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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 9일 월요일

The Healer / 민수기 5장 1-4절 주일 설교 (준비 과정)


* "설교 본문"을 어떻게 정했는가?

이번 설교는, 제가 정했다기 보다는 정해진 본문입니다. 함께 섬기는 부목사님과 주일 설교를 돌아가면서 해야 하는 상황인데, "매일 성경" 본문으로 하는 것으로 정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정해진 본문이 민수기였습니다. 거기다가 제가 민수기 본문의 첫 설교자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너무 어려운 처지가 되었습니다.

민수기 본문은 정말 까다롭습니다. 아마 하지 않을 수 있다면, 굳이 정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스토리가 등장하거나 차라리 교리적인 본문이, 준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훨씬 낫습니다. 하지만, 단순한 명령과 숫자, 그리고 지금 시대와 정말 동떨어진 것 처럼 느껴지는 정결 예법이 설교 본문이 된다면, 막막한 것이 사실입니다. 

"빠르게 해결하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저 본문을 계속 묵상하고,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또 그것을 성도님들에게 최대한 잘 들리고 이해되도록 구성하는 방법 뿐입니다. 이미 설교 스케쥴이 나왔기 때문에, 설교 본문을 처음 읽고 준비한 것부터 따진다면, 대략 두주 반 정도 준비한 설교입니다.

* "설교의 전체 구조"는 어떠했는가?

이번 본문을 묵상하면서, 두가지 큰 틀을 잡았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거룩을 요구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과 연결해서, "여호와 자신이 그 진영 안에 있기 때문에 거룩을 요구하셨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그것을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이고 공동체 안에서 실천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유출병이 무엇인지, 그리고 악성 피부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명하는데에만 십분 이상을 쓸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지루한 전개를 사용하면, 성도님들이 졸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그 부분은 아주 간결하게 짚고 넘어가면서, 오히려 "좀 더 도전적인 구조"를 사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요구를 하실 수 있는 분이신가? 그리고 과연 그러한 요구가 합당한가? 에 대한 도전적인 구조입니다. 

이러한 구조는 불신자를 염두에 둔 구조입니다. 팀켈러 목사님이 자주 사용하는 구조입니다. 그리고 신자이지만 믿음이 연약한 이들에게 도전을 줄 수 있는 구조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일종의 답변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설명"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해답으로서 그리스도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 "설교의 서두"를 어떻게 열 것인가?

지금까지 들어본 대략 스무편의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에서는, 설교 서두에 "설교 전체 구조를 제시"합니다. 설교가 전체 구성이 세가지 대지라면, 세가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다고 미리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저 같은 경우는, 그것이 썩 좋은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설교에 대한 신비감 혹은 기대감"을 떨어트리기 때문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아직 제 수준에서는 그렇게 서두에 이야기하고서 설교 본론에 들어가서 기대감을 유지하는 것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그런 방식을 감히 시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번 설교의 경우에는, 민수기로 처음 여는 설교이기 때문에, 적어도 민수기가 무엇인가를 설명은 반드시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부터 출애굽기에 이어지는 스토리를 아주 간략하게 제시하면서 설교를 열었습니다. 이러한 접근이 좋은 것은,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적어도 스토리를 이해하면서 내용을 따라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책"은 어떻게 설교에 인용했는가? 

본격적으로 신앙 혹은 신학 서적을 읽은 것이 스무살 부터입니다. 그리고 이십년이 지난 지금에와서야, 지금까지 읽고 고민한 모든 것이 꽃을 피운다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책들을 함께 읽기 시작한 것이 오년 정도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모든 것들이, 유기적으로 조금씩 연결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설교문을 쓰면서 큰 막힘이 적고, 생각을 풀어내도 신학인 틀에서 큰 오류가 없어 보입니다. 저에게 이런 날이 올 줄 감히 생각하지 못했고, 누구도 이런 결과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지 않았습니다. 저처럼 이해력이 느리고 속도가 느린 사람도, 결국 꽃을 피울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한편의 설교 가운데, 여섯권의 책을 인용했습니다. 굳이 "꼭 이만큼 인용해야겠다" 라고 생각한 것은 전혀 아닙니다. "이번 설교는 이 정도 인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껴서 인용한 것입니다. 세권 정도는 평소에 좋아서 기억하던 부분이고, 기독교 강요와 나를 따르라의 한 부분은 설교를 위해서 의도적으로 찾은 것입니다. 

