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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3일 월요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다 / 사도행전 13장 42-52절 새벽 설교

 



* 설교 준비와 반응

제가 섬기는 교회는, 새벽 강단을 향한 성도님들의 마음이 특별합니다. 팬데믹 이후로 유투브를 통해서 예배를 드리시는 분이 많이 늘었습니다. 심지어 아침에 시간이 여의치 않아서 퇴근하시면서 영상으로 예배를 드리시는 분도 계십니다. 모든 설교가 중요하지만, 어쩌면 새벽 설교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왜냐하면 그 바쁜 중에, 더욱 시간과 열심을 내어서 예배를 드리시기 때문입니다. 

새벽설교는 짧지만 난이도가 높습니다. 왜냐하면 대략 15분 정도의 짧은 시간 동안 성도님들의 마음에 남을 수 있도록 내용을 구성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 시도를 했는데 최근에 또 한번 전략을 바꾸었습니다. 충분한 강해 설교를 펼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고 오히려 너무 무미건조해진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강해 설교와 저의 큐티 나눔의 중간 형태 정도로 설교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설교는 아주 약간은 본문의 초점과 어긋난 부분이 있습니다. 복음을 거절한 유대인들과 오히려 복음을 기쁘게 받은 이방인들이라는 본문의 핵심 보다는, 본문 앞에 먼저 등장하는 바울의 설교를 읽으면서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의 중요성과 감동에 더욱 포커스를 맞췄습니다. 

준비하면서 바울 사도의 설교가 제 마음에 깊이 들어왔습니다. 그가 얼마나 평소에 그리스도로 인하여 마음이 불타고 있었는지를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먼저 은혜 받은 그 마음 그대로를 성도님들과 함께 나누는 시간이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한 권사님께서 카톡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자신이 무엇인가 한 것이 없기 때문에 구원에 자신이 없었던 권사님의 그 마음이, 한편의 설교를 통해서 깊은 위로 받으시고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언제나 설교는 두렵고 떨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레는 것입니다. 언제나 저의 설교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심이 되시고 힘있게 나타나시고, 또 그분의 영광이 드러남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소망합니다.


* 설교 원고 

 

혹시 성도님들께서는 지역 이름이나 길 이름을 잘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기억을 잘 못해서 어디를 갈 때면 꼭 GPS를 키고 가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GPS를 켜도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저는 미국에 와서 주를 네번 옮겨 다니면서 살아 봤는데 재미있는 것은 길 이름이 겹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분명히 달라스에서 보았던 길 이름인데 똑같은 길 이름이 미시간에서도 있는 그런 상황인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드문 일이지만 이런 식으로 길 이름이 겹치게 되면 갑자기 기억이 뒤죽박죽이 되면서 모든 것이 헷갈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다가도 가끔씩 그런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특정한 지역 이름이 등장하게 되면 갑자기 헷갈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안디옥 이라는 이름입니다. 사도행전 13 14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4 그들은 버가에서 더 나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원래 이 안디옥이라는 도시는 무려 열여섯개의 안디옥이라는 도시가 있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이후에 그의 후계자 중 한명인 셀레오쿠스 1세가 자신의 아버지를 기념하면서 무려 열여섯개의 안디옥을 건설한 것입니다. 그 중에 성경에서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곳이 수리아 안디옥과 비시디아 안디옥입니다

 

수리아 안디옥이라는 곳은 열여섯개의 안디옥 중에서 가장 크고 번성했던 곳입니다. 주일 설교에 등장했던 안디옥이 바로 수리아 안디옥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3 14절 부터 연결해서 바울이 설교했던 곳은 비시디아 안디옥이라는 곳입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은 아마도 현재 터키의 중부 지역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바로 여기에 있던 회당에서 설교를 하게 된 것입니다.

