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7편에서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다윗은 사자 같은 사람들 앞에 있습니다. 사자는 도저히 대항할 수 없는 대상이며, 또한 생명을 반드시 앗아가는 존재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생명의 위협 앞에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다윗은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도움을 구합니다. GT 스터디 바이블은, 우리의 삶의 어려움을 두가지로 구분하여서 설명합니다. 우리의 삶의 고통 중에 많은 부분은 우리 스스로의 잘못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런 경우에는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잘못 없이 일어나는 일도 당연히 있습니다. 이 경우가, 오늘 시편 속의 다윗의 상황입니다.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의 가장 깊은 내면까지 잘 아시고 또한 그것에 따라서 심판하시는 분이심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습니다. 물론 다윗은 완전한 자가 아니지만, 적어도 오늘 시편의 경우에는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억울함을 하나님 앞에 호소하며 도움을 구합니다.
이 시편은 우리의 실제적인 삶에서 너무나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아닌 것 처럼 사람들은 주장하지만, 세상은 강자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연약한 이들이 핍박과 어려움을 겪는 일들은 셀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만약, 우리의 삶을 감찰하시며 심판하시는 분이 없다면, 연약한 자들의 억울함은 감당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분노와 상황에 대한 억울함으로 잠도 제대로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이 모든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억울함을 아시며, 원수들을 향하여서 분노하시며, 악인이 자신의 포악과 스스로의 함정에 빠지고 말 것을 확신하면서 마음에 위로를 얻습니다.
다윗은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겠다고 말하며 시편을 마무리합니다. 가장 높은 곳에 계신이에 대한 확고한 믿음입니다. 나의 환경을 초월하여서 존재하시는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우리의 삶에 고난이 찾아올 때에, 억울함으로 고통 받을 때에, 지존하신 여호와를 찾고 그분을 의지하는 것만이 성도의 유일한 위로입니다.
In Psalm 7, David calls his God to save him from the evil men like a lion. David asks that God search his mind and soul to discover the sin. Of course, David is not the perfect right man before God. However, in this chapter, he is in an unfair situation.
When we are in an unfair situation, it is so hard to get comfort from the people or situation. However, David got a great comfort that God is sovereign and he knows everything and makes revenge for him on the evil people according to their sin.
God is "the Lord Most High". This is the greatest comfort for all his people who have faith in him. We should pray for him with confidence that he will rescue me from an unfair situation and make justice.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모여들었습니다. 아마도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께 다가왔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무리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사실 적어도 예수님 앞에서 말씀을 듣고 있는 이들은 외적으로 볼 때에는, 적어도 귀한 사람들이며 믿음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13장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의 앞에 모인 사람들, 그리고 앞으로 주님의 말씀을 읽을 사람들의 마음의 수준과 태도가 너무나 다양하고 차이가 날 것임을 보여주십니다.
무리와 제자들이 다른 점은, 예수님의 말씀을 좀 더 분명하게 알고자하는 열망과 질문이 있다는 것입니다. 수동적인 태도가 아니라 적극적인 태도로 에수님에게 질문합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그들의 영적인 지식이 깊어집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아주 흥미로운 것은, "깨닫지 못할 때에" 악한 자가 빼앗아갑니다. 그리고 "말씀을 듣고 깨달을 때에" 풍성한 결실을 맺게 됩니다. 물론 환난, 박해, 염려와 재물의 유혹등이 말씀의 결실을 맺는 것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들이지만, 듣고 깨닫는 것이야 말로 가장 결정적인 요소로 보입니다.
아주 흥미로운 것은, 밭에 가라지가 분명히 생긴다는 것입니다. 가라지는 처음에 자랄 때에는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나중에야 구분이 됩니다. 처음에는 천국의 아들들과 악한 자의 아들들이 비슷할 수도 있겠으나, 결국에는 구분이 됩니다. 악한 이들이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의인과 악인이 갈라내어 구분이 된다는 맥락은, 그물에 대한 비유에 동일하게 등장합니다. 가장 섬뜩한 것은,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낸다는 것입니다. 악인이 의도적으로 숨어있을 수도 있고, 혹은 자기 착각과 확신 속에서 그 속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분하여 갈라내고 지옥으로 넣으십니다.
