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 본문"을 어떻게 정했는가?
이번 설교는, 제가 정했다기 보다는 정해진 본문입니다. 함께 섬기는 부목사님과 주일 설교를 돌아가면서 해야 하는 상황인데, "매일 성경" 본문으로 하는 것으로 정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정해진 본문이 민수기였습니다. 거기다가 제가 민수기 본문의 첫 설교자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너무 어려운 처지가 되었습니다.
민수기 본문은 정말 까다롭습니다. 아마 하지 않을 수 있다면, 굳이 정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스토리가 등장하거나 차라리 교리적인 본문이, 준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훨씬 낫습니다. 하지만, 단순한 명령과 숫자, 그리고 지금 시대와 정말 동떨어진 것 처럼 느껴지는 정결 예법이 설교 본문이 된다면, 막막한 것이 사실입니다.
"빠르게 해결하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저 본문을 계속 묵상하고,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또 그것을 성도님들에게 최대한 잘 들리고 이해되도록 구성하는 방법 뿐입니다. 이미 설교 스케쥴이 나왔기 때문에, 설교 본문을 처음 읽고 준비한 것부터 따진다면, 대략 두주 반 정도 준비한 설교입니다.
* "설교의 전체 구조"는 어떠했는가?
이번 본문을 묵상하면서, 두가지 큰 틀을 잡았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거룩을 요구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과 연결해서, "여호와 자신이 그 진영 안에 있기 때문에 거룩을 요구하셨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그것을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이고 공동체 안에서 실천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유출병이 무엇인지, 그리고 악성 피부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명하는데에만 십분 이상을 쓸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지루한 전개를 사용하면, 성도님들이 졸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그 부분은 아주 간결하게 짚고 넘어가면서, 오히려 "좀 더 도전적인 구조"를 사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요구를 하실 수 있는 분이신가? 그리고 과연 그러한 요구가 합당한가? 에 대한 도전적인 구조입니다.
이러한 구조는 불신자를 염두에 둔 구조입니다. 팀켈러 목사님이 자주 사용하는 구조입니다. 그리고 신자이지만 믿음이 연약한 이들에게 도전을 줄 수 있는 구조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일종의 답변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설명"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해답으로서 그리스도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 "설교의 서두"를 어떻게 열 것인가?
지금까지 들어본 대략 스무편의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에서는, 설교 서두에 "설교 전체 구조를 제시"합니다. 설교가 전체 구성이 세가지 대지라면, 세가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다고 미리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저 같은 경우는, 그것이 썩 좋은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설교에 대한 신비감 혹은 기대감"을 떨어트리기 때문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아직 제 수준에서는 그렇게 서두에 이야기하고서 설교 본론에 들어가서 기대감을 유지하는 것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그런 방식을 감히 시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번 설교의 경우에는, 민수기로 처음 여는 설교이기 때문에, 적어도 민수기가 무엇인가를 설명은 반드시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부터 출애굽기에 이어지는 스토리를 아주 간략하게 제시하면서 설교를 열었습니다. 이러한 접근이 좋은 것은,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적어도 스토리를 이해하면서 내용을 따라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책"은 어떻게 설교에 인용했는가?
본격적으로 신앙 혹은 신학 서적을 읽은 것이 스무살 부터입니다. 그리고 이십년이 지난 지금에와서야, 지금까지 읽고 고민한 모든 것이 꽃을 피운다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책들을 함께 읽기 시작한 것이 오년 정도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모든 것들이, 유기적으로 조금씩 연결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설교문을 쓰면서 큰 막힘이 적고, 생각을 풀어내도 신학인 틀에서 큰 오류가 없어 보입니다. 저에게 이런 날이 올 줄 감히 생각하지 못했고, 누구도 이런 결과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지 않았습니다. 저처럼 이해력이 느리고 속도가 느린 사람도, 결국 꽃을 피울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한편의 설교 가운데, 여섯권의 책을 인용했습니다. 굳이 "꼭 이만큼 인용해야겠다" 라고 생각한 것은 전혀 아닙니다. "이번 설교는 이 정도 인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껴서 인용한 것입니다. 세권 정도는 평소에 좋아서 기억하던 부분이고, 기독교 강요와 나를 따르라의 한 부분은 설교를 위해서 의도적으로 찾은 것입니다.
