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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2일 월요일

칼빈과 함께한 20일, 드디어 그의 마음에 조금 다가가다

 


삶을 온전히 드리는 것의 기쁨 by 8개월 주일 설교의 대장정을 마치고

https://jungjinbu.blogspot.com/2023/08/by-8.html

공부는 평생 하는 것입니다. 공부는 단순히 학위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는 인간의 본성에 속한 것입니다. 더 발전하고 더 깊어지고 세상의 본질을 향해서 다가가는 행위 혹은 결과가 바로 공부입니다. 저도 꽤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그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20대 때에 이런 이야기를 진지하게 해주었다면, 나의 인생이 더 의미있는 인생이 되지 않았을까? 

장로교에서 가장 중요한 신학자라면 당연히 칼빈을 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신학교에서도 그렇게 배우고 강의도 듣습니다. 그러나 역시나 학위를 위한 공부에 급급한 상황에서 그를 깊이 만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페이퍼를 쓰기 위해서 그의 저작들의 부분을 인용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를 정말 잘 알고 있다는 느낌은 거의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결심하고 기독교 강요를 “천천히” 읽기 시작한 것이 20일이 되었습니다. 핵심은 “천천히”입니다. 그리고 “꾸준히”입니다. 매일 한챕터를 읽어내야 한다는 부담도 없습니다. 이것을 다 읽어야만 학위를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성숙을 위해서, 그리고 나의 깊이를 더 만들어내기 위해서 칼빈을 만나고 칼빈의 그 말투, 논리, 느낌, 그리고 그가 가진 그 생각의 본질을 나의 것으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사실 내가 얼만큼 읽었는가도 주된 관심사가 아닙니다. 그런데 살펴보니 생각보다 꽤 읽어냈습니다. 읽다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마음에 거부감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저도 꽤 보수적인 신학적 성향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입장에 서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 정말 지나친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하나님의 은혜와 그분의 능력이 아니라면 인간이 그 어떤 것이라도 깨닫거나 이룰 수 없음을 진심으로 믿고 고백합니다.

처음에는 강한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칼빈 자신이 주장하는 것처럼 심지어 믿지 않는 자들의 탁월함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언뜻 볼 때에 그는 마치 모순된 주장을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강요를 음미하고 읽어나가면서 결국 그의 마음에 저의 마음이 완전히 하나가 되었습니다. 칼빈이 주장하는 것은 선명하며 확고합니다. 세상의 그 모든 좋은 것들이 심지어 믿지 않는 자들의 탁월함과 재능이 모두 하나님께로 부터 왔음을 철저하게 인정하고 하나님을 높이고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칼빈을 진지하게 만나면서 감사하게도 제 마음이 더 겸손해 졌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경험하는 모든 깨달음과 지혜와 결과들이 하나님이 주시고 허락하신 것임을 저의 마음 깊이 드디어 인정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칼빈이 변화시킨 저의 마음이 저의 삶과 사역에 결정적이 영향을 주었습니다. 내가 열심히 하면서 기도하는 것이란 개념이 사라졌습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주님께서 이루시지 않는다면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모든 것을 오직 주님이 이루시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간절하게 절실하게 기도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칼빈은 저에게 참된 영적인 겸손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뿐만 아니라 저에게 성경을 이해하는 깊이 있는 눈을 주고 있습니다. 사실 기독교 강요는 거대한 주석입니다. 성경의 중요한 구절들에 대한 그의 이해를 아름답게 엮어 놓았습니다. 며칠 전에 어떤 성도님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어떤 신학적인 이슈에 대해서 학자들이 논쟁을 할 때에 그것이 힘들다는 것입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내가 견고하게 믿고 신뢰할 수 있는 신학자가 있어야만 합니다. 

저는 신학적 논쟁이 있는 본문들을 볼 때에 과연 누가 성경적인가를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합리적으로 논리를 끌어내어서 신학적 논증을 펼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핵심은 합리성이 아닙니다. 핵심은, 그 근본 원리와 내용이 성경적인가 입니다. 성경을 근거로 생각해야 하고, 성경에 근거해서 결론을 이끌어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칼빈으로 부터 큰 유익을 얻습니다. 

