왕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의 죽음 이후에 나라가 나뉠 것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북방 왕조인 셀레우코스 왕조와 남방 왕조인 프톨레미 왕조 사이에 갈등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이어서 역사가 흘러서 21절 부터는, 비열하고 악한 왕이었던 안티오쿠스 4세의 역사적인 모습들을 계속 예언하시는 내용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5절에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이 될 때까지 그 왕의 악행이 계속 되리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인 36절 부터는 계속 등장하고 있는 안티오쿠스 4세의 악행을 다시 한번 요약하면서 동시에 마지막 때에 나타날 적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쉬운 성경은 36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북쪽 왕은 무엇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스스로를 높이고, 자기가 신보다 크다고 생각하여 아무도 들어 보지 못한 말로 신들의 하나님께 맞선다 그의 성공은 하나님의 진노가 끝나면서 함께 끝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왕은 안티오쿠스 4세 혹은 적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왕이라 불리는 대상이 가지고 있는 그 특징입니다. 이 악한 왕의 특징은 무엇인가? 완벽하게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높아지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 전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무시하며 모욕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바로 우주의 중심에 있기 때문에 자기보다 높은 여호와라는 존재는 절대로 인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에는 악이라는 것은 여호와의 다스림을 거절하는 것이며 여호와를 대적하는 것이며 그분 아래에 굴복하지 않는 바로 그것이 악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아주 흥미로운 것은, 성경은 이렇게 하늘 높은줄 모르고 방자하게 행하는 극악의 존재를 묘사하면서도 동시에 그에게도 ""이 존재한다는 것을 끊임 없이 성도들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앞에 35절 마지막 부분에도, “이는 아직 정한 기한이 남았음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36절 마지막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그 작정된 일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실 것임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악한 존재가 활개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 기간을 허락하셨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마지막 때가 아직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고 분명히 못을 박아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이미 살펴본 것처럼 이 왕은 여호와를 철저하게 무시하고 모욕하며 자신이 신과 같은 자리에 올라가기를 원하는 극도의 교만한 존재라고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 37절 말씀에 “스스로 크다” 하고 또 마지막에는 말씀하시기를 “어떤 신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앞에서부터 살펴본 것 처럼, 이 악한 왕 혹은 적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신과 같은 존재로 높이기 때문에 37절 말씀은 충분히 이 부분은 이해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38절과 39절을 읽어보면 마치 지금까지 내용과 반대되는 듯한 말씀을 읽게 되는 것입니다. 38절 말씀에는 “그 대신에 강한 신을 공경할 것이요 또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신에게 보물을 드려 공경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39절 말씀에는 “이방신을 힘입어서 산성들을 점령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무슨 의미인가? 이것은 쉽게 이야기해서, 내 구미에 맞는 신만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악한 왕의 태도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신이라는 단어의 그 의미가 무엇인가? 절대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신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악한 존재는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신을 이용해 먹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승리를 가져다 주고 힘을 줄 수 있다면, 그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그 신의 힘만 빌리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있지만 그리고 그에게 제사까지 열심히 드리는 것이지만, 사실상 나의 성공을 위해서 부려 먹는 대상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중요한 한가지는, 우리가 여호와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이런 태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악한 왕 혹은 적그리스도가 신이라는 이름을 절대로 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겉으로 보기에는 어쩌면 굉장히 종교적인 열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신을 믿고 공경한다고 말하며 실제로 보물을 바치면서 제사도 드린다는 것입니다.

