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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9월 10일 수요일

삶으로 드리는 찬양 (232) - 이 때를 위함이라



1. 가사 살펴보기

기댈 곳 없는 연약한 인생 안에 작은 믿음 주께서 심으셨네
고난을 견딜 자녀로 빚으시네 이 때를 위함이라 

고된 시간을 주신 이유 있으니 이 시련의 끝을 묻지 않으리
작은 믿음을 온전히 드리리라 이 때를 위함이라 

주의 인자는 영원하시며 주의 선하심 신실하시네
크신 자비로 날 덮으시며 예수 흔적만 남게하소서 

여전히 벅찬 인생의 시간에도 이제 나는 헤매이지 않으리
십자가 사랑 구원하신 큰 은혜 예수를 인함이라

 

2. 곡 소개

곡은, 마커스워십의 항복을 승리로라는 앨범에 수록된 곡이다. 이 곡은, 성도의 고난 속에도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있으며, 신실한 하나님께서 주님의 목적을 위해서 주님의 자녀를 빚어 가시는 그분의 놀라운 일하심에 대해서 믿음으로 고백하는 아름다운 곡이다.

 

3. 말씀으로 바라보기

에스더 4:14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

모르드개는 에스더가 왕후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을 하나님의 섭리로 보았고, 그녀를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여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도록 세우셨다고 격려했습니다.

Joel R. Beeke, Michael P. V. Barrett, and Gerald M. Bilkes, eds., The Reformation Heritage KJV Study Bible (Grand Rapids, MI: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14), 698.

로마서 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5: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베드로전서 1: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박해와 고난을 겪으며 시험을 받지만, 썩지 않는 유업과 확실한 구원 안에서 기뻐할 수 있다는 것으로 성도들을 더욱 격려하였습니다.

Terry L. Wilder, “1 Peter,” in CSB Study Bible: Notes, ed. Edwin A. Blum and Trevin Wax (Nashville, TN: Holman Bible Publishers, 2017), 1976.

예레미야애가 3:22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3:23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에베소서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4. 찬양에 대한 묵상

이 찬양은, 성도가 가지고 있는 가장 위대한 소망을 고백하고 있는 탁월한 곡이다. 세상의 사람들은 인생이 그저 우연히 흘러가는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인을 선택하시고 구원하시며 그분의 자녀로 삼으시고, 그분의 주권적이며 위대하신 뜻 가운데 성도를 이끌어 가신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주님의 자녀들이 고난을 받지만, 그러나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욱 닮은 자로 빚어 가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성도를 성실하게 이끌어 가시는데, 하나님이 필요하신 바로 그 때를 위해서 우리를 연단 시키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하나님의 자녀의 삶은 반드시 의미가 있는 것이며, 환난 중에도 낙심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나를 성장시키시고 단련하심을 믿고 각자의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주실 그 상급을 믿고 기대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찬양을 부르면서,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다시 한번 깨닫고, 고난 중에도 견고한 소망을 발견하며 하나님의 뜻 가운데 위로와 기쁨과 용기를 얻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기대한다.

 * '삶으로 드리는 찬양' 전체 묵상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06/1_30.html    

2024년 2월 22일 목요일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 마가복음 5장 35-43절 설교

 

예수님께서 어느날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쌓여 있는데 유대인의 회당을 책임지는 야이로 라는 사람이 찾아왔습니다그는 예수님께 아주 간곡하게 부탁했습니다. 그것이 5 23절 말씀입니다.  


5:23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라고 예수님 앞에서 간곡하게 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야이로와 함께 바로 그의 집으로 걷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 속에 오랫동안 병으로 아팠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가진것을 다 써서 의사들을 만났지만 도대체 낫지가 않았습니다. 그 여인이 마음에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옷에 내가 손만 대도 병이 나을 수 있을 것 같다” 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몰래 다가가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댑니다

 

그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몰래 손을 대자 놀랍게도 여인의 몸이 치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을 무리 중에서 굳이 찾으시고 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마음이 바짝바짝 타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입니다. 왜 그런가? 시간이 지체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빨리 본인의 집으로 가셔야 하는데 빨리 가서 치료해 주셔야 되는데 자꾸 늦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들이 달려 왔어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것이 35절 말씀 하반절입니다. 5: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라고 너무나 슬픈 소식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야이로의 마음이 무너졌습니다. 왜 그런가? 사랑하는 딸이 결국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죽은 딸을 누가 어떻게 도와줄 수 있겠는가? 사람들이 마치 그런 야이로의 마음을 대변하듯이 이렇게 말을 합니다. “회당장님 이제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이 오신다고 해도 이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더 이상 예수님을 괴롭게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분이 온다고 해서 바뀔 것이 전혀 없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시점에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반응 하셨을까요? “야이로야 미안하다, 내가 좀더 빨리 갔어야 되는데 벌써 너의 딸이 죽었다니 어떻게 하겠느냐? 나는 이제 너의 집으로 가도 소용없으니 다시 돌아가겠다” 이렇게 말씀 하셨을까요

 

절대로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말을 들은 척도 안하셨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들의 불신의 말을 무시하신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딸의 죽음의 소식으로 인해 충격에 빠져 어쩔 줄 모르는 야이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영혼 깊이 자리 잡고 있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언제 두려움에 사로잡히는가?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일 앞에서 두려움에 사로 잡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이성과 한계를 뛰어넘는 절망 앞에서 인간은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인간도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도 죽음이라는 그 절대적인 운명 앞에서는 그 어떤 힘도 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께서 야이로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시는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분명한 명령의 말씀입니다. 야이로가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잠식당해서 고통스러워할 것이 아니라 지금 자신과 함께 있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믿고 예수님이야 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진정한 구원자이심을 분명하게 믿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야이로와 함께 도착해 보니 딸의 죽음으로 인해 난리가 났습니다. 그 온 집안에 곡소리가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39절 말씀입니다. 5:3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성경은 사람들의 반응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40절 처음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비웃더라”

 