물론 그는 고대의 철학가들의 논지를 파악하고 그것들을 자주 인용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성경의 권위에 호소합니다. 성경이 이렇게 말하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말한다 라고 결론을 맺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순환 논리에 가까워 보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러한 칼빈의 성경에 대한 이해와 추가가 지극히 옳은 것임을 마음으로 깊이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성경만이 최종적인 진리이기 때문에, 성경에 근거해서 생각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입니다. 그리고 그 길을 칼빈은 탁월하게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강요를 읽는 것 자체가 감동이 되고 은혜가 되고 위로가 됩니다.  

그래서 오늘 하루가 행복합니다. 그분의 손 안에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저의 삶의 결과와 모양에 대한 두려움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오늘 하루 저는 여전히 전진하고, 칼빈을 벗 삼아 하나님과 동행하면 됩니다. 제가 성경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읽어내고 적용하는 그 모든 것이 칼빈과 같기를 원하니다. 그것이 앞으로 제가 가야 할 길임을 기뻐하며 계속 걸어가겠습니다. 

2023년 8월 28일 월요일

삶을 온전히 드리는 것의 기쁨 by 8개월 주일 설교의 대장정을 마치고

 






미국에 온지 11년이 지났습니다. 아내와 함께 그저 흥분되는 마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온 것이 바로 어제 같은데 시간이 이렇게 흘렀습니다. 젊었을 때에 삶은, 나의 선택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갈 수록 나의 선택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놀라운 거대한 손에 떠밀려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담임 목사님께서 안식년을 가지고, 부목사가 어떤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시간은 아마 평생에 딱 한번 정도 찾아올 것입니다. 그리고 저에게 그 역할이 맡겨졌습니다. 너무 큰 부담,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제가 할 일들을 그대로 다 하면서, 주일 설교 강단을 잘 감당해야 한다는 것은 저의 삶 가운데 가장 큰 도전이었습니다. 

설교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끝이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참으로 가벼운 자리인 것처럼 보이지만, 저에게는 가장 소중한 자리입니다. 대략 열세번 정도의 기회가 저에게 주어졌습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는 주일 설교가 세번입니다. 저는 세번의 설교가 모두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오시는 분들의 숫자는 차이가 납니다. 그러나 그 중요성은 사실상 동일합니다. 1부 예배는 교회의 중직자들이 오십니다. 그리고  2부는 연세가 많으신 어르신들과 성가대가 있습니다. 3부는 주로 젊은 층들이 있습니다. 3번의 예배는 모두가 소중하고 그 고유한 의미가 있습니다. 단 한번의 설교도 허투로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 그대로 최선을 다해 감당했습니다.

모든 부교역자들이 주일 설교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교회는 여러 이유로 부목사들에게 주일 설교를 잘 맡기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 자리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며, 교회의 영적인 분위기에 지대한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기회가 참으로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일생 일대의 가장 중요한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을 온전히 드려서 모든 것을 걸고 감당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어제까지 저에게 맡겨진 모든 설교를 마쳤습니다. 설교를 위해서 강대상 의자에 앉아 있는데 감사의 기도가 터져나왔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이 모든 기회를 허락하시고 잘 감당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 제가 설 수 있다는 것이 기적처럼 느껴졌습니다. 마지막 설교의 세번은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다시 정리하겠지만, 마지막 설교는 저의 내면에 있는 그동안 갈고 닦은 개혁주의 신학의 종합이었습니다. 저는 한동안 화가 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존귀히 여김을 받지 못한다고 종종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당황스러운 것은, 예배의 모든 요소들이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그분을 받들지만, 설교 안에서는 그리고 성도님들의 사고와 고백과 삶 속에 너무나 그리스도께서 약하다고 느낀다는 것입니다. 마치 잔치의 주인이 구석에 몰려서 소외 받는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분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 자신을 그분께 드리는 것에 대해서 마음껏 설교했습니다. 설교 단에 올라가기 전에 기도했습니다. “주님, 사람들의 인식에서 저는 완전히 사라지기 원합니다, 오직 주님이 나타나시기 원합니다”

기도에 응답하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은혜 받으신 분들도 계셨고, 저를 노려보고 가신 분들도 계셨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반응입니다. 예수님께 당신 자신을 드려야 한다는 가장 직설적인 외침은, 어떤 이들에게는 하늘의 기쁨으로, 어떤 이들에게는 삶의 저주로 느껴질 것입니다. 원래 기독교 신앙은 그런 것입니다. 이제는 더욱 더 주님께 생명을 드리는 자들과, 근심하며 발걸음을 돌리는 자들로 나누어집니다. 

