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ouble / 출애굽기 34장 1-9절 주일 설교 (준비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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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독점적인 사랑을 받는 민족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친히 이방 땅에 살고 있는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복을 주시며 그와 그의 후손들을 통해서 온 세상이 복을 얻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 그리고 이삭의 아들 야곱을 통해서 가족이 늘어났습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을 이집트의 총리로 만드시고 극심한 기근 가운데 그들을 돌보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집트에서 노예로 고통 당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향한 약속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모세를 보내셨습니다. 여호와께는 오직 그분의 사랑으로 이집트의
모든 우상들을 치시고 바로의 아들을 치시며 결국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밖으로 이끌어내셨습니다. 거대한
홍해 바다를 가르시며 바로와 군사들을 물 안에 수장시고 그분의 능력과 그분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 아래로 이스라엘 백성을 모으시고 시내산 위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그의 백성들이 마땅히 지켜야하는 법칙으로써 그분의 십계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모세가 시내산 위에서 내려오지 않는
것입니다. 40일이 지나도 내려오지 않자 백성들이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모세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신뢰가 흔들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난데없이 여호와에 대한 신앙을 버리고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금송아지를 여호와라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그 여호와의 이름을 모욕하고 그분의 명예에 먹칠을 하고 춤추며 노래하고 음란한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으로 부터 이어진 500년에 가까운 하나님의 사랑은 40일을 기다리지 못한 백성의 배신으로 인해서 철저하게 망가지고 더럽혀진 것입니다.
드디어 산에서 내려온 모세가 그 참혹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모세는
분노하며 십계명의 돌판을 그들을 향해 던져 버렸습니다. 모세는 그들의 배신과 그 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았습니다. 여호와의 모든 사랑과 신뢰를 버린 이것은, 마치
신실한 배우자를 버리고 외도를 한 것과 동일한 것이라고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혹시 성도님들께서는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해 보신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서로가 마음을 나누는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나를 속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배신의
상처를 위로하다" 라는 책의 저자인 이브 우드는 배신 당한 사람들을 위한 책을 쓰면서 자신의
이야기로 그 책을 열고 있습니다.
기도의 응답이라고 생각하며 한 사람을 남편으로 맞이했습니다. 행복하게
시작한 그녀의 결혼 생활은 안타깝게도 순탄하지가 못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마치 지킬 박사와 하이드와
같이 이중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때로는 그녀를 지지했지만 또 어느 순간은 한 없이 그녀를 공격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는 남편의 외도의 결정적인 증거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경험을 이렇게 적어 놓았어 "나의 결혼 생활에 대한 환상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나는 황폐해져버렸습니다"
그리고 저자는 배신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하고 있어 "배신이란
신뢰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당신은 더 이상 당신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 사람이 실제로 과연 누구인지조차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자신이 직접 배신을 당한 사람으로서 그것은 한 사람의 육체적
정신적 모든 부분을 황폐하게 한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하는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보복하는 하나님이다 과연 그 말이 맞는가?
우리가 냉정하게 구약을 평가해 본다면 여호와 하나님은 배신당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다른 누가 아니라 자신의 백성에게 배신 당하고 버림 받은 것입니다. 그분이야
말로 상처 받은 신으로써 우리 앞에 계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저지른 이 엄청난 상처와 배신 앞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목숨을 걸고 중재하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백성 전체가 망하는 것은 겨우 막을 수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들과 앞으로 동행 하는 것을 거절하셨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모세 입장에서도 할 말이 없는
것이지
그러나 우리가 주목할 것은 염치 불구하고 할 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모세가
계속적으로 여호와께 매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3장 13절 하반절에 이렇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무슨 의미인가? 이렇게 황당하고 이렇게 악한 백성이라도 주의
백성으로 다시 받아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간구대로 그들과 함께 가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더 간절하게 이렇게 간구하고 있습니다. 33장 18절 말씀입니다.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대범한 요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여호와 하나님께 이렇게 요구한 적이 없었습니다. 물론 모세는 이미 하나님의 임재를 여러번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처음 만날 때에 떨기 나무에서 그리고 시내산에서의 임재도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가 요구하는 것은 그런 차원의 임재가 아니라 자신의 두 눈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그 깊은 본질을
