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을 변화시키기 위한 '가장 아름다운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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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트럭으로 눈을 치웠지만 손이 미치지 못한 곳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성도님들이 함께 모여서 눈을 치우기로 했습니다. 정말 추운 날씨였지만 모두가 자신의 일인 것처럼 교회로 모였습니다. 도저히 걸어갈 수 없던 곳에 길이 열리는 것을 보면서, 마치 홍해의 기적처럼 느껴졌습니다.
모태신앙으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느낀 것은, '교회는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자라간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정말 사랑하는 분들은,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교회를 섬깁니다. 그리고 그런 귀한 분들을 통해서 모든 분들이 흘러 넘치는 은혜를 누립니다.
눈을 치우면서 마음이 참 행복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형제'와 함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외롭고 힘들 수 밖에 없는 인생의 길에서, 하나님 안에서 하나 됨을 경험하는 것은 기적이며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목사이기 이전에 볼티모어 교회의 한 성도로서, 저 역시 최선을 다해서 일했고 그래서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어쩌면, 좋은 설교를 하고 또 듣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함께 섬기고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 좋았습니다. 저 역시 교회의 일원으로서 더 진실하게 열심으로 섬기고 싶은 마음이며,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그렇게 인도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전에 한 성도님께서, 제가 아닌 다른 목회자의 설교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하신 것을 들었습니다. "정목사님, 이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 정말 제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참 부러웠습니다. "아니 얼마나 그분의 설교가 감동이 되면 나한테까지 이렇게 이야기하시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성도가 이런 마음이 들 수 있도록 설교 할 수 있을까?"라는 진지한 질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좋은 설교란 무엇일까요? 혹은 설교를 잘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어떤 설교가 성도님들에게 감동이 될까요? 아주 어려운 질문이기도하고, 한편으로는 너무나 중요한 질문입니다.
한때는 주해적으로 정확한 설교가 좋은 설교라고 생각했습니다. 단어와 문맥과 신학적인 논리가 완전히 맞아 떨어지는 것이 설교의 목표인 것입니다. 그래서 권위있는 주석들을 많이 구입했습니다.
물론 설교는 당연히 주해적으로 가능하면 정확해야 합니다. 많은 주석가들의 의견을 충분히 살펴야 합니다. 때로는 아주 난해한 본문 해석을 붙들고 씨름해야 합니다. 그래서 설교에는 성경 본문 그 자체와 목회자 자신의 분명한 신학이 함께 조화를 이루어 드러나야 합니다.
또 한때는, 성도님들의 호기심을 끌어내는 것이 좋은 설교라고 생각했습니다. 뻔한 이야기를 뻔한 스타일로 말한다면,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당연히 지루해할 것이고 청중의 관심과 설교의 뜨거움은 식어 버릴 것이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더 매력적인 구조를 만들어낼 것인가에 많은 에너지를 쏟았습니다. 가능하면 연역적으로 내용을 끌어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고 강해와 주제의 두가지 스타일을 함께 섞어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좀 더 효율적이고 다양한 구조를 만들어내는 마인드맵을 쓰는 것은 저에게 있어서 필수입니다.
그런데 요즘에 드는 생각은, '온전히 나의 것으로 체화된 설교'가 정말 좋은 설교이구나 라는 생각입니다. 만약에 주해적으로 바른 설교가 목표라면, 그냥 주석을 읽어드리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호기심을 끌어내는 것 자체가 목표라면, 더 극적인 이야기 구조를 사용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 저는, 아무리 바른 말을 하더라도, 아무리 좋은 구조를 쓴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목회자 자신의 진실한 고백, 확신, 뜨거움이 아니라면 그것이 성도님들에게 감동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결국 문제는, 지역 교회 목회자는 동일한 성도를 대하기 때문입니다. 매주 만나는 동일한 회중이, 담임 목사의 설교에 은혜를 받을 수 있다면 저는 그것이 기적 그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자칫하면 이런 생각이 들게 됩니다. '목사님, 목사님도 그렇게 못하면서 왜 그렇게 설교하세요?'
