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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6월 24일 화요일

삶으로 드리는 찬양 (221) - 사랑한다 말하시네


1. 가사 살펴보기

아무런 자격도 없는 나를 위해
아무런 소망도 없는 나를 위해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말하시네
이 낮은 날 위해 

이제 나는 옛사람 아니요
사망에서 건지신 주의 자녀이니
그 한없는 주의 사랑 안에
기쁨으로 걸어가겠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손을 잡고 함께 가자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말하시네
세상 끝 날까지

 

2. 곡 소개

곡은, 예배사역 단체 기프티드(gifted)의 앨범에 수록된 곡이다. 이 곡은, 소망 없는 나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 그리고 새롭게 태어난 주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과 소망을 담고 있는 아름답고 탁월한 곡이다.

 

3. 말씀으로 바라보기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를 보내어 우리를 위하여 죽게 하심으로써 우리에 대한 그의 크신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높은 표현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사랑스러워지기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를 그분께 가까이 데려가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Bruce Barton et al., Life Application New Testament Commentary (Wheaton, IL: Tyndale, 2001), 597.

2: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암담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과 자비로 행동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비 없이는 인류에게 어떤 희망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바울이 구원을 이해하는데 있어 핵심 주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과정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방관자나, 분노로 가득 차 진정되기를 기다리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구원의 주체이시며, 자신의 사랑으로 그의 진노를 다루시고, 그분의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썩지 않을 씨로 거듭났고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안에 영적인 변화를 일으키셨고, 당신의 정체성은 당신의 새 생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더 이상 예전의 사람이 아닙니다. 옛 사람은 지나갔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이 새로운 정체성에 걸맞게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Tony Evans, The Tony Evans Study Bible (Nashville, TN: Holman Bible, 2019), 1370.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연합한 자 : 신약 성경에서만 여기 나오는 표현은 “연합하여 자라다” 혹은 “연합하여 심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함께 심었고 함께 자라며 밀접하게 얽혀 있거나 결합되어 있는 두 식물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문맥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와 우리가 연합하였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와의 죽음에의 연합은 마치 그분과 함께 심겨진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이제는 사랑의 연합인데, 그분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그 안에서 우리는 그분과 함께 성장하는 것입니다.

Earl D. Radmacher, Ronald Barclay Allen, and H. Wayne House, The Nelson Study Bible: New King James Version (Nashville: T. Nelson Publishers, 1997), Ro 6:4–5.

2:10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이 깨어나 게으름을 떨쳐버리고 당신과 함께 걷자고 권면하십니다

.Joel R. Beeke, Michael P. V. Barrett, and Gerald M. Bilkes, eds., The Reformation Heritage KJV Study Bible (Grand Rapids, MI: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14), 945–946.

 

4. 찬양에 대한 묵상

이 찬양은, 복음의 정수를 담고 있다. 우리는 사랑 받을 자격이 없고 소망이 없는 죄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우리를 기꺼이 찾아오시며, 오직 그분의 사랑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다. 이 찬양을 들으면,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은 감동을 받는다. ‘사랑한다라는 반복되는 가사가, 이 찬양의 깊이와 풍성함을 한 없이 더해준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구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완전히 다른 존재로 만드셨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하였다. 그분과의 연합은 성령님을 통하여 이루어진 사랑의 연합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고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의 다스림 속에서 그분을 사랑하는 존재로 거듭난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생명, 그리고 그분과의 사랑 가운데 살아가라고 부르심을 받았다. 그런 면에서 이 찬양의 브릿지를 아가서를 연결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다. 성경을 관통하는 핵심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와 동행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어떤 면에서는 한 없이 복잡해 보이고, 또 고민해야 할 부분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찬양은, 복음의 본질과, 성도의 정체성, 그리고 미래에 대해서 너무나 선명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넘치게 받았고 또 받고 있기에,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면 된다. 그것이 우리 인생의 전부이다. 이 찬양을 통해서, 우리를 사랑한다고 말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그것을 누리며 감사하며, 믿음의 길을 기쁨으로 걸어가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기대한다.

 삶으로 드리는 찬양 전체 묵상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06/1_30.html     

2025년 3월 4일 화요일

삶으로 드리는 찬양 (207) - 주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

 


1. 가사 살펴보기

주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 불 가운데로 걸어가는 것
그 속에서 신실하게 날 지키시는 그 손길을 경험하는 것 

주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 바다 위로 걸어가는 것
내 온몸을 덮쳐오는 폭풍 속에서 잠잠히 주 바라보는 것 

주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 나도 그들을 용납하는 것
나를 위해 달리신 십자가 사랑 그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 

주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
주께서 지신 십자가 기꺼이 지고 주와 함께 걸어가는 것 

때론 불 가운데 휩싸일 때도 폭풍 가운데 무너질 때도
주님 내 곁에 함께 하시네 가장 가까이에 함께 하시네

 

2. 곡 소개

찬양은, 혼성 찬양팀인 GIFTED의 싱글 앨범에 수록된 곡이다. 이 곡은, 주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그리고 아름답게 드러내는 찬양이다. 고난을 이겨내면서, 믿음으로, 용서로, 그리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의 인생 전체를 그려낸 탁월한 찬양이다.