보기 원한다, 여호와 하나님 자신을 직접 보고 싶다고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아마도 여호와 하나님께 일종의 보증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의 눈으로 본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약속을 지키실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오늘 말씀 5절에 보니 모세가 원하는대로 여호와께서
강림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여호와께서 모세와 함께 섰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셨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6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4: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나 이상하지 않은가? 첫째로 이상한 것은 모세는 여호와의 영광을 보기를 원했는데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영광을 그에게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이름을 두번 더블로 선포하셨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놀라운 것은 여호와께서 선포하셨다는 것입니다. 선포라는
것은 대화가 아니라 일방적인 것입니다. 선포하는 사람이 그것을 선포하면 그것이 끝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 분위기와는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지금까지 모세는 인간 중보자로
여호와께 매달렸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당신께서 용서해 주셔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처 받은 여호와께서는 쉽게 마음을 돌이키시지 못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대화들을 통해서 모세 때문에 모세를 봐서 이제 겨우 함께 가겠다고 약속하신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완전히 분위기가 바뀌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을
보여 달라는 모세의 요청 앞에서 그분께서 자신의 이름을 선포하시면서 분위기가 반전되고 있습니다. 이제
여호와께서 어떻게 하시는가? 모세의 간구나 모세의 부탁이나 누구의 요청이 아니라 여호와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선포하시는 것이지 스스로 있는 자니라
저는 처음 관심을 가지고 오늘의 본문을 접했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여전히 이 장면을 읽으면 마음이 먹먹합니다. 이 본문이 매우 특별한 것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시며 반복적 더블로 말씀하신 것은 성경을 통틀어서 여기에 한 번 밖에 등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출애굽기 3장에서 여호와께서 자신의 이름을 알리셨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여호와라는 이름 그 자체가 그런 뜻입니다. 여호와는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분이십니다. 우리는 누구로부터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그 어떤 것을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물과 공기와 음식이 있어야 존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호와는 누구이신가? 그분은 우리와 존재 자체가 다른
분이십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과도 본질적으로 다른 분이십니다. 그분은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의지하지 않으시며 오히려 모든 것의 창조자이시며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정말 흥미롭지 않은가? 모세는 여호와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했는데 여호와는 자신의 이름을 선포하십니다. 여호와라 여호와라 라고 말씀하시며 그분의 이름을 두번으로
연속해서 선포하십니다.
이런 마음에 묵상을 하게 되었어 이 여호와라는 더블로 스스로 부르시는 그분의 자기 선포는, 우리의 앞에 펼쳐지는 일종의 광대한 장면이다 라는 것입니다.
예전에 댄버에 살면서, 가을 날에 록키 산맥 안으로 들어간 적이
있었습니다. 산을 넘어 한참을 달려서 산들의 안쪽 어딘가를 지나갈 때에, 그때 너무 아름다운 광경을 보았습니다.
평생동안 단 한번도 보지 못했던 가을의 풍경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인간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절대적인 압도적인 풍경 앞에서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의 말씀의 장면이 마치 그런 것과 같습니다. 지금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사실 얼굴을 들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신에게 버림 받아 마땅하며 그저 하나님께
매달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어떻게 반응하시는가? 스스로 존재하시는 광대하신
여호와를 선포하시며 여호와 자신의 그 본질을 근거로 하여서 이 모든 배신과 분노를 떨쳐 내시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스스로 자신이 누구이신가를 선포하시며 자신이 인간과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분의 위대한 이름과 그분의 위대한 성품이 이 모든
비참하고 슬픈 이야기를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사실상 버림 받아 마땅한 그분의 백성의 운명이 여호와의 이름이 더블로 광대하게 선포될 때에 새로운 빛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분의 백성이 여호와를 배신하고 실망시키고 분노하게 했지만 그러나 그들의 운명이
백성 자신에게 달려 있지 않고, 스스로 계시는 여호와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과 그리고 여기 있는 우리에게 선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그분의 절대적인 선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6절에
계속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라고 말씀하시지
무슨 의미인가? 그분의 성품을 풍성하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들은 이 단어와 표현들과 그 연결들이 바로 이것이 여호와라 부르는 분의 본질입니다.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 영원하시며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시며 인간이라는 존재를 뛰어넘는 그분께서, 모세가 보여달라는 그 분의 영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인간의 언어로 풀어서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자비라는 것은, 부모가 자녀들에게 보여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그 어떤 부모도 자녀의 잘못에 일대일로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모욕을
참고 인내 하는 것입니다. 자녀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그를 버리지 않는 것이 부모입니다.
