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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5일 월요일

은혜 그리고 연단 / 로마서 5장 1-4절 주일 설교

 


* 특히 마음이 무거웠던 설교

말씀을 준비하는데 마음이 굉장히 부담이 되었습니다. 평소보다 원고를 하루 정도 더 미리 완성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로마서 말씀이 굉장히 무게가 있기도 하지만, 설교자로서의 부담이 정말 컸습니다. 지나치게 성도님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해야 하는 말을 하지 않는 것도 좋은 설교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깨닫게 하셨다면, 그것을 마땅히 전해야하는 것이 설교자의 역할입니다. 어떤 분에게는 이 설교가 위로가 될 수도 있고 또 어떤 분들에게는 큰 부담이 될 수 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고심하면서 최종적으로 설교의 수위를 결정하였습니다. 


* 무릎의 기도 

영혼이 눌리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에, 선배 목사님들께서 강대상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셨다라는 이야기가 갑자기 기억이 났습니다. 마지막 설교 연습을 하면서, 아무도 없는 본당에서 강대상 뒤에 엎드렸습니다. 주여... 다른 기도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저 말씀이 잘 전해지기만을 원하는 간절한 마음이었습니다. 생각해보니 강대상에서 그렇게 기도한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앞으로 저의 설교 준비 과정 가운데 무릎의 기도를 반드시 넣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 설교의 준비

존파이퍼 목사님의 설교 강의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한편의 설교를 위해서는 평생의 준비가 필요하다" 이 설교의 중요한 내용들은 이미 20년 전부터 읽은 필립 얀시가 준 것입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들춰보면서, 이 책이 얼마나 탁월한 것인지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다만 청년 때와 달라진 것은, 어느 정도 논리로만 존재하던 은혜에 대한 감격이, 이제는 아주 많은 부분이 저의 영혼의 진실한 고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에 대한 정의는 큰 스승이신 박영선 목사님으로 부터 받은 것입니다. 복음의 절대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이해는 C.S.루이스와 팀 켈러 목사님으로 이어지는 그것을 받은 것입니다. 순전한 기독교의 핵심 내용 중 하나입니다. 특히 최근에 들은 팀켈러 목사님의 아브라함과 사라에 대한 설교가 도움이 되었습니다. 앞서간 믿음의 사람들이 저를 만들었고 저는 그것을 바탕으로 설교를 준비하였습니다. 

언제나처럼, 본문에 해당하는 책들을 샅샅이 살펴 보았습니다. 스터디 바이블들도 좋은 주석들도, "인내가 연단을 만들어내는 그 과정"에 대해서 그렇게 깊게 주해하지 않은 것이 놀라웠습니다. 성도로 또 목회자로 모든 신학적인 사고와 경험들을 동원하여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것이 얼마나 귀한 말씀인가를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좋았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두려웠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큰 진리이며 그만큼 저를 포함하여 듣는 모든 이에게 큰 희생과 결단을 요구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작성하는 것은 철저하게 계획적인 것이지만, 또한 동시에 매우 감각적인 것입니다.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듣고 또 들으면서, 그러한 감각을 배우게 됩니다. 저는 웹툰을 참 좋아하는데,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는 웹툰 보다 더 흥미진진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상당히 많은 부분 제 설교에 반영되었음을 느낍니다. 확실히 흐름을 이끌어가는 감각이 예전보다 훨씬 좋아졌습니다. 논리와 예화의 반복되는 구조, 그리고 질문과 대답이라는 반복되는 구조가 그렇습니다.

특별히 복음의 놀라움에 대한 이해와 설명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계속 들었던 팀켈러 목사님의 Sarah and the Laugh의 내용을 변형하여 차용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저에게 꼭 필요한 설교를 듣게하시고, 또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응용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심을 경험합니다.

* 팀 켈러에게 배우다 (10)
- 가장 연약한 자에게도 놀라움(Wonder)를 베푸시는 분
https://jungjinbu.blogspot.com/2023/06/10-wonder.html

저는 마인드맵으로 설교를 작성합니다. 기본적으로 저의 설교의 구조는 제가 발전시킨 퓨전 설교의 구조를 가지고 있고, 그 안에는 많은 문단들이 들어가 있습니다. 예전에는 여기에서 보시는 원고에는 문단의 제목은 넣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문단의 제목들도 그대로 살려서 넣었습니다. 혹시라도 설교자들께서 보신다면 설교의 흐름을 이해하는 작은 도움이 될 듯 합니다.


* 설교를 들어가서 

저는 설교 원고와 축도는 완벽하게 작성하여서 하는 것을 기준으로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거의 처음으로, 설교 전 기도를 미리 작성했습니다. 최근에 읽기 시작한 토저 목사님의 설교 전 기도문이 너무 마음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설교의 목표는, 설교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끝까지 청중이 단 한번의 집중력도 잃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숨도 못 쉴 정도의 긴장감과 기대감을 가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가장 먼 곳에 있는 성도님들을 보면서 설교했습니다. 마치 설교자가 본인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충분히 집중력 있게 듣고 계셨습니다. 특히 이번 설교가 성도님들의 집중력이 좋았습니다. 제가 언뜻 보기에 두분 정도가 고개를 숙이고 계셨는데 크게 신경쓰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설교자도 흔들립니다. 아무리 집중하려고 해도 설교 중에 딴 생각이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그 때 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합니다. 주님, 설교에 집중하기 원합니다, 이번 설교에는 1부와 2부에는 두번 정도 심적으로 흔들렸습니다. 내가 과연 설교를 끝까지 잘 마칠 수 있을까 라는 두려움이 갑자기 몰려왔습니다. 다행히 크게 흔들리지 않고 설교를 처음부터 끝까지 잘 진행하였습니다.

부끄럽게도, 마지막 설교 때에는 왠지 제가 잘하고 있는 모습을 자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스로도 참 한심하게 생각되었습니다. 저라는 인간은 참으로 본성적으로 타락하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도 저의 자랑의 순간으로 삼으려는 것이 제 본성에 깊이 들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설교자의 자리에 앉아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의 존재는 완전히 가려주시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이 드러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저라는 인간 자체가 완전히 가려지기를 간절히 구했습니다. 그제서야 마음이 가라앉았습니다.


* 설교 후의 마음

성도님들이 밝은 얼굴로 나가시는 것이 너무 좋았습니다. 주일은 행복해야 하고, 은혜를 받아야 하는 날입니다. 제가 설교를 듣는 사람의 입장에 있을 때조차 그것을 항상 갈망합니다. 만약에 주일에조차 말씀을 통해서 소망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도대체 성도가 어디에서 진정한 소망을 발견하겠습니까? 