 

성도님들께서는 어제의 말씀을 들으시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13 15절에 보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5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하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바울과 바나바가 유대인의 회당에 예배를 드리려고 방문했다가 즉석에서 설교할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저에게는 즉석에서 설교하는 것이 참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바울 사도의 설교를 들어보면 정말 거침 없이 설교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바울은 항상 준비되어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부터 시작해서 그들의 역사를 훑으면서, 다윗으로 이어져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꼭 필요한 말씀으로 그리고 그들에게 가장 적합한 역사적인 배경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능력에 대해서 특별히 시편을 적극적으로 인용하면서 설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 받는다, 율법이 요구하는 의로움은 그 누구도 이룰 수 없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선언함을 받는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3 38절과 39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8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39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행한 사도 바울의 설교라는 것은, 매우 철저한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인 그리고 그리스도가 드러나시는 탁월한 설교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즉석에서 이루어진 설교였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바울의 영혼 깊은 곳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다는 것이지

 

그런면에서 오늘 말씀을 묵상하는데, 이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베드로전서 3 15절 말씀입니다. '3: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번에 장모님께서 오랜만에 오셔서 같이 이야기를 나눌수 있는 것이 저에게 큰 행복입니다. 장모님께서는 한국에서 전도폭발 훈련을 다 수료하시고 오랫동안 전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저에게 들려 주셨습니다. '가끔씩 교회 오래 다니신 분들에게 질문을 해 보면 정작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에 대해서 대답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예를 들어서, 만일 오늘밤 이 세상을 떠나서 천국 문 앞에 섰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물으시기를 내가 너를 나의 천국에 들어오게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라고 물으실 때에 대답할 준비가 안된 분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 17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3 28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강조하시는 것은, 나로서는 도저히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로움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행위와 업적이나 노력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그 죄의 모든 댓가를 치르심으로 그분의 십자가의 능력과 부활을 믿고 주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 받는다는 그 복음을 우리에게 들려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기는, 우리의 영혼의 근본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사랑하고 의지하고 붙들고 동행하시며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이렇게 담대한 바울 사도의 즉석의 설교를 통해서 회당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를 많은 이들이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43절 하반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말씀을 묵상하는데 이 부분이 참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머무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구약에서부터 이미 은혜를 베풀어오셨고,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으라 라고 새로운 성도들을 권면하고 격려하신 것이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안디옥에서의 사역이 순조롭게 진행된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을 누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45절에 이렇게 말씀하시지 '45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50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0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유대인들이라는 것은 종교 지도자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종교 지도자들의 시기심 혹은 질투라는 것이 그저 조금 일어난 수준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에 시기심이 완전히 차고 넘치는 수준이었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 분명하게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당연히 질문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왜 그렇게 질투에 완전히 사로잡혔던 것일까? 그것은 처음부터 그들의 신앙이라는 것이, 자신들이 드러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위하는 척 했지만,겉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척 했지만, 그러나 사실은 자신의 인기를 얻고 자신이 드러나는 것을 목적으로 위선적인 종교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확 쏠렸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입지를 잃어버린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에게는 옳고 그름이 별로 큰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얻느냐 아니냐도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자신의 인기를 잃어버리는 것을 가장 큰 문제로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그 도시에서 존경 받는 사람들을 선동해서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고 쫓아내게 되었다는 것을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말씀을 통해서 심각하게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따른다면 그것은 참 기분이 좋은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주변에 함께 할 사람이 많이 있다면 그것도 정말 좋은 일이겠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나의 신앙 생활의 목적 자체가, 사람들을 모으고 그 사람들로 부터 인기를 얻고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는 것이 최종 목적이 되었다면 그것이야 말로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는데 요한복음 3장이 생각이 났습니다. 스토리는 이렇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원래는 세례 요한이 예수님보다 먼저 사역을 잘 하고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찾아가서 세례를 받기 시작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에게 찾아오는 사람들의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 중에 한명이 와서 그 사실을 걱정스럽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세례 요한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요한복음 3 28-29절입니다. '3:28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3: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인가? 세례 요한이 점잖케 제자를 타이르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주변에 사람을 모으기 위해서 사역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그리스도가 결코 아니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된 신랑이시고 구원자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드러나고 그분의 부흥하고 그분이 역사하시는 그것이 자신에게 넘치는 기쁨이 된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한마디로 세례 요한은 삶의 목적을 분명하게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자신을 한번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과연 우리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가 점검해 보기를 원합니다. 혹시라도 우리가 인기를 얻거나 우리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 쉽게 교회 안에서 질투하고 시기하는 것이 아닌가 스스로를 점검해 보는 것입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여기 모여 있는 우리 모두가 오직 한가지 목표를 가지기를 원합니다. 나는 죽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드러나시는 것, 오직 그분이 전해지고 죄인들이 구원 받고 주님의 자녀가 되는 것,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그분의 통치가 실현되는 것, 바로 이 목적을 위해서 마음을 모으고 힘 있게 교회를 섬기시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이 시간에 말씀 묵상하시면서 함께 기도하기 원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해, 감격 그리고 감사가 저의 영혼에 깊이 자리잡게 하시고 제 마음을 움직이게 하시고 언제나 우리의 구원에 대하여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 복된 성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한가지 기도하실 때에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저의 삶을 통해서 오직 예수님께서 드러나시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높아지고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진정한 신앙의 길을 걸어갈  있도록 오늘도 저를 인도하여주시옵소서이렇게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함께 기도 하겠습니다.