 

3. 말씀으로 바라보기

3:17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3:18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구원하실 능력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겠다는 뜻을 가지고 계신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개인적인 유익이 순종의 기준이 아니었으며, 보상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용기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결과에 상관없이 옳은 일을 행하려는 믿음과 결단에서 나온 것입니다.

Joel R. Beeke, Michael P. V. Barrett, and Gerald M. Bilkes, eds., The Reformation Heritage KJV Study Bible (Grand Rapids, MI: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14), 1205.

14:27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14:28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나니 라는 말씀은, “나는 존재한다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출애굽기 3 14절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떨기 나무 가운데서 계시하신 신적인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신현, 즉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신성을 계시하는 사건입니다.

D. A. Carson, “The Gospels and Acts,” in NIV Biblical Theology Study Bibl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8), 1729.

15: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그러므로 라는 말씀은 로마서 14 1절에서 시작된 논의의 결론을 도입하는 표현입니다. 거기에서 바울은 약한 믿음을 가진 자를 받아들이라는 명령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받아들이라는 이 명령은 강한 신자들만이 아니라 약한 자들도 서로 받아주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Earl D. Radmacher, Ronald Barclay Allen, and H. Wayne House, The Nelson Study Bible: New King James Version (Nashville: T. Nelson Publishers, 1997), Ro 15:7.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의식하며 겸손하고 주의 깊게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정한 종교는 하나님을 자각하며 자신의 모든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Joel R. Beeke, Michael P. V. Barrett, and Gerald M. Bilkes, eds., The Reformation Heritage KJV Study Bible (Grand Rapids, MI: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14), 1287.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43: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4. 찬양에 대한 묵상

이 찬양은, 하나님의 자녀가 살아가야 하는 그 길에 대하여 탁월하게 묘사하는 찬양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의 유혹과 고난을 이겨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게 하시는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그리고 가장 연약한 자라도 받아주는 참된 포용과 인내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겸손한 모습으로 삶의 모든 순간에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영적인 감각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그리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그분의 주권을 의지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 찬양은, 성도의 삶의 분명한 방향과 결단, 그리고 그 모든 걸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이 조화롭게 이루어진 아름다운 찬양이다. 이 찬양을 부를 때 마다, 성도의 정체성이 새로워지기 원한다. 세상은 끊임없이 세속적인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지만, 우리는 이 찬양을 통해서 가장 성경적인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자녀로서 명예로운 삶을, 오직 주님의 신실하심 가운데 끊임없이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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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 29일 수요일

사십대의 절반을 지나보내며 / You Make Me Feel Brand New - Richard Elliot

 




일년에 한번씩 돌아오는 생일이지만, 이번에는 유독 여러 의미가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살던 시카고를 떠나 볼티모어로 이주를 하고, 전혀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역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몇달 동안은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지낸 것 같습니다. 당장 해야 하는 수 많은 일들을 소화하면서, 제 역할을 감당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든 할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능력이 아니라 책임감인 듯 합니다.

가족을 위해서 제가 가장 신경써서 기억하려고 하는 것은, 결혼 기념일 그리고 아내의 생일입니다. 당연히 제 생일은 뒷전입니다. 지난 주일이 제 생일이라는 것도 당연히 몰랐습니다. 그러니 심지어 그날 저녁까지 심방을 잡아 놓았습니다. 어렵게 잡은 심방이라 취소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어머니께서 평생을 그렇게 하신 것처럼, 목회는 나 자신의 것보다 교회를 앞세우는 것이 목회입니다. 

아내와 잠깐 시간을 내었습니다. 둘째가 미술을 배워야하는데 처음 가보는 곳이라 제가 잠깐 라이드를 해 주변서 주변을 살펴 보았습니다. 아주 작은 까페가 있더군요. '같이 커피라도 한잔 할까?' 아주 오랜만에 아내와 데이트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사실 너무 작고 낡은 곳이라 아내에게 미안했는데, 아내의 얼굴을 보니 기분이 좋아 보였습니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마흔의 절반을 지나도록 살아온 저의 삶의 거의 전부가 아내 덕분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아내가 없었다면 과연 내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을까? 대답은 언제나 No입니다. 그래서 요즘에 아내에게 잘 해주어야겠다라는 생각이 더 많이 듭니다. 

생일에 일어나보니 아이들이 카드를 주었습니다. 나름대로 정성으로 그려진 카드를 보니 웃음이 났습니다. 아빠가 된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이고 또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또 그만큼 큰 기쁨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이들을 품에 안으면, 단순히 행복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마음에 차오릅니다. 가족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일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고, 또 저에게 맡겨진 책임입니다. 그저 제가 이 모든 것에서 포기하지 않고 뒤로 물러서지 않고 계속 전진할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제 능력보다 할 일이 훨씬 많은 상황은 아마 평생 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늘 아쉬움과 부족함과 허덕임으로 살아가는 것이 현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 작은 순간들을 누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글을 남깁니다. 저의 생일이 대단한 날도 아니고, 누군가 알아주기를 원하는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하나 밖에 없는 남편으로, 그리고 하나 밖에 없는 아빠로, 조금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결심과 의미를 주기 때문에 너무나 소중한 날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저의 인생을 붙들어주시고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저의 곁에서 언제나 함께 해준 사랑하는 아내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2023년 10월 22일 일요일

"정목사님, 제가 목사님 잘 압니다" by 천개의 글을 기념하며

 

저는 감성이 풍부한 편이라 쉽게 자기 연민에 빠집니다. 힘든 과거를 떠올리면 감정이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힘들어지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과거를 돌아봅니다. 저의 행복한 한 순간은, 영화 터미네이터 2를 보면서 라면을 먹던 시절입니다. 라면을 신나게 먹고 밥을 잔뜩 말아 먹습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낮잠으로 들어갑니다. 뭔가 부족함이 없는 그런 시절입니다.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그렇게 깊게 생각하지 않았던 그러나 마냥 행복하던 저의 어린 시절입니다. 

