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에게 있어서 삶과 죽음은 맞닿아 있습니다. 이것은 그저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그렇습니다. 오늘은 누군가의 탄생을 함께 기뻐하시만, 또 내일은 누군가의 죽음을 함께 가슴 아파하며 유가족을 위로합니다.
죽음에 대한 감각을 가지는 것은 참으로 유익합니다. 왜냐하면 삶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오늘이 내 삶의 마지막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그 숭고한 마음은, 오늘 내 설교가 마지막 설교일 수도 있다는 그 절박함은, 우리의 태도의 근본을 뒤흔듭니다.
임종인 장로님을 처음 뵌 것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 교회를 떠나셨다가 다시 돌아오셨습니다. 연세가 80이 훌쩍 넘으셨지만 예배를 사모하시고 빠지지 않고 나오셨습니다. 다만 섬겨야 하는 성도님들이 여러분이라, 깊은 관계를 가지기 전에는 그분의 마음까지 알 수는 없었습니다.
어느 날 임장로님께서 속하신 순 모임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제일 연장자이시기 때문에 순장님께서 장로님에게 대표 기도를 부탁하셨습니다. 그때 그분의 진지한 목소리를 처음 들었습니다. 진실하고, 순수하고, 간절하게 기도하시는 그 음성을 처음 들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바로 눈 앞에 계시는 것처럼 기도하시는 그 간절함이 저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참 감사했던 것은, 저를 위해 축복하며 기도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저의 목회를 위해서, 저와 저희 가족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주셨습니다. 손자뻘에 불과한 목회자를 귀히 여겨주시고 또 기도해 주심에 참으로 마음이 기뻤습니다. 목회자는 받는 것을 기대하지 않고 누군가의 안부를 묻는 사람이기에,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주는 분들이 특히 더 고마운 듯 합니다.
암 투병 중이시던 장로님께, 더 이상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댁에서 호스피스 케어를 하시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댁으로 찾아갔습니다. 권사님 혼자 남편을 돌보셔야 해서 집이 정리가 안되어 부담스러워하셨지만, 꼭 찾아뵙고 싶었기 때문에 조금은 무리를 하였습니다.
그래도 장로님이 의식이 있으셨습니다. 비록 힘이 없어 많은 말씀은 못하셨지만, 권사님께서 장로님이 얼마나 귀하게 그동안 교회를 섬겼는지,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얼마나 선하게 대하셨는지를 알려주셨습니다. 권사님께서 부탁하셔서 면도기로 장로님 면도도 해드렸습니다.
시편 23편을 천천히 크게 읽어드리고 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아프신 분들을 찾아뵈면 크게 기도합니다. 때론 그래서 목이 상하지만, 그저 잠잠한 기도로는 제 마음의 간절함을 다 표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앞에 두고, 삶의 가장 큰 어려움과 고통 앞에서 어찌 제가 조곤조곤 기도할 수 있겠느냐는 마음에 결단이 있기 때문입니다.
잠깐 고민하다가, 장로님의 가슴에 올려진 손을 조심스럽게 꼭 잡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장로님께서 힘을 내서 제 손을 끌어 올리시고는 결국에는 본인 머리에 제 손을 올리셨습니다. 말씀은 안 하셨지만, 안수 기도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장로님의 마지막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평소보다 더 크게 그리고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이 어려운 시간을 오직 목자 되신 주님을 의지할 수 있기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지만 이겨내실 수 있기를, 성령께서 주시는 하늘의 평안으로 가득 채워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기도의 문장이 정지할 때마다 힘을 내어 아멘하시는 그 음성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심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 제 평생에, 장로님의 머리에 안수하고 기도한 것은 처음인 듯 합니다. 그리고 죽음을 앞에 두신 분을 놓고도 그러합니다. 장로님의 그 순간은 단순히 어린 목사의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종을 존대하며 간절히 주님의 은혜와 복을 사모하였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기도가 끝이 나고 장로님과 권사님 격려해 드리며 돌아오는 발걸음이 그래도 조금은 가벼웠습니다. 넘치게 위로하시는 주님의 역사를 함께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집례한 어제의 하관 예배를 마지막으로, 임장로님의 모든 장례 절차를 마쳤습니다. 우리의 육신이 무너져도 성도는 주님 앞에 가장 아름다운 존재라는 저의 설교는, 단순히 설교가 아니라 저의 깊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천국에서 설교를 들으실 장로님에 대한 진실한 고백이었습니다. 간절하게 하나님의 바라고 그분의 복을 사모했고 누렸던 장로님이야 말로, 목회자로서 저의 삶 속에 오래 남으실 것입니다.