아래에서 보시는 것처럼, 심지어 "책의 표지에 저자와 책 이름"을 넣고, 이후에 이어서 "책의 내용"을 본당 화면에 띄우면서 사용했습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 설교자들 중에 누구도 이렇게까지 한 적은 없는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굉장히 조심스러웠습니다. 한편으로는 매우 도전적이고 또 한편으로는 매우 따분하게 느끼실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책을 인용함에 있어서 "그 지루함"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이번에 설교를 준비하면서 새롭게 느낀 것은, 설교자가 책을 인용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어떤 목적으로, 그리고 또 어떤 깊이와 감정으로 그 책을 인용하는가"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인용한 두 권은, 탁월한 책들이지만 모두 기독교와 상관 없는 secular한 책들입니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결론적으로 성도님들의 마음에 전혀 부담이 없어 보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secular 한 책을 인용했지만, 오히려 제가 의도한 것 이상으로 "전체 말씀"을 진중하게 받아들인 분들이 있어서 적잖이 놀랐습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제가 적절하게 "그 책에 대해서 평가"를 한 것이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책의 논리와 비교하면서 "성경의 탁월함을 논증"했기 때문에, 더 성도님들의 마음이 오히려 편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에 인용한 모든 내용들은, 단순히 설교의 논리를 이끌어가기 위한 내용이 아니라, "저의 마음이 완전히 담긴 내용들"이었습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 책들을 인용하면서, 제가 정말 존경하는 분들의 "명예"를 소중히 여기고 싶었습니다. 

탁월한 저자들의 "모든 신학과 삶을 걸고 기록한 책"들이, 조금이라도 초라하게 인용되는 것이 너무나 싫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읽고 느꼈던 마음의 기쁨과 감동"을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제 온 마음을 담아서 읽고 인용하고, 그것이 성도님들의 마음에 남기고 싶었습니다. 

칼빈을 인용한 부분은,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대한 기독교 강요에 나오는 칼빈의 해설입니다. 읽으면서 제 마음에도 너무 마음에 감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설교 때에도, 마치 제가 칼빈 자신이 된 것 처럼 최대한 감정을 넣어서 읽었습니다. 



본회퍼는, "말씀에 대한 진실함과 자신의 신학"을 "자신의 생명"으로 증명한 사람입니다. 나를 따르라를 읽으면서, 그것을 너무나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마음이 숙연해지는 것을 저절로 느낍니다. 그래서 저 역시, "정말 진지한 태도와 마음"으로 인용하였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인용한 마이클 호튼의 언약 신학의 인용은, 수도 없이 줄을 치면서 그 책을 읽고 "제 마음에 가장 깊이 남은 내용"입니다. 호튼의 신학 그리고 개혁주의의 핵심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설교의 마무리에 책을 인용하는 것은 왠만하면 하지 않았겠지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사용한 것입니다.



* 설교에 대한 "반응"들

설교를 마치고 예배 후에 인사를 하는데, 성도님들의 표정이 참 다양했습니다. 많이 당황하신 분들도 계셨고, 제 손을 꼭 붙잡고 너무 좋았다고 말씀하신 분들도 계셨습니다. 너무 감정적이지 않고 신학적인 깊이가 있어서 그런 부분에서 좋았다고 하신 분도 계셨습니다. 어려웠지만 왠지 모르게 좋았다는 분도 계셨고, 위로가 되었다고 아내를 통해서 연락 주신 분도 계십니다. 

또 어떤 분들은 설교의 주제를 정확하게 이해한 분도 계시고, 구조나 책 인용이 상당히 파격적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설교"를 들은 것 같았다고 말씀하신 분들도 계셨습니다. "이제는 정말 어떻게 살아야할지 알겠다" 라고 하신 분도 계셨습니다. 동일한 설교를 듣고, 성령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다양하게 역사하신다고 느꼈습니다. 

물론 어떤 분들은 너무 지루했다고 말씀하신 분도 계셨습니다. 이십분 정도면 딱 좋겠는데 너무 길었다고 이야기하시고, 또 너무 고차원적인 이야기라서 힘들었다는 분도 계셨습니다. 특히 칠십이 넘으신 어르신들이 그랬다고 반응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런데 또 흥미로운 것은, 육십대 어르신 한 분 중에는 "정말 대단하다!"라고 말씀해 주신 분도 계십니다. 제가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그렇게 마음을 느끼셨다는 것이 설교자로서 행복했습니다. 

제가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느낀 것이 정확하게 그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대단하다!, 겨우 40분이라는 시간에 이렇게 아름다운 내용을 이렇게 아름다운 구성으로 이렇게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전하다니!" 존경하는 분의 수준에 아주 작게나마 다가갔다는 것이 기뻤습니다.

* "설교의 매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설교자로서 항상 제가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해야 매력적인 설교가 되는가?" 입니다. 이 질문은, 아마 평생의 고민이 될 것입니다. 물론 기본적인 전략들은 모든 설교자들이 다 아는 것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인 설교는 "무엇인가"가 확실히 다릅니다. 그리고 저는 그 매력 포인트는 결국 "설교자의 어떤 본능적인 감각"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어떻게 일할 것인가?"를 에전에 읽고 내용을 마음에 품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실제로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는 본능에 가깝습니다. 성경을 묵상하다가 제 마음 속에서 거의 저절로 떠오른 것에 가깝습니다. 이 부분이 저는 항상 흥미롭습니다. 

