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her's Day라는 개념은 여전히 저에게는 익숙하지 않습니다. 한국에서는 어버이날로 지키는 것을 미국에서는 Mother's Day로 지키고 이어서 Father's Day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미 아내를 위해서 마음을 쓰고 나면 사실 저를 위한 날은 잊어버립니다. 다만 목회를 위해서는 기억해야 하기 때문에 중요성을 가지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아내와 아이들이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오래 전에 잃어버린 머그컵을 용돈을 모아서 샀다고 합니다. 그리고 함께 편지를 써 주었습니다. 삐뚤한 글씨이지만 한글로 쓴 것이 너무 기특합니다.
쓴 내용을 한참이나 읽고 또 읽어 봤습니다. 너무나 사랑하는 아이들이지만, 또 아이들에 비친 저의 모습이 어떨까 싶어 조심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한자 한자 적어낸 그 내용 속에서, 아이들의 마음이 느껴져서 마음이 저릿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아빠로서 잘한 것이 뭐가 있나 싶어서 미안한 마음입니다.
참 재미있는 것은, 둘다 저를 응원한다고 적었다는 것입니다. 많이 컸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저는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저의 아버지께서 얼마나 큰 수고를 하시는지 잘 몰랐습니다. 제가 집에서 편안하게 보내는 모든 것들이 아버지의 수고와 눈물 덕분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너무 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겨우 열살 남짓한 사랑하는 아들들이 저를 응원한다는 것이 울컥합니다.
삶이라는 것은, 아주 복잡하기도 하지만 아주 단순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족을 허락하셨고 그 안에서 천국의 기쁨을 누립니다. 저처럼 철 없고 부족한 아빠에게 이렇게 소중한 아들이 둘이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아직도 안아주고 뽀뽀해주지만 그래도 늘 부족한 마음입니다.
제가 해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어서 항상 미안한 마음입니다. 그래도 아이들을 위한 기도를 빠뜨리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아이들을 하나님께서 건강하고 아름답게 키워주시기를, 그리고 어두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아름답게 이루는 주님의 자녀들로 자라나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저의 유일한 소원입니다.
이 찬양은, 성도가 하나님 안에서 사랑, 기쁨,
위로, 그리고 축복을 받는 존재임을 깊이 깨닫게 하는 곡이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것이 바로 교회 공동체이며, 그
안에서 성도 개개인을 향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가고 있음을 일깨워주는 아름다운 곡이다.
3. 말씀으로 바라보기
렙 31:3 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
영원한 사랑 :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은혜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심지어 이스라엘의 대다수가 그 사랑을 거절하더라도 이 언약적, 관계적 사랑은 중단시킬 수 없습니다.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1428.
습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기뻐하시고, 그들에 대한 사랑 안에서 안식하시며, 그들에 대해 기뻐 노래하시는
것은 불가해하지만 귀중한 진리이며,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의 반응으로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Joel R. Beeke, Michael P. V. Barrett, and
Gerald M. Bilkes, eds., The Reformation
Heritage KJV Study Bible (Grand Rapids, MI: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14), 1313.
고후 1: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1: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종종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려운 상황을 겪게 하셔서 다른
사람들에게 체험적으로 사역하고 그들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다른 성도들에게 위로를 베풀 때, 당신은 하나님의 위로를 전달하는 통로 역할을 하는
것이며, 당신의 삶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실체의 더 깊은 차원을 경험하도록 자신을 여는 것입니다.
엡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이 구절은 종종 ‘송영(doxology)’이라
불리며,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열거하며 그분께 경배와 찬양, 영광을
돌리는 표현입니다. 이 장엄한 부분에서 바울은 교회가 성부, 성자, 성령을
통해 누리는 복에 대해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를 축복하셨습니다. 이 복에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은 신분, 양자됨, 구속, 선택 등이 포함됩니다. 또한
모든 영적 은사와 섬김의 능력도 구원받는 순간 하나님께서 모든 신자에게 주시는 이 영적 복에서 흘러나옵니다.
