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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 6일 목요일

앞으로 책을 1000권 정도 읽고 나누는 것을 결심했습니다 with 독서 묵상

 



우리에게는 단 한번의 인생이 주어졌습니다. 그 누구도 두번의 기회는 없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참으로 두려운 일이고 또 한편으로는 너무나 신나는 일입니다. 삶은 매 순간 빛나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설레이게 합니다. 

지나간 저의 삶을 돌이켜보면, 탁월한 멘토를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느슨하게, 인생의 방향을 어느 정도 제시해주는 분들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정도의 방향성만 주어진 것에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분들은 저에게 희미한 빛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빛이었습니다. 

감사한 것은, 책을 통해서 진실로 탁월한 분들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신학자나 목회자 뿐 아니라 일반 저자들이 그렇습니다. 세상의 모든 지혜들을 엿볼수 있었습니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아름답게 변화시킨 모든 사람들은 책을 사랑했으며, 그것을 통해서 자신을 끊임없이 발전시켰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정말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누군가의 경쟁 속에서 그 사람을 앞서는 우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모든 것들을 아름답게 발현하고 싶은 맥락에서의 훌륭한 사람입니다. 제 자신 뿐만 아니라 저의 주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고, 궁극적으로는 인류의 발전 가운데 아주 작은 기여라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단 한번의 소중한 인생의 목적입니다. 

얼마전에 카카오톡이 업데이트가 되면서, 마치 인스타그램처럼 형태가 바뀌었습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 플랫폼을 통해서 사람들과 책을 나누면 어떨까? 물론 저는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 계정을 다 가지고 있지만 그렇게 열심히 업데이트를 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런 플랫폼은 반드시 다른 사람의 어떤 것을 봐야만 하는데, 저는 온라인에서 그런 활동 자체를 별로 선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저는 제 자신의 깊이를 만들어내는데에 더 큰 관심이 있습니다. 세상에 많은 것을 드러내지 않아도, 저의 가정과 저의 교회를 잘 섬긴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러나 카카오톡을 통해서 원하시는 분들과 저의 독서와 생각들을 나눌 수 있다면, 그것은 더 큰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략 목표를 천권 정도로 잡았습니다. 글쎄요, 이미 지금까지 읽은 책들도 대략 몇백권이 될 듯 합니다. 지금 이미 정독을 하는 책도 있지만, 가볍게 읽고 넘어가는 책들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책을 읽고 내가 배운 것이 있는가? 그리고 기독교적으로 한번이라도 생각을 하느냐? 이 두가지입니다. 

저는 책을 읽는 그 순간을 사랑합니다. 세상의 모든 소음은 사라지고, 시간이 정지해 버린 깊이를 알 수 없는 그 공간으로 한없이 들어갑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저는 모든 책을 정독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어떤 책이든, 적어도 저에게 가치있는 배움 두가지 정도는 찾기 위해 애를 씁니다. 또한 제가 읽어나가는 모든 책을 성경적으로 생각하기를 원하고, 그것이 저의 깊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방법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의 카카오톡 계정에서 화면을 누르면, 제가 그 책에서 인상적으로 읽은 부분을 함께 보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저의 기독교적인 묵상은 '독서 묵상'이라는 이름으로 리딩크리스천북클럽 블로그에 정리해 놓았습니다. 

이것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까요? 저로서는 전혀 가늠할 수 없습니다. 그저 인간으로써 마땅히 할 일을 할 뿐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귀한 책들을 통해서 배운 것은, 소비자가 아니라 생산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AI시대가 다가올 수록 그것은 더욱 중요한 방향입니다. 가치 있는 것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정리하면서 깊이를 만들어내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탁월한 사람들에게 책을 통해서 배워야 하며, 고전과 현대의 책들을 두루 읽으며 삶을 확장해 나가라는 것입니다. 

저는 제가 대하는 모든 분들을 존중합니다. 그러나 단 한번의 인생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사실 저는 이제 다른 사람의 말에 별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도 그렇게 큰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그저 탁월한 멘토들에게 배운대로 할 뿐입니다. 지난 10년 동안, 여러 마음의 고민과 힘든 상황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걸어왔던 것처럼, 적어도 앞으로 10년이 그러해야 하고 그럴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길을, 선하신 하나님께서 선하게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 "리딩 크리스천 독서 묵상" 모음
https://readingchristianbookclub.blogspot.com/2022/10/blog-post_48.html

2024년 6월 10일 월요일

아름다운 박일양 권사님, 소중한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 토저의 '온전한 믿음을 추구함'을 선물 받고






아직 저는 젊은 편입니다. 중년을 넘었지만 크게 아픈 곳도 없고 건강하게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정말 크게 아프신 분들, 그리고 이제 육신의 모든 힘을 잃어가는 분들의 마음을 안다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죄송할 때가 참 많습니다.

제가 부족함을 알기 때문에, 그 부족한 마음이라도 최대한 펼쳐봅니다. 아프신 분들의 상황에 공감하기 위해서, 그리고 언젠가 저에게 다가올 삶의 마지막 날을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전에도 그렇지만 더 그렇게 생각이 듭니다. 목회자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공감' 입니다. 

박일양 권사님은 이제 아흔이 거의 가까워 오십니다. 얼마전에는 사랑하는 아들을 먼저 하나님 품으로 떠나 보내셨습니다. 아들 이야기를 하면서 우시던 모습이 마음에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 아픈 마음은 감히 제가 헤아릴 수 없습니다. 

교회에 계단이 많아서, 그리고 워낙 약하신 몸이라 가끔씩 제 팔을 내어 드립니다. 함께 사역하는 전도사님께서 몰래 사진을 찍어주셨습니다. 저는 제가 저런 모습으로 권사님과 함께 걸어가고 있다는 것도 사실 몰랐습니다. 저의 마음은 혹시라도 권사님이 넘어지실까 조마조마하기 때문입니다. 그저 한걸음씨 걸어가고 있는 저의 발, 그리고 권사님의 발만이 보일 뿐입니다. 

오늘도 뵙고 인사드렸는데 갑자기 줄게 있다고 하십니다. 언뜻 들으니 ‘책’이라고 하셔서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습니다. 잠시 자리에 서시고는 작은 가방을 주섬주섬 여시는데 정말 책이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A.W. 토저의 '온전한 믿음을 추구함' 입니다. 

권사님께서 토저 책을 좋아하신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구십이 다 되신 어르신께서 여전히 책을 읽으신다는 것이 너무 놀라웠습니다. '정목사님, 내가 토저 정말 좋아해, 이 책 얼마전에 산 건데 줄께, 그리고 나중에 사도행전 설교도 사서 줄께' 

책을 받아드는데 어떤게 감사의 마음을 표현해야 할지 마음이 먹먹했습니다. 너무 야위어서 이제는 걷기도 힘든 권사님께서, 손자와 같은 목사에게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책을 직접 전달해주시는 것은 무엇이라 표현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바쁜 날이지만 바로 읽어 보았습니다. 이 책은 마치 토저 목사님의 마음을 토로하는 그대로라고 느꼈습니다. 잠깐 읽는 동안에, 이 부분이 참 좋았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찬양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 나아감으로써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기를 원하는 것이 광신적일까?
그렇게 살아 내어 이 땅에서도 
천국의 삶을 맛보려는 것이 광신적일까?
만일 그렇다면 그 광신은 율법서가 권하는 광신이요, 
시편이 권하는 광신요, 선지자들과 신약성경이 권하는 광신이다.

오늘은 글을 쓰고 있지만, 조금은 울적한 날입니다. 하루 종일 분주해서 무엇인가 집중하기 힘들었고 또 제 자신을 보았을 때에 불만족합니다. 따뜻한 햇빛 조차 마음이 불편한 날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토저의 글을 읽으면서 저의 감정을 가다듬어 봅니다. 저의 감정과 저의 환경과 상관 없이 제가 가야할 길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길이며, 토저 목사님의 표현에 따르면 광신의 길입니다. 오늘도 잠잠히 그 길을 걸어가겠습니다.

2024년 5월 10일 금요일

한 걸음씩 계속 걸어가는 것에 대하여 - 옵시디언에 독서 명언을 모으기 시작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유익한 것이 무엇인가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을 꾸준하게 하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합니다. 내가 막연하게 머리 속으로 느끼고 공감하는 것과, 그것을 내 삶에 실제로 구현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마치 영화 속에 등장하는 평행 우주 만큼의 차이가 있습니다. 실천하는 사람만이 '진짜'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정말로 성숙해 지고 싶다면 길은 한가지입니다. 깊은 사고의 훈련 그 결과를 구현하는 실천, 그리고 완성도를 계속적으로 높이는 꾸준함이 나의 삶의 본질이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중요한 것이 '끈기' 입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에, 더 이상 전진하고 싶지 않을 때조차도 한 걸음을 더 나아가야 합니다.

저 역시 가끔은 그저 멈추고 싶습니다. 이 정도면 많은 것을 하지 않았냐며 스스로를 안심시키고 오랫동안 쉬고 싶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때가 마음이 정말 불편합니다. 마치 저의 정체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들에게 소중한 인생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도록 우리를 이끌어가십니다. 그러므로 힘들어도 그 방향으로 걸어가는 것이 사실은 가장 편한 길입니다. 그런 면에서,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라는 말씀이야 말로 진리입니다. 

결과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신실함' 입니다. 바른 방향이 있다면 딱 한 걸음만 있어도 됩니다. 딱 한번의 작은 시도가 쌓이다 보면 그것은 결국 열매를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더 이상 발전하고 싶지 않아 게으름을 부등켜 않고 몸부림치는 저의 미숙한 자아를 설득하며 끊임없이 제 자신에게 이야기합니다. ‘진부야 잘하고 있어, 물러서지마, 딱 한걸음만 더 나아가자’

이번에 저의 책을 쓰면서 한계를 절감했습니다. 저의 문장력이 얼마나 부족한지에 대해서 눈물 흘리며 아파했습니다.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서 살았지만, 여전히 부족함을 느꼈습니다. 특별히, 다른 사람의 글 중에서 탁월한 부분을 인용할 때에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결코 단시간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꾸준한 독서, 성경적 사고의 훈련, 그리고 그것을 제대로 기록하는 것이 통합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저의 부족함에 눈물 흘렸다고 후회만 하고는 있을 수 없는 노릇입니다. 주님은 소경을 향하여 '일어나라' 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결심한 것은, 독서 명언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입니다. 