저는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지금 야이로가 처한 이 모든 상황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부터 야이로의 상황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딸의 죽음의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의 반응은 무엇인가? 사실상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위대한 선지자일지는 모르겠지만, 수 많은 기적들을 일으킨 사람일지는 모르겠지만, 죽음 앞에서는 무기력한 인간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 불신의 분위기 속에서 그 참담한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야이로를 향해서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불신의 분위기는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도착하셔서 소녀가 자고 있다고 말씀하셨을 때에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예수님을 비웃은 것입니다. 아마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야이로의 볼이 부끄러움을 붉어졌을 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노골적으로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한 것입니다

 

아마도 야이로는 방금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마음에 떠올렸을 것입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예수님을 믿을 때에 그 모든 두려움과 비웃음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을 야이로는 그 자리에서 더 절실하게 느꼈을 것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비웃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40절 말씀에 보니 예수님께서는 비웃는 자들을 다 내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그분을 비웃는 자들은 그분과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동행할 수 있는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데려가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아이의 부모와 함께 아이의 시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무릎을 꿇고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원래 구약의 율법에 따르면 시체를 만지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하는 행동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것을 전혀 신경쓰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소녀의 시신을 잡고 말씀하십니다. “달리다굼!”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라는 뜻입니다. 그 말씀을 하시니까 죽었던 소녀가 그 자리에서 살아났습니다. 살아날 뿐만 아니라 곧 일어나서 걸어 다녔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랐다” 왜 그런가? 그 자리에 있던 그 누구도 설마 죽었던 아이가 살아날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이라도 죽은 사람은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분은 죽음 조차 다스리시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권능의 말씀 단 한마디로 죽은 딸을 살리심으로 자신은 살아계신 여호와의 아들이시며 생명의 주인이심을 친히 증명하셨습니다. 그분은 죽음을 조차 이기시는 분이시며 생명 그 자체이심을 바로 이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기적의 사건이 일어난지 벌써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지금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쪽은 믿음의 사람들이 있고 또 한쪽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렇게 비웃는 것입니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다, 어떻게 죽음 이후에 생명이 있는가? 어떻게 죽은 이를 잔다고 부를 수 있는가?

 

그러나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삶의 모든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는 이들에게 그리고 심지어 죽음을 앞두로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을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왜 이 말씀이 중요한가?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우리의 믿음을 지킨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살아가는 이들을 비웃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봐야 아무 소용 없다 도대체 왜 그렇게 어리석게 살아가는 것인가? 왜 굳이 손해를 감수하고 살아가는 것인가? 그래봐야 무슨 이득이 있다고 저러는 것인가? 정말 우리가 진실한 크리스천으로 살아간다면 이러한 비웃음을 당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심지어 때로는 우리의 마음에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내가 굳이 이렇게 까지 해야 하는가? 좀 대충 순종하면서 살아도 괜찮지 않겠는가? 세상의 비웃음과 조롱 속에서 우리의 마음이 약해지면서 우리의 믿음도 연약해진다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 6절에서 9절에 이렇게 말씀하시지 1: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1: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오늘 이 기적의 사건 가운데 예수님 바로 옆에서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비웃던 수 많은 이들의 조롱을 바로 옆에서 함께 받았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을 이렇게 격려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여러 시험으로 잠깐 근심하게 되지만 그러나 진심으로 기뻐하라, 왜냐하면 우리 앞에 영원한 기쁨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험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오히려 연단을 받는 것이다. 주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많은 칭찬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있다는 그 사실이, 그분이 우리의 마음을 감격시키시고 넘치는 행복으로 지금 우리에게 부어주시고 계시다는 그 사실이, 우리가 믿음을 가진 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러한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오심과 그분을 향한 우리의 믿음과, 그리고 그분이 주실 그 칭찬과 영광과 존귀가 왜 그렇게도 중요한 것인가? 그것은 만약 우리에게 그 미래가 없다면 현재의 삶에 대한 의미를 잃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서 마지막까지 살아 남았던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은, 그 안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인간의 본질을 꿰 뚫는 중요한 진리를 발견했습니다

 

강제 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은 그 환경 자체가 그들의 모든 희망을 빼앗아가 버렸습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으니 현재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미래의 나를 보지 못하는 사람은 삶을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말 그대로 이성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미래의 목표를 볼 수 없어서 몸과 마음이 시들어가는 사람은, 과거의 생각에 파묻혀 살게 됐다. 그들은 강제 수용소에서의 시련을 내적 힘을 기르는 시험으로 여기지 않았다. 삶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업신여겼다. 그들은 두 눈을 감고 과거에서만 살려고 했다. 그들의 삶은 의미가 없어졌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그 어떤 인간도 넘어서지 못한 죽음이라는 절망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기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죽은 소녀에게 다시 생명을 주심으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친히 죽음을 이기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불신의 시대에, 그저 자기 탐욕을 채우는데 급급한 이 시대 속에서, 고아와 과부를 돌보며 선을 행하며 손해를 보며 주님의 뜻을 행하며 우리의 삶을 기꺼이 주님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미래에 반드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이루실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모든 눈물을 친히 닦아주시며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고 칭찬하실 그 날을 마음에 흔들림 없이 품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가장 근본적인 원동력이며, 주님의 자녀의 정체성의 전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모든 고난 속에서도 위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고통과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당당하시기를 바랍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붙드시기를 바랍니다. 전능자이시며 역사의 주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기꺼이 오늘도 주님을 위하여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마지막 날에 사랑하는 주님을 뜨겁게 그리고 온전히 만날 것을 사모하면서, 우리의 모든 삶을 주님을 위하여 살아가시는 모든 사랑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시간에 말씀 묵상하시면서 기도하기 원합니다그리스도께서 진정한 구원자이시며 우리 인생의 주권자이심을 믿습니다또한 다시 오실 주님이심을 믿습니다주님을 기대하며 오늘을 살아가기를 원합니다가장 명예로운 주님의 자녀의 모습으로 살기를 원하오니 우리의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주시고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게 하여주시옵소서십자가의 길을 힘써 걸어가게 하여주시옵소서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문" 전체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11/blog-post_4.html 

2022년 9월 28일 수요일

'칭찬'이 '취향'이 아닌 세 가지 이유

 

요즘에 어른이 된다는 것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금방 떠오르는 것은 점잖은 사람입니다. 목소리를 지나치게 높이지 않는 것입니다. 크게 웃지 않는 것입니다. 감정을 쉽게 표현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나를 감추는 것입니다. 적당한 수준에서만 자신을 오픈하는 것입니다. 나의 수를 먼저 보이지 않고 상대방의 수를 알아내는 것입니다. 억지스럽다고 생각하실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사람들이 가진 어른의 개념에 대한 저의 지나친 일반화일까요? 