저는 부끄러움이 굉장히 많은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 앞에서 말하는 것을 수줍어 합니다. 저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내새우기보다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 것을 훨씬 좋아합니다. 그런 제가 목회를 위해서 공부를 더 해야겠다고 유학을 결심했습니다. 

처음 유학을 시작하면서 CFNI는 저에게 낙원과 같았습니다. 처음 듣는 영어 찬양들이 좋아서 글을 써봐야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찬양들에 대한 간단한 묵상을 적어보면 어떨까?" 그것이 제가 블로그를 시작한 동기였습니다. 어렸을 때 부터 책을 좋아했지만 글을 쓰는 것은 그렇게 익숙하지는 않았습니다. 심지어 어린 시절 왜 이렇게 글을 못쓰냐고 구박을 받았던 저입니다. 하지만 글을 쓰는 것에 끌렸습니다. 비록 짧은 글들이지만, 저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좋았습니다. 

2011년에 시작한 유학입니다. 대략 12년이 지났습니다. 어느덧 하나씩 늘어가는 글을 보면서, 천개 정도 글을 쓰면 기분이 어떨까 라고 막연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블로그의 글이 천개가 되었습니다. 놀랍기도 하고, 생각하던 것이 실제로 눈 앞에 이루어진 것이 약간 이상하게도 느껴집니다. 

나는 왜 이렇게 글을 계속 쓰는 것일까?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다양한 책을 읽을수록 확고하게 알게 된 것은 "반드시 글을 써야한다"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글을 쓰면서 성장합니다. 글을 쓰면서 나 스스로를 알아갑니다. 글을 쓰면서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찾아가고 깊이를 만들어갑니다. 글을 쓰는 것은 삶의 선택이 아니라, 사실상 모든 인간이 걸어가야 할 유일한 길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저의 설교를 좋아하신다는 분을 직접 뵐 기회가 있었습니다. 저를 좋게 봐주셔서 참 감사했지만 속으로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처음 뵙고 정중하게 인사드리면서 악수를 나누었습니다. 저의 손을 따뜻하게 잡으시면서 말씀하시더군요 "정목사님, 제가 목사님 잘 압니다."

그분의 목소리가 참 부드럽고 좋았습니다. 저는 비록 처음으로 뵙는 것이었지만 그분은 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저를 처음 만나셨는데 어떻게 저를 잘 아시냐고 그분께 묻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설교는, 저의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설교를 잘 듣고 마음에 품은 분이라면 그분은 정말 저를 잘 아는 분입니다. 참 좋았습니다. 마음과 마음이 만났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블로그는 어떤 의미일까요? 그리고 이곳에 와서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또 어떤 분들일까요? 몇개의 글들은 제가 아끼는 분을 염두에 두고 쓴 글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글은 저의 목회와 삶을 함께 나누는 글입니다. 이곳에 쓰여진 저의 글은, 사실상 저의 모든 것이라 불러도 전혀 과장이 아닙니다. 저의 존재 자체가 글 속에 완전히 녹아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솔직하고 진지한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합니다. 저의 원래 성품 그대로입니다. 저는 항상 진지하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너무나 가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한가지 이 시대를 보면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은 자신이 말하는 바램과 실제의 삶을 다르게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깊은 관계를 원합니다. 자신의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누군가 들어주기 원합니다. 그리고 신앙의 깊이를 만들어가고 싶어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로써 자신을 보이기 보다는 감추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진리에 기반한 진지한 대화와 소통보다는 그저 삶의 변두리 이야기들을 말하는 것에 머무릅니다. 고민이 담긴 글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가다듬고 다른 이들과 교류하기 보다는 홀로 마음에 모든 것을 품고 살아갈 뿐입니다. 

저는 성도로서 목회자로서 삶과 신앙의 가치에 대해서 항상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고민이 저의 글 속에 묻어나기를 원합니다. 저의 기억력이 약하지만, 저의 모든 것이 천개의 글로 거듭났습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있고, 저의 아픔과 눈물, 그리고 기쁨과 환희가 들어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무거운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그러나 한편으로는 글을 씀으로 그 무거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 블로그의 글을 읽어보셨다면, 저를 잘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쩌면 앞으로도 제가 처음 뵙는 분이 저의 손을 꼭 잡으며 말씀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목사님, 제가 목사님 잘 압니다." 아마도 저는 그분을 향해 활짝 웃을 것입니다. 이 공간이 앞으로도 저의 성숙의 공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저의 작은 인생을 통해서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이 드러나고, 함께 믿음의 길을 걸어가시는 분들의 작은 쉼이 되기를 원합니다.