 

* "설교문전체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11/blog-post_4.html

2022년 6월 9일 목요일

왕되신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나아간다는 것 / 사무엘상 19장 1-24절 설교

 


사울이 영적으로 정서적으로 무너지는 것은 낯선 일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 하나님을 멀리 할 때에 어떻게 그 사람이 그럴 수 있는가 라고 탄식을 일으키는 일이 자주 있기 때문입니다. 거짓과 참된 것의 구별을 잃어버리고, 잔인함과 위선으로 가득 채운 것이 바로 하나님을 잃어버린 악인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설교 가운데 마땅히 이야기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다 하셨고 앞으로도 다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다 라는 것은 좋은 설교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매우 구체적으로 우리 삶 가우데 역사하시며, 또한 우리가 아주 예민하게 깨어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행동하기를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에게 이번 설교가 굉장히 의미가 있었습니다. 사울의 무너진 모습이 새롭게 보이고, 다윗의 신실함이 새롭게 보이고, 또 하나님을 떠난 자를 철저하게 낮추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일하심이 새롭게 보였습니다. 신앙의 길은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이고, 위선을 버리는 것이고, 하나님의 편에 서기를 히쓰는 것입니다. 그 길을 정말 진지하게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걸어가고 싶습니다.

* 사무엘상 19 1-24절 설교문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이후에 그의 명성이 높아졌습니다. 사람들은 다윗이 죽인 자가 만만이라면서 그를 칭찬했습니다. 사울은 자신보다 높아진 다윗을 심히 질투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유 때문에 사울은 다윗을 두려워 하였고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자신의 사위로 삼겠다는 것을 미끼로 그를 전쟁터에서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하나님께서 다윗을 도우셨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다윗이 사울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모든 신하보다 지혜로웠기 때문에, 사울이 다윗을 더욱 두려워하면서 평생의 대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전체적으로 부분으로 나눌 있겠습니다. 1절에서 7절까지는 “요나단의 변호”, 그리고 8절에서 17절까지는 “미갈의 변호” 그리고 18절에서 24절까지는 “사울의 옷을 벗기시는 하나님” 이라고 소제목을 잡을 있겠습니다. 내용으로 함께 말씀 묵상하기를 원합니다