은혜라는 것은, 도움을 필요하는 자들에게 거저 호의를 베푸는
것입니다. 도움이 필요해서 절박해서 눈물을 흘리는 자에게 모른척하거나 냉정하게 대하지 않고, 내가 굳이 그래야 하는 의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친절을 베푸는 것이 바로 은혜라는 것입니다.
진실이라는 것은, 그분을 신뢰할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께 진실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여호와께서는 자신을 배신한 그분의 백성에게 조차 신뢰할 수 있는 분으로 여전히 기꺼이 존재하시겠다고
선포하십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보여준 그들의 패역한 태도에
대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더 큰 품으심을 보여주는 것이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주님은 더블로 자신의
이름을 선포하시는가? 이스라엘 백성의 배신과 실패가 그분의 이름의 그 광대하심을 넘어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자신들을 버릴까 두려워하며 염려하고 괴로워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과 위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신약 성경에 모세가 다시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수난을 받으시기 얼마전에 그분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 앞에서 변하셨습니다. 얼굴이 마치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눈부시게 희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과연 누구이시길래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가?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9절 말씀입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오늘 말씀에서 모세가 직접 보기를 갈망하던
그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의 모든 범죄와 배신과 반역을 포용하고 넘어서며 그들을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그 여호와의 이름의 더블로 전해지는 은혜의 선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상 가운데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임하셨습니다. 본질상 성부 하나님과
영원히 동등하신 성자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역사 가운데 섬광처럼 시간을 가로질러 가장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은 가장 빛나는 영광을 가지신 하나님이셨지만, 동시에 두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있는 육체를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그분이 자신의 영광의 작은 부분을 잠깐 드러내셨을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무슨 의미인가? 모세는
율법을 받은 자로서 구약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이 주어졌지만 그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모든 인간이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행하시는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진정한 중보자로 오셨습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모세가 중재자로 등장하기는 하지만 모세는 예수님의 그림자에 불과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백성의 용서를 구하면서 기껏해야 자신의 작은
생명을 걸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영원의 가치를
가지신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기 위해서 죄인을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아담 이후로 모든 인간은 죄를 범하고 자신의 창조자에게 대항하고 그분을 배신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기꺼이 아버지께 순종하시며 인간의 모든 죄의
댓가를 십자가에서 치르시기 위해서 이땅에 오신 것입니다.
모세는 그 날 드디어 본 것입니다.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그
여호와의 영광 그 본질과 아름다움 여호와라 여호와라 선포하시며 인간의 죄악의 배신의 역사를 거스르시는 그 위대하신 여호와의 이름이 이 땅에서 실현
된 것을 본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3절과 24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의미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이라는 죄의 댓가를 치르심으로
자신의 의로움을 그분을 믿는 우리에게 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배신자를 너는 신실한 자라 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반역한 이들을 너는 하나님의 자녀라 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무슨 의미인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에 드러난
하나님의 은혜의 선포와 자비와 긍휼하심과 그 계명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번 한주간도 어쩌면 어제 밤에도 어쩌면 오늘 아침에도, 우리는
여전히 여호와를 배신하며 여호와를 실망시키며 그분께 큰 아픔을 안겨드렸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우리가 좌절하거나 삶을 포기하거나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중보자가 되시며 우리의 도움이 되시며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였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여호와께서 포기하시지 않고 끝까지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라는 것입니다.
저에게 좋은 영향을 준 책들이 많이 있지만, 제 인생을 통틀어
가장 선한 영향력을 준 책은 필립 얀시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책입니다. 거기에 나오는 얀시의 친구
다니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어느 늦은 밤 얀시를 찾아와서 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 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결혼 생활 15년 만에 신실한 아내를 떠나기로 했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신이 한동안 잊고 있었던 살아 있는 느낌을 되찾아 주는 젊은 여자를 만났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이어갔습니다. "오늘 밤 자네를
보자고 한 것은 오랫동안 나를 괴롭혀 온 질문 때문일세 자네는 하나님이 지금 내가 하려는 끔찍한 일까지도 용서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얀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의 질문은
살아 있는 뱀처럼 식탁 위에서 꿈틀거렸고 나는 감히 대답을 하기 전 커피를 석 잔이나 비웠다" 성도님들께서는
이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여호와의 자비하심에 대한
그분의 선포 앞에서 모세가 그분께 "경배"로
반응했다는 것입니다. 8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급히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여호와 앞에서 급하게 속히 바로 반응하면서 엎드렸습니다. 그의 겸손한 반응이 연속된 단어들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라 도대체 왜 그랬을까?