2023년 7월 8일 토요일

모든 것이 허무하다고 느껴질 때의 기도 / I Look To You - Whitney Houston

 

시편 73:26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주님, 어제는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고 느껴졌습니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이 그랬습니다. 세월이 무상하다고 느껴졌습니다. 많은 것을 이루었고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을 거스를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공중으로 흩어지는 것처럼, 저의 생각과 의지와 용기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주님, 어쩌면 진정으로 저의 존재를 깨달은 시간이었습니다. 먼지와 같은 인생, 어린 시절부터 주님을 알고 사랑했지만, 지나간 세월이 너무 빨라 제 자신조차 저의 존재를 붙잡을 수 없다는 불안감과 당혹감이 제 마음을 엄습했습니다. 고난이 아니라 마음의 허망함이, 더 큰 저의 적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저는, 제 자신에게 아주 작은 소망 아니면 제가 생각하던 것보다 더 큰 기대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의 실체를 보았습니다. 저는 먼지입니다. 저는 그저 따가운 태양에 순간 말라버리는 이름 없는 풀과 같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 주님, 저는 그제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제 자신에게는, 그 어떤, 그 작은, 그 조그마한 기대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이제서야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놀랍게도 그것이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나의 존재가 사라지고, 나의 소망이 사라지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저의 영혼의 근본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삽의 고백이 이제서야 저의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마치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조건으로 이 말씀을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이제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의 육체와 마음은 반드시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제 자신에 대한 모든 소망이 다 사라지고, 제 자신에게 기대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없다고 여겨지는 그 지독한 허무함의 끝에서, 그제서야 "오직" 여호와만이 반석이시고 분깃이심을 깨달았습니다. 

주님, 저는 실패합니다.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는 사라지고 있습니다. 저는 시간을 이길 수 없고, 그 완전한 완전함에 전혀 미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자신의 아들을 기꺼이 내어주신 그 영원한 사랑 안으로 들어갑니다. 저는 주님께 단 한걸음도 다가갈 수 없었지만, 주님이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래서 전적인 피조물이, 완전하신 창조자 안에서 쉬기 원합니다. 주님의 존전에서 행복을 누리기 원하고, 나는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기 원하며, 오직 그리스도께서 제 안에 숨쉬고 움직이시고 살아나시기를 원합니다. 

주님, 제 인생에 앞으로도 수 많은 시간을 허무함과 싸울 것입니다. 아마 종종,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것 같은,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어두움 속에 존재하는 그 허무함에 묻힐 것입니다. 오 주님, 주님만 의지합니다. 저의 손을 붙잡아 주시기를, 어리석고 교만하고 작은 제 자신을 더 이상 보지 않고 오직 주님만 바라볼 수 있기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사라지고, 오직 눈부신 태양과 같은 주님을 바라보며, 그 주님의 압도적이며 신적인 영광으로 저의 모든 허무함이 사라지기를 기도합니다. 주님만이 저의 소망이며, 주님만이 저의 반석이시고, 영원한 분깃입니다. 

저의 유일한 구원자, 존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23년 1월 20일 금요일

삶으로 드리는 찬양 (116) - 허망해 보이나

 


1. 가사 살펴보기

허망한 삶이라 여겼던 우리 인생은
한 사람이 짊어진 십자가로 변했네
우리의 세상은 여전히 허망해 보이나
주 안에서 우리 사랑을 외치네

이 곳에 주의 나라와 주의 뜻만이 영원히 이뤄지리
주가 일하시는 우리의 삶 가운데
주님께 우리 찬양과 그의 영광을 영원히 노래하리
포기치 않으시는 당신의 그 사랑을

 

2. 곡 소개

곡은, WELOVE 찬양팀의 people, Ecclesia 앨범에 수록된 곡이다. 이 곡은, 전도서의 중요한 메시지인 허망함 혹은 헛됨 이라는 메시지를 보여주며, “성도가 가질 수 있는 진정한 소망,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탁월한 찬양이다. 삶이 때론 헛되게 보일지라도, “주님께서 여전히 일하시고 있기 때문에성도의 삶은 충만한 의미가 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 people, Ecclesia’ 발매한 위러브 “소금과 빛 되길”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36842

 

3. 말씀으로 바라보기

전도서 1: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1:1 The words of the Teacher, son of David, king in Jerusalem: 1: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1:2 "Meaningless! Meaningless!" says the Teacher. "Utterly meaningless! Everything is meaningless." 1:3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1:3 What does man gain from all his labor at which he toils under the sun? 

