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거짓말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거짓말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24년 4월 2일 화요일

난 더이상, 절대로 속지 않겠다

 

한국의 마트에 11년 만에 들어가보니, 새롭게 깨닫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물건이 너무 화려하고 풍성하다는 것입니다. 컵라면을 사러 라면 섹션을 돌아보았습니다. 아니 세상에, 이렇게 라면 종류가 많았었나? 물론 제가 사는 곳도 대형 한국 마트가 있습니다. 그러나 차원이 다릅니다. 같은 라면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절대로 한국 본토 마트에 비할 바가 못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본토에 들어와보니 이제서야 그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그동안 속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금은 억울했습니다. 왜냐하며 저의 내면에서, 한국 라면의 풍성함이 너무나 흐려졌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럴듯하게 갖춰진 미국 한인 마트의 라면 섹션에서, 마치 그것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좋아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참으로 어리석었다는 것을, 내 나라에 들어와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복음에까지 저의 생각이 미쳤습니다. 모든 사람이 복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 깊은 풍성함을 직접 경험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굳이 라면에 비교하자면 그렇습니다. 어떤 이에게 복음은, 먼 타지에서 아주 작은 아시안 마켓 한 섹션 구석진 곳에 먼지 쌓인 컵라면 하나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에게 복음은, 나의 고국에 가장 화려하게 놓여진 그 종류를 헤아릴 수 없는 대단한 라면 섹션 하나와 같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저 자기 기준에서 복음을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복음, 그 깊은 복음의 놀라움이 아니라, 아주 얕은 수준에서 그것이 마치 복음의 전부인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런 말들에 사람들이 휩쓸린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독점적인 아름다움과 그분의 절대적인 가치가 너무나 흐려졌습니다. 

그래서 설교자인 제 자신에게 항상 경고하는 것이 있습니다. ‘절대로 복음이 별것 아닌것처럼 이야기하지 말아야 한다’ 저의 모든 태도와 표정과 뉘앙스에서 예수님이 가장 높아지셔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설교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청중의 입장에서 그렇지 못한 경우를 보게 될 때에,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마트를 몇바퀴 도는데 세상의 행복은 다 가진 것 같았습니다. 제일 좋아하는 왕뚜껑 라면 하나를 들고 나오는데 가슴이 벅찹니다. 진짜를 만난 듯한 기분입니다. 저에게 있어서 예수님이 그러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평생동안 그 풍성함이 넘치고 또 넘치는 것이 되기 원합니다. 그 끝을 알 수 없어 볼 때 마다 깊어지고 감격하고 또 벅차는 은혜가, 저에게 그리고 저와 함께하시는 분들에게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2023년 9월 4일 월요일

목회하기 가장 어려운 사람은 누구일까? 양심에 화인 맞은 자?



저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아내입니다. 그래서 대화하는 것이 즐겁습니다. 저 이상으로 교육과 미래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아내는 저에게 꼭 필요한 것들을 알려줍니다.

얼마 전에 아내가 알려준 영상이 참 좋았습니다. 한양대 대학원에서 교수로 일하시는 박상미 교수님의 영상입니다. 저는 누군가를 처음 알게 되면 그분이 어떤 공부를 하셨는지 꼭 살펴봅니다. 박상미 교수님의 공부하신 이력이 좋았습니다. 저에게 삶의 큰 의미를 준 빅터 프랭클의 로고테라피를 공부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이 분야를 공부하고 실제로 활발하게 활동하시는 분은 처음 보았습니다. 

이분은 오랫동안 교도소 재소자들을 위해서 심리 치료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분의 경험에서 나온 통찰이 저의 관심을 사로 잡았습니다. 절대로 교화가 되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다름 아니가 "사기꾼"이라는 겁니다. 

이들은 거짓이 몸에 밴 사람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들의 특징은 "여전히 자기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사기를 치면서도 자신을 깨닫지 못하고 착각에 빠져 살며, 그런 사람들끼리 서로 속이면서 어울리기를 즐긴다는 것입니다. 

영상을 보고 두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째로, 목회에서 동일한 것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적인 경험의 결과입니다. 자신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자신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놀랍게도 어떤 성도님들은 자신이 문제가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 정도면 잘하고 있고 충분히 선하고 충분히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자인 저의 관점에서는 여전히 너무나 어리고 부족한데, 자신은 충분히 성숙했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이런 분들에게는 어떤 목회적인 조언을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굉장히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 항상 생각하게 됩니다. 교회 생활을 오래하였고 그래서 신앙의 여러 언어들을 구사하지만 그러나 여전히 자신의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다른 사람을 쉽게 비난합니다. 자신은 의롭고 다른 이들은 악하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기에 힘을 씁니다. 남들을 비난하는 바로 그 모습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거의 깨닫지 못합니다.