아래에서 보시는 것처럼, 심지어 "책의 표지에 저자와 책 이름"을 넣고, 이후에 이어서 "책의 내용"을 본당 화면에 띄우면서 사용했습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 설교자들 중에 누구도 이렇게까지 한 적은 없는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굉장히 조심스러웠습니다. 한편으로는 매우 도전적이고 또 한편으로는 매우 따분하게 느끼실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책을 인용함에 있어서 "그 지루함"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이번에 설교를 준비하면서 새롭게 느낀 것은, 설교자가 책을 인용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어떤 목적으로, 그리고 또 어떤 깊이와 감정으로 그 책을 인용하는가"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인용한 두 권은, 탁월한 책들이지만 모두 기독교와 상관 없는 secular한 책들입니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결론적으로 성도님들의 마음에 전혀 부담이 없어 보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secular 한 책을 인용했지만, 오히려 제가 의도한 것 이상으로 "전체 말씀"을 진중하게 받아들인 분들이 있어서 적잖이 놀랐습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제가 적절하게 "그 책에 대해서 평가"를 한 것이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책의 논리와 비교하면서 "성경의 탁월함을 논증"했기 때문에, 더 성도님들의 마음이 오히려 편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에 인용한 모든 내용들은, 단순히 설교의 논리를 이끌어가기 위한 내용이 아니라, "저의 마음이 완전히 담긴 내용들"이었습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 책들을 인용하면서, 제가 정말 존경하는 분들의 "명예"를 소중히 여기고 싶었습니다.
탁월한 저자들의 "모든 신학과 삶을 걸고 기록한 책"들이, 조금이라도 초라하게 인용되는 것이 너무나 싫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읽고 느꼈던 마음의 기쁨과 감동"을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제 온 마음을 담아서 읽고 인용하고, 그것이 성도님들의 마음에 남기고 싶었습니다.
칼빈을 인용한 부분은,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대한 기독교 강요에 나오는 칼빈의 해설입니다. 읽으면서 제 마음에도 너무 마음에 감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설교 때에도, 마치 제가 칼빈 자신이 된 것 처럼 최대한 감정을 넣어서 읽었습니다.
본회퍼는, "말씀에 대한 진실함과 자신의 신학"을 "자신의 생명"으로 증명한 사람입니다. 나를 따르라를 읽으면서, 그것을 너무나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마음이 숙연해지는 것을 저절로 느낍니다. 그래서 저 역시, "정말 진지한 태도와 마음"으로 인용하였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인용한 마이클 호튼의 언약 신학의 인용은, 수도 없이 줄을 치면서 그 책을 읽고 "제 마음에 가장 깊이 남은 내용"입니다. 호튼의 신학 그리고 개혁주의의 핵심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설교의 마무리에 책을 인용하는 것은 왠만하면 하지 않았겠지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사용한 것입니다.
* 설교에 대한 "반응"들
설교를 마치고 예배 후에 인사를 하는데, 성도님들의 표정이 참 다양했습니다. 많이 당황하신 분들도 계셨고, 제 손을 꼭 붙잡고 너무 좋았다고 말씀하신 분들도 계셨습니다. 너무 감정적이지 않고 신학적인 깊이가 있어서 그런 부분에서 좋았다고 하신 분도 계셨습니다. 어려웠지만 왠지 모르게 좋았다는 분도 계셨고, 위로가 되었다고 아내를 통해서 연락 주신 분도 계십니다.