사실 생각만 해도 몸서리 쳐졌습니다. 몇배는 고된 훈련입니다. 책을 읽기만 하는 것은 즐겁지만, 탁월한 명언을 기록으로 남기고, 그것을 생각으로 정리하는 것은 몇배는 힘듭니다. 그러나 방향이 옳다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기에 제 자신을 밀어 붙였습니다. 

메모 프로그램인 옵시디언을 사용한지가 벌써 반년이 다 되어 갑니다. 그동안 많은 성과가 있었습니다. 제가 삶에서 경험하는 고민과 통찰들을 하나로 모으고, 더디지만 계속적으로 발전했습니다. 

* 책 어디까지 읽어봤니? (21) 세컨드 브레인 (티아고 포르테)
/ 옵시디언(Obsidian)으로 두번째 뇌를 만들기 시작하다

https://jungjinbu.blogspot.com/2023/12/21-obsidian.html

저는 세컨 브레인에서 제시하는 Organize 섹션에서 Project 폴더에 하위 폴더로 '통찰 1 - 독서의 통찰' 을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세컨 브레인에서는 실제로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일 Project 폴더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저는 항상 책을 읽고 정리해야 하기 때문에 그곳에 자료들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폴더의 하위 폴더로 '독서 명언' 폴더를 만들었습니다. 


독서 명언을 모으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제목은, 가장 마음에 와 닿은 짧은 명언으로 잡습니다. 위의 경우는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에서 가져온 내용입니다. 제목은 '우리 모두는 아직도 초대 교인임을 잊지 마십시오' 입니다. 그리고 그 명언의 문맥을 살릴 수 있는 내용을 함께 저장합니다. 필요하다면 하이라이트 혹은 굵은 글씨 효과를 넣습니다. 

그리고 내용 아래에는 화살표를 넣은 다음 그 명언에 대한 저의 간단한 생각을 정리합니다. 단순히 내용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소화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내용에 걸맞는 태그를 붙여서 추후에 사용할 때에 수월하도록 만듭니다.


순전한 기독교를 읽으면서 정말 좋았던 것은, 기독교의 거의 모든 부분에서 저에게 새로운 통찰 혹은 새로운 감각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성도의 정체성에 대해서, 그리고 교회의 현재 상황에 대해서 설명하는 부분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세상으로 부터 비난 받고 있는 교회에 대한 성경적인 시각,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여전히 역사하시고 계시며 그렇게 하실 것이라는 놀라운 기대를 저에게 심어 주었습니다. 

특별히 제가 지속적으로 신경쓰는 것은 '태그'입니다. 태그를 사용하면 모든 자료를 정확하게 분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실 굉장히 귀찮지만, 그것이 쌓일 수록 엄청난 가치를 발휘합니다. 예를 들어서 위의 글에서 '#독서 명언'을 누르면 아래처럼 태그로 모아져서 한번에 볼 수도 있습니다. 


처음에 결심할 때 다짐한 것이 있습니다. 하루에 딱 하나만 하자는 것입니다. 너무 지나치게 마음을 쓰다보면 결국에는 탈진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열네게 정도를 모았네요. 중요한 것은 하루에 모든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꾸준하게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느리더라도 방향이 분명하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할 것입니다. 

언제나 한결같은 마음입니다. 저는 언제나 부족하지만, 적어도 어제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는 제가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하나님께서 주신 소원에 조금이라도 더 부합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독서 명언을 모으는 이 작은 시도들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들로 이어지기를 기도합니다.

2022년 6월 5일 일요일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가는 성실함 / 사무엘상 17장 1-23절 설교

 



설교자의 입장에서는, 본인이 익숙하고 또 성도님들이 익숙하신 본문을 설교하는 것이 훨씬 수월합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익숙하지 않은 본문을 놓고 씨름하고 설교를 준비하는 것은, 새로운 도전이면서 큰 은혜입니다. 이전에 알지 못했던 것을 새롭게 고민하고, 또 그 안에서 영적인 원리들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엄밀한 의미에서 본문의 의미를 명확하게 드러낸다는 것이 참 쉽지가 않습니다. 특별히 단순히 주해의 작업이 아니라 성도님들을 위하여서 영적인 원리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설교를 준비한다는 것은, 주해가 매우 중요하지만 한편으로는 목회적으로 그것을 넓게 접근하는 태도도 필요한 듯 합니다. 

이번에 설교를 준비하면서 좋았던 것은, 다윗의 모습을 통해서 "전념"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아주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아도, 현재 주어진 그의 삶에 대한 전념이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안에 속해 있다는 것은 너무나 행복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 안에서 우리는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너무나 큰 행복이고,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고난과 아픔이며 끊없는 도전과 훈련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신비를 알지 못한다면, 그리고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가는 삶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현재의 삶에 전념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말하지만, 한뼘도 자라지 않는 많은 분들을 보면서 마음이 아픕니다. 저 역시 이제 더 이상 어떤 것도 시도하고 싶지 않다는 약한 마음이 종종 듭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그것이 궁극적인 삶의 진정 의미이기 때문에, 설교를 준비했고 저에게 적용하였습니다. 

* 사무엘상 17장 1-23절 설교문

오늘의 말씀은 어제의 말씀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사무엘상 16장에서는 하나님을 버린 사울 왕 대신에 여호와를 향한 아름다운 중심을 가진 다윗을 왕으로 세우십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찾아가 막내 아들 다윗에게 기름을 부은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신은 사울로부터 떠나고 악신이 그에게 임했습니다. 다윗은 사울로부터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수금을 연주할 때에 사울은 큰 회복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오늘 말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성도님들께서는 혹시 이어지는 내용 속에서 어떤 스토리를 기대하시고 계십니까? 저는 16장부터 사실 이어지는 스토리 속에서, 다윗이 당당하게 왕으로 자리 잡는 스토리를 기대했습니다. 왜냐하면 사울의 경우에는, 사무엘상 10장에서 사무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고 바로 그 이후에 모든 사람들이 모여서 그를 왕으로 추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어지는 말씀 속에서는, 다윗이 왕으로 바로 세워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긴박한 전쟁의 스토리 속으로 다윗이 들어가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1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 블레셋 사람들이 그 군대를 모으고 싸우고자 하여 유다에 속한 소고에 모여 소고와 아세가 사이의 에베스담밈에 진 치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에 큰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골짜기를 중간에 놓고 서로 마주보고 진을 치게 되었습니다. 사울 왕과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 전쟁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전쟁이 쉽게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블레셋 가운데 거인인 골리앗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골리앗의 키는 아마도 2미터를 훌쩍 넘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머리에서부터 발 끝까지 엄청난 갑옷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방패든 사람이 그를 호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임에 분명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눈에는 마치 전차와 같이 보였을 것입니다. 골리앗은 이스라엘 백성을 조롱했습니다.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 중에 한명이 나와서 자기를 이기면 블레셋이 이스라엘의 종이 되고, 그렇지 못하다면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성경은 이 말을 들은 백성들의 반응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1절 말씀입니다. "11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이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하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은 사울도 다른 사람보다 머리 하나가 더 높은 기골이 장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사울조차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거인이 나타난 것입니다. 백성은 자신들을 대신하여 앞에 나가 싸울 사람으로 사울을 뽑았지만, 정작 온 나라의 가장 큰 위기가 닥쳤을 때에 사울은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사울왕과 이스라엘 백성은 큰 두려움에 사로 잡히고,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 놓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도대체 사울에게 왜 두려움이 찾아왔을까? 사무엘상 11장으로 잠깐 돌아가보면 그가 왕으로 세워진 직후에 암몬 자손이 쳐들어와서 백성을 협박했습니다. 그때에도 오늘 본문과 매우 유사한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욕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구원할 자가 없었습니다. 백성이 힘이 없어서 소리 높여 울 때에 11장 6절에 보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매 그 노가 크게 일어나서" 라고 말씀하시지 

