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한편 한편이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모든 원고들을 완성하는 과정이 참 고되고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하지만, 그 설교를 통해서 제 자신을 더 하나님 앞에서 성찰하게 되고 성도의 삶의 의미를 발견해간다는 점에서 제 자신에게 저의 설교가 너무나 귀하게 느껴집니다. 설교야 말로, 목회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가장 큰 축복이 틀림 없습니다.
최근에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으면서, 성경을 완전히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것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등장하는 거의 대부분의 내용이 성경적인 맥락과 닿아 있다는 것입니다.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고 본질적으로는 분명히 차이가 있지만, 그 방향성은 성경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과 거의 동일하다고 느꼈습니다. 책에 대한 간단한 리뷰는 아래 링크를 통해 읽으실 수 있습니다.
* 책 어디까지 읽어 봤니?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 내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서
https://jungjinbu.blogspot.com/2021/08/blog-post_6.html
아래 설교는,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고 영향을 받은 설교입니다. 그리고 저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설교 중 한편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삶의 의미를 어떻게 발견할 것인가, 과연 성도의 궁극적인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맥락으로 준비된 설교입니다. 제가 이 설교를 통해 하나님 안에서 안식과 평안을 누리게 된 것 처럼,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그런 은혜를 함께 누릴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어제의 말씀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어제의 말씀 속에서는 예루살렘을 회복시키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 속에서는 그 일을 속히 이루어주시기를 간구하는 내용입니다.
오늘 말씀은 전체적으로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로는 9절에서 11절 까지 말씀인데 “하나님을 깨우는 기도” 라고 소제목을 잡을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둘째로는12절에서 13절까지 말씀인데 “여호와를 다시 한번 기억하라” 라고 소제목을 잡을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4절에서 16절까지 말씀인데 “만군의 여호와가 행하실 것이다” 라고 소제목을 잡을 수 있겠습니다. 이 내용을 가지고함께 말씀 묵상하기를 원합니다.
오늘 말씀에 9절에 이렇게 간구하고 있습니다. 51:9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어제의 말씀 속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로하시고 그들을 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시지만 아마도 그 약속이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선지자가 느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는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주님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주님은 사람이 아니시기 때문에 주무신 적이 한 번도 없으시고 잠시라도 쉬면서 행동하지 않은 적도 없으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말씀 속에서 선지자의 간구는 주님께서 깨어나시고 주님께서 그분의 팔을 움직이시며 능력을 베풀어 달라고 그렇게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적극적인 간구는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확신하기 때문에 간구할 수 있다는 것을 9절과 10절을 통해서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9절 말씀에서 라합과 용이라는 것은 거대한 이집트 제국과 파라오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아무런 배경이나 이유 없이 여호와께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구원하시며 이집트 군사들을 무찌르셨던 바로 그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면서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건의 핵심이 10절에 홍해를 건넌 사건입니다. 10절의 말씀으로 기도하면서 바다의 깊은 물을 말리시고 길을 내셔서 그분의 백성을 걸어가게 하신 그 여호와께서 다시 한번 깨어나시기를 적극적으로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11절에서는 그런 여호와께서 구속하신 자들이 반드시 시온으로 돌아오게 될 것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12절 부터는 여호와께서 그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1:12 이르시되너 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 곧 나이니라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 같이 될 사람의 아들을 두려워하느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대답하실 때에나 곧 나이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치 앞에서 간절히 주님을 찾을 때에 깨소서 깨소서라고 반복한 것에 대해서 그대로 받아서 응답하시는 것처럼 여호와께서 적극적으로 내가 내가라고 응답하십니다. 12절에서 여호와께서는 자신이 누구이신가를 말씀하시면서 위로하는 자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12절 하반절과 13절에서는 여호와 자신과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비교하시면서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 것을 강조하십니다.