그래서 저의 결론은, 설교는 정말 진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 자신이 직접, 설교 본문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말씀을 묵상하면서도, 또 설교 원고 자체를 작성하면서도, '도대체 이 본문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이 말씀이 나에게 무엇을 보여주시는가?' 바로 거기에 온 마음을 쏟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고민의 내용을 설교로 풀어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나의 것이 된 그 말씀'을 설교로 풀어내는 것입니다. 물론 주해를 충분히 살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더 중요한 것은, 저의 내면에 다가오고 그래서 품게 된 본문의 의미와 그 능력입니다.
또한 '말씀이 나의 것이 되는 그 과정'이 설교의 구조를 만듭니다. 단순히 한절 한절 논리적인 순서에 따라서 구조를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저의 마음에 감동이 되고 또 마음에 크게 와 닿은 부분을 중심으로 구조를 짭니다. 그래서 어떤 부분에서는 강해 설교이지만, 또 어떤 부분에서는 주제 설교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접근이, 본문 자체가 가지고 있는 구조와 어느 정도의 긴장을 만들어내지만, 그러나 설교가 결국 목회자라는 인격체를 통해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말씀을 받은 저라는 존재가 설교의 구조에 반영이 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고, 설교를 설교 답게 만드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요즘에 특히, 설교 원고를 고치고 또 고치면서 계속 고민합니다. 이제는 이 설교가 좋은 설교인가라고 묻지 않습니다. 주해적이고 신학적인 정확성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오히려 '정말 이 설교가 나의 진실한 고백인가? 나는 정말 이렇게 살교 있는가? 그리고 이 설교를 내 마음에 거짓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할 수 있는가?' 입니다.
그러한 질문을 품고 고치고 또 고친 이후에 최종 원고가 완성이 되면, 그제서야 마음이 놓입니다. 왜냐하면, 부끄러움 없이 설교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해나가는 저의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기를 항상 원합니다. 진실한 설교만이, 우렁찬 목소리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결국 설교는, 나 자신을 향하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의 마음에 넣는 것이 아니라, 저의 마음에 가장 먼저 넣고 저의 마음 안에 닿아야 합니다. 단순한 성경 교사가 아니라 설교자이기 때문에, 그 말씀 앞에서 먼저 엎드리고, 그 안에서 내가 먼저 변해야 하며, 그것이 부담이고 또 영광입니다.
결국 가장 어려운 것이, '나의 설교가 온전히 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좋은 설교를 위한 어떤 의미에서 유일한 방법도 '나의 설교가 온전히 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평생 동안 저의 설교가 그러했으면 좋겠습니다. 저의 설교는, 언제나 온전히 저의 것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한 사역이 쌓여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목회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고 이병욱 장로님은 참 귀한 분입니다. 항상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또 성도님들에게 먼저 다가와서 인사하시던 따뜻한 분이십니다. 얼마나 노방 전도를 열심히 하셨는지 온 성도들의 존경을 받고 또 사시던 아파트에서도 모르는 분들이 없었습니다.
장로님이 소천하시기 한주 전에 장로님 댁에 방문해서 심방을 했습니다. 그때에도 하나님께 감사할 것이 밖에 없다라는 말씀을 나누셨고 참 마음에 깊이 남았습니다. 소천하시기 하루 전에는 주일에 같이 식사를 했습니다. 어느 분 옆에서 식사를 하면 좋을까 두리번거리다가, 마침 장로님 옆 자리가 비어 있어 앉았습니다. 장로님의 젊은 시절에는 먹을 것이 귀했지만, 그래서 본인은 무엇이든지 맛있었고 하나님께 감사했다고 마음을 나눠주셨습니다.