저는 재미있는 웹툰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요즘의 웹툰은, "엄청난 내용 전개와 구성력"을 가집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넘나들고, 등장 인물들의 심리 안에서 일어나는 내용을 치밀하게 묘사하고 이 모든 것을 탁월하게 연결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을까?" 감동하면서 볼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팀켈러 목사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를 들으면 들을 수록 매력적입니다. 지루할만 하면 예가 등장하는데, 그 예들은 반드시 논리적으로 들어가야 하는 자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신학적인 자료들 그리고 심지어 기독교에 대적하는 사람들까지 인용하지만 전혀 거부감이 없습니다. 

저는 이 "탁월함"들을 "계속적으로 습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이번주에 있을 좋은 설교를 만들고 싶어 반짝 무엇인가 대단한 기술을 동원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설교자가 "꾸준하게 무엇을 하는가"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고 "가장 탁월한 것"을 "자신의 오감과 영혼"으로 "지속적으로 경험"해 보아야 합니다. 저에게 있어서는 "성경 통독과 지속적인 묵상, 꾸준한 독서와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에 대한 연구"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꾸준하게 고민할 때에, 결국 설교에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 어느 정도로 원고를 "연습"해야 할까?

제가 좋아하는 탑건 메버릭에는, 상징적인 숫자인 "10"이 등장합니다. 영화 초반에서 메버릭은 "마하 10"이라는 벽을 깨기 위해서 도전하고 성공합니다. 그리고 영화 중반을 넘어 주어지는 미션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10G"라는 중력을 이겨내야 합니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10이라는 숫자를 통해서, 인간이 이겨내야할 가장 완전한 목표와, 그것을 이뤄내는 메버릭의 위대함을 보여줍니다. 

설교 원고는 목요일 정도에 90퍼센트 정도 완성이 되었습니다. "실제 설교의 삼일 전" 입니다. 원고를 쓰면서 이미 연습을 하지만, 제대로 연습하는 것이 항상 중요합니다.

원고가 완성된 후에 대략 세어보니, 방에서 일곱번 정도 소리내어서 모션과 함께 연습하고, 실제 본당 강대상에서 세번 정도 연습하였습니다. 도합 열 번입니다. 의식한 것은 아니지만, 세어보니까 그렇더군요. 지금 교회에서 실제 강대상에서 설교를 세번이나 연습한 것은 처음입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는 주일에 도합 세번의 설교를 해야합니다. 두번째가 끝이 나고 세번째 예배에 들어갔을 때에는 이미 몸의 힘이 거의 다 빠진 상태였습니다. 실제로 정신이 거의 흐려진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설교자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버거웠습니다.

그런데 세번째 설교 후반부 중에 참 흥미로운 경험을 하였습니다. "거의 연습한 대로" 한 것입니다. 제 정신은 지쳐서 더 이상 설교의 내용을 따라갈 수 없지만, 여러번 연습한 것이 저의 몸과 근육에 남아서 앞서간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지나칠 정도로의 실전 연습"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이번에 더욱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 "무슨 자료"를 설교에 참조하였는가? 

저는 항상 동일한 패턴입니다. 개역 성경 묵상, NET BIBLE 번역본, 추가 번역본과 원어 참조, 스터디 바이블, 주석, 사전 등의 순서입니다. 그리고 조금 저속한 표현일 수는 있겠으나, "닥치는대로 다 찾아보는 것" 이 저의 전략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우아한 설교 준비를 상상하는 듯 합니다. 그런데 적어도 저에게 있어서 설교는, 혼신의 힘을 다하는 전투에 가깝습니다. 책을 읽고 고민한다는 점에서는 우아해 보일 수 있겠지만, 그 과정은 정말 처절합니다. 

아래의 스터디 바이블들은, 모두 탁월한 내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이해를 보여주고 설교의 큰 흐름을 결정해 주었습니다. 충분히 읽고 고민하면서 설교 내용에 반영한 것들입니다. 

5:3 without the camp. Outside the boundary of the camp (v. 4). defile. To render unclean. whereof I dwell. God’s presence was the reason for safeguarding the purity of the camp. Approaching God requires clean hands and pure hearts (Ps. 24:3–4).

Joel R. Beeke, Michael P. V. Barrett, and Gerald M. Bilkes, eds., The Reformation Heritage KJV Study Bible (Grand Rapids, MI: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14), 203.

1. The expulsion of people from Israel’s camp for ceremonial uncleanness reminds us that “the ungodly shall not stand in the judgment, nor sinners in the congregation of the righteous” (Ps. 1:5). What a solemn matter! Have you been to Jesus for the cleansing from sin found only in His blood? If we are in Christ then we know that we have been made fit to approach the Lord and we can enjoy fellowship with Him.

Joel R. Beeke, Michael P. V. Barrett, and Gerald M. Bilkes, eds., The Reformation Heritage KJV Study Bible (Grand Rapids, MI: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14), 204.