David S. Dockery, “Ephesians,” in CSB Study Bible: Notes, ed. Edwin A. Blum and Trevin Wax
(Nashville, TN: Holman Bible Publishers, 2017), 1870.
4. 찬양에 대한
묵상
이 찬양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태도를 가지고 계시고 어떤 은혜를 부어주시는가를 깊이 깨닫게 하는 곡이다. 굉장히 단순한 가사이지만, 성경적으로 깊은 은혜를 담고 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분의 자녀를
사랑하시고 그분의 사랑 속에서 성도를 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를 너무나 기뻐하시며 아버지가
자녀를 대하는 것처럼 기쁨으로 우리를 대하신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하신다. 우리의
고난과 어려움을 모른 척 하시지 않으시고 깊이 위로하시며, 또한 그 위로가 우리를 통하여 다른 이들에게
흘러가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신다. 교회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하늘의 복을 누린다. 우리는 주님의 선택 속에서 구속을 받아 주님의 자녀가 되었다. 또한 우리가 교회를 섬기는 모든 능력과 세상을 살아갈 힘을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끊임없이 얻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찬양은 우리에게 큰 힘이 된다. 때로는
세상의 기준과 판단 속에서 살아가면서 스스로 낙심할 수 밖에 없는 상황 속에 있다 하더라도, 다시 한번
이 찬양을 부를 때에 우리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하나님 안에서 깊은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된다. 그러므로 이 찬양을 부를 때마다, 우리의 마음이 회복되고 주님 안에서
새로운 용기를 얻고 믿음의 길을 걸어가시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기대한다.
아버지 당신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 있기를
원해요 아버지 당신의 눈물이
고인 곳에 나의 눈물이 고이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바라보는
영혼에게 나의 두 눈이 향하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울고
있는 어두운 땅에 나의 두 발이 향하길
원해요
나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뜻 아버지의
뜻이 될 수 있기를 나의 온몸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삶 당신의
삶 되기를
2. 곡 소개
이 곡은,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잘 드러내는 찬양이다. 그분의 마음은 잃어버린
영혼들과 그들이 거하는 어두운 땅에 있음을 보여주면서, 이 곡을 부르는 나 역시 그 아버지의 마음을
따라서 살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을 담아낸 너무나 아름다운 찬양이다.
3. 말씀으로 바라보기
시편 68:5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68:5 A father to the fatherless, a defender of widows, is God in
his holy dwelling.
고아의 아버지라는 것은, 가장
취약한 자를 보호하는 분으로 하나님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에는 종종 억압 받거나 학대 받는 고아와 과부를 보호하기 위한 특별한 조항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도우심은 그분의 자비와 정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John D. Barry et al., Faithlife Study
Bible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12, 2016), Ps 68:5.
에스겔 33:11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마태복음 9: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9: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개역개정) 36 When he saw the crowds, he had compassion on them, because
they were harassed and helpless, like sheep without a shepherd. (NIV)
목자 없는 양 같이 라는 말씀은 에스겔 34장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가 영적
지도자들의 실패를 반영한다고 암시합니다. 학대 받고 소외된 자들을 측은히 여기심으로써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의 목자이시며 다윗의 주이시며 종임을 밝히셨습니다.
Holman Bible Staff, KJV Study Bible
(WORDsearch, 2012), Mt 9:36.
야고보서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4. 찬양에 대한
묵상
이 찬양을 부를 때에 우리는 스스로 질문하게 된다, 나는 정말로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살아가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나의 관심을 위해서 살아간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들을 붙들고 그것을 위해서
시간과 노력을 사용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찬양을 부를 때에 우리의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인데, 하나님의 마음과는 너무나 멀어져 있는 우리의 안타까운 현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이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다. 다시 말해서, 그분은 특별히 사회적으로
소외 받는 자들 가장 연약한 자들을 마음에 품고 계시며 그들을 참으로 소중히 여기시며 도우신다. 또한
아버지 하나님은, 악인들을 마음에 품고 계신다. 그분은 죄인들이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며 그들이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이 찬양의 고백처럼, 아버지의 마음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을 떠나 방황하고 있는 죄인들이 있는 곳으로 우리가 가야 하며, 또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너무나 연약하여서 스스로 삶을 유지할 수 없는 그들을 찾아가 섬기며 돌보아야 하는
것이다.
