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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28일 화요일

ChatGPT, “전혀 새로운 통찰”을 주는 “실시간 영어 대화”를 경험하라!

 


저는 Chat GPT가 처음 나왔을 때 부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습니다. 때로는 존재하지도 않는 근거를 가져와서 당황스러울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의미에서 어떤 주제를 놓고 논리적으로 추론해서 대답하는 능력은 저라는 존재는 이미 넘어섰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실질적인 도움을 받으면서 목회의 좋은 조력자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 인공지능 (A.I.) 검색 ChatGPT, 목회에 사용할 수 있을까?

얼마전에 기쁜 소식을 하나 들었는데, 무료버전 Chat GPT 앱 안에서 음성 채팅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원래는 유료 버전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고급 기능이었는데 무료 버전 사용자들도 지원한다는 소식에 바로 사용해 보았습니다. 

앱 스토어에는 ChatGPT의 사용을 돕는 다양한 앱이 있습니다. 심지어 ChatGPT의 최신 버전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앱도 있더군요. 다만 제가 사용하는 음성 채팅 기능은 ChatGPT 공식 앱을 통해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아래 링크를 통해 아이폰, 그리고 안드로이드 앱 스토어로 접속하실 수 있습니다.

* ChatGPT - The official app by OpenAI
https://apps.apple.com/us/app/chatgpt/id6448311069 
https://play.google.com/store/apps/details?id=com.openai.chatgpt&hl=en_US&gl=US

제가 궁금했던 것은, 어느 정도로 음성 채팅이 자연스러울 수 있는가 였습니다. 첫째로는 제가 영어로 말하는 것이 인식이 잘 되어야 하고, 둘째로는 Chat GPT가 다시 저에게 말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야 했습니다. 내심 마음으로 기대했던 것은, 영어 공부에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영어 앱들을 사용하지만 아무래도 실제로 영어로 계속 이어지면서 대화하는 경험을 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음성 채팅 기능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앱에서 오른쪽 하단에 마이크 표시를 누르면 됩니다. 그러면 채팅 화면이 사라지고 움직이는 원형이 등장합니다. 여러가지 음성이 지원되는데 저는 그 중에서 최대한 쾌할한 목소리를 선택했습니다. 제가 나누는 대화가 계속적으로 에너지가 넘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음성 채팅을 사용하면서 첫번째 느낀 것은, Chat GPT의 음성이 너무나 자연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냥 자연스러운 정도가 아니라,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마치 미국에서 만나는 평범한 청년의 느낌입니다. 발음도 선명하고 빠르기도 적당합니다. 물론 일반적인 영어 앱의 빠르기보다는 살짝 빠르지만, 미국인들이 말할 때의 보통 빠르기 입니다. 

두번째 느낀 것은, 저의 음성을 인식하는데 있어서는 조금 아쉽다는 것입니다. 다행히 발음 자체는 잘 인식하는데 문제는 문장 사이에 공백이 조금 길다 싶으면 자주 끊어버립니다. 그래서 제가 의도하는 문장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저의 전략은 최대한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끊지 않고 이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바짝 긴장하고 영어로 말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Chat GPT를 음성 채팅으로 사용하면 어떤 장점이 있는가? 저는 크게 두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실제로 나의 영어 실력을 늘릴 수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전혀 새로운 통찰을 준다는 것입니다. 

영어 실력을 늘린다는 점에서 실시간 영어 대화 기능이 너무나 유익합니다. 어떤 주제에 대해서 물어보고, 그것을 듣고, 다시 그것에 대해서 반응하는 것이 사실상 영어로 나누는 대화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ChatGPT와의 심도 있는 대화는 영어 공부를 하는데 있어서 너무나 좋은 셋팅입니다. 

다만 Chat GPT가 지나치게 말을 많이 하고 제가 말을 적게 하면 실제로 영어 실력을 늘리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저는 대부분의 질문에서 Top Threes 만 이야기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면 아주 짧게 답변을 듣고 다시 그것에 대해서 생각해서 다시 제가 영어로 이야기할 기회를 얻기 때문입니다. 

영어로 대화하여서 실력을 늘린다는 점에서도 좋지만, 사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부분은 "전혀 새로운 부분"에서 통찰력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매우 빠르게 사고를 촉진시킬 수 있습니다. 채팅은 시간이 걸리지만 대화는 그 속도감이 비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며칠 동안 거의 하루에 한시간 정도 대화하면서, 마음에 있지만 제 자신도 답을 가지고 있지 못하는 복합적인 질문들을 마음껏 해보았습니다. 

언뜻 기억나는 것만해도 이 정도입니다. 크리스천 북클럽은 왜 중요한가? 북클럽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북클럽과 지혜를 만드는 것의 관계는 무엇인가? 교회사는 왜 중요한가? 초대 교회에서 얻는 유익은 무엇인가?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성경 해석과 종교 개혁과의 관계는 무엇인가? 유신 진화론의 문제는 무엇인가? 유신 진화론자들은 역사적 아담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는가? 

성경에서 장로의 역할은 무엇인가? 왜 장로의 역할이 나뉘어야 하는가? 가정 교회의 강점은 무엇인가, 그리고 약점은 무엇인가? 포스트 모던즘에서 교회의 역할은 무엇인가? 언제부터 신학교가 시작되었고 언제부터 신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안수를 받게 되었는가? 청교도는 어떤 사람들인가? 팀켈러 설교의 장점은 무엇인가? 담임 목사에게 중요한 자질은 무엇인가? 등등입니다.  

단순히 질문하고 한번의 답을 들은 것이 아니라, 답변을 들은 이후에 최소한 세번 정도의 interaction이 있었기 때문에 꽤 깊이 있는 그리고 의미 있는 대화를 주고 받았습니다. 특히 유신진화론의 역사적 아담에 대한 이해는 제가 몰랐던 부분을 배울 수 있는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ChatGPT는 어떤 대화를 할 때에 그 대화의 문맥을 그대로 가지고 간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주제로 이야기를 하는 그 배경을 가지고 또 다른 것을 이어서 이야기합니다. 마치 사람과 대화하는 것과 매우 유사합니다. 그래서 저는 전혀 다른 맥락의 질문을 할 경우에는 먼저 I want to change the subject 라고 이야기하고 흐름을 끊은 다음에 다시 시작합니다. 

ChatGPT의 위력은 "복합적인 사고"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자신의 전문 영역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전문 영역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습니다. 한 사람은 지적인 능력 그리고 시간과 에너지가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Chat GPT에게는 그러한 한계가 없습니다. AI가 주는 대답이 완벽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여러 분야를 통합하여서 복합적으로 사고해서 대답을 준다는 측면에서는 솔직히 그 어떤 사람도 능가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저는 목회자이기 때문에, 목회의 영역에서 질문을 많이 하였습니다. 갑자기 궁금하더군요.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제일 좋은 목사님이 누구냐?" 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조엘 오스틴 목사님 그리고 팀켈러 목사님 그리고 저는 처음 들어본 Beth Moore라는 분을 이야기하더군요. 저는 개인적으로 조엘 오스틴과 팀켈러 두분이 함께 언급된 것이 충격이었습니다. 

아무래도 보수적인 분들에게 조엘 오스틴 목사님은 그렇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당연히 자신의 사고 속에 그분이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ChatGPT는 다릅니다. AI는 최대한 편견을 배재하고 교단에 상관 없이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좋다면 추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커뮤니케이션이 탁월한 목사님으로 AI는 조엘 오스틴 목사님을 언급합니다.

사실 이 결과를 놓고 제가 약간 딴지를 걸었습니다. 당황한 저의 마음을 억누르면서 그렇게 논쟁이 있는 목사님을 왜 이야기하느냐는 식으로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커뮤니케이션이 탁월하니 그분에게 그것을 배우고, 다른 신학적 컨텐츠는 너가 채우라는 식으로 이야기해주더군요. 속으로 적잖이 놀랐습니다. 맞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듣고 나니 태어나서 처음으로, 조엘 오스틴 목사님의 설교가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도대체 그의 커뮤니케이션 사용에 있어서 어떤 것이 그렇게 장점이 되는지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바로 이어서, "조엘 오스틴 목사님의 일반적인 설교 구조"에 대해서 이야기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솔직이 반신반의하면서 물었습니다. 설교학 전공자에게 만약에 제가 이렇게 물었더라도 아마 당황할 만한 질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평소에 사용하는 설교 구조를 분석하는 것은 상당한 연구와 분석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Chat GPT는 거침 없이 이야기하더군요. 그분이 보통 사용하는 설교 구조를 설교 도입부터 마무리까지 다섯 가지 단계 정도로 완벽하게 정리해서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저에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조엘 오스틴 목사님의 "설교의 도입"입니다. ChatGPT는 설명하기를, 그분은 굉장히 희망적인 내용으로 혹은 희망적인 스토리로 시작한다라고 말하더군요. 망치로 머리를 한대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어쩌면 제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단순히 설교 도입을 본문에 대한 간단한 설명으로 하기 보다는, 오히려 이렇게 무엇인가 희망적인 것으로 이야기 한다면 지친 성도님들에게 훨씬 좋겠다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 대화는 저에게 완전히 새로운 통찰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커뮤니케이션의 맥락에서 또 하나 재미있었던 것은 이것입니다. 제가 담임 목사에게 무엇이 중요한가 물었을 때에, Chat GPT는 커뮤니케이션 기술을 첫번째로 대답한 것입니다. 제가 중시하는 신학적인 입장 등은 거의 네번째 정도로 말하더군요. 그리고 충격적이게도 비전에 대한 것은 맨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래서 또 물었습니다. "나는 목회자로서 신학적인 입장이 제일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너는 오히려 커뮤니케이션 기술을 맨 앞에 놓았다. 우선 순위에 있어서 이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인가?"