마치 그런 것처럼, 교회에 다니는 신자들도 여호와라는 이름을 교묘하게 사용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예배도 잘 드리고 헌금도 잘드리고 흠 잡을 데가 없는 모습이고, 마치 자신이 하는 행동과 말과 모든 목적이 여호와를 위하여 하는 것이라고 겉으로 말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보면 어떠한가? 결국에는 자신의 성공과 자신의 명예와 자신의 부와 이름을 위해서 여호와라는 존재를 교묘하게 이용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여호와라는 이름을 자주 사용한다고 해서 겉으로 신실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 만으로는, 그 사람은 완전히 믿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사람이 정말 그 내면에 여호와에 대한 참된 신앙이 있는가 진실로 여호와의 이름과 그분의 명예를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인가 그것을 살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을 보니, 이렇게 자신이 신이 되려고 하며 자신이 우주의 중심에 서고자 하는 악한 왕 혹은 적그리스도는 결국에는 "그 끝"이 온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45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1:45 그가 장막 궁전을 바다와 영화롭고 거룩한 산 사이에 세울 것이나 그의 종말이 이르리니 도와 줄 자가 없으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장막 궁전을 거룩한 산 사이에 세운다 라는 것을 주석가들은 악한 왕이나 적그리스도가 예루살렘을 차지할 것이라고 그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주 노골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극도로 대항하며 그분을 모욕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놀랍게도 그렇게 위세를 떨치고 수 많은 악의 동맹을 가지고 있었던 악한 존재도, 더 이상 그를 도와줄 자가 없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오늘 말씀에서 반복되던 것처럼, 결국에 하나님의 때가 되어서 결국에는 그분의 정하신 그 마지막 때가 되면 반드시 악이 멸망하고야 마는 시점이 오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12 1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2:1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큰 군주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여기에 관련된 모든 내용을 다 알 수는 없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앞에서 이어지는 모든 악한 존재 적그리스도의 큰 악행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가장 확실하게 그분의 백성을 보호하신다 라는 것입니다.