새로운 2025년도 한해가 바로 그러한
한해가 되기를 원한다. 온통 자신의 욕심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고 살아가는 이 세상의 풍조 속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분의 뜻을 생각하며, 바로 그 부르심을
향하여 적극적으로 섬김의 삶을 살아가시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기대한다.
이 곡은, 2022년에 발매된 예람워십 팀의 Arise Again 앨범에 수록된 곡이다. 이 곡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님의 자녀를 붙드시고 돌보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분의 큰 능력을 고백하는 아름다운 곡이다.
3. 말씀으로 바라보기
이사야 41:10 두려워 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41:10 So do not fear, for I am with you; do not be dismayed, for I am your God. I will strengthen you and help you; I will uphold you with my righteous right hand.
시편 61:2 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61:2 From the ends of the earth I call to you, I call as my heart grows faint; lead me to the rock that is higher than I.
이 말씀에서 다윗은 도움이 필요할 때이지만 하나님의 임재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묘사합니다. 그의 기도는 자신보다 더 높은 반석으로 자신을 돌아오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신자를 위한 반석으로서의 하나님의 이미지는 모세에 의해 소개되었으며, 시편의 다른 곳에서도 전개 됩니다.
시편 18:1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18:2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18:1 I love you, LORD, my strength. 18:2 The LORD is my rock, my fortress and my deliverer; my God is my rock, in whom I take refuge, my shield and the horn of my salvation, my stronghold.
시편 91:1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91:4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91:1 Whoever dwells in the shelter of the Most High will rest in the shadow of the Almighty. 91:4 He will cover you with his feathers, and under his wings you will find refuge; his faithfulness will be your shield and rampart.
4. 찬양에 대한 묵상
이 찬양은, 오직 하나님만이 성도의 피난처가 된다 라는 깊은 고백을 담고 있다. 우리의 현실은 깊은 한숨이라고 표현할 만큼 고난과 어려움을 가득 차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만이 주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보호하시고 일으키신다는 것이다.
고난 가운데 처하게 되면 우리는 당장 주변을 돌아보게 된다. 혹시라도 나를 도울 사람이 없는가를 본능적으로 찾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나 그 어떤 것도 의지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더욱 절망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에 우리가 의지할 대상이 아니며, 그것은 다 무너질 수 밖에 없는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고난의 순간에 오직 아버지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을 붙들어야 한다. 그분에게 우리의 소망을 둘 때에 우리는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새로운 힘을 얻게 될 것이며 나의 삶의 모든 고난 조차도 그분의 뜻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며 더 나아가 감사하게 될 것이다. 이 찬양을 통해서 그러한 주님을 향한 절대 의존의 마음을 회복하는 은혜가 있기를 기대한다.
주님 계신 곳에
나가리 찬양 드리며 그 성소에 들어가
주의 얼굴 뵈오리 그 얼굴을 뵈올
때 주님의 은혜 넘치네 엎드려 고백하네
주께
주의 위엄 이곳에
가득해 전능하신 하나님 아바 아버지 찬양 받기 합당한
전능하신 주님 주의 위엄 이곳에 가득해
As I come into
Your presence, past the gates of praise Into Your
sanctuary, 'till we're standing face to face I look upon
Your countenance, I see the fullness of Your grace And I can only
bow down and say
You are awesome
in this place, Mighty God You are awesome
in this place, Abba Father You are worthy
of all praise, to You our lives we raise You are awesome
in this place, Mighty God
2. 곡 소개
이 곡의 원래 제목은, Dave Billington의
Awesome in this place이다. 이 곡은, 주님의 임재 가운데 깊이 들어가는 하나님의 자녀의 감격과 기쁨을 고백한 곡이다. 가장 위대하신 전능하신 하나님, 또한 동시에 가장 가까이 계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신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예배를 감동적인 찬양으로 승화시킨 아름다운 곡이다.