또 한 부류의 사람은, 자신이 무엇인가 잘못된 상태라고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여전히 성격과 도덕적인 수준에서 문제가 있으며 그것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인식은 신앙 생활의 기간과는 큰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 신앙 생활을 오래한 분들 중에도 혹은 신앙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는 분들 중에도 존재합니다.

이들은 자신의 내면 안에 깊이 존재하는 죄성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기 보다는 자신을 돌아보고 바꾸는데 마음을 쓰는 사람입니다. 자연스럽게 그들의 마음은 겸손해져 있기 때문에 인격적으로 가까이 대할 때에 따뜻함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목회적으로는 바로 이런 사람에게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기 때문에 말씀이 들어갈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목회자의 조언이 그 가치를 발현합니다. 변화의 소망이 존재합니다. 사실상 이런 분들은 영적으로 탁월하게 성장하며 무한히 뻗어나가게 됩니다. 박상미 교수님의 주장을 신학적으로 바꾸자면, 성령님께서 활발히 역사하심으로 양심이 살아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더욱 힘있게 일하십니다.

이 짧은 영상을 보는데, 양심에 화인 맞은 자에 대한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물론 자신의 잘못된 상태를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을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이라고 일대일로 동일 선상에 놓을 수는 없습니다. 양심에 화인 맞았다라는 것은, 가장 최악의 상태로 들어간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것을 잊어버리고 착각 속에 빠져 살아가는 것은, 아주 위험한 상태 속으로 실제로 진입하고 있는 것임은 분명합니다. 디모데전서 4장 2절의 말씀입니다. 

디모데전서  4:2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2 Such teachings come through hypocritical liars, whose consciences have been seared as with a hot iron. (NIV)

4:2 The consciences of the false teachers have been seared (that is, desensitized and rendered ineffective) by their rebellion against the gospel. 거짓 교사들의 양심은 복음에 대한 그들의 반역으로 인해서 화인을 맞았습니다. 그것은 양심이 무감각해지고 무력해진 것입니다.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31.

4:2 The consciences of those peddling demonic doctrines have either been “branded” by Satan to show his ownership of them or “cauterized,” leaving them unfeeling and unable to distinguish between right and wrong. 악마적인 교리를 선전하는 사람들의 양심은 사탄이 그들에 대한 자신의 소유권을 보여주기 위해 낙인을 찍혔거나 혹은 화인을 맞아서 옳고 그름에 무감각해지고 그것을 구분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Edward A. Engelbrecht, The Lutheran Study Bible (St. Louis, MO: Concordia Publishing House, 2009), 2074.

이 말씀이 무서운 이유는, "인간의 그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이 바로 그 사람이 어떠한 상태인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겉으로 어떤 말을 하는 것은 사실 결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지적인 능력이 부족하여 자신의 신앙을 언어적으로 잘 표현하지 못하는 분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 사람의 내면의 문제가 바로 진짜 문제이며, 그것은 그 사람의 양심이 제대로 작동하는가 아닌가를 통해서 그 사람의 영적인 상태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저는 다른 분들을 비난하고 평가하기 보다는, 제 자신을 돌이켜봅니다. 죄는 나 자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제 자신에게 다시 한번 다짐하는 것은, 위선적인 거짓말과 위선적인 행동을 어떻게 해서 든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에게 익숙한 상황이 된다면 결국 나는 양심에 화인 맞은 자가 될 것입니다. 도저히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나의 죄성이 나를 완전히 뒤덮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목회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말씀으로 양심을 깨우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제 자신과 성도님들에게 끊임없이 경각심을 가지게 해야 합니다. 복음으로 그 사람의 양심을 깨워야 합니다. 지금 당신에게 무엇인가 잘못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고백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야 말로 목회의 중요한 본질임을 다시 한번 강하게 붙들게 되었습니다.