5:2 DISEASE … DISCHARGE. Strict instructions were given to the people in Leviticus 13–15 about diagnosing, treating, and dealing with conditions that God defined as “unclean.” While this probably resulted in many saved lives, it was also God’s way of teaching them the foundations of holiness.

Lyman Coleman, ed., Life Connections Study Bible (Nashville, TN: Holman Bibles, 2019), 203.

Even this process, however, is a means of grace from God designed to purify his people and to encourage all (including the disciplined individual) to cling more tightly to Christ since our clean state is found in him alone. We enter the new Jerusalem not having purified ourselves by our efforts but having been washed in the blood of the Lamb (Rev. 1:5), so that our names are written in his book of life (Rev. 21:27).

L. Michael Morales, “Numbers,” in Gospel Transformation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ed. Bryan Chapell and Dane Ortlund (Wheaton, IL: Crossway, 2013), 176.

거룩을 정의하는데 있어서는, 기본적으로는 LEXHAM 사전을 다 읽어 보았지만, 결국 깔끔하게 몇 단어로 정리한 것은, 넷 바이블의 각주를 참조하였습니다. 인용한 시편 24편 3절에 등장하는 거룩에서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로고스의 원어 검색으로, 거룩이라는 단어가 처음 사용된 출애굽기 3장 5절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그곳의 각주입니다. 

sn The word קֹדֶשׁ (qodesh, “holy”) indicates “set apart, distinct, unique.” What made a mountain or other place holy was the fact that God chose that place to reveal himself or to reside among his people. Because God was in this place, the ground was different—it was holy.

sn (study note)—Includes comments about historical or cultural background, explanation of obscure phrases or brief discussions of context, discussions of the theological point made by the biblical author, cross references and references to Old Testament quotations or allusions in the New Testament, and other information helpful to the modern reader.

Biblical Studies Press, The NET Bible, Second Edition. (Denmark: Thomas Nelson, 2019).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공동체가 실제로 행동한 것이 중요했다"는 것은, 이미 제 개인 묵상으로도 끌어낸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John Crurrid의 주석을 통해서 좀 더 확신있게 적용할 수 있었습니다. 

What is at stake is not merely the people in the camp, but the very sanctuary and dwelling place of God. Nothing unclean is to come near that which sits in the centre of the camp, but it will be thrust outside the camp. The final verse of the passage drives home the importance of the action: three times the text says that Israel did as God had commanded them. This triple emphasis is further heightened by the exact repetition at the beginning and end of the verse: it literally reads, ‘Thus did the sons of Israel … thus did the sons of Israel.’

John D. Currid, A Study Commentary on Numbers, EP Study Commentary (Darlington, England; Carlisle, PA: Evangelical Press, 2009), 87–88.

* 설교자의 "영광"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설교를 잘하는 것" 자체가 저의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시편 84편을 묵상하다가, 제가 설교를 아무리 잘 해도, "하나님의 영광의 지극히 일부분"을 드러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제 인생 최고의 설교 그리고 모든 성도님들이 감동과 은혜를 받은 설교를 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의 일억분의 일도 나타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깨달음이, 오히려 제 마음을 참 편안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감히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감격했습니다. 

저와 같이 초라하고 부족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영광이 드러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것 자체가 이미 구원의 기적이라고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저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의 정말 작은 부분"이라도 드러날 수 있다면, 제 인생에 있어서 이것보다 더 행복한 일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 인생의 최고의 설교"가 되리라고 기대하고 또 어느 정도 예상감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 예상대로 참 좋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설교가 끝이나자 제 마음에는, 제가 잘하고 못하고는 그렇게 마음에 둘 필요가 없다고 느꼈습니다. 

정작 설교를 마치니 정말 좋았던 것은, "성도님들과 함께 은혜를 나눌 수 있었다는 사실" 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서 사용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성도님들의 섬기는 자리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야 말로, "설교자의 가장 큰 영광"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이유이고, 또 앞으로 저의 설교가 더욱 기대가 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그리고 "앞으로 설교를 준비하며 살아갈 과정"이며, "제가 해왔던 일들"을 계속 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다짐했습니다. 

처음 신학교 시절 설교를 배울 때 부터, 마인드맵으로 full text로 원고를 모두 쓰고, 그것이 연습이 되었습니다. 꾸준하게 독서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힘들고 외로울 때에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힘들었지만, 제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평가하고 발전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익히고 배우는 것이 이번 설교에 정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겨우 몇개월의 공부와 훈련과 연습을 통해서, 저는 설교자로서 또 다른 차원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저는 저의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다른 사람의 길을 가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소명과, 그 확신"을 따라서 걸어갈 것입니다. 그렇게 결심 할 수 있어서 행복하고, 또 오늘 하루를 그렇게 걸어갈 수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 "설교문전체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11/blog-post_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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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17일 월요일

"And how to come home" by 탑건 메버릭 Quote - 흔들리지 않는 "목회의 목적" 그리고 "방법"

 