물론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아니 저는
모세가 왜 이렇게 까지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스라엘의 배신이나 혹은 불륜 정도는 뭐 그 정도는 당연히
용서하셔야 되는 것 아닙니까? 은혜와 자비의 하나님이시라면 그렇게 하셔야만 되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질문할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얀시는 어처구니 없는 그의 친구를 너무나 안타까워 하면서, 하나님의
용서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용서란 베푸는 편 못지 않게 받아들이는 자가 있어야
온전한 것이 된다 죄를 인정하지 않는 자는 용서를 받아들일 수 없다"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왜 그렇게 바닥에 엎드려 경배할 수 밖에 없었는가?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그 죄의 심각함을 알았고 마음 아파했습니다. 그 아픔과 괴로움과 슬픔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그것을 기꺼이 용서하시는 여호와의 용서의 가치를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정도 죄는 마땅히 용서 해야하지 않겠냐는 뻔뻔한 태도를 가지고 결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참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은, 매 순간 죄악된 나의 본질을 가슴 아파하며 여호와께 기도하며, 매 순간 그분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는자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 사람이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여호와께 참되게 경배하는 자이며,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가운데 거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을 보면서 또 하나 우리가 주목할 것은, 여호와께서는
여전히 동일한 십계명을 모세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4장 28절 하반절에 이렇게 말씀하시지 “28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처음의 십계명은 다 부서졌지만 다시 십계명을 하나님께서 기록하셨습니다. 사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렇게 십계명을 지키지
못했다면 차라리 한 두개 정도는 제외하고 다시 주시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전혀 물러서실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을 용서하시며 받아주시며 격려하시며 동시에 다시 한번 동일한 십계명을 주시면서 동일한 충성과 동일한 헌신과 사랑을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방식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넘어지고
실패한 이스라엘 백성을 품으시며 그들을 인도하시고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시며, 그분의 신실한 계명과
그 준엄한 말씀 앞에서 다시 한번 도전하며 살아갈 것을 엄숙하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46-48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정말 놀라운 말씀이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들의 삶의 기준이 어디에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이
바로 너희의 기준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 마다, 저의 전 존재를 부르시는 어떤
신성한 부름을 느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완전한 의로움을 주셨습니다. 그분 앞에 용서를 구하며 나아가는 우리에게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그 완전한 의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더 이상 우리의 구원이라는 것이, 내가 어느 정도의 순종을
보여주느냐에 달려있지 않고 오히려 여호와의 능력에 그리고 그 이름에 달려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여호와는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그분의 자녀로서 그분의 사랑의 은혜에 응답하며 경배하는 자로서
여호와의 그 용서의 가치를 아는 자로서 반응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도대체 아버지의 온전하심이란
것이 무엇일까? 예수님께서는 그 온전하심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자 한번 여기서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도대체 이것이 우리에게
무슨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가? 어떤 분들은 이렇게 이야기하실 수 있겠습니다. 아 목사님 알겠습니다, 그럼 친절을 많이 베풀라는 말씀이군요? 물론 그렇게 이해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지만 사실상 지금 성경이 말씀하고자 하는 바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모세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할 때에 여호와의 그 본질 그분의 그 본성 그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보여달라고 했을 때에 여호와께서 무엇을 선포하셨는가? 여호와의 자비, 은혜, 신실하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분의 그 놀라운 선포가 실제로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셨을 때에 도대체 그리스도의 그 본질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와 그 신실하심이 그대로 유지되어서 이 세상 가운데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 것인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아버지의 온전하심처럼 온전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분처럼 자비, 은혜, 신실하심을 보이고 실천하고 나타내는 것이 결코 변두리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의 근본적인 정체성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그것이 우리의 전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의 본질로서 존재해야 하는 것이며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전념해야 하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최근에 저에게 좋은 영향력을 준 책은 "전념"이라는 책입니다. 애덤 그랜트라는 베스트셀러 저자는 이 책을
평할 때에 21시기에 행복과 성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고 평가를 했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피트 데이비스는 지금 시대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어 “액채
근대라는 표현처럼 현대인들은 어느 한 가지 정체성, 장소, 공동체에
스스로 묶어두기를 원치 않으며 그래서 마치 액체처럼 어떠한 형태의 미래에도 맞춰서 적응할 수 있는 유동적 상태에 머무른다. 사람만 그런 것도 아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 역시 액체와 같은 상태를 유지한다. 사람들이
어느 하나의 직업이나 역할, 생각이나 신념, 집단이나 기관에
매달려서 오랫동안 같은 형태에 머무르지 못하는 것처럼, 사회도 우리를 진득하게 품어주지 않는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을 끊임없이 탐색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액체
근대다” 라고 이 시대를 평가하고 있습니다.