성도가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받을 것도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들을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 세상의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바로 그 때에 "하나님의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는다 라고 분명히 말씀하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라는 것은, 요한계시록 13 8절에 말씀하시는 어린 양의 생명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3: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냥 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그 명단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친히 기록하신 책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지막 때가 반드시 올 것인데, 그 때에 과연 누가 구원을 얻는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께 속한 자를 기록한 책이 존재하는 것이며 바로 그 생명 책에 기록된 그 사람만이 반드시 구원을 얻을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다니엘 12 2절과 3절은 구약에서 육체적인 부활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말씀인 것입니다. 2절과 3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2:2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12: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저는 말씀을 묵상하면 깊이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이 본문을 그저 평범하게 읽어 나간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 목사님 알겠습니다 예수님 잘 믿으면 죽은 이후에 천국 간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잘 전하라 라는 말씀이지요?” 당연히 그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으면 부활하여 주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잘 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제 마음을 사로잡은 단어들이 있습니다. 2절에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이다 에서 "수치와 부끄러움" 이라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3절 말씀에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라는 말씀에서 "옳은데" 라는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이 말씀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영원한 천국에 가느냐 지옥에 가느냐 라는 것만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의롭고 선한 것이며, 그렇지 않은 것은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것임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옳은 데로 돌아오는 것 왜 이것이 새롭게 보였는가? 왜냐하면 지금 이 말씀이 주어진 문맥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한번 3절 말씀을 보시면 좋겠습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옳은데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지금 앞에서 부터 계속 다루고 있는 악한 왕과 적그리스도의 모습을 보면 그것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중심이 자신이 되고 마치 자신이 신이 되고자 하고 자신의 탐욕을 추구하고 만족하는 그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악이며 적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라는 것은, 이제 한 사람이 천국 갈 수 있게 되었다 라는 의미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지를 굴복시키고 자신이 높아지는 것을 쳐서 무너뜨리고 살아계신 여호와 앞에 겸손하며 그분의 다스림을 받는 진정한 그분의 백성으로 변하는 것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통하여서, 마치 안티오쿠스 4세와 같은 모습으로 악한 삶을 살던 사람이,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돌이키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주인이신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는 그 진정한 회심이 일어나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4 17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들어가는 그 하나님의 나라는, 진정으로 자신의 삶을 돌이키며 하나님의 의로운 다스림을 갈망해야 하는 것임을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소망을 가장 확고하게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15 20절에서 22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15:21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오늘 말씀에서 마지막 때를 경고하시며 부활에 대하여 소망을 주실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부활을 얻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신약의 말씀을 통해서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죽음을 넘어선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친히 자신을 믿으라고 말씀하셨고 자신을 통하여 그분을 믿는 자들도 동일하게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임을 확고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 가운데 분명히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분을 믿는 모든 자들도 고난과 어려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부활의 기쁨 가운데 바로 오늘을 소망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로마서 6 17절에서 18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6: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6:18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의미인가?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그 영생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우리의 마음과 삶의 태도를 어떻게 바꾸는지를 분명히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 안에 있다는 것은, 내가 믿었으니 천국에 들어간다 라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끄러운 과거를 벗어난 사람들이며, 옳은 방향으로 옳은 것을 향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과거의 모습이 본질적으로 죄의 종이 되어서 나 중심적으로 나 자신만을 위하여 살았다면, 이제는 여호와의 종이 되어서 그분께 전적으로 순종하며 그분의 다스림을 받는 그분의 자녀로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임을 우리에게 말씀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옳은 것이며 자랑스러운 것이며 명예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믿음을 가진 성도라면 마땅히 자기 자신을 끊임 없이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혹시라도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해서 나의 욕심을 취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혹시라도 내가 마음이 변질되어서 내가 살고 싶은대로 그대로 살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만 내세우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고 분명히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진정한 순종이 바른 것이고 옳은 것이며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바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이며, 하나님께서 그런 자들을 높이시며 영원히 빛나는 자들로 영광스러운 자리로 세워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기는,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새로워지기를 원합니다. 고난과 어려움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얻게 되는 부활에 대한 확고한 소망이 우리의 마음에 충만하기를 원합니다. 악을 행하는 이들은 그 위세와 전혀 상관 없이 반드시 그 끝을 맞이할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것임을 분명히 믿고 확신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또한 주님을 믿을 때에 그리고 주님을 다른 이들에게 전할 때에, 마땅히 나의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삶을 버리고, 의롭고 바른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서 나의 하루 하루의 삶을 주님 앞에서 변화시켜 나가시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함께 기도 하겠습니다. 먼저 기도하실 때에 이렇게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주님을 붙들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부활을 믿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생명책에 기록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와 그 기쁨과 소망 가운데 오늘 하루를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둘째로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참된 주님의 자녀로 백성으로 살아가기 원합니다. 저의 죄악과 이기심과 자기 중심성을 무너뜨리게 하시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최 우선으로 삼고 주님의 뜻을 따라서 주님께 순종하는 진실한 자녀로 살아가도록 오늘 하루도 새롭게 힘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성령의 충만함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 "설교문" 전체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11/blog-post_4.html

2022년 6월 10일 금요일

예배를 통해 변화되는 삶을 꿈꾸며 / 사무엘상 20장 24-42절 설교

 


수 많은 예배를 통해서 무엇을 경험해야 할까요?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추구해야 할까요? 언젠가 부터 예배가 우리를 위로해주는 어떤 위로의 수단으로만 전락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저 한주일에 한번 예배당에 나와서 마음을 위로 받는 것, 한번 마음에 찡하게 감동을 느끼고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가는 것, 그런 것이 예배가 된 것이 아닌가 라는 염려의 마음이 있습니다. 

초하루라는 중요한 예배의 날에, 사울은 여전히 자신의 탐욕과 살의로 가득차 있습니다. 어쩌면 사울은, 죄인의 전형적인 모습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이스라엘 왕으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지만, 그러나 그는 어떤 변화도 경험하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자로 남아 있습니다. 

단순히 설교자로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자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싶습니다. 다른 이에게 들으라고 하는 설교가 아니라, 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가 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제는 진정한 예배자로 살아가라고 부르시는 꾸중과 자비의 우렁찬 음성으로 이번 설교가 들렸습니다. 

