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 어른이 된다는 것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금방 떠오르는 것은 점잖은 사람입니다. 목소리를 지나치게 높이지 않는 것입니다. 크게 웃지 않는 것입니다. 감정을 쉽게 표현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나를 감추는 것입니다. 적당한 수준에서만 자신을 오픈하는 것입니다. 나의 수를 먼저 보이지 않고 상대방의 수를 알아내는 것입니다. 억지스럽다고 생각하실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사람들이 가진 어른의 개념에 대한 저의 지나친 일반화일까요?
요즘에, 저의 삶과 목회를 많이 돌아보고 있습니다. 너무 이상주의에 빠져서 살아온 것은 아닐까? 너무 경직된 나의 관점으로 세상과 교회를 바라보고 평가했던 것은 아닐까? 나의 생각이 너무 옳다고만 주장했던 것은 아닐까? 나의 완고함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말 못할 피해를 준 것은 아닐까? 그리고 다른 사람이 보기에 지나친 칭찬이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이것이 저의 마음 속에 있는 생각들입니다.
이십대 초반의 어느날,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사람들은 칭찬을 하지 않을까? 과장이 아니라, 칭찬을 할 줄 아는 혹은 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 주변을 좀 더 주의 깊게 돌아보았습니다. 빛나는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또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귀한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제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정말 이분들이 귀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렇게 귀한 분들이 너무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참 아쉬웠습니다. 아무도 그들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이 매우 이상하게 생각되었습니다. 왜 아무도 이 사람들을 격려해주지 않을까? 왜 이들의 사랑과 수고와 헌신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일까? 그리고 제 마음에는, 저라도 사람들의 장점을 알고 칭찬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칭찬을 실천하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십년이 흘렀습니다.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제가 느낀 것은, 제가 "유별나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저의 행동과 말은 한국적인 어른이 된다는 것과는 거리가 상당히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정목사는 지나치게 칭찬하는 사람이야" 라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맥락 속에서 다시 한번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왜 그렇게 살아왔던 것일까? 그리고 왜 칭찬하는 것일까?
제가 약간 당황했던 부분은, "저의 칭찬의 행위 자체"를 유별나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저를 유별나게 생각하는 것은, 제가 잘못했다면 당연히 제가 스스로를 자제하고 잠잠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자신에 대한 평가는 제가 감당해야 할 부분입니다. 하지만 저의 칭찬하는 행위 자체가, 마치 "저의 개인적 취향"이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한다는 평가에 동의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칭찬이 과연 취향인가? 며칠 동안 고민했습니다. 제 내면에서 이 질문이 매우 진지했던 것은, 이것이 저의 삶과 목회에 있어서 결정적인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두가지 갈림길이 나타납니다. 만약에 칭찬이 단순히 저의 개인적인 취향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면 저는 당장 오늘 그 행위를 그만 두어야 할 것입니다. 저의 취향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필요도 혹은 그럴 이유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칭찬이 취향이 아니라면, 다시 말해서 그것이 어떤 절대적인 혹은 성경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전혀 문제가 달라집니다. 만약 그렇다면, 칭찬이라는 것은 나의 감정 다른 사람의 감정을 뛰어넘는 이유를 가지는 것입니다. 단순히 내가 하고 싶고 하기 싫고, 내가 듣고 싶고 듣기 싫고의 기준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것이 옳은 것이라면, 바로 오늘부터 평생을, 저의 모든 것을 걸고 개인과 공동체가 함께 그 방향을 향해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취향이라는 것은, 한 사람에게 국한 된 자신의 선호와 자신이 좋아하는 방향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저의 내면을 살펴보니, 칭찬이라는 행위 자체를 결코 취향의 문제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그것이 본질적인 목회의 방향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이 성경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한 것이지, 저의 개인적인 취향 자체가 칭찬이 맞다 라고 생각해 본적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말씀드리는 이 세가지는, "칭찬이 취향이 아닌 이유들" 입니다.