또 어떤 분들은 설교의 주제를 정확하게 이해한 분도 계시고, 구조나 책 인용이 상당히 파격적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설교"를 들은 것 같았다고 말씀하신 분들도 계셨습니다. "이제는 정말 어떻게 살아야할지 알겠다" 라고 하신 분도 계셨습니다. 동일한 설교를 듣고, 성령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다양하게 역사하신다고 느꼈습니다.
물론 어떤 분들은 너무 지루했다고 말씀하신 분도 계셨습니다. 이십분 정도면 딱 좋겠는데 너무 길었다고 이야기하시고, 또 너무 고차원적인 이야기라서 힘들었다는 분도 계셨습니다. 특히 칠십이 넘으신 어르신들이 그랬다고 반응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런데 또 흥미로운 것은, 육십대 어르신 한 분 중에는 "정말 대단하다!"라고 말씀해 주신 분도 계십니다. 제가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그렇게 마음을 느끼셨다는 것이 설교자로서 행복했습니다.
제가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느낀 것이 정확하게 그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대단하다!, 겨우 40분이라는 시간에 이렇게 아름다운 내용을 이렇게 아름다운 구성으로 이렇게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전하다니!" 존경하는 분의 수준에 아주 작게나마 다가갔다는 것이 기뻤습니다.
* "설교의 매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설교자로서 항상 제가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해야 매력적인 설교가 되는가?" 입니다. 이 질문은, 아마 평생의 고민이 될 것입니다. 물론 기본적인 전략들은 모든 설교자들이 다 아는 것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인 설교는 "무엇인가"가 확실히 다릅니다. 그리고 저는 그 매력 포인트는 결국 "설교자의 어떤 본능적인 감각"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어떻게 일할 것인가?"를 에전에 읽고 내용을 마음에 품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실제로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는 본능에 가깝습니다. 성경을 묵상하다가 제 마음 속에서 거의 저절로 떠오른 것에 가깝습니다. 이 부분이 저는 항상 흥미롭습니다.
저는 재미있는 웹툰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요즘의 웹툰은, "엄청난 내용 전개와 구성력"을 가집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넘나들고, 등장 인물들의 심리 안에서 일어나는 내용을 치밀하게 묘사하고 이 모든 것을 탁월하게 연결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을까?" 감동하면서 볼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팀켈러 목사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를 들으면 들을 수록 매력적입니다. 지루할만 하면 예가 등장하는데, 그 예들은 반드시 논리적으로 들어가야 하는 자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신학적인 자료들 그리고 심지어 기독교에 대적하는 사람들까지 인용하지만 전혀 거부감이 없습니다.
저는 이 "탁월함"들을 "계속적으로 습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이번주에 있을 좋은 설교를 만들고 싶어 반짝 무엇인가 대단한 기술을 동원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설교자가 "꾸준하게 무엇을 하는가"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고 "가장 탁월한 것"을 "자신의 오감과 영혼"으로 "지속적으로 경험"해 보아야 합니다. 저에게 있어서는 "성경 통독과 지속적인 묵상, 꾸준한 독서와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에 대한 연구"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꾸준하게 고민할 때에, 결국 설교에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 어느 정도로 원고를 "연습"해야 할까?
제가 좋아하는 탑건 메버릭에는, 상징적인 숫자인 "10"이 등장합니다. 영화 초반에서 메버릭은 "마하 10"이라는 벽을 깨기 위해서 도전하고 성공합니다. 그리고 영화 중반을 넘어 주어지는 미션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10G"라는 중력을 이겨내야 합니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10이라는 숫자를 통해서, 인간이 이겨내야할 가장 완전한 목표와, 그것을 이뤄내는 메버릭의 위대함을 보여줍니다.
설교 원고는 목요일 정도에 90퍼센트 정도 완성이 되었습니다. "실제 설교의 삼일 전" 입니다. 원고를 쓰면서 이미 연습을 하지만, 제대로 연습하는 것이 항상 중요합니다.