성도님들의 반응이라는 측면에서만 본다면, 아마 이번 설교가 제 삶에서 가장 좋은 반응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가 너무 좋았다라는 진심어린 칭찬보다 더 좋았던 것은, 설교자로서 저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는 것과, 적어도 그 부분에 있어서는 부끄러움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성도님들께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앞으로도 더 열심히 하겠다 라는 진심의 고백이었습니다. 이 말은 예전에는 어느 정도는 인사치례였는데, 이제 보니 설교자인 제가 드릴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설교자는 열심히 해야 합니다,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 진실한 성실함이 중요하다는 것을 제 마음에 더 깊이 깨달았습니다.

성도님들이 너무 좋아하셔서, 역설적으로 되려 마음에 큰 부담이 되었습니다. 이틀 정도는 제가 살아온 삶을 돌이켜보면서, 내가 정말 잘 살아온 것일까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저는 제 영혼 하나 감당하기 어려운 연약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저의 연약한 어깨에, 많은 성도님들의 삶을 짊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설교가 더 어렵고 두려워졌습니다. 저의 설교의 한마디 한마디가, 과연 이렇게 귀한 성도님들의 삶을 책임질 수 있는 내용들인가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다시 돌이켜 보았습니다. 

은혜를 끼친 설교를 한번 했다고 사실 설교자의 삶에 달라질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저 지금까지 그러했던 것처럼, 성경을 듣고 읽고 묵상하고 마음을 다해서 설교를 준비하는 것, 그 끝없는 과정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그래서 이미 다음 설교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다음 설교는 이번보다 더 나아지기를 바라고, 또 성도님들께 큰 감격과 기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성도님들이 좋아하신 설교이지만, 이 설교는 저에게도 정말 큰 의미를 가진 설교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도하셨던 것처럼, 앞으로도 저의 인생에 많은 환난과 연단이 있을 것입니다. 이번에 설교를 준비하면서 그것을 확실히 느끼고 깨달았습니다. 다만 그 모든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 제 마음을 변화시켜주시고 더 깊은 영혼을 지닌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을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변함없이 꾸준하게 성도님들을 잘 섬기는 성실한 목회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 로마서 5장 1-4절 설교 원고

- 말씀을 위한 기도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도록 하겠습니다. 존귀하신 주님, 주님의 진리의 말씀 앞에 서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주님은 우리의 전부이시며 우리의 반석이십니다. 우둔한자에게는 주님의 지혜로 깨닫게 하시고, 교만한 자에게는 주님의 말씀으로 겸손하게 하시며, 낙심한 자에게는 주님의 위로로 평안을 주시고, 진실한 하늘의 영광을 맛보는 시간으로 역사하여주시옵소서, 존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인간의 문제 

미국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물어본다면, 저는 아마도 자동차 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차가 고장이 나서 수리 하러 갈 때 마다 감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저의 동네에 있는 메카닉은 정말 실력이 뛰어난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4년 동안 저의 집 차가 고장난 것을 못 고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제 차에 엔진 경고등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몇번 똑같은 문제로 수리를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처음으로 그분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목사님 이건 정말 고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때 마음이 덜컥 내려 앉았습니다. "아 이분에게도 안되는 것이 있구나" 저는 그때 처음으로 그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것입니다. 

저는 이 시대가 마치 "심각하게 고장난 자동차와 같다" 라는 생각을 종종 하곤합니다. 사람들은 이 시대야 말로 큰 문제가 있다고 말을 합니다. 사람들은 삶의 기준을 잃어버렸습니다. 그저 자신의 감정만을 따라서 순간의 쾌락을 쫓아서 살아갑니다. 자신이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가가 지상 최대의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간의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하기 위해서 도대체 누구를 찾아가야 하는 것일까? 종교인들과 학자들과 대중들은 대안을 내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우리가 조금 더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조금 더 양보해야 한다, 우리가 조금 더 소수의 입장에 선 사람들을 배려해야 한다, 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 성경의 대답

그러나 성경은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 어디에서 시작하였다고 말씀하시는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온 우주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진화를 통해서 우연히 저절로 어쩌다 보니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여호와 라는 신이 그분의 능력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가장 특별한 존재로 만드시고 그분의 뜻에 따라서 인간이 세상을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세상 속에서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감히 인간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그분에게 대항한 것입니다. 인간은 만들어진 존재에 불과하지만 자신의 주인이신 하나님처럼 높아지려고 교만하게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 벌로 영원한 죽음을 선고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만드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 10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여기에 모든 문제의 근원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에 우리의 영혼은 병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죄와 이기심과 탐욕으로 가득해 졌고 부부와 친구와 연인 사이에 관계가 깨어지며 사회가 병든 것입니다. 

-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

만약에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스스로의 노력으로 내가 좀 더 선한 사람이 되어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인간의 역사가 보여주는 것은 인간은 이 세상을 완전히 변화시킬 수도 없고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도 없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쟁으로 서로를 죽이는 것이 인간입니다. 다시 말해서, 타락한 영혼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그들이 저지르고 있는 죄의 댓가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인간에게는 그 어떤 소망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영원한 절망을 보시면서, 창조주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4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도대체 예수라는 사람이 누구이길래 그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분은 시간의 밖에서 부터 이미 존재하시던 분이십니다. 그분은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만드신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그런데 그분께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한 없이 낮아지셔서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셨습니다. 

왜 그분이 오셨는가? 인간의 모든 죄의 댓가를 홀로 치르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여기에 모여 있는 우리가 바로 죄인이며 우리의 범죄로 인해서 마땅히 죽임을 당해야 하는데, 오히려 예수님께서 우리의 자리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당사자인 우리가 그분 앞에서 완벽하게 순종을 해야 하는데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순종하셨고 십자가에서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버리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과 그분이 하신 일이 바로 기쁜 소식이라는 것입니다. 

- 믿음으로 얻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복음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로마서 4장 5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여기에서 성경에 가장 중요한 원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어떤 일을 실제로 하는 것과 완전히 반대에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라는 것은, 내가 행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나는 그저 두 손벌려 그것을 받기만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4장 23절과 24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3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아브라함과 우리의 관계가 나오는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가 가본적도 없는 이스라엘과 만난 적도 없는 아브라함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것은 아브라함이 착한 사람이어서 하나님께 인정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어서 의롭다하심을 얻은 것처럼, 우리도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라는 것입니다. 

