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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16일 금요일

CGN 하루 20분 공동체성경읽기 장별 요약 - (신03)누가복음

 



* 누가복음 개관

1. 왜 네 개의 복음서가 필요할까?

사복음서는 모두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굳이 네 개의 복음서가 존재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너무나 크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각도와 시각을 통해 그 크신 예수님을 입체적으로 조명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2. 저자 '누가'의 배경과 특징

1) 사랑받는 의사: 따뜻한 성품을 지녔으며, 병의 상태 등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묘사합니다.

2) 선교사: 사도 바울의 동역자로 그와 함께 15년 이상 선교 여행을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다른 복음서에 나오지 않는 많은 여행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3. 보편성을 추구하는 큰 스케일의 시각

1) 유대인의 시각을 넘어선 세계적이고 우주적인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마태가 갈릴리를 '바다'로 소개할 때, 지중해를 경험한 누가는 '호수'로 표현하며, 마태가 헤롯으로 시작하는 반면 누가는 당시 로마의 세계사인 아구스도로 복음서를 시작합니다.

4. 누가복음의 핵심 특징

1) 가난한 자와 연약한 자를 향한 관심: 일명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이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동방박사 대신 목자들이 등장하고, 당시 소외되거나 멸시받던 사마리아인들, 그리고 나인성 과부, 요안나, 수산나, 마리아와 마르다 같은 연약한 여인들이 많이 조명됩니다.

또한 단순히 가난한 자를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복음으로 인해 역전이 일어나는 반전(가장 작은 자 마리아를 통한 메시아 탄생 등)을 보여줍니다.

2) 기도와 성령의 강조: 전도 현장에서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을 만날 때마다 기도해야 했고, 기도할 때 도우시는 성령의 능력을 체험했기에 기도가 강조됩니다.

3) 역사적 배경의 강조: 누가의 전공은 의학, 부전공은 역사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예수의 구속사를 당시 세계사와 긴밀하게 비교하여, 팔레스타인 땅을 한 번도 와보지 않은 이방인(그레코-로마 지식인들)에게 친숙하고 체계적으로 다가갑니다.

4) 사도행전과의 연속성: 누가복음은 단권으로 끝나지 않고 사도행전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 10월 20일

* 누가복음 1장: 메시아의 오심과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

로마의 귀족 데오빌로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를 확실히 가르치기 위해 복음서를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늙고 자식이 없던 제사장 사가랴와 엘리사벳에게 세례 요한의 출생을 약속하시고, 나사렛의 겸손한 처녀 마리아에게는 성령으로 메시아가 잉태될 것을 선포하십니다.

이에 믿음으로 순종한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가 만날 때, 하나님께서 비천한 자를 돌보시고 세상의 질서를 뒤집으시는 은혜를 찬양합니다. 그리고 약속대로 세례 요한이 태어남과 동시에 사가랴의 입이 열리며,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며 조상들에게 주신 언약을 이루실 것을 찬양합니다. 이어 세례 요한이 주님의 길을 준비할 것이 예언되고,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들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실 메시아의 오심이 선포됩니다.


* 10월 21일 

* 누가복음 2장: 예수님의 소박한 출생과 시몬·안나와의 만남

예수님께서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으며, 그 탄생을 처음 목격하고 환영한 이들이 화려한 동방박사가 아닌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목자들과 같이 소박하고 푸근한 이들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이어 아기 예수님이 성전에 올라갔을 때 주의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던 경건한 노인 시몬과 과부 안나를 만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 누가복음 3장: 세례 요한의 회개 선포와 열방을 향한 족보

광야에서 회개를 외치는 세례 요한은 세리에게 부과된 것 외에 거두지 말고, 군인에게는 강탈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이러한 사역을 통해 가난한 자들을 향한 복음의 주제가 강조됩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족보는 요셉부터 시작해 아담을 거쳐 하나님께로 이어지며, 예수님께서 특정 이스라엘만의 구원자가 아니라 온 열방과 전 세계를 위한 구원자이심을 드러냅니다.