이미 설교 준비를 완벽하게 마쳤기 때문에, 설교 전에는 조용히 루이스의 책을 읽었습니다. 마음이 평안해지고 안정을 찾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합니다. 평범함에 지친 저의 마음에, 가장 탁월하게 주님의 뜻을 알려줍니다. 저의 마음에 직접 들려주는 그의 이야기들은 너무나 달콤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새롭게 합니다. 

저에게 있어서 지난 8개월은 사라진 것처럼 느껴집니다. 지나치게 최선을 다했고 그런 면에서 후회가 없습니다. 아마 다시 돌아가서 해보라고 하더라도, 더 잘 할 자신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소극적으로는 교회에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저의 역할을 잘 감당했고, 적극적으로는 목회자로서 보일 수 있는 최선으로 설교를 감당했습니다. 주님께서 넘치게 저에게 은혜와 기쁨을 주셨고, 분에 넘치는 칭찬을 받았고, 제가 누릴 수 없던 영광을 누렸습니다. 

이제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며칠 전 부터 갑자기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금보다, 열배의 깊이를 가지고 싶다” 이미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수준은 지나갔습니다. 사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저는 배우고 배우고 또 배울 뿐입니다. 배운 것을 실천하고 갈고 닦고 더 나아질 뿐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의 기도입니다. “주님, 열배의 깊이를 허락해 주십시요”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이미 삶의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스스로도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여전히 목이 마르다고 느꼈습니다. 제가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처럼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팀켈러처럼 되고 싶고, 루이스처럼 되고 싶고, 칼빈처럼 되고 싶고, 마이클 호튼처럼 되고 싶고, 박영선 목사님처럼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저의 꿈입니다. 그리고 솔직한 제 내면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들 보다 더 나아야한다고.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저의 개인적인 욕심은 아닙니다. 앞으로 이정도 수준에서 살아도 크게 잘못될 일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주일 설교를 하면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설교를 들으시는 성도님들의 그 진지함과 기뻐함을 보면서, 그렇게 좋아해주시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빛나는 눈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더 잘해야겠다” 

하나님께서는 설교자를 세우시고 그분의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교회의 신비입니다. 예배에 와서 앉아 있다는 것 자체가 사실상 그런 기대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바랄 수 없는 그 어떤 것을 얻고자 하는 그 간절한 마음으로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탁월해야 합니다. 그분들의 기대가 있기 때문에, 저는 앞으로도 더 깊어져야 합니다. 굳이 그것을 수치로 표현하자면, 열배입니다. 

곰곰히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한동안 제 설교가 늘지 않아서 정말 고민했습니다. 그때에도 이미 저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고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새로운 길을 여셨습니다. 저를 더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의 한계를 스스로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주 섬세하고도 확고한 전략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저의 결론은, 루이스와 칼빈을 평생동안 가장 진지하게 그리고 깊게 파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제가 가장 믿을 수 있는 두분입니다. 루이스는 세상을 향해서 가장 탁월하게 기독교를 설명하고 이해한 사람이며, 칼빈은 가장 성경적으로 탁월하게 기독교를 이해하고 밝히 보인 사람입니다.

물론 종종 두 사람의 책을 읽기는 했습니다. 루이스야 원래 좋아했고, 지금도 기독교 강요를 읽고 있습니다. 하지만 태도 자체를 바꾸었습니다. 그들의 것이 완전히 저의 것이 되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데 이렇게 말하더군요. “두주 전쯤에 바로 이 부분에 대해서 루이스가 저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물론 직접은 아니구요” 사람들이 모두 즐겁게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팀켈러 목사님이 얼마나 루이스를 사랑하는지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팀켈러 목사님에게 루이스는 살아있는 사람이고 또 늘 동행하는 존재였습니다. 