1:2 Vanity. The Hb. word translated “vanity,” which occurs thirty-eight times in Ecclesiastes, means “breath,” “vapor,” or “fleeting” and in the context of the book refers to that which is frustrating, temporary or perplexing (Introduction: Characteristics and Themes). “Vanity of vanities” is a Hebrew way of expressing the superlative. The Preacher is here clearly using hyperbole to encourage the reader to face the vanity of life; elsewhere in the book, he commends finding satisfaction, the opposite of frustration in life, and presumes that the reader will understand and not be perplexed by his message. 헛되고 : “헛됨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전도서에서 모두 서른 여덟 나오는데, “”, “증기혹은한순간 뜻하며, 전도서의 맥락에서는 좌절시키는 , 덧없는 또는 당혹하게 만드는 것을 가리킵니다. “헛됨 중에 헛됨이라는 것은, 최상급을 표현하는 히브리어의 표현 방식입니다. 여기서 전도자는 독자들로 하여금 인생의 헛됨을 직면하게 하려고 과장법을 사용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전도서의 다른 곳에서 전도자는 인생의 좌절과 정반대에 있는 만족을 찾기를 권하면서, 독자가 자신의 메시지를 이해하고 그것에 대하여 당혹하지 않을 것이라고 간주합니다.

R. C. Sproul, ed., The Reformation Stud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2015 Edition) (Orlando, FL: Reformation Trust, 2015), 1078.

마태복음 25: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25:40 "The King will reply, 'I tell you the truth, whatever you did for one of the least of these brothers of mine, you did for me.'

25:40 the least of these Jesus’ remarks here call for Christian care to reach all the way to the bottom of the social structure, thus inverting earthly values. Jesus might be referring to the same people He earlier calls “little ones” (10:42; 18:6, 10, 14). It is unclear whether Jesus is speaking specifically about His followers or about anyone in need. Another option suggests that He is describing judgment on the nations and the “least of these” refers to Israel. 지극히 작은 하나 : 여기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성도의 돌봄이라는 것이 사회에서 가장 바닥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도달하여서, 세속적인 가치를 뒤집어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전에 작은 자들이라고 부르셨던 바로 사람들을 언급하고 계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체적으로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인지, 혹은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른 선택지는, 그가 열방에 대한 심판을 묘사하고 있으며, “이들 중에 가장 작은 이스라엘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John D. Barry, Douglas Mangum, et al., Faithlife Study Bible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12, 2016), 25:40.

고린도전서 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15:58 Therefore, my dear brothers, stand firm. Let nothing move you. Always give yourselves fully to the work of the Lord, because you know that your labor in the Lord is not in vain

15:58 The hope of resurrection makes all the efforts and sacrifices in the Lord’s work worth it. No work done in His name is wasted in light of eternal glory and reward. 부활의 소망은, 주님이 이루신 안에서 모든 노력과 희생을 가치 있게 만듭니다. 그분의 이름으로 행한 어떤 일도, 영원한 영광과 상급에 비추어서 헛되지 않은 것입니다.

John F. MacArthur Jr., The MacArthur Study Bible: New American Standard Bible. (Nashville, TN: Thomas Nelson Publishers, 2006), 고전 15:58.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개역개정) 2:20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and I no longer live, but Christ lives in me. The life I live in the body, I live by faith in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NIV)

2:20 Union with Christ means that He represented us in His death and resurrection. But it means more, for it is a living union. Jesus is present with the believer; by the Spirit, the Lord lives in inward fellowship with His own. Paul does not mean that the individuality of a person is suppressed or absorbed; he lives “in the flesh” by “faith.” The union is a spiritual relationship of the utmost intimacy.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를 대표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연합은 살아 있는 생명의 연합이기 때문에, 이상의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신자들과 함께 실재하십니다. 성령으로, 우리 주님은 자기에게 속한 자들과 내적인 친교 안에서 살아 계십니다. 바울은 사람의 인격이 억눌리거나 주님께 흡수된다는 의미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육체 가운데오직 믿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연합은 가장 친밀한 영적인 관계입니다.

R. C. Sproul, ed., The Reformation Stud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2015 Edition) (Orlando, FL: Reformation Trust, 2015), 2077.

 

4. 찬양에 대한 묵상

이 찬양은, 삶의 허망함으로 인하여 절망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찬양이다. 살아가다 보면, 마치 우리의 인생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 내가 주를 위하여 섬기고 행하는 모든 것들에 열매가 전혀 없어 보이고, 도대체 이런 일을 해서 무엇에 쓸모가 있는가, 참으로 헛되구나 라고 생각하며 마음에 낙심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바로 그것이 곧 주님께 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비록 우리의 삶의 많은 부분이, 세상이 볼 때에는 의미가 없고 헛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주님 안에서 사랑으로 행한 모든 것을 주님께서는 귀히 여기시며, 너무나 놀랍게도 그것이 바로 주님 자신에게 행한 것이라 여기시며 칭찬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밖에서 우리를 다스리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영적으로 연합하여 성령을 통해 우리의 내면에서부터 우리를 다스리신다. 주님께서는, 놀라운 사랑으로 주님의 교회를 포기하지 않으시며 친히 다스리시고 이끌어가신다.

주님께서 친히 일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결코 헛되지 않은 것이다. 때론 우리의 마음이 낙심할지라도, 성경은 우리가 흔들리지 말 것을 명령하신다. 주님의 영적인 다스림을 통하여 이루어낸 우리의 모든 일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받으시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주를 위하여 섬긴 모든 노력과 수고를 반드시 칭찬하시며, 넉넉하게 갚아 주신다. 이 찬양을 통하여, 희망과 의미를 잃어버린 세상 속에서, “모든 순간에 빛나는 성도의 삶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 삶으로 드리는 찬양 전체 묵상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06/1_3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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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 23일 월요일

"우스운 모습" 으로 남고 싶지 않아서, 오늘도 노력합니다.