그러면서 14절부터는 포로로 잡힌 그들이 반드시 풀릴 것과 그들을 풀어주실 여호와는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다시 한번 확신시켜 주십니다. 14절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1:14 결박된 포로가 속히 놓일 것이니 죽지도 아니할 것이요 구덩이로 내려가지도 아니할 것이며 그의 양식이 부족하지도 아니하리라 라고말씀하십니다.
기적과 같은 말씀입니다. 남의 나라에 잡혀가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희망의 말씀을 주시고 있습니다. 포로 생활에서 속히 놓이게 될 것이며 양식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라는 여호와의 보호하심에 대한 약속의 말씀이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약속을 왜 믿어야만 하는가? 그것은 여호와의 능력이 무한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약속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을 오늘 말씀에서 여호와께서 친히 강조하시고 계십니다. 15절에 보니 그분은 바다를 휘저어서 파도를 일으키시는 분이신데 16절에 보니 바로 그분이 친히 그분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의 입에 넣었고 손으로 그늘을 만들어 그들을 보호하시며 그분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부르셨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오늘 말씀이 마무리가 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적용은 “삶의 의미를 찾았는가? 아니면 잃어버렸는가?”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정말 이상하게 생각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13절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13절의 말씀은 9절 말씀과 대조가 됩니다. 9절에서 이사야는 어떻게 기도합니까?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지금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가 어떤 분이신지를 기억하면서 그분이 이미 행하신 일을 적극적으로 기억하면서 이미 그렇게 행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제는 그들을 도와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그런 이사야의 간구를 들으시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를 정확하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백성이 여호와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라는 신은 알고 여호와를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분이 과거에 무슨 일을 행하셨는가? 그러므로 현재와 미래에 그분이 어떤 일을 하실 수 있는가? 그것을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가 어떤 분이신가를 잊어버렸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그 결과로 인하여서 필연적으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위대하심을 잊었기 때문에 그 당연한 결과로서 그들을 핍박하는 제국들이 그들의 눈에 너무나 거대해 보이고 그래서 그 결과로 인하여서 이스라엘의 마음에 두려움이 몰려들어온다는 것을 분명히 지적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의 문맥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사람을 두려워하고 압제자를 두려워하는 것 그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진짜 문제는 여호와가 누구이신가를 잊어버린 것 그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최근에 읽고 있는 책 중 하나가 빅터 프랭클 박사가 쓴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입니다. 이 사람은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인데 그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 잡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수용소는 나치가 세운 강제 수용소 중에 가장 큰 수용소인데 1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살해당한 곳입니다.
빅터 프랭클 박사는 죽음을 넘나드는 모든 끔찍한 경험들 속에서 결국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이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입니다. 책은 24개 언어로 번역이 되고 무려 1억 권이 팔린 책입니다. 빅터 프랭클 박사는 자신이 직접 수용소에 갇힌 상태에서 주변에 갇혀서 고통 받는 이들을 관찰하면서 중요한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인간의 정신 상태가 용기와 희망을 잃어버린다면 육체적으로 얼마나 약해지는가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특히 사람들이 많이 죽는 기간이 성탄절에서 새해로 넘어가는 시기였습니다. 그때에 사람들의 사망하는 원인은 가혹한 노동조건이나 식량 사정이 악화되거나 혹은 전염병 때문이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수감자들은 이번 성탄절에는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강한 희망을 가지지만 정작 그 시간이 다가와도 희망의 소식이 전혀 들리지 않을 때에 용기를 잃고 절망감에 사로잡히고 그리고 결국에는 저항력이 급격히 떨어져서 그 중에 많은 이들이 사망에 이른 것입니다. 이 책의 깊이를 한마디로 말하기는 쉽지 않지만 결국 빅터 플랭클 박사는 심리학적인 치료와 회복이라는 것은 한 사람이자신의 삶에 있어서 진정한 의미를 가질 때에 일어난다 라는 것을 책을 통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오늘 본문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단순히 기억하라 라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오늘의 말씀은 능력의 여호와를 기억하여 그분의 일하신 것들을 충분히 기억하여 그분이 여전히 현재에서 일하고 계심을 기억하며 적극적으로 그분을 찾으면서 그분을 통하여서 현실의 삶 속에서 삶의 의미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기억하라에서 시작하지만, 최종적인 결론은 하나님 안에서 삶의 희망과 의미를 찾는 것이 바로 오늘의 핵심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서 아무런 목적도 찾지 못하고 그냥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신은 우연히 태어났으며 자신은 그저 운명의 장난에 맡겨졌으며 어쩔 땐 좋은 일 어쩔 땐 나쁜 일 속에서 아무런 의미 