칼빈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신학책을 보고 학자들을 살펴보지만, 그러나 가장 성경적으로 탁월하게 설명하는 것은 역시 칼빈입니다. 흔들림 없이 신뢰할 수 있는, 그리고 의지할 수 있는, 성경이 이야기한만큼 성경에 대해서 깊이 있게 이야기하는 분이 칼빈입니다. 칼빈의 모든 태도와 모든 사고와 모든 경건을 저의 것이 되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네이버 밴드를 추가로 두개를 더 만들었습니다. “하루 한번” 루이스, “하루 한번” 칼빈입니다. 멘탈리티에 빠져서 반복해서 읽으면서 얻은 유익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마치 그런것처럼, 평생동안 하루 한번 루이스와 칼빈으로 저를 완전히 변화시키는 것이 목적입니다. 천천히 그러나 깊이 그리고 아주 지나치게 진지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아마 그 길의 언젠가에는, 열배 쯤 깊어져 있는 제가 존재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모든 것은 주님의 은혜입니다. 목회자로서의 저의 여정은, 어떤 의미에서 이제 시작입니다. 마치 저는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 보물이 가득 담긴 바로 그 방의 문을, 아주 살짝 열어보고서 놀라버린 아이입니다. 오 이럴수가! 눈이 부셨습니다. 그곳에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것들이 있었습니다! 제대로 쳐다볼 수 조차 없는 아름다움입니다. 그래서 떨렸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주 조금 맛보았습니다. 그것은 내 삶 전체를 드려도 아깝지 않은 그 어떤 것입니다. 그래서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저의 가진 모든 것과 저의 삶 전체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곳에 쓰여지기 원하고, 저에게 맡기신 성도님들을 잘 섬기시는데 사용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저의, 유일한 소원입니다. 

2023년 1월 9일 월요일

The Healer / 민수기 5장 1-4절 주일 설교 (준비 과정)


* "설교 본문"을 어떻게 정했는가?

이번 설교는, 제가 정했다기 보다는 정해진 본문입니다. 함께 섬기는 부목사님과 주일 설교를 돌아가면서 해야 하는 상황인데, "매일 성경" 본문으로 하는 것으로 정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정해진 본문이 민수기였습니다. 거기다가 제가 민수기 본문의 첫 설교자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너무 어려운 처지가 되었습니다.

민수기 본문은 정말 까다롭습니다. 아마 하지 않을 수 있다면, 굳이 정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스토리가 등장하거나 차라리 교리적인 본문이, 준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훨씬 낫습니다. 하지만, 단순한 명령과 숫자, 그리고 지금 시대와 정말 동떨어진 것 처럼 느껴지는 정결 예법이 설교 본문이 된다면, 막막한 것이 사실입니다. 

"빠르게 해결하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저 본문을 계속 묵상하고,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또 그것을 성도님들에게 최대한 잘 들리고 이해되도록 구성하는 방법 뿐입니다. 이미 설교 스케쥴이 나왔기 때문에, 설교 본문을 처음 읽고 준비한 것부터 따진다면, 대략 두주 반 정도 준비한 설교입니다.

* "설교의 전체 구조"는 어떠했는가?

이번 본문을 묵상하면서, 두가지 큰 틀을 잡았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거룩을 요구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과 연결해서, "여호와 자신이 그 진영 안에 있기 때문에 거룩을 요구하셨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그것을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이고 공동체 안에서 실천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유출병이 무엇인지, 그리고 악성 피부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명하는데에만 십분 이상을 쓸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지루한 전개를 사용하면, 성도님들이 졸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그 부분은 아주 간결하게 짚고 넘어가면서, 오히려 "좀 더 도전적인 구조"를 사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요구를 하실 수 있는 분이신가? 그리고 과연 그러한 요구가 합당한가? 에 대한 도전적인 구조입니다. 

이러한 구조는 불신자를 염두에 둔 구조입니다. 팀켈러 목사님이 자주 사용하는 구조입니다. 그리고 신자이지만 믿음이 연약한 이들에게 도전을 줄 수 있는 구조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일종의 답변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설명"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해답으로서 그리스도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 "설교의 서두"를 어떻게 열 것인가?

