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는 딱 정해진 시간에 일하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설교, 행정, 심방, 교육 등등을 모두 한번에 소화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새벽 설교를 일과 시간에 준비하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많은 밤은 설교 준비로 사용합니다.
그래서 목회는 효율의 극대화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교회의 제 방에도 일할 수 있는 최선의 셋팅을 갖춰 놓았지만, 집에도 최소한의 셋팅을 마련해 놓았습니다. 2019년형 중급형 맥북과 외장 모니터 하나를 연결해 놓고, 필요할 때에 바로 앉아서 일할 수 있도록 마련해 놓았습니다.
원래 제 책상은 아이들 놀이방에 있었지만, 어제 침실 구석으로 책상을 옮겼습니다. 아이들의 놀이방에서 혼돈 속에서 준비하던 것보다, 침실이지만 조용한 공간에서 준비하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공간과 분위기 자체가 썩 마음에 들어서 주일 설교 준비를 시작했는데 마음이 한결 가볍습니다.
한편으로는 참 감사한 마음입니다. 할 일이 많은 것이 쉽지는 않지만, 마음껏 일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졌다는 점에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능력의 적은 부분을 사용해야만 하는 억압된 환경 보다는,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그리고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환경 속에 있는 것이 정서적으로는 훨씬 낫습니다.
책상에 앉아 꽤 몇시간 성경을 묵상하는데 마음이 행복합니다. 바로 옆에 침대에 아내와 아이들이 잠깐 놀러 와서 즐거운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 행복이 가까운 곳에 있어서 참 감사하고, 또 가족이 있어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남편으로 또 아빠로 저의 역할에 최선을 다할 수 있어서 그것도 감사합니다.
조촐하지만 충분한 환경을 주셨으니 좀 더 부지런해져야겠습니다. 저의 목표는 언제나,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하루를 가늠해 봅니다. 다가올 모든 미래를 염두에 두고 오늘 제가 해야 할 일들을 잘 완수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가장 효율적으로 해내는 것, 이 두가지를 아침마다 결심합니다.
최대한 집중하기 위해서 가벼운 음악을 틀어 놓습니다. 문제는 집중도를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빠르거나 강한 음악은 잠시 분위기를 업 시키지만 정작 일을 꾸준하게 하는데는 도움이 안 됩니다. 그렇다고 너무 느린 피아노 음악은 오히려 정신을 심하게 이완시켜서 되려 집중력을 떨어트립니다.
여러 시도를 해 보았습니다. 당연히 찬양을 많이 듣지만, 일하면서 찬양을 들으면 찬양 자체에 너무 집중이 되어서 오히려 일의 효율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Smooth Jazz 장르 음악들을 모아 보았습니다. 대부분이 밝고 부드럽고 서정적인 곡들입니다. 꽤 정성스럽게 모았는데 들으면서 일을 하니 거의 하루 종일 집중력을 잃지 않고 일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저의 리스트를 함께 나눕니다.
누군가의 마음에 행복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이 삶의 가장 큰 의미입니다. 진실한 그 행복은, 우리의 마음에 있는 아픔과 슬픔, 분노와 질투, 그리고 절망과 낙심을 몰아내기 때문입니다.
우연히 만난 청년들입니다. 잠시 한번의 만남으로 스쳐지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해맑은 얼굴들을 보고 있자니 제 마음이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뜨겁고 아팠습니다. 가장 바쁜 시점에 처음 만난 청년들이 자꾸 제 동생들처럼 느껴졌습니다.
'북클럽을 해보는게 어떨까요?' 처음 만난 목사가 갑자기 하는 이야기에, 미친 사람이라고 충분히 생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몇명이 함께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나중에 말하더군요, 북클럽이 뭔지는 몰랐지만 열정적으로 말하는 저의 모습에 끌렸다고, 사실 그날 목이 다 쉬었습니다.
가장 바쁜 시기에 매주 여덞시간 이상을 사용했습니다. 한번의 모임이 그렇게 좋았습니다. 가장 세속적인 자기계발서인 악인론을 가지고 청년들과 진지하게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마치 기적처럼 청년들의 변화를 제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
한국에서 들어온 몇명과 만나기로 했습니다. 저의 모든 일정 중에서 가장 먼저 약속을 잡았습니다. 그만큼 너무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만나서 식사를 했습니다. 함께 커피를 마셨습니다. 이야기 나누는데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영원에 몸을 담근 것 처럼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사랑하는 청년들이 바로 저의 눈 앞에 앉아 있는 것이 실감 나지 않았습니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를 통해, 그리고 우리의 모임을 통해 몰라볼 만큼 변한 모습에 마음이 벅찼습니다. '그래, 이건 꿈을 꾸는 걸꺼야' 우리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웃음이 있었습니다. 삶을 바라보는 태도에 대해서 그리고 학업에 대해서 미래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돌아보는 부분에서 처음 만났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아졌습니다.
정말 정말 헤어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한달에 한번이라도 이렇게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눈물이 났지만 참았습니다. 악수하면서 헤어지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서, 이 기쁨과 감사, 그리고 아쉬움과 다짐을 마음에 담아 둡니다.
물론 영원한 끝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만남은 이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만남이 기적처럼 이루어졌듯이, 비록 당장은 직접 얼굴을 마주볼 수 없어도, 하나님께서 선하게 인도하실 것입니다. 저는 더 좋은 모임으로 준비해서 이들과 함께할 것입니다.
한 청년이 노래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RIIZE의 Love 119입니다. 노래가 참 좋았습니다. 'Nothing but I want it all with you' 이들과 함께 하기로 한 것은, 제 인생에 가장 탁월한 선택입니다. 다시 돌아간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에게 소중한 이들의 삶이 더 풍성해지기를, 그리고 우리의 긴 여정의 한걸음 한걸음이 행복으로 가득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기도합니다.
정말 좋아하는 두분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좋았습니다. 아, 나의 형제여. 굉장히 두근거렸습니다. 사실 제 마음에 제 이야기를 실컷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분의 지친 표정을 보니, 적어도 오늘 만큼은 제가 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분간 오래 뵙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중년이 된다는 것은, 함부러 저의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의 기회가 그렇게 소중합니다. 마음껏 이야기하고 싶을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알았습니다. 오히려 제가 정말 좋아하는 누군가에게는, 제가 그렇게도 경청의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누군가에게는, 잠깐이라도, 작은 위로가 되고 싶었습니다.
두분의 이야기를 힘써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희망과 슬픔의 발라드와 같았습니다. 포기하고 싶지만, 포기할 수 없는 삶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그리고 내가 당신을 듣고 있다고 온 몸으로 표현하며 들었습니다. 손을 꼭 잡고, 허그를 했습니다. 따뜻하고 좋았습니다. 연약한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것은 관계입니다.
헤어지는 마지막이 너무 아쉬웠습니다. 언젠가 다시 십년 후에 뵐 때에, 더 좋은 모습으로 만나자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더 좋은 모습,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저의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제 마음 안에 있는 불안과 아픔과 갈등은 조금 감추었지만, 어쩌면 다시 만날 그 때에도 다시 들을 것 같습니다. 그 때에는 더 넓은 마음으로, 그리고 더 큰 사랑으로.
필라델피아에서 처음에 뵙고 안부를 나누면서 제가 받은 인상은 아름다우시고, 친절하시고, 위트가 있으시고, 참 따뜻한 분이다 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때 엄마를 보기 위해서 진우 형제가 방문했을 때에 처음으로 진우 형제도 만났습니다.
그 당시만해도 제가 시카고로 온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던 시절인데 헤브론 교회 당회에서 교회를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도착해서 보니 이명은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계속 교제하고 함께 기도하면서 지금까지 시간을 보냈습니다.
여기 계시는 분들이 모두 아시는 것처럼, 이명은 집사님은 오랫동안 투병 생활을 하셨지만 불굴의 의지로 그 시간들을 이겨내셨습니다. 헤브론 교회에서 사역을 하면서 이명은 집사님의 칭찬을 정말 많이 들었고 옆에서 지켜보면서 존경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고인께서는 한글 학교 교사로 그리고 교장으로 탁월하게 섬기셨습니다. 두 자녀들을 너무나 훌륭하게 아름답게 키우셨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많은 성도님들에게 큰 사랑을 나눠주셨습니다. 탁월한 예술가로서 인간과 자연을 예술 작품으로 남기셨습니다. 기적과 같이 생명을 연장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그 시간을 가장 의미있게 채우신 너무나 아름다우신 분이십니다.
이명은 집사님이 몸이 점점 약해지시는 것을 보면서, 또 가장 강한 항암제를 쓰시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집사님께서 그래도 활동이 가능하실 때에 댁으로 찾아갔습니다. 몇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면서 제 삶에 기억에 남을 만한 최고로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집사님은 본인이 그렇게 아픈 중에도 저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귀기울여 들어 주셨습니다. 저도 집사님의 많은 이야기들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뵜을 때에도 집사님의 죽음이나 장례식 이야기는 전혀 나누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서로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저 역시 굳이 제가 그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잠시 든 생각은, 혹시라도 제가 장례를 맡아야 하면 어떻게 하나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많이 염려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유가족과 조문객들이 그러하신 것 처럼 절대로 그런 날이 오지 않기를 저 역시 너무나 간절히 바랬기 때문입니다.
집사님과의 대화들을 기억하면서 오늘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집사님과 나눈 대화의 대부분은 신앙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집사님께서 어떻게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는지, 고인의 시아버지 되시는 고 옥한음 목사님의 설교가 본인에게 얼마나 큰 은혜가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본인이 고통 중에도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목회자인 저의 눈에도 참으로 놀랍고 감격적이었던 것은, 이명은 집사님의 육신은 눈에 띄게 연약해져 갔지만, 그 내면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그 믿음과 사랑이라는 것은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깊어졌다는 것입니다.