원고가 완성된 후에 대략 세어보니, 방에서 일곱번 정도 소리내어서 모션과 함께 연습하고, 실제 본당 강대상에서 세번 정도 연습하였습니다. 도합 열 번입니다. 의식한 것은 아니지만, 세어보니까 그렇더군요. 지금 교회에서 실제 강대상에서 설교를 세번이나 연습한 것은 처음입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는 주일에 도합 세번의 설교를 해야합니다. 두번째가 끝이 나고 세번째 예배에 들어갔을 때에는 이미 몸의 힘이 거의 다 빠진 상태였습니다. 실제로 정신이 거의 흐려진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설교자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버거웠습니다.
그런데 세번째 설교 후반부 중에 참 흥미로운 경험을 하였습니다. "거의 연습한 대로" 한 것입니다. 제 정신은 지쳐서 더 이상 설교의 내용을 따라갈 수 없지만, 여러번 연습한 것이 저의 몸과 근육에 남아서 앞서간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지나칠 정도로의 실전 연습"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이번에 더욱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 "무슨 자료"를 설교에 참조하였는가?
저는 항상 동일한 패턴입니다. 개역 성경 묵상, NET BIBLE 번역본, 추가 번역본과 원어 참조, 스터디 바이블, 주석, 사전 등의 순서입니다. 그리고 조금 저속한 표현일 수는 있겠으나, "닥치는대로 다 찾아보는 것" 이 저의 전략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우아한 설교 준비를 상상하는 듯 합니다. 그런데 적어도 저에게 있어서 설교는, 혼신의 힘을 다하는 전투에 가깝습니다. 책을 읽고 고민한다는 점에서는 우아해 보일 수 있겠지만, 그 과정은 정말 처절합니다.
아래의 스터디 바이블들은, 모두 탁월한 내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이해를 보여주고 설교의 큰 흐름을 결정해 주었습니다. 충분히 읽고 고민하면서 설교 내용에 반영한 것들입니다.
5:3 without
the camp. Outside the boundary of the camp (v. 4). defile. To render unclean. whereof
I dwell. God’s presence was the reason for safeguarding the purity of the
camp. Approaching God requires clean hands and pure hearts (Ps. 24:3–4).
Joel R. Beeke, Michael P. V. Barrett, and
Gerald M. Bilkes, eds., The Reformation
Heritage KJV Study Bible (Grand Rapids, MI: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14), 203.
1. The
expulsion of people from Israel’s camp for ceremonial uncleanness reminds us that
“the ungodly shall not stand in the judgment, nor sinners in the congregation
of the righteous” (Ps. 1:5). What a solemn matter! Have you been to Jesus for
the cleansing from sin found only in His blood? If we are in Christ then we
know that we have been made fit to approach the Lord and we can enjoy
fellowship with Him.
Joel R. Beeke, Michael P. V. Barrett, and
Gerald M. Bilkes, eds., The Reformation
Heritage KJV Study Bible (Grand Rapids, MI: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14), 204.
5:2 DISEASE … DISCHARGE. Strict instructions were given to the
people in Leviticus 13–15 about diagnosing, treating, and dealing with
conditions that God defined as “unclean.” While this probably resulted in many
saved lives, it was also God’s way of teaching them the foundations of
holiness.
Lyman Coleman, ed., Life Connections
Study Bible (Nashville, TN: Holman Bibles, 2019), 203.
Even this
process, however, is a means of grace from God designed to purify his people
and to encourage all (including the disciplined individual) to cling more
tightly to Christ since our clean state is found in him alone. We enter the new
Jerusalem not having purified ourselves by our efforts but having been washed
in the blood of the Lamb (Rev. 1:5), so that our names are written in his book
of life (Rev. 21:27).
L. Michael Morales, “Numbers,” in Gospel Transformation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ed. Bryan Chapell and Dane Ortlund (Wheaton, IL: Crossway, 2013), 176.