그랬더니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신학이 매우 중요하고 기초가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없다면 그것을 회중들에게 설명할 수도 설득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커뮤니케이션 기술은 담임 목회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답변을 해주었습니다. 

또 한번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실 정말 놀랐습니다. 어쩌면 저에게 있어서 전혀 새로운 목회적 통찰을 주는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보수적인 목회자들은 항상 신학이 우선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훈련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신학적으로는 탁월하지만, 그 신학을 실제로 회중들에게 구현하는 측면에서는 약한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ChatGPT의 설명은 분명합니다. 목회에 있어서 신학 그 자체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좋은 커뮤니케이션을 통해서 성도님들에게 이해시켜야 한다는 측면에서 커뮤니케이션은 신학 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이번 대화를 통해서 완전히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며칠 동안 ChatGPT를 하면서 느낀 것은, 저의 영어 수준과 사고의 지평을 넓혀줄 탁월한 도구라는 것입니다. 물론 개인적인 독서와 북클럽 그리고 생각의 훈련은 평생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며칠 동안 크리스천 북클럽에 대한 다양한 각도의 대화를 ChatGPT와 주고 받으면서, 제가 훈련하고 추구하는 크리스천 북클럽이야 말로 반드시 필요한 것임을 확인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혼자 있을 때에, 그리고 제가 원할 때에 나의 사고의 지평을 넓혀줄 탁월한 비서가 도와줄 수 있다면 그 가치는 감히 돈으로 환산할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한 사람이 ChatGPT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면, 그는 이제 완전히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미리 세심하게 질문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평소에 궁금했지만 알지 못했던 것들을 미리 준비해서 대화를 통해서 물어보고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대한 영어 문장들을 다듬어서 말하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한번의 대화 속에서도 의미있는 내용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더 준비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너무나 빨리 변합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변화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나에게 맞추어서 선용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영어가 전혀 안되는 분이 ChatGPT로 음성 채팅을 하는 것은 쉽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본인이 어느 정도 영어가 된다면, 그리고 자신의 사고를 급격히 혁신적으로 확장시키고 싶다면 꼭 한번 사용해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2023년 5월 19일 금요일

존경하는 팀 켈러 목사님(1950–2023)을 기억하며 "I’m ready to see Jesus. I can’t wait to see Jesus. Send me home" / Top Gun: Maverick - The Man, The Legend

 


짧은 삶을 살아보니, 저를 포함해서 성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멘토"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멘토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넓고 방대한 인간의 삶과 신학 가운데, 그 좁고도 찬란하게 빛나는 길로 능히 인도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먼저 스스로 그 길을 힘써 걸어가며, 이후에 아버지와 같은 사랑으로 다른 이들을 인도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직접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팀켈러 목사님이 저에게는 바로 그런 멘토 같은 존재입니다. 

그분의 책에서도 좋은 영향을 받았지만, 설교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너무나 탁월합니다. 성경적이며 동시에 시대의 정신을 관통하며, 따뜻하며 또한 논리적으로 아름답고, 인간적이지만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높아지시는 설교입니다. 몇십번을 반복해서 들어도 은혜가 되고, 제 마음을 움직이고, 제가 나아가야 할 길을 알려주고,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그런 설교입니다. 이런 설교가 존재하고 그것을 들을 수 있는 것이 항상 꿈처럼 느껴졌습니다.  

팀켈러 목사님은 암으로 오래 투병하시다가, 오늘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치셨습니다. "I’m ready to see Jesus. I can’t wait to see Jesus. Send me home" 라는 본인의 유언처럼, 그토록 고대하던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비록 이 땅에서 그의 발걸음은 멈추었고 죽음이 그를 무너뜨렸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은 기꺼이 사망을 이겼습니다. 그렇게 평소에 확신과 사랑을 담아 전하던 그분의 품에 안기셨습니다. 소식을 접하는데 마음이 너무 먹먹하더군요,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도 그분의 설교를 들으며 생각했습니다. 팀 켈러 목사님을 뛰어 넘는 설교자는 기독교 역사상 앞으로 더 나오기는 힘들 것입니다. 성경과 철학으로 시대를 관통하고 설득하고 논증하며 복음을 전하는 것에서는 특히 더 그렇습니다. 이분이야 말로 진정한 Legend입니다. 겨우 72세의 나이에 소천하셨습니다. 그래서 한 없이 마음이 아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하게 인정하는 분입니다. 팀켈러 목사님의 마지막 말은 ""There is no downside for me leaving, not in the slightest" 였습니다. 팀켈러 목사님은 자신의 삶을 최선을 향해서 달렸고, 주어진 시간 동안 마지막까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분 자신의 고백처럼, 목사님의 떠나는 것에는 부정적인 측면은 조금도 없습니다.

이제 팀켈러 목사님의 위대한 성경적인 가르침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대를 고민하며 열어가야 하는 책임이 저를 포함해서 모든 남겨진 목회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마음으로 그렇게 의지하던 분이 소천하셨다는 것이 너무나 두렵지만, 그런 면에서 오히려 더욱 그분의 남겨진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배워야 하겠다고 결심합니다. 

얼마전에 주일 설교 강단에 서기 바로 전에 그런 마음이 들더군요, 감히 내가 팀켈러 목사님과 같은 "설교자"라는 타이틀을 가져도 되는 것일까? 마음이 뭉클하고 벅찼습니다. 위대한 그분과 같은 설교자라는 동일한 직책을 가졌다면, 그분처럼 좋은 설교를 하기 위해서 마땅히 저의 삶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깨달았습니다.    

언젠가 저에게도, 저의 목회 그리고 저의 삶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올 것입니다. 그때에 저도 팀켈러 목사님처럼 동일하게 후회 없는 믿음의 삶을 살았다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그 날을 향하여 오늘도 한걸음을 걸어가기를 원하고, 믿음의 길을 향해 묵묵히 전진하기를 원합니다.

* "팀켈러에게 배우다" 모음
- 성경과 신학, 그리고 목회를 배우기 위하여

2023년 1월 9일 월요일

The Healer / 민수기 5장 1-4절 주일 설교 (준비 과정)


* "설교 본문"을 어떻게 정했는가?

이번 설교는, 제가 정했다기 보다는 정해진 본문입니다. 함께 섬기는 부목사님과 주일 설교를 돌아가면서 해야 하는 상황인데, "매일 성경" 본문으로 하는 것으로 정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정해진 본문이 민수기였습니다. 거기다가 제가 민수기 본문의 첫 설교자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너무 어려운 처지가 되었습니다.

민수기 본문은 정말 까다롭습니다. 아마 하지 않을 수 있다면, 굳이 정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스토리가 등장하거나 차라리 교리적인 본문이, 준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훨씬 낫습니다. 하지만, 단순한 명령과 숫자, 그리고 지금 시대와 정말 동떨어진 것 처럼 느껴지는 정결 예법이 설교 본문이 된다면, 막막한 것이 사실입니다. 

"빠르게 해결하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저 본문을 계속 묵상하고,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또 그것을 성도님들에게 최대한 잘 들리고 이해되도록 구성하는 방법 뿐입니다. 이미 설교 스케쥴이 나왔기 때문에, 설교 본문을 처음 읽고 준비한 것부터 따진다면, 대략 두주 반 정도 준비한 설교입니다.

* "설교의 전체 구조"는 어떠했는가?

이번 본문을 묵상하면서, 두가지 큰 틀을 잡았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거룩을 요구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과 연결해서, "여호와 자신이 그 진영 안에 있기 때문에 거룩을 요구하셨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그것을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이고 공동체 안에서 실천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유출병이 무엇인지, 그리고 악성 피부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명하는데에만 십분 이상을 쓸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지루한 전개를 사용하면, 성도님들이 졸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그 부분은 아주 간결하게 짚고 넘어가면서, 오히려 "좀 더 도전적인 구조"를 사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요구를 하실 수 있는 분이신가? 그리고 과연 그러한 요구가 합당한가? 에 대한 도전적인 구조입니다. 