지금까지 들어본 대략 스무편의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에서는, 설교 서두에 "설교 전체 구조를 제시"합니다. 설교가 전체 구성이 세가지 대지라면, 세가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다고 미리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저 같은 경우는, 그것이 썩 좋은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설교에 대한 신비감 혹은 기대감"을 떨어트리기 때문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아직 제 수준에서는 그렇게 서두에 이야기하고서 설교 본론에 들어가서 기대감을 유지하는 것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그런 방식을 감히 시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번 설교의 경우에는, 민수기로 처음 여는 설교이기 때문에, 적어도 민수기가 무엇인가를 설명은 반드시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부터 출애굽기에 이어지는 스토리를 아주 간략하게 제시하면서 설교를 열었습니다. 이러한 접근이 좋은 것은,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적어도 스토리를 이해하면서 내용을 따라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책"은 어떻게 설교에 인용했는가? 

본격적으로 신앙 혹은 신학 서적을 읽은 것이 스무살 부터입니다. 그리고 이십년이 지난 지금에와서야, 지금까지 읽고 고민한 모든 것이 꽃을 피운다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책들을 함께 읽기 시작한 것이 오년 정도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모든 것들이, 유기적으로 조금씩 연결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설교문을 쓰면서 큰 막힘이 적고, 생각을 풀어내도 신학인 틀에서 큰 오류가 없어 보입니다. 저에게 이런 날이 올 줄 감히 생각하지 못했고, 누구도 이런 결과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지 않았습니다. 저처럼 이해력이 느리고 속도가 느린 사람도, 결국 꽃을 피울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한편의 설교 가운데, 여섯권의 책을 인용했습니다. 굳이 "꼭 이만큼 인용해야겠다" 라고 생각한 것은 전혀 아닙니다. "이번 설교는 이 정도 인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껴서 인용한 것입니다. 세권 정도는 평소에 좋아서 기억하던 부분이고, 기독교 강요와 나를 따르라의 한 부분은 설교를 위해서 의도적으로 찾은 것입니다. 

아래에서 보시는 것처럼, 심지어 "책의 표지에 저자와 책 이름"을 넣고, 이후에 이어서 "책의 내용"을 본당 화면에 띄우면서 사용했습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 설교자들 중에 누구도 이렇게까지 한 적은 없는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굉장히 조심스러웠습니다. 한편으로는 매우 도전적이고 또 한편으로는 매우 따분하게 느끼실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책을 인용함에 있어서 "그 지루함"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이번에 설교를 준비하면서 새롭게 느낀 것은, 설교자가 책을 인용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어떤 목적으로, 그리고 또 어떤 깊이와 감정으로 그 책을 인용하는가"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인용한 두 권은, 탁월한 책들이지만 모두 기독교와 상관 없는 secular한 책들입니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결론적으로 성도님들의 마음에 전혀 부담이 없어 보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secular 한 책을 인용했지만, 오히려 제가 의도한 것 이상으로 "전체 말씀"을 진중하게 받아들인 분들이 있어서 적잖이 놀랐습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제가 적절하게 "그 책에 대해서 평가"를 한 것이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책의 논리와 비교하면서 "성경의 탁월함을 논증"했기 때문에, 더 성도님들의 마음이 오히려 편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에 인용한 모든 내용들은, 단순히 설교의 논리를 이끌어가기 위한 내용이 아니라, "저의 마음이 완전히 담긴 내용들"이었습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 책들을 인용하면서, 제가 정말 존경하는 분들의 "명예"를 소중히 여기고 싶었습니다. 

탁월한 저자들의 "모든 신학과 삶을 걸고 기록한 책"들이, 조금이라도 초라하게 인용되는 것이 너무나 싫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읽고 느꼈던 마음의 기쁨과 감동"을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제 온 마음을 담아서 읽고 인용하고, 그것이 성도님들의 마음에 남기고 싶었습니다. 

칼빈을 인용한 부분은,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대한 기독교 강요에 나오는 칼빈의 해설입니다. 읽으면서 제 마음에도 너무 마음에 감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설교 때에도, 마치 제가 칼빈 자신이 된 것 처럼 최대한 감정을 넣어서 읽었습니다. 