성도님들은 이 내용을 통해서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크리스천의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크리스천이라고 말은 하지만, 성도의 그 본질의 정체성이 무엇인가 거기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처럼 액체처럼 방향 없이 그저 흘러가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이시는 요구하시는 그 본질에 매달리지 않고, 그저 세상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여기 기웃 저기 기웃거리면서 나는 도대체 삶의 방향을 알지 못한다고 한탄하면서
액체처럼 방황하며 세월을 낭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자신에게 질문하고 싶은 것입니다. 과연 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완전하심 그분의 본성인 자비와 은혜와 긍휼과 신실하심을 내 인생의 중심의 본질로 삼고 있는가? 그것이
나의 삶의 목적이며 방향이며 나의 삶의 전부이며 다른 어떤 일이 일어나도 반드시 고수해야 할 나의 모든 것이며 내가 반드시 전념해야 하는 그 삶의
목표라고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실천하고 있는가? 그것을 여쭤보고 싶은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4절 말씀입니다. “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세상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보여주십니다. 과연 은혜의
반대가 무엇인가? 무정한 것입니다. 과연 은혜의 반대가 무엇인가? 원통함을 풀지 않는 것입니다. 과연 신실함의 반대가 무엇인가?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여호와의 이름과
그분의 성품보다, 세상의 모든 쾌락과 즐거움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이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은 하나님의 성품과 정확히 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 여호와라는 그 더블 선포가 의미하는 무한한 여호와의 자비,
긍휼, 신실하심이야 말로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꿈을 이야기하곤 합니다. 세상을 하나님의
뜻대로 변화시키고 싶습니다 교회 안에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도대체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것이 무엇일까?
저는 때론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이 전혀 다르다라는 생각을 종종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말로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다고, 내가 변화되는
삶을 살고 싶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 길에 대해서는 무시하거나 무관심하거나 그 안으로 들어가 전념하기를
주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방법에 대해서 오늘 말씀에 나오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의 더블의 선포가 바로 그 자리로 우리를 이끌어가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미 베푸신 여호와 은혜와
자비와 사랑을 그리고 그분의 진실하심을 우리가 진중하게 받아들이고, 그 가치야 말로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임을 깨닫고 그 길을 기꺼이 걸어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진정한 변화는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배신이 난무하는 끔찍하고 비참한 현장 속에서 여호와라 여호와라 선포하시는 그분의 더블의
선포가 임할 때에 거기에서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여호와의 온전하심이 드러난 곳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운명의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원수를 원수로 갚지 않는 자비와, 베풀 필요도 없지만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은혜와, 남들이 나를 저버린다 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내 자리를 지키는 진실함이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흔들고 그들을 바꾸고 그 누구도 생각해보지 못한 새로운 곳으로 그들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더 많은 것을 그리고 좋은 것을
가지고 여기저기 그럴 듯한 곳을 탐색한다고 해서 나 자신과 세상은 절대 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 안에서 교회 밖에서 어떤 이들이 되어야하겠는가? 여호와의
본질을 소유한 자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자녀로서 우리의 모든 것 우리의 삶의 전부를 걸어서 여호와의 그 이름의 위대하심에 전념하여서 세상
속에 드러내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길을 기꺼이 걸어가는 사람이야, 말로 여호와께서 더블로
광대하게 선포하셨던 그분의 이름의 가치를 알고 하나님의 자녀의 명예를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이번 한 주간 동안 그리고 우리 평생에 여호와의
이름을 묵상하시고 붙드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의 본질을 향하여 전념하시며 추구하시며 살아가시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이 시간에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앞에 추악한 죄인인 저를 기꺼이 구원하시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품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여호와의 놀라운 자비와 그 은혜에
언제나 감사하며 경배하는 참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둘째로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 하나님 저를 붙들어주시기 원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의 깊은 사랑과 은혜와 자비와 진실함이 저의 삶의 본질이 되기 원합니다. 여기저기 방황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하시고 저의 남은 평생을 성도의 본질에 전념하는 제가 되도록 인도하여주시옵소서,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함께 기도하기 원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문" 전체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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