2021년 11월 13일 토요일

말씀 묵상 어디까지 해봤니? - 창세기 3장 / 하나님을 배신한 인간 그리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빛나는 은혜와 사랑

 

세상의 모든 것이 완벽했습니다. 그러나 뱀의 등장으로 이 아름다움은 깨어집니다. 창세기 3장은 정말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묵상의 내용들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말로 형용할 수 없을만큼 완벽했던 하나님의 창조를 무너뜨리는 악한 존재의 간교함과, 인간의 처참한 배신 그리고 하나님의 충격적인 은혜를 보여줍니다. 

교육학적으로 볼 때에, 성경에 등장하는 첫 질문을 뱀이 사용한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뱀은 결코 억지로 인간에게 선악과를 먹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뱀은 질문을 사용하여서 인간의 마음을 떠 봅니다. 악한 질문에 여자가 걸려듭니다. 

뱀은 여자에게 거짓말을 합니다. 사탄은 거짓의 아비입니다. 거짓은 단순한 잘못의 차원이 아니라, 인류의 첫 시작부터 인간을 망쳤던 가장 흉악한 죄입니다. 

뱀의 목적은, 하나님을 의심하고 그분의 권위에 도전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모든 사랑을 쏟아 부으심이 너무나 분명하지만, 어리석게도 인간은 하나님을 의심합니다. 단순히 금하신 것을 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버리고 배신하고 그분처럼 되고자 하는 창조물로서의 본분을 잊어버린 것이 바로 타락의 본질입니다. 

Grace and Truth 스터디 바이블은, 아주 훌륭하게 3장의 내용을 설명해냅니다. 특별히 인간의 타락과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3장의 내용을, 신약과 충실하게 연결합니다. 여자가 열매를 보았을 때에 그녀의 눈에 비친 나무에 대한 묘사를, 요한일서 2장의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상의 자랑"과 연결합니다.

여인이 열매를 볼 때에, 자신을 지혜롭게 해 줄 것 같았다고 여긴 것은 너무나 충격적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망가진 이성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창조주께 순종하지 않고 어떻게 지혜로워질 수 있을까요? 그러나 인간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가능하다고 여깁니다. 여전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야 말로 지혜 그 자체입니다. 

선악과의 의미에 대한 논의는 더 공부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넷바이블의 창세기 2장 9절의 각주는 큰 도움이 됩니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그러나 망가진 그들의 이성은, 그 능력을 지극히 제한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선악을 구별할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선을 행할 의지도 없고, 그것을 완벽하게 이룰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대단한 존재인양 하나님 앞에서 소리치고, 불완전한 옳고 그름을 따지고 들어오는 교만한 인간들의 모습이 이 장 안에서 겹쳐 보입니다. 

여자와 남편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을 때에,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수치심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피해야 했습니다.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그들의 관계에 절대적인 벽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도 질문을 사용하신다는 것이 매우 놀랍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질문 속에서 아담을 향한 연민과 슬픔을 느낍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아담과 아내가 하나님 앞에 잘못을 인정하기를 기다리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비난하며, 서로 상대방에게 그리고 뱀에게 책임을 전가할 뿐입니다. 인간 관계에서 흔히 보는 거짓말, 책임 전가, 비난, 이 모든 것들은 죄 그 자체이며 죄로 인한 결과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의심한 그 순간, 사실상 인류의 삶을 끝나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역사는 진행이 됩니다. 

하나님의 반응은 즉각적입니다. 뱀은 영원히 저주를 받습니다. 그리고 여인의 후손을 통하여서 여인의 후손은 치명적이지 않은 상처를 입을 것이지만, 뱀은 치명적인 상처를 받을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서 가장 가까워야할 부부 사이에 견고한 관계가 깨어집니다. 갈등이 들어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자 명령이었던 일은, 자신의 삶을 위한 고통스러운 목표가 됩니다. 일은 축복이며 동시에 고통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임을 말씀합니다. 모든 인간은 죽게 됩니다. 

처음으로 깨달은 것은, 아담은 자신의 아내의 이름을 바로 이 시점에서 지었다는 것입니다. "하와"의 의미는 "생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담은 이렇게 끔찍하게 망가진 자신의 죄의 결과 속에서도, 죽음을 이기게 하실 하나님의 생명의 약속을 붙듭니다. 

자신의 죄로 인해 수치를 받아 마땅한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께서 또 다른 생명을 죽이심으로 그들의 수치를 가려주십니다. 인류는 동산에서 영원히 쫓겨납니다.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을 두심으로 동산을 막으십니다. 그러나 이후에 하나님께서 만드실 성막 안에 그룹이 다시 등장합니다. 스터디 바이블은 이것을 상기시키며, 인류는 동산으로 돌아갈 수 없지만, 하나님은 은혜로 동산을 인류에게 가져다주실 것임을 보여줍니다. 