19 1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 사울이 아들 요나단과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라 말하였더니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다윗을 심히 기뻐하므로”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윗을 향한 사울의 적대감은 누가 봐도 분명하였습니다. 안타깝게도 사울은 인격적으로 인격적으로 망가진 상태였습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사울의 모습은 사울로 부터 하나님의 영이 떠났을 때에 그의 인격과 그의 삶이 얼마나 비참하게 추락하는지를 보여주십니다. 그는 아주 노골적으로 자신의 아들과 신하들에게 다윗을 죽이라고 명령을 하였습니다. 그는 이상 옳고 그름을 전혀 신경쓰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는 괴물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명령을 듣고서 그의 아들 요나단이 다윗에게 숨어 있으라고 말하고 자신의 아버지에게 나아가서 담대하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4절에 하반절이 핵심입니다.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하지 마옵소서 그는 왕께 득죄하지 아니하였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심히 선함이니이다”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요나단은 매우 정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옳고 그름을 분별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이 심지어 자신의 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사울 명령과 행동은 분명한 범죄라는 것을 요나단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이 행하는 일은 분명한 범죄이지만 다윗은 사울에게 범죄한 일이 없고 오히려 다윗은 사울에 대하여 심히 선하게 대했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사울에게 말하면서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어떻게 반응하는가? 6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거니와 그가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반응이고 그리고 뜻밖의 반응입니다. 장면에만 집중해서 보자면 사울은 하나님께 맹세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같고, 자신의 삶의 방향을 바꾼 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말씀이 이어지는 맥락에서 사울의 상태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사울의 상태라는 것은 사울로부터 하나님께서 떠나신 상태입니다. 사울은 하나님께 순종할 마음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가 무엇을 있는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도,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드리지 않는 사람이라도, 얼마든지 거짓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할 있다는 것입니다.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로 살아갈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함부로 사람의 말을 믿을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는그 사람의 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보여주는 삶의 모습을 통해서 있다는 것을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수가 있습니다.

 

역시나 사울이 하나님을 걸고 뻔뻔한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성경은 바로 이어서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오늘 말씀 속에서 다윗의 신실함과 사울의 거짓이 계속 대조되어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다윗은 미련해 보일 만큼 사울을 믿고 있습니다. 그는 사울의 위협 속에서도 그를 떠나지 않고 그의 옆에서 전쟁을 수행하고 블레셋으로 부터 승리를 거둡니다

 

그런데 9절에 보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9 사울이 손에 단창을 가지고 그의 집에 앉았을 때에”라고 말씀하십니다. 혹시 성도님들 중에 집에 계실 때에손에 칼을 계속 들고 계신 분들은 없으실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말씀은 사울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울이 얼마나 광기와 살기가 넘치는 지를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와중에 사울을 엄습한 악령으로 부터 그를 돕기 위해서 다윗은 수금을 타고 있습니다. 결국 사울은 자신의 단창을 자신을 돕고 있는 다윗을 향해 던졌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급하게 자리를 피해서 도망을 쳤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너무나 안타까운 것은, 사울은 사람을 능숙하게 속이는 자였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자신의 말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걸었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한다 라고 말했지만, 정작 그는 여호와의 뜻을 대적하는 자로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그는 끊임없이 여호와의 다스림을 거절하는 자였기 때문에, 그의 말과 행동이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는 것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얼마나 대단한 신앙의 고백과 이야기를 하는가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는가? 우리가 기꺼이 하나님의 기준으로 나의 삶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기준으로 평가하고, 그분의 다스림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가를 우리에게 진지하게 질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잠언 26 24절에서 26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4 원수는 입술로는 꾸미고 속으로는 속임을 품나니 25 말이 좋을지라도 믿지 것은그 마음에 일곱 가지 가증한 것이 있음이니라 26 속임으로 미움을 감출지라도 그의 악이 회중 앞에 드러나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악인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진짜 무섭고 철저한 악인이 어떤 악인인가? 그럴 듯한 신앙의 말을 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감추는 겉으로만 그럴 하게 자신을 꾸미는 악인이 진짜 악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악인을 가증하다고 말씀하시며, 그의 악을 회중 앞에 드러내겠다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히브리서 10 22절에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살아가는 모습에 대하여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의미인가? 예수 그리스를 믿고 그분의 보혈을 믿는다는 것은, 믿음을 가진 사람 가운데 진실하고 참된 마음을 하나님께서 만들어내셨다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상다른 이를 속이고 위선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분 앞에 진실한 마음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죄성으로 남아 있는 위선과 거짓을 날마다 회개하고 돌이키는 참된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기는,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삶의 순간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주님의 자녀다운 진실하고 순수한 마음과 참된 믿음으로 살아가시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이야기의 핵심은, 사울은 다윗을 해치지 않겠다는 거짓말을 하고, 실제로는 하나님을 향한 맹세를 뒤집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1절에 보니, 사울이 끝까지 다윗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형편이 얼마나 위급하고 긴박했던지, 다윗이 도피했다 도망했다 라는 표현들이 계속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울은 극도로 다윗을 미워하고 질투했지만, 오히려 사울의 아들과 그의 딸은 다윗을 너무나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가정의 리더인 아버지가 영적으로 완전히 무너졌지만, 그래도 가정에 영적으로 바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미갈은 다윗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우상을 침대에 뉘여 놓고 다윗처럼 꾸며서 다윗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서 다윗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사울은 분노하며 딸에게 책임을 추궁했지만, 미갈은 어쩔 없이 자신이 다윗을 도망하게 했다고 말했습니다