탑건 메버릭을 열번 정도 본 이후에는, 몇번 더 보았는지 더 이상 세어 보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볼 때 마다 저의 마음이 새로워지고 목회적인 영감을 주는 것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저는, 석사로 교육학을 전공했습니다. 박사도 목회학이지만 사실상 교육에 모든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육이라는 것은 "저의 삶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제 머리 속에는 온통, 교육의 내용과 목적과 방법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교육"이라는 관점에서 탑건은, 많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저에게는 이 영화가, 일종의 교회 교육에 대한 교과서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주인공인 메버릭은, 특별한 미션을 위해서 조종사들을 교육시키는 교관이 됩니다. 그런데 메버릭이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 위에 제독이 있고, 그 제독의 통제 아래에 조종사들을 교육해야 합니다. 

메버릭의 교육은, 일반적인 비행 교육이 아닙니다. 탑건이라는 명예를 이미 가지고 있는 최고의 조종사들을 더욱 혹독하게 밀어 붙입니다. 제독이 보기에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상식적인 수준을 넘어서는 훈련을 지속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영화는, 메버릭과 제독 사이에 존재하는 "교육에 대한 근본적인 혹은 철학적인 충돌"을 명백하게 보여줍니다. 

먼저 제독은, 이 미션 자체를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독의 관심은, "조종사들이 미션을 완수할 수 있는가 없는가" 입니다. 그들은 이미 탑건 출신의 최고의 조종사이기 때문에, 혹시 그들이 생명을 잃고 돌아올 수 없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들이 짊어져야 하는 당연한 위험이라고 전제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독의 입장에서는, 메버릭이 하는 심한 훈련은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메버릭이 그들에게 요구하는 지나친 훈련이 마음에 들지가 않습니다. 쓸데 없이 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제독은 그저 조종사들이 임무만 어떻게든 완수할 수 있다면, 그 다음은 조종사 스스로가 책임져야 하는 것이고, 그것이 그들이 짊어져야 할 몫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둘은, 자신들의 관점을 붙들고 대화를 통해서 논쟁합니다. 

(Admiral) What exactly do you suppose you were teaching, Captain?

(Maverick) That as good as they are, sir, they still have something to learn.

You are talking about the best fighter pilots on the planet, Captin.

The parameters of this mission call for something they have never encountered. 

Okay, you have less than three weeks to teach them how to fight as a team. and how to strike the target.

And how to come home. 

Every mission has its risks. These pilots accept that. 

I don't, sir.

그런데 바로 이 부분에서, 메버릭은 제독과는 전혀 다르게 접근합니다. 메버릭이 교관으로서 염려하는 것은,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자신이 훈련시키는 조종사들이 "이전에는 경험해 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차원의 도전 (something they have never encountered)"에 맞닥뜨려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자타가 공인하는 탑건 출신 조종사들입니다. 그런데 메버릭이 판단할 때에 그들은, 여전히 부족합니다. 단순히 그들의 실력이 부족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수행해야 하는 임무 자체"가 그들의 능력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교육한다는 것은 "평범한 교육"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훈련 방식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메버릭이 염려하는 또 다른 하나는, 그 미션을 완수한 이후에 그들은 반드시 "살아돌아와야 (come home)"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자신의 아들과 같은 조종사도 있습니다. 메버릭은 그들을 "도구"로 보지 않고 "자신의 전우", 그리고 "자신의 가족"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반드시 살아돌아와야만 합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메버릭은, 더욱 자신의 교육 방법에 매진합니다. 왜냐하면 메버릭의 관심과 그의 목표는, 조종사들이 단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엄청난 미션을 완수하고, 더 나아가 최종적으로 그들이 돌아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단순히 교관이 아니라, 조종사들의 "how to come home" 까지 책임져야 하는 마치 아버지와 같은 사람으로 자신을 인식합니다.

저는 이 부분을 보면서, 그리고 지금까지 여러번 보면서, 전율을 느낍니다. "교회 교육"이 마치 이런 것과 같다고, 처음부터 지금까지 확고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시대는, 이런 시대입니다. 4차 산업혁명과 고물가 고유가 시대, 다원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세상, 진리가 더 이상 진리로 여김을 받지 않고, 모두가 각자 도생하며 살아가는 시대, 하나님과 교회의 명예가 땅에 떨어진 시대, 그리고 미래를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시대, 그 누구도 역사상 이렇게 어려운 시대를 경험해본 적이 없습니다. 역사학자, 인문학자, 그리고 일반 대중까지 지금 시대를 바라보며 큰 위기감과 절박함을 느낍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시대의 상황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우리의 교회 교육은, "단순히 교육을 하는 것 자체"를 뛰어 넘어야 합니다. 어쩌면, "단순한 양육"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적당하게 설교합니다. 적당한 소그룹을 합니다. 적당한 교제를 구입해서, 적당하게 가르치고, 적당하게 박수치고 끝나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이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교회 교육을 하고 있어" 라고 말할 수 있는 수준으로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적당한 수준의 교육"들이 뭉쳐서 우리의 눈을 가립니다. "우리는 뭔가 열심히 하고 있는거야, 그러니까 아무런 문제가 없을꺼야" 