목회자는 많은 성도님들의 장례식에 참석합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입니다.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아픔과 큰 슬픔을 느낍니다. 비통함을 경험합니다. 인류의 죄가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그리고 얼마나 큰 댓가를 치러야 하는 것인지를 생생하게 체험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붙듭니다. 우리에게 있는 "유일한" 소망이자 생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끔찍한 인류의 배신과 범죄의 그 순간에, 그리스도를 예언하시며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그 황홀한 약속은 우리에게 이루어졌으며, 오늘도 우리에게 그 약속을 적용하시며 인도해 가십니다. 

Genesis chapter 3 is the most miserable story in human history. Everything was perfect however, humanity doubted the authority and love of their creator. 

I see that some people blame God for the sin of Adam and Eve. But we see the apparent fault of two people. The serpent did not force them to sin. They chose to sin with their own decision. 

Actually, when the people chose to betray God, the history of humanity should be ended. However, his grace is abundant and indescribable. God punished the serpent and make the grace covenant for Adam and Eve. God permit the offspring of her to save the world. 

We see Jesus as the accomplishment of God's covenant. In Jesus, we walk our daily life in peace even with an enemy. He is true life for the sinners. We overcome the ultimate enemy which is death through Jesus Christ. 

2021년 10월 9일 토요일

말씀 묵상 어디까지 해봤니? - 창세기 31장 / 속이는 라반 vs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

 


사람이 변하는데 몇년이 필요할까요? 요즘 시대는 한두달 만에 고층 빌딩도 말들어내는 시대입니다. 하루 아침에 최신의 기술이 과거의 것이 되는 시대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떻습니까? 사람의 변화는 얼마를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시간은 우리가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긴 시간, 그리고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신앙에 있어서 "시간"이라는 요소를 잊어버릴 때가 참 많습니다. 나 자신을 향해서도 그렇고 다른 사람을 향해서도 그렇습니다. 섣불리 손가락질 하며, 섣불리 비난합니다. 하나님은 상상할 수 없는 인내로 우리를 인도하시며 우리를 설득해 나가십니다. 

라반 밑에서 이십년을 고생 한 끝에 야곱이 많이 변하였습니다. 사실 여기서 강조점은, 야곱이 변하였다라는 것보다는 이십년이 지났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야곱이 많은 재산을 얻게 되었지만 그리고 사실상 라반의 재산을 불려주기 위해서 그렇게 긴 시간을 고생했지만 여전히 야곱은 억울한 상황입니다. 그의 아들들이 야곱을 음해합니다. 안타깝게도 라반의 가정은, 거짓으로 똘똘 뭉쳐진 가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돌아가라 명하십니다. 야곱은 아내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동의를 구합니다. 심지어 아내들의 입에서도 자신의 아버지를 향한 분노가 쏟아집니다. 라반은 자신의 딸들 조차도 재산을 증식하는 대상으로 밖에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벧엘의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명시적으로 처음 나타나셨습니다. 야곱은 지난 20년 동안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억울함과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야곱은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는 진실한 청지기입니다. 악한 주인이 맡긴 일 조차 성실하게 감당했습니다. 맡겨진 일 속에서 성실함으로 감당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때가 되었습니다. 벧엘의 하나님이 그를 부르십니다. 

라반의 평소 성격과 잔인함과 치밀함을 알았기 때문에 야곱은 할 수 없이 가족들과 소유를 데리고 도망을 칩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게 된 라반의 대 추격전이 펼쳐집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라고 말하십니다. 저는 좀 이해가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점잖게 타이르시면서 라반에게도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렇게 억울한 야곱을 오히려 더 편들어주셔야 했던 것 아닐까요?

야곱을 추적해서 만난 이후에 하는 라반의 대사는, 정말 이렇게 뻔뻔할 수가 없습니다. 이십년을 부당하게 대접하고 자신의 딸까지 돈벌이의 대상으로 삼았던 그는 여전히 자신을 꾸미고 거짓으로 말합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는 그 사람의 과거를 보면 됩니다. 미래를 향해서 어떻게 하겠다라는 과장된 말들은, 그의 과거에 비추어 살펴보아야 합니다.