이러한 구조는 불신자를 염두에 둔 구조입니다. 팀켈러 목사님이 자주 사용하는 구조입니다. 그리고 신자이지만 믿음이 연약한 이들에게 도전을 줄 수 있는 구조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일종의 답변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설명"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해답으로서 그리스도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 "설교의 서두"를 어떻게 열 것인가?

지금까지 들어본 대략 스무편의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에서는, 설교 서두에 "설교 전체 구조를 제시"합니다. 설교가 전체 구성이 세가지 대지라면, 세가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다고 미리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저 같은 경우는, 그것이 썩 좋은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설교에 대한 신비감 혹은 기대감"을 떨어트리기 때문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아직 제 수준에서는 그렇게 서두에 이야기하고서 설교 본론에 들어가서 기대감을 유지하는 것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그런 방식을 감히 시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번 설교의 경우에는, 민수기로 처음 여는 설교이기 때문에, 적어도 민수기가 무엇인가를 설명은 반드시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부터 출애굽기에 이어지는 스토리를 아주 간략하게 제시하면서 설교를 열었습니다. 이러한 접근이 좋은 것은,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적어도 스토리를 이해하면서 내용을 따라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책"은 어떻게 설교에 인용했는가? 

본격적으로 신앙 혹은 신학 서적을 읽은 것이 스무살 부터입니다. 그리고 이십년이 지난 지금에와서야, 지금까지 읽고 고민한 모든 것이 꽃을 피운다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책들을 함께 읽기 시작한 것이 오년 정도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모든 것들이, 유기적으로 조금씩 연결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설교문을 쓰면서 큰 막힘이 적고, 생각을 풀어내도 신학인 틀에서 큰 오류가 없어 보입니다. 저에게 이런 날이 올 줄 감히 생각하지 못했고, 누구도 이런 결과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지 않았습니다. 저처럼 이해력이 느리고 속도가 느린 사람도, 결국 꽃을 피울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한편의 설교 가운데, 여섯권의 책을 인용했습니다. 굳이 "꼭 이만큼 인용해야겠다" 라고 생각한 것은 전혀 아닙니다. "이번 설교는 이 정도 인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껴서 인용한 것입니다. 세권 정도는 평소에 좋아서 기억하던 부분이고, 기독교 강요와 나를 따르라의 한 부분은 설교를 위해서 의도적으로 찾은 것입니다. 

아래에서 보시는 것처럼, 심지어 "책의 표지에 저자와 책 이름"을 넣고, 이후에 이어서 "책의 내용"을 본당 화면에 띄우면서 사용했습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 설교자들 중에 누구도 이렇게까지 한 적은 없는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굉장히 조심스러웠습니다. 한편으로는 매우 도전적이고 또 한편으로는 매우 따분하게 느끼실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책을 인용함에 있어서 "그 지루함"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이번에 설교를 준비하면서 새롭게 느낀 것은, 설교자가 책을 인용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어떤 목적으로, 그리고 또 어떤 깊이와 감정으로 그 책을 인용하는가"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인용한 두 권은, 탁월한 책들이지만 모두 기독교와 상관 없는 secular한 책들입니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결론적으로 성도님들의 마음에 전혀 부담이 없어 보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secular 한 책을 인용했지만, 오히려 제가 의도한 것 이상으로 "전체 말씀"을 진중하게 받아들인 분들이 있어서 적잖이 놀랐습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제가 적절하게 "그 책에 대해서 평가"를 한 것이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책의 논리와 비교하면서 "성경의 탁월함을 논증"했기 때문에, 더 성도님들의 마음이 오히려 편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에 인용한 모든 내용들은, 단순히 설교의 논리를 이끌어가기 위한 내용이 아니라, "저의 마음이 완전히 담긴 내용들"이었습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 책들을 인용하면서, 제가 정말 존경하는 분들의 "명예"를 소중히 여기고 싶었습니다. 

탁월한 저자들의 "모든 신학과 삶을 걸고 기록한 책"들이, 조금이라도 초라하게 인용되는 것이 너무나 싫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읽고 느꼈던 마음의 기쁨과 감동"을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제 온 마음을 담아서 읽고 인용하고, 그것이 성도님들의 마음에 남기고 싶었습니다. 

칼빈을 인용한 부분은,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대한 기독교 강요에 나오는 칼빈의 해설입니다. 읽으면서 제 마음에도 너무 마음에 감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설교 때에도, 마치 제가 칼빈 자신이 된 것 처럼 최대한 감정을 넣어서 읽었습니다. 



본회퍼는, "말씀에 대한 진실함과 자신의 신학"을 "자신의 생명"으로 증명한 사람입니다. 나를 따르라를 읽으면서, 그것을 너무나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마음이 숙연해지는 것을 저절로 느낍니다. 그래서 저 역시, "정말 진지한 태도와 마음"으로 인용하였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인용한 마이클 호튼의 언약 신학의 인용은, 수도 없이 줄을 치면서 그 책을 읽고 "제 마음에 가장 깊이 남은 내용"입니다. 호튼의 신학 그리고 개혁주의의 핵심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설교의 마무리에 책을 인용하는 것은 왠만하면 하지 않았겠지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사용한 것입니다.



* 설교에 대한 "반응"들

설교를 마치고 예배 후에 인사를 하는데, 성도님들의 표정이 참 다양했습니다. 많이 당황하신 분들도 계셨고, 제 손을 꼭 붙잡고 너무 좋았다고 말씀하신 분들도 계셨습니다. 너무 감정적이지 않고 신학적인 깊이가 있어서 그런 부분에서 좋았다고 하신 분도 계셨습니다. 어려웠지만 왠지 모르게 좋았다는 분도 계셨고, 위로가 되었다고 아내를 통해서 연락 주신 분도 계십니다. 

또 어떤 분들은 설교의 주제를 정확하게 이해한 분도 계시고, 구조나 책 인용이 상당히 파격적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설교"를 들은 것 같았다고 말씀하신 분들도 계셨습니다. "이제는 정말 어떻게 살아야할지 알겠다" 라고 하신 분도 계셨습니다. 동일한 설교를 듣고, 성령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다양하게 역사하신다고 느꼈습니다. 

물론 어떤 분들은 너무 지루했다고 말씀하신 분도 계셨습니다. 이십분 정도면 딱 좋겠는데 너무 길었다고 이야기하시고, 또 너무 고차원적인 이야기라서 힘들었다는 분도 계셨습니다. 특히 칠십이 넘으신 어르신들이 그랬다고 반응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런데 또 흥미로운 것은, 육십대 어르신 한 분 중에는 "정말 대단하다!"라고 말씀해 주신 분도 계십니다. 제가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그렇게 마음을 느끼셨다는 것이 설교자로서 행복했습니다. 

제가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느낀 것이 정확하게 그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대단하다!, 겨우 40분이라는 시간에 이렇게 아름다운 내용을 이렇게 아름다운 구성으로 이렇게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전하다니!" 존경하는 분의 수준에 아주 작게나마 다가갔다는 것이 기뻤습니다.

* "설교의 매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설교자로서 항상 제가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해야 매력적인 설교가 되는가?" 입니다. 이 질문은, 아마 평생의 고민이 될 것입니다. 물론 기본적인 전략들은 모든 설교자들이 다 아는 것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인 설교는 "무엇인가"가 확실히 다릅니다. 그리고 저는 그 매력 포인트는 결국 "설교자의 어떤 본능적인 감각"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어떻게 일할 것인가?"를 에전에 읽고 내용을 마음에 품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실제로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는 본능에 가깝습니다. 성경을 묵상하다가 제 마음 속에서 거의 저절로 떠오른 것에 가깝습니다. 이 부분이 저는 항상 흥미롭습니다. 

저는 재미있는 웹툰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요즘의 웹툰은, "엄청난 내용 전개와 구성력"을 가집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넘나들고, 등장 인물들의 심리 안에서 일어나는 내용을 치밀하게 묘사하고 이 모든 것을 탁월하게 연결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을까?" 감동하면서 볼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팀켈러 목사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를 들으면 들을 수록 매력적입니다. 지루할만 하면 예가 등장하는데, 그 예들은 반드시 논리적으로 들어가야 하는 자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신학적인 자료들 그리고 심지어 기독교에 대적하는 사람들까지 인용하지만 전혀 거부감이 없습니다. 

저는 이 "탁월함"들을 "계속적으로 습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이번주에 있을 좋은 설교를 만들고 싶어 반짝 무엇인가 대단한 기술을 동원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설교자가 "꾸준하게 무엇을 하는가"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고 "가장 탁월한 것"을 "자신의 오감과 영혼"으로 "지속적으로 경험"해 보아야 합니다. 저에게 있어서는 "성경 통독과 지속적인 묵상, 꾸준한 독서와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에 대한 연구"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꾸준하게 고민할 때에, 결국 설교에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 어느 정도로 원고를 "연습"해야 할까?