거룩을 정의하는데 있어서는, 기본적으로는 LEXHAM 사전을 다 읽어 보았지만, 결국 깔끔하게 몇 단어로 정리한 것은, 넷 바이블의 각주를 참조하였습니다. 인용한 시편 24편 3절에 등장하는 거룩에서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로고스의 원어 검색으로, 거룩이라는 단어가 처음 사용된 출애굽기 3장 5절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그곳의 각주입니다.
sn The word קֹדֶשׁ (qodesh, “holy”) indicates “set apart, distinct, unique.” What made a mountain or other place holy was the fact that God chose that place to reveal himself or to reside among his people. Because God was in this place, the ground was different—it was holy.
sn (study note)—Includes comments about historical or cultural background, explanation of obscure phrases or brief discussions of context, discussions of the theological point made by the biblical author, cross references and references to Old Testament quotations or allusions in the New Testament, and other information helpful to the modern reader.
Biblical Studies
Press, The NET Bible,
Second Edition. (Denmark: Thomas Nelson, 2019).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공동체가 실제로 행동한 것이 중요했다"는 것은, 이미 제 개인 묵상으로도 끌어낸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John Crurrid의 주석을 통해서 좀 더 확신있게 적용할 수 있었습니다.
What is at stake is not merely the people in the camp,
but the very sanctuary and dwelling place of God. Nothing unclean is to come
near that which sits in the centre of the camp, but it will be thrust outside
the camp. The final verse of the passage drives home the importance of the
action: three times the text says that Israel did as God had commanded them.
This triple emphasis is further heightened by the exact repetition at the
beginning and end of the verse: it literally reads, ‘Thus did the sons of
Israel … thus did the sons of Israel.’
John D. Currid, A Study Commentary on Numbers, EP Study Commentary (Darlington, England; Carlisle, PA: Evangelical Press, 2009), 87–88.
* 설교자의 "영광"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설교를 잘하는 것" 자체가 저의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시편 84편을 묵상하다가, 제가 설교를 아무리 잘 해도, "하나님의 영광의 지극히 일부분"을 드러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제 인생 최고의 설교 그리고 모든 성도님들이 감동과 은혜를 받은 설교를 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의 일억분의 일도 나타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깨달음이, 오히려 제 마음을 참 편안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감히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감격했습니다.
저와 같이 초라하고 부족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영광이 드러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것 자체가 이미 구원의 기적이라고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저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의 정말 작은 부분"이라도 드러날 수 있다면, 제 인생에 있어서 이것보다 더 행복한 일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 인생의 최고의 설교"가 되리라고 기대하고 또 어느 정도 예상감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 예상대로 참 좋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설교가 끝이나자 제 마음에는, 제가 잘하고 못하고는 그렇게 마음에 둘 필요가 없다고 느꼈습니다.
정작 설교를 마치니 정말 좋았던 것은, "성도님들과 함께 은혜를 나눌 수 있었다는 사실" 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서 사용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성도님들의 섬기는 자리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야 말로, "설교자의 가장 큰 영광"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이유이고, 또 앞으로 저의 설교가 더욱 기대가 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그리고 "앞으로 설교를 준비하며 살아갈 과정"이며, "제가 해왔던 일들"을 계속 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다짐했습니다.
처음 신학교 시절 설교를 배울 때 부터, 마인드맵으로 full text로 원고를 모두 쓰고, 그것이 연습이 되었습니다. 꾸준하게 독서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힘들고 외로울 때에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힘들었지만, 제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평가하고 발전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익히고 배우는 것이 이번 설교에 정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겨우 몇개월의 공부와 훈련과 연습을 통해서, 저는 설교자로서 또 다른 차원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저는 저의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다른 사람의 길을 가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소명과, 그 확신"을 따라서 걸어갈 것입니다. 그렇게 결심 할 수 있어서 행복하고, 또 오늘 하루를 그렇게 걸어갈 수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 "설교문" 전체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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