첫째로 칭찬이 취향이 아닌 이유는, "칭찬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추상적일 수 있지만 동시에 매우 구체적이고 중요한 신학적인 이유입니다. 제가 가끔씩 크게 놀라는 것은, 사람들의 하나님에 대한 오해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에, 사람들의 머리 속에 계시는 하나님은 "인색한 하나님"이십니다. 자녀들이 무엇을 하든지 관심이 없는 분이시며,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든지 반응이 없는 분이시며, 그저 나중에 다 죽은 이후에 천국에 가면 그제서야 잘했다고 한마디 툭 던지시는 그런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수 많은 믿음의 선진들의 귀한 믿음의 행위들과 결단들을 굳이 성경에 기록해 놓았을까요? 저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칭찬하기 위해서라고 확신합니다. 표현이 이상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은 수다쟁이이 아버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들의 장점을 빼곡하게 적어놓으셨고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에 믿음의 사람들의 장점들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 적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그것 중에 단 하나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 기록된 단점을 보면서 그들이 인간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의 중요한 결단들과 위대한 도전들은 하나님께서는 소중하게 기록해 놓으신 것이며,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칭찬을 통해서 그들을, 그리고 그들을 그렇게 만들어내시는 하나님을 칭찬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공동체 안에서 칭찬이 사라진다고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어쩌면 당신이 지금 경험하는 그 공동체일 수도 있겠습니다. 과연 그것은 어떤 공동체가 될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이루신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자라가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하나님을 반영하는 곳"이며, "하나님을 반영해야만하는 곳"입니다. 설교를 아무리 그럴 듯 하게 해도, 나라는 인격체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실질적으로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경험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교회에서 칭찬이 사라진다면, 사실상 우리는 하나님을 제대로 경험할 수 없습니다.
칭찬이 없는 공동체는 하나님을 이렇게 "실제적으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무슨 행동을 해도 관심 없는 하나님, 내가 잘한 것도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는 하나님, 내가 잘못한 것만 찾아내서 벌주시는 하나님으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이 이야기하는 하나님, 가장 자비로우시며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고 우리에게 지금 이 순간에 풍성한 사람을 부으시는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 없는" 그런 냉혹한 경험을 심지어 교회에서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야기하지만, 하나님이 부재하신 공동체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칭찬을 통해서 모든 분들이 성경적인 하나님을 경험했으면 좋겠습니다.
둘째로 칭찬이 취향이 아닌 이유는, "칭찬은 관계를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사실 칭찬이라는 것은 정신적인 노동에 가깝습니다. 성실하게 의미있는 칭찬을 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관찰해야 합니다. 만약에 어떤 일의 맥락을 가지고 있다면, 그 일에서 그 사람이 가진 역할을 이해하고, 그 사람이 자신에게 맡겨진 그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면밀한 관찰과 세심한 배려의 과정을 통해서 결과적으로 칭찬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꼭 일과 연관 짓지 않아도, 그 사람 자체가 가진 어떤 개인적인 장점을 파악하는 것 역시 관찰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단순히 그 사람 존재를 칭찬해도 괜찮겠지만, 그것보다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부분을 살펴서 칭찬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장점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더 나아가 하나님이 주신 가능성이기 때문에 그것을 충분히 발현하도록 돕는 것 역시 성경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칭찬이라는 것은 "한 사람에 대한 깊은 관심의 표현"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관심과 사랑이 없다면" 절대 칭찬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 칭찬을 통해서 드러내는 것입니다. 당신과 나의 관계는 그저 일로 만난 사이가 아니라, 당신의 삶 자체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당신의 존재에 대해서 마음을 쓰고 있으며, 삶을 나눌 수 있는 관계로 나아가고 싶다는 표현이 바로 칭찬입니다.
왜 관계를 만들어내는 칭찬이 그렇게 중요할까요? 제가 목회를 하면서 느낀 것은, 교회는 얼마든지 "일 중심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회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오히려 회사보다 더 못할 수도 있습니다. 행정적인 일들과 교회의 일정등을 조율하다 보면, 마치 그것이 교회의 본질이라고 저 조차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사실 전혀 아닙니다. 교회의 본질은, "관계"입니다. 한 사람과 한 사람 그리고 관계 안에 교회가 존재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고 받는 이야기들은 어떤 것인가요? 이런 질문들입니다. 이것이 잘 되었습니까? 저것이 잘 되었습니까? 저것이 일정대로 진행되고 있습니까? 이러한 것들은 fact에 대한 나열이지 관계에 대한 단어가 아닙니다. 조직이라는 관점에서는 일을 잘 돌아가도록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마치 그것 자체가 교회를 만들어내는 본질적인 요소라고 생각한다면 저는 그것이야 말로 너무나 큰 아쉬움이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현대 교회가 경험하는 본질적인 실패의 원인일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저에게 있어서 칭찬이라는 것은, 단순히 일로 끝나는 사이, 행정적으로 돌아가는 어떤 조직화 되어 버리는 변질되는 교회에 대한 반발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인간으로 그리고 관계로 존재하는 것이지, 일의 진행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와 함께 하는 모든 분들과의 관계가 풍성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저와 함께 하는 분들의 모든 부분을 살피고 칭찬하고 관계를 중시하기를 원합니다.