제가 좋아하는 탑건 메버릭에는, 상징적인 숫자인 "10"이 등장합니다. 영화 초반에서 메버릭은 "마하 10"이라는 벽을 깨기 위해서 도전하고 성공합니다. 그리고 영화 중반을 넘어 주어지는 미션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10G"라는 중력을 이겨내야 합니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10이라는 숫자를 통해서, 인간이 이겨내야할 가장 완전한 목표와, 그것을 이뤄내는 메버릭의 위대함을 보여줍니다. 

설교 원고는 목요일 정도에 90퍼센트 정도 완성이 되었습니다. "실제 설교의 삼일 전" 입니다. 원고를 쓰면서 이미 연습을 하지만, 제대로 연습하는 것이 항상 중요합니다.

원고가 완성된 후에 대략 세어보니, 방에서 일곱번 정도 소리내어서 모션과 함께 연습하고, 실제 본당 강대상에서 세번 정도 연습하였습니다. 도합 열 번입니다. 의식한 것은 아니지만, 세어보니까 그렇더군요. 지금 교회에서 실제 강대상에서 설교를 세번이나 연습한 것은 처음입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는 주일에 도합 세번의 설교를 해야합니다. 두번째가 끝이 나고 세번째 예배에 들어갔을 때에는 이미 몸의 힘이 거의 다 빠진 상태였습니다. 실제로 정신이 거의 흐려진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설교자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버거웠습니다.

그런데 세번째 설교 후반부 중에 참 흥미로운 경험을 하였습니다. "거의 연습한 대로" 한 것입니다. 제 정신은 지쳐서 더 이상 설교의 내용을 따라갈 수 없지만, 여러번 연습한 것이 저의 몸과 근육에 남아서 앞서간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지나칠 정도로의 실전 연습"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이번에 더욱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 "무슨 자료"를 설교에 참조하였는가? 

저는 항상 동일한 패턴입니다. 개역 성경 묵상, NET BIBLE 번역본, 추가 번역본과 원어 참조, 스터디 바이블, 주석, 사전 등의 순서입니다. 그리고 조금 저속한 표현일 수는 있겠으나, "닥치는대로 다 찾아보는 것" 이 저의 전략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우아한 설교 준비를 상상하는 듯 합니다. 그런데 적어도 저에게 있어서 설교는, 혼신의 힘을 다하는 전투에 가깝습니다. 책을 읽고 고민한다는 점에서는 우아해 보일 수 있겠지만, 그 과정은 정말 처절합니다. 

아래의 스터디 바이블들은, 모두 탁월한 내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이해를 보여주고 설교의 큰 흐름을 결정해 주었습니다. 충분히 읽고 고민하면서 설교 내용에 반영한 것들입니다. 

5:3 without the camp. Outside the boundary of the camp (v. 4). defile. To render unclean. whereof I dwell. God’s presence was the reason for safeguarding the purity of the camp. Approaching God requires clean hands and pure hearts (Ps. 24:3–4).

Joel R. Beeke, Michael P. V. Barrett, and Gerald M. Bilkes, eds., The Reformation Heritage KJV Study Bible (Grand Rapids, MI: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14), 203.

1. The expulsion of people from Israel’s camp for ceremonial uncleanness reminds us that “the ungodly shall not stand in the judgment, nor sinners in the congregation of the righteous” (Ps. 1:5). What a solemn matter! Have you been to Jesus for the cleansing from sin found only in His blood? If we are in Christ then we know that we have been made fit to approach the Lord and we can enjoy fellowship with Him.

Joel R. Beeke, Michael P. V. Barrett, and Gerald M. Bilkes, eds., The Reformation Heritage KJV Study Bible (Grand Rapids, MI: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14), 204.

5:2 DISEASE … DISCHARGE. Strict instructions were given to the people in Leviticus 13–15 about diagnosing, treating, and dealing with conditions that God defined as “unclean.” While this probably resulted in many saved lives, it was also God’s way of teaching them the foundations of holiness.

Lyman Coleman, ed., Life Connections Study Bible (Nashville, TN: Holman Bibles, 2019), 203.

Even this process, however, is a means of grace from God designed to purify his people and to encourage all (including the disciplined individual) to cling more tightly to Christ since our clean state is found in him alone. We enter the new Jerusalem not having purified ourselves by our efforts but having been washed in the blood of the Lamb (Rev. 1:5), so that our names are written in his book of life (Rev. 21:27).

L. Michael Morales, “Numbers,” in Gospel Transformation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ed. Bryan Chapell and Dane Ortlund (Wheaton, IL: Crossway, 2013), 176.

거룩을 정의하는데 있어서는, 기본적으로는 LEXHAM 사전을 다 읽어 보았지만, 결국 깔끔하게 몇 단어로 정리한 것은, 넷 바이블의 각주를 참조하였습니다. 인용한 시편 24편 3절에 등장하는 거룩에서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로고스의 원어 검색으로, 거룩이라는 단어가 처음 사용된 출애굽기 3장 5절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그곳의 각주입니다. 

sn The word קֹדֶשׁ (qodesh, “holy”) indicates “set apart, distinct, unique.” What made a mountain or other place holy was the fact that God chose that place to reveal himself or to reside among his people. Because God was in this place, the ground was different—it was holy.

sn (study note)—Includes comments about historical or cultural background, explanation of obscure phrases or brief discussions of context, discussions of the theological point made by the biblical author, cross references and references to Old Testament quotations or allusions in the New Testament, and other information helpful to the modern reader.

Biblical Studies Press, The NET Bible, Second Edition. (Denmark: Thomas Nelson, 2019).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공동체가 실제로 행동한 것이 중요했다"는 것은, 이미 제 개인 묵상으로도 끌어낸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John Crurrid의 주석을 통해서 좀 더 확신있게 적용할 수 있었습니다. 

What is at stake is not merely the people in the camp, but the very sanctuary and dwelling place of God. Nothing unclean is to come near that which sits in the centre of the camp, but it will be thrust outside the camp. The final verse of the passage drives home the importance of the action: three times the text says that Israel did as God had commanded them. This triple emphasis is further heightened by the exact repetition at the beginning and end of the verse: it literally reads, ‘Thus did the sons of Israel … thus did the sons of Israel.’

John D. Currid, A Study Commentary on Numbers, EP Study Commentary (Darlington, England; Carlisle, PA: Evangelical Press, 2009), 87–88.

* 설교자의 "영광"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설교를 잘하는 것" 자체가 저의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시편 84편을 묵상하다가, 제가 설교를 아무리 잘 해도, "하나님의 영광의 지극히 일부분"을 드러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제 인생 최고의 설교 그리고 모든 성도님들이 감동과 은혜를 받은 설교를 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의 일억분의 일도 나타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깨달음이, 오히려 제 마음을 참 편안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감히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감격했습니다. 

저와 같이 초라하고 부족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영광이 드러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것 자체가 이미 구원의 기적이라고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저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의 정말 작은 부분"이라도 드러날 수 있다면, 제 인생에 있어서 이것보다 더 행복한 일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 인생의 최고의 설교"가 되리라고 기대하고 또 어느 정도 예상감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 예상대로 참 좋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설교가 끝이나자 제 마음에는, 제가 잘하고 못하고는 그렇게 마음에 둘 필요가 없다고 느꼈습니다. 

정작 설교를 마치니 정말 좋았던 것은, "성도님들과 함께 은혜를 나눌 수 있었다는 사실" 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서 사용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성도님들의 섬기는 자리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야 말로, "설교자의 가장 큰 영광"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이유이고, 또 앞으로 저의 설교가 더욱 기대가 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그리고 "앞으로 설교를 준비하며 살아갈 과정"이며, "제가 해왔던 일들"을 계속 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다짐했습니다. 

처음 신학교 시절 설교를 배울 때 부터, 마인드맵으로 full text로 원고를 모두 쓰고, 그것이 연습이 되었습니다. 꾸준하게 독서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힘들고 외로울 때에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힘들었지만, 제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평가하고 발전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익히고 배우는 것이 이번 설교에 정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겨우 몇개월의 공부와 훈련과 연습을 통해서, 저는 설교자로서 또 다른 차원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저는 저의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다른 사람의 길을 가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소명과, 그 확신"을 따라서 걸어갈 것입니다. 그렇게 결심 할 수 있어서 행복하고, 또 오늘 하루를 그렇게 걸어갈 수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 "설교문전체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11/blog-post_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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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7일 금요일

완전한 아버지, 그분의 품에 거하라 / 사무엘하 12장 15-23절 설교

 

저는 원래 감동을 잘 받는 스타일입니다. :) 저의 이러한 성향이 성경적인 것인지는 깊게 고민해 보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작은 것 안에서라도 큰 행복을 느끼고, 그 안에서 감사를 누릴 때가 종종 있습니다. 