이찬수 목사님께서 주일에 헤브론 교회에서 설교하실 때에, 하나님과의 친밀함 Intimacy 에 대해서 강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명은 집사님과 대화하면서 느낀 것이 정확하게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본인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어떻게 기도하는 지 또 무슨 내용으로 기도하시는지 들려주시는데, 마치 딸이 아빠에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렇게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이명은 집사님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아버지 하나님의 신실한 딸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인으로 모신 분이심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하시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6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만드신 신이며 절대자이십니다. 세상은 존재하지 않던 아무것도 없던 그 때에 그분은 말씀으로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며 빛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은 가장 완벽한 곳이었지만 인간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그분에게 대적하여서 결국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인간이 죄인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 죄 때문에 모든 인간은 영적으로 병들었고, 그 마음은 마치 어두움이 가득한 것처럼 처음부터 하나님을 미워하고 대적하고 싫어하는 상태로 이 땅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저를 포함하여,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동일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지 못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며 죄를 짓는 죄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놀라운 말씀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어두움 속에 찬란한 빛이 직접 찾아오는 것입니다. 마치 태초에 하나님이 세상 속에 빛을 만드신 것처럼,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찾아오시고 우리의 영혼을 살리시고 생명을 주시고 밝히심으로, 우리의 병들고 어두운 영혼을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죄인에게 비치는 하나님의 빛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의 독생자 아들이시며, 오직 그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이 나타나고, 오직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는 그 믿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7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야 말로, 성도의 삶의 본질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가 건강하고 고난이 없고 형통한 삶을 살기를 원하지만, 그러나 모든 인간은 마치 질그릇과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명은 집사님처럼 강철과 같은 의지를 가진 분조차도, 결국에는 육신이 연약하여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과연 하나님의 자녀는 무엇이 다른가?" 라고 우리에게 질문하시며 "그는 보배를 가진자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의미인가? 우리의 영혼 안에 가장 가치 있는 보물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존귀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을 위하여 친히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동시에 인간으로오셔서, 우리가 저지른 모든 죄의 댓가를 홀로 감당하셨습니다. 그 어떤 죄도 없으신 순결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서 십자가에서 가장 잔인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는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자신이야 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과 같은 절대자이심을, 수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고 역사 가운데 증명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사실을 믿는 이들에게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그 사람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분을 믿는 자와 영적으로 연합하시며, 그에게 영적인 생명과 능력을 공급하시며, 죽음을 이기는 영원한 생명이 되시며, 그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명은 집사님의 삶의 마지막 모습은 너무나 성경적이고 또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고인은 자신의 육체가 연약해지고 이 땅에서 생명이 거의 끝나가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붙들고 사랑하였고, 자신에게 구원을 베푸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확신하며 의지하는 분이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너무나 슬프고 마음이 힘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에 가장 큰 위로가 되는 것은, 고인이야 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담은 질그릇"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약속하시는대로, 집사님께서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안겨 하늘 아버지의 나라로 들어갔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고인께서 누리셨던 그 놀라운 영광의 빛이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의 마음에도 가득하기를 원합니다. 오늘의 예배의 이 거룩한 시간이 우리의 영적인 모든 어두움이 물러가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영광스러운 빛이 우리의 영혼 깊은 곳으로 들어오고 하나님 앞에 범죄한 모든 죄들을 돌이키며 용서 받고 고인이 그러신 것처럼 하나님의 복된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시는 구원의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간절히 바라기는, 고인이 평생동안 그러하셨던 것처럼, 내 안에 모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가까이하시고, 보배이신 그분을 가장 소중히 여기시며, 사랑하며 그분과 동행하시며 믿음의 길을 걸어가시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또 조문객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퇴근하고 나면, 두 아들의 하루를 아내가 이야기 해 줍니다. 듣고 있으면 재미있습니다. 저의 어렸을 적 추억도 기억이 나고, 마냥 행복한 마음이 듭니다. 그저 아이들이 자라고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합니다.
막내가 친하게 지내는 친구가 학교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학교가 끝나면 막내가 놀이터에서 기다린다고 하더군요. 처음에는 의아했습니다. 왜 기다리지? 막내의 친구는 같은 반이고, 인도에서 온 작은 여자 어린이입니다. 아내가 정말 작고 귀엽다고 말하면서 웃더군요. 제가 농담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여보,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됬는데?" :)
학교에 아이들을 픽업하러 아내와 같이 나갔습니다. 역시나 막내는, 오늘도 발걸음을 돌리지 못하고 또 놀이터에서 기다리더군요. 친구가 나온다는 쪽에서 잠시도 눈을 때지 못하고 한참을 기다립니다. 한 곳만 바라보는 막내를 보면서, 괜시리 제 마음이 두근거렸습니다. 십오분쯤 지났을까요? 막내가 한 여자 아이를 보고서 너무 반가워하면서 달려가더군요, 사실은 서로가 서로를 마주보면서 달렸습니다. 그리고 꼭 끌어 안았습니다.
약간 당황하기는 했습니다. 그렇게까지 친밀한 관계인 것은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 또 한편으로는 마음이 참 따뜻해졌습니다. 우리 막내는 학교 가는 것이 참 행복하겠구나.. 기다리고 싶은 누군가가 있다면, 매일 만나고 싶은 누군가가 있다면, 이미 막내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해본 사람은, 하나님을 깊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고 그 사람을 위해서 노력해본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향하여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질이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한 남자로서 펼쳐질 제 아들들의 삶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지만 웬지 기대가 됩니다. 저의 아들들 역시, 진심으로 기다리는 누군가를 만날 것이고, 또 아름다운 관계를 만들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깊고 순수한 사랑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많이 아플 수도 있는 그 긴 시간들이, 사랑하는 아이들의 마음과 인격을 형성하고,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는 시간이 되기를 아빠로서 바랄 뿐입니다. :)
저는 음악을 듣는 것을 정말 좋아합니다. 물론, 실제로 만드는 것과 듣는 것은 천지 차이입니다. 듣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들으면서 보컬에 감탄하고, 편곡에 감탄하고, 믹싱에 감탄합니다. 탁월한 분들의 음악을 듣는 것 그 자체가 기쁨입니다.
음악을 듣다 보면, 음악의 크기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스럽게 깨닫습니다. 음악의 감동은 다이나믹에서 나옵니다. 작은 곳은 작아야 하고, 큰 곳은 커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항상 그런 것은 아닌 듯 합니다. 어떤 음악에서는 처음부터 크게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감동이 있습니다. 참 흥미로운 것은, 작다고 다 좋은 것이 아니고, 크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나가수에서 조규찬님이 부르셨던 "이별이란 없는거야"의 경우에는, 정말 처음이 작게 시작합니다. 제가 유투브 버전을 찾아보니 그렇게 표시가 나지 않는데 spotify로 앨범 버전을 들어보면 그 차이가 정말 큽니다. 그런데 마지막 후렴은 폭발적인 느낌으로 믹싱이 되어있습니다. 다이나믹을 작게에서 크게로 마쳐서 정말 엄청난 곡으로 승화시켰습니다. 감동으로 손 꼽을만한 대곡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발라드이지만, 처음부터 정말 크게 시작하는 곡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최근에 들은 곡 중에서 존박님의 "밤새 서로 미루다"는 처음부터 보컬의 존재감이 굉장히 큽니다. 처음 들을 때에 소리가 너무 커서 깜짝 놀랐습니다.
아무래도 큰 소리가 귀를 사로잡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실 성량 자체는 적어도 벌스 부분에서는 조규찬님과 존박님이 큰 차이가 없으리라 생각되지만, 그러나 실제 앨범의 볼륨이라는 측면에서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저는 개인적으로 처음이 너무 큰게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긴 했습니다. 그러나 또 이 나름대로의 감동을 줍니다.
재미있는 것은, 들으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실제로 이렇게 큰 사운드를 만드는 것이 정말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보컬의 느낌은 속삭이듯이 혹은 건반의 느낌은 살살쳐야 하는 초반에 실제로 그 사운드를 크게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약한 사운드를 약한 느낌 그대로 강하게 살려야 한다는 것은 일종의 모순된 목표처럼 보입니다.
언젠가 이 부분에 있어서 결정적인 플러그인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이 로우레벨 컴프레서인 MV2 입니다. 큰 볼륨을 누르는 컴프레서가 아니라, 작은 볼륨을 올려주는 컴프레서입니다. 일반적인 컴프레서의 완전 반대 개념입니다. 그리고 이것에 대해서 간단하게 리뷰를 적은 적이 있습니다.
* 홈 레코딩, 어디까지 해봤니? - 작은 소리를 레벨업시켜주는, 기적의 로우레벨 컴프레서 MV2
그런데 이 플러그인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눈에 확 들어온 부분이 있습니다. "COMP UP" 이라는 부분입니다. 직감적으로 알았습니다. 이건 로우레벨 컴프레서다! 이 플러그인은 로우레벨 컴프레서와 반대 개념인 일반 컴프레서가 동시에 들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로우레벨 컴프레서는 MV2 밖에 써보지 못한 저에게 갑자기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이런, 이건 정말 유용하겠는걸?
사실 보컬만 놓고 보면 MV2로도 충분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스터링입니다. MV2의 경우에는 세밀한 조절이 어렵기 때문에 막상 마스터링에 걸어놓고 한 곡 전체의 다이나믹을 조정하려고 할 때에 아쉬운점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SCULPT 의 경우에는 THRESH 등 세밀한 조절이 완전 가능합니다. 그래서 저의 마스터링 과정에 바로 적용해 보았습니다.
위에서 보시는 것 처럼, SCULPT의 경우에는 일단 시각적으로 매우 뛰어납니다. 주황색으로 위에 나타나는 부분이 원래 레벨에서 추가로 레벨을 더 끌어올려주는 부분입니다. 지금 스크린 캡쳐한 부분은 verse 부분인데, 충분히 끌어올려주고 있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금방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매우 세밀한 조절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위에 그림에서 COMP UP 부분에서 1.2:1 로 셋팅 된 것 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사실 표시만 그렇게 되어 있고 더 세밀하게 조정이 가능합니다. 소수점 두 자리까지 조절이 가능합니다. 테스트해보니 저의 음악에서는 1.1 ~ 1.1.6 정도까지가 딱 적당하다고 느꼈습니다. 어느 정도 레벨부터 끌어올릴지를 정할 수 있고 그 레벨을 높이는 값 자체를 매우 세밀하게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MV2 보다 훨씬 섬세하게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인 웨이브 형태는 이렇게 나왔습니다.
저는 이 파형이 너무 마음에 듭니다. :) 만약에 로우레벨 컴프레싱이 없었다면, 앞에 verse 부분이 너무 약하게 들려서 음악적으로 감동을 주기가 쉽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위의 정도 파형이면 약한 부분은 약하고, 뒷 부분에서는 충분히 강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SCULPT에는 일반 컴프레서와 몇가지 기능이 추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마스터링 컴프레서는 따로 쓰는 것이 있고, 톤 조정과 트렌지언트 조정은 아직 잘 이해를 못해서 오직 로우레벨 컴프레서 섹션만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마음에 드네요. 그리고 SCULPT를 사용해서 두 곡 정도를 이미 만들었습니다.