* 10월 22일 

* 누가복음 4장: 성령의 능력과 은혜의 해 선포, 그리고 인간적 편견

성령의 인도하심과 능력으로 광야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의 사역이 소개됩니다. 이어 고향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서 인용을 통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 된 자와 눌린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시며, 하나님의 은혜와 회복을 선포하십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고향 사람들은 인간적인 편견에 사로잡혀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는 슬픈 대조를 보입니다.

* 누가복음 5장: 베드로의 부르심과 죄인을 향한 은혜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려 만선을 경험한 베드로는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고 예수님 앞에 엎드립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치유하시며 죄를 사하는 권세까지 드러내십니다. 마지막으로 세리 레위를 부르신 후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을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의사가 필요한 것은 병든 자라며 자신이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음을 밝히십니다.


* 10월 23일 

* 누가복음 6장: 기도와 하나님 나라의 삶

안식일 논쟁과 함께 예수님께서 밤이 새도록 기도하신 후 12제자를 선택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는 다른 복음서보다 예수님의 기도를 특별히 강조하며,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이어지는 평지 설교에서는 마태복음의 산상설교와 차별화되는 가난한 자에 대한 특별한 강조와 구제의 중요성이 다뤄지며, 진정으로 복된 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낌없이 주는 자라는 가르침이 선포됩니다.

* 누가복음 7장: 믿음과 죄 사함의 은혜

백부장의 종을 고치신 사건을 통해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과 예수님의 권위가 드러납니다.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실 때는 시체에 직접 손을 대신 장면을 통해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뛰어넘으시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또한 세례 요한에 관한 말씀을 통해 조금의 다름으로 분열하기보다 복음을 위해 고난받는 이들을 서로 격려하고 하나 될 필요성을 생각하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야기는 죄 사함의 은혜와 용서에 대한 감격을 보여 주며, 예수님께서 죄인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은혜로 받아 주시는 분임을 강조합니다.


* 10월 24일 

* 누가복음 8장: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약한 자들을 돌보시는 능력의 주님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하나님의 권능을 친히 드러내십니다.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해 약하고 소외되었던 여인들의 헌신적인 섬김을 받아 주시며, 약한 자들의 주님이 되어 주십니다. 또한 ‘네 가지 밭의 비유’를 통해 말씀을 듣고 인내로 결실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이어 바람과 바다를 잠잠하게 하시고 거라사 광인을 치유하시며 자연과 영적 세계를 다스리는 전능하신 권능을 드러내십니다. 또한 12년 된 혈루증 여인을 고치시고 12살 야이로의 딸을 살리심으로써,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고통과 한계의 자리에 찾아오셔서 온전한 치유와 구원을 베풀어 주십니다.


* 10월 25일 

* 누가복음 9장: 수난 예고와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의 시작

공생애 3년 중 2년 6개월이 지난 시점으로, 12제자 파송, 오병이어 사건,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수난 예고, 그리고 변화산 사건이 펼쳐집니다. 변화산에서 언급된 '별세'는 헬라어로 출애굽을 의미하며,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인류 구원이 이루어짐을 보여주고, 제자들에게 기적뿐 아니라 수난의 예수님을 알아야 함을 가르칩니다. 

특히 51절을 기점으로 갈릴리 사역이 마감되고 예루살렘을 향한 긴 여행이 시작되며, 주님을 따르려는 이들에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시며 참된 제자의 자격과 정신을 일깨워 주십니다.

* 누가복음 10장: 제자도의 실천과 우선순위의 분별

70인 전도대의 파송과 선교 보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그리고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제자도가 무엇인지를 계속해서 강조합니다. 제자는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이자, 위험을 무릅쓰고 강도 만난 이웃을 돌보는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실천하는 자이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나아가 십자가 죽음을 앞둔 중요한 시점에서 분주한 봉사보다 주님의 말씀에 집중한 마리아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제자로서 영적 우선순위를 바르게 분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르쳐 줍니다.