* 사무엘상 20장 24-42절 설교

다윗이 도망하였던 라마나욧까지 사울이 찾아왔기 때문에, 다윗은 다시 도망을 하여서 요나단을 은밀히 찾아갔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죽음의 위기를 토로하였습니다. 다윗은 다시 한번 사울의 마음을 정확하게 확인하기 위해서 요나단에게 자신을 도와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만약에 왕실의 잔치에 다윗이 나가지 않았을 때에, 요나단이 허락해서 다윗이 가족에게 잠시 방문했다 라고 말했을 때에 사울이 이에 대해서 분노한다면, 다윗을 죽이려는 것이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20장 14절과 15절에 이렇게 요나단이 말합니다. “14 너는 내가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내게 베풀어서 나를 죽지 않게 할 뿐 아니라 15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 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함을 내 집에서 영원히 끊어 버리지 말라 하고”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의미인가? 요나단은 다윗을 사랑할 뿐 아니라, 정확하게 상황을 판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왕권을 이을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다윗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위로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집을 보호해 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자 이제 오늘의 스토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다윗은 계속 숨어 있었고 특별한 잔치가 시작되었습니다. 24절은 오늘의 스토리의 배경을 아주 간략하게, 하지만 무게감 있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들에 숨으니라 초하루가 되매”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24절에서 말하는 초하루라는 것은 유대인들의 절기를 의미하는데 매 달의 첫 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때는 무엇을 하는 날인가? 이 날은 안식일과 비슷하게 휴식을 취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특별한 희생 제사를 드리는 날이었습니다. 


민수기 28장에 그 내용이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수송아지와 양과 숫양으로 번제를 드리고, 그것과 함께 곡식도 함께 제사로 드리는 날입니다. 그리고 포도주를 제물 위에 부어드리는 전제도 드리는 날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추가하여서 속죄제를 여호와께 바치는 날입니다. 마치 우리에게 매달 첫 날이 굉장히 새롭게 다가오는 것 처럼, 초하루는 매달의 첫째 날이기 때문에 그 달 전체를 대표하는 날로서 중요성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나간 달을 지켜주신 것을 감사하면서, 또 새로운 한 달을 주님께 맡긴다 라는 의미로 나팔을 불어서 그 날을 선포하고 거룩한 날로 지켰습니다. 한마디로 초하루라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께 새롭게 헌신하며,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날이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초하루가 기쁨과 감사의 날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25절에는 이렇게 말씀하시지 “25 왕은 평시와 같이 벽 곁 자기 자리에 앉아 있고”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 작은 단서가 사울의 현재 심리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등 뒤에 벽을 두고 앉으면 어떻습니까? 자신의 뒤에서 누구도 자신을 공격할 수 없고, 모든 사람을 정면으로 볼 수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은 여호와를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앞으로 한달을 또 다시 지키실 주님을 기대하는 날이지만, 정작 지금 사울의 상태는 굉장히 불안하고 또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미 예상한 것처럼, 왕궁에 신하들이 모두 함께 해야 하는 중요한 잔치에 다윗이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첫날에 다윗이 안 보였을 때에는 혹시 개인적인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둘째 날에도 보이지 않자 요나단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때 요나단이 대답하기를, 다윗이 그에게 직접 부탁을 하셨는데 가족이 제사가 있어서 형의 명을 받고 가야된다 라고 했기 때문에 자신이 다윗을 보내었다 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어떻게 반응하였는가? 30절에 이렇게 소리치며 이야기했습니다. “30 사울이 요나단에게 화를 내며 그에게 이르되 패역무도한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 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굉장히 충격적인 장면입니다. 지금 이 자리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자리여야 했지만, 공포와 폭력과 저주가 휘몰아치는 자리가 되었다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울이 극도로 분노하면서 자신의 아들 요나단에게 욕을 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요나단의 속 마음을 꽤뚫어보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아들이 다윗을 선택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너무나 끔찍한 일이었고 너무나 수치스럽고 치욕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사실상 사울에게는 옳고 그름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의 친 아들이 자신이 원수처럼 여기는 다윗의 편에 섰다는 것 그것으로 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31절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31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사람을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 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이니라”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울의 이야기가 정말 놀라운 것이 무엇인가? 사울은 지금 심각하게 요나단에게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죽지 않는다면, 요나단과 요나단의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할 것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사울의 머리에 꽉 차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나라를 물려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나라이며 마땅히 자신의 아들이 물려 받아야하며, 그 누구도 감히 그 나라를 가져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하는 다윗은 죽여야 한다는 것이, 사울의 변함 없는 논리입니다. 사울은 요나단에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보내서 끌어 오라 다윗은 죽어야 한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단은 이렇게 심한 이야기를 듣고서도, 자신의 아버지에게 항변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다윗이 잘못한 것이 무엇인가라고 다윗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다윗을 변호한다기 보다는, 옳고 그름을 정확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잘못한 적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사울은 답변을 하지 않았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답변을 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답을 회피하는 대신에 자신의 아들에게 창을 던졌습니다. 


