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주일 설교로 이 본문을 정한 이유는, 제가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제가 주일 설교를 꾸준하게 해야 한다면 목회적인 부분까지 충분히 고려해야 하지만, 한번 하는 경우에는 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본문을 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목회적인 고려를 넣기로 생각했습니다.
이 본문은, 난이도로 따지자면 지금까지 제가 한 설교 중에 최고의 난이도를 가진 본문이었습니다. 일단 자주 다뤄지는 본문이 아니고, 아주 쉽게 풀어낼 수도 없는 본문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저는, 이스라엘의 결정적인 실패 이후에 등장하는 여호와의 이름의 더블의 선포가 제 자신과 성도에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더 충분히 연구하고 설교 안에서 풀어내고자 하는 결심으로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역시나, 쉽지는 않았습니다. 설교 자체를 조금이라도 쉽게 가려면 본문 안에서만 내용을 풀어내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그런데 네러티브는 전혀 다릅니다. 이 본문은 네러티브와 해석의 깊이라는 두가지를 한꺼번에 다 잡아야 하는 본문이었습니다.
첫째로 이 본문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중요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부터 이야기 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야만 이스라엘 백성이 배신한 그 장면을 부각시키면서, 성도님들로부터 정서적으로 공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쉽지가 않았습니다. 출애굽기 34장까지 오는 그 모든 과정을 초반에 설명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압축하고 압축해서 초반 7분 정도를 인트로에 사용했습니다. 설교 본문의 body를 만드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무심한 듯 빠르게 지나가는 이 인트로에 공을 많이 들였습니다.
해석의 내용을 위해서 살펴본 자료는, 스터디 바이블 뿐 아니라 제가 가진 출애굽기 주석은 모두 살펴 보았습니다. 합쳐서 대략 서른권 정도 될까요? 너무 버거워서 평소처럼 모든 것을 기록하지도 못했습니다. 줄을 치면서 필요한 것들을 최대한 머리 속에 넣고, 동시에 틀을 짜면서 주석들을 읽었습니다.
여러 주석들을 한꺼번에 보면 비교가 저절로 됩니다. 평소에는 정말 탁월하다고 생각했던 John Currid의 출애굽기 주석은 너무나 평범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거의 처음으로 제대로 읽어본 Peter Enns의 주석은 탁월했지만, 본문 해석에 있어서 조금은 조심스럽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히려 큰 도움이 되었던 주석은 Exaling Jesus in Exodus와 Kregel Exegetical Library 출애굽기 주석이었습니다. 물론 주석의 시리즈마다 어느 정도 특징이 있지만, 결국 그 주석을 쓰는 것은 저자이고, 저자가 탁월하면 그 주석이 탁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Spurgeon said, “Why, it is the greatest petition that man
ever asked of God” (“View”). Moses wanted to see the radiance and splendor of
God. Think about it! He had already seen glory. He saw it at the burning bush,
with the 70 elders, on the mountain top, in the tent of meeting, and through
all the miracles. Yet Moses longed to see more. Had he not seen enough? No. He
had a taste of glory, and it made him long for more.
Tony Merida, Exalting Jesus in Exodus (Nashville,
TN: Holman Reference, 2014), 출 33:18–35:3.
It is no exaggeration to say that Exodus 34:6 is one of
the most important verses in the Bible. It is repeated numerous times in
Scripture (Pss 86:15; 103:8; 145:8; Joel 2:13; Jonah 4:2). When someone wanted
to know what God was like, they could quote this verse. After saying His sacred
name “Yahweh,” which God revealed to Moses at the burning bush—denoting His
self-sufficiency and self-existence—He explained the meaning of that name more
fully by highlighting several attributes of Himself. This could be a sermon in
itself, but just consider them briefly for now.
Tony Merida, Exalting Jesus in Exodus (Nashville,
TN: Holman Reference, 2014), 출 33:18–35:3.
רַב־חֶסֶד וֶאֱמֶת
(“rich in grace and faithfulness”): On חֶסֶד (“grace”), see
below. The word אֱמֶת
(“faithfulness”) implies that something is dependable, solid, has integrity,
and stands in contrast to something that fails when needed most (the “bruised
reed”). In this context, it means that when one needs mercy, one can rely upon
YHWH.
וְחַטָּאָה (“forgiving
iniquity and transgression and sin”): The verb נשׂא when used with
“sin” as its object means to carry away the sin; that is, the word essentially
means “forgive.” It is used here with three different terms as its object:
“iniquity and transgression and sin.” The point is that YHWH forgives all
manner of immorality, disobedience, indiscretion, rebellion, or more
generically, sin. There are no degrees or types of sin that are beyond YHWH’s
power or willingness to forgive. YHWH forgives sin of every kind and shape.