어떻게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SCULPT를 약간 약하게 걸었으면 더 좋았겠다라는 느낌은 있습니다. :) 그래도 이정도면 충분히 의도하는 바를 살린 듯 합니다. 계속 배우고 훈련하는 입장에서, MV2 외에도 최종적인 마스터링에서 사용할 로우레벨 컴프레서를 발견했다는 것이 참 즐겁습니다. 값을 계속 조절해가면서 최적의 느낌을 찾아가야 할 듯 합니다. 혹시 곡 전체의 다이나믹에 대해서 저와 같은 고민이 있으시다면 한번 데모로 사용해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요즘에 저의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과연 음악의 아름다운 어디에서 오는가?" 입니다. 매주 찬양 커버곡을 녹음하고 믹싱해서 최종적으로 완성해 보면서, 그리고 매주 찬양팀의 리더로 섬기면서, 음악의 아름다운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를 정말 신중하게 살펴보고 있습니다.
참 흥미로운 것은, 음악을 만들지 못하는 사람도 음악의 좋고 나쁨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지 못한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음악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본인이 찬양을 잘 부르지 못해도, 혹은 악기를 연주하지 못해도, 어떤 사람의 노래가 혹은 어떤 찬양팀의 음악이 아름답다고 분명히 느낍니다. 그 이유는 정확하게 말하지 못하지만, 그러나 어떤 지점에서 분명히 좋은 감정 좋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리고 성도님들은 그것을 은혜를 받았다 라고 말합니다.
찬양팀에게 있어서 생명과 같은 마이크와, 그 마이크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음악적으로 사용하면 좋을지는 이미 예전에 글로 정리한 적이 있습니다. 읽어보시지 않았다면 꼭 읽어보시고 연구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없다면, 찬양팀의 음악은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목소리와 우리의 연주를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성령님의 역사로만 설명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아티스트들도 정말 아름다운 음악들을 얼마든지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않는 자들에게조차 일반적인 은총을 통해서, 그분의 아름다우심을 음악을 통해서 드러내십니다.
보통 찬양팀을 하게 되면 악기팀에 집중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악기는 정말 중요합니다. 음악적인 악기 연주가 받쳐주지 않는다면 어떤 곡을 완성도 있게 찬양으로 올려드리기는 정말 어려울 것입니다. 물론 음향이 너무 중요합니다. 사실상 어떤 의미에서 찬양팀 음악의 아름다움은 100퍼센트 음향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훌륭한 엔지니어는 찬양팀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양팀을 섬기면 섬길수록 중요한 것은 "싱어의 역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악기가 훌륭하고 싱어가 훌륭하다면 좋은 찬양팀입니다. 하지만 "악기가 훌륭해도 싱어의 역량이 떨어지면", 절대로 훌륭한 찬양팀이 될 수는 없습니다. 싱어들이 어떤 느낌으로, 어떻게 음들을 처리하며, 어떻게 강조점을 넣는가를 통해서 찬양팀의 색깔이 완전히 바뀌기도 합니다. 그리고 제 자신과 찬양팀을 염두에 두고, 음악적인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오는가에 대한 저의 고민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1. "음이 시작되는 바로 그 순간" 목소리가 나와야 한다.
미국 유학 나오기 전에 음악하는 친구가 Ken Reynolds를 저에게 소개시켜 주었습니다. 처음에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도대체 찬양을 이렇게 세련되게 만들 수 있는가? 요즘에는 한국에도 이런 스타일의 찬양을 하는 팀들이 늘어났습니다. 하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켄 레이놀즈를 뛰어넘는 팀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흑인의 소울에서 나오는 것은 연습에서 나온다기 보다는, 타고난 그 어떤 것으로 부터 나오는 듯 합니다. 물론 연습도 엄청나게 했을 것입니다. 어떤 리듬감의 완벽함에서 오는 감격은, 제 느낌으로는 0.2-3초 어간의 밀고 당기는 수준에서 결정이 됩니다.
이 곡을 잘 들어보면, 드럼과 베이스가 들어가는 모든 지점에서 보컬들이 단 하나도 어긋나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보컬이 한 번도 박자가 밀리지 않습니다. "들어가야 하는 타이밍"에 모두가 다 들어갑니다. 물론 라이브도 앨범을 만들 때에는 나중에 후보정을 모두 하게 됩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역량이 되지 않으면 소프트웨어로 보정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한계가 있습니다.
위의 찬양은 너무 신이납니다. 듣고만 있어도 어깨가 들썩입니다. 왜 그럴까요? 싱어들과 악기들이 "합"이 맞기 때문입니다. 드럼과 베이스가 완벽하게 리듬을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싱어들이 그 위에 살짝 "올라타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에 싱어들이 박자가 안 맞거나, 처음에 시작음이 안 맞거나, 박자가 쳐지는 것은, 싱어인 본인이 "곡을 지배해야 한다"라는 무의식 속의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음악에 맞춰 부르지 않고 내가 노래를 강하게 부르면 악기가 나에게 맞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야" 합니다. 절대로 보컬이 "악기의 리듬과 흐름"을 방해해서는 안됩니다. "음악은 흘러가는 것"이고, 보컬은 그 음악에 "자신의 목소리를 얹는 것"입니다.
위의 곡에서 하나 더 눈여겨 볼 것은, 적어도 다섯 명 정도의 메인 보컬들이 "끝음"이 완벽하게 맞아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음악에서 시작음이 같이 들어가야 하는 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만큼 중요한 것인 "끝음"입니다.
제 경험으로는 찬양을 음악적으로 망가지게 하는 것은, "끝음을 길게 처리하는 경우" 입니다. 노래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내가 은혜를 받을 때에 끝음을 길게 처리하는 것이 굉장히 음악적으로 느껴집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떤 음이든 지나치게 길게 끌 경우, 혹은 다른 싱어들은 이미 마무리했는데 혼자서 끝음을 끌고 있을 경우 거의 백퍼센트 "찬양팀 전체 음악을 루즈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모두가 함께 동일하게 시작했다면, 끝음의 처리에 있어서 길게 끌지 말고 딱 좋을 정도로 (보통은 악보의 길이에서 80퍼센트 정도)만 끄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모든 싱어들이 함께 맞춰야 합니다.
위의 곡은 빠른 곡이지만, 동일한 앨범에 들어 있는 또 다른 느린 곡을 들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정말 정말 좋아하는 곡입니다. 특별히 코러스들의 수준이 엄청납니다. 들어가고 마무리 되는 부분들이 마치 한 사람과 같습니다. 이 팀이 가지고 있는 음악적인 역량은, 느린 곡에서 더 대단하게 발휘가 됩니다. 느린 곡 역시 빠른 곡 처럼 리듬감이 뛰어나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들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제 기억으로 켄 레이놀즈는 미시간에서 로컬 처치에서 사역합니다. 혹시 들리시게 되면 꼭 한번 그곳에서 주일 예배를 드려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제가 방문했을 때에는 베이스 기타를 메고 찬양을 인도하더군요. :)
보컬의 리듬감 혹은 보컬의 어떤 음의 시작점의 중요성을 저는 페퍼톤스라는 그룹에서 또한 봅니다. 페퍼톤스 역시 한국에서 매우 지명도가 높은 그룹입니다. 사실 노래 자체를 놓고 보면 그렇게 엄청난 발성을 가진 분들은 아닙니다. 하지만 본인들이 만든 음악에다가, "어떻게 보컬을 리듬감 있게 입혀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아래 곡은 페퍼톤스의 "thank you"라는 곡입니다.
저는 위의 곡을 너무 좋아합니다. 일단 가사 내용이 너무 좋습니다. 음악적으로도 두명이 함께 노래를 할 때에 너무너무 합이 잘 맞습니다. 처음에 들어가는 시작점이 아주 자연스럽게 완벽하고, 또 끝나는 부분이 타이밍적으로 너무 좋습니다. 밴드의 음악을 전혀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보컬이 완벽하게 음악을 완성해 냅니다. 정말 많이 들었고 따라부르면서 리듬감을 익혔습니다.
2. "발성 자체의 다양함"이 필요하다.
위의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노래의 시작점과 끝점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탑 가수들의 노래를 들어보면, 모두가 들어가는 노래의 시작점과 끝 점에 엄청나게 공을 들입니다. "타이밍을 완벽하게 음악적으로" 맞춥니다. "어떤 음"도 "지나치게" 늘어지게 끌게 부르지 않습니다. "딱 좋을 정도"로 음악을 방해하지 않고 그 위에 얹어서 보컬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음악은 처음과 끝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중간"이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노래의 어떤 음의 시작점과 끝 점 사이의 중간은 어떨까요? 예를 들어서 어떤 음이 세박 정도를 지속해야 할 때에, 도대체 그 긴 공간은 어떻게 채워야 할까요? 이 부분 역시 매우 어려운 부분입니다.
최근에 라디님의 12 month를 들었습니다. 라디는 한국의 알앤비 장르에서 이미 탑클래스의 가수입니다. 너무 아름다운 노래입니다. 저와 동갑이지만 어떤 미소년보다 더 아름다운 목소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저는 이 곡이 "피아노만으로 반주"한다는 것을 10번 정도 노래를 듣고서야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노래에 완전히 빠져서, 가창력에 완전히 몰입이 되어서, 도대체 다른 악기가 어떻게 등장하는지를 분석할 틈도 없었습니다. 라디님의 노래가 "너무나 변화 무쌍하고 전혀 지루함이 없어서" 피아노 하나의 악기만으로도 완벽한 곡을 만들어 냈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에 기존의 ccm에서 아쉬운 것은, 그리고 일반적인 찬양팀에 있어서 아쉬운 것은 "노래의 변화" 가 "너무 적다"라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너무 밋밋"합니다. 멜로디 하나 하나 사이사이, 그 음의 사이사이에 변화가 너무 적습니다.