그러나 이 어려운 시대에 교회에 중요한 것은, "목적" 입니다. 마치 메버릭이, 제독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조종사들에 대한 자신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 것 처럼, 우리는 나 자신과 더 나아가서 교회를 향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목적"은 이것입니다. 과연 교회의 교육이, "그들이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이 시대에 크리스천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겠는가?"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들이 삶에서 좌절하거나 영적으로 생명을 잃지 않고 과연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과연 교회 교육이 이 두가지 기준을 충족할 수 있겠는가?" 입니다. 

왜 제가 이렇게 "목적"에 집착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목적에서부터" 방법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제독은, 메버릭이 왜 그렇게 특이한 교육 방법에 집착하는지 처음에는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근본적"으로 "메버릭의 목적"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흔히 듣는 질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렇게 질문합니다. "도대체 성도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중요한 질문이지만, 질문이 잘못되었습니다. 그 질문은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까?"로 바뀌어야 합니다. 목적이 분명해야, 그 다음에 그 목적을 이루는 방법이 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목적에서 방법이 나오는 것이지, 방법에서 목적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는, 사실 어려운 문제는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형식과 내용으로든 우리의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막 살아도 어떻게든 살게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목적" 입니다. "목적"이 분명한 사람만이, "그 목적에 맞는 방향과 방법"을 찾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제대로 된 방향과 방법"을 "끊임없이 갈망하고 도전하고 추구한 사람"만이, 인생의 종국에 있어서 "자신이 남은 삶을 제대로 살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저는, "피상적이면서 멋져 보이는 것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멋져 보이지만 아무 의미도 없는 문장과 말은, 정말 헛된 것입니다. 삶을 허무하게 만들고 사람을 피곤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이 글 안에서, "그래도 교회 교육이 중요하니, 그래도 당신의 신앙이 중요하니, 이제는 정신차리고 좀 더 노력해 보세요" 라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어떤 경로로 여기까지 오셔서 이 글을 읽고 계신지 모르겠지만, 만약 우리가 서로 만날 수 있다면, 잠시 같이 걸어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눈"을 보면서 진지하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과연 당신과 저는, 흔들리지 않는 "교육의 목적" 혹은 "목회의 목적" 그리고 "삶의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까? "시대에 대한 절박함과 그 혼돈의 깊이"를 인식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러한 현실의 인식 안에서, "크리스천으로서 하나님의 빛을 드러내야 한다는 숭고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리고 더 나아가 "그 숭고한 목적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있습니까? 어디서 들어본 좋다더라 라고 말하는 그런 그럴듯한 평범한 방법이 아니라, 당신이 정말 확고하게 붙들고 생명을 걸 수 있는 어떤 방법이 있습니까? 아니 만약, 당신이 그 방법을 가지지 못했고 아직까지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것에 대해서 마음 아파하고 고민하고 절박하게 찾고 있습니까?

만약에, 이 질문들에 대해서 명쾌하게 혹은 확신있게 답하지 못한다면, 여전히 우리는 평범한 삶에 머무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만약, 이러한 질문들에 "당신의 언어"로 "당신의 확신"으로 누군가에게 풀어내어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야 말로 우리가 그렇게 찾아 해매던 "어떻게 해야 삶을 제대로 살 수 있는가?" 에 대한 대답에, 큰 한걸음을 내 딛은 것이라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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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5일 월요일

"Maybe so, sir, but not today" by 탑건 메버릭 Quote - "보이지 않는 미래"를 향해서 "오늘"을 충실하게 살아간다는 것

 

"The end is inevitable, Maverick. Your kind is heading to extinction." -Admiral Cain

"Maybe so, sir, but not today." -Maverick

저에게 지금까지 가장 큰 영향을 준 영화는, 고3때에 보았던 주성치의 서유기입니다. "한 남자의 이루어졌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그린 영황입니다. 아직도 마지막 장면을 생각하면 마음이 먹먹하네요. :) 언뜻 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는 B급 감성의 코미디 영화이지만, 사랑의 본질을 보여주는 가장 완벽한 스토리와 연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서유기 이후에, 저에게 다시는 인생 영화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탑건 메버릭을 보기 전에는 그랬습니다. 영화관에서 감동을 받아서 결국 영화를 구입했습니다. 하루를 마무리하면서 운동을 하면서 몇번을 더 보았습니다. 아마 미국으로 지역이 셋팅 되어서인지 자막은 영어 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대사의 깊은 맛을 더 음미하고 있습니다. 

탑건의 메버릭은, 여전히 "캡틴"입니다. 그는 파일럿이야말로,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비행기보다 파일럿이 여전히 더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환경은 달라졌습니다. 더 이상 파일럿이 필요 없는 세상이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더욱 설 자리를 잃어갑니다. 그는 최고의 파일럿이지만, 세상은 더 이상 그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 처럼 보입니다. 