팀켈러 목사님 설교를 들으면서 감동 받고 혼자서 눈물을 종종 흘리고 있습니다. 혼자 차를 타고 오고가는 길이 지루하지가 않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렇게 짧은 시간에 이렇게 아름다운 내용을 이렇게 충실하게 설교할 수 있는 것일까요? 심장이 두근거리고 마음이 떨립니다. 아, 은혜 받음의 기쁨,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입니다. 

감동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아마 평생 이 부분을 놓고 고민할 것입니다.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자신이 감동을 받아보는 경험은 너무나 중요한 듯 합니다. 왜냐하면, 설교자 자신이 감동을 받지 못했는데, 다른 누군가에게 내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으라고 강요한다는 것은 명백한 논리적인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설교는 평소보다 짧았습니다. 새벽이라 길게하지는 않지만 조금 짧았습니다. 그래도 내용이 너무 마음에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정말 고심해서 준비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한주 내내 머리 속에 본문을 넣고 씨름했습니다.

팀켈러 목사님의 스타일은, 주해적이지만 동시에 철학적입니다. 그리고 본문을 붙들고 있지만 그 본문의 지평을 넓혀주는 그런 느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에서는 아주 엄격하게 말하자면, 신하들이 놀란 다윗의 태도가 더 핵심에 가야하는 것이 맞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번 설교에서, 죄에 대하여 싸우는 것 그리고 인간 아버지의 역설과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에 대해서 준비했고 마음에 흡족했습니다. 

이번 본문을 묵상하면서 다양한 스터디 바이블을 참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Faithlife Study Bible 에 대한 짧은 리뷰도 작성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이 이 설교를 준비하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 "갈수록 그 가치를 드러내다" - Faithlife Study Bible을 봐야만 하는 "네 가지 이유"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10/faithlife-study-bible.html

왜 신하들이 다윗에게 아들의 죽음을 말하기를 두려워했는가에 대한 설명들도 보았지만, 특별히 강하게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 설교는 주해를 가지고 와서 설명하는 자리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문맥상 살짝 언급하고 지나갔을 분입니다. 다른 자료도 신하들의 염려를 언급 하지만기본적으로  바이블의 각주를 참조하였습니다.

tn Heb “he will do harm.” The object is not stated in the Hebrew text. The statement may be intentionally vague, meaning that he might harm himself or them!

Biblical Studies Press, The NET Bible, Second Edition. (Denmark: Thomas Nelson, 2019).

그리고 역시나 Reformation Heritage KJV Study Bible 실망시키지 않았습니다설교의  부분에 있어서 중요한 논리를 이끌어가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말도 안되는 방종과 은혜의 남용으로 흐를  있는 잘못된 태도를 막아주는 역할입니다.

The death of the child indicates that consequences for sin are necessary parts of God’s discipline (Ps. 94:12; Prov. 3:11–12; Heb. 12:5–11; Rev. 3:19). Even sorrow over sin and the resolution to turn from it do not exempt us from all its consequences. Sometimes erring children assume that simply telling their parents they are sorry for a bad behavior will excuse them from any disciplinary action. But learning that sin has consequences and then experiencing those consequences is itself a sanctifying process (Prov. 20:30). The best way to avoid sin’s consequences is to avoid sin. Why is it a mercy that God disciplines His people?

Joel R. Beeke, Michael P. V. Barrett, and Gerald M. Bilkes, eds., The Reformation Heritage KJV Study Bible (Grand Rapids, MI: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14), 447–448.

설교의 후반부는, 최근에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개인적으로 공부했던 부분을 적용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에 대한 설명과 강조가 얼마나 마음에 들었던지, 도대체 잊혀지지가 않았습니다. 마침 오늘 설교 주제와 완전히 맞아 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호칭이 있지만 예수님께서 그분을 아버지라 부르라고 하셨다라는 것은 거의 직접적으로 인용하였습니다. 아래의 글이 이 설교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 팀켈러에게 배우다 (1) -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 당신은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10/blog-post_4.html

설교의 전반적인 흐름과 느낌도 팀켈러 목사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가장 작은 것 부터는, 설교 할 때에 상당히 빠르게 발음을 하지만 중요한 문장 혹은 문단 이후에는 충분히 쉬는 것도 그분의 영향입니다. 평소에 저 같으면 중요한 문장 후에 혹은 문단 사이에 약 1초 정도만 쉬었겠지만 이번에는 거의 3초 가까이 pause를 가졌습니다. 성도님들이 그 의미를 음미할 여유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문장 안에서 수식어를 연달아서 설명하면서 감정의 고조를 더하는 것도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 스타일입니다. 저는 수식어를 그렇게 많이 사용해서 연결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거의 처음으로, 완전한 아버지, 거룩하신 아버지, 사랑의 아버지 등등으로 수식어를 연결하고 빠르게 진행함으로써 강조의 느낌을 더 해 보았습니다. 처음이었지만 좋았습니다. 

인용 구절도 최소화 시켰습니다. 저는 항상 성도의 인지적인 능력을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짧은 40분 정도의 설교 안에서 인용 구절을 이해할 수 있는 인지적인 한계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아주 흥미로웠던 것은, 성경 구절의 직접 인용을 최소화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설교 중에 설교 본문을 다시 언급하면서 읽어야 할 때에는, 빠르게 약간 대충 읽는 느낌도 납니다. 그래서 저도 인용 구절을 최소화하면서 설교를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설교의 큰 구조와 흐름에서도, 팀켈러 목사님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불완전한 아버지에서 완전한 아버지로 논리적인 흐름을 전개하는 것"도 팀켈러 목사님의 스타일을 차용한 것입니다. 구조에 대한 접근에서는 어떤 의미에서 약간 뜬금 없는 듯한 느낌도 있지만,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정말 괜찮은 논리적인 전개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파악한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의 특징은, 본문 전체를 한 구절 한 구절 다 붙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필요한 것들을 압축적으로 타이트하게 전개한 이후에, 하나님의 은혜와 연결시키는 것이 이분의 특징인데 그것이 너무나 저의 마음에 매력적으로 들렸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저 역시 예전에 종종 시도했었는데, 오늘은 조금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제 스스로 평가할 때에, 과거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내용을 언급하면서 약간 김이 빠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보니, 오히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논리를 전개할 때에 오히려 더 폭발적인 어떤 감동을 주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어쩌면 설교자 자신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확신이 큰 영향을 끼치는 듯 합니다. 

한편의 설교를 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가장 피곤한 새벽 시간에 두눈이 초롱초롱하게 저를 쳐다보시는 성도님들의 모습이 너무 좋았고 저도 행복했습니다. 앞으로도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할 뿐입니다.

* 사무엘하 12장 15-23절 설교

성도님들께서는 다윗의 무너져 가는 모습을 보면서 어떤 감정을 느끼시는지 모르겠습니다저는 오늘 말씀 근처의 본문들을 읽을 때 마다 참 마음이 비통하고 너무나 슬프다 라는 생각을 자주하게 됩니다

영적으로 탁월한 그리고 하나님이 가장 아끼시는 그 한 사람이 이렇게 무너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그리고 인간의 한계와 그 연약함을 성경은 너무나 가감없이 드러내기 때문에 읽으면서 함께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범죄는 겉으로 보기에는 간음이라는 그리고 살인 교사라는 끔찍한 형태로 나타났지만그것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다윗의 마음 중심에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12 9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라고 말씀하십니다그리고 10절에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다윗의 문제의 핵심이었던 것입니다모든 죄악의 가장 그 근본에 있는 것은 감히 인간이 여호와를 업신여기는 그 끔찍한 태도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인류 역사의 초기에 이미 시작되었습니다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 범죄할 때에도 마찬가지였고지금 다윗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여호와를 경외하고 그분을 높이는 마음이여호와를 업신여기는 그 마음으로 변질되고 타락하여서믿음의 영웅은 가정 파괴범 그리고 살인자로 추락한 것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다윗은 바로 사형을 당해야 마땅한 사람이었습니다그러나 그가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회개할 때에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해 주셨습니다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다윗의 진실한 회개와 하나님의 용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가 반드시 치뤄야할 댓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오늘 말씀 가운데 등장하는데나단은 다윗에게 말할 때에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 라고 말하며 왕궁을 떠난 것입니다그리고 나단이 떠나자 마자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여호와께서 그 아이를 치셨다 그래서 심히 앓게 되었다”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다시 말해서 이것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여호와의 분명한 뜻이 다윗의 아이에게 임했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아마 다윗 성은 그 분위기가 최악이었을 것입니다누구 하나 감히 입을 열어서 함부러 이야기할 수 없는 너무나 무거운 분위기였을 것이 틀림 없는 것입니다

