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이 도망하였던 라마나욧까지 사울이 찾아왔기 때문에, 다윗은 다시 도망을 하여서 요나단을 은밀히 찾아갔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죽음의 위기를 토로하였습니다. 다윗은 다시 한번 사울의 마음을 정확하게 확인하기 위해서 요나단에게 자신을 도와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만약에 왕실의 잔치에 다윗이 나가지 않았을 때에, 요나단이 허락해서 다윗이 가족에게 잠시 방문했다 라고 말했을 때에 사울이 이에 대해서 분노한다면, 다윗을 죽이려는 것이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20장 14절과 15절에 이렇게 요나단이 말합니다. “14 너는 내가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내게 베풀어서 나를 죽지 않게 할 뿐 아니라 15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 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함을 내 집에서 영원히 끊어 버리지 말라 하고”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의미인가? 요나단은 다윗을 사랑할 뿐 아니라, 정확하게 상황을 판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왕권을 이을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다윗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위로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집을 보호해 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자 이제 오늘의 스토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다윗은 계속 숨어 있었고 특별한 잔치가 시작되었습니다. 24절은 오늘의 스토리의 배경을 아주 간략하게, 하지만 무게감 있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들에 숨으니라 초하루가 되매”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24절에서 말하는 초하루라는 것은 유대인들의 절기를 의미하는데 매 달의 첫 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때는 무엇을 하는 날인가? 이 날은 안식일과 비슷하게 휴식을 취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특별한 희생 제사를 드리는 날이었습니다.
민수기 28장에 그 내용이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수송아지와 양과 숫양으로 번제를 드리고, 그것과 함께 곡식도 함께 제사로 드리는 날입니다. 그리고 포도주를 제물 위에 부어드리는 전제도 드리는 날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추가하여서 속죄제를 여호와께 바치는 날입니다. 마치 우리에게 매달 첫 날이 굉장히 새롭게 다가오는 것 처럼, 초하루는 매달의 첫째 날이기 때문에 그 달 전체를 대표하는 날로서 중요성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나간 달을 지켜주신 것을 감사하면서, 또 새로운 한 달을 주님께 맡긴다 라는 의미로 나팔을 불어서 그 날을 선포하고 거룩한 날로 지켰습니다. 한마디로 초하루라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께 새롭게 헌신하며,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날이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초하루가 기쁨과 감사의 날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25절에는 이렇게 말씀하시지 “25 왕은 평시와 같이 벽 곁 자기 자리에 앉아 있고”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 작은 단서가 사울의 현재 심리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등 뒤에 벽을 두고 앉으면 어떻습니까? 자신의 뒤에서 누구도 자신을 공격할 수 없고, 모든 사람을 정면으로 볼 수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은 여호와를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앞으로 한달을 또 다시 지키실 주님을 기대하는 날이지만, 정작 지금 사울의 상태는 굉장히 불안하고 또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미 예상한 것처럼, 왕궁에 신하들이 모두 함께 해야 하는 중요한 잔치에 다윗이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첫날에 다윗이 안 보였을 때에는 혹시 개인적인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둘째 날에도 보이지 않자 요나단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때 요나단이 대답하기를, 다윗이 그에게 직접 부탁을 하셨는데 가족이 제사가 있어서 형의 명을 받고 가야된다 라고 했기 때문에 자신이 다윗을 보내었다 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어떻게 반응하였는가? 30절에 이렇게 소리치며 이야기했습니다. “30 사울이 요나단에게 화를 내며 그에게 이르되 패역무도한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 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굉장히 충격적인 장면입니다. 지금 이 자리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자리여야 했지만, 공포와 폭력과 저주가 휘몰아치는 자리가 되었다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울이 극도로 분노하면서 자신의 아들 요나단에게 욕을 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요나단의 속 마음을 꽤뚫어보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아들이 다윗을 선택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너무나 끔찍한 일이었고 너무나 수치스럽고 치욕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사실상 사울에게는 옳고 그름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의 친 아들이 자신이 원수처럼 여기는 다윗의 편에 섰다는 것 그것으로 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31절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31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사람을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 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이니라”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울의 이야기가 정말 놀라운 것이 무엇인가? 사울은 지금 심각하게 요나단에게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죽지 않는다면, 요나단과 요나단의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할 것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사울의 머리에 꽉 차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나라를 물려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나라이며 마땅히 자신의 아들이 물려 받아야하며, 그 누구도 감히 그 나라를 가져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하는 다윗은 죽여야 한다는 것이, 사울의 변함 없는 논리입니다. 사울은 요나단에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보내서 끌어 오라 다윗은 죽어야 한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단은 이렇게 심한 이야기를 듣고서도, 자신의 아버지에게 항변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다윗이 잘못한 것이 무엇인가라고 다윗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다윗을 변호한다기 보다는, 옳고 그름을 정확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잘못한 적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사울은 답변을 하지 않았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답변을 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답을 회피하는 대신에 자신의 아들에게 창을 던졌습니다.