무슨 의미입니까? 방금 왕으로 세워진 사울왕이 그렇게 담대해질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었기 때문이다 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마음에 합한 마음이 되고 그분의 뜻이 사울의 뜻이 되었을 때에는, 사울왕의 마음에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시고 그의 마음에 두려움이 없이 능히 대적과 싸울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에서 사울은 어떤 상태인가? 16장 14절에서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났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상 다른 모든 조건들은 동일한 것입니다. 사울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왕입니다. 사울은 여전히 백성들의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사울의 앞에는 대적들이 동일하게 서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하였을 때에는 그 어떤 두려움도 없었지만, 그러나 여호와의 신이 떠났을 때에는 그는 도망치고 숨는 겁쟁이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더 과거로 돌아가서,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으로 백성을 인도해야 했을 때에 여호수아가 염려하며 걱정하며 미래를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수아 1장 7-8절 말씀입니다. "7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그리고 심지어 많은 크리스천들이, 마음의 담대함이라는 것은 혹은 용기라는 것은 자신의 능력과 자신이 가진 조건에서 나온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여호와의 말씀을 따르며, 여호와의 편에서 바른 길을 걸어가는 것, 바로 그것으로 부터 진정한 용기와 담대함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기는, 우리가 우리의 삶의 고난과 어려움에 직면하여서 용기를 잃고 방황할 때 마다 주의 말씀을 떠나지 않기를 원합니다. 말씀을 주야로 묵상함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을 걸어가기를 힘쓰면서 모든 어려움들을 이겨내기를 원합니다. 살아계신 여호와의 편에서서 그분과 동행하며,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영적인 담대함을 가지고 믿음의 삶을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의 전반부에서는 골리앗 앞에 두려워하는 사울이 집중적으로 조명이 되었다면, 바로 다음 장면에서는 이어서 다윗이 등장합니다. 12절에서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장성한 세 아들은 사울을 따라 싸움에 나갔다" 그리고 14절에 보니 "장성한 삼인은 사울을 쫓았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주 흥미로운 표현이 두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다윗의 형들은 누구였는가? 그들은 인간 왕인 사울 왕을 따라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사울과 함께 전쟁터에 나갔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울을 의지하는 사람들이었고 사울의 병사였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방금 살펴본 그 골짜기 앞에서 대치 상황이 무려 40일 동안이나 계속 되고 있었습니다. 고대의 군인들은 대개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 가져온 개인 물품으로 전쟁터에서 생활을 감당하곤 했었습니다. 당연히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음식이 떨어지고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것입니다. 그때에 다윗의 아버지가 다윗을 불렀어 형들에게 곡식을 가져다 주라고 다윗에게 시켰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지금 어떤 사람인가? 16장에 말씀에 보면 "다윗은 호기와 무용과 구변이 있는 준수한 자였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는 어린 소년이었지만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미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그리고 온 가족이 그것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다윗에게 맡겨진 역할은 무엇이었습니까? 음식을 챙겨가서 형들에게 전달하는 심부름꾼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건 굳이 다윗이 아니더라도 아무나 다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성도님들께서는 만약에 다윗의 입장이었다면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요? 저 같으면 사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아니 내가 지금 누구인데 이런 하찮은 일을 시키시는가? 내가 겨우 형들의 도시락이나 가져다 줄 사람인가? 이런 하찮은 일은 종에게 시켜서 해도 되지 않는가?" 저 같으면 본능적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20절에 말씀하시기를 "다윗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서 양을 양 지키는 자에게 맡기고"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놀라운 것은, 다윗은 여전히 양을 지키는 일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다윗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자신이 기름 부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평소에 하던 것을 그대로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다윗은 그의 신분이나 그의 지위는 완전히 변했지만, 그는 자신의 일을 버리거나 혹은 소홀히 하지 않고,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묵묵히 감당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놀라운 것은, 그가 일찍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형들에게 음식을 가져다 주라고 했을 때에 늦장을 부리거나 귀찮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일찍 일어났다라고 말합니다. 아주 흥미로운 것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그 다음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난 것과 동일한 모습으로 다윗이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마음의 태도를 온전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명령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명령을 하나님의 명령처럼 받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현재의 상황 속에서 이렇게 저렇게 불평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게 지금 맡겨진 것을 하나님의 일로 알고 매우 성실하게 그것에 전념하여 감당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제 마음에 떠오른 생각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평범한 삶을 진실하게 감당하는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념"이라는 책의 저자는, 우리가 세상을 진정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자발적인 전념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것에 꾸준하게 전념하면서, 결국 그것을 통해서 개인의 깊이와 긴밀한 공동체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저자의 주장을 하나 인용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어떤 것에 전념하는 것은, 큰 위험이 존재한다고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깊이 파고드는 것을 막는 위협들은, 마치 옛날이야기 속에서 나무가 우거진 길을 따라 걸을 때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괴물들처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첫째는 지루함boredom이다. 오랫동안 전념하려면 같은 일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한다. 

둘째는 산만함distraction이다. 길을 가다 보면 온갖 반짝이는 것들이 계속 눈에 띈다. 셋째, 불확실성uncertainty도 깊이를 위협한다. 내가 올바른 결정을 했는지, 바른길을 가고 있는지 불확실하기 때문에 불안하다. 넷째는 유혹temptation이다. 이는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심리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보면서 소년 다윗의 삶을 지켜보면서, 이 책 전념의 내용이 생각이 났습니다. 참 흥미로운 것은 현재 다윗의 상황이라는 것은, 얼마든지 그가 자신이 전념하던 삶을 내팽개치고 여기저기 기웃거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인정받고 왕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자신의 왕권을 위해서 그것만을 쳐다보면서 더 이상 그 어떤 것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가 보여준 것은, 현재 자신에게 맡겨진 자신의 삶에 대해서 여전히 변치 않는 모습으로 전념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여전히 양을 치는데 전념하는 자로서, 그리고 아버지의 새로운 명령을 받아서 움직이는 성실하고 부지런한 소년의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 사도는 성도에게는 반드시 부활의 영광이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현재 우리가 살아야할 삶의 태도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8 그러므로 내 사랑 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갈라디아서 6장 9절과 10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찌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주 흥미로운 것은, 우리의 평소의 생각과 성경의 말씀은 완전히 반대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의심을 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전념해서 산다고 하더라도 과연 좋은 열매들을 허락하실 것인가?" 거기에 대해서 의심을 품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당장 지금 눈에 보이는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내가 마땅히 지금 전념해야 할 것을 너무나 쉽게 내팽개쳐버린다는 것입니다. 

전념의 저자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신앙의 훈련과 반복을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음의 길을 끊임없이 의심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마땅한 것에 힘을 쓰기 보다는, 허망한 것에 관심을 가지고 시간을 낭비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현재 맡겨진 일에 충실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이 더 멋진 것을 한다고 생각하면서 남을 쳐다보면서 남을 의식하면서 살아갈 때가 종종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열매는 반드시 얻게 되는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명령하시는가? 그것은, 바로 오늘 이 시간에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가, 낙심하지 않고 오늘 하루를 믿음으로 정진하고 있는가, 이것을 물으시면서 우리를 격려하시는 것입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다윗이 자신의 모든 상황에서 마땅히 자신에게 맡겨진 모든 것을 묵묵히 감당한 것 처럼 우리에게 그런 믿음의 삶에 대한 전념이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귀한 것으로 부어 주실 것을 믿으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힘써 행하고 진실하게 하루를 살아가시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놓고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 하나님, 삶의 역경과 어려움 속에서 성령 충만을 구합니다. 저의 마음에 엄습해오는 두려움을 물리쳐주시고 오직 주의 말씀을 힘있게 붙들고 순종함으로 삶의 어려움들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둘째로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 하나님, 주님께서 저에게 지금 맡기신 모든 것들을 충실히 감당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마땅히 걸어가야 할 믿음의 길에 오늘 하루를 전념하게 하시고, 선한 일을 하되 낙심하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을 붙들어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문" 전체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11/blog-post_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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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21일 목요일

책 어디까지 읽어봤니? (12) - A Biblical Case against Theistic Evolution / 유신 진화론에 반대할 수 밖에 없는 이유

 


저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은 "지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논리적이고 똑똑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좀 더 합리적으로, 심지어 믿지 않는 사람들이 들어도 충분히 수긍할 만한 수준으로 설명하는 것을 최종적인 목표로 삼는 듯 합니다. 

그러나 요즘에 제가 깊이 가지는 생각은, 과연 합리적인 것, 이성적인 것, 그리고 상대방에 대하여 설득적이라는 것이 성도의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 있는가 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이라는 것이, 성경을 뛰어넘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인간의 지식과 지혜는 완전하지 않으며 여전히 발전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론, 마치 나의 합리성이라는 것을 통하여 성경을 세상을 향해다 설명해야 하며,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그것이 진리가 아닌 것 처럼 느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별로 발을 들여놓고 싶지 않은 영역이 있습니다. 진화론입니다. 사실 진화론이라는 것이 말도 안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지적으로 탁월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이들은 진화론을 지지합니다. 그런데 더 어려운 것이 유신 진화론입니다. 유신 진화론의 형태는 다양한 것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아주 간단하게 말해서 진화는 존재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진화를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 미국에서 많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유신 진화론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유신 진화론을 지지하는 가장 큰 단체는 제가 알기로는 biologos 입니다. 이 단체는 기독교계 안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많은 분들이 존경하는 팀켈러 목사님 역시 이 단체를 지지하는 입장인 것을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보실 수 있습니다. 


처음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제 입장에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유신 진화론에 찬성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팀켈러 목사님의 경우는 창세기의 주해를 하면서 창세기의 역사성에 대하여서 본인이 생각할 때에 풀리지 않는 난점들을 가지고 고민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제가 팀켈러 목사님의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마치 외계의 문서를 읽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보수적인 신학에서 공부한 저에게 있어서, 진화론에 대하여서 가능성을 열어 놓고, 그리고 하나님과 진화를 함께 연결하여서 설명하는 것, 그리고 고대의 사람들의 입장에서 성경을 이해해야 하는데 유독 창세기는 비유적인 부분이 많기 때문에 이것을 굳이 역사적으로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성경의 저자들의 목표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데 있어서 상당한 거부감이 느껴집니다. 도대체 이분에게 성경의 권위라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이런 부분에서 고민하던 시기에 마침 좋은 책을 한권 보게 되었습니다. A Biblical Case against Theistic Evolution 입니다. 단순히 유신 진화론에 섣부르게 반대하는 책이 아니라, 유신 진화론이 어떤 맥락에서 왜 문제가 있는 것인지를 잘 설명하는 좋은 책이어서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아직 다 보지는 않았지만 특별히 앞 부분에서 창세기 주해와 관련하여서 창세기의 역사성에 대한 논증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Yes, Genesis 1, in particular, is highly structured. Elements like the repetition of “evening and morning” throughout the passage reflect its compositional grid. However, repetitive formulas do not necessarily signify nonhistorical, figurative accounts. For example, the entire book of Genesis is structured according to the repeated formula “This is the book of the generations of …” (2:4; 5:1; 6:9; 10:1; 11:10, 27; 25:12, 19; 36:1, 9; 37:2), but that in no way indicates that the entire book is figurative in what it relays to its readers. Genesis 1 has an elevated style, yet it is still historical narrative. C. John Collins perhaps has the best genre definition of Genesis 1 when he calls it “exalted prose narrative.” As I conclude elsewhere, “This description properly reflects the sequence, chronology, and historicity of the account, while at the same time underscoring its exceptional quality.”