자 만약에 내가 지금 다윗의 입장에 선다고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하나님의 분명한 진노를 받아서 아이가 죽어가고 있는데 그 아비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어쩌면 우리 중에 어떤 분들은모든 것을 포기하고 넋을 놓아 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어떻게 보면 정말 이상한 모습이 아닌가하나님의 분명한 진노를 입어서 아기가 죽어가고 있는데 그 아기를 살려 달라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참으로 안타깝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너무나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다윗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아들을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그는 충분히 분노할 수 있었습니다다윗이 얼마나 간절하고 또 간절하게 기도를 했는지 그가 무려 칠일 동안 금식하면서 맨 땅에 누워서 지냈습니다그는 왕의 자리에 올라가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정도의 다윗의 모습을 보면하나님께서 그 아이를 살려주셔도 될 것 같습니다이 정도 정성을 드렸다면 그래도 들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그런데 어떻게 되었는가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았습니다아이가 결국 죽은 것입니다

다윗이 저지른 죄의 그 댓가는 너무나 큰 것이었습니다물론 그는 자신의 죄의 댓가의 전부를 치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그러나 그 죄가 가지고 있는 영향력을 온 몸으로 경험하면서 고통을 받아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자기 합리화가 무엇일까요그것은 “여호와께서는 무조건 용서하신다” 라는 것입니다물론 그 말은 백퍼센트 맞는 것입니다다윗은 극적으로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습니다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죄의 댓가를 경험한 것입니다물론 그 댓가는 그의 죄의 무게의 비하면 비교할 없을 만큼 작은 것이었지만그는 그 댓가를 어느 정도는 치러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쉽게 죄를 짓고 나서하나님께서 다 용서하실 것이라고 쉽게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죄는 우리의 삶을 망치고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망치며 우리의 삶을 망가지게 하는 무서운 것임을 성경은 분명히 경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12 4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12: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부각되는 두가지 단어가 있습니다“피 흘리기까지” 그리고 “대항하다” 라는 두 단어입니다죄와 싸우는 것은 영적인 것이지만 피가 튀는 것입니다내가 거룩하게 살기 위해서 나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서 피를 흘릴만큼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그리고 대항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어떤 것을 향해서 힘을 다해서 맞서 싸우는 것입니다그것은 수동적인 태도가 아니라 매우 적극적인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죄를 대하는 성도의 태도는마치 전쟁에 나간 전사처럼 피를 흘리며 대항하는 최선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는 그런 모습을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그런 면에서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도전이 되기를 원합니다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그런 태도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죄의 무서움과 그 영향의 비참함을 깨닫고 적극적으로 죄와 싸워 나가시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다윗의 그 간절한 기도도 하나님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아이가 죽은 것을 신하들이 먼저 알았습니다그리고 차마 그 이야기를 다윗에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얼마나 다윗이 그 아이를 사랑하고 아끼고 그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간절히 기도한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심지어 충격을 받고 낙심한 다윗이 무슨 행동을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그런데 신하들이 수근거리는 것을 보고 다윗이 깨달았습니다“아이가 죽었구나…”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만약에 우리가 다윗의 입장이라면 어떠했겠습니까너무나 낙심하고 분노하고 슬퍼했을 것입니다그렇게 간절하게 생명을 걸고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기도가 간절할 수록 그 낙심이라는 것은 너무나 큰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다윗이 자신의 간절한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에그가 그 이후에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성경이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0절에 보니다윗이 자신이 지내던 땅에서 일어났습니다그리고 씻고 기름을 발랐습니다그리고 왕의 새로운 옷을 입은 다음에 어디로 갔는가여호와의 전으로 간 것입니다그리고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였습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구약 성경 전체에서 직접적으로 다윗이 경배한다는 표현이 딱 두번 등장하는데그중에 한번이 바로 이 구절이라는 것입니다다윗은 삶의 가장 어려운 순간에 심지어 자신의 마음에 가장 낙심하고 하나님께 대하여 실망한 그 순간에그의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확인한 그 순간에여호와를 찾고 그분께 경배하였습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사실 기도라는 것의 평범한 정의는 무엇입니까그것은 자신의 뜻과 소원을 이루는 것이 기도입니다그래서 기독교와 전혀 상관 없는 사람들도 기도라는 단어를 거리낌 없이 쓸 수가 있는 것입니다신이라는 자신보다 뛰어난 존재를 통하여서 혹은 우주의 어떤 힘을 이용해서자신의 소원을 이루는 것을 기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기도는 전혀 다른 기도였다는 것입니다그가 간절히 자신의 소원을 아뢴 것은 사실이지만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너무나 바랬지만그의 기도는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있었던 것입니다다윗은 참된 기도가 혹은 참된 성도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자신의 아들이 죽기를 바라는 아버지가 어디에 있겠습니까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자신의 가장 소중한 그 소원조차도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맡기면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다윗의 삶의 궁극적인 소원이었다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고 또 묵상하면서한 아버지의 깊은 후회와 슬픔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성경의 어느 장면에서 다윗이 칠일을 금식한 적이 있습니까다윗은 틀림 없이 그 금식과 통곡의 기도의 시간 속에서자신의 죄의 결과와 그리고 아들에 대한 미안함으로 그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을 것이 틀림 없는 것입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모습입니다그는 가장 위대한 신앙의 사람이었고 그는 한 나라의 권력의 정점에 있는 사람이었지만자신의 아들 한 명을 위하여 제대로 살아갈 수 없었던 사람입니다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그 아들이 자신의 죄로 인해서 죽어야 한다는정말 어떤 의미에서 너무나 비참한 운명에 다윗이 던져진 것입니다그런 면에서 오늘 본문은 인간 아버지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이것은 단순히 다윗만이 그러했던 것은 아닙니다세상에 모든 아버지가 해결하지 못한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오늘 말씀이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가장 완벽한 인간이었던 아담조차 그가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그의 말씀을 업신 여겼을 때에자신의 아들이 또 다른 아들을 살해하는 것 조차 막지 못하는 가장 무력한 아버지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아담으로 인하여 모든 그의 후손들은 본질상 죄인이 되었습니다하나님을 멀리하고 업신여기는 자로 태어났습니다그것이 마치 삶의 당연한 방향인 것 처럼 살게 되었습니다그리고 영적인 죽음 속에서 지옥을 향해서 걸어가는 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볼 수 있는가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가장 완벽한 아버지를 꿈꾸고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연약하고 죄로 인해서 무너지는 그 아버지가 아니라가장 완전하며 가장 완벽하며 가장 거룩하시며 가장 온전하신 하늘 아버지를 바라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시편 103 13절과 14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103:13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103:14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정말 놀라운 표현이 아닙니까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먼지임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냉정하게 말한다면 우리 인간의 죄성으로 인해서 우리를 거들떠 보지도 않을 것 같은 그런 여호와께서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인간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를 이해한다고 말씀하십니다구약 안에 이미 복음이 나타나 있으며인간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시는 그 여호와 하나님 진정한 아버지 되신 그분의 은혜가 풍성하게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 9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셨습니다

정말 놀라운 표현이 아닙니까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왜 이 땅에 오셨는가그분의 고난 그분의 죽으심 그분의 부활 그 모든 것들은 구약에서부터 꿈꿔 오던 진정한 아버지 되심여호와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바로 그 놀라운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믿는 자들자신을 의지하는 자들자신을 붙드는 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하나님을 부를 때에 우리 아버지여 라고 부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을 부르는 많은 호칭들이 있지만가장 앞서는 가장 본질적인 것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아버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로마서 8 15절에 말씀하십니다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갈라디아서 4 6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4: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이 강조하시는 것이 무엇인가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입니다그 사랑의 관계 그 은혜의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 지금 이 시간에 우리를 안아주시고 돌봐주시고 그분의 나라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지금까지 일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말씀이 여기 모인 우리 모두에게 큰 위로가 되기를 원합니다하늘 아버지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돌보시며 지금도 우리의 삶을 붙들고 계시며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변치 않는 사랑으로 인도하심을 믿고 신뢰하며 담대하게 걸어가시는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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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30일 금요일

영원한 십자가, 그 안에서 누리는 은혜 / 사무엘하 7장 18-29절 설교

 

요즘에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계속 들으면서, 많은 통찰력을 얻고 있습니다. 특별히 탕자 비유에 대한 연속 설교를 들으면서, 한편의 설교에 본문의 모든 것을 담을 필요는 없다는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탕자에 대한 팀켈러 목사님의 책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그분의 연속 설교 스타일이 매우 탁월하시다고 느꼈습니다. 하나의 본문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하나의 메시지이지만, 그러나 안에서도 굉장히 풍성한 관점들을 연속되는 설교에서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팀켈러 목사님의 시리즈 설교를 들으면서 고민하게 부분은, 저도 모르게 설교의 정석이라는 틀에 갇혀서  저의 설교가 뻗어나갈 있는 어떤 가능성을 막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입니다. 설교는 마땅히 본문이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어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메시지들을 다양한 관점에서 풀어낼 있다면 굳이 설교 안에서 모든 것을 담지 않아도 된다는 조심스러운 생각의 실천을 시도해보고 있습니다.