나의 노력이나 나의 도덕적인 능력으로 인정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죄 용서 하심과 부활하심을 믿고 나를 향한 그분의 은혜와 사랑과 희생을 믿음으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그래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5장 1절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라고 말씀하십니다. 방금 앞에서 설명한 모든 것들이 "그러므로"에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왜 이 부분이 그렇게 감격이 되는가? 우리가 지금 누구인가를 알려주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과 어떤 관계인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라는 것은, 이제 나는 죽어서 지옥에 안 간다 라는 의미 정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를 미워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분은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우리를 한 없이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염려하시고 돌보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 적용1 : 은혜를 기억하고 누리라

그래서 오늘 말씀의 첫번째 적용은 "절대적인 은혜를 기억하고 누리라" 입니다. 혹시 성도님들께서는 방탄 소년단에 대해서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보이 그룹입니다. 영국에 올리 런던 이라는 유명한 청년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방탄 소년단의 한 멤버를 닮기 위해서 무려 스무번 넘게 성형 수술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극단적인 경우이기는 하지만, 이 시대의 중요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면서 끊임없이 비교 의식에 빠지는 것입니다. 미국 청소년들은 거의 하루에 6시간 이상을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소셜 네트워크에 접속합니다. 

어떻게든 자신을 더 멋지게 예쁘게 보이고자 하는 사진과 영상이 가득한 곳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청소년은 자신의 체중과 몸매에 큰 불만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중에 일부는 심각한 불안과 우울증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저는 이러한 현상이, 죄로 물든 인간의 근본적인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난 이후에 영혼이 죄로 인해 망가졌습니다. 인간은 처음에는 가장 높은 수준에 가장 아름다운 존재였지만, 죄로 인해서 비참하게 추락한 이후에 자신에 대한 근본적인 불안감이 있는 것입니다. 

화장을 하고 행복한척 하면서 어떻게든 감추려고 노력하지만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과 정체성을 완전히 잃어버렸습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전혀 모른 것입니다. 내 마음 안에는 알 수 없는 불안이 가득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내가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무엇 뿐인가? 내가 얼마나 몸짱인가? 내가 얼마나 잘생기고 예쁜가? 내가 얼마나 좋은 차를 타는가? 얼마나 좋은 옷을 입는가? 내가 얼마나 좋은 것을 먹는가? 온통 이것으로 나를 치장하는 것입니다. 

눈을 뜨면서 카톡을 열고 페이스북에 접속하면서, 바로 그 순간부터 남과 나를 비교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불안감을 감추기 위해서 잊어버리기 위해서, 어떻게든 남보다 멋져보여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 잡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지어 종교 생활 조차 그것의 연장선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합니다, 저는 이것도 했고 저것도 했습니다 라는 방식으로 하나님 앞에 늘어 놓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영혼이 도대체 어디에서 진정한 평안을 얻겠습니까?

- 우리는 은혜를 갈망한다

그래서 모든 인간의 마음 가운데에는 이런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가와 상관 없이 누군가 나를 한 없이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혹은 내가 큰 잘못을 했더라도 나를 무조건 용서해 주기를 바라는 그런 은혜를 갈망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필립 얀시는 헤밍웨이의 한 소설을 인용하면서 사실상 모든 인간은 은혜를 갈망한다는 것을 이렇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스페인의 한 아버지가 집을 나가버린 아들과 화해하기로 다짐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과 연락하고 싶었는데 연락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문에 광고를 내기로 결정했습니다. 

광고 내용은 이것인데 큰 글자들로 한 면에 집어 넣었습니다. "파코, 화요일 정오에 몬타나 호텔에서 만나자, 다 용서했다. 아빠" 파코는 스페인에서 흔한 이름입니다. 그날 화요일 당일에 아버지가 그곳에 나갔습니다. 그랬더니 파코라는 이름의 젊은 남자가 무려 800명이나 나와서 저마다의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은 이 자리에 무엇을 바라고 오셨습니까? 혹시라도 기독교를 가장한 종교 생활에 지치신 것은 아닙니까? 기독교는 절대로 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불교가 주장하는 고행이라는 것도, 힌두교가 주장하는 업보라는 것도, 이슬람교가 주장하는 법이라는 것도 겉 모습만 다를 뿐 본질적으로 하나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너는 여전히 부족하고 모자라고 못나고 비참한 사람인데 죽도록 노력해서 너의 노력으로 신 앞에서 인정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종교 생활로는 우리 안에 있는 불안감과 비참한 마음을 절대로 없앨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남과 비교하면서 한없이 위축되는 마음을 절대로 없앨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더 심해질 뿐입니다. 

하지만 오직 성경만이, 완전히 다른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만들어진 종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절대자인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이 값없이 조건 없이 우리를 찾아온다는 것은 인간의 모든 본성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마음 한 구석에 소원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이런 누추한 나를 찾아와서 사랑해주고 안아주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이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완전한 은혜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꿈꾸는 가장 멋진 왕자가 가장 누추한 하녀의 남편이 되어주고, 한 없이 배신 당해도 사랑을 포기 하지 않는 순애보와 같은 이야기들은 바로 오늘 이 말씀 속에서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 은혜를 누리라

복음이라는 것은, 내가 지은 모든 죄의 댓가를 그리스도께서 치르셨음을 선언하십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공포와 죽음 이후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해결하는 유일한 진리입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나의 비참한 지금의 모습과 상관 없이 여전히 하나님은 나를 넘치게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는 비참한 열등감과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병적인 우월감으로 부터 나를 완전히 해방시키시는 유일한 진리입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나 같은 죄인도 여전히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큰 은혜를 지속적으로 깨닫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향해서 긍휼의 마음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고 원수 같은 사람을 향해서 용서를 선언할 수 있게 만드는 유일한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라는 것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위로이며, 진짜라기에는 너무 좋아서 믿기 어려울 만큼 좋은 것입니다. 

2절은 연결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은혜에 들어갔다" 라고 선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께서는 과연 어떤 마음으로 오늘을 시작하셨습니까? 또 어떤 마음으로 이 자리에 나오셨습니까? 