* 10월 26일 

* 누가복음 11장: 기도와 성령, 위선에 대한 경고

예수님께서는 주기도문을 가르치시며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선하심을 강조하십니다. 이어서 바알세불 논쟁과 악한 세대의 표적 요구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기적이나 바리새인의 위선에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영적인 눈을 밝게 하여 하나님의 빛 가운데 살아가야 합니다.

* 누가복음 12장: 탐욕과 염려, 깨어 있는 삶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 재물을 쌓는 삶의 위험을 경고하십니다. 또한 까마귀를 먹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염려를 버리고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탐욕과 세상 풍조에 휘둘리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주인의 재림을 기다리며 늘 깨어 준비하는 신실한 청지기로 살아가라고 가르치십니다.


* 10월 27일 

* 전체 배경 및 주제

1.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과 제자도: 누가복음 9장 이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여정 속에서 강조하시는 핵심 주제는 제자도입니다.

2. 천국을 향한 나그네의 삶: 성도는 이 땅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고, 천국을 소망하는 나그네로서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 누가복음 13장: 회개와 열매, 그리고 사명의 길을 걸어가는 제자

실로암 망대 사건과 무화과나무 비유는 모든 사람에게 회개가 필요하며, 하나님 앞에서 열매 맺는 삶을 살아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18년 동안 꼬부라진 여인을 안식일에 고치신 사건은 예수님의 자비와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보여 줍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가르침과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겪으실 것을 아시면서도 사명의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제자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보여 줍니다. 

* 누가복음 14장: 낮은 자리를 택하는 겸손과 소외된 이웃을 향한 사랑

수종병 환자를 안식일에 고치신 사건과 이어지는 논쟁은 안식일의 참된 의미와 생명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를 보여 줍니다. 잔치의 비유는 제자가 스스로 높은 자리를 구하기보다 낮은 자리를 택하는 겸손을 가져야 함을 가르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잔치를 베풀 때 보답할 수 있는 사람들만 초대하지 말고, 가난하고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초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통해 제자의 관심은 세상의 권력과 유익에 머물지 않고, 소외된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이어져야 함을 보여 줍니다. 


* 10월 28일 

* 누가복음 15장: 잃어버린 자를 향한 아버지의 간절한 사랑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이 가까이 나아올 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리자,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기 위해 세 가지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백 마리 양 중 하나를 잃은 목자, 열 드라크마 중 하나를 잃은 여인, 그리고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탕자를 품은 아버지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들을 통해 무언가를 잃어버렸을 때 대가를 치르더라도 기쁨으로 찾아내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임을 보여주시며, 천국 백성이 된 우리 역시 나그네 인생길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잃은 영혼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귀한 가르침을 전해주십니다.

* 누가복음 16장: 물질과 영원한 삶에 대한 지혜로운 태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돈을 좋아하던 바리새인들을 향해 우리의 재물관과 내세에 대한 경고의 가르침을 이어가십니다. 먼저 직분을 잃게 될 위기 속에서 지혜를 발휘한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통해, 천국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하찮은 물질을 선용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힘쓰고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지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서는, 오직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인 것처럼 호화롭게 살다 심판을 받는 부자와 달리,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깨어 준비하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깊은 깨달음을 주십니다.


* 10월 29일 

* 누가복음 17장: 겸손한 종의 자세와 감사, 그리고 영적 깨어있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고백하는 겸손한 종의 자세를 가르치십니다. 또한, 깨끗함을 받은 열 명의 나병환자 중 오직 사마리아인 한 사람만 돌아와 감사했던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에 늘 감사하는 삶을 살라고 가르치십니다. 나아가 인자의 임함은 노아와 롯의 때처럼 갑자기 찾아오므로, 세상의 즐거움에 빠져 영적으로 잠들지 말고 늘 깨어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라고 경고하십니다.