3. 말씀으로 바라보기
역대하 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7:14 if my
people, who are called by my name, will humble themselves and pray and seek my
face and turn from their wicked ways, then will I hear from heaven and will
forgive their sin and will heal their land.
여기서 여호와의 얼굴을 구하는 기도는, “음식을 주셔서 감사하다” 라거나 혹은 “이제 자겠습니다” 라는 기도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기도는, 죄가 그의 얼굴을 우리에게 멀어지게
하고 우리를 그에게서 멀어지게 한다는 인식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기쁜 소식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분의 얼굴을 구하라고 초대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해 활짝 열려 계십니다.
시편 105:4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 105:4 Look to the LORD and his strength; seek his face always.
“구할지어다”는 히브리어 동사의 미완료 형태입니다. 그래서 습관적인 활동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을 추구한다는 것은, 믿음, 겸손, 죄에 대한
회개, 그리고 악에서 구원하여 주시기를 그리고 주님의 사랑스러운 임재에 대한 갈망과 주님의 선하신 섭리에
대한 간구로 주님께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추구하는 것은 또한 마음으로부터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Joel R. Beeke, Michael P. V. Barrett, and
Gerald M. Bilkes, eds., The Reformation
Heritage KJV Study Bible (Grand Rapids, MI: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14), 846–847.
시편 27: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27:4 One thing I ask of the
LORD, this is what I seek: that I may dwell in the house of the LORD all the
days of my life, to gaze upon the beauty of the LORD and to seek him in his
temple.
여호와의 집에 거한다는 것은, 예배를 위해서 지속적으로 성소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한 사람이 살아가는 것을 일반적으로 언급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두 가지 경우
모두, 요점은 평생 동안 주님과 끊임없는 교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Kevin R. Warstler, “Psalms,” in CSB
Study Bible: Notes, ed. Edwin A. Blum and Trevin Wax (Nashville, TN: Holman
Bible Publishers, 2017), 840.
시편 96:4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지극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들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96:4 For great is the LORD and most worthy of praise; he is to
be feared above all gods. 96:5 만국의 모든 신들은 우상들이지만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96:5 For all
the gods of the nations are idols, but the LORD made the heavens.
4절의 말씀으로 시인은 모든 신들과 나라들보다 주님을 높입니다. 그분은 그
누구보다도 그리고 그 어떤 것보다도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시는
분이시며, 그분이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행하신 일에 대한 역사는 그분을 찬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3:26 You are all sons of God through faith in Christ Jesus,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3:27 for all of you who were
baptized into Christ have clothed yourselves with Christ.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 우리가 하나님의 참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했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양자 된 아들들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를 가려 준다는
것이며,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경험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 하나님의 임재는 매우 추상적인 것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는 분명한 실체가 있고, 우리의 이성과 감성을
포함한 온 존재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경험하는가?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이 죄를 돌이키고 하나님의 얼굴을 찾으라고 초대하신다.
단순한 기도가 아니라 주님을 향한 믿음과 겸손, 회개, 그리고
임재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갈 때에 우리는 주님의 임재를 깊이 경험한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은,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마치 다윗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기를 사모했던 것처럼 주님 앞에 예배 드릴
때 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에 그것을 갈망하고 추구하는 것이다. 주님은 전능하시며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그분의 능력에 경탄할 수
밖에 없으며 마땅히 찬양을 올려드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 되신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한 없이 누리며, 주님의 임재 가운데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바라기는 이 찬양을 부를 때마다, 원곡에
등장하는 핵심 단어인 하나님 안에서 “Awesome”을 누리기를 원한다. 주님을 갈망하시고 추구함으로,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감히 비교될
수 없는 감격과 감사와 기쁨과 충만함을 누리시고 또한 만끽하시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소망한다.