몇개월 전에는 장로님과 함께 기도회를 참석했습니다. 교회 연합 기도회인데 다른 성도님들은 스케쥴이 여의치 않으셔서 아무도 못 오셨지만, 장로님께서 함께 해 주셨습니다. 오고가는 길에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장로님의 젊은 시절의 이야기, 사별한 부인의 이야기, 그리고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소천하시는 날은 평소처럼 운동하시다가 갑자기 쓰러지셨습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주님 품에 안기셨습니다. 모든 성도님들이 참 마음 아파했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토요일이 장례를 치뤘지만 그래도 주일에 왠지 장로님이 교회로 나오실 것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교회 전도지가 준비되면 꼭 노방 전도 같이 나가자고 장로님과 약속했는데 그 약속은 지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저에게 장로님과의 좋은 추억을 쌓도록 해주셨습니다. 저의 셀폰에서 함께 기도회 가던 길에 찍은 사진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유가족께서 보내주신 장로님께서 소천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도 함께 저장해 놓습니다. 아름다운 길과 트리가 십자가 처럼 보입니다. 오직 예수님만 전하기를 위해 애를 쓰신 장로님의 귀한 인생에 어울리는 사진입니다.
추모 예배의 설교 제목은 '모범적인 믿음을 본 받으라' 였습니다. 고심하며 지었는데, 고인의 지나온 삶을 생각하면 참 좋은 제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설교 원고를 준비하면서 또 실제로 설교하면서 장로님의 믿음, 감사, 헌신, 복음에 대한 열정, 그 모든 것을 제 마음에 담았습니다.
마지막 함께한 식사 자리에서 더 많이 이야기를 나누지 못해서 아쉽습니다. 언젠가 주님 나라에서 다시 뵐 때에, 사실 그때 필요는 없겠지만 준비한 전도지를 자랑스럽게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못 다 들은 장로님의 이야기들을 이어 들으며 영원히 행복한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습니다.
담임 목회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이 '영적인 감각을 유지하는 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몰아닥치는 목회 스케쥴 속에서, 나의 영혼의 상태를 돌보며 모든 상황에서 건강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제 자신을 단련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드라마 바이블은 최고의 선택입니다. 잠깐의 짬을 내어 언제든지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드라마 형태로 녹음되었기 때문에 생동감이 있어, 지쳐버린 저의 마음에 힘을 불어 넣어 줍니다.
원래는 드라마 바이블로 전체 통독을 했지만, 올해 하반기는 전략을 약간 바꾸었습니다. 설교를 하면서 가장 많이 인용하게 되는 로마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를 집중해서 들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창세기부터 쭉 듣는 것도 좋지만, 바쁜 목회 일정 속에서 설교 준비와 결합하기 위해 좀 더 효율성을 높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요한계시록 마지막까지 들었습니다. 일단 마음이 참 뿌듯했습니다. 개인적인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이루는 것은, 스스로에게 용기를 불어 넣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가능할 때에 매일 조금씩 들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요한계시록까지 통독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처음에 의도한대로, 설교 때에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 부분이 정말 좋았습니다. 아무래도 목회자는 항상 설교를 생각하게 됩니다. 한 주일이 시작되면, 그 주의 새벽과 주일 설교까지 일주일의 본문을 머리에 담고 다닙니다. 그런데 서신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꾸준하게 들으면서, 준비하는 본문과 매치가 되는 중요한 구절들을 참 많이 발견했습니다. 그전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까지 하나님께서 깊이 깨닫게 하셨습니다.
내년부터는 제가 섬기는 교회에서는, 온 성도님들이 일독을 도전하게 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구약부터 순서대로 하는 것보다 구약과 신약을 함께 결합해서 하는 형태가 훨씬 덜 지루했습니다. 그래서 '20분 신구약 함께 읽기'로 실행할 예정입니다.
제가 섬기는 성도님들이 언제나 마음이 평온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 평온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섬기는 목회자가 부지런히 움직여야 합니다. 제가 언제나 생각하는 것은, 말씀을 떠나서는 '그 누구도' 생명력을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많이 쓰는 것이 제 자신의 영적인 상태입니다. 당연히 저도 삶이 흔들립니다. 그리고 낙심하고 넘어집니다. 그러나 영원하며 견고한 주님의 말씀이 있기에, 저의 평생과 목회를 주님께서 인도하시리라 믿고 오늘도 전진합니다.
어제 잠깐 통화 중에 지인이 물어보셨습니다. '목회하는 것 힘들지 않으세요?' 금방 대답할 수는 없었습니다. 목회자는 안부를 묻는 것에 더 익숙한 사람이기 때문에, 정작 제 마음을 이야기해야 하는 타이밍에는 금방 대답하기가 여의치 않습니다.