임장로님의 관이 내려가는 것을 더 가까이 다가가서 보았습니다. 그 순간이 마치 저에게는 친할아버지께서 하관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멀지 않아 장로님을 뵐 생각에 마음에 위로가 있었습니다. 임장로님을 뵙는 그 날에 더 기쁘게 만나기를 원합니다. 저도 장로님처럼, 누군가를 간절하게 축복하는 삶으로 살았다고 조금은 자랑하고 싶습니다. 장로님 다시 뵐 그 날까지 부끄럽지 않은 목회를 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팀 켈러 목사님의 설교 한편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까요? 저는 대략 2-3주 정도로 잡고 있습니다. 당연히 모두에게 그런 것이 아니라 저에게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충분히 듣고, 충분히 고민하고, 혹시라도 필요한 부분을 더 찾아보고 공부하는 시간이 그렇습니다.
설교를 듣고 공부하는 것을 공부 자체로 받아들이면 참 괴로울 듯 합니다. 하지만 팀 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것이 너무 즐겁습니다. 참 신기하게도, 이분의 설교를 들을 때에 저의 설교의 아이디어가 더 많이 떠오르고 종종 마음이 벅찹니다. 저는 성령님의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이 저의 마음 안에서 움직이는 것을 경험합니다.
팀 켈러 목사님이 소천하신지 벌써 시간이 꽤 지났습니다. 그분의 소천의 소식을 들으면서 마지막의 그분의 고백들을 살펴보면서, 표현이 이상할지 모르겠지만 정말 부럽고 멋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셨고, 그분의 죽음에 대한 태도는 성경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설교가 참 좋았습니다. 죽음에 대한 설교를 들으면서 그분의 마지막 모습은 이미 충분히 준비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죽음을 정면으로 맞서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혹시라도 중병으로 인해서 병원에 입원하신 분들을 찾아보면, 그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믿음으로 견딘다는 것은, 건강하고 평온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임을 금방 깨닫게 됩니다.
설교의 서두에서 죽음에 대한 두가지 태도를 언급합니다. 하나는 스토익 방식이고 하나는 모던 방식입니다. 스토익은 죽음이 끔찍한 것임을 알지만, 감정을 완전히 닫아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현대적인 방식인데, 죽음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죽음은 그저 자연에서 시작한 인간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세뇌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팀켈러 목사님은 논리적으로 분명하게 반박합니다. 여러 문헌들을 이용해서 죽음이라는 것 앞에서는 마땅히 분노해야 함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죽음은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며 인간의 마음의 근원에 두려움과 공포를 주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어린 아이의 마음에 대한 예가 등장할 때에는 청중들과 함께 몇번이나 웃었는지 모릅니다.
이번 설교의 큰 장점은, 죽음이 사랑의 관계를 다 빼앗아 간다는 것을 포착한 것입니다. 어떤 일에 대한 사실 자체를 나열하는 것은 설교가 아닙니다. 그것의 성경적인 의미를 밝혀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부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너무나 단조로운 사실이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를 드러내는 것은 탁월함의 결과입니다. 죽음은 나로부터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아가며, 사랑하는 사람들로 부터 나를 빼앗아 간다는 그 문장은 정말 탁월했습니다.
죽음에 대한 논증 이후에는 예수님을 설명합니다. 전통적인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에대한 설명입니다. 여기서 좋았던 것은,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신 분이신데, 죽음에서 다시 돌아오신 분이신데 왜 그분이 우리에게 중요한가를 분명하게 설명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2장 10절을 인용하면서 그 부분을 설명합니다. 논리적으로 9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개역개정 성경에는 "구원의 창시자"로 번역된 부분인데, 이 부분을 해석하면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champion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원어적으로 대리자의 측면이 있고 그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신 분이심을 설명합니다.