정말 놀라운 것은, 지금 요나단을 향한 창을 던진 그 행위 자체가 그냥 위협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정말 말 그대로 자신의 아들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사울이 요나단을 향해서 소리칠 때에는, 마치 언뜻 들으면 그가 요나단을 위하는 것 처럼 보였습니다. 이 어리석은 요나단아 아직 알지 못하느냐? 너와 너의 나라가 위태로운 것 아니냐? 라고 말하면서 마치 자신의 아들을 걱정하는 것 처럼 그렇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의 아들조차도 죽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인가? 사실 사울은 요나단과 그의 왕위를 걱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울의 머리 속에는 자기 자신 밖에 없다는 것이지. 다윗으로 인해서 자신의 나라가 빼앗길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요나단은 심히 노하였고 식탁에서 떠났습니다. 그리고 34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4 그 달의 둘째 날에는 먹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아버지가 다윗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다윗을 위하여 슬퍼함이었더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놀랍게도 요나단은 자신의 아버지가 창을 던진 것 보다 의로운 다윗이 모욕 당한 것을 더욱 큰 일로 여겼습니다. 선하고 잘못이 없는 다윗이 모욕당하는 것을 매우 슬퍼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장면이 바뀌고 있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만나기 위해서 들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화살을 멀리 쏘았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다는 신호입니다. 시종은 무기를 가지고 성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윗은 요나단과 만나서 요나단에게 세번 절했습니다. 그리고 서로 입맞추고 심하게 울었습니다. 자신의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려는 것이 확실했기 때문에, 요나단은 더 이상 다윗을 붙잡아 둘 수 없었습니다. 평안히 가라 라고 그에게 말하며 다시 한번 다윗에게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42절 말씀입니다.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라고 서로가 고백하였다는 것입니다. 둘 사이에 있는 그 약속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확인하면서, 두 사람은 헤어지면서 오늘 말씀이 마무리가 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참으로 안타깝게 여겨지는 것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초하루의 절기에 오늘의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정말 놀라운 것은 사울의 영적인 태도입니다. 여호와의 절기에 참여하고 그 절기의 음식을 먹고 모두 함께 모여서 그 절기를 지키고 있는 것 처럼 보였지만, 실상 사울은 단 한걸음도 그 예배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예배를 드리긴 했으나 그 예배를 드리는 동안 자신을 변화시키고 자신이 하나님께 엎드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이키는 역사는 전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왕으로서 절기의 음식을 먹고 절기의 자리를 베풀었지만, 그의 마음에는 여전히 분노와 질투와살인에 대한 마음이 가득해 있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울의 탐욕의 그 깊은 중심에는, 나의 나라 나의 왕국이라는 것이 들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겉으로는 아들을 염려하는 것처럼 말했지만, 실상 영원히 자신이 왕이 되고 싶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의 아들조차도 자신의 나라에 방해가 된다면, 얼마든지 창으로 죽이려는 잔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머리 속에서 그리고 그의 마음 안에서는, 무슨 짓을 해서든지 자신의 나라를 유지해야겠다라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 가득했다는 것입니다. 예배 가운데 들어가 있었지만, 자신의 욕망과 탐욕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는 악한 죄인의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중심이 되셔야 하는 예배인데, 자신의 탐욕이 중심이 되어서 그것을 놓지 못하는 너무나 죄악으로 가득찬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울과 대조되는 것이 요나단의 모습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실상 다윗은 요나단에게 있어서 더 큰 대적입니다. 그런데 정작 사울보다 더 라이벌 위치에 있던 요나단의 관심은, 자신의 나라 자체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 20장 42절에 말씀하십니다.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정말 놀라운 고백입니다. 