정말 놀라운 것은, 지금 요나단을 향한 창을 던진 그 행위 자체가 그냥 위협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정말 말 그대로 자신의 아들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사울이 요나단을 향해서 소리칠 때에는, 마치 언뜻 들으면 그가 요나단을 위하는 것 처럼 보였습니다. 이 어리석은 요나단아 아직 알지 못하느냐? 너와 너의 나라가 위태로운 것 아니냐? 라고 말하면서 마치 자신의 아들을 걱정하는 것 처럼 그렇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의 아들조차도 죽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인가? 사실 사울은 요나단과 그의 왕위를 걱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울의 머리 속에는 자기 자신 밖에 없다는 것이지. 다윗으로 인해서 자신의 나라가 빼앗길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요나단은 심히 노하였고 식탁에서 떠났습니다. 그리고 34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4 그 달의 둘째 날에는 먹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아버지가 다윗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다윗을 위하여 슬퍼함이었더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놀랍게도 요나단은 자신의 아버지가 창을 던진 것 보다 의로운 다윗이 모욕 당한 것을 더욱 큰 일로 여겼습니다. 선하고 잘못이 없는 다윗이 모욕당하는 것을 매우 슬퍼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장면이 바뀌고 있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만나기 위해서 들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화살을 멀리 쏘았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다는 신호입니다. 시종은 무기를 가지고 성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윗은 요나단과 만나서 요나단에게 세번 절했습니다. 그리고 서로 입맞추고 심하게 울었습니다. 자신의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려는 것이 확실했기 때문에, 요나단은 더 이상 다윗을 붙잡아 둘 수 없었습니다. 평안히 가라 라고 그에게 말하며 다시 한번 다윗에게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42절 말씀입니다.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라고 서로가 고백하였다는 것입니다. 둘 사이에 있는 그 약속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확인하면서, 두 사람은 헤어지면서 오늘 말씀이 마무리가 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참으로 안타깝게 여겨지는 것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초하루의 절기에 오늘의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정말 놀라운 것은 사울의 영적인 태도입니다. 여호와의 절기에 참여하고 그 절기의 음식을 먹고 모두 함께 모여서 그 절기를 지키고 있는 것 처럼 보였지만, 실상 사울은 단 한걸음도 그 예배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예배를 드리긴 했으나 그 예배를 드리는 동안 자신을 변화시키고 자신이 하나님께 엎드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이키는 역사는 전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왕으로서 절기의 음식을 먹고 절기의 자리를 베풀었지만, 그의 마음에는 여전히 분노와 질투와살인에 대한 마음이 가득해 있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울의 탐욕의 그 깊은 중심에는, 나의 나라 나의 왕국이라는 것이 들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겉으로는 아들을 염려하는 것처럼 말했지만, 실상 영원히 자신이 왕이 되고 싶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의 아들조차도 자신의 나라에 방해가 된다면, 얼마든지 창으로 죽이려는 잔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머리 속에서 그리고 그의 마음 안에서는, 무슨 짓을 해서든지 자신의 나라를 유지해야겠다라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 가득했다는 것입니다. 예배 가운데 들어가 있었지만, 자신의 욕망과 탐욕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는 악한 죄인의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중심이 되셔야 하는 예배인데, 자신의 탐욕이 중심이 되어서 그것을 놓지 못하는 너무나 죄악으로 가득찬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울과 대조되는 것이 요나단의 모습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실상 다윗은 요나단에게 있어서 더 큰 대적입니다. 그런데 정작 사울보다 더 라이벌 위치에 있던 요나단의 관심은, 자신의 나라 자체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 20장 42절에 말씀하십니다.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정말 놀라운 고백입니다. 사울의 관심은 온통 자기 자신과 자신의 나라를 유지하는 것, 그리고 방해가 되는 어떤 것이라도 없애는 것, 바로 거기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과 요나단은 어떠한가? 지금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이 참 아름다우니그 우정을 본 받자 라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들의 우정이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들의 모든 관심과 삶의 목적이 여호와의 이름이 그들과 함께하시는 것, 어떤 상황에서든지 여호와께서 그들 사이에 계시고, 그들의 삶을 다스리시고 여호와가 주인 되시는 참된 신앙과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진정한 우정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장 중요한 날조차도 전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악한 사울과, 죽음과 위기의 순간에서도 하나님 중심으로 마음을 모으며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두 청년의 모습을, 엄청난 대조의 모습을 통해서 보여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참된 예배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진지하게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예배라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빌립보서 2장 9절에서 11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배를 통해서 어떤 결과를 보아야하는가?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인 되심에 대한 깊은 인식입니다. 모든 무릎은 오직 예수의 이름에 꿇는 것이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주인이다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 참된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12장 1절에서,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아주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마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이 세대는 "사울의 세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머리 속에, 나의 성공 나의 행복 나의 목적 나의 왕국, 내가 이루고 싶은 일만 가득한 것이 바로 이 세대입니다. 그런데, 예배를 통해서 어떻게 마음이 새롭게 되어야하는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도대체 은혜 받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가 예배 가운데 경험하는, 어떤 짠한 감동적인 마음만이 우리의 궁극적인 예배의 목적은 아닐 것입니다. 진정한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이 없는 나 중심적인 죄인의 삶에서 벗어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원하신 그분의 은혜에 응답하며,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중심을 가득 차지하시는, 바로 그 마음으로 새롭게 변화되는 것이 바로 예배라는 것입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바로 이런 예배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예배 가운데 온전히 하나님께 나아가며, 하나님 앞에 우리의 모든 악한 것들을 돌이키며, 나 중심적이고 탐욕적인 삶에서 돌이켜서, 여호와께서 우리의 주인으로 온전히 역사하시는, 참된 예배와 복된 믿음의 삶을 누리시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함께 기도 하겠습니다.
이 시간에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이 아니라 제 자신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모든 것을 주님 앞에서 정직하게 발견하기 원합니다. 세상의 목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삶을 돌이키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복된 성도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둘째로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 하나님, 참된 예배자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모든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이 더욱 나의 중심이 되시고, 하나님의 뜻이 나의 뜻이 되는 성령의 역사가 있게 하시고, 그리스도 앞에서 무릎을 꿇게 되는 참된 예배자로 성숙해가는 성도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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