저는 모든 사람이 쉽지 않은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유독 목회만 힘들다 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부분은 어렵고 어떤 부분은 영광스럽고, 또 어떤 부분은 한 없이 자랑스럽습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많은 부분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 것이 목회입니다.
책을 읽고 살피고 정리하기로 결심한 이후에, 좋았던 책들을 다시 책장에서 꺼내고 있습니다. 리차드 마우의 이 책은 어린 시절 읽은 책입니다. 칼빈주의에 한참 매료되었을 때에 제목이 좋아서 산 책입니다.
어렴풋한 기억 속에는 너무 좋게 읽었는데, 거의 15년 이후에 다시 읽으니 그때 받았던 느낌이 정확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됩니다. 이 책을 처음 읽을 때에는 유학을 생각도 해보지 않은 때였지만, 이제는 다른 입장에서 모교인 칼빈 신학교의 이야기를 보며 더 정겨운 마음이 듭니다.
저는 칼빈주의자입니다. TULIP을 성경적인 교리라고 믿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그분의 통치 안에서 저의 인생과 목회를 이해하고자 노력합니다. 이렇게 한 문장을 적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현실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자칫하면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명목 아래에서 모든 것을 합리화할 가능성을 언제나 가지고 있고, 때로는 지나친 교리적인 해석으로 인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가능성도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어려운 것은, 하나님의 주권 안에 저의 삶을 녹여내는 것입니다. 저는 다른 사람을 향해서 칼빈주의를 주장하는 것보다, 제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칼빈주의는 결국 제 자신의 삶 속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제 자신과 목회를 볼 때에, 하나님의 일하심을 인정하고 그것 안에서 인내하며 평안을 가지고 전진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모든 성도들이 그런 것처럼 저 역시 당장 오늘 하루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서 쉽지 않을 때도 종종 있습니다. 지나온 시간들 속에서 회한도 있고, 또 마음이 아파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이 하신 것을 감사하게 됩니다. 아픔이 없어서도 아니고 순탄해서도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다스립과 그분의 완전함이 없다면, 이 세상도 제 자신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믿음으로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칼빈주의는 어떤 의미에서 굉장히 딱딱하고 정교하지만 저자의 글이 따뜻해서 좋았습니다. 칼빈주의는 고민이 많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논리로 이해할 수 없는 지점들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민스러운 논점들을 피하지 않고 성경을 진지하게 살피며, 사려깊고 담담하게 그리고 확신 가운데 적은 내용들이 참 좋았습니다.
저자는 신학자이지만 동시에 목회자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책에서 인용된 수 많은 예들이 마음을 울립니다. 칼빈주의자로 직접 목회의 현장에서 마주치는 모든 이야기들이 책 속에 녹아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어린 시절 읽은 이 책의 귀한 영향으로, 지금의 저의 목회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앞으로의 남은 목회를 생각하더라도,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태도를 생각하더라도, 저는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분의 주권을 신뢰하고 설교하고 살아가지만, 동시에 저를 통해서 누군가가 그리스도의 사랑과 아름다움을 조금이라도 엿볼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칼빈주의자로 살아가는 저의 가장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선하게 인도하셨습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기도는 이것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인도하셨고 지금의 일을 모두 이루셨습니다.
저는 하루의 신실함을 지키기도 힘들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저를 인내하시고 이끄셨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이룬 모든 선한 것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제가 교만하지 않게 하시고, 저의 수준을 알게 하시며, 주님 앞에 기도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기도로 이 시간까지 오게 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평소에 기도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성도님들의 기도 제목을 가지고 저의 일처럼 기도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모든 책임을 진다는 무게가 참 무거웠지만, 주님의 자녀들의 기도를 함께 짊어진다는 것이 이렇게 감격적인 일이라는 것은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설교에 힘을 쓰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저의 준비와 저의 마음은 오직 주님께서 아십니다. 홀로 방안에서 고민하고 눈물 흘리는 모든 시간도 주님께서 아십니다. 부끄러움 없이 설교하게 하시니 감사드리고, 주의 말씀을 통하여 성도님들이 은혜를 누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일에 웃음이 가득한 성도님들의 얼굴이, 저의 마음에 너무나 큰 기쁨이 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교회가 안정되게 하심도 감사드립니다. 미래를 생각하면 여러 두려움이 있지만, 그러나 오늘 하루가 주님 안에서 있어서 감사드립니다. 미래를 감추시고 현재에 주님을 의지하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신비임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에 기도하며 믿음으로 전진하는 것이 제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알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모든 짐을 주님께 맡긴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지를 경험합니다.