본회퍼는, "말씀에 대한 진실함과 자신의 신학"을 "자신의 생명"으로 증명한 사람입니다. 나를 따르라를 읽으면서, 그것을 너무나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마음이 숙연해지는 것을 저절로 느낍니다. 그래서 저 역시, "정말 진지한 태도와 마음"으로 인용하였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인용한 마이클 호튼의 언약 신학의 인용은, 수도 없이 줄을 치면서 그 책을 읽고 "제 마음에 가장 깊이 남은 내용"입니다. 호튼의 신학 그리고 개혁주의의 핵심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설교의 마무리에 책을 인용하는 것은 왠만하면 하지 않았겠지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사용한 것입니다.



* 설교에 대한 "반응"들

설교를 마치고 예배 후에 인사를 하는데, 성도님들의 표정이 참 다양했습니다. 많이 당황하신 분들도 계셨고, 제 손을 꼭 붙잡고 너무 좋았다고 말씀하신 분들도 계셨습니다. 너무 감정적이지 않고 신학적인 깊이가 있어서 그런 부분에서 좋았다고 하신 분도 계셨습니다. 어려웠지만 왠지 모르게 좋았다는 분도 계셨고, 위로가 되었다고 아내를 통해서 연락 주신 분도 계십니다. 

또 어떤 분들은 설교의 주제를 정확하게 이해한 분도 계시고, 구조나 책 인용이 상당히 파격적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설교"를 들은 것 같았다고 말씀하신 분들도 계셨습니다. "이제는 정말 어떻게 살아야할지 알겠다" 라고 하신 분도 계셨습니다. 동일한 설교를 듣고, 성령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다양하게 역사하신다고 느꼈습니다. 

물론 어떤 분들은 너무 지루했다고 말씀하신 분도 계셨습니다. 이십분 정도면 딱 좋겠는데 너무 길었다고 이야기하시고, 또 너무 고차원적인 이야기라서 힘들었다는 분도 계셨습니다. 특히 칠십이 넘으신 어르신들이 그랬다고 반응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런데 또 흥미로운 것은, 육십대 어르신 한 분 중에는 "정말 대단하다!"라고 말씀해 주신 분도 계십니다. 제가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그렇게 마음을 느끼셨다는 것이 설교자로서 행복했습니다. 

제가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느낀 것이 정확하게 그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대단하다!, 겨우 40분이라는 시간에 이렇게 아름다운 내용을 이렇게 아름다운 구성으로 이렇게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전하다니!" 존경하는 분의 수준에 아주 작게나마 다가갔다는 것이 기뻤습니다.

* "설교의 매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설교자로서 항상 제가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해야 매력적인 설교가 되는가?" 입니다. 이 질문은, 아마 평생의 고민이 될 것입니다. 물론 기본적인 전략들은 모든 설교자들이 다 아는 것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인 설교는 "무엇인가"가 확실히 다릅니다. 그리고 저는 그 매력 포인트는 결국 "설교자의 어떤 본능적인 감각"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어떻게 일할 것인가?"를 에전에 읽고 내용을 마음에 품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실제로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는 본능에 가깝습니다. 성경을 묵상하다가 제 마음 속에서 거의 저절로 떠오른 것에 가깝습니다. 이 부분이 저는 항상 흥미롭습니다. 

저는 재미있는 웹툰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요즘의 웹툰은, "엄청난 내용 전개와 구성력"을 가집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넘나들고, 등장 인물들의 심리 안에서 일어나는 내용을 치밀하게 묘사하고 이 모든 것을 탁월하게 연결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을까?" 감동하면서 볼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팀켈러 목사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를 들으면 들을 수록 매력적입니다. 지루할만 하면 예가 등장하는데, 그 예들은 반드시 논리적으로 들어가야 하는 자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신학적인 자료들 그리고 심지어 기독교에 대적하는 사람들까지 인용하지만 전혀 거부감이 없습니다. 

저는 이 "탁월함"들을 "계속적으로 습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이번주에 있을 좋은 설교를 만들고 싶어 반짝 무엇인가 대단한 기술을 동원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설교자가 "꾸준하게 무엇을 하는가"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고 "가장 탁월한 것"을 "자신의 오감과 영혼"으로 "지속적으로 경험"해 보아야 합니다. 저에게 있어서는 "성경 통독과 지속적인 묵상, 꾸준한 독서와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에 대한 연구"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꾸준하게 고민할 때에, 결국 설교에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 어느 정도로 원고를 "연습"해야 할까?