 

The historical nature of the Hebrew creation account underscores the reality that God invented time and history. And the history that God created in Genesis 1 is one that is moving and unfolding: it is a linear history that moves from inception to consummation. The universe had a beginning, and it is moving toward an end. This truth distinguishes the biblical creation account from the cosmogonical texts of the ancient Near East. The non-Israelite accounts are legendary stories that have no determinable basis in fact or history. They are symbolic sagas of primordial times that describe the realm and activities of deities. They are what can be called “mythic narrative”; that is, the stories have linear forward movement, but they are simply ahistorical. Models such as the figurative approach simply de-historicize the Hebrew creation account and, therefore, minimize this important “theological” aspect of the text.

 

The deeply historical nature of Genesis 1–3 is profoundly important to the entire Bible because these chapters stand at the beginning of the Bible, whose overall structure is historical. The Bible shows the great scope of the work of God from the beginning of time to a final judgment and a new heavens and new earth. The first three chapters of Genesis do not stand alone in the Bible as isolated chapters but are structurally tied to the narrative in Genesis 4 about Adam and Eve and their children Cain, Abel, and Seth; and to the genealogies of human beings found in Genesis 5; and to the historical record in Genesis 6–9 of Noah’s family and the flood; and to the historical narrative in Genesis 10 of the nations that descended from Noah’s sons; and to the tower of Babel and to the descendants of Shem in Genesis 11; and to Abraham and the patriarchs in Genesis 12–50. Genesis 1–3 does not stand alone but is closely linked to the rest of this entire historical narrative.

The macro-structure of the Bible is a historical account of God’s actions from beginning to end. If we remove the profoundly historical nature of Genesis 1–3, we will remove the historical foundation on which all the remainder of the Bible rests.

 

John D. Currid, “Theistic Evolution Is Incompatible with the Teachings of the Old Testament,” in A Biblical Case against Theistic Evolution, ed. Wayne Grudem (Wheaton, IL: Crossway, 2022), 53–54.


적어도 제 입장에서는 John D. Currid 의 성경 읽기가, 훨씬 성경적이고 자연스럽고 설득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시간과 역사를 창조하신 분이시며, 이것은 계속 진행되고 움직이고 있는 역사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특히 John D. Currid는 이 책에서 다른 고대 문헌들과 창세기를 비교하면서, 비교할 수 없을만큼 창세기 기록이 역사성을 띄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비유적인 해석 접근으로는 창세기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창세기 4장에서부터 11장까지 이어지는 모든 내용들을 볼 때에, 그리고 50장까지 내용들을 볼 때에, 1-3장이 밀접하게 다른 이야기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창세기 1-3장의 역사성을 제거할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 

저는 이것이 굉장히 자연스러운 성경 읽기라고 이해합니다. 저 역시 어렸을 때 부터 이렇게 읽어 왔습니다. 너무 복잡하게 파고들어가지 않아도, 신학으로 고급 학위를 받지 않아도, 창세기를 처음부터 읽으면서 전체를 읽어나가면, 비록 창세기가 가지고 있는 비유적인 요소들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 큰 틀이 가지는 강력한 역사성을 성도들은 본능적으로 경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진화론자, 유신진화론자, 그리고 창조론자들의 다양한 글을 읽으면서 엄청난 긴장감을 발견했습니다.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그것이 학술적으로도 충분히 증명되는 것인데, 누군가에게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내용이라는 것이 이상한 일입니다. 그리고 같은 신앙을 고백한다고 말하면서도 결국에는 많이 다른 길을 걷고 있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마음이 아픈 일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에 보통의 성도님들께서는 이런 주제에 대해서 큰 관심이 없으실 수도 있고 그렇게 큰 영향이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미 보수적인 교회에서는 성경적인 창조론으로 성도님들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신 진화론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고 싶고 또 그것에 대하여 성경적인 이해를 통해서 반박하고자 하는 분들에게는 사려깊게 쓰여진 A Biblical Case against Theistic Evolution이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유명한 누군가의 해석이나 누군가의 주장에 의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때에 그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 없어도,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홀로 만드신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의 생각을 뛰어 넘어 인간의 역사와 개인의 삶을 책임지시며 이끌어가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인간의 부족한 생각으로는 난점이 존재할 수 있겠으나, 불완전한 인간의 이성을 뛰어 넘는 진리의 말씀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경을 믿지 않고 하나님께 손가락질 하지만, 자신의 아들을 이미 죄인을 위하여 주시고 대속의 길을 열어주신 은혜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온전한 인간이었던 아담의 반역과 타락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주권적인 사랑으로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 주심으로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인간의 구원 뜻을 홀로 정하시고 이루시며 마지막 날에 반드시 완성하실 삼위 하나님께만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 "책 어디까지 읽어봤니?" 전체 글 모음
/ 당신을 변화시키기 위한 "가장 아름다운 길"
https://jungjinbu.blogspot.com/2023/03/blog-post_6.html

2021년 10월 15일 금요일

우리 이제 100일이야! / "하루 한번 성경 읽기" 100일 인증을 기념하며

 

삶은 참으로 고된 것입니다. 하루를 온전하게 살아낸다는 것, 그리고 나에게 맡겨진 일들을 감당한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또한 삶은 매우 희망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단잠에서 깨어 눈을 뜬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하루를 선물하시고 미래를 열어 주십니다. :)

어렸을 때에는 대부분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 수록 모든 사람이 각자의 상황에 따라서 살아갑니다.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나 다양합니다. 그래서 마음에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내가 지금 잘 살고 있는 걸까? 다른 사람들을 보면 저렇게 잘 살고 화려한 것 같은데 나는 왜 이렇게 초라할까? 모두가 느끼는 감정이고 저 역시 그렇습니다. 

세상에 혼란스럽고, 내가 제대로 살고 있는가 질문이 들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본질을 붙드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것에 매진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삶의 가장 우선 순위에 놓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영적으로도 또한 감정적으로도 안정감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루 한번" 성경 읽기 밴드를 시작한지 130일이 되었습니다. :) 시간이 얼마나 빠른지 모릅니다. 그저 한번 도전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던 그 결심과 결단이 벌써 4개월이 넘은 것입니다. 지나간 시간은 우리 눈에 더 이상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행했던 과거의 행적은 남습니다. 당신의 지나간 4개월은 어떠했습니까? 그리고 어떤 부분이 가장 의미가 있었습니까?

* "하루 한번" 성경 읽기 밴드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https://jungjinbu.blogspot.com/2021/06/blog-post_7.html

오늘 드디어, 하루 한번 성경 읽기 저의 인증글을 100회를 돌파했습니다. :) 100번이라뇨,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혹시 가능할까 싶어서, 하지만 이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에 시도했던 하루 한번 성경 읽기를 100번을 인증을 했다는 것은, 제 개인의 삶에 있어서 엄청난 혁신입니다. 그리고 감사이고 감격입니다. 

사람들은 기독교는 지식의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실천의 종교에 훨씬 가깝습니다. 그리고 습관의 종교에 훨씬 가깝습니다. 성도를 지탱해주는 것은, 꾸준한 성경 읽기와 기도를 포함한 영적인 실천들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실천들은, 단순히 주일 하루가 아니라, 주중의 삶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성경 읽기 100회를 그리고 100일을 기념하면서 제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과연 제 자신이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요? 처음에는 하루 한번 성경 읽기는 드라마 바이블 인증으로 시작했습니다. 이미 많이 습관이 되었던 드라마 바이블을 매일 아침에 듣고 인증을 남기는 것입니다. 사실 충분히 그것으로도 좋았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나아가보자는 결심을 가졌습니다. 물론 지금도 매일 아침에 출근 때에도 드라마 바이블을 듣지만, 이제는 성경을 한장 한장 묵상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루에 한시간 정도를 사용합니다. 한시간이 굉장히 큰 시간이지만, 가장 우선순위에 놓는다면 감당하지 못하는 시간도 아닙니다. 

말씀을 가장 우선 순위에 놓을 때에 좋은 점은, 제 자신의 삶에 대해서 확신을 더 많이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목회자인 저도, 제가 제대로 살고 있는가를 스스로조차 평가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말씀에 자신을 비출 시간을 정기적으로 가지면서, 정신적으로 훨씬 안정감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일을 할 때에 좀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말씀 자체가 저의 영혼 속에 더 깊이 들어오는 것을 자주 경험합니다. 목회자는 기본적으로 설교를 계속 해야 합니다. 설교는 어쩔 수 없이 시간이라는 압박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어떤 결과물을 충실히 만들어내야 하는 목표가 존재합니다. 그래서 설교 준비는 매우 행복한 것이지만, 어떤 의미에서 영혼의 자유로움을 충분히 주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성경을 자유롭고 자발적으로 매일 읽고 묵상을 하니, 제 영혼이 훨씬 더 자유로움을 느낍니다. 마치 넓은 들판에서, 아름다운 갈대 밭을 지날 때에 손으로 그 풀들을 훑으며 지나가는 그런 자유로움입니다. 쫓기듯이 말씀을 대하지 않고 한 없이 너그럽고 넉넉한 마음으로 그 안에 들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제 스스로 아주 흥미로운 것은, 꼭 아침에 묵상하는 시간이 아니더라도 다른 시간들 속에서도 제 마음에 영적인 호기심들이 자꾸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보았던 말씀이 떠오를 때도 있고, 내일은 어떤 말씀이 나올까? 어떤 묵상을 하게 될까? 이런 영적인 호기심과 동기들이 마음 속에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말씀이 제 삶을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위대한 도전은 작은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작은 것들을 성실하게 실천하는 것을 통해서 믿음의 삶이 이루어집니다. 감사한 것은, 네이버 밴드로 시작해서 드라마 바이블과 성경 묵상까지 하나의 틀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4개월 전까지만 해도 네이버 밴드를 들어보지도 못했던 사람입니다. 이것을 제안했던 아내에게 한 없이 감사합니다.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저는 이것을 붙들고 평생을 살 것입니다. 