약간 아쉬운, 혹은 추가적인 공부가 필요한 부분은 제가 가지고 있는 저명한 원어사전을 살펴보아도 대리자의 개념까지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마 본인이 보신 주석의 해석 가운데 일부분을 차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로서는 모든 히브리서 주석까지 다 살펴볼 수는 없으니, 일단 이 개념을 마음에 담고 넘어갑니다.
특별히 좋았던 부분은, 앞에서 죽음이 우리의 사랑의 관계를 다 무너뜨리는 적이라면, 결국 천국은 그 사랑의 관계를 완벽하게 회복하는 것임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를 인용하셨는데 저에게는 새로운 통찰력입니다. 천국을 단순히 영원히 예배를 드리는 곳으로 묘사하는 것은 항상 부족하다고 느꼈습니다. 천국은, 진정한 사랑의 회복이며, 다른 이의 행복을 통해서 내가 행복을 경험하는 곳이라는 그 논리가 참으로 마음에 오래 남았습니다.
최근에 여러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천국에 들어간다는 그 복음이 굉장히 폄하된다고 느꼈습니다. 저는 완전히 반대합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가장 고귀한 소식입니다. 그리고 팀켈러 목사님은 그 놀라운 복음의 소식을 탁월하게 깊이있게 그리고 설득적으로 설교합니다. 이 소식이 저의 기쁨입니다. 가장 큰 감사가 마음에 넘쳐납니다.
과연 저는 저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모든 것이 무기력해지고 모든 것이 의미 없다고 느껴질 만한 그 절망의 상황에서 저는 어떤 태도를 보이게 될까요? 종종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준비합니다. 누구에게도 죽음은 멀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끔찍한 죽음 앞에서, 죄의 결과의 최종적인 그 대적 앞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합니다. 주님의 생명과 승리로 저의 두려움을 잠재웁니다. 그리고 죽음은 절대로 끝이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영광과 사랑 속으로 들어감을 믿고 기뻐합니다. 천국에서 저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이것이 저의 가장 큰 소망입니다.
삶이 어렵지
않은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누구나 자신의 삶에 대해서 아파하고 고민할 것입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너무나 비관적으로 보이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감사보다는 고통과 비참함이 가득한 것이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삶을 인정합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때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선포합니다.
“인생의 때”에 대한 가장 유명한 본문의 설교를 준비하면서, 마음이 두근거렸습니다. 물론 설교할 것이 기대가 된 것도 있지만 긴장이 되었습니다. 혹시 지난 주처럼 차가 도로에 서면 어떻게 하나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의 저의 때는, 하나님께서 그 시간에 도로에서 떨면서 주님께 기도하도록 하신 때입니다. 그리고 또 오늘은, 무사히 설교단에 서게 하셨습니다.
어린 시절보다는 저의 내면이 참 강해졌지만, 또 한편으로는 더 연약해진 듯 합니다. 마음에 갈등과 낙심하는 일들이 있었는데, 이번 설교를 통해서 제 자신이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그것이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전도서 설교는 한 구절 한 구절의 의미보다는, 전체적인 맥락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그리고 주님을 향한 참된 믿음으로 영원하신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것은, 동일한 본문을 보면서도 어떤 스터디 바이블들은 한 없이 비관적이고, 또 어떤 책들은 매우 긍정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본문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희망적이고 또 영적인 소망들을 담고 있다고 이해했습니다.
스터디 바이블들이 비슷한 내용들을 담고 있었지만, 평소에 자주 보지 않던 Defenders’ Study Bible의 내용이 은혜롭고 참 좋았습니다. 모든 성경 구절에 대한 설명이 있지는 않지만, 내용이 참으로 충실하고 또 은혜롭습니다.
Ecclesiastes 3:1
a time to every purpose. In Ecclesiastes 3:2–8 of this chapter there is a
remarkable listing of twenty-eight “times,” arranged in fourteen pairs of
opposites (e.g., “a time to be born, and a time to die”). Every timed event has a “purpose” (Ecclesiastes 3:1) and every
thing is “beautiful” in God’s time for it (Ecclesiastes 3:11). Even when in our time,
we may not understand how a particular event can be either purposeful or
beautiful, we can have faith that, in God’s time, it is (Romans 8:28).