케인 제독은, 그가 탑건 교관으로 차출되었다는 소식을 알려줍니다. 케인은 무인 전투기에 전쟁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당연히 메버릭을 탐탁지 않게 생각합니다. 떠나는 메버릭의 머리 뒤로 이렇게 말을 던집니다.

The end is inevitable, Maverick. Your kind is heading to extinction.

아주 단순한 대사이지만, 그 의도는 확실합니다. 메버릭과 같은 전투기 조종사들은 이제 사라질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종말은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전투기보다 조종사들이 중요하다고 믿어도, 결국 그들과 그들이 붙들던 이상은 사라질것입니다. 메버릭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 다시 돌이키며, 제독을 향해 메버릭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Maybe so, sir, but not today.

아주 짧은 대사이지만, 제 영혼 어딘가에 이것이 깊이 남았습니다. 영혼의 흔적은 보이지 않지만, 결코 지워지지 않습니다. 메버릭도 알고 있습니다. 자신과 같은 조종사들,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들은 결국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not today". 

메버릭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바로 그 오늘" 입니다. 메버릭 역시 자신의 운명과 앞길을 알고 있지만, "바로 그날 하루만큼은" 여전히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겠다는 것입니다. 

비록 암울한 혹은 정해진 미래가 다가오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하루는 소신을 가지고 살아가겠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환경과 미래에 대하여, 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놀라우리만큼 숭고한 태도와 진정한 위대함을 경험했습니다. 

요즘처럼, 제 자신의 시간이 이렇게 빨리 흘러간다고 느낀적이 없습니다. 아마 앞으로 더 그렇겠죠. 지금 글을 쓰는 이 순간처럼 하루를 보내고 잠이 들 때 즈음에, "나의 오늘"을 돌이켜봅니다. 오늘 하루는 의미있는 삶을 살았는가? 부끄럽기가 한이 없습니다. 아무리 제 자신에게 너그러운 기준을 제시한다하더라도 높은 점수를 주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제가 스스로를 평가할 때에, 어느 정도 이상주의자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 새롭게 제 자신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더 이상주의자 그리고 원칙주의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봐도 지나칩니다. 깨달은 것은 어떻게든 실천하고 싶고, 알게 된 것은 어떻게든 실현시키고 싶습니다. 그것이 저라는 사람입니다. 단 한걸음도 물러서고 싶지 않습니다. 완벽을 향해 도전하고 싶고, 내일이 아니라 "바로 오늘" 그것을 이루고 싶습니다.

하루를 소중히 여기는 것은 지극히 성경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거짓없이 순수하게 마음 깊이 들어오고 저의 삶의 목표가 되고 나서야, 미처 예상하지 못한 큰 어려움이 그 안에 도사리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루에 대한 소중함이 너무 커서, 저도 모르게 제 마음이 눌리고 있습니다. 쉽게 다른 이들에게는 드러내기 어려운 무거움입니다. 마치, 죽음을 바로 목전에 두고 있는 것과 같은 기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부러 이것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은, 저의 무거움이 타인에게 짐이 되고 싶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밤이 되는 것이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삶의 마지막에 하루를 더 다가섰는데, 여전히 만족스럽지 않은 자리 어딘가 서 있다는 것이 제 자신을 힘들게 합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사라질 저의 운명에 대항하여 담대히 거슬러 전진하고 싶습니다. 어쩌면 저도 메버릭처럼, 이런 절박함 때문에 더욱 더, 저의 이상과 존재 가치를 "오늘 이 하루동안" 여전히 지켜내고 싶은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다른 사람이 저를 어떻게 보는가는, 저에게 별로 큰 관심사는 아닙니다. 지난 시간과 현재를 돌이켜보면, 저는 여전히 아웃사이더에 가깝습니다. 저 역시 사람이기에 다른 이의 평가를 기대할 수 밖에 없지만, 최대한 신경쓰지 않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여전히 그럴 것입니다. 

타인의 평가는 중요합니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과 교류하는 것은 결국 내가 누구인가를 새롭게 조명하게 합니다. 그러나 다시 곰곰히 생각해보면, 역설적으로 타인의 평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저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이미 제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붙드는 것은 "본질"입니다. 하나님 앞에 성실한 삶을 살았는가, 주님 보시기에 그리고 제 자신이 보기에 의미있는 삶을 살았는가, 그리고 가장 높은 이상을 추구하기 위하여 오늘 하루를 바로 그 길을 담대하게 걸어갔는가, 이것이 바로 저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본질입니다. 