* "성경 읽기와 묵상"의 "위대한 도전"을 시작합니다
with Hannah's Bible Outlines & NIV The Grace and Truth Study Bible

https://jungjinbu.blogspot.com/2021/09/with-hannahs-bible-outlines-niv-grace.html

벌써 다음 계획이 생겼습니다. :) 이제 창세기 묵상도 절반을 넘어갑니다. 5년 쯤 이후에 성경 전체 장들을 한번 묵상한 이후에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또 다른 스터디 바이블 하나를 붙들고 한번 더 묵상하는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흥분이 되네요. 과연 앞으로 10년 동안 하나님께서 제 영혼에 제 삶에 어떤 일들을 더 일어나게 하실까요?

지금 이 글을 읽으시는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분이시라면, 도전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거대하고 엄청난 것이 아니라, 작은 것에서 부터 시작하시기를 권면 드립니다. 영적으로 선한 것이라면 무슨 형태이든 무슨 내용이든 좋습니다. 그리고 하루하루의 성실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들을 삶 속에서 이뤄가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2021년 8월 20일 금요일

이사야 51장 9-16절 설교 with "죽음의 수용소에서"

 

설교자에게 설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설교를 준비하고 할수록, 설교는 설교자 자신을 위한 일이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이전에, 말씀을 붙들고 자신의 삶과 신앙을 고민하는 것이 설교이며, 그 모든 고민의 결과를 선포하며 함께 나누는 것이 또한 설교입니다. 

설교 한편 한편이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모든 원고들을 완성하는 과정이 참 고되고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하지만, 그 설교를 통해서 제 자신을 더 하나님 앞에서 성찰하게 되고 성도의 삶의 의미를 발견해간다는 점에서 제 자신에게 저의 설교가 너무나 귀하게 느껴집니다. 설교야 말로, 목회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가장 큰 축복이 틀림 없습니다. 

최근에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으면서, 성경을 완전히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것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등장하는 거의 대부분의 내용이 성경적인 맥락과 닿아 있다는 것입니다.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고 본질적으로는 분명히 차이가 있지만, 그 방향성은 성경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과 거의 동일하다고 느꼈습니다. 책에 대한 간단한 리뷰는 아래 링크를 통해 읽으실 수 있습니다. 

* 책 어디까지 읽어 봤니?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 내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서
https://jungjinbu.blogspot.com/2021/08/blog-post_6.html

아래 설교는,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고 영향을 받은 설교입니다. 그리고 저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설교 중 한편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삶의 의미를 어떻게 발견할 것인가, 과연 성도의 궁극적인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맥락으로 준비된 설교입니다. 제가 이 설교를 통해 하나님 안에서 안식과 평안을 누리게 된 것 처럼,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그런 은혜를 함께 누릴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어제의 말씀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어제의 말씀 속에서는 예루살렘을 회복시키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 속에서는 그 일을 속히 이루어주시기를 간구하는 내용입니다.

오늘 말씀은 전체적으로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로는 9절에서 11절 까지 말씀인데 하나님을 깨우는 기도라고 소제목을 잡을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둘째로는12절에서 13절까지 말씀인데 여호와를 다시 한번 기억하라라고 소제목을 잡을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4절에서 16절까지 말씀인데 만군의 여호와가 행하실 것이다라고 소제목을 잡을 수 있겠습니다. 이 내용을 가지고함께 말씀 묵상하기를 원합니다.

오늘 말씀에 9절에 이렇게 간구하고 있습니다. 51:9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어제의 말씀 속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로하시고 그들을 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시지만 아마도 그 약속이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선지자가 느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는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주님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주님은 사람이 아니시기 때문에 주무신 적이 한 번도 없으시고 잠시라도 쉬면서 행동하지 않은 적도 없으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말씀 속에서 선지자의 간구는 주님께서 깨어나시고 주님께서 그분의 팔을 움직이시며 능력을 베풀어 달라고 그렇게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적극적인 간구는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확신하기 때문에 간구할 수 있다는 것을 9절과 10절을 통해서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9절 말씀에서 라합과 용이라는 것은 거대한 이집트 제국과 파라오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아무런 배경이나 이유 없이 여호와께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구원하시며 이집트 군사들을 무찌르셨던 바로 그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면서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건의 핵심이 10절에 홍해를 건넌 사건입니다. 10절의 말씀으로 기도하면서 바다의 깊은 물을 말리시고 길을 내셔서 그분의 백성을 걸어가게 하신 그 여호와께서 다시 한번 깨어나시기를 적극적으로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11절에서는 그런 여호와께서 구속하신 자들이 반드시 시온으로 돌아오게 될 것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12절 부터는 여호와께서 그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1:12 이르시되너 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 곧 나이니라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 같이 될 사람의 아들을 두려워하느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대답하실 때에나 곧 나이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치 앞에서 간절히 주님을 찾을 때에 깨소서 깨소서라고 반복한 것에 대해서 그대로 받아서 응답하시는 것처럼 여호와께서 적극적으로 내가 내가라고 응답하십니다. 12절에서 여호와께서는 자신이 누구이신가를 말씀하시면서 위로하는 자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12절 하반절과 13절에서는 여호와 자신과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비교하시면서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 것을 강조하십니다. 

그러면서 14절부터는 포로로 잡힌 그들이 반드시 풀릴 것과 그들을 풀어주실 여호와는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다시 한번 확신시켜 주십니다. 14절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1:14 결박된 포로가 속히 놓일 것이니 죽지도 아니할 것이요 구덩이로 내려가지도 아니할 것이며 그의 양식이 부족하지도 아니하리라 라고말씀하십니다

기적과 같은 말씀입니다. 남의 나라에 잡혀가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희망의 말씀을 주시고 있습니다. 포로 생활에서 속히 놓이게 될 것이며 양식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라는 여호와의 보호하심에 대한 약속의 말씀이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약속을 왜 믿어야만 하는가? 그것은 여호와의 능력이 무한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약속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을 오늘 말씀에서 여호와께서 친히 강조하시고 계십니다. 15절에 보니 그분은 바다를 휘저어서 파도를 일으키시는 분이신데 16절에 보니 바로 그분이 친히 그분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의 입에 넣었고 손으로 그늘을 만들어 그들을 보호하시며 그분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부르셨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오늘 말씀이 마무리가 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적용은 삶의 의미를 찾았는가? 아니면 잃어버렸는가?”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정말 이상하게 생각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13절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13절의 말씀은 9절 말씀과 대조가 됩니다. 9절에서 이사야는 어떻게 기도합니까?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지금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가 어떤 분이신지를 기억하면서 그분이 이미 행하신 일을 적극적으로 기억하면서 이미 그렇게 행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제는 그들을 도와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그런 이사야의 간구를 들으시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를 정확하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백성이 여호와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라는 신은 알고 여호와를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분이 과거에 무슨 일을 행하셨는가? 그러므로 현재와 미래에 그분이 어떤 일을 하실 수 있는가? 그것을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가 어떤 분이신가를 잊어버렸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그 결과로 인하여서 필연적으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위대하심을 잊었기 때문에 그 당연한 결과로서 그들을 핍박하는 제국들이 그들의 눈에 너무나 거대해 보이고 그래서 그 결과로 인하여서 이스라엘의 마음에 두려움이 몰려들어온다는 것을 분명히 지적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의 문맥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사람을 두려워하고 압제자를 두려워하는 것 그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진짜 문제는 여호와가 누구이신가를 잊어버린 것 그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최근에 읽고 있는 책 중 하나가 빅터 프랭클 박사가 쓴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입니다. 이 사람은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인데 그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 잡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수용소는 나치가 세운 강제 수용소 중에 가장 큰 수용소인데 1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살해당한 곳입니다

빅터 프랭클 박사는 죽음을 넘나드는 모든 끔찍한 경험들 속에서 결국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이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입니다. 책은 24개 언어로 번역이 되고 무려 1억 권이 팔린 책입니다. 빅터 프랭클 박사는 자신이 직접 수용소에 갇힌 상태에서 주변에 갇혀서 고통 받는 이들을 관찰하면서 중요한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인간의 정신 상태가 용기와 희망을 잃어버린다면 육체적으로 얼마나 약해지는가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특히 사람들이 많이 죽는 기간이 성탄절에서 새해로 넘어가는 시기였습니다. 그때에 사람들의 사망하는 원인은 가혹한 노동조건이나 식량 사정이 악화되거나 혹은 전염병 때문이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수감자들은 이번 성탄절에는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강한 희망을 가지지만 정작 그 시간이 다가와도 희망의 소식이 전혀 들리지 않을 때에 용기를 잃고 절망감에 사로잡히고 그리고 결국에는 저항력이 급격히 떨어져서 그 중에 많은 이들이 사망에 이른 것입니다. 이 책의 깊이를 한마디로 말하기는 쉽지 않지만 결국 빅터 플랭클 박사는 심리학적인 치료와 회복이라는 것은 한 사람이자신의 삶에 있어서 진정한 의미를 가질 때에 일어난다 라는 것을 책을 통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오늘 본문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단순히 기억하라 라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오늘의 말씀은 능력의 여호와를 기억하여 그분의 일하신 것들을 충분히 기억하여 그분이 여전히 현재에서 일하고 계심을 기억하며 적극적으로 그분을 찾으면서 그분을 통하여서 현실의 삶 속에서 삶의 의미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기억하라에서 시작하지만, 최종적인 결론은 하나님 안에서 삶의 희망과 의미를 찾는 것이 바로 오늘의 핵심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서 아무런 목적도 찾지 못하고 그냥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신은 우연히 태어났으며 자신은 그저 운명의 장난에 맡겨졌으며 어쩔 땐 좋은 일 어쩔 땐 나쁜 일 속에서 아무런 의미 없이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오늘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국제적인 정세의 압박 속에서 두려워하며 떨고 괴로워할 때에 그리고 나중에 바벨론의 포로 된 자들이 나라를 잃어버리고 타국에 끌려가서 가장 크게 절망하고 있을 때에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히 기억하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친히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시며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시는 그들의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것을 기억하여 현재의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하고 그분 안에서 현재의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하고 바로 그 과정을 통해서 고난과 두려움을 견뎌낼 수 있다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서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자신을 한번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어떤 분이시며 그분께서 현재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시는 지를 말씀을 통해 기억하기를 원삽니다. 로마서 324절에 말씀하십니다.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로마서 81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여기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된 자들이며 하나님의 전적이며 주권적인 능력과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하나님의 인 치심으로 말미암아 죽음도 극복하는 자들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자들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아마 우리의 현재의 삶 속에서 어려움이 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의 현재의 삶 속에서 실패하지 않는 사람도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세상 적으로 성공하는 것이나 순탄한 삶을 살아가는 것 그 것 자체에 우리의 의미와 희망을 둔다면 우리는 어쩌면 아우슈비츠에서 죽어가던 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세상적인 성공을 늘 누리지는 못하고 언제나 승리하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인생의 성공과 잘나가는 것 그 자체에 우리의 삶의 의미를 둔다면 우리가 몸은 자유로울지 모르지만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성공과 잘되는 것에 얽매여서 혹시라도 단 한번이라도 내가 실패하거나 나에게 고난이 찾아오면 완전히 나의 내면이 무너져 버리고 삶의 의미와 희망을 다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의미와 희망을 우리 자신에게 두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에 두라고 말씀하시며 그 하나님을 더욱 적극적으로 찾고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9절 말씀에서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라고 간절히 찾는 것은 헛된 거짓 신을 부르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살아계시며 지금도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그분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그를 통하여 복을 주시기로 작정하시면서 아브라함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 세상이 구원 받는 약속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큰 존재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맹세하시며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여호와께서는 지금 우리에게 약속하신 온전한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 자신의 독생자를 역사 가운데 기꺼이 내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619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6:19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영원한 중보자가 되셔서 비록 답답하고 괴로운 현실 속에서도 여전히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지금도 일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현재의 의미와 미래의 소망은 흔들릴 수 없이 확고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강조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려운 속에서도 실패 속에서나 자신의 좌절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그리스도 안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면 그리고 심지어 죽음조차 넘어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에 삶의 진정한 희망과 의미를 둔다면 우리는 어떤 고난도 능히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기는 오늘도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진정한 삶의 의미를 발견하기를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며 오직 그분을 사랑하며 그분과 힘께 동행하며 적극적으로 그분의 도움을 구하며 오직 그분 안에서 믿음의 길을 힘써 걸어가시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시면서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인생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분명히 기억하기 원합니다. 우주와 지구와 세상을 친히 만드신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나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자비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삶의 의미와 희망을 찾기 원합니다. 누가 뭐래도 여전히 나는 사랑 받는 사람이고 영원한 생명과 천국을 상속 받은 사람이고 죽음조차도 이겨낼 사람임을 기억하고 살아가도록 오늘도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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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7월 24일 토요일