제가 좋아하는 탑건 메버릭에는, 상징적인 숫자인 "10"이 등장합니다. 영화 초반에서 메버릭은 "마하 10"이라는 벽을 깨기 위해서 도전하고 성공합니다. 그리고 영화 중반을 넘어 주어지는 미션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10G"라는 중력을 이겨내야 합니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10이라는 숫자를 통해서, 인간이 이겨내야할 가장 완전한 목표와, 그것을 이뤄내는 메버릭의 위대함을 보여줍니다. 

설교 원고는 목요일 정도에 90퍼센트 정도 완성이 되었습니다. "실제 설교의 삼일 전" 입니다. 원고를 쓰면서 이미 연습을 하지만, 제대로 연습하는 것이 항상 중요합니다.

원고가 완성된 후에 대략 세어보니, 방에서 일곱번 정도 소리내어서 모션과 함께 연습하고, 실제 본당 강대상에서 세번 정도 연습하였습니다. 도합 열 번입니다. 의식한 것은 아니지만, 세어보니까 그렇더군요. 지금 교회에서 실제 강대상에서 설교를 세번이나 연습한 것은 처음입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는 주일에 도합 세번의 설교를 해야합니다. 두번째가 끝이 나고 세번째 예배에 들어갔을 때에는 이미 몸의 힘이 거의 다 빠진 상태였습니다. 실제로 정신이 거의 흐려진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설교자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버거웠습니다.

그런데 세번째 설교 후반부 중에 참 흥미로운 경험을 하였습니다. "거의 연습한 대로" 한 것입니다. 제 정신은 지쳐서 더 이상 설교의 내용을 따라갈 수 없지만, 여러번 연습한 것이 저의 몸과 근육에 남아서 앞서간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지나칠 정도로의 실전 연습"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이번에 더욱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 "무슨 자료"를 설교에 참조하였는가? 

저는 항상 동일한 패턴입니다. 개역 성경 묵상, NET BIBLE 번역본, 추가 번역본과 원어 참조, 스터디 바이블, 주석, 사전 등의 순서입니다. 그리고 조금 저속한 표현일 수는 있겠으나, "닥치는대로 다 찾아보는 것" 이 저의 전략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우아한 설교 준비를 상상하는 듯 합니다. 그런데 적어도 저에게 있어서 설교는, 혼신의 힘을 다하는 전투에 가깝습니다. 책을 읽고 고민한다는 점에서는 우아해 보일 수 있겠지만, 그 과정은 정말 처절합니다. 

아래의 스터디 바이블들은, 모두 탁월한 내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이해를 보여주고 설교의 큰 흐름을 결정해 주었습니다. 충분히 읽고 고민하면서 설교 내용에 반영한 것들입니다. 

5:3 without the camp. Outside the boundary of the camp (v. 4). defile. To render unclean. whereof I dwell. God’s presence was the reason for safeguarding the purity of the camp. Approaching God requires clean hands and pure hearts (Ps. 24:3–4).

Joel R. Beeke, Michael P. V. Barrett, and Gerald M. Bilkes, eds., The Reformation Heritage KJV Study Bible (Grand Rapids, MI: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14), 203.

1. The expulsion of people from Israel’s camp for ceremonial uncleanness reminds us that “the ungodly shall not stand in the judgment, nor sinners in the congregation of the righteous” (Ps. 1:5). What a solemn matter! Have you been to Jesus for the cleansing from sin found only in His blood? If we are in Christ then we know that we have been made fit to approach the Lord and we can enjoy fellowship with Him.

Joel R. Beeke, Michael P. V. Barrett, and Gerald M. Bilkes, eds., The Reformation Heritage KJV Study Bible (Grand Rapids, MI: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14), 204.

5:2 DISEASE … DISCHARGE. Strict instructions were given to the people in Leviticus 13–15 about diagnosing, treating, and dealing with conditions that God defined as “unclean.” While this probably resulted in many saved lives, it was also God’s way of teaching them the foundations of holiness.

Lyman Coleman, ed., Life Connections Study Bible (Nashville, TN: Holman Bibles, 2019), 203.

Even this process, however, is a means of grace from God designed to purify his people and to encourage all (including the disciplined individual) to cling more tightly to Christ since our clean state is found in him alone. We enter the new Jerusalem not having purified ourselves by our efforts but having been washed in the blood of the Lamb (Rev. 1:5), so that our names are written in his book of life (Rev. 21:27).