요즘에, 저의 삶과 목회를 많이 돌아보고 있습니다. 너무 이상주의에 빠져서 살아온 것은 아닐까? 너무 경직된 나의 관점으로 세상과 교회를 바라보고 평가했던 것은 아닐까? 나의 생각이 너무 옳다고만 주장했던 것은 아닐까? 나의 완고함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말 못할 피해를 준 것은 아닐까? 그리고 다른 사람이 보기에 지나친 칭찬이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이것이 저의 마음 속에 있는 생각들입니다.

이십대 초반의 어느날,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사람들은 칭찬을 하지 않을까? 과장이 아니라, 칭찬을 할 줄 아는 혹은 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 주변을 좀 더 주의 깊게 돌아보았습니다. 빛나는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또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귀한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제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정말 이분들이 귀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렇게 귀한 분들이 너무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참 아쉬웠습니다. 아무도 그들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이 매우 이상하게 생각되었습니다. 왜 아무도 이 사람들을 격려해주지 않을까? 왜 이들의 사랑과 수고와 헌신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일까? 그리고 제 마음에는, 저라도 사람들의 장점을 알고 칭찬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칭찬을 실천하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십년이 흘렀습니다.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제가 느낀 것은, 제가 "유별나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저의 행동과 말은 한국적인 어른이 된다는 것과는 거리가 상당히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정목사는 지나치게 칭찬하는 사람이야" 라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맥락 속에서 다시 한번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왜 그렇게 살아왔던 것일까? 그리고 왜 칭찬하는 것일까? 

제가 약간 당황했던 부분은, "저의 칭찬의 행위 자체"를 유별나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저를 유별나게 생각하는 것은, 제가 잘못했다면 당연히 제가 스스로를 자제하고 잠잠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자신에 대한 평가는 제가 감당해야 할 부분입니다. 하지만 저의 칭찬하는 행위 자체가, 마치 "저의 개인적 취향"이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한다는 평가에 동의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칭찬이 과연 취향인가? 며칠 동안 고민했습니다. 제 내면에서 이 질문이 매우 진지했던 것은, 이것이 저의 삶과 목회에 있어서 결정적인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두가지 갈림길이 나타납니다. 만약에 칭찬이 단순히 저의 개인적인 취향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면 저는 당장 오늘 그 행위를 그만 두어야 할 것입니다. 저의 취향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필요도 혹은 그럴 이유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칭찬이 취향이 아니라면, 다시 말해서 그것이 어떤 절대적인 혹은 성경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전혀 문제가 달라집니다. 만약 그렇다면, 칭찬이라는 것은 나의 감정 다른 사람의 감정을 뛰어넘는 이유를 가지는 것입니다. 단순히 내가 하고 싶고 하기 싫고, 내가 듣고 싶고 듣기 싫고의 기준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것이 옳은 것이라면, 바로 오늘부터 평생을, 저의 모든 것을 걸고 개인과 공동체가 함께 그 방향을 향해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취향이라는 것은, 한 사람에게 국한 된 자신의 선호와 자신이 좋아하는 방향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저의 내면을 살펴보니, 칭찬이라는 행위 자체를 결코 취향의 문제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그것이 본질적인 목회의 방향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이 성경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한 것이지, 저의 개인적인 취향 자체가 칭찬이 맞다 라고 생각해 본적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말씀드리는 이 세가지는, "칭찬이 취향이 아닌 이유들" 입니다.

첫째로 칭찬이 취향이 아닌 이유는, "칭찬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추상적일 수 있지만 동시에 매우 구체적이고 중요한 신학적인 이유입니다. 제가 가끔씩 크게 놀라는 것은, 사람들의 하나님에 대한 오해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에, 사람들의 머리 속에 계시는 하나님은 "인색한 하나님"이십니다. 자녀들이 무엇을 하든지 관심이 없는 분이시며,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든지 반응이 없는 분이시며, 그저 나중에 다 죽은 이후에 천국에 가면 그제서야 잘했다고 한마디 툭 던지시는 그런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수 많은 믿음의 선진들의 귀한 믿음의 행위들과 결단들을 굳이 성경에 기록해 놓았을까요? 저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칭찬하기 위해서라고 확신합니다. 표현이 이상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은 수다쟁이이 아버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들의 장점을 빼곡하게 적어놓으셨고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에 믿음의 사람들의 장점들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 적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그것 중에 단 하나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 기록된 단점을 보면서 그들이 인간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의 중요한 결단들과 위대한 도전들은 하나님께서는 소중하게 기록해 놓으신 것이며,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칭찬을 통해서 그들을, 그리고 그들을 그렇게 만들어내시는 하나님을 칭찬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공동체 안에서 칭찬이 사라진다고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어쩌면 당신이 지금 경험하는 그 공동체일 수도 있겠습니다. 과연 그것은 어떤 공동체가 될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이루신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자라가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하나님을 반영하는 곳"이며, "하나님을 반영해야만하는 곳"입니다. 설교를 아무리 그럴 듯 하게 해도, 나라는 인격체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실질적으로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경험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교회에서 칭찬이 사라진다면, 사실상 우리는 하나님을 제대로 경험할 수 없습니다. 

칭찬이 없는 공동체는 하나님을 이렇게 "실제적으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무슨 행동을 해도 관심 없는 하나님, 내가 잘한 것도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는 하나님, 내가 잘못한 것만 찾아내서 벌주시는 하나님으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이 이야기하는 하나님, 가장 자비로우시며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고 우리에게 지금 이 순간에 풍성한 사람을 부으시는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 없는" 그런 냉혹한 경험을 심지어 교회에서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야기하지만, 하나님이 부재하신 공동체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칭찬을 통해서 모든 분들이 성경적인 하나님을 경험했으면 좋겠습니다. 