주님,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것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저의 역할이 너무 크지만, 또 한편으로는 너무 작음에 감사드립니다. 어찌할 바를 몰라서 혼란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주님 주시는 지혜로 해쳐나오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혼란 속에서도 질서를 보게 하시고, 담대해야 할 때에 담대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교회라는 것이 저의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저는 여전히 부족하고 저의 능력은 미천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어떤 것이라고 하실 수 있음을 믿습니다. 저를 민첩하게 하시고, 지금의 수준보다 배의 능력을 주시며, 누구보다 탁월하게 사랑할 수 있는 넉넉한 마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천년이 하루 같은 주님 앞에서 일년은 마치 점과 같은 시간임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모든 걸음 속에서 하나님께서 선하게 인도하시니 감사합니다. 스쳐지나가지 않으시고 저의 손을 잡아 주시니 감사합니다. 아기처럼 주님의 손을 잡았고 서툰 걸음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걸음을 가장 성공적으로 걷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그래서 주님의 일하심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성도들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시니 감사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사람이 어떻게 바꿀 수 있겠습니까? 모든 은혜와 감화와 감격과 감동은, 오직 주님께로부터 나옴을 고백합니다. 오직 성령님의 능력입니다. 주님이 영혼을 다스리시며 주인이 되시기에, 성도님들의 마음이 부드러워집니다. 주님, 이것이 기적입니다. 저는 그것을 보았고, 그래서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여전히 두려움이 있습니다. 여전히 저의 책임은 너무나 크다고 느낍니다. 주님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숨 쉬기가 어렵다고 종종 느낍니다. 그래서 또한 주님께 의지합니다. 지금까지 잘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그저 순간의 기쁨일 뿐임을 고백합니다. 제가 심적으로 받는 모든 부담조차도 주님께 올려드립니다. 저의 가장 낮은 마음이 되기 원하고, 오직 주님의 일하심이 저의 소망이 되고 기쁨이 되기 원합니다.
주님 저를 붙들어 주시기 원합니다. 저는 이제서야 신앙을 배우는 듯 합니다. 전적으로 주님께 잡히는 것이야 말로 성도의 가장 큰 기쁨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 훈련이 되지 않았습니다. 두렵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제가 그렇게 되기를 원하심을 봅니다. 인간적인 표현으로는 운명이고, 주님의 뜻이고 섭리임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저를 온전히 주님께 맡깁니다.
그저 하루를 충실하게 살 수 있도록 힘을 주시기 원합니다. 오늘 하루가 참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좀처럼 종잡을 수 없는 미래를 놓고 두려워하지 않도록 침착함을 주시기 원합니다. 저의 실패가 주님의 실패가 아님을 기억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시기 원합니다. 주님이 그렇게 해 주신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의 영광만이 앞으로도 드러나기 원합니다. 저는 사라지고 없어지고, 오직 주님의 이름이 높아지고 주님의 뜻이 이뤄지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저의 유일한 소원이 되게 하시고, 그것이 저의 인생에 실제로 이루어지게 하시고, 저의 지나가는 그 길에는 오직 주님만이 선명하게 드러나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게 하시고 감사하게 하시니 이것에 감사드립니다. 주의 교회를 섬기는 1년을, 아름답게 지나가게 하신 주님께 모든 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 모든 감사와 찬양을 오직 주님께만 올려드립니다. 존귀하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지금까지 목회로 섬기면서 제가 가장 중점을 두었던 것은, '저의 자리에서, 저의 역할로 섬기는 것' 이었습니다. 교회를 섬기다보면, 내가 드러나고 빛날 수 있는 자리가 있습니다. 목회자의 눈에는 당연히 그런 자리가 더 잘 보입니다. 그리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자리에 있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의 마음에는 언제나, 저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확신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저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교회가 제 개인의 소유라면, 제가 가고 싶은 곳에, 제가 가장 드러나고 멋져 보이는 자리로 찾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주님이 드러나셔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전 교회에서 섬길 때에, 몇분이 저를 부추겼습니다. 