Duane A. Garrett, A Commentary on Exodus: Commentary, Kregel Exegetical Library (Grand Rapids, MI: Kregel Academic, 2014), 653.
사실 이 본문은 너무 중요해서, 위의 설명에서 보시는 것처럼 구약의 여러 군데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주제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넓게 펼쳐지는 맥락에서 주석가들이 그렇게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물론 주석이라는 틀의 한계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초점을 더 맞춰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을 다룬 아티클까지 더 찾아봤어야 했는데 그것이 아쉽습니다.
특히 어느 주석에서 존파이퍼 목사님도 이 본문에 대한 아티클을 쓰셨다고 보았는데 언젠가 확인해 보아야겠습니다. 저는 구약 전공이 아니지만, 이 본문으로부터 풀어나간다면 구약학의 학위 논문도 충분히 나오리라 생각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의 오해는, 마치 주석만 열심히 읽으면 설교가 저절로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주석은 주석일 뿐입니다. 그것은 내용을 만드는 일차적인 재료에 불과합니다. 주석의 내용들을 사용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설교에 사용되는 구조와 흐름과 언어적인 표현들 그리고 전달 등은 결국 설교자가 만들고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가 정말 어렵습니다.
원래 준비한 원고는 45분 정도였습니다. 토요일 오전까지 준비한 내용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성도님들이 45분의 설교를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았고, 저도 세번의 설교를 그렇게 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하루 동안, 33분 정도로 압축하고 압축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심지어, 단어의 반복이나 조사의 사용까지 하나하나 점검하면서 군더더기를 제거했습니다.
먼저 구조적으로 보면, 이 설교는 대략 이런 흐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큰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마치 원 포인트처럼 논리적인 흐름을 가집니다. 1. 이스라엘의 배신 => 책 인용 (배신이란 것의 비참함에 대한 공감) => 상처 받은 하나님 => 모세의 간구 => 여호와의 이름의 더블의 선포의 의미 =>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냄 => 모세와 그리스도 => 그리스도의 은혜
2. 책 인용 (은혜의 남용에 대한 경고 도입) => 참된 성도에 대한 이해 3. 십계명을 다시 주심 => 성도의 의무 => 아버지의 완전하심에 대한 설명과 깨우침 => 책 인용 (성도의 삶의 전념의 필요성) => 도전 4. 결론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논리적으로 너무 아름답다라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습니다. 그 짧은 시간동안 펼쳐지는 논리 구조는 황홀함 그 자체여서, 정말 빠져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금은 성도님들께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저의 설교 안에서도 아름답고 질서정연한 논리 구조를 제시하기 위해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다시 설교의 구조를 돌이켜보면, 그렇게 어려운 내용은 아닙니다. 그러나 굉장히 빠른 전개 속에서 흐름을 따라가야 하는 부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설교자인 제 자신에게 더 부담을 지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설교 중에 버벅이거나 주저하거나 흔들리면, 당연히 성도님들도 설교의 흐름을 놓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설교 원고를 준비하면서, 어느 정도 원고가 완성된 다음부터는 실제로 설교 하는 것처럼 부단히 발음과 어조와 액션 등을 연습했습니다.
설교를 준비한 사람으로서 설교의 흐름 중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하나님의 영광이 그리스도로 나타나셨다라는 부분, 그리고 모세와 그리스도의 만남을 연결한 부분입니다. 그리스도를 이해하고 설교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감격이었습니다. 그래서 설교 초중반부터 그리스도를 등장시키고 설명하는데 집중했습니다.
예전에는 그리스도의 중요성과 그분에 대한 묵상과 설명을 어느 정도까지 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많았는데,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그 부분을 완전히 해결했습니다. 정말 충분하게, 교리적인 내용을 감동적으로 설명하시는 것을 들으면서 나도 저 정도까지는 풀어서 설명해야겠다는 가이드를 얻었습니다.
설교 안에서 책을 세번 인용했습니다. 평소 때에는 많으면 두번까지 인용하는데 세 번은 처음입니다. 그래도, 흐름상 적절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 인트로에서 인용한 책은 일반 심리학 책인데 이번에 처음 발견했고 내용을 다 읽지는 못했습니다. 번역서는 이미 절판 되어서 아마존 영문판에 공개된 것 정도를 다 읽어 보았습니다. 책 내용이 참 좋아서 나중에라도 꼭 다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사실상 성경에 있어서 죄와 함께 등장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가 배신이기 때문입니다.