 

한번 다윗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끊임없이 생명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가 충성심을 최대한 발휘해서 장인의 옆을 지키려했지만, 사울의 죽음의 위협을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18절에 보니 “다윗이 도피하여 라마로 가서 사무엘에게로 갔다, 그리고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전하였다, 그리고 다윗과 사무엘이 나욧으로 가서 살았더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욧이라는 곳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에 8마일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자신의 위협을 피해서 도망을 갔지만 그런데도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윗의 행방을 알리자, 바로 나욧으로 전령들을 보냈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에서 아주 흥미로운 것은 사울의 전령들이 계속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사울을 대신하여서 그의 뜻을 수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지엄한 왕의 명령을 받아서 수행하는 자들입니다. 왕의 전령이기 때문에 사실상 왕이 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계속 다윗을 찾아서 죽이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사울이 전령들을 보냈는데 그들이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선지자 무리가 예언을 하는 것과 사무엘이 그들의 리더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로 때에하나님의 영이 사울의 전령들에게도 임하였습니다. 감히 누구도 막을 없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때에 사울의 명령을 받고 다윗을 죽이려 하던 전령들이 모두 갑자기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완전히 하나님의 능력에 사로잡혀서, 그분의 뜻대로 움직이게 것입니다

 

사울이 분노하여서 두번이나 전령들을 보냈지만, 모두가 동일한 현상에 사로잡혔습니다. 보다 못한 사울이 직접 다윗을 찾아나섰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흥미로운 것은 22절에 보니, 마치 사울은 길을 잃어버린 어린아이처럼 사람들에게 다윗의 행방을 물어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사울이 라마 나욧에 도착했을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사울조차도 그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셨습니다. 그는 심지어 걸어가면서 예언을 하였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24절에는, 아주 충격적인 말씀이 등장합니다. 24 그가 그의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하루 밤낮을 벗은 몸으로 누웠더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주 놀라운 말씀입니다. 지금 사울이 어떤 사람인가? 그는 살아있는 이스라엘의 실세였습니다. 그는 질투에 눈이 멀고 살기가 등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멀리하고 그분을 대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살인조차 서슴치 않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부하들을 마음대로 부릴 있는 권세자였고, 아무도 그의 뜻을 막을 없는 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사무엘 앞에 서자, 사실은 사울이 자기 자신도 스스로를 컨트롤 없는 연약한 인간이라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성경은 그가 하루 밤낮을 벗은 몸으로 누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처음에 라마 나욧으로 때에 무슨 옷을 입고 갔겠습니까? 당연히 왕의 옷을 입고 당당한 모습으로 갔을 것입니다. 왕복이라는 것은 왕의 신분을 나타내는 아주 중요한 표시입니다. 그는 자신이 왕이라는 것을 언제나 자랑스러워했고, 그것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으로 여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사무엘 앞에 다다랐을 때에하나님의 말씀으로 그에게 부으시고서는, 하나님께서는 그의 옷을 벗겨 버리셨습니다. 무슨 의미인가? 위에 진짜 왕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땅에 왕을 세우고 다시 폐하는 모든 권세는 사울왕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진정한 왕이신 여호와께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명백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울이 아무리 살기 등등하여 다윗을 죽이려 한다 할지라도, 다윗의 생명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분은오직 여호와 하나님 분이시라는 것을, 사울 자신과 모든 이들에게 명백하게 보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이 마무리가 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시는가? 그것은"감히 여호와를 대적할 자가 없도다"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오늘의 이야기가 얼마나 급박하게 돌아가는지 모릅니다. 