예를 들어서, 위의 곡에서 라디의 발성을 들어보면, 끝음 처리들이 동일한 곳이 거의 없습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직선으로 끌고, 어떤 부분에서는 코에 소리를 집중해서 바이브레이션을 넣습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바이브레이션을 한 음의 처음부터 넣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완전히 끝 쪽에만 사용합니다. 곡의 전체를 비교적 약하게 부르지만, 모든 기교들을 사용해서 보컬 자체를 지루하지 않게 만들기 때문에, 이 곡은 아름답게 완성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부분을 어떻게 찬양팀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저는 "찬양 자체에 대한 편견"이 깨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편견은, "한국 찬양의 편견" 입니다. 한국 사람들의 생각에는, "찬양은 성악 발성으로" 혹은 "찬양은 강하게 부르는 발성으로 부른다"는 일종의 선입견이 있는 듯 합니다. 물론 그런 부분이 일정 부분에서는 당연히 필요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속삭이듯이 부르는 부분은 존재하지 않고" 모든 부분을, 너무 강하게 너무 세게 불러 버린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고 그 마음에 다가가는 곡들은" 부드러운 곡 혹은 부드러운 부분들입니다. "처음에 약하게 시작"되고 또 "변화가 다양한 곡"들입니다. 반드시 모든 음들은 "변화"가 들어가야 합니다. 그 음의 높이를 유지하면서도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찬양팀의 싱어라면 "다양한 발성"을 연구해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스스로 연구를 많이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저 같은 경우도, 어떤 부분에서 어떤 음에서 바이브레이션을 어떻게 얼만큼 넣을 지, 어떤 부분에서 강조점을 둘 지에 대해서 계속 고민합니다. 아래 곡은, 최근에 만든 커버곡입니다.
이 곡은, 멜로디가 굉장히 난이도가 높은 곡입니다. 도약이 정말 많기 때문입니다. 이 곡을 준비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코러스로 넘어갈 때에 "나의 길" 이라는 부분입니다. 보통은 "길"을 시작부터 너무 강하게 부릅니다. 사실 기본적인 음악적인 이론에서는 맞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4박자 리듬에서 길이 강 박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의 길"이라는 것이 하나의 단위라고 생각할 때에는 좀 더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길"을 처음부터 너무 강하게 부르면 백퍼센트 촌스럽게 들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의 길에서 길에 바로 힘을 주지 않고, "약간 힘을 빼고 살짝 그 음만 짚은 이후에 약 반박자 이후에 힘"을 넣었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음의 시작과 끝의 그 사이"를 "어떻게 처리할지"를 고민한 저의 결과입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생각보다 좋게 들려서 만족하고 있습니다.
음이 시작되고 마무리 될 때까지, 가장 다양한 변화를 주는 모델이 될 만한 사람은 누가 있을까요? 과연 가장 완벽한 가수가 있을까요? 저는 박효신님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발성, 색깔, 음악성을 모두 갖춘 한국 최고의 가수입니다. 야생화의 뮤직 비디오는 아마 수십번은 본 듯 합니다.
이 곡은 음역대가 높아서 따라해 볼 수도 없을 정도입니다. 다만 제가 너무 좋았던 것은 "이분이 노래하는 모든 기교들"입니다. 어떤 멜로디의 한 음이 시작되고 끝나는 "그 중간의 순간에 존재하는 그 시간들"을 엄청난 음악성으로 모두 채워 넣습니다. 그저 듣고만 있어도 빠져들어갑니다.
사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음들의 절대적인 높이를 처리하는 능력"입니다. 보통의 가수들은 음원을 낼 때에 소프트웨어적으로 보정을 합니다. 물론 박효신님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정말 좋았던 것은, 어떤 음이 세박이 지속된다고 할 때에, 처음에 들어가는 음 높이와, 마지막에 끝나는 음 높이를 예술적으로 살짝 튼다는 것입니다. 이건 소프트웨어로 절대 할 수 없습니다. 이건 가수 스스로 느끼고 만들어낸 예술의 영역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음을 라 음에서 시작해서, 마지막 끝날 때에는 라에서 살짝 올라간, 아마도 반에 반에 반음 정도를 살짝 틀어서 부르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노래를 하면 음이 다 맞지가 않습니다. 듣고 있으면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멜로디 자체"를 제대로 못 부른 경우가 허다 없습니다. 찬양팀을 음악적으로 망치는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기본적으로 멜로디를 틀리지 않고 잘 불러야 합니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여기 논의되는 모든 내용들이 무용지물이 됩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때에는 박효신님은 음을 맞추어서 노래를 부른다는 개념 자체를 초월해 버렸습니다. 위의 곡에서 4분 17초를 넘어가면서 하이라이트로 올라 갈 때에 "한 음에서 약간 음을 틀어서 부르면서 타고 올라가는 그 느낌"은, 이미 이분이 인간의 경지가 아니라는 충격을 주었습니다. 잘 들어보시면서 연구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3. "음의 끝음 처리"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내용은, 이것입니다. 어떤 음이든지 정확한 타이밍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정확한 타이밍에 끝나야 합니다. 한가지 오해가 있는 듯 합니다. 특별히 찬양팀 싱어는 "팀 사역"입니다. 절대로 수퍼스타 한명으로 팀이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리더 혼자 혹은 싱어 혼자 만드는 것이 찬양팀이 아닙니다. "팀이 부르는 것"이기 때문에 "혼자서 너무 길게 부른다거나 하면" 결국 음악적으로 "큰 손해"를 가져옵니다. "전체적인 통일성"이 우선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그 음 사이에서 다양한 발성을 개인적으로 연구하면서 다양성을 넣어서 지루하지 않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한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끝 음의 처리" 입니다. 예를 들어서, 세 박의 음을 끌어서 그 음을 마무리하는 방법은 다양할 것입니다. 가장 쉬운 방법은, 끝나는 타이밍에 그냥 입을 다물면 됩니다. :) 하지만 아무도 이렇게 추천하지는 않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성대로 통과되는 공기의 흐름을 적게 만들어서 자연스럽게 fade out 시키는 것을 추천합니다.
하지만 탁월한 가수들은, "자기들만의 끝음 처리 능력"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어떤 음이 끝나는 그 느낌"이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 가수의 개성이 드러납니다. 저는 다양한 가수들의 노래를 분석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제가 또 하나 존경하는 뮤지션은 다빈크님입니다. 한국의 최고의 뮤지션 윤상님과 함께 활동했고 본인이 곡 전체를 프로듀싱하는 가수이며 키보디스트입니다.
다빈크의 곡을 들면서 너무 좋았던 것은, 어떤 음의 "끝음 처리" 입니다. 사실 제 기준에서는 다빈크 님은 라이브 실력은 라디보다 조금은 밀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음의 처리에 있어서 "굉장히 독특한 처리"를 합니다. 약간 콧 소리를 강하게 넣어서 살짝 끝 음을 꺾어 올립니다. 반에 반에 반음 정도 될까요? 그래서 어떤 애잔함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비슷한 기교가, 이승환님의 천일동안에도 등장합니다.
다빈크님의 발라드들은 주로 건반 위주로 진행이 되고, 강한 일렉기타들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순전히 보컬과 코러스들을 더블링해서 입히면서 다이나믹을 만들어냅니다. 보컬의 활용만으로 이정도 다이나믹을 만들어내는 사람은 다빈크님이 거의 유일합니다. 저는 ccm 커버를 만들면서 제 노래가 너무 밋밋해서 고민하면서 다빈크님을 많이 따라해서 발성을 연습했습니다. 저는 다빈크처럼 모든 음을 꺾어서 처리하지는 않지만 이분을 연구하는 것이 저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위에는 거의 다 남자 곡들입니다. :) 저는 제가 남자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남자 보컬들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정말 노래를 잘한다고 생각하는 여자 가수는 벤 입니다. 가수 거미 같은 경우는 알앤비를 추구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찬양팀에 적용하기는 좀 어렵습니다. 그리고 소향님은 일반인이 접근하기는 너무 어렵습니다. 그리고 발성이 찬양팀과 전혀 맞지 않습니다. 하지만 벤의 경우에는 전형적인 발라드 가수이며 그런 점에서 배울 점이 너무 많습니다.
벤의 발성과 기교가 너무 탁월하지만, 특별히 끝음 처리에 주의해서 들어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냥 듣지 말고 분석하면서 들어야 합니다. "끝음 처리의 모델"이라고 부를 만 합니다. 왜냐하면 아주 자연스럽게 음의 끝이 사라집니다. 이 부분이 대부분의 보컬들이 실패하는 부분입니다. "그냥 똑같은 크기로 음의 길이를 채우다가 뚝 끊어지면" 절대로 음악적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약해지면서 사라져야 합니다. 벤의 경우는 배에서 부터 공기를 잘 조절해서 음을 끝까지 너무 강하게 부르지 않게 살짝 힘을 빼면서 음들을 처리하기 때문에 너무 자연스럽습니다.
4. 자신만의 "다이나믹"이 필요하다.
만약에 위의 내용들이 충분히 이해되고 연습이 되었다면, 결국 "자기 자신만의 다이나믹"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음악의 아름다움은 "다이나믹"에서 옵니다. 음악은 "흐름"입니다. 음악에는 "강약"이 있어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4/4 박자는 "강약 중간약" 이라는 다이나믹을 가지고 있습니다. 찬양팀 리더는 큰 그림 안에서 다이나믹을 제시하고 조정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싱어 본인"이 그 사이에 얼마든지 음악적으로 다이나믹을 만들어낼 수 있고 만들어 내야 합니다.
제가 생각할 때에 문제는, 보통의 찬양팀은 "찬양을 부르기 시작하면" 다이나믹을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훈련이 되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이나믹이 목숨을 걸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찬양이 "민밋해" 집니다. 민밋한 찬양은 부르는 사람에게도, 듣는 사람에게도 "고통"을 줍니다. 반드시 기억할 것은 "모든 음악"은 약한 부분, 강한 부분이 있습니다. 한곡 전체에서, 그리고 한마디 안에서 그렇습니다. 내가 어떤 감성으로 "어디를 약하게 부를지, 어디를 강하게 부를지"를 스스로 결정하고 연습해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다이나믹은 "감성"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저는 찬양을 덤덤하게 부르는 것은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감성이 부족해서 다이나믹이 살아나지가 않습니다. 남녀간의 사랑 노래도 이렇게 애절하게 부르는데, 진정한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찬양할 때에 덤덤하게 부른다는 것은 너무나 아쉬운 일입니다. "덤덤하게 찬양을 부르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 자체"가 큰 문제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커피 소년님의 모든 곡을 좋아하진 않지만, 감성 혹은 다이나믹이라는 점에서 참고할 만한 곡이 커피잔이라는 곡입니다.
커피소년은 원래 ccm 가수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일반 가수로 전향하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찾아보니 ccm을 부를 때에는 많이 평범했습니다. 하지만 일반 가수로 전향하면서 훨씬 더 감성적인 가수로 변했습니다.
위의 곡이 정말 좋은 것은, "클라이막스를 굉장히 뒤에 두면서도"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후렴으로 들어가면서 발성을 강하게" 해서 다이나믹을 냅니다. 곡 전체를 구성하면서 어떤 식으로 다이나믹을 만들면 감동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생각합니다.