둘째로 칭찬이 취향이 아닌 이유는, "칭찬은 관계를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사실 칭찬이라는 것은 정신적인 노동에 가깝습니다. 성실하게 의미있는 칭찬을 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관찰해야 합니다. 만약에 어떤 일의 맥락을 가지고 있다면, 그 일에서 그 사람이 가진 역할을 이해하고, 그 사람이 자신에게 맡겨진 그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면밀한 관찰과 세심한 배려의 과정을 통해서 결과적으로 칭찬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꼭 일과 연관 짓지 않아도, 그 사람 자체가 가진 어떤 개인적인 장점을 파악하는 것 역시 관찰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단순히 그 사람 존재를 칭찬해도 괜찮겠지만, 그것보다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부분을 살펴서 칭찬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장점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더 나아가 하나님이 주신 가능성이기 때문에 그것을 충분히 발현하도록 돕는 것 역시 성경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칭찬이라는 것은 "한 사람에 대한 깊은 관심의 표현"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관심과 사랑이 없다면" 절대 칭찬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 칭찬을 통해서 드러내는 것입니다. 당신과 나의 관계는 그저 일로 만난 사이가 아니라, 당신의 삶 자체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당신의 존재에 대해서 마음을 쓰고 있으며, 삶을 나눌 수 있는 관계로 나아가고 싶다는 표현이 바로 칭찬입니다. 

왜 관계를 만들어내는 칭찬이 그렇게 중요할까요? 제가 목회를 하면서 느낀 것은, 교회는 얼마든지 "일 중심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회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오히려 회사보다 더 못할 수도 있습니다. 행정적인 일들과 교회의 일정등을 조율하다 보면, 마치 그것이 교회의 본질이라고 저 조차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사실 전혀 아닙니다. 교회의 본질은, "관계"입니다. 한 사람과 한 사람 그리고 관계 안에 교회가 존재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고 받는 이야기들은 어떤 것인가요? 이런 질문들입니다. 이것이 잘 되었습니까? 저것이 잘 되었습니까? 저것이 일정대로 진행되고 있습니까? 이러한 것들은 fact에 대한 나열이지 관계에 대한 단어가 아닙니다. 조직이라는 관점에서는 일을 잘 돌아가도록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마치 그것 자체가 교회를 만들어내는 본질적인 요소라고 생각한다면 저는 그것이야 말로 너무나 큰 아쉬움이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현대 교회가 경험하는 본질적인 실패의 원인일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저에게 있어서 칭찬이라는 것은, 단순히 일로 끝나는 사이, 행정적으로 돌아가는 어떤 조직화 되어 버리는 변질되는 교회에 대한 반발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인간으로 그리고 관계로 존재하는 것이지, 일의 진행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와 함께 하는 모든 분들과의 관계가 풍성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저와 함께 하는 분들의 모든 부분을 살피고 칭찬하고 관계를 중시하기를 원합니다. 

셋째로, 칭찬이 취향이 아닌 이유는, "칭찬을 통해서 공동체의 방향을 잡아가기 때문" 입니다. 저는 목회자로 교회의 리더로 섬기고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공동체라는 것은 분명한 방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어디로 나아가는지가 분명해야 합니다. 그것을 어려운 말로 비전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쉽게 이야기하면, 우리가 지금 잘 하고 있는가 아닌가를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리더의 피드백"이 매우 중요합니다. 리더는 비전을 가진 사람이며 동시에, 끊임없이 공동체의 방향을 살피며 그 방향대로 나아가고 있는지 점검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 사람의 정서는 긍정적인 피드백 보다 부정적인 피드백을 훨씬 많이 한다는 것입니다. 칭찬보다는 비난이 익숙합니다.

평소에 리더가 공동체의 방향에 대한 평가와 피드백이 없다면 큰 문제입니다.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은 평소에 자기가 잘 하고 있는지 아닌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방향을 완전히 잃었을 수도 있고, 좀 더 긍정적으로는 그저 각자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뭔가 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리더가, 평소에 칭찬 한마디 없다가, 이건 잘못되었다며 갑자기 혼을 내거나 부정적인 피드백을 준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럼 과연 그 공동체가 제대로 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중요한 것은, "평소에" 비전을 향해 제대로 나아가고 있는지 살피고 그것에 대한 피드백을 칭찬을 통해서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지금 잘 하고 있다는 부분에 대하여 확신을 주고, 그 방향으로 더 힘있게 나아갈 수 있도록 칭찬을 통해서 힘을 실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공동체 전체 가운데, 그들이 가진 비전에 대한 공통의 관심과 힘이 생기고 그 방향으로 힘있게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경우도 있겠습니다. 만약에 공동체 가운데 혹은 한 사람의 마음 가운데 "리더의 칭찬에 대한 불신"이 있다면, 사실상 위의 이야기는 실현하기 어렵습니다. 슬프고 아픈 경우입니다. 믿지 못하는 사람의 칭찬은 상대방을 화나게 하며 오히려 불신을 더 불러올 뿐입니다. 

결국 리더가 그 공동체 안에서 인정 받지 못한다면, 리더의 칭찬이나 리더의 피드백은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리더의 문제일 수도 있고, 혹은 그 리더와 함께 하는 공동체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칭찬이 별로 의미가 없는 개인 혹은 공동체라면, 어쩌면 다른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을 반증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은, 소통하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서로 소통하지 않는다면 "절대로" 상대방의 마음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아도 다 알고 계시죠?" 라는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마음이 아픕니다. 저는 사실 이 말을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마치 다른 세상 속에 존재하지만 겨우 저에게 다가온 어떤 외계의 메시지처럼 들립니다. 저에게는 그 말이, "당신이 하나님처럼 내 마음을 꿰뚫어보아야 한다"라는 말로 해석이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저는, 제가 표현하기 이전에 상대방이 제 마음을 다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표현하고 칭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표현해주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과의 관계가 깊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화를 좋아합니다. 상대방을 알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갈수록 대화의 소중함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제 바램은 크지 않습니다. 서로 칭찬하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넉넉함과 사랑, 그분의 풍성한 격려와 관심과 위로를, 추상적인 논리가 아니라 실제로 공동체 안에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칭찬을 하기 위해서 상대방의 상황을 잘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칭찬을 통해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귀한 것들을 격려하고 높여주고 그 가치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칭찬을 통해서 공동체가 바른 방향으로 끊임없이 방향을 잡고 힘을 얻어 주님의 뜻을 향하여 더욱 힘있게 달려나가는 것입니다. 너무 이상적인 것일까요? 적어도 제가 섬기는 그 공동체 안에서만은, 이런 귀하고 마땅한 일들이 일어나기를 하나님께 기도 드립니다.