저는 원래 감동을 잘 받는 스타일입니다. :) 저의 이러한 성향이 성경적인 것인지는 깊게 고민해 보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작은 것 안에서라도 큰 행복을 느끼고, 그 안에서 감사를 누릴 때가 종종 있습니다.
팀켈러 목사님 설교를 들으면서 감동 받고 혼자서 눈물을 종종 흘리고 있습니다. 혼자 차를 타고 오고가는 길이 지루하지가 않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렇게 짧은 시간에 이렇게 아름다운 내용을 이렇게 충실하게 설교할 수 있는 것일까요? 심장이 두근거리고 마음이 떨립니다. 아, 은혜 받음의 기쁨,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입니다.
감동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아마 평생 이 부분을 놓고 고민할 것입니다.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자신이 감동을 받아보는 경험은 너무나 중요한 듯 합니다. 왜냐하면, 설교자 자신이 감동을 받지 못했는데, 다른 누군가에게 내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으라고 강요한다는 것은 명백한 논리적인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설교는 평소보다 짧았습니다. 새벽이라 길게하지는 않지만 조금 짧았습니다. 그래도 내용이 너무 마음에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정말 고심해서 준비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한주 내내 머리 속에 본문을 넣고 씨름했습니다.
팀켈러 목사님의 스타일은, 주해적이지만 동시에 철학적입니다. 그리고 본문을 붙들고 있지만 그 본문의 지평을 넓혀주는 그런 느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에서는 아주 엄격하게 말하자면, 신하들이 놀란 다윗의 태도가 더 핵심에 가야하는 것이 맞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번 설교에서, 죄에 대하여 싸우는 것 그리고 인간 아버지의 역설과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에 대해서 준비했고 마음에 흡족했습니다.
이번 본문을 묵상하면서 다양한 스터디 바이블을 참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Faithlife Study Bible 에 대한 짧은 리뷰도 작성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이 이 설교를 준비하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왜 신하들이 다윗에게 아들의 죽음을 말하기를 두려워했는가에 대한 설명들도 보았지만, 특별히 강하게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 설교는 주해를 가지고 와서 설명하는 자리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문맥상 살짝 언급하고 지나갔을 분입니다. 다른자료도신하들의염려를 언급하지만, 기본적으로넷바이블의각주를참조하였습니다.
tnHeb “he will do harm.” The object is not stated in the Hebrew text. The statement may be intentionally vague, meaning that he might harm himself or them!
Biblical Studies Press, The NET Bible, Second Edition. (Denmark: Thomas Nelson, 2019).
그리고 역시나Reformation Heritage KJV Study Bible는실망시키지않았습니다. 설교의앞부분에있어서중요한논리를이끌어가는데큰도움이되었습니다. 말도안되는방종과은혜의남용으로흐를수있는잘못된태도를막아주는역할입니다.
The death of the child indicates that consequences for sin are necessary parts of God’s discipline (Ps. 94:12; Prov. 3:11–12; Heb. 12:5–11; Rev. 3:19). Even sorrow over sin and the resolution to turn from it do not exempt us from all its consequences. Sometimes erring children assume that simply telling their parents they are sorry for a bad behavior will excuse them from any disciplinary action. But learning that sin has consequences and then experiencing those consequences is itself a sanctifying process (Prov. 20:30). The best way to avoid sin’s consequences is to avoid sin. Why is it a mercy that God disciplines His people?
Joel R. Beeke, Michael P. V. Barrett, and Gerald M. Bilkes, eds., The Reformation Heritage KJV Study Bible (Grand Rapids, MI: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14), 447–448.