저는 아내와 대화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 틈만 나면 이야기를 나눕니다. 주제는 다양하지만 주로 "삶의 목표와 우선 순위" 에 대한 문제입니다. 과연 우리가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내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우스운 모습으로 남고 싶지 않아서, 열심히 사는거야" 아내가 저의 이야기를 듣고 적잖이 놀랍니다. 왜냐하면 저는 굉장히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고, 그리고 제가 이룬 일들에 대해서 자랑스러워한다는 것을 아내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제가 우스운 모습으로 남고 싶지 않다라고 말하니, 꽤 놀란듯 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별로 생각하지 않는 편입니다. 그리고 제가 열심히 일한 부분에 대해서는 스스로를 격려하고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자랑스러워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약점에 대해서는 냉정하게 바라보기 위해서 또한 노력합니다. 

제가 지금 목회자로 그리고 성도로서 주력하고 있는 로고스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부분에서는, 꽤 많은 결과들을 끌어 냈습니다. 저의 목회를 위해서 사용해야 할 자료들을 거의 분류하고 분석하였고, 실질적으로 매주 사용하는 스터디 바이블에 대해서 제 관점에서는 매우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삶으로 드리는 찬양" 프로그램도, 다른 사람에게 들릴 때에 어느 정도 좋게 들리는 것도 사실입니다. 1년 전에 비하자면, 정말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스스로 냉정하게 평가할 때에 정말 우스운 부분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로고스를 탁월하게 사용하지만, 로고스 유저들 사이에는 그저 평균보다 약간 나은 수준입니다. 레코딩 프로그램을 꽤 잘 다루게 되었지만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많고, 배울 것이 너무 많습니다. 과거에 만든 찬양 곡들을 다시 들을 때에 부족한 부분들이 정말 수십가지는 들립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 저게 범할 수 있는 치명적인 오류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제가 이미 이룬 업적에 스스로 도취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면서, 내가 가진 장점들만 부각시키면서 자아 도취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래 나는 이정도나 할 수 있는 사람이야" 라고 생각하면서 나의 약점은 덮어 버리며 더 이상의 발전을 멈추어 버리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오류는, 저의 우스운 부분에만 집중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직 이루지 못한 부분들, 내가 가진 약점에만 포커스를 맞추면서 "그래 나는 겨우 이정도 밖에 안되는 사람이야"라고 말하면서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장점을 전혀 인정하지도 바라보지도 못하면서, 나 라는 인간의 자기 발전의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신앙인의 삶이라는 것은, 두가지를 다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기가 이미 이룬 귀한 것들은 그것을 이루게 하신 하나니께 감사하며 자신의 장점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우스운 부분들, 약점들은 그것 또한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하면서 계속적으로 발전시켜야 합니다. 

물론, 어떤 탁월한 업적을 이룬 사람을 기준으로 삼아서 노력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친 비교 의식은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줄 뿐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장점을 감사로 인정하면서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서 노력하고, 그리고 자신의 약점을 겸허하게 인정하면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가장 의미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 내가 어떻게 비쳐질 것인가를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생각하시는 가에만 포커스를 맞추어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삶의 바른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어느 정도의 삶을 더 주실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우스은 모습"이 아닌 "조금 더 발전되고 성숙한 모습" 으로 계속 더 나아가고 싶습니다. 저는 여전히, 그리고 아마도 주님께서 그분의 나라로 부르시는 바로 그 날까지도 우스은 모습이 가득한 부족한 사람일 것이 틀림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좋은 것들은, 더욱 발전시켜서 아름답게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끊임 없이 성장하고 싶습니다.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한 길이며, 삶의 진정한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

2021년 8월 20일 금요일

이사야 51장 9-16절 설교 with "죽음의 수용소에서"

 

설교자에게 설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설교를 준비하고 할수록, 설교는 설교자 자신을 위한 일이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이전에, 말씀을 붙들고 자신의 삶과 신앙을 고민하는 것이 설교이며, 그 모든 고민의 결과를 선포하며 함께 나누는 것이 또한 설교입니다. 

설교 한편 한편이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모든 원고들을 완성하는 과정이 참 고되고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하지만, 그 설교를 통해서 제 자신을 더 하나님 앞에서 성찰하게 되고 성도의 삶의 의미를 발견해간다는 점에서 제 자신에게 저의 설교가 너무나 귀하게 느껴집니다. 설교야 말로, 목회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가장 큰 축복이 틀림 없습니다. 

최근에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으면서, 성경을 완전히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것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등장하는 거의 대부분의 내용이 성경적인 맥락과 닿아 있다는 것입니다.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고 본질적으로는 분명히 차이가 있지만, 그 방향성은 성경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과 거의 동일하다고 느꼈습니다. 책에 대한 간단한 리뷰는 아래 링크를 통해 읽으실 수 있습니다. 

* 책 어디까지 읽어 봤니?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 내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서
https://jungjinbu.blogspot.com/2021/08/blog-post_6.html

아래 설교는,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고 영향을 받은 설교입니다. 그리고 저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설교 중 한편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삶의 의미를 어떻게 발견할 것인가, 과연 성도의 궁극적인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맥락으로 준비된 설교입니다. 제가 이 설교를 통해 하나님 안에서 안식과 평안을 누리게 된 것 처럼,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그런 은혜를 함께 누릴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어제의 말씀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어제의 말씀 속에서는 예루살렘을 회복시키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 속에서는 그 일을 속히 이루어주시기를 간구하는 내용입니다.