이제 저의 위치 정도면,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여지가 있지 않느냐는 이야기였습니다. 저를 좋게 봐 주시고 이야기해 주신 것입니다. 듣는 분은 조금 불편하셨겠지만 단호하게 이야기했습니다. 교회는 저의 교회가 아니라고, 그리고 저는 담임 목사가 아니라고, 제 역할은 담임 목사님의 목회를 잘 이루고 또 교회가 유익이 되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사실 상당히 미련하게 지냈습니다. 제 스스로에게도,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라는 생각도 몇번 했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목사로 섬긴 과거의 시간이 후회가 없습니다. 제 인생에 자랑스러운 것이 별로 없지만, 이렇게 지켜온 저의 태도만은 참 좋다고 스스로 평가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긴 시간의 훈련이, 지금의 담임 목회에도 큰 유익이 됩니다. 이렇게 연결될 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담임 목사는, 모든 자리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꼭 있어야 하는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고, 교회가 필요로 하는 바로 그 자리에 있는 사람입니다. 제가 다른 사람에게 드러나는가 아닌가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더 절실하게 깨닫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편안합니다. 저의 역할에, 제가 할 일에, 그리고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데 전심전력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방향이 분명하게 보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그렇게 훈련했던 것처럼, 제 자리를 지키려고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이고, 또 주님의 교회를 아름답게 세워가는 길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주님의 뜻을 마음에 두고 순종할 때에, 한번도 기대하지 못했던 새로운 길을 그분께서 친히 열어가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목회를 하면, 누군가의 인간 관계가 총체적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과거와 현재가 하나로 연결이 됩니다. 사실 제가 원해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분들이 저에게 여러 이야기를 하기 때문입니다. 퍼즐이 맞춰지듯이 모든게 맞아 떨어지는 것입니다. 때로는 누군가의 삶의 아름다움이 드러나고, 때로는 아쉬운 부분들도 드러납니다. 저의 마음에는 때로는 존경이, 하지만 때로는 깊은 아픔이 있습니다.
저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힘들게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목회만 힘든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살아가는 것 자체가 버겁습니다. 저의 삶이 완전하지 않은 것처럼, 다른 분들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실을 알게 되고, 또 그것이 명확해 지더라도, 누군가의 연약한 점을 굳이 더 파고들어가진 않습니다.
가끔씩은 성도님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분명히 제가 알고 있는 사실과 다른 이야기를 하실 때도 있습니다. 본인의 잘못이 거의 확실해 보이지만, 본인은 상관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도 넉살 좋게 웃으면서 경청합니다. 저도 가끔은, 제가 잘못하고서도 누군가가 그래도 내 편이 되어 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예, 그러시군요' 알아도 모르는 척 하는 것입니다. 지나간 시간 늘 그래왔고 지나고 보니, 그렇게 한 것이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목회를 하면 할 수록, 날카롭게 공격하는 사람보다는, 부드럽게 받아주고 들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커집니다.
그래서 적어도 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누군가는, 조금이라도 편안한 마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여전히 부족한 우리를 받아주시고 인내하시고 붙들어주시는 하늘 아버지처럼, 그렇게 교회를 섬기고 싶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어머니의 귀한 사랑 덕분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늘 저에게 말씀을 읽고 기도하라고 하셨지만, 어린 저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가 않았습니다. 대학생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성경을 읽기를 시작했으니, 한편으로는 참 부끄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참 아쉽기도 합니다. 그나마 그때 정신을 차린 것이 감사하고, 또 한편으로는 너무 늦었다는 생각에 안타까운 마음도 있습니다.
개인 기도 노트를 만든지 몇년이 되었습니다. 거창하지 않고 아주 간단한 노트입니다. 셀폰 메모장에 성도님들의 기도 제목을 적어 놓고 개인 기도할 때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많은 기도 부탁 속에서 잊는 것이 죄송해서, 또 좀 더 진지하게 기도하고 싶어서 시작한 일입니다.