또 한분 소개하고 싶은 분은 이승환님입니다. ccm 영역에서 저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분이 박종호님이라면, 가요 영역에서 저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분이 이승환님입니다. 정말 존경하는 아티스트입니다.
이승환님은 단연코 한국 최고의 발라드 가수입니다. 물론 이 분보다 노래를 더 잘하는 분은 있겠지만, 그러나 이분보다 더 완성도가 높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1989년에 데뷔해서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가수입니다. 이승환님은 워낙 탁월한 발라드를 많이 만들었지만, 그 중에서 손꼽히는 곡이 "애원"이라는 곡입니다.
이승환님은 아주 작은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부터, 터져나오는 발성으로 부르는 소리까지 모든 것을 다 갖춘 분입니다. 작게 흐느끼면서 혹은 작게 속삭이면서 부르는 것부터, 크게 소리지는 발성까지 완벽하게 모두 소화합니다. 소위 말해서 공기 반 소리 반의 소리, 코로 모아서 내는 비음, 때론 음의 끝을 살짝 올리는 발성, 과하지도 모자르지도 않는 애절한 바이브레이션 등등을 매우 복합적으로 구사하기 때문에, 모든 남자 싱어라면 반드시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승환님은, 모든 앨범이 곡의 구성과 완성도 그리고 사운드라는 점에서 단 하나의 흠도 발견하기 어려운 대단한 아티스트입니다. 특히, 애원이라는 이 곡은 이분의 모든 것을 한 곡 안에 담아낸 엄청난 명곡입니다. 들으면서 이분이 어떻게 노래를 부르는지, 악기가 어떻게 흐르면서 어떻게 싱어가 힘을 더해서 곡을 완성해 나가는지를 충분히 듣고 연구해 봐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이 곡은 수천번은 들었지만 여전히 경이로운 곡입니다. 저는 바라기는 한국의 ccm 영역에서 이승환님과 같은 위대한 아티스트가 나오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자신만의 다이나믹"을 보여주는 가수는 박윤하님입니다. 예전에 케이팝 스타에 등장해서 굉장한 화재를 불러 일으켰던 가수입니다. 저는 박윤하님이 한국 여자 가수 중에 거의 탑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아마도 버클리에서 공부하고 있어서 아쉽게도 앨범 활동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들어보시면, 위에 나누었던 벤과는 좀 더 성향이 다른 가수입니다. 폭발적인 소리를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자신만의 감성과 다이나믹"이 분명합니다. 예전에 박윤하 씨가 첫 소절을 부르는 그 순간, 너무 목소리가 감미로워서 박진영님이 눈을 감았던 장면이 기억이 납니다. 한국 가요사에 남을 가장 위대한 곡인 "그대 내 품에"를 완벽하게 불렀습니다.
약하게 부르는 듯 하지만 분명한 다이나믹이 존재합니다. 후렴에서 꺽어 부르는 밴딩의 기법(ex) 그~대~ 내~ 품~에)이 굉장히 강하게 들어갔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조차 아름답게 들립니다. 이분도 평범함을 완전히 뛰어넘은 분입니다. 박윤하님의 모든 부분이 너무 아름답기 때문에, 비록 동일하게 못한다고 하더라도 여자 보컬은 들으면서 연구해볼 가치가 충분히 가치가 있습니다.
5. 음악의 아름다움은 어디서 오는가?
제가 좋아하는 찬양과 노래들을 예로 들어, 제 나름대로 분석한 내용을 나누면서 싱어 중심으로 음악의 아름다움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분명한 것은 음악은 "하나님으로 부터"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음악의 창조자이시며 주인이십니다. 음악이 시작되고, 리듬과 화음이 조화를 이룰 때에 저는 늘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생각합니다. 찬양의 절정 속에서,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하늘의 감동을 경험합니다. 이 땅에서 듣는 음악도 이렇게 큰 감동을 준다면, 천국은 하물며 어떨까요? 그곳은, 누구도 들어보지 못한 가장 아름다운 찬양으로 넘치고 또 넘치게 가득찬 곳일 것입니다.
저는 항상 꿈을 꿉니다. 노래를 잘 하고 싶고, 음악을 잘 하고 싶습니다. 제 노래가 시작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저의 호흡이 마이크로 들어가는 바로 그 순간부터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이 있고, 제 음악을 들을 때에 사람들이 마음에 감격을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제 나름대로 듣고 분석하면서 고민해보지만, 음악의 아름다움은 어디서 오는지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음악을 하고 있고 고민을 하는 부분입니다. 다만, 계속 연구하고 계속 연습하고 싶습니다. 좀 더 아름다운 음악으로, 좀 더 아름다운 찬양으로, 그렇게 평생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와 함께하는 분들이라면, 같은 마음으로 고민하면서 계속적으로 함께 발전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
이준용 감독님을 처음 영상에서 뵌 것은, 유투브 뮤살 채널이었습니다. 굉장히 뭔가 진지한 모습, 그리고 위트가 넘치는 멘트들이 참 마음에 들었고 자주 영상을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채널로 시작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제는 정말 레코딩 관련해서 유투브 안에서 엄청난 채널로 성장했습니다. 젊어보이시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과 실력은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생각합니다.
얼마전에 이준용 감독님이 믹싱 마스터링 하신 곡이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새벽에 눈을 뜨면서 확인했는데 잠이 확 깨더군요. :) 바로 스포티 파이로 찾아서 들어 보았습니다. 믹싱만 혹은 마스터링만 하신 것도 너무 좋을 것 같은데, 둘다 혼자서 하셨다면 얼마나 좋을까?
들어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실 노래 자체도 굉장히 좋았습니다. 가사가 너무 좋고 멜로디가 한국 발라드 중에서는 탑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사울라라는 분은 제가 워낙 가요에 문외한이라 처음 들어보지만 노래도 정말 잘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제가 제일 궁금했던 것은 음원의 사운드였습니다. 거의 이틀동안은 이 곡만 들어본 것 같네요. :) 이준용 감독님이 완성하신 곡이라서 기대를 많이 했는데, 기대를 많이 했는데 기대를 뛰어 넘어서 정말 너무너무 좋았습니다.
일단 스피커로 들어보니 공간을 꽉 채우는 보컬 사운드가 대단하다고 느꼈습니다. 보컬이 스테레오감이 엄청 넓습니다. 세상에 이건 어떻게 하는걸까?
그리고 반주와 보컬의 밸런스가 정말 좋습니다. 저처럼 아마추어의 최대 고민은, 보컬을 키우면 촌스럽고, 보컬을 작게 하면 노래가 안들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감독님의 곡은 정말 완벽한 밸런스를 보여주더군요. 보컬이 선명하지만 동시에 다른 음악들이 충분히 음악적으로 드러납니다.
제가 생각할 때에 보컬을 처리하는 방식이 보통 두가지인 것 같습니다. 하나는 최대한 그냥 듣는 사람의 목소리처럼 자연스럽게 처리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이큐를 조금은 극단적으로 만져서 보컬의 개성을 살리는 것입니다. 이 곡은 두번째 경우로 보입니다.
처음에 이 곡을 언뜻 들었을 때에는, 약간 어색하다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메인 보컬만 때 놓고 보면 마치 옛날 라디오 느낌이 조금 나기도 합니다. 그리고 보컬에서 저음이 최대한 빠져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로우컷으로 무조건 처리한 것 같지도 않습니다. :) 이런, 이건 어떻게 하는 걸까요?
그리고 코러스도 너무 마음에 듭니다. 코러스들이 너무 두드러지지 않게 확실히 고음은 많이 컨트롤 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부분에서는 충분히 역할을 합니다. 아, 정말 대단하네요.
또 하나 아주 흥미로웠던 것은, 전체적으로 곡이 굉장히 화려하지만 전혀 시끄럽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미터링으로 확인해 보니 최대 음압이 LUFS 5.9 정도까지 올라갑니다. 사실 이정도면 굉장히 크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너무 흥미로운 것은 제 느낌으로는 5k 중심으로 굉장히 사운드가 절제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보컬은 시원하면서도 하지만 harsh하지 않아서 너무 매력적입니다. 정말 많이 들었는데 귀에 통증이 없습니다.
그리고 한가지 매우 특이한 것은, 보컬이 상대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드럼과 스트링 등이 약간 더 고음을 절제한 것 처럼 들립니다. 윤종신님의 곡들은 사실 메인 보컬이 살지만 악기들이 너무 뭉개지는 듯한 느낌을 종종 받았는데, 이준용 감독님은 훨씬 사운드를 잘 만들어내시는 듯 합니다. 드럼 버스와 스트링 버스에서 이큐로 많이 절제한 사운드를 만들어낸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것만 들리고, 필요하지 않은 것은 들리지 않는 그런 아주 특별한 느낌입니다.
특히 킥과 스네어 탐 등은 저음 등에서 존재감은 충분히 있지만 전면에 완전히 나오지는 않은 것으로 들립니다. 그런데 정말, 매력적으로 들리네요. 아 정말 밸런스가 너무 환상적입니다.
이 곡을 여러번 들으면서 느끼는 것은, 마치 사운드가 춤을 추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엄청나게 섬세하게 다듬어져 있습니다. 악기들의 다이나믹이 쉴새 없이 움직이고, 그 안에서 메인 보컬이 멋지게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리버브와 딜레이가 쉴새 없이 움직이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곡의 전체 구성에서 작아짐과 커짐이 어색함이나 흔들림 없이 완벽하게 시간에 따라서 흘러갑니다.
특히 베이스가 마음에 듭니다. 제 장비가 딥한 베이스를 케치할 수는 없지만, 차에서 들으니 아주 마음에 듭니다. 이준용 감독님 영상에서 특별히 본인 스튜디오 만드신 것에 공을 쏟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음이 정말 너무 깔끔하게 들리네요. 좋은 공간에서 엄청난 실력자가 만들어낸 결과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가지 정말 개인적으로 약간 아쉬운 것은, 마지막에 피아노 마무리가 약간 피아노가 볼륨이 큰게 아닌가 싶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약간의 아쉬움입니다.
이틀 동안 들으면서 너무 마음에 들어서, 이번주에 만드는 CCM 커버는 최대한 한번 따라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그리고 곰곰히 생각해 봤습니다. 어떻게 해야 조금이라도 따라해 볼 수 있을까?