책 어디까지 읽어봤니? (02) - 복음이 울다 (데이비드 플랫) / 목회의 참된 비전을 발견하다

 



제 나이대에 비슷한 분들이 모두 경험하는 것이겠지만, 제 마음에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항상 존재합니다. 더 이상 어린 아이나 청년이 아니며, 저의 삶에 대한 깊은 책임감과 무게를 짊어지고 가야 하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

저는 지금까지 무난하고 평탄한 삶을 살았습니다. 물론 저 역시 전혀 고생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인생의 우여곡절까지 겪지는 않았습니다. 아직 돈이 없어 식사를 거른적이 없고, 가정을 이루었고, 좋은 교회에서 부목사로 섬기고 있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은혜이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누구도 저에게 언제부터 담임 목회를 해야한다라고 말한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저에게 마음을 주신 것은, 그 날이 그렇게 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마치 미래를 미리 경험하는 사람처럼, 이미 제 핸드폰 안에 담임 목회를 시작하는 그 남은 날짜를 카운드다운하고 있습니다.

미래는 전혀 알 수 없지만, 마음에 강하게 드는 생각은 목회적인 방향을 정립하고, 그것을 제 자신에게 훈련시키며, 그것에 따라서 실천하는 것이 너무나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미 열심히 살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더 부지런히 움직이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삶을 돌이켜 보면, 모든 부분에서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고, 준비한 부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사용하셨습니다.

담임 목회로 나가기 전에, 몇권의 책을 반드시 마스터해야겠다 라고 결심하였습니다. 10여년 전에 미국 유학을 결정하기 이전에 정독하고 유학을 결심하였던 맥그라스의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 가장 신학적으로 목회를 잘 정립한 팀 캘러의 "센터처치" 그리고 좌파 경제학자로 부를 수 있는 장하성의 "한국 자본주의" 입니다. 

누군가에게는 독서가 지적인 유희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저에게는 어떤 절박함 속에서 나오는 처절한 몸부림입니다. 책을 읽어내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며, 또한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요즘에 더 독서를 열심히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리디 셀렉트 플렌을 실천하고 나서 다양한 책들을 계속 보고 있습니다. 중간에 슬럼프도 있었지만 다행히 포기하지 않고 한달에 몇권 이상은 읽어내고 있습니다. 이번에 리디 셀렉트 안에서 볼 수 있는 책이 데이비드 플랫 목사님의 "복음이 울다"가 포함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분의 이전 작품인 "래디컬"을 읽어보지 않았습니다. 이미 읽고 있는 책들도 버겁고, 또 제 마음 한켠에 기독교 고전을 더 중시하는 이유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전형적인 한국 사람이라, 어렵고 두꺼운 책만 책이라고 여기는 안 좋은 습성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책 중에 하나가 "리딩으로 리드하라" 입니다. 이지성씨의 "상위 0.1 퍼센트의 뇌에 접속하라"는 말을 주문처럼 외우고 있습니다. :) 한마디로 오래된 책 중에 시대의 비평을 이겨낸 인정 받은 좋은 책만 읽으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클럽을 실제로 성도님들과 하면서 배운 것은, 얇고 쉬운 책도 얼마든지 큰 영향력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 고전이 아니더라도, 동시대에 나온 책 중에도 읽을만한 좋은 책은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담임 목회를 준비하면서, 목회의 본질에 대해서 고민하고 탐구하고 집중하면서 "복음이 울다"라는 책을 읽게 된 것은, 진정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참된 복음의 길을 저에게 밝히 보여주셨습니다. 

이 책은 아주 단순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데이비드 플랫 목사님이 우연히 히말라야 산맥 지역으로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단지 8일간의 이 여행으로 통해 삶의 큰 변화의 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책은 그가 느꼈던 경험했던 그리고 말씀 안에서 고민하며 변화하고자 몸부림쳤던 모든 것을 담고 있습니다.

데이비드 목사님은 히말라야 산맥 지역에서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삶이 너무나 가난해서 모든 것이 망가져 버린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들을 돕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헌신하는 사람들과 공동체를 만납니다. 

그는 그 안에서 복음이 무엇인가 고민하며,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고민하고, 진정한 복음의 의미와 공동체의 소중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복음이 누군가의 삶 가운데 실현되고 실천되어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인생의 과제임을 깨닫게 됩니다. 


데이비드 목사님이 이 여행동안 얻은 가장 큰 유익은, 영적으로 그리고 육적으로 가난한 이들을 실제로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실제의 삶 속에서 들어가서 그들의 어려움을 직접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문제가 단순히 이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문제로 경험 되었다는 것입니다. 

데이비드 목사님은 자기 자신의 설교 속에서, 사람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도 그런 유익을 얻었습니다. 안락한 사무실 방 안에서 에어컨 아래에서 앉아 있으면 얼마나 편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도님들의 어려운 삶 속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대화하고 시간을 보내고 같이 기도하는 것만이, 진정으로 목회라는 것을 수도 없이 깨닫습니다. 

그런면에서, 제가 고민하고 적었던 수 많은 설교에 대한 고민과 방향들이, 자칫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을 저는 늘 경각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관심이 없는데, 성도에 대한 사랑이 없는데, 무슨 말씀 주해가 의미가 있고 또 그것을 통해 만들어낸 설교가 감동이 되겠습니까? 진실로 사랑이 없다면, nothing 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의 글과 설교의 완성은, 성도님들과의 사랑의 관계와 만남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저의 어머니에게 언제나 감사합니다. 평생을 여자 전도사님으로 성도들을 돌보고, 지금은 목사로 성도들을 돌보십니다. 얼마전에 그러시더군요, 가족들조차 포기해 버린 알콜 중독자에게 매일 찾아가, 밥을 먹도록 도와주고 격려하고 몇개월을 그렇게 했더니 사람이 많이 달라졌다고, 대화하는데 제 마음이 먹먹해서 눈물이 나서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저의 어머니를 닮아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언제나 강조합니다. 

이제 저에게는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주중에 심방을 계속 잡습니다. 어려운 분들을 더 찾아가려고 노력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진정한 목회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어려움 속에 목회자가 실제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 책이 참 좋았던 것은, 데이비드 목사님이 자신의 성경적인 삶과 목회의 비전을 결심하게 된 과정을 자연스럽게 적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더 높은 사랑"으로의 부르심을 깨닫습니다. 말 뿐인 사랑, 대면대면하고 미지근한 사랑, 기브 앤 테이크로 가장한 사랑, 그런 사랑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사랑에 대해서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조건 없는 사랑이고, 진정한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 뿐 아니라 온 가족이 바로 그런 사랑을 위해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진정으로 결심하게 됩니다. 

저 역시 요즘에 이런 부르심을 마음에 깊이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신비적인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제 마음 속에 부으시는 영적인 부담감으로 나타납니다. 저의 모든 목회적 섬김 가운데, 그저 피상적인 관계와 친절을 넘어서서, 참된 복음 속에서 공동체를 이루고, 그리고 그것을 위해 제 자신을 변화시켜 나가라는 부르심입니다. 지금까지도 말씀을 가까이 하려고 노력했지만, 이제는 또 다른 차원에서 말씀을 대하고 절실하게 붙들고 믿음으로 살아가라는 부르심입니다. 


데이비드 목사님은 이 책에서 자신이 경험하는 모든 현실 속에서 하나님께 고민하며 기도합니다. 자신의 삶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메달립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결심들을 가지고 자신의 사역의 방향을 바꾸고 실천합니다.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이 짧은 여행을 통해서 결론적으로 자신이 얼마나 많은 실천을 이루었는지를 정리해 놓았습니다.