라벨은 라반의 드라빔을 훔쳤습니다. 스터디바이블은 라헬의 생리로 인해서 고대인의 의식에 따르면 그 드라빔을 부정하게 만들었다고 설명합니다. 한 사람의 삶을 책임지시는 위대한 여호와, 그리고 여인에게 부정함을 당할 수 밖에 없는 드라빔이 극적으로 비교가 됩니다. 

야곱과 라반이 언약을 맺습니다. 스터디 바이블은 이 부분에 대해서 특별히 해석하지 않습니다. 저는 라반의 동기를 생각해 봅니다. 이십년 동안 그렇게 고통스럽게 만들고서는 왜 갑자기 화평의 언약을 맺을까요? 왜 갑자기 라반이 야곱에게 자기를 해하지 말아 달라고 말할까요? 

조심스럽게 저는 라반의 꿈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늘 높은줄 모르고 폭력과 억압을 휘둘렀던 라반에게 나타나신 하나님, 그분 때문입니다. 신의 계시를 꿈을 통해서 경험하고 나서야 그는 두려움을 경험한 것입니다. 

야곱의 뒤에 누가 계신지를 가장 확실하게 경험하고 나서야 야곱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경험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지식으로 쌓아지는 하나님 만큼 경험하는 하나님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속이는 라반에 대해서 말씀을 통해 은유적으로 통렬히 비난합니다. 31장에서는 창세기 전체에서 가장 비중있게, "도둑질하다", "속이다"라는 원어가 등장합니다. 라반은 야곱이 드라빔을 도둑질했고, 속였다고 주장합니다. 자기 얼굴에 침 뱉기입니다. 이십년을 속였던 그는 이렇게 말해서는 안됩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의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2021년 10월 4일 월요일

말씀 묵상 어디까지 해봤니? - 창세기 27장 / 결국 야곱이 장자의 복을 받다

 


한 인물에 대해서, 혹은 한 가정에 대해서 어떤 평가를 하는 것은 굉장히 조심스럽습니다. 성경은 완벽하게 의인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가장 현실적인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모든 사람은 흠이 있고, 모든 사람은 자신의 선과 악을 가지고 이야기에 기여합니다. 

스터디 바이블은, 야곱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평가합니다. 야곱은 에서를 개인적으로 좋아하고 또 그가 해 주는 음식을 좋아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무시하였고 에서에게 장자의 축복을 하기로 결심합니다. 자신의 선호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무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짓과 속임이라는 방법조차 허락하시며, 자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스터디 바이블은 어머니 리브가의 역할을 굉장히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야곱은 약속을 잊은자로, 그리고 리브가는 약속을 기억하는 자로 이해합니다. 그녀는 약속을 의지하였기에 저주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이미 장자권을 소유한 야곱이 결정적으로 형을 속여서 축복을 가지는 것을 옹호해야 할 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가 확실히 장자권을 소유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연스럽게 그에게 길을 열어주실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에서의 행세를 하면서 아버지를 속이는 그 순간에, 오히려 진실을 고백하고 자신에게 축복해 달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는 없었을까요?

에서는 계속 자신의 복을 빼앗겼다고 말하지만, 사실상 그것은 자기 스스로 넘겨준 것입니다. 에서가 장자권을 넘겨 주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장자권을 소유한 야곱이 복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에서는 자신을 뉘우치기 보다는 분노하고 소리지르며 동생을 죽이기로 결심합니다. 

흥미롭게도 27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직접 등장하시지 않습니다. 마치 이 가정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옆에서 지켜보시는 것 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작정하셨지만, 그러나 인간은 그 안에서 자신의 행동을 선택하며 미래를 열어갑니다. 리브가는 잠시 헤어질 줄 알았지만 그러나 결국 그녀는 결과적으로는 아들과의 긴 이별을 맛보게 됩니다.

쉽지 않은 본문입니다. 스터디 바이블도 적극적인 해석이나 옳고 그름에 대해서 강하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저 역시 지금 현재 상황에서는 그렇게 잠시 이 장면에 머물러 있고 싶습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이렇게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확고히 이루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속임과 속임, 원한과 분노, 그리고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선택 들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추천 글

로고스 프로그램으로, 평신도 성경 공부하기 with 스터디 바이블 노트 Study Bible Notes (2023년 9월 업데이트)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시 119:103) 누구나 성경을 열심히 읽으라는 말은 듣습니다. 그리고 성경이 꿀보다 달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 ...

리딩 크리스천 독서 묵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