설교의 후반부는, 최근에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개인적으로 공부했던 부분을 적용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에 대한 설명과 강조가 얼마나 마음에 들었던지, 도대체 잊혀지지가 않았습니다. 마침 오늘 설교 주제와 완전히 맞아 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호칭이 있지만 예수님께서 그분을 아버지라 부르라고 하셨다라는 것은 거의 직접적으로 인용하였습니다. 아래의 글이 이 설교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설교의 전반적인 흐름과 느낌도 팀켈러 목사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가장 작은 것 부터는, 설교 할 때에 상당히 빠르게 발음을 하지만 중요한 문장 혹은 문단 이후에는 충분히 쉬는 것도 그분의 영향입니다. 평소에 저 같으면 중요한 문장 후에 혹은 문단 사이에 약 1초 정도만 쉬었겠지만 이번에는 거의 3초 가까이 pause를 가졌습니다. 성도님들이 그 의미를 음미할 여유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문장 안에서 수식어를 연달아서 설명하면서 감정의 고조를 더하는 것도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 스타일입니다. 저는 수식어를 그렇게 많이 사용해서 연결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거의 처음으로, 완전한 아버지, 거룩하신 아버지, 사랑의 아버지 등등으로 수식어를 연결하고 빠르게 진행함으로써 강조의 느낌을 더 해 보았습니다. 처음이었지만 좋았습니다.
인용 구절도 최소화 시켰습니다. 저는 항상 성도의 인지적인 능력을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짧은 40분 정도의 설교 안에서 인용 구절을 이해할 수 있는 인지적인 한계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아주 흥미로웠던 것은, 성경 구절의 직접 인용을 최소화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설교 중에 설교 본문을 다시 언급하면서 읽어야 할 때에는, 빠르게 약간 대충 읽는 느낌도 납니다. 그래서 저도 인용 구절을 최소화하면서 설교를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설교의 큰 구조와 흐름에서도, 팀켈러 목사님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불완전한 아버지에서 완전한 아버지로 논리적인 흐름을 전개하는 것"도 팀켈러 목사님의 스타일을 차용한 것입니다. 구조에 대한 접근에서는 어떤 의미에서 약간 뜬금 없는 듯한 느낌도 있지만,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정말 괜찮은 논리적인 전개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파악한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의 특징은, 본문 전체를 한 구절 한 구절 다 붙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필요한 것들을 압축적으로 타이트하게 전개한 이후에, 하나님의 은혜와 연결시키는 것이 이분의 특징인데 그것이 너무나 저의 마음에 매력적으로 들렸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저 역시 예전에 종종 시도했었는데, 오늘은 조금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제 스스로 평가할 때에, 과거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내용을 언급하면서 약간 김이 빠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보니, 오히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논리를 전개할 때에 오히려 더 폭발적인 어떤 감동을 주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어쩌면 설교자 자신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확신이 큰 영향을 끼치는 듯 합니다.
한편의 설교를 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가장 피곤한 새벽 시간에 두눈이 초롱초롱하게 저를 쳐다보시는 성도님들의 모습이 너무 좋았고 저도 행복했습니다. 앞으로도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할 뿐입니다.
* 사무엘하 12장 15-23절 설교
성도님들께서는 다윗의 무너져 가는 모습을 보면서 어떤 감정을 느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 근처의 본문들을 읽을 때 마다 참 마음이 비통하고 너무나 슬프다 라는 생각을 자주하게 됩니다.
영적으로 탁월한 그리고 하나님이 가장 아끼시는 그 한 사람이 이렇게 무너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한계와 그 연약함을 성경은 너무나 가감없이 드러내기 때문에 읽으면서 함께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범죄는 겉으로 보기에는 간음이라는 그리고 살인 교사라는 끔찍한 형태로 나타났지만, 그것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다윗의 마음 중심에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12장 9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10절에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다윗의 문제의 핵심이었던 것입니다. 모든 죄악의 가장 그 근본에 있는 것은 감히 인간이 여호와를 업신여기는 그 끔찍한 태도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인류 역사의 초기에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 범죄할 때에도 마찬가지였고, 지금 다윗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분을 높이는 마음이, 여호와를 업신여기는 그 마음으로 변질되고 타락하여서, 믿음의 영웅은 가정 파괴범 그리고 살인자로 추락한 것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다윗은 바로 사형을 당해야 마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회개할 때에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의 진실한 회개와 하나님의 용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가 반드시 치뤄야할 댓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오늘 말씀 가운데 등장하는데, 나단은 다윗에게 말할 때에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 라고 말하며 왕궁을 떠난 것입니다. 그리고 나단이 떠나자 마자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여호와께서 그 아이를 치셨다 그래서 심히 앓게 되었다”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분명한 뜻이 다윗의 아이에게 임했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아마 다윗 성은 그 분위기가 최악이었을 것입니다. 누구 하나 감히 입을 열어서 함부러 이야기할 수 없는 너무나 무거운 분위기였을 것이 틀림 없는 것입니다.