오늘 말씀은 전체적으로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로는 9절에서 11절 까지 말씀인데 하나님을 깨우는 기도라고 소제목을 잡을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둘째로는12절에서 13절까지 말씀인데 여호와를 다시 한번 기억하라라고 소제목을 잡을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4절에서 16절까지 말씀인데 만군의 여호와가 행하실 것이다라고 소제목을 잡을 수 있겠습니다. 이 내용을 가지고함께 말씀 묵상하기를 원합니다.

오늘 말씀에 9절에 이렇게 간구하고 있습니다. 51:9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어제의 말씀 속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로하시고 그들을 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시지만 아마도 그 약속이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선지자가 느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는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주님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주님은 사람이 아니시기 때문에 주무신 적이 한 번도 없으시고 잠시라도 쉬면서 행동하지 않은 적도 없으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말씀 속에서 선지자의 간구는 주님께서 깨어나시고 주님께서 그분의 팔을 움직이시며 능력을 베풀어 달라고 그렇게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적극적인 간구는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확신하기 때문에 간구할 수 있다는 것을 9절과 10절을 통해서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9절 말씀에서 라합과 용이라는 것은 거대한 이집트 제국과 파라오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아무런 배경이나 이유 없이 여호와께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구원하시며 이집트 군사들을 무찌르셨던 바로 그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면서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건의 핵심이 10절에 홍해를 건넌 사건입니다. 10절의 말씀으로 기도하면서 바다의 깊은 물을 말리시고 길을 내셔서 그분의 백성을 걸어가게 하신 그 여호와께서 다시 한번 깨어나시기를 적극적으로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11절에서는 그런 여호와께서 구속하신 자들이 반드시 시온으로 돌아오게 될 것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12절 부터는 여호와께서 그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1:12 이르시되너 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 곧 나이니라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 같이 될 사람의 아들을 두려워하느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대답하실 때에나 곧 나이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치 앞에서 간절히 주님을 찾을 때에 깨소서 깨소서라고 반복한 것에 대해서 그대로 받아서 응답하시는 것처럼 여호와께서 적극적으로 내가 내가라고 응답하십니다. 12절에서 여호와께서는 자신이 누구이신가를 말씀하시면서 위로하는 자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12절 하반절과 13절에서는 여호와 자신과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비교하시면서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 것을 강조하십니다. 

그러면서 14절부터는 포로로 잡힌 그들이 반드시 풀릴 것과 그들을 풀어주실 여호와는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다시 한번 확신시켜 주십니다. 14절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1:14 결박된 포로가 속히 놓일 것이니 죽지도 아니할 것이요 구덩이로 내려가지도 아니할 것이며 그의 양식이 부족하지도 아니하리라 라고말씀하십니다

기적과 같은 말씀입니다. 남의 나라에 잡혀가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희망의 말씀을 주시고 있습니다. 포로 생활에서 속히 놓이게 될 것이며 양식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라는 여호와의 보호하심에 대한 약속의 말씀이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약속을 왜 믿어야만 하는가? 그것은 여호와의 능력이 무한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약속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을 오늘 말씀에서 여호와께서 친히 강조하시고 계십니다. 15절에 보니 그분은 바다를 휘저어서 파도를 일으키시는 분이신데 16절에 보니 바로 그분이 친히 그분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의 입에 넣었고 손으로 그늘을 만들어 그들을 보호하시며 그분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부르셨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오늘 말씀이 마무리가 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적용은 삶의 의미를 찾았는가? 아니면 잃어버렸는가?”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정말 이상하게 생각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13절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13절의 말씀은 9절 말씀과 대조가 됩니다. 9절에서 이사야는 어떻게 기도합니까?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지금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가 어떤 분이신지를 기억하면서 그분이 이미 행하신 일을 적극적으로 기억하면서 이미 그렇게 행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제는 그들을 도와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그런 이사야의 간구를 들으시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를 정확하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백성이 여호와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라는 신은 알고 여호와를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분이 과거에 무슨 일을 행하셨는가? 그러므로 현재와 미래에 그분이 어떤 일을 하실 수 있는가? 그것을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가 어떤 분이신가를 잊어버렸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그 결과로 인하여서 필연적으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위대하심을 잊었기 때문에 그 당연한 결과로서 그들을 핍박하는 제국들이 그들의 눈에 너무나 거대해 보이고 그래서 그 결과로 인하여서 이스라엘의 마음에 두려움이 몰려들어온다는 것을 분명히 지적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의 문맥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사람을 두려워하고 압제자를 두려워하는 것 그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진짜 문제는 여호와가 누구이신가를 잊어버린 것 그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최근에 읽고 있는 책 중 하나가 빅터 프랭클 박사가 쓴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입니다. 이 사람은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인데 그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 잡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수용소는 나치가 세운 강제 수용소 중에 가장 큰 수용소인데 1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살해당한 곳입니다