우리가 돌이켜 보면 모든 것이 은혜가 아닙니까? 하나님을 비난하던 자들에게 주님께서 친히 찾아오셨습니다. 감히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함께 모이는 믿음의 공동체를 우리에게 주시고, 주님을 예배할 수 있는 자들로 변화시키신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주님을 가까이 하며 그분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 이 모든 것을 은혜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서 받을 자격 없는 자에게 거저 베푸시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우리가 이것을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 영원한 은혜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정말 놀라는 것은, 우리가 누리는 이 은혜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누리는 이 모든 영적인 복이라는 것이 우리가 잘하고 못하는 것에 달려 있다면 얼마나 슬픈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바울 사도는 이 모든 영적인 복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영원히 우리에게 주어진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2절에 말씀하실 때에 "그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누리는 이 모든 은혜가 내가 얼마나 기분 좋은 상태인가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세상을 잘 살았는가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얼마나 열심히 순종했는가에 달려 있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의 은혜의 손 안에 있는 것이며, 그분의 사랑의 품 안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넘치게 안심할 수 있는 것이며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가 받은 이 모든 은혜를 만끽하시고 즐거워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모든 은혜 가운데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모든 은혜를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평생을, 주님을 향한 감격과 기쁨과 감사로 살아가시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 반전

이렇게 놀라운 우리의 정체성과 감격을 보여주신 다음에 5장 3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자 여기에서 우리가 기대하지 못하던 바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환난이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2장 9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도 동일하게 환난이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환난이라는 것은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어려움이 다 여기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 3절에서 환난이라는 것은 단순히 삶의 어려움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말씀이, 하나님의 자녀를 설명하는 맥락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도 어려움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모두에게 겉보기에는 동일한 어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성경이 말씀하시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환난의 목적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악인들에게는 그것이 형벌이고 마땅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의 댓가를 치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에게 환난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전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있는 그분의 자녀들에게 닥치는 모든 어려움은, 하나님의 자녀의 영혼을 단련하며 변화시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 적용 2 : 연단의 과정으로 기꺼이 들어가라

그래서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두번째 적용은 "연단의 과정으로 기꺼이 들어가라" 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굉장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3절에 말씀에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라는 말씀입니다. 

언뜻 보기에도 정말 이상한 말씀이 아닙니까? 고난과 괴로움이 닥치면 아프고 피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믿음의 사람들 모두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 심지어 다른 번역으로 그것을 자랑스러워한다 라고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주 오래전에 듣고 한참을 웃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폴레옹 장군이 오스트리아 군과 싸우기 위해서 병사들을 거느리고 알프스 산맥을 넘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실화는 아니고 웃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알프스 산맥이라 하면 산봉우리가 평균 높이가 1.5 마일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만년설이 쌓여져 있습니다. 

엄청난 고생 끝에 나폴레옹이 병사들을 이끌고 한 봉우리에 올랐습니다. 그때 그가 뭐라고 했는가? "여기가 아닌가벼" 이 얼마나 황당한 이야기입니까? 어쩔 수 없이 병사들은 죽을 힘을 다해서 봉우리를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천신만고 끝에 다른 봉우리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그때 나폴레옹이 하는 말에 모든 병사는 기절하고 말았습니다. "아까 거긴가벼"

- 하나님의 목적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만약에 성도가 고난과 환난 자체를 즐거워하고 자랑스러워한다면 그것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상태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도는 고난 자체를 즐거워하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분명한 목적과 방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성도님들께서는 도대체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때로는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 우리가 웃으면서 말했던 나폴레옹만도 못한 리더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성경은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여호와 하나님은 전능자이시며 그분은 우리를 그분의 신성한 뜻대로 이끌어가시는 분이시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그 어떤 사건도 그 어떤 일이라도 아무런 목적이 없거나 의미가 없는 일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가지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너가 좋은대로 느끼는대로 마음대로 살아라" 라고 노골적으로 사람들에게 주입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완전히 반대의 것을 말씀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며, 그 시간을 통과할 것을 기대하시고 우리가 변화될 것을 기대하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4절 마지막에 "앎이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성도는 고난을 즐거워하는가 자랑하는가? 우리에게도 괴로움과 아픔과 슬픔이 분명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서는 누구도 부정할 없는 즐거움과 자랑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이 과정을 통해서 나를 변화시키며 나를 연단시키시며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시키고야 만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 인내는 연단을

그리고 바로 그 내면의 변화 영혼의 변화의 길을 걸어가는 과정을 3절과 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바울 사도께서는 환난이 인내를 만들어 낸다고 말씀하십니다. 인내라는 것은 문자적으로는 "어떤 것 아래에서 견디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일까?

이렇게 질문할 수 있겠습니다. "목사님 여기서 말하는 인내라는 것은 그냥 뭔가 열심히 참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까? 그냥 아무것이나 고생 많이 하고 참으면 되는 것입니까? 그냥 열심히 잘 버티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으로 변화됩니까?" 이렇게 질문하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무슨 의미인가? 예수님께서 무엇을 참으셨는가? 무엇을 인내하셨는가? 십자가를 참으시고 인내하셨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우리가 반드시 기억할 것은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그 어떤 의무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그분의 긍휼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대신하여 희생하는 희생 때문입니다.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기꺼이 감당하시는 은혜 때문이며 모든 희생을 감내하고 견디고 아버지께 순종하시겠다는 그 순종 때문입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인내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밀어 넣으시는 그 인내라는 것이 무엇인가? 희생과 은혜를 베푸는 것과 순종의 인내라는 것입니다. 

- 인내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 말씀은 마치 황금과 같은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제 자신의 삶과 수 많은 성도님들의 삶을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목회적으로 대화하고 상담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성도님들께서 공통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목사님, 저도 하나님의 뜻대로 저의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멋진 소원인가? 너무나 귀한 소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그 일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평생을 그렇게 말만 하고 소원만 품다가 삶을 허무하게 보낸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십자가의 인내를 경험하지 않고 피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성품과 내면과 삶을 변화시킬 그 길로는 정작 걸어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정말 신앙적으로 성숙한 사람인가를 살펴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하는 말이나 그 사람이 이야기하는 소원이 기준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 들어갈 때에 나오는 반사적인 태도와 반응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이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요구 받을 때에, 약자를 위해서 내가 손해를 봐야 하는 상황 앞에서, 하나님께서 순종을 요구하시는 그 상황 앞에서, 그 사람이 보여주는 반응이 진짜 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 사람이 그 상황 속에서 기꺼이 웃으면서 입술을 꽉 깨물고서 "내가 주님을 위해서 그렇게 하겠습니다" 라고 행동한다면 그것이 바로 오늘 말씀에서 보여주시는 인내라는 것입니다. 

- 경험

그런데 오늘 말씀이 아주 놀라운 것은 인내는 연단을 이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연단이라는 것을 영어 성경들은 대부분 character 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KJV은 experience라고 번역했습니다. "경험" 이라는 뜻입니다. 