자 만약에 내가 지금 다윗의 입장에 선다고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하나님의 분명한 진노를 받아서 아이가 죽어가고 있는데 그 아비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 중에 어떤 분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넋을 놓아 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어떻게 보면 정말 이상한 모습이 아닌가? 하나님의 분명한 진노를 입어서 아기가 죽어가고 있는데 그 아기를 살려 달라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깝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너무나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아들을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충분히 분노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간절하고 또 간절하게 기도를 했는지 그가 무려 칠일 동안 금식하면서 맨 땅에 누워서 지냈습니다. 그는 왕의 자리에 올라가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정도의 다윗의 모습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 아이를 살려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이 정도 정성을 드렸다면 그래도 들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는가?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결국 죽은 것입니다.
다윗이 저지른 죄의 그 댓가는 너무나 큰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는 자신의 죄의 댓가의 전부를 치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죄가 가지고 있는 영향력을 온 몸으로 경험하면서 고통을 받아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자기 합리화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여호와께서는 무조건 용서하신다” 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 말은 백퍼센트 맞는 것입니다. 다윗은 극적으로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죄의 댓가를 경험한 것입니다. 물론 그 댓가는 그의 죄의 무게의 비하면 비교할 없을 만큼 작은 것이었지만, 그는 그 댓가를 어느 정도는 치러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쉽게 죄를 짓고 나서, 하나님께서 다 용서하실 것이라고 쉽게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의 삶을 망치고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망치며 우리의 삶을 망가지게 하는 무서운 것임을 성경은 분명히 경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2장 4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2: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부각되는 두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피 흘리기까지” 그리고 “대항하다” 라는 두 단어입니다. 죄와 싸우는 것은 영적인 것이지만 피가 튀는 것입니다. 내가 거룩하게 살기 위해서 나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서 피를 흘릴만큼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항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것을 향해서 힘을 다해서 맞서 싸우는 것입니다. 그것은 수동적인 태도가 아니라 매우 적극적인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죄를 대하는 성도의 태도는, 마치 전쟁에 나간 전사처럼 피를 흘리며 대항하는 최선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는 그런 모습을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도전이 되기를 원합니다. 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그런 태도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죄의 무서움과 그 영향의 비참함을 깨닫고 적극적으로 죄와 싸워 나가시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다윗의 그 간절한 기도도 하나님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아이가 죽은 것을 신하들이 먼저 알았습니다. 그리고 차마 그 이야기를 다윗에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나 다윗이 그 아이를 사랑하고 아끼고 그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간절히 기도한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충격을 받고 낙심한 다윗이 무슨 행동을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신하들이 수근거리는 것을 보고 다윗이 깨달았습니다. “아이가 죽었구나…”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우리가 다윗의 입장이라면 어떠했겠습니까? 너무나 낙심하고 분노하고 슬퍼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간절하게 생명을 걸고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간절할 수록 그 낙심이라는 것은 너무나 큰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다윗이 자신의 간절한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에, 그가 그 이후에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성경이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0절에 보니, 다윗이 자신이 지내던 땅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씻고 기름을 발랐습니다. 그리고 왕의 새로운 옷을 입은 다음에 어디로 갔는가? 여호와의 전으로 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였습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구약 성경 전체에서 직접적으로 다윗이 경배한다는 표현이 딱 두번 등장하는데, 그중에 한번이 바로 이 구절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삶의 가장 어려운 순간에 심지어 자신의 마음에 가장 낙심하고 하나님께 대하여 실망한 그 순간에, 그의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확인한 그 순간에, 여호와를 찾고 그분께 경배하였습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사실 기도라는 것의 평범한 정의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의 뜻과 소원을 이루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와 전혀 상관 없는 사람들도 기도라는 단어를 거리낌 없이 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신이라는 자신보다 뛰어난 존재를 통하여서 혹은 우주의 어떤 힘을 이용해서, 자신의 소원을 이루는 것을 기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기도는 전혀 다른 기도였다는 것입니다. 