"그렇다면 의인과 악인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라는 자연스러운 질문이 생겨납니다. 성경 전체적으로 본다면 의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믿고 죄 사함을 받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속한 자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3장의 직접적인 문맥 안에서 본다면, "천국의 가치를 깨닫고 그것에 모든 것을 건 사람"입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 그리고 극히 값진 진주에 대한 비유는 가장 드라마틱한 비유입니다. 내용은 짧지만, 그러나 그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너무나 강렬하며 분명합니다. 누군가가 자신의 살아온 인생 가운데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가장 가치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너무나 안타깝게도 고향 사람들이 오히려 에수님을 배척합니다. 단순히 피한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분에게 분노하며 화를 낸 것을 의미합니다. 의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해 자신의 삶을 모든 것을 드립니다. 왜냐하면 그분이야 말로 가장 가치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어두운 이들은 가치 있는 것을 비웃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며 분노합니다. 저와 당신은 과연 어디에 속해 있습니까?
In Matthew 13, a large crowd was gathered in front of Jesus. Seemingly, they were very sincere for the word of Jesus. However, in the lecture about the kingdom of God, Jesus shows that there is various spiritual status of the people.
Some people accept the word of God with a genuine heart and understand it and bear tremendous fruit. However, some people do not keep it due to their worldly cares and the seductiveness of wealth.
Like the weed can not be noticed when it is sprouted, the righteousness and wicked will be similar. However, in the last time of Jesus second coming, angels will separate "the evil from the righteous"
Who is the righteous? Surely, they are the believer in Jesus Christ and his power of precious blood for forgiving their sin. And, in this close context of Matthew 13, the righteous are those who know and accept the greatest value of the kingdom of God. The righteous are those who use their everything to serve God and his kingdom due to its value. Which group are you and I belong to spiritually?
시편 1편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악인과 의인의 대조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시대는 악인과 의인의 경계를 점점 허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의인에게도 악한 면이 있고, 악한 사람도 의로운 부분이 있다고 사람을 이해합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완전한 기준 앞에서는 모두 악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의를 입은 자만이 의인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무리에 동참하지 않습니다. GT 스터디 바이블은 악인들은 걷고, 서고, 앉음으로서 그들의 악행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의인을 설명할 수 있는 수 많은 비유들이 있겠지만,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것, 그것 하나로 모든 것을 담아 냅니다. 의인의 모습은 말씀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기쁨 그리고 주야로 라는 말을 통해서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매우 인격적이며 자발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복을 받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어떤 직업을 가지는지, 그 사람이 어떤 취미를 가지는지, 혹은 그 사람이 어떤 인종인지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외로 묵상이라는 문자적인 의미를 모르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GT 스터디 바이블은 "낮은 톤으로 중얼거리는 것"이라고 아주 명확하게 정의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진리로 인해서 완전히 그 마음에 풍성해진 그런 마음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고 설명합니다. 제가 영어를 잘 못하지만, David Gundersen의 묵상은 정말 따뜻하고 멋집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자는, 풍성한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광야 지역에는 제대로 된 나무가 자라기 힘듭니다. 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물만 옆에 있으면 나무는 풍성하게 자랄 수 있습니다. 말씀이야 말로 우리가 풍성해 지기 위한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형통이라는 말에서 잠시 멈추게 됩니다. 예수님 잘 믿는데 고생하는 분들은 어디가서 자기 이야기도 잘 못하십니다. 우리의 본능이 그렇습니다. 하나님 믿으면 무조건 잘 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미 창세기에서 요셉의 형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세상 만사 자기 뜻대로 풀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심" 입니다. 성도 안에 내주하시는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말씀을 묵상할 때에 그 하나님을 확신하며 의지하며 바라보는 수준은 감히 비교할 수 없을만큼 올라갑니다. 그것이 형통입니다.
악인은 심판을 당하게 됩니다. 제가 생각할 때에, 현대인들은 더 이상 심판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심판을 이야기합니다. 악인의 운명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 걸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운명은 지옥입니다.
그러나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알고 인정하시는 걸입니다. 말씀으로 인해서 풍성하고 심지어 고난 가운데에서도 행복을 누리는 의인은 생명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악인은 그 최종적인 길은 심판과 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삶의 여정 속에서, 말씀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시편 1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생명과 죽음을 가르는 바로 그 척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완전히 압도된 그 삶이 바로 생명의 삶인 것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평생을 추구해 나가기를 원합니다.