예전에 인터넷에서 이런 말을 읽어본적이 있어 "연애는 책으로 배울 수 없다" 라는 것입니다. 짧은 말이지만 정말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연애라는 것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만나고 대화하고 나누고 경험하는 그 모든 것인데 어떻게 방에서 책만 보고서 연애를 배울 수 있겠는가? 그것은 말도 안되는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 시대의 성도가 마치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단 우리가 지금까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그 인내라는 것은 십자가의 인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의 인내를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혹은 그것을 감당하기를 피하고 도망치기 바쁜 사람은 단 한걸음의 성숙도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러한 인내는 한순간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인내를 지속적으로 감당함으로 자신의 단단하고 견고한 경험으로 만들어내는 사람이 하나님을 닮아가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경험을 대리만족하는 것으로는 나를 만들어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이런 것과 같은 것입니다. TV에서 한참 육아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었습니다. 아이들이 자라나는 것을 보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그런데 우리 모두가 착각하는 한가지는 남이 아이를 키우는 것을 소파에 편안하게 앉아서 TV로 보는 것과, 내가 직접 나의 아이를 출산해서 키우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육아를 하는 것은 아마도 80퍼센트는 부모의 눈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짜 부모에게 한번 물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자신의 아기가 언제 제일 이쁩니까? 잘때가 제일 예쁩니다 이렇게 대답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의 인내는 연단을 다시 말해서 성품과 경험을 만들어내는 것인데, 그것은 남이 대신해서 이뤄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남이 잘하는 것을 tv로 보면서 감동 받고 눈물 흘리면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실제로 나의 십자가를 지고 희생하고 순종하고 베풀고 경험하는 것 오직 그것만을 통해서 우리의 성품이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 소망을 이룬다

그리고 결국 그러한 과정을 거친 사람의 마음 가운데 소망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소망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2절 하반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도의 영혼 안에는 하나님께서 부으신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온 세상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지어서 그것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수준에 다다르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든 십자가의 인내로 우리의 성품을 연단하시고 경험을 만드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닮은 자들로 하나님을 닮은 자들로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이건 정말 놀라운 말씀이 아닙니까? 바로 여기에 진정한 세상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망가져서 너무나 암담하고 어두운 세상 속에서 누가 진짜 소망이 되는가? 복음이신 예수그리스도 오직 그분이 세상의 소망이 되십니다. 그리고 기꺼이 고난을 무릅쓰고 주님을 따라가는 그의 제자들, 십자가의 인내와 연단과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닮게 된 자들 바로 그들을 통하여서 세상에 소망과 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 그 길을 가라

오늘 말씀을 묵상하는데, 갑자기 군대 있던 시절이 생각이 났습니다. 저보다 두달 앞선 선임병이 있었습니다. 군대이기 때문에 참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이고 제 선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군생활 같이 하는 거의 30개월 동안 그 사람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 보았는데 정말 변한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꼭 이 이야기를 했던 것입니다. "지금 이건 내가 할 일이 아닌데 하고 있다" 

조금 과장하자면 30개월 동안 몇천번을 똑같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삶의 목표도 삶의 방향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저 국방부의 시계가 돌아가기만을 기다리는 무기력하고 의미없는 시간을 보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 25절에 27절에 말씀하십니다. "9: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9:26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말씀하신 바울 사도는 동시에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나는 나의 삶에서 절제하는 사람이다, 나는 방향 없이 달려가는 사람이 아니다, 목표가 분명한 사람이다, 나는 내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하는 사람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야 말로 참된 성도의 목표이며, 의미있는 삶의 진정한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인가? 다른 사람을 향하여는 한 없이 자비롭고 은혜로운 사람이지만, 동시에 언제나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 맡기고 은혜를 구하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이 세상에 그 어떤 운동 선수나 그 어떤 자기 계발서나 이 세상에 그 어떤 노력하는 사람 이상으로 자기 자신을 쳐서 굴복시키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은혜를 누리는 사람은 기꺼이 자신의 삶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이며, 연단의 과정으로 들어가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기는, 이 자리에 계신 모든 사랑하는 성도님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지혜와 그분의 놀라운 계획을 신뢰하시기를 바랍니다. 주저하지 말고 십자가의 연단의 과정 속으로 기꺼이 들어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속에서, 주님의 영광을 소유한 빛나고 아름다운 성도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의 마지막 날까지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주님을 위해 살아가시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시간에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감히 하나님 앞에 나설 수도 없는 죄인을 사랑하시며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그분을 믿음으로 저를 구원하시니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언제나 기억하게 하시고 그 은혜 안에서 영원한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둘째로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 하나님 십자가의 인내를 두려워하지 않기 원합니다, 은혜를 베풀고 손해를 보고 순종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기 원합니다, 십자가의 인내가 저의 성품을 변화시키도록 용기와 담대함으로 그 길을 걸어가도록 저를 이끌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와 같은 아름다운 사람으로 변화되도록 저의 삶을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이제는 우리의 의로움이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자신의 아들을 기꺼이 내어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의 성품과 경험을 빚어가시는 성령 하나님의 교통하심과 능력이, 주님의 은혜를 만족하며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기꺼이 십자가의 인내를 추구하며 살아가기로 결심한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머리 위에 영원히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 드리옵나이다 아멘

* "설교문전체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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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14일 월요일

Double / 출애굽기 34장 1-9절 주일 설교 (설교문)

* Double / 출애굽기 34장 1-9절 주일 설교 (준비 과정)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11/double-34-1-9.html

* 출애굽기 34장 1-9절 설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독점적인 사랑을 받는 민족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친히 이방 땅에 살고 있는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복을 주시며 그와 그의 후손들을 통해서 온 세상이 복을 얻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 그리고 이삭의 아들 야곱을 통해서 가족이 늘어났습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을 이집트의 총리로 만드시고 극심한 기근 가운데 그들을 돌보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집트에서 노예로 고통 당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향한 약속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모세를 보내셨습니다. 여호와께는 오직 그분의 사랑으로 이집트의 모든 우상들을 치시고 바로의 아들을 치시며 결국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밖으로 이끌어내셨습니다. 거대한 홍해 바다를 가르시며 바로와 군사들을 물 안에 수장시고 그분의 능력과 그분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 아래로 이스라엘 백성을 모으시고 시내산 위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그의 백성들이 마땅히 지켜야하는 법칙으로써 그분의 십계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모세가 시내산 위에서 내려오지 않는 것입니다. 40일이 지나도 내려오지 않자 백성들이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모세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신뢰가 흔들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난데없이 여호와에 대한 신앙을 버리고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금송아지를 여호와라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그 여호와의 이름을 모욕하고 그분의 명예에 먹칠을 하고 춤추며 노래하고 음란한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으로 부터 이어진 500년에 가까운 하나님의 사랑은 40일을 기다리지 못한 백성의 배신으로 인해서 철저하게 망가지고 더럽혀진 것입니다.

드디어 산에서 내려온 모세가 그 참혹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모세는 분노하며 십계명의 돌판을 그들을 향해 던져 버렸습니다. 모세는 그들의 배신과 그 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았습니다. 여호와의 모든 사랑과 신뢰를 버린 이것은, 마치 신실한 배우자를 버리고 외도를 한 것과 동일한 것이라고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혹시 성도님들께서는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해 보신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서로가 마음을 나누는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나를 속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배신의 상처를 위로하다" 라는 책의 저자인 이브 우드는 배신 당한 사람들을 위한 책을 쓰면서 자신의 이야기로 그 책을 열고 있습니다.