2022년 6월 18일 토요일

성도는 끊임 없이 격려 되어야 한다 / 사무엘상 25장 23-44절 설교

 


저는 학부 전공이 행정학입니다. 행정학은 조직을 다루는 학문입니다. 학부 시절에 가장 좋았던 것은, "흥황하는 조직"과 "망하는 조직"의 특징을 공부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흥황하는 조직은 반드시 커뮤니케이션이 잘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잘한 것과 못한 것에 대한 피드백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집니다. 특히 조직 구성원의 탁월하게 이룬 부분에 있어서 강력한 칭찬과 격려를 끊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환경에 예민하게 반응하여서 조직 자체와 구성원 자신을 끊임없이 변화시킵니다. 

반면에 망하는 조직은, 그 안에서 커뮤니케이션이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에 관심이 없고, 조직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조직원이 따르던지 말던지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놀라운 것은 평소에는 아무런 평가도 없다가, 단지 그 사람이 어떤 나쁜 결과를 만들어내면, 그제서야 그 사람을 비난하기 바쁩니다. 물론 외부의 환경에 전혀 예민하지 않고 그저 행동하던 과거의 방식을 고수합니다. 그리고 결국 그 조직은 망하고 사라집니다. 섬뜩한 결과입니다.

저는 교회를 볼 때에, 늘 이러한 조직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교회는 세상의 조직과는 다른 차원의 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로 연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직의 특징의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이 되고, 그 말씀을 따르는 이들이 평가를 받고 격려 받고 칭찬 받고 교정되어야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많은 부분에서 그렇지 못합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성도가 얼마나 격려가 필요한지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우리의 주변을 돌아보면,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신앙적으로 잘하고 못하는 것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무관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내가 살아가는 삶에 바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가족으로 우리를 만드셨지만, 우리는 여전히 "일로 만난 사람처럼", "일"을 이야기할 뿐입니다. 

그런 면에서, 제가 하는 찬양 사역도, 서로를 향한 사랑과 격려가 없다면 그것은 그저 "일"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가장 완벽한 천상의 찬양의 주인이십니다. 그런 면에서 이 땅에서의 찬양은 보잘것 없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관점에서 아름다운 찬양을 드려도, 서로에게 관심이 없다면 도대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너무나 고통스러운 현상입니다.  

무관심은 결국, "커뮤니케이션의 부재"를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더 이상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지 않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세상은 절대로 교회를 격려하거나 칭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칭찬은 결국 우리 스스로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은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것을 굉장히 낯설고 이상한 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도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결단하고 선택하고 도전하였을 때에, 그것은 마땅히 그리고 충분히 격려 받고 칭찬 받아야 합니다. 마치 아비가일의 탁월한 영적인 안목과 선택을 다윗이 칭찬한 것 처럼 말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에서 그 부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과연 우리는 그런 아름다운 교회를 세워갈 수 있을까요? 

* 사무엘상 25장 23-44절 설교 

사무엘상 25장의 앞 부분에서는, 다윗이 바란 광야에 있을 때의 이야기를 말씀하십니다. 나발이라는 한 사람이 등장하였습니다. 그는 매우 부유한 사람이었지만, 매우 인색하고 교만하고 무례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과 그의 부하들의 그의 많은 양떼를 지켜주었고 다윗은 그에 합당한 호의를 정중하게 부탁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발은 오히려 다윗을 심하게 모욕하였습니다. 다윗을 취급하기를, 주인으로 부터 도망한 근본 없는 종으로 취급하였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모욕적인 상황입니까? 다윗은 이미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고, 그는 골리앗을 쳐서 넘어 뜨린 사람입니다. 그는 이미 수 많은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대놓고 모욕을 하는 사람 앞에서는 다윗도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모욕을 참지 못하고 부하들과 함께 칼을 차고 나발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소식을 들은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 많은 음식을 싣고서 다윗을 찾아가서 그들이 서로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23절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비가일이 다윗을 보고 급히 나귀에서 내려다윗 앞에 엎드려 그의 얼굴을 땅에 대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너무나 겸손한으로 모습으로, 마치 하나님을 대하듯이 다윗을 응대하고 있습니다. 아비가일은 무례한 나발의 아내였지만, 놀랍게도 나발과는 전혀 다른 성품과 전혀 다른 안목을 가진 아주 지혜롭고 현명한 여인이었습니다. 