일단 음질이 차이가 꽤 나더라도 유투브에서 MP3로 변환시켜서 Metric AB에 띄웠습니다. 그리고 비교해서 들으면서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어보았습니다. 메인 보컬은 생각한대로 최대한 5k 근처 소리들을 절제해서 만들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큐를 약간은 극단적으로 사용해서 조금은 라디오 느낌으로 만들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틀 동안 시도했다가 결국에는 포기했습니다. :) 아무리 들어도 메인 보컬의 느낌은 도저히 흉내낼 수가 없더군요. 한번 만들었다가 결국 망치고 접었습니다. :) 그래서 최종적으로는 제가 평소에 하던 스타일대로 하되, 보컬을 패러럴 컴프레싱으로 하면서 패러럴 쪽에서 스테레오 이미지를 굉장히 많이 넓히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드럼과 스트링 들은 버스 채널에서 풀텍 이큐를 사용해서 일부러 소리를 고음쪽을 많이 깎아 냈습니다. 확실히 톤 메이킹에는 풀텍 이큐가 너무 좋은 것 같습니다. 버스 채널에서 적극적인 톤 메이킹은 처음으로 해보았는데 정말 흥미롭더군요. 지금까지 해보지 않은 완전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원래는 마스터 단 볼륨은 전혀 손을 대지 않았었는데, 이준용 감독님 곡을 들으니 후렴 쪽이 전체가 같이 커지는 것이 너무 듣기 좋아서 후렴 반복 정도에 0.3 데시벨 정도를 올렸습니다. 마스터링 전 단계에서 부터 그렇게 셋팅을 잡았습니다.
최종적으로 마스터링은 정말 간단하게 잡았습니다. 믹싱이 너무 새로운 도전이었고, 믹싱에 공을 많이 쏟았기 때문에 최대한 원본을 건드리지 않는 쪽으로 했습니다. IRON에서 최대 1db 정도 게인 리덕션에, Black Box에서 너무 과하지 않게 세츄레이션을 넣고, 마지막으로 Bettermaker EQ232D에서 미드 사이드로 해서 미드 쪽에 과한 치찰음들을 최대한 눌렀습니다. 평소보다 좀 과하게 누른 듯 합니다. 그리고 The Wall 리미터로 올렸습니다. 아래 결과물입니다.
결과물을 놓고 보면, 베이스는 좀 아쉽네요. 킥도 좀 강합니다. 아무래도 제가 모니터링이 정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5인치 스피커로 작업을 하다보니 이 부분이 가장 어렵습니다. 메인 보컬은 스테레오감은 많이 넓어졌는데 아무래도 어색함은 있네요. :) 물론 노래 자체가 항상 제일 아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했다고 판단하는 부분은, 일단 의도한 부분들은 많이 반영되었습니다. 드럼과 스트링이 먹먹한 편이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존재감이 있습니다. :) 드럼 스네어가 너무 먹먹해서 좀 아쉽지만 여하튼 새로운 시도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듯 합니다. :)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제가 지금까지 믹싱한 곡 중에, 메인 보컬이 가장 크게 들린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촌스럽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크게 들리는 것이 너무 만족스럽네요. 아, 정말 힘들었습니다. 이준용 감독님 곡을 들으면서 뭔가 보컬과 악기들이 다 같이 풍성하게 올라가는 느낌이 너무 좋았는데, 아주 약간은 비슷한 느낌이 나서 그것도 긍정적입니다.
사실 곡을 녹음하고 최종 결과물을 낼 때 마다, 불가능에 대한 도전이구나 라는 생각을 자주합니다. 하지만 하면서 참 즐겁고 배우는 것이 많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계속 고민하면서 결국에는 음악에 대한 이해도가 굉장히 높아지고 또 음색에 대한 이해도 굉장히 깊어지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계속 공부하면서 계속 훈련하면서 만들다 보면, 지금보다는 조금 더 나은 모습으로 완성도 있는 모습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봅니다. :)
어떤 노래를 들을 때에, 마음에 완전히 들어와서 남는 가사가 있습니다. 김동률님의 "내 마음은"이라는 곡을 처음 들었을 때가 그랬습니다. "뜨겁지 않은 사람이 됬어" 제 마음에 오랫동안 남아 있는 가사입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목회를 오랫동안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뜨겁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뜨겁지 않은 것은, 모든 일에 대면 대면해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에 무감각해지는 것입니다. 자신을 향한 그리고 누군가를 향한 기대와 비전보다는, 그저 아무런 희망 없이 감정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상처 받지 않기 위해서 다가서지 않는 것이며, 마음에 있는 따뜻한 말을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되려 삼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뜨겁지 않은 사람"입니다.
저는 칭찬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격려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깨달았습니다. "내가 뜨겁지 않은 사람이 되었구나..." 누군가를 향한 깊은 벽이 느껴졌습니다.
상대방이 만든 것이 아니라 제 자신이 만든 벽이었습니다. 마음을 담아서 진심으로 하는 말이 사라지고, 그저 형식과 듣기 좋은 내용이 남은 말들이 저로부터 나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참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어느새 제 자신이 뜨겁지 않게 되었음을 것을 깨달은 순간, 다른 사람을 향하여 내 자신을 향하여 뜨겁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마음이 참 낙심이 되었습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주신 깨달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으로서 그리고 목회자로서의 저의 삶을, 하나님께서 바로 잡아주시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부르심을 따라 새롭게 마음을 가다듬었습니다. 뜨거운 사람으로 남자, 뜨거운 사람으로 살아가자, 혹시 그렇게까지 뜨겁지 못하더라도, 따뜻한 사람으로 살아가자, 그것이 저의 새로운 마음입니다.
삶이 단조롭다 하더라도, 누군가가 나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 자신이 나 스스로를 실망시킨다 하더라도,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이 되어도, 힘이 사라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을 때에도, 차가워 마음이 식어버린 사람과 세상을 향하여, 따뜻한 사람으로 남고 싶다는 마음으로 새롭게 다짐해봅니다.
신앙은 일이 아닙니다. 신앙은 행정이 아닙니다. 신앙은 조직이 아닙니다. 신앙은 직분이 아닙니다. 신앙은 형식이 아닙니다. 신앙은 모임이 아닙니다. 신앙은 어떤 보이는 것으로 규정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뜨거운 사람, 그리고 따뜻한 마음입니다. 그곳에서부터 우리의 신앙이 출발하는 것이고, 우리가 행동하는 그 모든 것을 감싸는 것이 바로 따뜻함입니다.
이제 겨우 차가운 사람에게 벗어나서, 앞으로 조금은 따뜻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시카고는 갑자기 추워졌습니다. 얇은 옷을 입고서는 견딜수가 없을 정도의 추위입니다. 세상이 차갑다고 느낄 때가 참 많습니다. 너무 차가워서 웅크리고 있고 싶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따뜻한 온기로 나의 옆 사람을 위로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하나님이 저에게 원하시는 삶을 충분히 이루는 것이라는 마음으로, 오늘도 살아가겠습니다.
요즘에 공부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짧지만 긴 여정을 허락하셨고 우리는 늘 배우는 존재로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적이시고 아름다운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 역시 그러한 존재로 살아가는 것에서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최근에 한 영상을 보고 찬양팀 멤버들이 함께 보면 큰 유익이 되겠다 싶어서 간단히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찬양팀 하면 떠오른 것이 무엇인가요? 그것은 마이크입니다. :) 찬양팀은 단순히 내 목소리로만 사람들에게 노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음향 시스템을 이용해서 찬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음향 시스템으로 들어가는 그 첫 시작이 바로 마이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마이크를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서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보통 TV에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흉내내는 정도에 그칩니다. 어떤 분들은 마이크를 가슴 높이에 놓고 노래하는 분들도 계시고, 또 어떤 분들은 입에 바짝 붙여서 라인을 손에 감은채 부르는 분들도 계십니다.
우리가 다양한 모습으로 마이크를 사용하는 것은 좋지만, 문제는 그러한 우리들의 마이크 사용법이 찬양의 전체적인 퀄리티에 큰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내 목소리를 어떤 식으로 처리하고 어떻게 다루어야 그것이 음향적으로 좋게 들리는 것일까를 고민하는 것은,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을 고민하기 이전에 가장 기초적인 부분이면서 또 중요한 부분입니다.
저는 이 영상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 이미 유명한 가수로 활동하는 정진운님이 자신이 어떻게 마이크를 사용하는지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찬양은 정진운 님이 설명하는 기본적인 song form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통 성도님들이 좋아하시는 찬양들이 대부분 발라드의 형태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발라드 가수의 마이크 사용법과 이해를 배우는 것은 찬양팀 멤버들에게 매우 유익하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이 영상에서 좋게 생각하고 또 함께 배웠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간단히 정리해봅니다. 첫째로, 우리는 마이크를 사용한다는 것 자체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찬양팀의 보컬은 마이크를 사용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내가 마이크를 사용하는 것이 찬양팀의 결과물에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항상 고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마이크에 대고 박수를 치지 말아야 합니다. 마이크는 음향 시스템을 통해서 스피커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보통 본인의 마이크가 켜져 있는가를 체크하기 위해서 마이크 헤드를 때리는 분이 종종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최종단인 스피커의 고장을 가져오는 아주 안 좋은 버릇입니다. 그리고 동일한 관점으로 마이크를 박수를 친다고 때리게 되면 또한 스피커에 무리를 줍니다. 그러므로 박수는 팔꿈치를 치는 것으로 대신해야 합니다.
셋째로, 마이크 헤드를 잡으면 안됩니다. 마이크 헤드를 잡으면 내 목소리가 제대로 마이크로 들어가지 않고 굉장히 거북한 소리가 들립니다. 방송에서 힙합 가수들이 그렇게 할 때도 있지만 그것은 극단적인 경우이며 엔지니어에게 후처리에 대한 큰 부담을 줍니다. 라이브 셋팅에서 섬기는 찬양팀은 보통의 정상적인 마이크 잡는 방식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로, 벌스, 프리코러스, 코러스 등을 나누어서 마이크 사용법을 가져야 합니다. 제가 생각할 때에 정진운님은 이 영상에서 발라드 가수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기술들을 모두 가르쳐주었습니다. 핵심은, "벌스 부분은 작게 조곤조곤 대화하듯이 마이크를 가까이 대고 숨소리를 섞어서 불러주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정말 두가지 핵심은, 마이크를 가까이 대고, 동시에 작게 조곤조곤 부르라는 것입니다. 두가지가 동시에 되어야 합니다. 마이크만 가까이 대고 크게 불러서도 안되고, 마이크를 멀리 대고 작게 불러서도 안됩니다. 마이크를 가까이 대고 조곤조곤 속삭이듯이 불러야 합니다.