하나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얻는 통찰은, “설교자는 어느 정도로 추가적인 설명을 해야 하는가” 입니다. 한마디로 성경 구절에 대한 설교자의 설명의 충분함이 어디까지인지를 배우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는 어떤 성경 구절에 대한 설명이 굉장히 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설명 안에는 풍성함이 있습니다. 성경 구절에 대한 이해, 그리고 시대적인 배경을 염두에 변증, 그리고 변증을 추가적으로 풀어내는 성경적이고 철학적인 부연 설명까지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전통적인 강해 설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마치 하늘에서 바라보는 듯한 넓은 시각으로 성경과 삶을 조망한다고 느꼈습니다.

이러한 스타일은 저로서는 상당히 어렵다고 느꼈습니다. 물론 제가 배운 설교의 정석과도 다릅니다. 저는 주로 강해 설교 중심이라면, 그리고 제가 존경하는 존파이퍼 목사님도 그런 방향이라면, 팀켈러 목사님은 완전히 다른 자신만의 장르라고 느꼈습니다. 설교를 풀어나가는 방식 자체가 완전히 다릅니다.

그리고 제가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따라하기 어려운 가장 이유는, 일단 실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성경 구절을 놓고, 변증과 성경과 철학을 넘나드는 변증적인 내용을 풀어내기에는 실력이 아직 한참 부족합니다. 다만 제가 느낀 것은, 어떤 신학적인 사고를 풀어내는데 있어서 자유함을 가져야겠다는 결심이었습니다.

역시 설교를 준비하다보면, “꼭 부분은 말씀을 드려야겠다”라는 것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내용이 조금이라도 성경 본문에서 벗어나게 되면 차라리 안하는 쪽으로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어쩌면 아주 약간은 성경의 본문 자체에서 멀어진다고 하더라도, 충분한 신학적인 사고를 펼쳐내서 성도님들과 함께 길을 걸어가보는 것도 굉장히 좋겠다고 판단을 내렸습니다.

이번에 제가 본문을 보면서 가장 묵상한 부분이 “겸손” 그리고 “미래에 대한 약속” 입니다. 물론, “말씀에 근거한 인간의 반응과 기도”라는 주제가 본문의 후반부에 들어있지만 다음을 기약하고 과감하게 생략했습니다. 그리고 여유가 생긴 부분에 대해서는 미래에 대한 약속이라는 부분을 시간이라는 관점으로 집중해서 풀어냈습니다.

아마 예전에는 절대로 이렇게 풀어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일반적인 설교의 방식대로, 과거와 미래에도 여전히 은혜를 부으시는 하나님이라는 평범한 논리로 풀어 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마음으로 새롭게 시도해 보았습니다. 철학적인 논증을 위해서 고민해 보았습니다.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에서 읽었던 시간에 대한 부분이 여전히 마음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 과거와 미래를 함께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며, 안에서 십자가의 영원함이라는 주제를 담아냈습니다.

실제로 설교를 들으시는 분들은 어떻게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다행히 저를 바라보시는 성도님들의 눈빛이 지루해보이지는 않았습니다.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그분의 확신이 너무 좋았던 것처럼, 역시 마음 속에 말씀을 묵상하면서 정말 부분은 반드시 나누고 싶다, 혹은 이러한 하나님을 드러내고 싶다라는 바로 소망을 가지고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본문 해석을 조금 추가해야 하는 부분이 있었지만, 과감히 건너뛰고 포커스를 맞춰야 하는 부분에 집중하고 설명을 추가했습니다. 이번 설교 준비에도 스터디 바이블들이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스터디 바이블은 완벽한 도구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부분에서이든지 생각을 일깨워줄 있다면 충분히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겸손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지만 설교 가운데 충분히 내용을 풀어냈습니다.

7:18 The words sat before the Lord indicate that David was in the tent which served to house the ark. Who am I, O Lord God: David’s rhetorical question reflected his sense of unworthiness to have been extended such a gracious promise (vv. 12–16).

Earl D. Radmacher, Ronald Barclay Allen, and H. Wayne House, The Nelson Study Bible: New King James Version (Nashville: T. Nelson Publishers, 1997), 삼하 7:18.

그리고 시간에 대한 이해 속에서 그리스도의 영원한 다스림은, 아래 스터디 바이블을 염두에 두고 내용을 풀어 냈습니다.

7:16 for all time … forever: God’s promises do not negate human responsibility and accountability (7:14). Wrongdoing requires a just response from God. However, no wayward son of David could move God to withdraw his promise to preserve David’s dynasty. Although the dynasty disappeared for hundreds of years, David’s house and kingdom were renewed in Jesus Christ, the sinless descendant of David who reigns forever. • before me: As in Greek version and some Hebrew manuscripts; Masoretic Text reads before you.

New Living Translation Study Bible (Carol Stream, IL: Tyndale House Publishers, Inc., 2008), 삼하 7:16.

7:19 God’s plan to give David a lasting dynasty stretched well beyond his lifetime. The promise is fulfilled forever in the eternal reign of Christ (Rev 11:15). • Do you deal with everyone this way, O Sovereign Lord? Or This is your instruction for all humanity, O Sovereign Lord.

New Living Translation Study Bible (Carol Stream, IL: Tyndale House Publishers, Inc., 2008), 삼하 7:19.

세상에 힘들지 않은 일이 없지만, 설교를 준비하는 것은 매우 고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영광을 경험합니다. 하나님만이 주시는 기쁨 그리고 그분 자신의 영광입니다. 설교를 있는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저의 설교가 조금이라도 나아지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오직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분의 아름다우심을 가장 탁월하게 드러내기를 원합니다.

* 사무엘하 7 18-29 설교

사울 왕은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그분을 크게 실망시켰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이 다윗을 찾아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셨던 것이 대략 BC 1025 경입니다. 그리고 거의 이십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다윗은 한때 삶이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져서 사울을 피해서 도망하는 도망자로 살았지만, 이제는 유다지파 뿐만 아니라 모든 지파를 다스리는 이스라엘 나라의 왕으로 온전하게 세워진 것입니다.

이제 다윗은 나라의 가장 정점에 사람이 되었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가장 권력이라도 그의 마음을 무너뜨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는 생명을 전쟁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성으로 여호와의 법궤를 모시고 왔습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하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사람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기뻐 춤추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모든 것이 형통하여져서 그의 왕궁에서 편하게 살게 되었을 때에, 그의 마음에 여호와의 법궤는 여전히 천막 안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였습니다. 다윗은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마음을 보시고서는 다윗이 감히 상상하지도 못할 계획들을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은 여호와를 생각할 때에 그분에게 성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여호와는 오히려 다윗을 위하여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를 위한 축복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내가 다윗 너의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겠다, 너의 후손을 세워서 나라를 견고하게 하겠다, 너의 아들이 성전을 건축할 것이다, 그리고 왕위를 영원하게 것이다, 사울과는 다르게 하나님의 은총을 거두지 않고 너의 나라의 왕위는 영원히 견고할 것이다,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단 선지자가 모든 말씀을 다윗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그때 다윗이 이렇게 반응하고 있습니다. 18절입니다.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라고 여호와께 고백하고 있습니다. 지금 다윗은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서 여호와를 찾아온 것입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어디에서든 그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임을 알았지만, 여호와께 그의 마음을 아뢰기 위해서 직접 언약궤 앞으로 찾아온 것입니다.

지금 다윗은 과거와 다른 사람입니다. 이미 백성의 위대한 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여호와 앞에 홀로 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왕이라고 여호와 앞에 거들먹거리지도 않았고, 자신이 왕이기 때문에 이정도 축복은 받을만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을 전적으로 가득 채운 것은, 여호와께서 얼마나 많은 은혜를 베푸시는가, 그리고 그분의 은혜를 받기에는 얼마나 자신과 자신의 가문이 턱도 없이 부족한가를 절실하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다윗이야 말로 은혜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호와를 향한 다윗의 기도를 보면 계속 반복되는 표현들이 있습니다. “주 여호와여” 라는 표현입니다. 주라는 것은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여호와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스스로 존재하는 자”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슨 의미인가? 다윗의 완전한 겸손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분명히 인간이며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낮은 모습으로 그가 취할 있는 가장 겸손한 진실함으로, 여호와께서는 저의 유일한 주인이십니다 라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19절부터 등장하는 표현들이 있습니다. 주의 종을, 주의 종에게, 주의 종의 다시 말해서 계속 등장하는 것은 “주의 종”이라는 표현입니다. 어떻게 보면 나라의 왕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표현입니다. 거기다가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자신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때에는 나라의 왕이고 이미 인생의 성공의 가장 정점에 있는 사람이지만, 그의 마음에 교만이 들어갈 틈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다윗의 마음에는 무엇이 가득한가? 하나님 저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저는 절대 순종 밖에 없습니다, 저는 주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입니다, 바로 마음이 그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주 오래전에 이야기입니다. 필립 얀시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책을 함께 읽으면서 청년에게 질문을 보았습니다. “누구누구 형제님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그러니까 형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을 위해서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아주 훌륭한 대답이었습니다. 정말 귀한 고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한가지 너무 아쉬웠습니다. 너무 맞는 이야기였지만 아직 깊은 신앙의 수준까지 들어가지 못한 것이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정말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가 정말 아쉽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그냥 죄인이 아니라 용서 받지 못할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주었습니다. 그때 청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용이 낯설게 느껴지는 처럼 저를 바라 보았습니다.