25절에 보니 아비가일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나발에게로 달려오는 다윗의 마음 가운데에는, 나발의 모욕이 아주 깊숙히 들어와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는 나발이 자신에게 준 상처로 분노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더 이상 마음에 두지 말라고 아비가일이 부탁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나발은 미련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미련한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가? 나발과 같은 사람은 누구에게라도 그렇게 모욕을 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의 언행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 다윗에게 오히려 손해라는 것입니다. 아주 흥미로운 것은, 지금 아비가일의 말을 들어보면, 다윗을 매우 높이면서 그에게 합당한 표현을 쓰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다윗을 부를 때에 "내 주여, 내 주여"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다윗을 높이고 충분히 인정하면서, 그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비가일 자신은 이 상황을 알지 못했었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허물을 용서하여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말씀에서 아주 놀라운 것은, 아비가일이 바라보는 다윗의 미래의 모습입니다. 28절 부터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라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아비가일이 하고 있는 이 모든 행동과 말이, 단순히 자신의 남편이 잘못했기 때문에 그 일을 무마하기 위해서 음식을 준비해서 달려가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지금 아비가일은, 이스라엘 나라의 중요한 영적인 흐름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사울이 이 땅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지만,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오히려 다윗의 편에 계시다는 그 영적인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단순히 인간의 왕이 아니라,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는 여호와께서 세우신 왕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29절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 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의미인가? 지금은 비록 다윗이 사울로부터 끊임없이 쫓기는 위기의 상황 속에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완전히 생명으로 싸고 계시기 때문에 감히 그 누구도 다윗을 해칠 수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도우시고 그의 편에 서셨고 그를 지지하시고 도우신다는 확신을 말하면서, 바로 그것 때문에 다윗의 미래는 든든할 것이라고 연약한 여인이 너무나 담대하게 그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놀라운 것은 30절 중간에, “내 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실 때에” 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지도자” 라는 것은, 처음에 하나님께서 사울을 세우실 때에도 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단순히 다윗이 리더 중에 한명이 된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가 이스라엘의 최고 통치자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을 만나자 마자, 다윗의 현재의 위치와 그의 놀라운 가치와 엄청난 미래에 대해서, 너무나 정확하고 탁월하게 그에게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비가일이 이야기했을 때에, 드디어 다윗의 마음이 완전히 누그러지고 풀어졌습니다. 다윗이 분노하여 살인하려던 것을 그녀가 지혜롭게 막은 것입니다. 32절에서 다윗은 그녀를 보내서 자신을 영접하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합니다. 그리고 33절에서는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지혜"라는 것은 "판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라고 다윗이 그녀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것은, 여호와를 찬송하는 것, 또 아비가일의 지혜를 칭찬하는 것, 그리고 아비가일에게 복이 있을 지로다 라는 말씀에서 “찬송, 칭찬, 복이 있을 지로다” 라는 모든 동사가 같은 단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다윗이 아비가일을 칭찬하는 것이, 단순히 그녀가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고 좋은 말을 해 주어서 아비가일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다윗은, 아비가일의 영적인 분별력과 지혜를 칭찬하는 것입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이 누구인지를, 그리고 그의 참된 가치를, 그리고 하나님이 다윗을 통해서 어떻게 자신의 나라를 세울 것인지를 미리 바라보는 영적인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바로 그것을 다윗이 기뻐하며 그녀를 인정하며 크게 칭찬하는 것입니다. 아비가일이 여호와의 나라와 그가 세우신 자를 분별하고 그것을 택한 것에 대하여, 너무나 크게 칭찬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비가일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랬더니 나발이 어떻게 하고 있었는가? 그는 왕과 같은 잔치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크게 취하였습니다. 마음이 너무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에게는 마땅히 베풀어야 하는 것 조차 너무나 아까워했지만, 자신의 행복과 즐거움을 위해서는 흥청망청 돈을 쓰는데 있어서 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음날 정신이 들고나서, 아비가일이 다윗과 자신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나발은, 자신이 죽은 목숨이었는데 아내의 지혜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는 것과, 자신이 저지른 일이 얼마나 큰 잘못이었는가를 깨닫고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열흘 후에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거두셨습니다. 

다윗은 나발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자신의 모욕을 갚기 위해 살인을 하지 않도록 자신을 보호하신 여호와를 찬양하였습니다. 다윗은 비록 자신이 도망자의 신세였지만, 아비가일을 아내로 맞이하고 싶었습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다윗을 처음 만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요나단이 자신을 잘 알고 사랑한 것 처럼 다윗을 이해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다윗을 잘 아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인이었고, 분명한 영적인 판단력을 가진 탁월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사람을 보내어 그녀에게 청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42절에 보니 “아비가일이 급히 일어나서”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의 부름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다윗의 현재의 상황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그의 편에 서 계시다는 것을 알았고, 그의 미래는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비가일이 드디어 다윗의 아내가 되면서 그리고 사울의 딸인 다윗의 첫째 아내 미갈은 아마도 사울에 의해서 다른 사람에게 억지로 다시 결혼을 하면서 오늘 말씀이 마무리가 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은, “과연 참된 영적인 지혜와 분별력이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가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성경은 결단코 재산 그 자체를 부정적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나발은 굉장히 부유한 사람이었지만, 부유한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나발 자신이 어리석고 지혜가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아주 흥미로운 것은, 25장 11절에 보면넷 바이블 영어 성경은 이렇게 번역하고 입니다. 다윗이 종들을 보내어서 자신에게 합당한 호의를 부탁 하였을 때에, 나발은 이렇게 주장하였습니다. “나의 떡과 나의 물과 나의 고기를 줄 수 없다”라고 나발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발이 왜 어리석은 사람인가? 그에게는,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발은 자신이 누리는 모든 것,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 자신의 능력으로 부터 나온 것이며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너무나 이상한 것은, 왜 아비가일이 이런 사람과 결혼했는가입니다. 우리는 그 뒷 이야기는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비가일은 분명한 지혜와 분별력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나발은 “나”라는 자기 중심의 인물이지만, 아비가일은 “하나님” 중심적인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과 전혀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쩌면 소문으로 다윗에 대해서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편에 있기 때문에 그에게 극도로 공손한 모습을 보이면서 그를 대접하고 있습니다. 그는 다윗의 현재의 모습을 본 것이 아니라, 그가 장차 하나님을 섬기는 왕으로 온전히 세워질 것임을 믿음의 눈으로 분명히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아비가일이야 말로 너무나 지혜로운 자라는 것입니다. 