셋째로, 칭찬이 취향이 아닌 이유는, "칭찬을 통해서 공동체의 방향을 잡아가기 때문" 입니다. 저는 목회자로 교회의 리더로 섬기고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공동체라는 것은 분명한 방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어디로 나아가는지가 분명해야 합니다. 그것을 어려운 말로 비전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쉽게 이야기하면, 우리가 지금 잘 하고 있는가 아닌가를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리더의 피드백"이 매우 중요합니다. 리더는 비전을 가진 사람이며 동시에, 끊임없이 공동체의 방향을 살피며 그 방향대로 나아가고 있는지 점검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 사람의 정서는 긍정적인 피드백 보다 부정적인 피드백을 훨씬 많이 한다는 것입니다. 칭찬보다는 비난이 익숙합니다.
평소에 리더가 공동체의 방향에 대한 평가와 피드백이 없다면 큰 문제입니다.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은 평소에 자기가 잘 하고 있는지 아닌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방향을 완전히 잃었을 수도 있고, 좀 더 긍정적으로는 그저 각자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뭔가 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리더가, 평소에 칭찬 한마디 없다가, 이건 잘못되었다며 갑자기 혼을 내거나 부정적인 피드백을 준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럼 과연 그 공동체가 제대로 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중요한 것은, "평소에" 비전을 향해 제대로 나아가고 있는지 살피고 그것에 대한 피드백을 칭찬을 통해서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지금 잘 하고 있다는 부분에 대하여 확신을 주고, 그 방향으로 더 힘있게 나아갈 수 있도록 칭찬을 통해서 힘을 실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공동체 전체 가운데, 그들이 가진 비전에 대한 공통의 관심과 힘이 생기고 그 방향으로 힘있게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경우도 있겠습니다. 만약에 공동체 가운데 혹은 한 사람의 마음 가운데 "리더의 칭찬에 대한 불신"이 있다면, 사실상 위의 이야기는 실현하기 어렵습니다. 슬프고 아픈 경우입니다. 믿지 못하는 사람의 칭찬은 상대방을 화나게 하며 오히려 불신을 더 불러올 뿐입니다.
결국 리더가 그 공동체 안에서 인정 받지 못한다면, 리더의 칭찬이나 리더의 피드백은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리더의 문제일 수도 있고, 혹은 그 리더와 함께 하는 공동체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칭찬이 별로 의미가 없는 개인 혹은 공동체라면, 어쩌면 다른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을 반증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은, 소통하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서로 소통하지 않는다면 "절대로" 상대방의 마음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아도 다 알고 계시죠?" 라는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마음이 아픕니다. 저는 사실 이 말을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마치 다른 세상 속에 존재하지만 겨우 저에게 다가온 어떤 외계의 메시지처럼 들립니다. 저에게는 그 말이, "당신이 하나님처럼 내 마음을 꿰뚫어보아야 한다"라는 말로 해석이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저는, 제가 표현하기 이전에 상대방이 제 마음을 다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표현하고 칭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표현해주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과의 관계가 깊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화를 좋아합니다. 상대방을 알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갈수록 대화의 소중함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제 바램은 크지 않습니다. 서로 칭찬하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넉넉함과 사랑, 그분의 풍성한 격려와 관심과 위로를, 추상적인 논리가 아니라 실제로 공동체 안에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칭찬을 하기 위해서 상대방의 상황을 잘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칭찬을 통해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귀한 것들을 격려하고 높여주고 그 가치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칭찬을 통해서 공동체가 바른 방향으로 끊임없이 방향을 잡고 힘을 얻어 주님의 뜻을 향하여 더욱 힘있게 달려나가는 것입니다. 너무 이상적인 것일까요? 적어도 제가 섬기는 그 공동체 안에서만은, 이런 귀하고 마땅한 일들이 일어나기를 하나님께 기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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