* 누가복음 18장: 낙심 없는 기도와 겸손, 그리고 하나님 나라

예수님께서는 기도 응답이 더디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불의한 재판장을 찾아간 과부처럼 끝까지 하나님께 부르짖으라고 가르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공의를 행하시는 분입니다. 또한 자신을 의롭다 여기며 타인을 무시한 바리새인이 아니라, 자비를 구한 세리처럼 겸손히 회개하는 자가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지는 어린아이와 부자 청년, 여리고의 맹인 사건을 통해 하나님 나라는 세상적인 자격이나 부로 얻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과 자격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것임을 강조하십니다.

* CGN 하루 20분 공동체성경읽기 장별 요약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6/01/cgn-20.html

2023년 6월 24일 토요일

삶으로 드리는 찬양 (137) - 하나님 나라는

 


1. 가사 살펴보기

하고 싶지 않은 그 일에도 말씀 따르네
하고 싶지 않은 그 때에도 주님의 뜻 따라 갈 때
주님은 흔들리는 나를 사랑하시며 나를 붙드네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주님 그 안에 있네
하나님 나라는 오직 말씀 따라 사는 비밀 아는 자에게 있네 

어둠에 감추인 빛이 드러나고 주님의 뜻이 나타나네
할 수 없는 일에도 할 수 없는 그 때에도
주의 뜻 따라 나 걷네 주의 길

 

2. 곡 소개

이 곡은, 찬양 사역자인 강찬 목사님의 2020년에 발매된 싱글 앨범에 수록된 곡이다. 이 곡은, 고린도전서 4장 20절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묵상을 담고 있는 곡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내가 주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주인 되시며, 그 말씀에 순종하는 이들의 나라임을 드러낸 아름다운 곡이다.

 

* [좌은혜 X 강찬] 하나님 나라는 [OFFICIAL MV] & 곡 소개

http://kangchan.co.kr/?p=1634

3. 말씀으로 바라보기

누가복음 4: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4:43 But he said, "I must preach the good news of the kingdom of God to the other towns also, because that is why I was sent."

4:42–44 This is the first of more than thirty times that the kingdom of God is mentioned in Luke’s Gospel. A full-blown concept of the kingdom includes: (1) the King (ruler), (2) the rule itself (sovereignty to rule), (3) the realm being ruled (this world), and (4) those ruled (individuals who believe the good news of Jesus Christ). In addition, some passages in the Gospels present the kingdom of God as already present in at least some senses (Mt 12:28) while others speak of it as being still future (Mt 6:10). 이 말씀은 “하나님의 왕국”이 누가복음에 서른번 이상 언급된 것 중에 첫번째 입니다. 완전한 왕국의 개념은 (1) 왕 (통치자), (2) 다스리는 것 (통치할 주권), (3) 통치 받는 영역 ( 이 세상), (4) 통치 받는 자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개인)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복음서의 일부 구절은 하나님 나라를 적어도 어떤 의미에서 이미 현존하는 것으로 제시하는 반면, 다른 구절은 그것이 여전히 미래에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A. Boyd Luter, “Luke”, in CSB Study Bible: Notes, ed. Edwin A. Blum와/과Trevin Wax (Nashville, TN: Holman Bible Publishers, 2017), 1611–1612.

4:43 The Kingdom of God was Jesus’ central concern (see Mark 1:15), and God’s sovereign reign was established through Jesus’ words and deeds. 하나님의 왕국은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였으며,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 Study Bible (Carol Stream, IL: Tyndale House Publishers, Inc., 2008), 눅 4:43.

고린도전서 4:18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4:18 Some of you have become arrogant, as if I were not coming to you. 4:19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4:19 But I will come to you very soon, if the Lord is willing, and then I will find out not only how these arrogant people are talking, but what power they have.  4: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4:20 For the kingdom of God is not a matter of talk but of power.