Although it is beyond our finite comprehension, it is still bound to be true
that the infinite God “worketh all things after the counsel of His own will” (Ephesians 1:11).
Welwyn Commentary 전도서 주석은 사실 언제 구입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전도서주석을 찾아보니 이미 가지고 있더군요. 다만 John Currid의 주석을 좋아하는데 내용이 굉장히 탄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덕분에 1절에 대한 이해부터 자신 있게 논지를 펴 나갈 수 있었습니다.
The opening line of this verse
literally reads, ‘To everything there is an appointed time.’ Some translations render ‘appointed time’ as ‘season,’ and that certainly is a proper
translation of the word. However, it often is better translated as a reference
to a set, fixed time. For example, Ezra tells the people of Judah to come to
Jerusalem as follows: ‘Let all in our cities who have taken foreign wives come at
appointed times’ (Ezra 10:14). Also, Nehemiah says that he established the work
of the priests and Levites in Jerusalem and that he ‘provided for the wood offering
at appointed times’ (Nehemiah 13:31). The Hebrew word in those cases is not
referring to some generic time or season, but to definite times. Thus, it is
likely that the proposition of the verse in front of us simply means that for
everything that happens there is a set, fixed, and appointed time.
11절과 12절에대한이해는, 최근에들었던팀켈러목사님의로마서설교에먼저영향을받았습니다. 영원을사모하는마음은모든이들이일반은총의관점에서는가진것이지만, 그러나그리스도안에서참된하나님의자녀의특징으로더깊이들어갔습니다. 그리고 12절에말씀처럼, 참으로기뻐할수있는사람은오직그리스도안에있는자만이그러할수있다고논리를전개했습니다. 이부분은어떤주석의도움을받지않고제안에서묵상한내용을풀어낸것입니다.
14절과 15절은시간관계상거의언급하지않았습니다. 특별히 15절은해석의관점이상당히복잡하게얽히고있어서, 새벽에간단히설명하기는무리라고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14절에대한과학적이해는다음에언젠가이본문으로설교하게된다면충분히주목할만한부분이었습니다.
Ecclesiastes 3:14
shall be for ever. In addition to emphasizing
the immutability of God and His works, this passage anticipates the great
scientific principle of conservation (conservation of energy, mass, momentum,
charge, etc.). Nothing is now being either created or annihilated. An entity
may be changed in character and even deteriorate in quality, but it must be
conserved in quantity.
저도 저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때를 분명하게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정하시고 저의 미래를 이끌어가십니다. 비록 제 눈에는 많은 부분이 답답하고 아쉽고 때론 슬프지만,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소망과 은혜와 기쁨을 누립니다. 제가 설교한 그 내용에 제 자신이 먼저 진실하기를 원합니다. 저 역시 은혜를 누리며, 주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 전도서 3장 1-15절설교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궁금증을 다루고 있는 본문입니다. 아마도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이런 궁금증이 있을 것입니다. 도대체 내가 원하는 일은 언제 이루어질 것인가? 예를 들어서, 내 사업은 언제 성공하게 될 것인가? 내 자녀는 언제 결혼하게 될 것인가? 이 고난의 시간은 언제 지날 것인가? 이런 궁금증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은, 그러한 "언제"라는 궁금증에 대한 중요한 답변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1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1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 눈을 사로잡는 것은 "범사에" 라는 표현입니다. 범사라는 것은 모든 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위에서 우리가 언급했던 모든 질문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다 포함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부분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2절부터 8절까지 말씀하십니다. 이 부분을 읽어보면 어떤 규칙이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2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치 이런 것처럼, 다양한 경우의 처음과 끝을 포함해서 8절까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14개의 상반된 상황에서 발생하는 28개의 특정한 시간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체라는 개념"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14와 28이라는 숫자는 성경에서 완전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자주 사용되는 7의 배수입니다. 쉽게 말해서 이 안에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점은 분명한 것입니다. 2절에서 8절까지는 1절의 말씀을 풀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인생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에는 누군가가 정해놓은 때가 있다 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은 아무 목적 없이 아무런 방향 없이 우연히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혹은 세상 안에 속해 있는 어떤 존재가 그 때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뛰어넘으시는 창조주이신 여호와께서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의 그 정확한 때를 정하신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9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9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라고 말씀하십니다. 언뜻보면 이 말씀은 굉장히 부정적이고 염세적인 분위기를 보이고 있습니다. 앞에 내용을 생각하면 그렇게도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천하의 모든 일들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고 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일어난다면 그거 일 좀 해봐야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렇게 들리는 것이 사실입니다.