내일은 저에게 어떤 하루가 펼쳐질까요? 하루를 마무리하면서 오늘을 돌이켜보며, "다시 새롭게 오늘이 될 저의 내일"을 기대해봅니다. 저의 오늘이 존재하기 때문에, 저의 내일이 존재합니다. 우리의 오늘이 의미가 있다면, 그래서 우리의 내일이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저의 이상에는 다다를 수 없다는 것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언젠가 저의 육체와 정신도 연약해 진다는 것을. 언젠가 저의 모든 꿈과 모든 결심과 모든 도전과 모든 열정과 모든 노력들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가진 운명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주어진 이 하루 만큼은, "not today", 바로 오늘은 아직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2022년 8월 3일 수요일

"낭만"을 찾아서 by Top Gun Maverick OST 01. Main Titles (You’ve Been Called Back To Top Gun)

 

미국에 와서 첫번째 영화관에서 본 영화가, 퍼시픽 림이었습니다. 영화 예고편을 보고 흥분을 이기지 못해서, 돌도 지나지 않은 첫째를 돌보는 아내에게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여보, 너무 미안한데 나 영화 한편만 보고와도 될까?" 

그리고 거의 10년만에 두번째로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았습니다. 탑건 메버릭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영화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평가하지만, 저는 흠 잡을데가 없다고 느꼈습니다. 영화의 ost가 흘러나는 바로 그 첫 순간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눈을 떼지 못하고 영화 속에 푹 젖어 들어갔습니다. 

제가 이 영화가 좋았던 것은, "낭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은 장군이 되어 마땅한 사람이지만 여전히 캡틴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는 비행의 현장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이미 인간의 능력을 압도하는 최신의 전투기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그 순간에도,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실은 인간인 파일럿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또 낭만적입니다. 

주인공은 중요한 미션 앞에서, 남들이 보기에는 무모한 길을 걸어갑니다.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비행을 스스로 도전하며, 더 나아가 자신이 가르치는 다른 이들에게도 동일한 것을 요구합니다. 무모함에 대한 도전이라기 보다는 숭고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마땅히 해야하는 맥락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팀과 함께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그 목표를 결국 이루게 됩니다. 이것 역시 지나치게 낭만적이며 또 이상적입니다. 

그런데 저는 영화를 보면서, 우리의 삶이 게속 오버랩 되었습니다. 어쩌면, 마치 주인공이 그렇게 살아간 것 처럼, 성도의 삶 역시 낭만 그 자체라고 생각했습니다. 기독교는 낭만입니다. 낭만을 빼고서는 단 하나도 설명될 수가 없습니다. 

애시당초, 신이 자신을 배신하여 구원 받을 자격 없는 인간을 위하여 구원을 약속하고, 아들을 보낸다는 것 자체가 지나치게 낭만적입니다. 마땅히 받아야 할 죄의 댓가를 신의 아들이 대신 지고, 오히려 그 아들의 의로움을 죄인이 댓가 없이 받아서 신의 아들의 형제가 된다는 것 자체가 지나치게 이상적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그 일이 역사 가운데 흔들릴 수 없는 너무나 견고한 것임을 피에 젖은 십자가의 낭만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잔인한 죽음이, 성도의 생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지나치게 낭만적이며, 지나치게 이상적이며, 또 지나치게 원칙주의입니다. 기독교 그리고 그것의 낭만이라는 것은, 인간의 이성과 판단을 아득히 뛰어넘어버렸기 때문에 그것은 진리라고 부를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결코 상식적인 종교가 아니라, 상식을 압도하는 종교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신앙의 삶 역시 "낭만"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사랑도, 용서도, 원칙도, 목회도, 관계도, 도전도, 실패도, 모든 것이 충분히 낭만적이어야 합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낭만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부르심입니다.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왜 신앙 생활이 힘들까요? 어쩌면 우리는, 내 상식 선에서 이렇게 저렇게 해보면서, 그것이 기독교의 전부인 것으로 착각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고, 나를 미워하는 자를 미워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내가 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습니다. 용기를 가져야할 바로 그 순간에, 아무런 도전 없이 주저함으로 앉아버립니다. 그저 다른 사람들처럼, 혹은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아가면서, 그것을 전혀 어색해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여깁니다. 

이것은 존재론적인 모순입니다. 가장 근본적인 낭만을 가진 기독교 안에 은혜로 들어와 있지만, 나의 삶은 여전히 낭만적이지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낭만을 통해서 나를 빚어내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어떤 것이 내 삶에 이루어지기에는, 현재의 우리에게는 너무나 요원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미워할 때 그래서 내가 마음에 분노가 일어나고 잠이 오지 않을 때에, 용서라는 낭만이 있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어떤 일을 해야 하는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주저하고 있을 때에, 용기를 발휘할 수 있는 낭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할 수 있는 바를 다 했지만, 그것이 현재로서는 실패라고 판단될 때에, 나보다 높으신 존재에게 기도함으로 이 모든 것을 맡기는 낭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원칙을 포기하고 그저 사람들이 보기 좋은대로 삶을 흘러가게 하고 싶을 때에, 어처구니 없이 원칙을 지키는 낭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의 혹은 신앙의 진정한 회복은, 낭만의 회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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