시편 111편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근본이라는 것은, “가장 근원적인 원리”라는 의미입니다. 아무리 재산이 많고 세상적으로 부유하다 하더라도, 여호와가 그 사람에게 없다면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다면, 그는 의미있고 가치 있는 구원 받은 자로서의 삶을 절대로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참된 지혜는,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며, 여호와를 경외하는데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선택만이, 지혜로운 선택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도님들께서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어떤 부분이 가장 마음에 깊이 혹은 흥미롭게 다가오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에서 사실 가장 놀랍고도 흥미로웠던 부분이, 아비가일이 다윗의 아내가 되는 장면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아비가일이 나발과 억지로 결혼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아마 나발이 처음부터 이런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남편이 죽었다면 그 아내가 슬퍼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오늘 말씀은 자칫하면 자신의 남편의 죽음에 대하여 슬픔 조차 느끼지 못하는 그런 이상한 아내에 대한 이야기로 오해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관통하는 그 핵심을 붙들고 있다면, 이러한 아비가일의 행동이 이해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관통하는 핵심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것,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알아보는 것”, 그것이라고 말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보면서, 예수님이 마태복음 13장 44절에서 말씀하신 천국 비유가 생각이 났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무나 신비한 것인데, 보물이지만 밭에 감추어진 보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 그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어떤 선택을 내렸는가? 밭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이 보물이라는 것을 인지한 이후에,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즉시 자신이 가진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밭을 샀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선택은 너무나 즉각적이었고 너무나 큰 결단이었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에게는 분명히 정신이 이상한 사람으로 보였을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인정한 사람은, 영적인 분별력을 통해서 기꺼이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들에게, 빌립보서 3장 19절과 20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아비가일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다윗의 미래를 확신하고 그에게 자신을 드리고 함께 하기로 결단한 것 처럼, 우리는 장차 오실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오늘을 믿음으로 살아가기로 결단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엄청난 영적인 깨달음과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와 사랑하는 성도님들은 과연,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 하나님께 함께 하시는 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어떤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영적인 안목과 지혜가 있는가를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비가일이 다윗의 부름을 받고 달려간 것 처럼, 우리의 왕이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나라의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서 기꺼이 나의 모든 것을 걸고 달려갈 수 있는지를 물으며 강력하게 우리에게 변화를 촉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하나님의 역사와 그분의 일하심과 그분의 마음을 깨달아 아는, 그분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영적인 지혜와 분별력이 넘치시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의 모든 선택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를 위하여서 기꺼이 우리의 모든 것을 걸고 믿음의 삶을 살아가시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시간에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함께 기도하기 원합니다. 첫째로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 하나님 영적인 안목과 지혜를 부어 주시옵소서, 세상적인 기준으로 사람과 상황을 판단하지 않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어떻게 판단하시는 가를 주목하게 하시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따라가는 영적인 판단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둘째로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그분이 주실 칭찬과 기쁨을 기대하며, 주님의 뜻을 지금 저의 속에서 기꺼이 이루어 나가는 복된 성도 복된 교회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2022년 3월 26일 토요일

말씀 묵상 어디까지 해봤니? - 출애굽기 2장 / 인생 최악의 상황에서 정체성을 붙들다

 

파라오가 모든 남자 아이를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성경은 이 상황 속에서 한 가정에 집중합니다. 어떻게든 아들을 살리고자 하는 부모의 처절한 노력이 등장합니다. 석 달 동안 아이를 숨겼지만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습니다. 결국 갈대 상자를 만들어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둡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 슬픈 장면입니다. 부모의 마음이 찢어지도록 아팠을 것입니다. 그들의 행동이 어떤 미래를 이 아기에게 열어갈지를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아기의 누나가 그 아기 옆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봅니다. 그런데 성경은 가족의 아픈 마음과 아기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매우 담담하게 기록하는 것 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 바로의 딸이 등장합니다. 바로의 딸은 상황을 바로 이해했습니다. 그녀는 아기를 보고 히브리 사람의 아기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아버지와 다르게 그녀는 자비가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불쌍히 여겼다"라는 단어는 구약 성경 안에서 거의 스무번 가깝게 하나님께서 주어로 사용된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바로의 딸을 통하여 이 아기에게 보여졌습니다.

지혜로운 누이가 그 때 등장합니다. 사실 굉장히 당돌한 발언입니다. 유모를 불러주겠다고 제안합니다. 이집트사람 중에 유모가 없었을까요? 당연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 유모를 제안하였고 그 제안이 받아들여집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자라서 바로의 딸의 아들이 됩니다. 그리고 그녀가 그 아들에게 "모세"라는 이름을 붙여 줍니다. 

그 모세가 장성하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모세가 의롭고 정의로운 사람이라서 동족을 위하여 행동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은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저는 항상 그런 생각이 듭니다. 도대체 모세는 장성하기까지 무엇을 했는가? 입니다. 모세는 오랫동안 왕궁에서 자랐습니다. 매우 긴 시간 동안 동족들은 이미 핍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늘 보고서도 그에게 큰 감흥을 주지 못했던 동족의 핍박이, 어느날 모세에게 큰 아픔으로 느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이야말로 자신의 형제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동족을 죽이려는 이집트 사람을 쳐서 죽입니다.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모세의 뜻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습니다. 히브리 동족들은 모세를 자신들의 재판자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세의 폭력과 살인을 모든 이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파라오에게까지 그 소식이 들어갑니다. 모세는 미디안 땅으로 도망합니다. 

이집트의 왕자에서 하루 아침에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영화에서도 보기 어려운 진정한 추락입니다. 모세의 입장에서는 큰 용기였고 정의로운 행동이었지만 그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의 삶 자체가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미디안 땅 어느 낯선 우물 옆에 앉아 있을 때에, 그곳 제사장의 딸들을 도와줍니다. 낯선 곳에서, 전혀 낯선 누군가를 도와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딸들의 이야기를 아버지가 듣습니다. 아버지는 딸들이 그렇게 귀한 은인을 버려두고 왔다고 책망합니다. 모세를 집으로 초대합니다. 

저는 21절에 "모세가 그와 동거하기를 기뻐하매"라는 말씀이 너무나 크게 보입니다. 르우엘은 모세를 인정해 준 사람입니다. 그를 칭찬해준 사람입니다. 그의 가치를 알아봐준 사람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 너무 좋았습니다. 타인의 가치를 무시하며 칭찬에 인색한 삭막한 이 시대에 적용될 수 있는 너무나 따뜻한 말씀입니다. 

모세는 르우엘의 딸과 결혼합니다. 자신의 가치를 알아봐준 사람이 장인 어른이 된 것입니다. 아들의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합니다. 모세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자신은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다는 것을 아들의 이름을 통해 나타냅니다. 

사도행전 7장 30절을 보니, 광야에서 모세는 40년이 훌쩍 지나갑니다. 성경이 시간을 기록하고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과정은 때론 너무나 야속하고 잔인하게 느껴집니다. 40년이라니... 이 시간 동안 모세를 찾던 파라오는 죽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은 끝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상달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우신 그분의 언약을 기억하십니다. 성경에서 기억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주제는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도 히브리 민족을 돌아보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모세도 버려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의 삶을 다 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그들을 기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끊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입니다. 