나머지 두 권은 평소에 좋아하던 책입니다. 저에게 정말 큰 영향을 준 책들입니다. 저는 설교에 꼭 책을 인용해야 한다는 그런 압박감은 없지만, 설교를 준비하면서 평소에 읽었던 책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적절하게 인용할 수 있었습니다.
전달이라는 측면에서는, 철저하게 팀켈러 목사님의 스타일을 최대한 사용해 보았습니다. 저는 원래 말이 빠른 편인데 지금까지는 상당히 자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팀켈러 목사님은 쉴 부분은 충분히 쉬지만, 그러나 어떤 부분에서는 마치 속사포와 같은 연속된 논리들은 주저하지 않고 빠르게 말하더군요. 영어라서 그런지 더 멋집니다. 그래서 저도 그분처럼 특정 부분에서는 속도를 매우 빠르게 진행했습니다. 다만 충분한 완급 조절을 위해서 때론 느리게 때론 빠르게 변칙적으로 언어를 구사했습니다.
전달이라는 측면에서 이번에 가장 신경 쓴 것은, “인용 성경 구절을 읽을 때의 톤” 입니다. 가급적 저는 설교 안에서 성경 인용을 적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왜냐하면 성도님들이 너무 많은 정보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인용 구절이 많아진다면 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톤을 완전히 바꾸어서 성도님들이 완전히 새롭게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설교에서 처음으로, 굉장히 작은 목소리로 또 낮은 톤으로 성경을 읽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톤이 너무 연기 같거나 혹은 과장 되었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저는 제가 정말 느끼는 그대로, 그리고 성도님들이 더 집중할 수 있도록 그런 차원에서 새롭게 시도해 보았습니다.
제가 이렇게 시도한 것은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여러 번 이런 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구절을 그렇게 읽지는 않지만, 종종 그렇게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약간 무심한 듯이, 그러나 정말 낮은 톤으로, 그리고 빠르게 인용 성경 구절을 읽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것이 너무 좋았고 새로웠고 이번에 저의 설교에 처음으로 시도하면서 저도 좋았습니다.
3주 정도 전부터 본문을 정하고 천천히 묵상하면서 준비했습니다. 과연 매주 이렇게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못할 것 같습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평범한 저의 지나친 도전입니다. 들어간 생각들과 고민들을 다 정리하자면 끝이 없을 것 같습니다. 설교에 대한 갈망이 있는 누군가와 한 문장 한 문장 짚어가면서 이야기 나눌 수 있다면, 아마 밤을 샐 듯 합니다. 그래서 아주 핵심적인 저의 고민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설교 원고를 다 마무리하고 방에서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기도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곡의 가사처럼, More of you, Less of me 이것이 언제나 저의 기도이며 목표입니다. 저 같은 사람이 말씀을 전한다는 것이 너무 벅차서, 넘치게 하나님께 감사로 올려드렸습니다.
실제 설교 중간에 저도 모르게 세번 정도, 약간 잘난 척을 하고 싶은 혹은 정신을 집중하지 못하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삼십분이 넘는 시간 동안, 준비한 설교를 멈추지 않고 한다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순간 순간 주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했습니다. 계속 기도하면서 설교를 끝까지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쉽지 않은 설교였습니다. 그런데 일흔이 넘으신 권사님이 은혜 받으셨다고 활짝 웃으시면서 인사하셨습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기뻤습니다. 어린 제가 감히 어르신께 어떤 부분이 은혜로우셨냐고 물어볼 수는 없었지만, 은혜 받으셨다는 것 자체가 참 좋았습니다. 손을 잡아주시는데 손이 따뜻했습니다.
아직 신앙이 어린 젊은 집사님 한 분이 너무 좋았다고, 어렵지 않았다고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습니다. 단순히 제가 어느 정도로 설교를 했느냐를 떠나서,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합신을 졸업한지가 이렇게 오래되었는데, 설교학 교수님들의 말씀이 여전히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성도는 주일에 설교 한번 들으러 교회 오는 거라고, 그러니까 정말 정성들여서 잘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일 설교가 강단에서 약해지는 것을 염려하시며 눈물로 학생들에게 호소하셨습니다. 그 절절하고 아린 마음이, 여전히 저에게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좋아지기 위해서, 글도 쓰고 고민도 하고 정리도 합니다. 어려운 고비를 지나고 나니, 힘들게 하던 몸살도 좋아진 것 같은 착각이 듭니다. 며칠동안 계속 먹었던 약기운에 어지러웠는데 이제서야 조금은 머리가 개운합니다. 저의 작은 도전들과 발걸음들을 하나님께서 선하게 사용하시기를 언제나처럼 기도합니다.
* "설교문" 전체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11/blog-post_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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