제가 생각할 때에 CCM쪽의 찬양팀들과 발라드 가수들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찬양팀들은 보통 벌스를 너무 크게 부릅니다. 너무 힘을 주어서 부르고 너무 발성적으로 부르고 너무 강하게 부르고 너무 한 음들을 길게 빼서 부릅니다.
물론 그렇게 부른다고 찬양을 망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듣는 사람이 찬양에 빠져들거나 감정 선을 살려서 듣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언제나 예외는 존재하겠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마이크를 사용하는 찬양팀 싱어들은 벌스 부분은 살살 불러야 합니다. 그리고 조곤조곤 불러야 합니다. 그리고 가급적 각 음들을 끝까지 빼지 않고 약간은 음들 사이에 공간을 두고 불러야 합니다.
물론 이렇게 다 부를 수 있다면 모두가 프로 가수가 되었겠죠 :) 그래서 저는 보통 저는 찬양팀 안에서 주문할 때에 "벌스는 살살 약하게 불러주세요" 라고 부탁드립니다. 이 부분을 정진운 님이 정말 잘 설명해주셨습니다. 영상에서 마이크를 가까이 대고 공기를 좀 더 넣어서 부르는 것이 어떤 효과를 가져오는지를 살펴보시면, 실제로 내가 찬양의 벌스를 부를 때에 큰 유익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코러스로 넘어갔을 때에 적절한 마이크 거리와 성량을 조절하는 것도 너무 중요한 부분입니다. :) 특히 저 역시 찬양을 하다보면 지나치게 큰 소리를 낼 때가 많습니다. 제 자신이 들을 때에는 그것이 더욱 드라마틱하고 은헤롭다고 느끼기 때문이겠죠. 그런데 지나치게 마이크를 가까이하고 소리를 지른다면, 그것은 사실 상대방을 괴롭게 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리고 그것을 컨트롤 하는 엔지니어에게 오히려 부담을 주게 됩니다.
그래서 앞으로 저도 연습할 부분은, 감정이 복받치고 은혜로운 코러스 파트에 들어갈 수록 마이크를 조금은 더 띄우고 적당한 수준에서 부르는 것입니다. 물론 마이크를 띄워주는 그 강도에 대해서는 정진운 님이 이야기하시는 것 처럼 점진적으로 멀어져야 할 것입니다.
적당한 수준에서 마이크를 띄운다는 것은 정진운 님의 영상을 보니 딱 주먹 하나에서 하나 반 정도입니다. 저도 이정도를 추천합니다. 평소에 벌스 부분에서는 주먹 반개 정도를 마이크에서 띄우고 부르고 후렴에서는 맥시멈으로 주먹 하나 반 정도를 띄우고 부르는 것입니다.
찬양팀을 이루어서 함께 찬양한다는 것은, 정말 종합 예술입니다. :) 찬양이 시작되어서 15분에서 20분 정도를 끊이지 않고 찬양을 한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입니다. 그리고 마이크를 사용하여 찬양을 한다는 것은, 굉장히 신경쓸 것이 많고 공부할 것이 많은 엄청난 자리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 귀한 역할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바라기는 비록 정진운 님은 발라드 가수이지만, 이 분의 영상을 통해서 마이크 사용법과 감정을 처리하는 발성 등을 잘 배우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찬양이 좀 더 아름다운 그리고 음악적으로 완성된 찬양이 되기를 원합니다. :)
홈레코딩은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해내야 합니다. :) 누군가에게 세션의 도움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리얼함을 살리는데 큰 도움이 되지만, 상황이 늘 여의치가 않지요. 그래서 결국 모든 악기를 혼자서 해내야 하는데 그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홈레코딩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가장 어려운 파트가 어디일까요? 저는 드럼 파트라고 생각합니다. :) 저는 피아노와 기타를 조금 다룰 줄 압니다. 하지만 드럼은 거의 못합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드럼이 더 어렵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물론 요즘에는 가상 악기들이 좋아서, 악기 안에 이미 리얼 드럼 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인의 능력이 가능하다면 실제로 그 소리를 사용하여서 미디로 찍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보통일이 아닙니다. 어찌어찌 미디로 찍더라도 그 리얼감을 살리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어렵습니다. 드럼이라는 악기는 곡의 분위기를 만들고 그루브를 만들어내는 가장 중요한 파트인데, 미디로 드럼을 찍는다는 것 자체가 막대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좀 쉽게 드럼 파트를 만들 수 없을까요? :) 맥 기반 DAW인 로직에는 "드러머"라는 기능이 따로 있다고 들었습니다. 가상으로 드럼을 자동으로 지원해주는 기능입니다. 아쉽게도 저는 윈도우 기반 컴퓨터를 사용하기 때문에 그림의 떡에 불과합니다. :)
이런 어려움 때문에 드럼 악기 회사들은 좀 더 사용자들을 배려하고 있습니다. 저처럼 드럼의 초보자들을 위해서 드럼 가상 악기들은 "미디 팩"을 지원합니다. 다시 말해서 미리 전문가들이 드럼 패턴을 미디로 만들어 놓고, 사용자는 본인이 원하는 드럼 사운드에 그 미디 패턴을 입히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저는 미디팩을 잘 사용해 본적은 없지만 굉장히 좋은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
저 같은 경우, 드럼 트랙을 최대한 쉽게 처리하기 위해서 AIR Music이라는 회사에서 나온Strike 2라는 가상 악기를 사용합니다. 제품 설명은 공식 홈페이지 링크를 참조하시면 됩니다.
그럼 Strike 2가 왜 사라진 것일까요? 현재 상황에서 두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프로그램 호환성 문제로 사라졌을 수 있습니다. Strike 2의 윈도우 쪽 프로그램에서 문제가 생겨서 최근 몇개월 동안 잠시 플러그인부띠끄 사이트에서 사라졌습니다.
놀라운 것은 너무 치명적인 문제라 돈을 주고 구입한 사람들도 한동안 다운로드를 막아 놓았다는 것입니다. 덕분에 저도 한동안 쓸 수가 없었네요 :) 얼마전에 잠깐 다시 복귀 했었는데, 또 다시 사라졌다는 것은, 아마도 프로그램에 다른 문제가 생겼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둘째는, 새로운 버전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Strike 2는 굉장히 오래된 악기입니다. 그리고 인터넷을 찾아보시면 AIR Music 회사의 모든 악기는 정말 항상 할인 중입니다. :) 어디서 듣기로는 많이 팔아서 다음 악기를 준비중이라고 들었는데, 혹시라도 깜짝 선물로 Strike 3를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제가 이 가상 악기를 쓰는 이유는 "편리하다" 그리고 "소리가 괜찮다" 입니다. Strike 2는 일단 드럼에 대해서 잘 몰라도, 얼마든지 본인의 곡 안에서 드럼을 쓸 수 있도록 준비해 놓았습니다. 아래 그림을 보시죠.
먼저 왼쪽에 탐색창에 보시면, 다양한 음악 장르에 따라서 드럼 셋트가 준비되어 있죠. 실제로 쓸만한 사운드와 셋트가 정말 많이 있습니다.
그림의 맨 아래에 보시면 보시면, VERSE, INTRO, FILL, BRIDGE, OUTRO, CHORUS 등이 배치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각 영역에 따라서 연주 패턴이 세개에서 다섯개 정도가 추가로 준비되어 있네요. 예를 들어서 VERSE 안에서도 다섯가지 패턴이 준비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 가상 악기가 매우 편리한 것은, 아래의 가상 악기의 키 맵이, 미디 컨트롤러 건반과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VERSE를 위해 준비해 놓은 연주 패턴을 사용하고 싶다면, VERSE에 해당되는 키를 누르면 되는 것입니다. 위에 그림 상으로 빨간 점으로 표시된 것이 VERSE 패턴이 연주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일단 키를 누르면, 다음 정보가 입력되기 전까지 계속 그 패턴을 연주해 줍니다. :) 이런 자동 연주 기능은 아래 왼쪽에 "STYLE"과 "LATCH"가 눌려진 상태에서만 작동합니다.
그리고 중앙의 드럼 이미지 오른쪽에는 COMPLEXITY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똑같은 VERSE 패턴도 이 수치가 올라가면 좀더 복잡하게 연주해 줍니다. 다시 말해서 연주 기본 패턴에 마치 사람이 실제로 연주하는 듯한 느낌을 더하는 것이죠. 솔직히 말해서 이 부분이 정말 끝내줍니다. 진짜 사람이 치는 것 같거든요. :)
게다가 이 기능에 더해서 왼쪽 아래에 JAM이라는 기능이 추가되어 있습니다. 마치 여러 악기들이 즉석에서 JAM으로 연주하는 것 처럼, 즉흥 연주의 느낌을 드럼에 추가해 줍니다.
아마 지금까지 위에 설명을 보신 분들은 갑자기 뭔가 깨달음이 오실 것입니다. :) 예를 들어서 본인이 곡 전체를 염두에 둔다면, 미디 건반에서 아래와 같이 타이밍에 맞춰서 키를 누르면 되겠죠.
INTRO => VERSE => FILL => BRIDGE => CHORUS => FILL => CHORUS => OUTRO 이런 식으로 가장 간단하게라면 미디 건반을 여덞번 정도 누르는 것으로 곡 하나의 드럼을 완전히 해결할 수도 있습니다. :)
실제로 글의 맨 마지막에서 들어보실 저의 곡에서도 그렇게 많은 키를 누르지 않았습니다. :) 드럼 채널의 입력을 일부분을 한번 보시죠. 이렇게 복잡한 드럼 연주이지만, 실제로 제가 누른 키는 기껏해야 전체 곡 안에서 스무번 안쪽입니다.
물론 Strike 2는 다른 악기들 처럼, 믹싱 창도 따로 있습니다. 믹싱 창 안에서 모든 사운드들을 자체적으로 믹스할 수 있습니다. 아래 그림을 한번 보시죠.
위에 그림에서 보시는 것 처럼 모든 드럼 파트들의 채널을 DAW 안에서 "멀티 채널"로 당연히 분리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 같은 경우는 위의 그림에서처럼 Out1 부터 Out4까지 채널을 분리했습니다.
채널을 다르게 설정하는 것은 각 드럼 파트 마다 좌우 PAN 조절 위에 설정 창이 존재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자신이 정한 드럼 셋트의 사운드를 나눠서 들으면서 멀티 아웃으로 뽑아낸 각 채널에 맞춰서 필요한 플러그인들을 따로 걸 수도 있겠죠.