저는 이 부분이 너무 마음에 듭니다. 기독교 세계관을 공부하면서 그리고 논문을 쓰면서 저는 지적인 담론에 그치는 세계관 운동의 한계를 절감했습니다. K.A. 스미스가 탁월하게 풀어낸 것 처럼, 인간은 "아는 것"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은 "사랑"을 통해 움직이는 존재이며, 그 사랑은 "실천과 반복"을 통해 만들어집니다.  

그러므로 결국 인간은 "끝없는 신앙에 대한 실천과 도전"이 그 사람을 빚어냅니다. 이것이 변화에 대한 전부입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라고 백번 듣는 것" 보다, "고통 받는 사람을 자발적으로 찾아가서 함께 식사하며 위로하는 한번의 경험"이 훨씬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변화한 이후에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 변화합니다. 

그래서 이 책은, 복음 안에 들어간 사람이 경험하는 모든 것이 실천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주님이 보시는 그 긍휼의 눈으로 아픈 이들을 경험하고, 그들을 참된 사랑으로 돕는 사람들을 만나며 그 공동체 안에서 변화하는 한 사람의 영적인 여정을 보여줍니다. 충분히 이론적이면서도 또 너무나 충실하게 실천적입니다. 이론과 실천을 평이한 언어로 감동적으로 엮어냈다는 점에서, 저는 이것보다 더 좋은 책은 보지 못했습니다. 

이 책을 다 읽고 생각한 것은, 담임 목회를 하게 되면 반드시 이 책을 모든 성도님들과 함께 읽고 나누어야겠다 라는 생각입니다. 책이 너무 쉬워서, 누구나 읽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렇게 결심한 것은, 적어도 제가 섬기는 교회는 복음으로 마음이 뜨거워진 사람들,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 아픔을 마음에 품고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는 사람들로 성장해 나가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본질이 아닌 것을 붙들고 삶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붙들고 삶을 의미있게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의 남은 삶과 목회 역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 처럼 복음을 통해 가장 어려운 이들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앞 날을, 복음이 이끄시는 방향으로 확고하게 인도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 "책 어디까지 읽어봤니?" 전체 글 모음
/ 당신을 변화시키기 위한 "가장 아름다운 길"
https://jungjinbu.blogspot.com/2023/03/blog-post_6.html

2021년 5월 15일 토요일

로고스 어디까지 써 봤니? - 상담 길잡이는 언제, 어떻게 쓰는 겁니까? / 거짓 친밀함을 넘어, 진정한 친밀함을 찾아서 (잠언 7장 10-27절 설교)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 말씀이 나의 골수를 쪼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참되게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그 말씀이 나의 영혼의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와서 성찰하며 살피며 꾸짖으며, 나를 돌이키는 그 기적과 같은 역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영혼 속에서 일어나는 가장 놀라운 변화이며, 진정으로 성령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요즘에 그런 경험을 많이 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말씀을 더 사모하게 하시고, 그 말씀 안에서 저를 성찰하게 하시는 그런 경험입니다. 

특별히 퓨전 설교를 추구하면서 "적용점을 더 정확하게 만들어내기 위해서" 고민하다보니, 그러한 경험들을 더 하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말씀이 추상적인 맥락에 머물지 않고, 정확하게 무엇을 목적으로하는가에 더욱 마음을 쏟는 것은 비단 성도님들 뿐 아니라 설교자 자신에게도 참으로 유익한 일입니다. 

잠언 7장에서 마치 무엇엔가 홀린 것 처럼, 음란한 여인을 찾아가는 이 청년의 모습이 낯설게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우리의 죄로 망가진 본능 속에서 친밀함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채워지지 않는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그런 나의 공허함을 채워줄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 환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런 헛된 시도들을 통해서, 더 지독한 죽음과 같은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본문을 묵상하면서, 이 청년이 가진 문제가 "친밀감"의 문제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물론 이 청년이 성적인 중독의 문제가 있는지는 분명하게 말하고 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악한 여인은 그러한 거짓된 친밀감을 무기로 삼고 청년을 지배해 들어가는 것이 분명히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위에서 인용한 "거짓된 친밀감"이라는 책을 읽고 참고하면서 설교를 준비하였습니다. 비록 이 책이 완전하게 이 본문과 연결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거짓된 친밀감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고 본문을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좋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설교를 준비하면서 얻은 또 하나의 도움은, 로고스 프로그램의 "상담 길잡이" 입니다. 로고스 9으로 업그레이드 되면서, "실버 패키지 이상"에는 상담 길잡이라는 도구가 있습니다. 

이 도구는, 성도님들이 경험하는 다양한 상담의 주제들에 대해서 레퍼런스와 연결해서 보여주는 효과적인 도구입니다. 저는 이 도구에 대한 소개를 보자마자 사야겠다고 바로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설교 안에서의 많은 부분이 상담의 조언을 포함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평소에 잘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본문을 좀더 general 하게 이해하고 적용하는데 익숙하다보니, 또 너무 적용을 깊게 하는 것이 조심스럽다 보니 그랬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특별히 이번 설교에서는, "성 중독"이라는 검색어로 도움을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상담 길잡이" 도구를 실제로 어떻게 사용하면 좋을까요? 로고스는 본인이 구입한 자료와 패키지에 따라서 상당히 다른 결과들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아래 내용은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저의 경우는 상담 길잡이 도구가 기본적으로 두가지 자료와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Baker Encyclopedia of Psychology and Counseling, 2nd ed.이고, 또 다른 하나는 "The Quick-Reference Guide" 시리즈입니다. 

Baker 자료는  과거에 구입한 패키지에 포함되어 있었고, Quick Reference 자료는 한글 로고스 9으로 구입할 때에 포함된 것입니다. 저는 Quick Reference를 굉장히 좋게 생각하고 의도적으로 로고스 9 골드를 구입하였습니다.

그리고 현재 저의 검색 결과에서 우선적으로 뜨는 자료는 Quick Reference 입니다. 아마 로고스가 자동으로 그렇게 설정을 해 주는 것 같습니다. 

* Baker Encyclopedia of Psychology and Counseling, 2nd ed.

* The Quick-Reference Counseling Guide Collection (7 vols.)
기억하실 것은, 상담 길잡이 도구 자체는 "실버 패키지 이상"에 포함되어 있지만, The Quick-Reference Guide 시리즈는 "골드 패키지 이상"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저 같은 경우는 Logos 9 골드 한글 버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담 길잡이 도구를 통해서, 이 자료를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본인이 원하시면 얼마든지 이 시리즈만 구입해서 따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무료 버전인 "베이직 버전"을 사용하고 있다면, 이 시리즈를 사서 그냥 책의 자체 인덱스를 통해서 항목을 찾아들어가서 읽어보면 됩니다. 

그러나 만약 본인이 로고스의 상위 패키지를 가지고 있다면, 굉장히 편리하게 연결을 해줍니다. 로고스가 이미 주제별로 다 분류를 해 놓았기 때문에, 본인이 한글 패키지를 사용하고 있다면 한글로 검색할 수 있다는 편리함이 큽니다. 이것이 로고스의 힘이겠죠. 

저는 상담 전공이 아니기 때문에, 이 책의 학문적인 가치나 그 탁월함에 대해서 직접 논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다만, 일단 이 시리즈의 주요 저자인 Tim Clinton 이라는 분이, 미국 기독교 상담 협회의 president라는 것이 굉장히 신뢰감을 줍니다. 상담 분야에서, 그리고 성도의 평생 교육이라는 면에서 계속적으로 헌신하고 있는 훌륭한 분이시네요. 
http://www.timclinton.com/about/

그리고 이 시리즈의 책들은 Tim Clinton이 모든 책의 기본 저자이고, 추가로 각 영역에서 전문가들을 초빙하여서 공동 저작으로 만들어냈습니다.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각 영역의 전문가를 통해 보완한 것으로 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저자가 인정 받는 사람이고 그리고 오랜 기간 동안 훌륭하게 활동했던 분이라면, 충분히 신뢰할 만한 자료라고 생각이 됩니다. 항상 생각하는 것은, "세상은 넓고 귀하고 훌륭한 분은 정말 많다" 라는 것입니다. :)

그리고 이 자료는 로고스에서 이번에 새로운 버전으로 업데이트 하면서 야심차게 넣은 기능과 자료이기 때문에, 적어도 인정받는 자료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저는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족하지만 제 관점에서는 내용이 매우 훌륭하고 적절하게 상담의 조언을 잘 제시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아래 그림에서 보시는 것 처럼, 왼쪽 창에서 상담 길잡이의 검색창에 "상담의 주제"를 넣으면, 상담 주제 섹션에서 연결된 자료들을 알아서 띄워줍니다. 


상담 길잡이에서는 기본적으로, "상담 주제", "관련된 상담 주제", "성경 구절"이라는 섹션으로 내용을 분류해서 보여줍니다. 일단 저는 "상담 주제" 안에서 요약 내용을 먼저 읽어봅니다. 만약 본인이 필요하다면, "관련된 상담 주제"를 통해서 확장해서 공부할 수 있겠네요.

이번에 저의 경우에는 "상담 주제"라는 섹션 아래에 "성 중독"이라는 주제로 Quick Reference Guide를 자동으로 띄워주네요. 그리고 "더 알아보기"를 클릭하면 그 해당하는 리소스를 연결해 줍니다. 위 그림은 제 랩탑에서 상담 길잡이 기능을 띄우고, 그것과 연결된 레퍼런스를 클릭한 화면입니다. 그리고 아래는 그 내용의 일부입니다.

All things are lawful for me, but all things are not helpful. All things are lawful for me, but I will not be brought under the power of any.

1 Corinthians 6:12 NKJV

God gave people all things to enjoy, but Satan works tirelessly to take God’s blessings and twist them into evil. Believers are allowed to enjoy many things, as long as Scripture does not forbid them. But they must never allow themselves to be controlled or “brought under the power of any.”