In Psalm 1, we see the big contrast between the blessed one and the wicked. The wicked are walking their evil way and they make their path hard more and more. However, the blessed man meditates God's word all the time with delight.
The blessed man is described by a tree planted by flowing streams. This shows the flourish of the spiritual blessing. The psalm says that he succeeds in everything. I want to define the succeeds according to Joseph's story. He was in prison but he was successful because God was there with him. The people of God could have the hardship. But, they could overcome with God's word.
I saw God's judgment in this chapter. Psalm 1 shows evidently there will be the final judgment in our last time. I think that people of the present society do not believe this. However, the Bible shows clearly judgment. Only the people of God who in Jesus Christ and love the word of God will go enter God's eternal kingdom.
미국에는 노아의 방주를 실제로 재현해 놓은 전시관이 있습니다. 제가 사는 곳에서 꽤 달려가야 했지만 가족들과 함께 방문해 보았습니다. 성경의 사건을 실제로 더 실감나게 경험해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방주는 정말 어마어마하게 큽니다. 눈으로 볼 때에 그 사이즈는 보는 이를 압도합니다. 노아는 결국 방주를 완성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결과입니다. 그리고 그 방주 안으로 들어갑니다. 비도 오기 전에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Grace and Truth 스터디 바이블은, 히브리어의 서술 스타일이 종종 반복을 특징으로 한다고 설명합니다. 반복을 통해서 어떤 강한 이미지가 말씀을 읽는 우리 가운데 만들어집니다. 노아의 나이가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그리고 노아와 그 가족들이 방주 안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반복되어 강조됩니다. 가슴 뭉클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직접 문을 닫으십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서 실제로 비가 오기까지의 그 기간을, 현재의 크리스천들이 살아가는 것으로 비유적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있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아직 최후 심판의 때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에 긴장이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 속에 더 깊이 믿음을 가져야 하고, 또한 동시에 세상의 비웃음을 이겨내야 합니다.
가끔씩 홍수에 대한 소식이 들립니다. 평안한 곳에 살다가 홍수 경보라도 나면 심하게 긴장하는 것이 우리입니다. 하물며 사십일 동안 깊음의 샘이 터지고 물이 쏟아지는 홍수 속에서 사람들은 엄청난 충격과 공포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똑똑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똑똑하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치 자신이 성경과 대등하며, 자신의 지적인 수준에서 얼마든지 성경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가 신화에 불과하다는 사람, 혹은 국지적인 사건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노아의 나이를 언급하며, 천하의 높은 산이 다 잠겼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생명이 달린 문제입니다. 성경을 말씀대로 믿지 않는다면,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할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할까요? 아니면 사람을 믿어야 할까요?
끔찍한 심판이 일어났습니다. 비가 오기 전에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심판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 그대로 땅위의 모든 생물들을 쓸어버리십니다. 심지어 새까지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나 "오직" 노아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들만 구원을 받습니다. 극적인 대조 그 자체입니다.
심지어 지옥이 있는가를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자와 그리스도 밖에 있는자가 이렇게 대조될 것입니다. 한 부류는 주님을 향한 찬양 속에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부류는 이를갈며 한탄하며 영원한 지옥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This chapter shows that it is real history because we see the exact age of Noah and his behavior. Noah, his family, and living creatures entered before the flood according to God's command. I see the identity of Christian through this scene. We entered in Jesus Christ. And we should endure the insult from people of this world.
The judgment came to this world. It was the tremendous and overwhelming one. Everything on the earth was destroyed and wiped by the flood. It was not nature's coincidence but God's judgment for their sin. Only Noah and his company were saved by God's grace.
갈라디아서 2:20 내가그리스도와함께십자가에못박혔나니그런즉이제는내가사는것이아니요오직내안에그리스도께서사시는것이라이제내가육체가운데사는것은나를사랑하사나를위하여자기자신을버리신하나님의아들을믿는믿음안에서사는것이라2:20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and I no longer live, but Christ lives in me. The life I live in the
body, I live by faith in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데살로니가전서 5:10 예수께서우리를위하여죽으사우리로하여금깨어있든지자든지자기와함께살게하려하셨느니라 (개역개정) 5:10 He died for us so that,
whether we are awake or asleep, we may live together with him. (NIV)
신학 대학원 시절에, 박영선 목사님 수업을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늘 그분의 수업은 너무 좋았습니다.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고 생각할 만큼, 언제나 좋은 수업을 후배들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박목사님은 사실 약간 분위기가 도인에 가깝습니다. :) 한마디 한마디 던지시는 것이 모든 것이 통찰력이고, 성경을 보는 그 생각과 관점이라는 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분입니다.