L. Michael Morales, “Numbers,” in Gospel Transformation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ed. Bryan Chapell and Dane Ortlund (Wheaton, IL: Crossway, 2013), 176.

거룩을 정의하는데 있어서는, 기본적으로는 LEXHAM 사전을 다 읽어 보았지만, 결국 깔끔하게 몇 단어로 정리한 것은, 넷 바이블의 각주를 참조하였습니다. 인용한 시편 24편 3절에 등장하는 거룩에서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로고스의 원어 검색으로, 거룩이라는 단어가 처음 사용된 출애굽기 3장 5절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그곳의 각주입니다. 

sn The word קֹדֶשׁ (qodesh, “holy”) indicates “set apart, distinct, unique.” What made a mountain or other place holy was the fact that God chose that place to reveal himself or to reside among his people. Because God was in this place, the ground was different—it was holy.

sn (study note)—Includes comments about historical or cultural background, explanation of obscure phrases or brief discussions of context, discussions of the theological point made by the biblical author, cross references and references to Old Testament quotations or allusions in the New Testament, and other information helpful to the modern reader.

Biblical Studies Press, The NET Bible, Second Edition. (Denmark: Thomas Nelson, 2019).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공동체가 실제로 행동한 것이 중요했다"는 것은, 이미 제 개인 묵상으로도 끌어낸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John Crurrid의 주석을 통해서 좀 더 확신있게 적용할 수 있었습니다. 

What is at stake is not merely the people in the camp, but the very sanctuary and dwelling place of God. Nothing unclean is to come near that which sits in the centre of the camp, but it will be thrust outside the camp. The final verse of the passage drives home the importance of the action: three times the text says that Israel did as God had commanded them. This triple emphasis is further heightened by the exact repetition at the beginning and end of the verse: it literally reads, ‘Thus did the sons of Israel … thus did the sons of Israel.’

John D. Currid, A Study Commentary on Numbers, EP Study Commentary (Darlington, England; Carlisle, PA: Evangelical Press, 2009), 87–88.

* 설교자의 "영광"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설교를 잘하는 것" 자체가 저의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시편 84편을 묵상하다가, 제가 설교를 아무리 잘 해도, "하나님의 영광의 지극히 일부분"을 드러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제 인생 최고의 설교 그리고 모든 성도님들이 감동과 은혜를 받은 설교를 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의 일억분의 일도 나타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깨달음이, 오히려 제 마음을 참 편안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감히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감격했습니다. 

저와 같이 초라하고 부족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영광이 드러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것 자체가 이미 구원의 기적이라고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저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의 정말 작은 부분"이라도 드러날 수 있다면, 제 인생에 있어서 이것보다 더 행복한 일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 인생의 최고의 설교"가 되리라고 기대하고 또 어느 정도 예상감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 예상대로 참 좋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설교가 끝이나자 제 마음에는, 제가 잘하고 못하고는 그렇게 마음에 둘 필요가 없다고 느꼈습니다. 

정작 설교를 마치니 정말 좋았던 것은, "성도님들과 함께 은혜를 나눌 수 있었다는 사실" 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서 사용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성도님들의 섬기는 자리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야 말로, "설교자의 가장 큰 영광"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이유이고, 또 앞으로 저의 설교가 더욱 기대가 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그리고 "앞으로 설교를 준비하며 살아갈 과정"이며, "제가 해왔던 일들"을 계속 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다짐했습니다. 

처음 신학교 시절 설교를 배울 때 부터, 마인드맵으로 full text로 원고를 모두 쓰고, 그것이 연습이 되었습니다. 꾸준하게 독서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힘들고 외로울 때에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힘들었지만, 제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평가하고 발전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익히고 배우는 것이 이번 설교에 정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겨우 몇개월의 공부와 훈련과 연습을 통해서, 저는 설교자로서 또 다른 차원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저는 저의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다른 사람의 길을 가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소명과, 그 확신"을 따라서 걸어갈 것입니다. 그렇게 결심 할 수 있어서 행복하고, 또 오늘 하루를 그렇게 걸어갈 수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 "설교문전체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11/blog-post_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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