Therefore put to death your members which are on the earth: fornication, uncleanness, passion, evil desire, and covetousness, which is idolatry. Because of these things the wrath of God is coming upon the sons of disobedience.

Colossians 3:5–6 NKJV

These verses describe some of those sinful desires that believers should “put to death.” Sexual sins, evil desires, and covetousness (a form of idolatry) should have no place in a believer’s heart. It takes a conscious daily decision to say no to these sinful temptations and rely on the Holy Spirit’s power to overcome them.

Tim Clinton and Mark Laaser, The Quick-Reference Guide to Sexuality and Relationship Counseling (Grand Rapids, MI: Baker Books, 2010), 155.

저의 이번 설교에서는, 특별히 위의 상담 길잡이의 내용을 통해서 이런 유익을 얻었습니다.  마귀의 유혹이라는 것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그 바운더리를 벗어나서 모든 것을 즐기도록 하는 것이며, 그리고 성도의 참된 길은 모든 선택 속에서 성령님을 의지하여야 한다라는 점에서 통찰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위의 책과 상담 길잡이를 통해서 준비한 최종 설교는 아래 영상을 통해 들으실 수 있습니다. 

 
성경을 종합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성경이 최종적인 타겟으로 삼는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도,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늘 생각하는 것은, 목회자인 저 자신도, 제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아직 많이 모르는 것 같습니다. 하물며 나 자신도 나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데, 다양한 컨텍스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성도님들을 어떻게 잘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항상 설교가 조심스럽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부지런히 평생 공부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가급적 새롭게 책을 읽어보고, 또 로고스의 다양한 기능들을 사용해서 효율적으로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혹시 로고스의 상위 패키지를 사용하고 계시다면, 필요하다고 생각하실 때에, 위의 기능을 한번 사용해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

* "로고스 성경 프로그램" 전체 글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11/blog-post.html

2019년 6월 18일 화요일

골든아워 - 이국종 / 목사로서의 삶과 다짐



괴이한 일이었다. 우리는 '의료진'으로서 최선을 다해 환자를 살려야 했고 '조직원'으로서 병원의 이윤을 도모해야 했으나, 대한민국 의료 시스템상 '외상외과'에 적을 두고서는 그 둘 모두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나를 향한 따가운 눈초리와 뒷말은 여전히 무성했다. 팀원들이 있어서 혼자 버티던 날보다는 나았으나 여전히 무참한 날들이었다. 팀원들마저 나와 마찬가지로 허리를 굽히고 사정하며 버텼다. 일상이 핏물과 비난의 파도 속에 있었다...

한 번의 수술로 기적같이 환자를 살려내고 보호자들의 찬사를 받는 모습은 영화에서나 존재한다. 실상은 답답하고 지루한 긴 호흡으로 환자를 살펴야 하고, 그런 중에 더없이 비루한 현실까지 감내해야 하는 것이 외상외과의 일이다...

사회가 의사에게 기대하는 바는 급격히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의사가 방대한 의학지식을 갖춰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그것이 남의 생사에 깊숙이 관여하는 자로서 갖춰야 할 최소한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속에서 자주 화가 치밀었다. 아무리 피곤해도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새벽녘에 간신히 잠들 것 같으면 여지없이 악몽에 시달렸다. 꿈을 꾸며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해댔다. 그때마다 벽을 치거나 침대 난간을 후려치다 통증에 깼다. 부딪혀 얼얼한 팔과 다리를 붙들고 어둠 속에서 멀거니 앉아 있는 때가 많았다. 윤태일이 내 증상을 듣고는 렘 수면 행동장애라고 했고, 이런 증상을 보이는 환자의 3분의 2가 치매로 발전한다며 걱정했다. 치매라...

육군 보병사단의 대위라고 했다. 선한 인상에 눈빛이 맑았다. 내가 여태까지 살면서 보아온 어떤 사람과도 달랐다. 목소리는 크지 않아도 울림이 있어 그 음성이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정경원을 보면서 욕심이 동했다. 이런 사람과 같이 일하면 좋을 것 같았으나 그런 마음을 애써 눌렀다. 좋은 사람은 더 좋은 일을 해야 한다. 정경원에게 그간의 내 경험과 암흑 같은 미래에 대해 있는 그대로 말해주었다. 그는 조용히 들었다. 내가 두서없는 말들을 끝냈을 때 얼마간 침묵이 흘렀다. 묵묵히 듣고만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교수님, 저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그거면 됩니다. 큰 욕심 없습니다." 

예상 밖의 말이었다. 나는 내 업을 부끄럽지 않게 하고 싶을 뿐 내가 하는 일에 '소명' 이나 '사명' 같은 단어를 대입해 보지 않았다. 무엇보다 내게 월급을 주는 것은 신이 아니라 병원이다. 신의 존재는 나에게 멀었고 그리스도적인 삶이 외상외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정경원의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곧은 심지는 충분히 느껴졌다. 그럴수록 그를 이 사지에 들이고 싶지 않았다. 거듭 설득했으나 그의 답은 하나였다. 

"저는 외상외과 수련을 마치고 난 뒤 직장에 대한 보장이나 윤택한 삶을 바라는 건 아닙니다. 어디에서든 사람을 살리는 외과 의사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심도 있는 수련을 받기를 바랍니다." 

나는 말없이 정경원을 보았다. 이런 사람이라면 이 수렁을 함께 헤쳐 나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솟았다...

그는 수술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겸손하고 성실했다. 환자를 수술하고 진료하는 시간 외에는 공부에 힘을 쏟았다. 정경원의 책상에는 언제나 반쯤 열린 교과서와 주요 논문집들이 놓여 있었고 한쪽에는 늘 성경이 독서대에 반듯이 펼쳐 있었다. 

내가 정경원의 거처조차 마련해주지 못했을 때 김지영이 나섰다. 중환자실 옆 회의실 한쪽에 칸막이를 설치하고 2층 침대와 책상을 들였다. 회의실에는 화장실은 물론 세면대 조차 없었으나 정경원은 묵묵히 버텼다. 이른 새벽에 그 앞을 지날 때면 정경원의 나지막한 통성 기도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하루도 저의 부족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뜻이 환자들에게 잘 전달 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 주시고, 제가 하는 일이 옳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보살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냥 할 수 있는 데까지..., 나는 늘 내가 어디까지 해나가야 할지를 생각했다. 어디로, 어디까지 가야 하는가, 스스로 묻고 또 물었다. 답이 없는 물음 끝에 정경원이 서 있었다. 하는 데까지 한다. 가는 데까지 간다. 나는 정경원이 서 있는 한 버텨갈 것이다. '정경원이 중증외상 의료 시스템을 이끌고 나가는 때가 오면' 이라는 생각을 나는 결국 버리지 못했다. 그때를 위해서 하는 데까지는 해보아야 한다. 정경원이 나아갈 수 있는 길까지는 가야 한다. 거기가 나의 종착지가 될 것이다.

- 골든 아워 중에서


이국종 교수는 크리스천이 아니지만, 누구보다 더 생명을 소중히 여깁니다. 그는 생명이 꺼져가는 마지막 그 자리에서, 다시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던지는 사람입니다. 또한 이 책은 단순히 외상외과 교수로서 생명을 살리는 이야기 일 뿐 아니라, 가장 숭고한 가치의 일을 추구해 나갈 때에, 사회적으로 혹은 자신이 속한 조직의 지원이 뒷받침 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얼마나 큰 어려움이 있으며, 또 그 어려움 속에서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가를 보여주는 인생의 청사진과 같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책의 거의 대부분의 내용은, 삶을 포기하고 싶다는 이교수의 독백으로 채워져있습니다. 타인의 생명을 자신의 목숨을 걸고 살려내지만, 그러나 현실이 너무 힘든 이교수는 하루하루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람을 살릴수록 병원에 적자가 쌓여가고, 자신을 둘러싼 소문들은 더 커져갑니다. 바르게 산다는 것이 이교수에게 결코 좋은 결과를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계속 이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결국 이국종 교수는 지나친 업무로 인하여 한쪽 눈까지 거의 실명하게 됩니다. 그가 생각하는 이상은 너무나 아름답고 또 높지만, 현실은 그것을 뒷받침 해 주지 못합니다. 현실은 지나치게 처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만신창이가 되어서까지, 끝까지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그와 함께 하는 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 정경원이라는 의사는, 이국종 교수의 끔찍한 병원의 현실 안으로 들어오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는 크리스천으로서 소명을 가지고 그 일을 해나갑니다. 이국종 교수에게 그는 참으로 신비로운 사람으로 비춰집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책은, 앞으로 자신의 일을 정경원이 해내리라는 이교수의 큰 기대감으로 끝을 맺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저의 현실을 바라봅니다. 아마 누구나 그런 것 처럼, 현실은 생각보다 너무 녹녹하지 않고, 힘이 들고, 이상을 붙들고 가기에는 암흑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어떤 조직이라도 완벽한 곳은 없기 때문에, 지원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국종 교수의 인생을 아주 가까이 들여다 보면서, 조직의 부족함과 현실의 절망은 모두가 경험하는 지극히 일반적인 현실이며, 이상을 추구하는 것이 비록 무모해 보이더라도, 그것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신을 다시 한번 가지게 되었습니다. 

목사는 "영혼의 의사"라고 부릅니다. 그 말을 생각할 때 마다, 참으로 스스로 부끄럽습니다. 목사 안수 받은 것이 10년이 되어가는데, 저는 한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 얼만큼 발전하고 또 충분히 준비되어 있는가? 그리고 이국종 교수만큼 가장 치열하게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해서 제 자신을 돌이켜 봅니다. 좋은 신학책도 많이 있지만, 이 책을 읽는 것이, 평생을 목사로 섬기는데 있어서 다른 어떤 책 보다 큰 유익을 주리라 생각합니다. 

책의 한마디 한마디가 마음을 찌르고, 또 여러번 벅차서 눈물을 훔칩니다. 이제 저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요? 정경원 교수의 기도처럼, "오늘 하루도 제가 하는 일이 옳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그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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