물론, 이 플러그인을 잘 사용하려면 자신의 음악적인 감각이 매우 필요합니다. 많은 부분을 자동으로 처리해주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VERSE에서는 어떤 패턴이 좋을지, FILL 은 어떤 것이 좋을지 CHORUS는 어떤 것이 좋을지 그 모든 것은, 수 많은 패턴 중에 결국 본인이 고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물론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첫째로는, 드럼 셋트에 따라서 사운드 편차가 큽니다. 예를 들어서 스네어와 킥이 어떤 것은 좀 많이 작고, 또 어떤 것은 지나치게 큽니다. 그렇기 때문에 드럼 셋트를 정해도 본인이 섬세하게 사운드를 만지는 과정은 필수입니다. 밸런스 조절 뿐 아니라 저 같은 경우는 각 채널에 최소 4개자 정도의 플러그인과 센드에 걸어 놓은 리버브 딜레이는 추가로 사용합니다.
또 하나의 아쉬운 점은, 자동 모드로 연주할 때에 내가 원하는 타이밍에 딱 맞춰서 넣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FILL => CHORUS 혹은 INTRO => VERSE 의 형식으로 넣으려고 할 때에, 딱 타이밍을 맞춰서 넣기 위해서는 여러번 시도를 해야 합니다.
제 경험으로는 DAW 안에서 드럼 패턴을 인식할 때에 "엇박"이 아니라 "정박"을 기준으로 해서 인식하는 듯 합니다. 예를 들어서 메인이 되는 피아노 박자와 드럼 박자가 정박 기준으로 딱 맞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드럼을 맞추기 위해서 이리저리 맞춰보면서 수고를 해야 하지만, 실제로 드럼을 찍는 것 보다는 훨씬 편해서 저는 그저 감사하면서 쓰고 있습니다. :)
그렇다면 사용법은 어느 정도 알겠는데, Strike2로 어느 정도의 느낌과 사운드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저는 주로 발라드 쪽에 네가지 드럼 셋을 사용합니다. 제가 가장 최근에 만든 CCM 커버 곡을 한번 들어보시죠. :) 전체를 한번 부르고, 다시 한번 부를 때 부터 드럼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듣기에 어떠신가요? 제가 듣기에는 이 정도면 꽤 괜찮은 것 같습니다. :) 제가 다른 드럼 가상 악기를 하나 정도 추가로 써 보았지만, 저는 이 Strike 2가 가장 편합니다. 앞으로도 더 이 악기를 연구하면서 잘 사용해 보려고 합니다.
혹시 저처럼, 뭔가 저렴하면서도 쓰기 편리한 드럼을 찾으신다면 한번 사용해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지금은 아쉽게도 가장 저렴하게 팔던 플러그인부띠끄에서 막아 놓았지만 조만간 다시 오픈되면 구입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
절대 뒤를 돌아보지마 앞만 보며 날아가야해 너의 꿈을 비웃는자는 애써 상대하지마 - 신해철, 해에게서 소년에게 느헤미야 2:18 또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전하였더니 그들의 말이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 2:18 I also told them about the gracious hand of my God upon
me and what the king had said to me. They replied, "Let us start
rebuilding." So they began this good work. 2:19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이
말을 듣고 우리를 업신여기고 우리를 비웃어 이르되 너희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 너희가 왕을 배반하고자 하느냐 하기로2:19 But when
Sanballat the Horonite, Tobiah the Ammonite official and Geshem the Arab heard
about it, they mocked and ridiculed us. "What is this you are doing?"
they asked. "Are you rebelling against the king?" 세상에는, 두가지 부류의 사람만이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사람, 그리고 무시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이란
매우 단순합니다. 모든 성도는 오직 하나의 길로 걸어갑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붙들고 기도하며, 그 말씀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또 안타깝게도 많은 이들이, 우리에게 유일한 이 영적인 일을 소홀히 합니다. 성도이면서 말씀을 가까이하지 않으면서 영적인 복을 누리기를 원하고, 삶의
풍성한 열매들을 얻기를 원합니다. 자신의 일과 취미와 좋아하는 것들을 위해서는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사용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곳에는 그렇게 인색할 수가 없습니다. 몇 년 전부터, 드라마 바이블을 통해서 말씀을 가까이 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말씀을
듣는 많은 방법이 있지만, 저에게는 이것이 딱 맞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작년 한 해는 구약 한번에 신약 두 번을 듣는 계획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결단하고 실천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하게 인도하셔서 2020년 마지막 날에 성경 통독을 마쳤습니다.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을 듣는데 마음이 떨립니다. 그리고 오늘 2021년
1월 1일, 새로운
성경 일독을 시작하였습니다. 한해를 끝내는 마지막 날 느헤미야를 들으면서 마음에 들어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쌓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일을 시도하자, 대적들이
그를 업신여기며 비웃습니다. 대적들의 표정이 눈에 보이는 것 같습니다.
느헤미야를 향한 조롱이 가득합니다. 대적들의 비웃음은 결국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것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는데, 신해철의 노래 가사 중에 좋아하는 부분이
생각이 났습니다. “너의 꿈을 비웃는 자를 애써 상대하지마” 물론
우리는 우리의 꿈을 꾸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꿈을 꾸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변치 않는 진리인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고, 그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꿈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붙들고 믿음으로 살아갈 때에, 주님이 원하시는 그 꿈을 우리의 현실 속에서 만들어 내십니다. 작년 한 해는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온라인으로 교회 사역이
전환되면서 정말 많은 영상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박사 과정 논문도 완성해야 했습니다. 저 역시 변화된 환경 속에서 정신적인 압박을 이겨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매일 아침 일어나 삶의 우선 순위를 말씀에 가장 먼저 두고, 한 해를 믿음으로 달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결국 주님의 많은 소원들을 풍성하게 이루게 하셨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이 가장 안정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목회적인 그리고 저의
삶에서 중요한 계획들을 세우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룰 수 있도록 힘을 주셨습니다.
제가 귀를 열어 말씀을 읽을 때만이, 지적으로 그리고 정서적으로
주님의 뜻과 마음으로 제 자신이 채워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말씀을 가까이 할 때에, 제 자신을 돌이키고 회복시키는 놀라운 영적인 역사들이 있었습니다. 상황이나
감정과 상관없이 성경을 부지런히 읽는 것만이, 저의 영적인 삶에서 절대적인 것임을 드디어 가슴 깊이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코로나 상황은 여전히 암담합니다. 목회적인 상황도 녹녹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을 키우는 가정적인 환경도
여의치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상황 속에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변치 않습니다. 그리고 진리가 우리의 삶을 인도할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한 해에는, 말씀을 두 번 통독하는 것을 결심했습니다. 제가 영적인 결심을 한다고 해서, 모두가 환영하리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너가
성경을 통독한다고?” “너가 말씀을 붙들고 기도한다고?” “목회
하기에도 바쁜데 성경 들을 여유가 있겠어?” "말씀 읽는 다고 뭐 대단한 일이 일어나겠어?" “이런 어려운 시대에 무슨 영적인 축복이 있다는거야?”
느헤미야가 경험했던 비웃음과 조롱은 이 시대에도 가득합니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달려가야 합니다. 그것이 성도의 본질이며, 우리의 진정한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결심을 할 때에는 언제나 마음이 떨립니다. 그리고
흥분됩니다. 그것은 제가 대단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새언약의 새 마음을 저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제 안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무한하시기 때문에, 주님 안에서 무한한
꿈을 꿉니다. 부족한 나는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영적으로 어두운 사람들은 나의 부족함 만을 쳐다보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일하심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저 나는 주님이 맡기신 그 길을, 하루에
한걸음 씩 만 걸어가면 됩니다. 새로운 2021년, 하나님 안에서 꿈을 꾸고 주님 안에서 기대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행복.
잠언
24:16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 (개역개정) 24:16 for though a righteous man falls seven times,
he rises again, but the wicked are brought down by calamity.(NIV)
저도 다른 분들처럼 생활이 들쭉날쭉 할 때가 있습니다. 기분이
오르락 내리락 할 때가 있습니다. 마음에 결심한 것들을 이루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너무 탁월하게 살아서 스스로 놀랄 때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 못해서
우울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 자신이 도저히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종종 그런 때가 있습니다.
그때 마다 생각합니다. 다시 일어서자, 다시 시작해야해, 여기서 포기하지 말고 다시 한번 시작하는 것이
하나님 뜻이야, 그러니까 포기하지 말자.
오랫동안 신앙 생활을 하면서, 격려 보다는 정죄가 익숙한 삶을
살았습니다. 최근까지도 그랬습니다. 특히 다른 사람에 대해서
더 그렇습니다. 부끄럽게도 나 자신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하면서도, 다른
사람이 넘어지고 실수하고 죄 짓는 것은 그렇게 견디기가 힘들었습니다. 안타까운 죄인의 본성입니다.
제 자신이 설교하고, 또 설교에서 듣는 대부분의 이야기는, 인간이 얼마나 죄인인가에 대한 지적이었습니다. 나쁜 이야기는 아닙니다. 충분히 성경적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많이 놓친 듯 합니다.
인간은 죄인이며, 죽기 전에 완전한 성화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넘어진 사람, 실패한 사람이 다시 일어서기 보다는, 그 사람이 얼마나 비참하게 실패했는가를 지적하는 것이 저의 혹은 우리의 태도가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요즘에 제 자신을 많이 돌이키고 성찰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굉장히 긴 레이스입니다. 한번 넘어졌다고 해서, 그 사람이 넘어진 그 자리에서 평생 머물러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여전히
본질적으로 죄인이지만 놀랍게도 법적으로 완전히 의롭다고 인정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실패하더라도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라도 예수님 안에 있다면, 그 사람의 실패는 영원한 실패가 아닙니다.
실패보다 더 관심을 가져야하는 것은, 실패 이후에 일어서는 것입니다. 다시 일어서는 것, 다시 희망을 가지는 것입니다. 열 번의 계획 속에 한번의 성공이라면, 그 한번의 성공에 감사하고
싶습니다. 이제는 정말 실패한 사람에게 손을 내밀고 싶습니다. 누구라도
한번 잘한 것이 있다면 그 사람의 친구가 되어 많이 격려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고 계속 열심으로 걸어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삶의 마지막 날에 뒤를 돌아볼 때에, 우리가 넘어진
그 순간마다 역사하셨던 거대한 하나님의 손을 분명히 보게 될 것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