기도의 응답이라고 생각하며 한 사람을 남편으로 맞이했습니다. 행복하게 시작한 그녀의 결혼 생활은 안타깝게도 순탄하지가 못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마치 지킬 박사와 하이드와 같이 이중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때로는 그녀를 지지했지만 또 어느 순간은 한 없이 그녀를 공격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는 남편의 외도의 결정적인 증거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경험을 이렇게 적어 놓았어 "나의 결혼 생활에 대한 환상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나는 황폐해져버렸습니다"

그리고 저자는 배신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하고 있어 "배신이란 신뢰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당신은 더 이상 당신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 사람이 실제로 과연  누구인지조차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자신이 직접 배신을 당한 사람으로서 그것은 한 사람의 육체적 정신적 모든 부분을 황폐하게 한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하는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보복하는 하나님이다 과연 그 말이 맞는가?

우리가 냉정하게 구약을 평가해 본다면 여호와 하나님은 배신당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다른 누가 아니라 자신의 백성에게 배신 당하고 버림 받은 것입니다. 그분이야 말로 상처 받은 신으로써 우리 앞에 계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저지른 이 엄청난 상처와 배신 앞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목숨을 걸고 중재하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백성 전체가 망하는 것은 겨우 막을 수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들과 앞으로 동행 하는 것을 거절하셨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모세 입장에서도 할 말이 없는 것이지

그러나 우리가 주목할 것은 염치 불구하고 할 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모세가 계속적으로 여호와께 매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3 13절 하반절에 이렇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무슨 의미인가? 이렇게 황당하고 이렇게 악한 백성이라도 주의 백성으로 다시 받아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간구대로 그들과 함께 가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더 간절하게 이렇게 간구하고 있습니다. 33 18절 말씀입니다.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대범한 요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여호와 하나님께 이렇게 요구한 적이 없었습니다. 물론 모세는 이미 하나님의 임재를 여러번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처음 만날 때에 떨기 나무에서 그리고 시내산에서의 임재도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가 요구하는 것은 그런 차원의 임재가 아니라 자신의 두 눈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그 깊은 본질을 보기 원한다, 여호와 하나님 자신을 직접 보고 싶다고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아마도 여호와 하나님께 일종의 보증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의 눈으로 본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약속을 지키실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오늘 말씀 5절에 보니 모세가 원하는대로 여호와께서 강림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여호와께서 모세와 함께 섰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셨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6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4: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나 이상하지 않은가? 첫째로 이상한 것은 모세는 여호와의 영광을 보기를 원했는데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영광을 그에게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이름을 두번 더블로 선포하셨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놀라운 것은 여호와께서 선포하셨다는 것입니다. 선포라는 것은 대화가 아니라 일방적인 것입니다. 선포하는 사람이 그것을 선포하면 그것이 끝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 분위기와는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지금까지 모세는 인간 중보자로 여호와께 매달렸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당신께서 용서해 주셔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처 받은 여호와께서는 쉽게 마음을 돌이키시지 못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대화들을 통해서 모세 때문에 모세를 봐서 이제 겨우 함께 가겠다고 약속하신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완전히 분위기가 바뀌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을 보여 달라는 모세의 요청 앞에서 그분께서 자신의 이름을 선포하시면서 분위기가 반전되고 있습니다. 이제 여호와께서 어떻게 하시는가? 모세의 간구나 모세의 부탁이나 누구의 요청이 아니라 여호와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선포하시는 것이지 스스로 있는 자니라

저는 처음 관심을 가지고 오늘의 본문을 접했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여전히 이 장면을 읽으면 마음이 먹먹합니다. 이 본문이 매우 특별한 것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시며 반복적 더블로 말씀하신 것은 성경을 통틀어서 여기에 한 번 밖에 등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출애굽기 3장에서 여호와께서 자신의 이름을 알리셨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여호와라는 이름 그 자체가 그런 뜻입니다. 여호와는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분이십니다. 우리는 누구로부터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그 어떤 것을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물과 공기와 음식이 있어야 존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호와는 누구이신가? 그분은 우리와 존재 자체가 다른 분이십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과도 본질적으로 다른 분이십니다. 그분은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의지하지 않으시며 오히려 모든 것의 창조자이시며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정말 흥미롭지 않은가? 모세는 여호와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했는데 여호와는 자신의 이름을 선포하십니다. 여호와라 여호와라 라고 말씀하시며 그분의 이름을 두번으로 연속해서 선포하십니다.

이런 마음에 묵상을 하게 되었어 이 여호와라는 더블로 스스로 부르시는 그분의 자기 선포는, 우리의 앞에 펼쳐지는 일종의 광대한 장면이다 라는 것입니다.

예전에 댄버에 살면서, 가을 날에 록키 산맥 안으로 들어간 적이 있었습니다. 산을 넘어 한참을 달려서 산들의 안쪽 어딘가를 지나갈 때에, 그때 너무 아름다운 광경을 보았습니다.

평생동안 단 한번도 보지 못했던 가을의 풍경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인간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절대적인 압도적인 풍경 앞에서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의 말씀의 장면이 마치 그런 것과 같습니다. 지금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사실 얼굴을 들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신에게 버림 받아 마땅하며 그저 하나님께 매달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어떻게 반응하시는가? 스스로 존재하시는 광대하신 여호와를 선포하시며 여호와 자신의 그 본질을 근거로 하여서 이 모든 배신과 분노를 떨쳐 내시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스스로 자신이 누구이신가를 선포하시며 자신이 인간과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분의 위대한 이름과 그분의 위대한 성품이 이 모든 비참하고 슬픈 이야기를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사실상 버림 받아 마땅한 그분의 백성의 운명이 여호와의 이름이 더블로 광대하게 선포될 때에 새로운 빛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분의 백성이 여호와를 배신하고 실망시키고 분노하게 했지만 그러나 그들의 운명이 백성 자신에게 달려 있지 않고, 스스로 계시는 여호와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과 그리고 여기 있는 우리에게 선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그분의 절대적인 선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6절에 계속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라고 말씀하시지

무슨 의미인가? 그분의 성품을 풍성하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들은 이 단어와 표현들과 그 연결들이 바로 이것이 여호와라 부르는 분의 본질입니다.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 영원하시며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시며 인간이라는 존재를 뛰어넘는 그분께서, 모세가 보여달라는 그 분의 영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인간의 언어로 풀어서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자비라는 것은, 부모가 자녀들에게 보여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그 어떤 부모도 자녀의 잘못에 일대일로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모욕을 참고 인내 하는 것입니다. 자녀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그를 버리지 않는 것이 부모입니다.