그가 간절히 자신의 소원을 아뢴 것은 사실이지만,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너무나 바랬지만, 그의 기도는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참된 기도가 혹은 참된 성도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아들이 죽기를 바라는 아버지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그 소원조차도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맡기면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다윗의 삶의 궁극적인 소원이었다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고 또 묵상하면서, 한 아버지의 깊은 후회와 슬픔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의 어느 장면에서 다윗이 칠일을 금식한 적이 있습니까? 다윗은 틀림 없이 그 금식과 통곡의 기도의 시간 속에서, 자신의 죄의 결과와 그리고 아들에 대한 미안함으로 그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을 것이 틀림 없는 것입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그는 가장 위대한 신앙의 사람이었고 그는 한 나라의 권력의 정점에 있는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아들 한 명을 위하여 제대로 살아갈 수 없었던 사람입니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그 아들이 자신의 죄로 인해서 죽어야 한다는, 정말 어떤 의미에서 너무나 비참한 운명에 다윗이 던져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본문은 인간 아버지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이것은 단순히 다윗만이 그러했던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 모든 아버지가 해결하지 못한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오늘 말씀이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완벽한 인간이었던 아담조차 그가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그의 말씀을 업신 여겼을 때에, 자신의 아들이 또 다른 아들을 살해하는 것 조차 막지 못하는 가장 무력한 아버지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아담으로 인하여 모든 그의 후손들은 본질상 죄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업신여기는 자로 태어났습니다. 그것이 마치 삶의 당연한 방향인 것 처럼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죽음 속에서 지옥을 향해서 걸어가는 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볼 수 있는가?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가장 완벽한 아버지를 꿈꾸고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연약하고 죄로 인해서 무너지는 그 아버지가 아니라, 가장 완전하며 가장 완벽하며 가장 거룩하시며 가장 온전하신 하늘 아버지를 바라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시편 103편 13절과 14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03:13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103:14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정말 놀라운 표현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먼지임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냉정하게 말한다면 우리 인간의 죄성으로 인해서 우리를 거들떠 보지도 않을 것 같은 그런 여호와께서,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인간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를 이해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구약 안에 이미 복음이 나타나 있으며, 인간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시는 그 여호와 하나님 진정한 아버지 되신 그분의 은혜가 풍성하게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9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셨습니다.
정말 놀라운 표현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왜 이 땅에 오셨는가? 그분의 고난 그분의 죽으심 그분의 부활 그 모든 것들은 구약에서부터 꿈꿔 오던 진정한 아버지 되심, 여호와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바로 그 놀라운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믿는 자들, 자신을 의지하는 자들, 자신을 붙드는 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을 부를 때에 우리 아버지여 라고 부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을 부르는 많은 호칭들이 있지만, 가장 앞서는 가장 본질적인 것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아버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5절에 말씀하십니다.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갈라디아서 4장 6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이 강조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관계 그 은혜의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 지금 이 시간에 우리를 안아주시고 돌봐주시고 그분의 나라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지금까지 일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말씀이 여기 모인 우리 모두에게 큰 위로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돌보시며 지금도 우리의 삶을 붙들고 계시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변치 않는 사랑으로 인도하심을 믿고 신뢰하며 담대하게 걸어가시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