없이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오늘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국제적인 정세의 압박 속에서 두려워하며 떨고 괴로워할 때에 그리고 나중에 바벨론의 포로 된 자들이 나라를 잃어버리고 타국에 끌려가서 가장 크게 절망하고 있을 때에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히 기억하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친히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시며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시는 그들의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것을 기억하여 현재의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하고 그분 안에서 현재의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하고 바로 그 과정을 통해서 고난과 두려움을 견뎌낼 수 있다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서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자신을 한번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어떤 분이시며 그분께서 현재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시는 지를 말씀을 통해 기억하기를 원삽니다. 로마서 3장 24절에 말씀하십니다.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로마서 8장 1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여기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된 자들이며 하나님의 전적이며 주권적인 능력과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하나님의 인 치심으로 말미암아 죽음도 극복하는 자들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자들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아마 우리의 현재의 삶 속에서 어려움이 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의 현재의 삶 속에서 실패하지 않는 사람도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세상 적으로 성공하는 것이나 순탄한 삶을 살아가는 것 그 것 자체에 우리의 의미와 희망을 둔다면 우리는 어쩌면 아우슈비츠에서 죽어가던 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세상적인 성공을 늘 누리지는 못하고 언제나 승리하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인생의 성공과 잘나가는 것 그 자체에 우리의 삶의 의미를 둔다면 우리가 몸은 자유로울지 모르지만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성공과 잘되는 것에 얽매여서 혹시라도 단 한번이라도 내가 실패하거나 나에게 고난이 찾아오면 완전히 나의 내면이 무너져 버리고 삶의 의미와 희망을 다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의미와 희망을 우리 자신에게 두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에 두라고 말씀하시며 그 하나님을 더욱 적극적으로 찾고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9절 말씀에서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라고 간절히 찾는 것은 헛된 거짓 신을 부르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살아계시며 지금도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그분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그를 통하여 복을 주시기로 작정하시면서 아브라함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 세상이 구원 받는 약속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큰 존재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맹세하시며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여호와께서는 지금 우리에게 약속하신 온전한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 자신의 독생자를 역사 가운데 기꺼이 내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6장 19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6:19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영원한 중보자가 되셔서 비록 답답하고 괴로운 현실 속에서도 여전히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지금도 일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현재의 의미와 미래의 소망은 흔들릴 수 없이 확고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강조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려운 속에서도 실패 속에서나 자신의 좌절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그리스도 안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면 그리고 심지어 죽음조차 넘어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에 삶의 진정한 희망과 의미를 둔다면 우리는 어떤 고난도 능히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기는 오늘도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진정한 삶의 의미를 발견하기를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며 오직 그분을 사랑하며 그분과 힘께 동행하며 적극적으로 그분의 도움을 구하며 오직 그분 안에서 믿음의 길을 힘써 걸어가시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시면서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인생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분명히 기억하기 원합니다. 우주와 지구와 세상을 친히 만드신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나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자비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삶의 의미와 희망을 찾기 원합니다. 누가 뭐래도 여전히 나는 사랑 받는 사람이고 영원한 생명과 천국을 상속 받은 사람이고 죽음조차도 이겨낼 사람임을 기억하고 살아가도록 오늘도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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