어느날 수업에서 성경을 잠깐 강해하시는데, 거의 성경 한장을 다 읽으시더군요. 어린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아니, 그냥 몇구절 읽으시고 설명해 주시면 되지 왜 저렇게 거의 한장을 다 읽으시지? 수업 시간도 짧은데 굳이 저렇게 하셔야 되나?"
혹시 제 속 마음을 읽으셨는지, 성경을 다 읽고 한마디 하시더군요. :) "한국 교회는 성경 한구절 한구절을 주해하고 공부하는데에는 익숙하지만, 한장의 맥락에서 그리고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 참 약하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이 내용과 거의 비슷한 워딩으로 기억합니다. 이것은 지금도 제 마음에 깊이 남은 목사님의 큰 가르침입니다.
성경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물론 우리가 깊은 주해 중심의 주석을 통해서 보는 것 처럼, 한구절 한구절, 그리고 더 세분화시켜서 한 단어와 한 단어, 그리고 더 깊이 들어가서 전치사까지 들여다 보며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성경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그렇습니다.
그런데 조금 성경을 읽어나가다 보면,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한 구절 중심 그리고 한 단어 중심으로 바라보는 차원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결국 언어라는 것은 언어가 만들어내는 구조와 그 문맥 안에서 그 의미가 많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문맥이 왜 중요할까요? :) 예를 들어 이런 것입니다. 아내가 결혼하기 전에 저에게 "돼지야"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크게 상처를 받았죠. :) 저는 초등학교 이후로 날씬해 본적이 거의 없어서 돼지야 라는 놀림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내와 이야기를 나눠보니, 그 말의 뉘앙스는 비난이 아니라 "애칭" 이었습니다. 아내 입장에서는 제가 좋다라는 의미로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각자가 다른 컨텍스트 속에서 "돼지야"라는 말을 사용하기 때문에 오해가 생긴 것입니다.
저는 언어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문학 전공은 아닙니다. 하지만 "Literary"라는 말이 주는 중요성과 뉘앙스는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Collins 사전에 보니 이렇게 표현하는 군요.
영어에 영어가 더해지니 정신이 아득해 집니다. :) 하지만 절대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결국 영어에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콜린스 사전과 같이 영어를 영어로 풀어내는 사전을 정복해야 합니다.
위에 내용을 읽어보니 분명한 것은, Literary라는 것이 결국에는 문학에 관련된 것인데, 문학의 작법, 연구, 그리고 이해에 대한 것과 연결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문학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Literary 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그렇다면 성경과 Literary는 관련이 있을까요?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에 의해서 하나님의 보전하심 가운데 오류 없이 쓰여졌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인간의 특성이 반영이 됩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림이 아니라 글입니다. 그러므로 문학적인 특성이 반영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부분들을 늘 마음에 생각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ESV Literary Study Bible"을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보자마자 프리 퍼브를 신청했고 나온 이후로 쭉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스터디 바이블의 저자는 휘튼 칼리지의 총장인 Philip Graham Ryken 그리고 휘튼 칼리지에서 영어 교수로 섬기고 있는 Leland Ryken 입니다. 성이 같은 것은, 부자지간이기 때문입니다. Leland Ryken이 아버지이군요.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학문을 이뤄간다는 것은 정말 너무 엄청난 일입니다. :)
특별히 Philip Graham Ryken은 주석을 포함해서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저술했는데, 살펴보니 웨스트민스터에서 MDiv를 하셨네요. 그리고 옥스포드에서 역사 신학으로 PhD를 받았습니다. 일단 이분의 교육 배경을 보면, 보수적이며 칼빈주의적인 성향이 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습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Philip_Ryken
여하튼, 제가 처음에 이 스터디 바이블을 보았을 때에 정말 엄청난 기대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식으로 성경에 대해서 접근하는 분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구절 한구절 의미를 파악하는 것을 넘어서서, 한 성경을 각 권과 장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살피면서, 문학적인 구조를 분석하고, 그 안에서 성경의 의미를 탐구한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성경을 자세히 주해하는 능력과, 거시적인 이 문학적인 안목까지 갖춘다면, 가장 이상적인 성경 주해로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사용하면서 어땠을까요? :) 첫째로는, 아.. 영어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다른 평범한 스터디 바이블과는 표현이 차원이 다르다는 생각을 여러번 했습니다. 영어 영문학을 가르치는 분이 공저를 했기 때문에 제가 평소에 접근하지 못하는 수준의 영어 구사를 보면서 많이 좌절을 했습니다. 일단 책을 보는데 시간이 많이 들어갑니다.