10절에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10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의미인가?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 행해야 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주신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행하기 위하여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일이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결정을 넘어설 수는 없다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11절에 너무나 감사한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의미인가? 우리 인간은 본능적으로 좋은 쪽을 항상 바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 보다는 당연히 생명을 원하고 전쟁보다는 당연히 평화를 원하고 우는 것 보다는 당연히 웃는 것을 원하는 것이지 잃는 것이 아니라 얻는 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을 누가 깨닫는 것인가” 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나 깨닫는 내용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상식과 본능을 아득히 뛰어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11절에 보니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이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특징입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것을 본능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거절하는 사람까지라도 이런 영원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 영적인 아주 기초적인 개념들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더 깊이 들어가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 라는 이 영적인 놀라운 진리는, 하나님을 믿고 그분을 신뢰하는 자들에게만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8장 39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의미인가?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이 놀라운 고백,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 라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어지는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놀라운 믿음의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12절과 13절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3:12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3:13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늘 말씀의 겉모습만 보면서 굉장히 부정적인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인간이 그렇게 바라고 소망하고 갈망하는 것이 있지만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며 인간이 바꿀 수 없는 것이다 라는 말씀 때문에 그렇게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이야기가 생각이 났습니다. 초대 교회의 순교자 폴리캅 감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폴리캅이 박해 가운데 잡히게 되었습니다. 로마의 황제를 주님으로 부르고 희생 제사를 드리라고 협박 당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욕하면 자유를 얻을 것이라고 회유 당했습니다. 그때 이렇게 그가 대답했습니다. “내가 86년 동안 그분을 섬겨왔지만 그분은 내게 절대로 해를 입히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나의 왕이요 나의 구주이신 그분을 욕할 수 있겠습니까?”
불에 태워서 죽이겠다는 협박 앞에서 그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한 시간 동안 타다가 잠시 후면 꺼져버리는 불로 나를 위협하고 있지만, 경건치 못한 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심판과 영원한 형벌의 불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지체하고 있습니까? 당신이 원하는 대로 속히 시행하시오!” 이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는 확신과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의 안면에는 은혜가 충만했다 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완벽했습니다. 그러나 뱀의 등장으로 이 아름다움은 깨어집니다. 창세기 3장은 정말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묵상의 내용들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말로 형용할 수 없을만큼 완벽했던 하나님의 창조를 무너뜨리는 악한 존재의 간교함과, 인간의 처참한 배신 그리고 하나님의 충격적인 은혜를 보여줍니다.
교육학적으로 볼 때에, 성경에 등장하는 첫 질문을 뱀이 사용한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뱀은 결코 억지로 인간에게 선악과를 먹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뱀은 질문을 사용하여서 인간의 마음을 떠 봅니다. 악한 질문에 여자가 걸려듭니다.
뱀은 여자에게 거짓말을 합니다. 사탄은 거짓의 아비입니다. 거짓은 단순한 잘못의 차원이 아니라, 인류의 첫 시작부터 인간을 망쳤던 가장 흉악한 죄입니다.
뱀의 목적은, 하나님을 의심하고 그분의 권위에 도전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모든 사랑을 쏟아 부으심이 너무나 분명하지만, 어리석게도 인간은 하나님을 의심합니다. 단순히 금하신 것을 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버리고 배신하고 그분처럼 되고자 하는 창조물로서의 본분을 잊어버린 것이 바로 타락의 본질입니다.
Grace and Truth 스터디 바이블은, 아주 훌륭하게 3장의 내용을 설명해냅니다. 특별히 인간의 타락과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3장의 내용을, 신약과 충실하게 연결합니다. 여자가 열매를 보았을 때에 그녀의 눈에 비친 나무에 대한 묘사를, 요한일서 2장의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상의 자랑"과 연결합니다.