은혜라는 것은, 도움을 필요하는 자들에게 거저 호의를 베푸는 것입니다. 도움이 필요해서 절박해서 눈물을 흘리는 자에게 모른척하거나 냉정하게 대하지 않고, 내가 굳이 그래야 하는 의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친절을 베푸는 것이 바로 은혜라는 것입니다.

진실이라는 것은, 그분을 신뢰할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께 진실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여호와께서는 자신을 배신한 그분의 백성에게 조차 신뢰할 수 있는 분으로 여전히 기꺼이 존재하시겠다고 선포하십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보여준 그들의 패역한 태도에 대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더 큰 품으심을 보여주는 것이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주님은 더블로 자신의 이름을 선포하시는가? 이스라엘 백성의 배신과 실패가 그분의 이름의 그 광대하심을 넘어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자신들을 버릴까 두려워하며 염려하고 괴로워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과 위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신약 성경에 모세가 다시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수난을 받으시기 얼마전에 그분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 앞에서 변하셨습니다. 얼굴이 마치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눈부시게 희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과연 누구이시길래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가?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 9절 말씀입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오늘 말씀에서 모세가 직접 보기를 갈망하던 그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의 모든 범죄와 배신과 반역을 포용하고 넘어서며 그들을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그 여호와의 이름의 더블로 전해지는 은혜의 선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상 가운데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임하셨습니다. 본질상 성부 하나님과 영원히 동등하신 성자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역사 가운데 섬광처럼 시간을 가로질러 가장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은 가장 빛나는 영광을 가지신 하나님이셨지만, 동시에 두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있는 육체를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그분이 자신의 영광의 작은 부분을 잠깐 드러내셨을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무슨 의미인가? 모세는 율법을 받은 자로서 구약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이 주어졌지만 그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모든 인간이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행하시는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진정한 중보자로 오셨습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모세가 중재자로 등장하기는 하지만 모세는 예수님의 그림자에 불과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백성의 용서를 구하면서 기껏해야 자신의 작은 생명을 걸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영원의 가치를 가지신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기 위해서 죄인을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아담 이후로 모든 인간은 죄를 범하고 자신의 창조자에게 대항하고 그분을 배신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기꺼이 아버지께 순종하시며 인간의 모든 죄의 댓가를 십자가에서 치르시기 위해서 이땅에 오신 것입니다.

모세는 그 날 드디어 본 것입니다.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그 여호와의 영광 그 본질과 아름다움 여호와라 여호와라 선포하시며 인간의 죄악의 배신의 역사를 거스르시는 그 위대하신 여호와의 이름이 이 땅에서 실현 된 것을 본 것입니다.

로마서 3 23절과 24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의미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이라는 죄의 댓가를 치르심으로 자신의 의로움을 그분을 믿는 우리에게 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배신자를 너는 신실한 자라 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반역한 이들을 너는 하나님의 자녀라 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5 8절에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무슨 의미인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에 드러난 하나님의 은혜의 선포와 자비와 긍휼하심과 그 계명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번 한주간도 어쩌면 어제 밤에도 어쩌면 오늘 아침에도, 우리는 여전히 여호와를 배신하며 여호와를 실망시키며 그분께 큰 아픔을 안겨드렸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우리가 좌절하거나 삶을 포기하거나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중보자가 되시며 우리의 도움이 되시며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였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여호와께서 포기하시지 않고 끝까지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라는 것입니다.

저에게 좋은 영향을 준 책들이 많이 있지만, 제 인생을 통틀어 가장 선한 영향력을 준 책은 필립 얀시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책입니다. 거기에 나오는 얀시의 친구 다니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어느 늦은 밤 얀시를 찾아와서 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 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결혼 생활 15년 만에 신실한 아내를 떠나기로 했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신이 한동안 잊고 있었던 살아 있는 느낌을 되찾아 주는 젊은 여자를 만났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이어갔습니다. "오늘 밤 자네를 보자고 한 것은 오랫동안 나를 괴롭혀 온 질문 때문일세 자네는 하나님이 지금 내가 하려는 끔찍한 일까지도 용서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얀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의 질문은 살아 있는 뱀처럼 식탁 위에서 꿈틀거렸고 나는 감히 대답을 하기 전 커피를 석 잔이나 비웠다" 성도님들께서는 이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여호와의 자비하심에 대한 그분의 선포 앞에서 모세가 그분께 "경배"로 반응했다는 것입니다. 8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급히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여호와 앞에서 급하게 속히 바로 반응하면서 엎드렸습니다. 그의 겸손한 반응이 연속된 단어들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라 도대체 왜 그랬을까?