둘째로는, 저자들께는 너무 죄송스러운 표현이지만 내용이 부실하다는 생각을 종종 했습니다. :) 왜냐하면, 뭔가 성경의 한 장 안에서 그 문맥을 종합적으로 살핀다기 보다는, 그저 성경의 내용을 요약 정리 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상당히 많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필요한 것은, 성경 본문의 문맥에 대한 혹은 문학 구조에 대한 통찰력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의미있는 결론인데, 그저 성경 내용을 잘 정리한 수준에 머무를 때도 꽤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늘 아쉬움만 있었을까요? :) 절대 그렇지는 않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한 저자나 한 책에 대해서 모든 기대를 걸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늘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대 학자도, 성경의 모든 부분에 대해서 통찰력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스터디 바이블을 구입한 이후에 포기하지 않고 항상 살펴봤습니다.
특히 이번에 잠언 설교를 하면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혹시 잠언을 읽으시면 어떤가요? 잠언은 사실 어떤 틀을 잡기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저런 격언들로 가득찬 질서 없는 글의 모음으로 보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번에 제가 설교한 잠언 11장에 대해서 이 스터디 바이블은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요? 아래 내용을 한번 읽어 보시죠.
The Great Either-Or—Chapters 11–12
Antithetic parallelism dominates these two chapters as
well, as the two sentences that make up each individual verse set one thing
against its opposite. It is fruitful to ponder what sense of life and worldview
emerge from this dialectical rhetoric. A large part of the meaning of these two
chapters is embodied in the *epithets that recur: “the humble,” “the upright,”
“the righteous,” “the wicked,” “the treacherous,” “the godless man,” etc.
Another analytic grid for the material is to note the categories of human
experience that the chapters cover—economic life, society, future reward and
punishment, the good life, relations with others, domestic life, etc.
간단하게 내용을 살펴보자면, 결국에는 11장과 12장 안에는 끊임없이 대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대조적인 형국이, 인간의 삶의 감각과 세계관에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은 접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장에 등장하는 통칭(epithet) 등이 의미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또 이 두 장을 보기 위해서는, 경제와 사회와 미래의 보상 등의 다양한 인간의 경험의 범주를 분석해 보면 좋다는 것입니다.
저는 사실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잠언 11장 후반부를 혼자 묵상하면서 준비할 때에는, 대조가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정도까지는 어느 정도 감을 잡았지만, 실제로 이 스터디 바이블을 읽으면서 좀더 성경의 분명한 맥락과 문학적인 특징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 설교에서는, 해당 본문의 모든 구절을 하나하나 설명하기 보다는 특징 되는 구절들 속에 나타는 의인과 악인의 대조, 그리고 위에서 설명하는 삶의 grid 중에 하나인 경제적인 것, 그리고 미래에 대한 보상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설교의 중요한 논지들을 펼쳐 나갔습니다. 이런 부분을 염두에 두고 설교를 한번 들어보시죠. :)
들어보시니 어떠셨습니까? 저 역시 잠언을 묵상하고 설교하는 것이 참으로 막막하고 어렵지만, 제 개인적인 평가로는 이번에는 좋은 자료를 통해서 성경적인 맥락을 잘 붙들고 설교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스터디 바이블을 항상 읽어 보면서, 열번 중에 여덟 번은 썩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 이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평가입니다. 그리고 물론 부족한 제 영어 실력도 크게 작용했다고 생각합니다. 외국 리뷰들을 찾아보면 좋은 평가들이 굉장히 많다는 것을 기억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있어서 열번 중에 두번이라도, 말씀에 통찰과 깊은 이해를 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너무 귀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시라도 저와 같은 고민과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번 살펴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