이틀정도 마음이 쉽지 않았는데, 더 기도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오늘 아침에 기도하다가, 갑자기 말씀을 적어 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 간절해져서 그런 듯 합니다. 어머니께서는 굴곡진 인생을 걸으시면서, 늘 성경을 펴고 읽으셨습니다. 어머니께서 우시면서 기도하는 모습도 참 많이 보았고, 그것이 저의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녹아 있습니다.
어머니의 진실함과 절박함에 아직 제가 따라갈 수 없지만, 그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듯 합니다. 한 사람의 인생도 그리고 목회도, 인간의 능력이 역할을 하는 것은 아주 아주 적은 부분인 듯 합니다. 예전에는 너무 막막해서 한숨이 나오던 순간이 거의 대부분이었다면, 이제는 조금은 믿음이 더 생겨서, 기도 제목으로 적고 기도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기도 노트는 점점 길어집니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성경 구절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기도하기 전에 읽고 이 말씀을 붙들고 기도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이라 감사할 따름입니다. 저의 삶 역시 돌이켜보면 녹녹치 않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저를 더 연단시키시는 것이 뜻인 듯 합니다. 어쩌면 이제 시작일 수도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두려운 일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은 그분의 뜻대로 이루시며 영광 받으시는 분이기에 저는 순종할 따름입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벧전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요일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수 1: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잠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잠 16: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히 12: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이 말씀들을 단숨에 읽고 나니, 그제서야 마음에 평안이 찾아옵니다. 어디로 나가야 할지를 조금은 더 선명하게 발견하게 됩니다. 말씀이 문자로 머무르지 않고, 저의 생각과 마음 그리고 전 존재에 스며들기 원합니다. 그럴 때에 저의 인생에 두려움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걸음 한걸음이 진정한 천국의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소망하며 끊임없이 전진하기 원합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나누는 것은,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 그것이 가치있으니 열심히 하라고 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바로 그 가치를 알고 내 인생을 던질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너무나 귀한 일입니다. 새로운 삶, 그리고 성숙한 신앙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바라기는, 제가 섬기는 모든 성도님들이 말씀에 더 가까워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도 더 말씀으로 깊이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짧은 인생을 살아갈 뿐이지만,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매 순간 영원의 기쁨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섬기는 모든 시간 속에서, 오직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역사하시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주일 설교를 생각하면 마음이 막막할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사실 거의 대부분의 과정이 그렇습니다. 본문을 정해 놓고서도 마치 망망 대해를 앞에 두고 그 바다를 지나가야 하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세상에, 이번주는 어떻게 준비해야하지? 말씀은 너무나 넓고 광대하며, 저는 너무나 작은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아주 가끔씩은 더 이상 최선을 다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누군가의 기대는 큰 부담이 되고, 제 자신을 향한 저의 기대조차 부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가장 큰 부담은, 매주 잘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상황 속에서 정신을 차릴 수 밖에 없는 것은 목사는 프로이기 때문입니다. 프로의 세계는 냉정합니다.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 최선을 결과를 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 면에서 단순히 영적인 일이라는 차원이 아니라, 어떤 조직의 리더로서도 저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오랫동안 목회하면서 느끼는 것은, 목회는 카오스라는 것입니다. 혼돈 그 자체입니다. 교회는 수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 속에서 존재합니다. 그리고 다양한 역학적인 관계 속에서 변화가 일어납니다. 목회자는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위치입니다. 특히 담임 목사는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낄 때도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설교의 시간 만큼은 오롯이 목회자의 시간입니다. 모두가 경청하는 바로 그 시간, 그 순간을 위해서 목회자는 최선을 다합니다. 설교는 어렵지만, 교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시간이고, 제 자신을 그곳에 던져야 합니다.