사울의 관심은 온통 자기 자신과 자신의 나라를 유지하는 것, 그리고 방해가 되는 어떤 것이라도 없애는 것, 바로 거기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과 요나단은 어떠한가? 지금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이 참 아름다우니그 우정을 본 받자 라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들의 우정이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들의 모든 관심과 삶의 목적이 여호와의 이름이 그들과 함께하시는 것, 어떤 상황에서든지 여호와께서 그들 사이에 계시고, 그들의 삶을 다스리시고 여호와가 주인 되시는 참된 신앙과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진정한 우정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장 중요한 날조차도 전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악한 사울과, 죽음과 위기의 순간에서도 하나님 중심으로 마음을 모으며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두 청년의 모습을, 엄청난 대조의 모습을 통해서 보여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참된 예배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진지하게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예배라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빌립보서 2장 9절에서 11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배를 통해서 어떤 결과를 보아야하는가?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인 되심에 대한 깊은 인식입니다. 모든 무릎은 오직 예수의 이름에 꿇는 것이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주인이다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 참된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12장 1절에서,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아주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마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이 세대는 "사울의 세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머리 속에, 나의 성공 나의 행복 나의 목적 나의 왕국, 내가 이루고 싶은 일만 가득한 것이 바로 이 세대입니다. 그런데, 예배를 통해서 어떻게 마음이 새롭게 되어야하는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도대체 은혜 받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가 예배 가운데 경험하는, 어떤 짠한 감동적인 마음만이 우리의 궁극적인 예배의 목적은 아닐 것입니다. 진정한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이 없는 나 중심적인 죄인의 삶에서 벗어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원하신 그분의 은혜에 응답하며,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중심을 가득 차지하시는, 바로 그 마음으로 새롭게 변화되는 것이 바로 예배라는 것입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바로 이런 예배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예배 가운데 온전히 하나님께 나아가며, 하나님 앞에 우리의 모든 악한 것들을 돌이키며, 나 중심적이고 탐욕적인 삶에서 돌이켜서, 여호와께서 우리의 주인으로 온전히 역사하시는, 참된 예배와 복된 믿음의 삶을 누리시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함께 기도 하겠습니다. 


시간에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모든 것을 주님 앞에서 정직하게 발견하기 원합니다. 세상의 목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삶을 돌이키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복된 성도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둘째로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 하나님, 참된 예배자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모든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이 더욱 나의 중심이 되시고, 하나님의 뜻이 나의 뜻이 되는 성령의 역사가 있게 하시고, 그리스도 앞에서 무릎을 꿇게 되는 참된 예배자로 성숙해가는 성도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문" 전체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11/blog-post_4.html

추천 글

로고스 프로그램으로, 평신도 성경 공부하기 with 스터디 바이블 노트 Study Bible Notes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시 119:103) 누구나 성경을 열심히 읽으라는 말은 듣습니다. 그리고 성경이 꿀보다 달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 ...

리딩 크리스천 독서 묵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