물론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아니 저는 모세가 왜 이렇게 까지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스라엘의 배신이나 혹은 불륜 정도는 뭐 그 정도는 당연히 용서하셔야 되는 것 아닙니까? 은혜와 자비의 하나님이시라면 그렇게 하셔야만 되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질문할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얀시는 어처구니 없는 그의 친구를 너무나 안타까워 하면서, 하나님의 용서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용서란 베푸는 편 못지 않게 받아들이는 자가 있어야 온전한 것이 된다 죄를 인정하지 않는 자는 용서를 받아들일 수 없다"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왜 그렇게 바닥에 엎드려 경배할 수 밖에 없었는가?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그 죄의 심각함을 알았고 마음 아파했습니다그 아픔과 괴로움과 슬픔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그것을 기꺼이 용서하시는 여호와의 용서의 가치를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정도 죄는 마땅히 용서 해야하지 않겠냐는 뻔뻔한 태도를 가지고 결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참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은, 매 순간 죄악된 나의 본질을 가슴 아파하며 여호와께 기도하며, 매 순간 그분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는자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 사람이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여호와께 참되게 경배하는 자이며,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가운데 거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을 보면서 또 하나 우리가 주목할 것은, 여호와께서는 여전히 동일한 십계명을 모세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4 28절 하반절에 이렇게 말씀하시지 “28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처음의 십계명은 다 부서졌지만 다시 십계명을 하나님께서 기록하셨습니다. 사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렇게 십계명을 지키지 못했다면 차라리 한 두개 정도는 제외하고 다시 주시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전혀 물러서실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을 용서하시며 받아주시며 격려하시며 동시에 다시 한번 동일한 십계명을 주시면서 동일한 충성과 동일한 헌신과 사랑을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방식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넘어지고 실패한 이스라엘 백성을 품으시며 그들을 인도하시고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시며, 그분의 신실한 계명과 그 준엄한 말씀 앞에서 다시 한번 도전하며 살아갈 것을 엄숙하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 46-48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정말 놀라운 말씀이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들의 삶의 기준이 어디에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이 바로 너희의 기준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 마다, 저의 전 존재를 부르시는 어떤 신성한 부름을 느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완전한 의로움을 주셨습니다. 그분 앞에 용서를 구하며 나아가는 우리에게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그 완전한 의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더 이상 우리의 구원이라는 것이, 내가 어느 정도의 순종을 보여주느냐에 달려있지 않고 오히려 여호와의 능력에 그리고 그 이름에 달려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여호와는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그분의 자녀로서 그분의 사랑의 은혜에 응답하며 경배하는 자로서 여호와의 그 용서의 가치를 아는 자로서 반응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도대체 아버지의 온전하심이란 것이 무엇일까? 예수님께서는 그 온전하심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자 한번 여기서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도대체 이것이 우리에게 무슨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가? 어떤 분들은 이렇게 이야기하실 수 있겠습니다. 아 목사님 알겠습니다, 그럼 친절을 많이 베풀라는 말씀이군요? 물론 그렇게 이해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지만 사실상 지금 성경이 말씀하고자 하는 바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모세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할 때에 여호와의 그 본질 그분의 그 본성 그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보여달라고 했을 때에 여호와께서 무엇을 선포하셨는가? 여호와의 자비, 은혜, 신실하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분의 그 놀라운 선포가 실제로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셨을 때에 도대체 그리스도의 그 본질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와 그 신실하심이 그대로 유지되어서 이 세상 가운데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 것인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아버지의 온전하심처럼 온전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분처럼 자비, 은혜, 신실하심을 보이고 실천하고 나타내는 것이 결코 변두리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의 근본적인 정체성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그것이 우리의 전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의 본질로서 존재해야 하는 것이며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전념해야 하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최근에 저에게 좋은 영향력을 준 책은 "전념"이라는 책입니다. 애덤 그랜트라는 베스트셀러 저자는 이 책을 평할 때에 21시기에 행복과 성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고 평가를 했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피트 데이비스는 지금 시대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어 액채 근대라는 표현처럼 현대인들은 어느 한 가지 정체성, 장소, 공동체에 스스로 묶어두기를 원치 않으며 그래서 마치 액체처럼 어떠한 형태의 미래에도 맞춰서 적응할 수 있는 유동적 상태에 머무른다. 사람만 그런 것도 아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 역시 액체와 같은 상태를 유지한다. 사람들이 어느 하나의 직업이나 역할, 생각이나 신념, 집단이나 기관에 매달려서 오랫동안 같은 형태에 머무르지 못하는 것처럼, 사회도 우리를 진득하게 품어주지 않는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을 끊임없이 탐색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액체 근대다라고 이 시대를 평가하고 있습니다.

성도님들은 이 내용을 통해서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크리스천의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크리스천이라고 말은 하지만, 성도의 그 본질의 정체성이 무엇인가 거기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처럼 액체처럼 방향 없이 그저 흘러가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이시는 요구하시는 그 본질에 매달리지 않고, 그저 세상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여기 기웃 저기 기웃거리면서 나는 도대체 삶의 방향을 알지 못한다고 한탄하면서 액체처럼 방황하며 세월을 낭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자신에게 질문하고 싶은 것입니다. 과연 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완전하심 그분의 본성인 자비와 은혜와 긍휼과 신실하심을 내 인생의 중심의 본질로 삼고 있는가? 그것이 나의 삶의 목적이며 방향이며 나의 삶의 전부이며 다른 어떤 일이 일어나도 반드시 고수해야 할 나의 모든 것이며 내가 반드시 전념해야 하는 그 삶의 목표라고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실천하고 있는가? 그것을 여쭤보고 싶은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 1-4절 말씀입니다. “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세상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보여주십니다. 과연 은혜의 반대가 무엇인가? 무정한 것입니다. 과연 은혜의 반대가 무엇인가? 원통함을 풀지 않는 것입니다. 과연 신실함의 반대가 무엇인가?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여호와의 이름과 그분의 성품보다, 세상의 모든 쾌락과 즐거움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이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은 하나님의 성품과 정확히 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 여호와라는 그 더블 선포가 의미하는 무한한 여호와의 자비, 긍휼, 신실하심이야 말로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꿈을 이야기하곤 합니다. 세상을 하나님의 뜻대로 변화시키고 싶습니다 교회 안에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도대체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것이 무엇일까?

저는 때론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이 전혀 다르다라는 생각을 종종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말로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다고, 내가 변화되는 삶을 살고 싶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 길에 대해서는 무시하거나 무관심하거나 그 안으로 들어가 전념하기를 주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방법에 대해서 오늘 말씀에 나오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의 더블의 선포가 바로 그 자리로 우리를 이끌어가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미 베푸신 여호와 은혜와 자비와 사랑을 그리고 그분의 진실하심을 우리가 진중하게 받아들이고, 그 가치야 말로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임을 깨닫고 그 길을 기꺼이 걸어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진정한 변화는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배신이 난무하는 끔찍하고 비참한 현장 속에서 여호와라 여호와라 선포하시는 그분의 더블의 선포가 임할 때에 거기에서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여호와의 온전하심이 드러난 곳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운명의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원수를 원수로 갚지 않는 자비와, 베풀 필요도 없지만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은혜와, 남들이 나를 저버린다 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내 자리를 지키는 진실함이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흔들고 그들을 바꾸고 그 누구도 생각해보지 못한 새로운 곳으로 그들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더 많은 것을 그리고 좋은 것을 가지고 여기저기 그럴 듯한 곳을 탐색한다고 해서 나 자신과 세상은 절대 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 안에서 교회 밖에서 어떤 이들이 되어야하겠는가? 여호와의 본질을 소유한 자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자녀로서 우리의 모든 것 우리의 삶의 전부를 걸어서 여호와의 그 이름의 위대하심에 전념하여서 세상 속에 드러내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길을 기꺼이 걸어가는 사람이야, 말로 여호와께서 더블로 광대하게 선포하셨던 그분의 이름의 가치를 알고 하나님의 자녀의 명예를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이번 한 주간 동안 그리고 우리 평생에 여호와의 이름을 묵상하시고 붙드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의 본질을 향하여 전념하시며 추구하시며 살아가시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이 시간에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앞에 추악한 죄인인 저를 기꺼이 구원하시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품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여호와의 놀라운 자비와 그 은혜에 언제나 감사하며 경배하는 참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둘째로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 하나님 저를 붙들어주시기 원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의 깊은 사랑과 은혜와 자비와 진실함이 저의 삶의 본질이 되기 원합니다. 여기저기 방황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하시고 저의 남은 평생을 성도의 본질에 전념하는 제가 되도록 인도하여주시옵소서,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함께 기도하기 원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문" 전체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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