그런 면에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감동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요? 우리의 가운데 진정한 감격이 없는 것일까요? 우리는 말씀을 보면서 그렇게 감동이 없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들이 내가 받을만한 것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릴 만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것을 누린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만한 생각이라는 것은 우리의 의식 속에 있을 수도 있고 우리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무의식 속에 감추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차원 속에 있든지 간에, 만약에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들이 그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모든 것들이 그저 심상하게 느껴질 밖에 없는 것입니다.

잠언 3 34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34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야고보서 4 6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6 그러나 더욱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겸손한 마음이야 말로 하나님의 복을 받는 가장 중요한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겸손을 통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새롭게 보이는 것입니다. 사실상 이미 넘치게 부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겸손을 통해서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부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넘치게 생생하게 경험하고 느끼고 누릴 있는 것은, 바로 우리의 겸손한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리고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면서, 다윗처럼 마음이 겸손하게 낮아지기를 원합니다. 용서 받지 못할 죄인이 바로 나라는 것을 깨닫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홀로 서기를 원합니다. 다윗처럼 겸손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서 홀로 서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내가 가진 어떤 지위나 재산이나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기를 원합니다. 오직 여호와 앞에서 겸손하여 짐으로 그분의 은혜와 말씀에 대한 감격으로 온전히 새로워지시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다윗의 겸손함에 바로 이어서 나오는 말씀이, 다윗이 그렇게 감격한 이유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19 말씀입니다. 7:19 여호와여 주께서 이것을 오히려 적게 여기시고 종의 집에 있을 장래의 일까지도 말씀하셨나이다 여호와여 이것이 사람의 법이니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표현이 이것이지 종의 집에 있을 장래의 일까지도 말씀하셨나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가장 흥미롭고도 놀라운 부분이 무엇인가? 우리가 기억할 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처럼,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후손과 그의 집에 대해서 영원히 그것을 세우시고 지키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절대로 너의 후손을 버리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을 전해 들었을 때에 상식적으로 무엇에 먼저 놀라야 하는가? 자신의 왕국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놀라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을 놀라게 것은, 자신의 현재 뿐만 아니라 미래를 책임지시는 미래까지 계획하시고 보장하시는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하심에 놀랐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여호와 자신에 대해서 놀라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감히 인간이나 다른 피조물을 초월하시는 분이심을 다윗이 분명히 깨닫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시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시며, 순간의 정점에 불과한 인간을 아득히 뛰어 넘으시는 그러므로 장래의 일조차 가장 확고하게 말씀하시고 복을 주시는 진정한 절대자라는 점에서 가장 크게 놀라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사람도 벗어날 없는 것이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예배를 드리는 순간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습니다. 누구도 시간을 거스를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시간이 흐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을 맞이할 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은 자신의 시간 속에서 정확하게 자신의 인생 밖에 살아갈 밖에 없는 것입니다. 누구도 자신의 시간 밖에 있는 것을 경험하거나 넘어갈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모든 사람은 자신의 후손에 집착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삶이 비록 끊어진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일부분이라 있는 자신의 후손이 세상에 남는다면 자신도 남을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는 어떤 분이신가? 그분은 시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시간의 밖에도 계시며 시간 안에도 계시는 시간의 초월자이시며 주권자이십니다.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는 그분의 이름 그대로입니다. 모든 인간은 시간에 얽매여있고 어떤 것을 의지할 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그러나 여호와는 전혀 다른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인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주관하시는 분이시며 감히 다윗조차 상상해보지 못한 그의 기대와 생각을 완전히 뛰어넘은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다윗은 오늘 말씀에서, 과거의 하나님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는 시간을 뛰어넘으시는 여호와를 깨닫고, 여호와께서는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이스라엘 백성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셨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23절과 24절이지 7:23 땅의 어느 나라가 주의 백성 이스라엘과 같으리이까 하나님이 가서 구속하사 자기 백성으로 삼아 주의 명성을 내시며 그들을 위하여 일을, 주의 땅을 위하여 두려운 일을 애굽과 많은 나라들과 그의 신들에게서 구속하신 백성 앞에서 행하셨사오며 7:24 주께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세우사 영원히 주의 백성으로 삼으셨사오니 여호와여 주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매우 놀라운 점은, 비록 다윗이 자신이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여호와께서 과거 가운데 역사하신 일을 기억하면서 시간을 초월하시는 여호와의 위대하심과 그분의 은혜를 찬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여호와를 향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데 자신의 시간의 영역 아니라 과거조차 지배하시며 역사하시며 구원하셨던 전능하신 여호와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라는 관점에서, 시간을 넘어서는 절대자이신 여호와께서 미래에도 그분의 약속을 반드시 이루실 것을 확신하면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25절과 26절이지 7:25 여호와 하나님이여 이제 주의 종과 종의 집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영원히 세우셨사오며 말씀하신 대로 행하사 7:26 사람이 영원히 주의 이름을 크게 높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 하게 하옵시며 주의 다윗의 집이 앞에 견고하게 하옵소서”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여호와께서 절대자가 아니시라면, 그분이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여호와라는 존재가 마치 인간처럼 시간에 얽매이시며 인간처럼 변덕쟁이이며 변하시는 분에 불과하다면, 우리가 도대체 어떻게 그분을 믿을 있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여호와께서 절대자이심을 고백하면서, 과거에 그분의 일하심을 기억하면서, 이제는 그분을 믿고 나아가서 그분이 약속하신 미래를 붙들고 감사하면서 그분의 말씀을 이루시기를 기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과연 여호와의 약속은 이루어졌는가? 라는 것입니다. 과거로 부터 이어지던 그분의 말씀은 이루어졌는가? 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 32-33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32 그가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하나님께서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1:33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나라가 무궁하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의미인가? 사실 이스라엘 역사를 돌아보면 결국 나라가 분열되고 철저하게 망하게 되었습니다. 남의 나라의 포로가 되었고 돌아온 이들조차 겨우 명맥을 유지하다가, 강대한 제국들의 다스림을 받는 비참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이땅에 보내셨습니다그저 아무 혈통이 아니라, 분명한 그분의 약속대로 다윗의 후손으로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땅에 오심은, 시간을 넘어서 그분의 뜻을 이루시고야 마는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라는 것입니다. 비록 다윗의 왕조는 무너졌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완전히 세우시는 것입니다.

다윗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 자신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친히 시간 안으로 인간으로 가장 낮은 모습으로 땅으로 오신 것이며 그분을 통해서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1 15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1: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이루어질 확고한 미래를 보고 다윗이 놀라고 감사하고 감격했던 것처럼, 반드시 미래를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경험하지 못했지만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반드시 완성될 것이며,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타락한 세상은 완전히 회복될 것이며, 너무나 아름답고 행복한 하나님의 나라가 죄와 질병과 눈물과 고통과 괴로움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가장 완벽한 하나님의 나라가 반드시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무엇이 중요한가? 성도라고 불리는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품과 그분의 계획 안에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8 1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고린도후서 5 17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것이 되었도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의미인가? 저는 이번에 말씀을 묵상하면서, 시간이라는 중요한 속에서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실 때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라고 말할 때에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할 때에, 그것은 단순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감히 인간이 상상할 없는 절대자의 주권과 보호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태초부터 시작하여 이스라엘을 통해 역사하시며, 다윗을 통해 그리스도를 약속하시며 약속을 이루시며, 다가올 미래에 조차 확정적으로 이루시고야 하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사랑의 주권 속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감히 우리를 흔들 없는 것은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 속에서 그분의 은혜에 우리는 붙들려 있고, 은혜 가운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보다 감격과 축복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기는, 오늘의 말씀이 우리에게 용기와 격려가 되기를 원합니다. 시간을 넘어 다윗에게 약속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놀라운 은혜가 하나님의 때가 되어 우리에게 임하여진 것을 없이 감사하며,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넘치게 올려드리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저의 마음 가운데 겸손한 마음을 주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음을 기억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로 살아가기 원합니다. 받을 자격 없는데 받은 용서와 은혜를 감사하며 하나님께 찬양와 영광을 올려드리는 복된 인생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하나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시간을 초월하시는 절대자 하나님 전능하신 여호와의 안에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우리를 품어 주시고 그리스도의 의로 입혀 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안식과 기쁨과 안전을 누리게하시고 영원한 그분과 연합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주님 안에서 없는 기쁨을 누리게 하시고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살아가도록 인도하여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문" 전체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11/blog-post_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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