겨우 삼십분 남짓한 시간인데,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많은 것들이 필요합니다. 끊임없이 발전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또 그것을 위해서 모든 제반 조건을 조절하면서 자신을 관리해야 합니다. 평소의 성경 통독과 묵상, 꾸준한 독서와 말씀에 대한 열정, 그리고 무엇보다 성도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가끔씩은 그런 생각을 합니다. 목회를 하는 것 자체가 기적이구나. 한동안 설교가 정체되어 있다고 생각되어서 참 괴로웠고, 지금도 그런 느낌이 조금은 듭니다. 학적이고 딱딱하고 어려운 설교, 그리고 쉽고 금방 이해되는 묵상과 같은 설교 사이에서 여전히 갈팡질팡하고 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다가 크게 한숨을 쉬고 여러번 되네입니다. 너무 어렵게 하지말고 쉬운 설교로 준비하자. 들리지 않는 설교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렵습니다. 계속 발전할 수 밖에 없습니다. 팀 그로버가 이야기한 것처럼, 저에게는 애초에 천장도 없고 바닥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간구하며 도전하고 앞으로 전진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동네 길을 잠깐 걸었습니다. 담임 목회를 시작한지 8개월이 지나고 나서야, 동네를 걸을 여유가 드디어 생겼습니다. 메릴랜드는 산지가 많아 동네길도 오르막이 꽤 높습니다. 숨이 턱까지 차고 속도가 느려집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걸었더니 정상으로 올라왔습니다. 여름의 하늘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여기까지 이끄셨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 자리까지 밀어 붙이셨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그렇습니다. 제가 느끼는 감정 부담 혹은 무거움은, 누군가에게 이야기해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특히 목회자는 주로 듣는 입장입니다. 아마 평생 그럴 것입니다.
요즘에는 누군가를 설득하는 것보다는, 저의 일을 잘 하기 위해서 더 노력합니다. 저의 사명을 감당하기에도 인생이 참 짧기 때문입니다. 마치 아주 가느다란 선 위를 걸어가는 것 같습니다. 좌우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없이 앞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래서 저의 사명이 더 선명해 지는 것 같습니다.
목회자에게는 목회가 전부입니다. 목회는 '카오스 속에서 걸어가는 작은 한 걸음'입니다. 정의를 내리고 나니 썩 마음에 들었습니다. 미래는 알 수 없고, 현재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습니다. 도저히 내 힘으로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인정하면, 그때서야 내 영혼의 깊은 곳에서 진실한 기도가 나옵니다. 그것은 절망 속에서 마음에 빛이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그저 기도하고, 그저 행동하고, 그렇게 목회의 길을 걸어갑니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너무나 암담할 때가 참 많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지난 이 시간에 고백하는 것은, 그 때를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에 지금의 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가끔씩은, 꼭 그렇게까지 하셔야 했나라는 눈물이 핑도는 원망의 마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뜻대로 그렇게 하셨고, 저를 조금은 주님을 닮은 사람으로 빚으셨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를 잘 감당하기 원하고, 설교를 잘 감당하기 원합니다. 성도님들은, 좋은 설교를 듣기 위해 예배를 드립니다. 단 한 번도 방심할 수가 없고, 단 한번도 실패하지 않기를 원하는 마음입니다. 당연히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제가 감당해야 하는 현실을 인정하고 목표를 그렇게 잡고 싶습니다.
세상에 수 많은 직업이 있고, 직업적인 동등성이라는 측면에서 목회자는 다른 직업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가까이에서 대하고 그 말씀을 통해서 주님의 뜻을 선포할 수 있는 것은, 목회자만이 가진 가장 큰 특권이자 영광입니다. 그 일은 해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것이며, 삶의 전부를 다 태워도 아깝지 않은 어떤 것입니다.
대단한 성공이 아니라, 그저 포기만 하지 않아도 좋겠습니다. 주저 앉아버리기에는 이미 맡겨진 것들이 너무 커졌습니다. 그저 작은 한걸음, 하루를 성실하게, 그래서 그 연장선 안에서 이어지는 그 사명의 길이 하나님 보시기에 썩 좋았으면 좋겠습니다. 저의 길이 어떻게 이어질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최선을 다하고 싶은 마음, 그것이 저의 마음입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시 119:103) 누구나 성경을 열심히 읽으라는 말은 듣습니다. 그리고 성경이 꿀보다 달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