여호와를 버린 사울은 끊임없이 살기를 품고 다윗을 죽이려합니다. 겉보기에 다윗의 처지는 너무나 처량한 것입니다. 그는 도망치고 도망치고 도망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과연 죽음이 그의 바로 앞에 있다고 말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여호와께서 그를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최고 권력자가 그를 추적하고 있지만, 감히 사울 조차 여호와를 이길 수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강권적으로 그가 예언하게 하시며 그의 옷을 벗겨버리심으로서, 감히 여호와를 대적할자가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무엘 상을 열어가는 중요한 기도인 사무엘상 2 10절에서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기도가 성취되고 있는 것입니다. 10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에서 우레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끝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경외하는 자를 왕으로 삼으시며, 그를 대적하는 이를 철저하게 낮추신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오늘 말씀을 통해 사울의 추락을 보이시면서 그것을 실제로 역사 가운데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1 7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7 영원하신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말씀인가?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은, 죄인인 나를 용서하시며 이제는 자유롭게 하시는 그것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들의 값으로 우리를 사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온전히 하나님의 것입니다. 왕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반역한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셨기 때문에, 이제 백성은 진정한 자신의 왕을 마땅히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세상의 진정한 주인이시며, 그분의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소유하셨기 때문에, 오직 그분만이 세상이 진정한 왕이심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이 무엇인가? 그것은, 아무리 악인들이 횡횡하며 자신들이 왕인 처럼 행동하며 그들이 의인들을 핍박하고 무너뜨리려 할지라도, 모든 위에 계시며 온전한 왕이 되시는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그분을 기대하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하겠습니까? 그것은, 살아계신 왕이신 여호와 앞에서의 겸손한 삶입니다. 그리고 그분 안에서 담대함을 가지는 삶입니다. 오직 여호와께서 우리의 주인으로서 사람을 높이시고 낮추시며,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어떤 재력과 어떤 위치에 있다 하더라도 여호와 앞에 없이 겸손하여지고 그분을 높이고 그분 앞에 예배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우리가, 다윗처럼 여호와를 따르고 여호와의 편에 선다면, 우리의 삶의 고난 속에서도 무한한 용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편에 우리가 당당하게 있다면, 우리의 삶에 어떤 것도 두려워할 필요 없는 것이며, 여호와께서 우리를 친히 돌보시고 지키신다는 확신 가운데 담대하게 우리의 삶을 살아갈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기는, 오늘도 주님의 편에 서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한없는 겸손한 마음으로 담대한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시는 모든 사랑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시간에 통성으로 기도하실 때에이렇게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아버지 하나님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저의 모든  속에서진실하고 정직한 모습으로 주님께 나아가기 원합니다삶의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모습을 벗어 던지고하나님의 자녀다운 진실한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매일 저의 삶을 새롭게 하여 주시옵소서이렇게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둘째로 기도하실 때에아버지 하나님  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어떤 인간도 감히 여호와의 뜻을 거스를  없음을 고백합니다 되신 주님의 신하로 종으로 살아가게 하시고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가는자 되게 하시고주님 앞에 겸손함으로 그리고 주님의 편에  자로 담대한 믿음으로 살아갈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이렇게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문" 전체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11/blog-post_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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