빅터 프랭클 박사는 죽음을 넘나드는 모든 끔찍한 경험들 속에서 결국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이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입니다. 책은 24개 언어로 번역이 되고 무려 1억 권이 팔린 책입니다. 빅터 프랭클 박사는 자신이 직접 수용소에 갇힌 상태에서 주변에 갇혀서 고통 받는 이들을 관찰하면서 중요한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인간의 정신 상태가 용기와 희망을 잃어버린다면 육체적으로 얼마나 약해지는가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특히 사람들이 많이 죽는 기간이 성탄절에서 새해로 넘어가는 시기였습니다. 그때에 사람들의 사망하는 원인은 가혹한 노동조건이나 식량 사정이 악화되거나 혹은 전염병 때문이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수감자들은 이번 성탄절에는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강한 희망을 가지지만 정작 그 시간이 다가와도 희망의 소식이 전혀 들리지 않을 때에 용기를 잃고 절망감에 사로잡히고 그리고 결국에는 저항력이 급격히 떨어져서 그 중에 많은 이들이 사망에 이른 것입니다. 이 책의 깊이를 한마디로 말하기는 쉽지 않지만 결국 빅터 플랭클 박사는 심리학적인 치료와 회복이라는 것은 한 사람이자신의 삶에 있어서 진정한 의미를 가질 때에 일어난다 라는 것을 책을 통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오늘 본문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단순히 기억하라 라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오늘의 말씀은 능력의 여호와를 기억하여 그분의 일하신 것들을 충분히 기억하여 그분이 여전히 현재에서 일하고 계심을 기억하며 적극적으로 그분을 찾으면서 그분을 통하여서 현실의 삶 속에서 삶의 의미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기억하라에서 시작하지만, 최종적인 결론은 하나님 안에서 삶의 희망과 의미를 찾는 것이 바로 오늘의 핵심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서 아무런 목적도 찾지 못하고 그냥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신은 우연히 태어났으며 자신은 그저 운명의 장난에 맡겨졌으며 어쩔 땐 좋은 일 어쩔 땐 나쁜 일 속에서 아무런 의미 없이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오늘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국제적인 정세의 압박 속에서 두려워하며 떨고 괴로워할 때에 그리고 나중에 바벨론의 포로 된 자들이 나라를 잃어버리고 타국에 끌려가서 가장 크게 절망하고 있을 때에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히 기억하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친히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시며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시는 그들의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것을 기억하여 현재의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하고 그분 안에서 현재의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하고 바로 그 과정을 통해서 고난과 두려움을 견뎌낼 수 있다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서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자신을 한번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어떤 분이시며 그분께서 현재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시는 지를 말씀을 통해 기억하기를 원삽니다. 로마서 324절에 말씀하십니다.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로마서 81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여기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된 자들이며 하나님의 전적이며 주권적인 능력과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하나님의 인 치심으로 말미암아 죽음도 극복하는 자들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자들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아마 우리의 현재의 삶 속에서 어려움이 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의 현재의 삶 속에서 실패하지 않는 사람도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세상 적으로 성공하는 것이나 순탄한 삶을 살아가는 것 그 것 자체에 우리의 의미와 희망을 둔다면 우리는 어쩌면 아우슈비츠에서 죽어가던 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세상적인 성공을 늘 누리지는 못하고 언제나 승리하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인생의 성공과 잘나가는 것 그 자체에 우리의 삶의 의미를 둔다면 우리가 몸은 자유로울지 모르지만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성공과 잘되는 것에 얽매여서 혹시라도 단 한번이라도 내가 실패하거나 나에게 고난이 찾아오면 완전히 나의 내면이 무너져 버리고 삶의 의미와 희망을 다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의미와 희망을 우리 자신에게 두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에 두라고 말씀하시며 그 하나님을 더욱 적극적으로 찾고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9절 말씀에서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라고 간절히 찾는 것은 헛된 거짓 신을 부르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살아계시며 지금도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그분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그를 통하여 복을 주시기로 작정하시면서 아브라함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 세상이 구원 받는 약속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큰 존재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맹세하시며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여호와께서는 지금 우리에게 약속하신 온전한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 자신의 독생자를 역사 가운데 기꺼이 내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619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6:19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영원한 중보자가 되셔서 비록 답답하고 괴로운 현실 속에서도 여전히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지금도 일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현재의 의미와 미래의 소망은 흔들릴 수 없이 확고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강조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려운 속에서도 실패 속에서나 자신의 좌절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그리스도 안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면 그리고 심지어 죽음조차 넘어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에 삶의 진정한 희망과 의미를 둔다면 우리는 어떤 고난도 능히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기는 오늘도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진정한 삶의 의미를 발견하기를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며 오직 그분을 사랑하며 그분과 힘께 동행하며 적극적으로 그분의 도움을 구하며 오직 그분 안에서 믿음의 길을 힘써 걸어가시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시면서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인생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분명히 기억하기 원합니다. 우주와 지구와 세상을 친히 만드신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나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자비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삶의 의미와 희망을 찾기 원합니다. 누가 뭐래도 여전히 나는 사랑 받는 사람이고 영원한 생명과 천국을 상속 받은 사람이고 죽음조차도 이겨낼 사람임을 기억하고 살아가도록 오늘도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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