여인이 열매를 볼 때에, 자신을 지혜롭게 해 줄 것 같았다고 여긴 것은 너무나 충격적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망가진 이성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창조주께 순종하지 않고 어떻게 지혜로워질 수 있을까요? 그러나 인간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가능하다고 여깁니다. 여전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야 말로 지혜 그 자체입니다.
선악과의 의미에 대한 논의는 더 공부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넷바이블의 창세기 2장 9절의 각주는 큰 도움이 됩니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그러나 망가진 그들의 이성은, 그 능력을 지극히 제한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선악을 구별할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선을 행할 의지도 없고, 그것을 완벽하게 이룰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대단한 존재인양 하나님 앞에서 소리치고, 불완전한 옳고 그름을 따지고 들어오는 교만한 인간들의 모습이 이 장 안에서 겹쳐 보입니다.
여자와 남편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을 때에,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수치심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피해야 했습니다.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그들의 관계에 절대적인 벽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도 질문을 사용하신다는 것이 매우 놀랍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질문 속에서 아담을 향한 연민과 슬픔을 느낍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아담과 아내가 하나님 앞에 잘못을 인정하기를 기다리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비난하며, 서로 상대방에게 그리고 뱀에게 책임을 전가할 뿐입니다. 인간 관계에서 흔히 보는 거짓말, 책임 전가, 비난, 이 모든 것들은 죄 그 자체이며 죄로 인한 결과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의심한 그 순간, 사실상 인류의 삶을 끝나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역사는 진행이 됩니다.
하나님의 반응은 즉각적입니다. 뱀은 영원히 저주를 받습니다. 그리고 여인의 후손을 통하여서 여인의 후손은 치명적이지 않은 상처를 입을 것이지만, 뱀은 치명적인 상처를 받을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서 가장 가까워야할 부부 사이에 견고한 관계가 깨어집니다. 갈등이 들어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자 명령이었던 일은, 자신의 삶을 위한 고통스러운 목표가 됩니다. 일은 축복이며 동시에 고통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임을 말씀합니다. 모든 인간은 죽게 됩니다.
처음으로 깨달은 것은, 아담은 자신의 아내의 이름을 바로 이 시점에서 지었다는 것입니다. "하와"의 의미는 "생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담은 이렇게 끔찍하게 망가진 자신의 죄의 결과 속에서도, 죽음을 이기게 하실 하나님의 생명의 약속을 붙듭니다.
자신의 죄로 인해 수치를 받아 마땅한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께서 또 다른 생명을 죽이심으로 그들의 수치를 가려주십니다. 인류는 동산에서 영원히 쫓겨납니다.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을 두심으로 동산을 막으십니다. 그러나 이후에 하나님께서 만드실 성막 안에 그룹이 다시 등장합니다. 스터디 바이블은 이것을 상기시키며, 인류는 동산으로 돌아갈 수 없지만, 하나님은 은혜로 동산을 인류에게 가져다주실 것임을 보여줍니다.
목회자는 많은 성도님들의 장례식에 참석합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입니다.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아픔과 큰 슬픔을 느낍니다. 비통함을 경험합니다. 인류의 죄가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그리고 얼마나 큰 댓가를 치러야 하는 것인지를 생생하게 체험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붙듭니다. 우리에게 있는 "유일한" 소망이자 생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끔찍한 인류의 배신과 범죄의 그 순간에, 그리스도를 예언하시며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그 황홀한 약속은 우리에게 이루어졌으며, 오늘도 우리에게 그 약속을 적용하시며 인도해 가십니다.
Genesis chapter 3 is the most miserable story in human history. Everything was perfect however, humanity doubted the authority and love of their creator.
I see that some people blame God for the sin of Adam and Eve. But we see the apparent fault of two people. The serpent did not force them to sin. They chose to sin with their own decision.
Actually, when the people chose to betray God, the history of humanity should be ended. However, his grace is abundant and indescribable. God punished the serpent and make the grace covenant for Adam and Eve. God permit the offspring of her to save the world.
We see Jesus as the accomplishment of God's covenant. In Jesus, we walk our daily life in peace even with an enemy. He is true life for the sinners. We overcome the ultimate enemy which is death through Jesus Chr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