In Exodus 2, we see the newborn baby at risk. because the pharaoh ordered to kill every boy, one of the Hebrew families chose to hide his baby putting the papyrus basket among the reeds along the edge of the Nile. 

in god's grace, this baby was rescued by the daughter of the pharaoh, and even he adapted to her son. amazingly, when this boy was fully grown up, he realized and see Hebrews as his brothers. he had great brave and sense of justice to kill the Egyptian beating his brother. however, the Hebrew people refuse to accept Moses as their leader or helper. 

so, Moses should flee to the Midian. coincidently Moses helped some women and he found a good man to acknowledge his value. however, Moses has felt that he is a foreigner there. 

even 40 years passed. maybe Moses felt that he was abandoned by everyone and Israelites felt too. however, God saw them remembered his covenant, and started to act to save them.

2021년 8월 18일 수요일

'하나님을 송축한다' 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 송축? 낯설지만 익숙한 단어

시편 63:3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63:3 Because your love is better than life, my lips will glorify you. 63:4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개역개정63:4 I will praise you as long as I live, and in your name I will lift up my hands. (NIV)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기록하셨습니다그리고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행동해야 궁극적이고도 바른 방향을 배우며,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찬양할 때에 많이 듣는 것인 '송축하다'라는 가사입니다특별히 영어권에서 '10,000 Reasons'라는 찬양을 원곡에서는 'Bless the Lord' 라고 표현된 분을 한국어로 번역하면서 '송축해 영혼' 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하였습니다보통의 일상의 언어로는 '송축하다' 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지만 찬양을 통해서 성도님들에게 많이 익숙해진 듯합니다.


* 송축의 사전적 정의

저를 포함해서 보통의 성도님들은 사전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하지만 사전이라는 것은 복잡한 개념을 간단하고 명확하게 짚어 주기 때문에 성경 사전을 사용하는 것은 신앙에 유익을 줍니다송축이라는 것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송축(頌祝, praise) 하나님 앞에 몸과 마음을 바쳐 감사와 찬송을 드리는 행위.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의 표현으로 대상은 ‘하나님’(대하 2:12; 16:7)이거나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성호)이다( 96:2). 송축은 삶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찬양하는 내용이 중심 줄거리를 이룬다(대상 16:36).

가스펠서브라이 성경사전 (서울시 종로구 경희궁1 5-9(03176): 생명의말씀사, 2006), 568.

한가지 정의만으로도얻을 있는 것이 풍성합니다송축하는 것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해서 찬양하는 것입니다 대상은 하나님이시며 그 내용은 그분이 이미 이루신 일들 입니다.


* 송축의 성경적 정의

시편 63편에서 다윗은 주님을 송축하며손을 것이라고 고백합니다위에서 우리가 살펴본 정의 그대로입니다단순히 입술로만 주님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몸을 사용하여서 여호와를 높이는 것이 그분을 송축하는 방법입니다그렇다면 다른 스터디 바이블들은 이 말씀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요? 

63:4 lift up my hands. This signifies praise, as it does in 134:2. Elsewhere, this action more commonly signifies prayer (e.g., 28:2; 44:20; 77:2; 88:9; 141:2; 143:6).

이 말씀에서 손을 든다는 것은 찬양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시편의 또 다른 말씀 (ex) 28:2) 에서는 더 일반적으로 이 동작은 기도를 의미합니다. 

D. A. Carson, ed., NIV Biblical Theology Study Bible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8), 948.

63:35 The psalmist expresses his joy in knowing God and his determination to continue praising God throughout his life. Lovingkindness may also be translated loyal love (13:5). Praise is a vocal, public act in the Psalms (Heb. 13:15). bless hands: Praise (the meaning of bless here) and raising the hands in worship are often associated in the Psalms (134:2). To lift the hands to the Lord expresses dependence on Him, coupled with an acknowledgment of His power, wonder, and majesty (77:2). be satisfied with joyful lips: In coming to the Lord in praise, the poet finds the refreshment he has sought (v. 1).

시편에서 찬양은 목소리로 공개적으로 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시편에서 찬양하고 예배에서 손을 드는 것은 종종 연결되어 있습니다. 손을 든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 경이로움 그리고 위암에 대한 인정과 함께 그분을 의존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Earl D. Radmacher, Ronald Barclay Allen, and H. Wayne House, The Nelson Study Bible: New King James Version (Nashville: T. Nelson Publishers, 1997),  63:35.

위의 스터디 바이블의 설명에서 아주 흥미로운 것은, 여호와께 손을 드는 것이 다른 본문에서는 기도와 연결하여서 등장한다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찬양은 곡조가 있는 기도이며기도 속에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들어가는 것입니다또한 손을 든다는 외적인 행위는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확고한 표현이며그분의 능력과 경이로움과 위엄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 송축 = 손을 들어 하나님을 인정하고 높이고 칭찬함으로 찬양하는 것

한국 문화는누군가를 칭찬하는 것을 그렇게 좋게 생각하지 않습니다심지어 어떤 분들은칭찬을 하면 그것을 받는 사람이 교만해 진다 라고도 말씀합니다그러나 저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누군가의 장점을 알아주고 격려하고 칭찬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어떤 방식이든 수만 있다면 다른 사람을 깔보고 평가 절하하는 세상 속에서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칭찬함으로써 나는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누군가를 칭찬하는데 익숙하지 않다면하나님을 칭찬하는 것도 그러할 것입니다 앞에 보이는 누군가를 칭찬하는 연습을 해본적도 없는데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높이고 칭찬할 있겠습니까?

우리의 모든 찬양 속에서다윗의 결단처럼 여호와를 마음껏 송축하기를 원합니다그분이 이루신 수많은 일들과 친절과 사랑과 은혜를 입술로 고백하며 감격하기 원하고 손을 높이 들고 주님을 의지하며 그분을 인정하기를 원합니다그것이 성도의 마땅한 목표이며 삶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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