4:20 words … power. Spiritual character is measured not by the impressiveness of words, but in the power of the life (cf. Mt 7:21–23). 영적인 성품은 말의 감동이 아니라 삶의 능력으로 측정되는 것입니다.

John F. MacArthur Jr., The MacArthur study Bible: New American Standard Bible. (Nashville, TN: Thomas Nelson Publishers, 2006), 고전 4:20.

4:20 kingdom of God Refers to the reign of God expressed in the lives of His people. While the kingdom of God is a present reality, it is not yet fully here. Here Paul urges the Corinthian believers to live according to the value system of God’s kingdom, which prizes powerful deeds more than persuasive speech. 하나님의 나라는 그의 백성의 삶에 나타난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왕국은 지금 존재하는 실제이지만, 아직 완전히 여기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이 말씀에서 바울은 설득력 있는 말보다 능력 있는 행동을 더 귀하게 여기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 체계에 따라 살 것을 고린도 성도들에게 촉구합니다. 

John D. Barry기타, Faithlife Study Bible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12, 2016), 고전 4:20.

4:20 Being a big talker is one thing, but living by God’s power is quite another. Some people talk a lot about faith, but that’s all it is—talk. They may know all the right words to say, but their lives don’t reflect God’s power. Paul says that the Kingdom of God is not just fancy talk, it is to be lived. A person can live only by God’s power when he or she has the Holy Spirit within (see John 3:3–8; 2 Corinthians 5:17). 말을 잘하는 것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에 대해 많은 말을 하지만, 그것은 오직 말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올바른 말을 모두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삶은 하나님의 능력을 반영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그럴듯한 말이 아니라, 삶으로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은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실 때에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 수 있습니다.

Bruce Barton기타, Life Application New Testament Commentary (Wheaton, IL: Tyndale, 2001), 660.

4. 찬양에 대한 묵상

이 찬양은, “하나님의 나라” 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말이 아니라 삶의 능력으로 나타나야 한다” 라는 측면에서 가장 독보적인 찬양이다.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을 매우 추상적인 혹은 개념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고 특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야 말로 성경의 핵심임을 말씀하신다. 나라에는 반드시 왕이 존재하는데, 여호와께서 우리의 왕이 되신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들어가는 것이며, 나의 하루 하루를 마땅히 그분의 백성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단지 경험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리고 우리의 경험이 신앙의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도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신실함과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보이지 않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든지 혹은 심각하게 영적으로 병든 사람인 것이 틀림없다. 기독교는 절대로 말과 개념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에 절대적으로 순종하고자 하는 그 처절한 몸부림으로 존재한다.

성경의 진리는, 그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자 노력하는 자들에게 활짝 열린다. 단지 신앙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는 절대로 신앙이 자라지 않는다. 오직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을 삶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훈련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진리가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는 것이다. 이 찬양을 부를 때 마다, 하나님의 위대한 그리고 존귀한 다스림이 우리의 삶 가운데 풍성하게 드러나기를 기대한다.

* 삶으로 드리는 찬양 전체 묵상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06/1_3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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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13일 토요일

책 어디까지 읽어봤니? (16) - 담임목사가 되기 전에 알아야 할 7가지 Part 2 / 설교는 예배의 중심이며,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

 

담임 목사가 되기 전에 알아야 하는 Part1은, 교회가 쇠락해져가는 시대에 희망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현실을 충분히 감안하면서 작은 교회로서 살아남기 위한 여러가지 조언들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Part1을 통해서 저는 예배와 소그룹에 대해서 더 고민하게 되었고 그리고 더욱 적극적인 성도들과의 만남의 중요성을 생각하면서 미래를 좀 더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Part2는 설교에 대한 내용입니다. 무려 일곱 개의 짧은 글들이 있었지만, 저에게는 임경근 목사님이 쓰신 “설교, 말씀의 봉사!”라는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먼저 가장 좋았던 부분을 인용하고 싶습니다.

설교는 언제나 교회 예배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1517년 마틴 루터에 의해 시작된 종교개혁 전에는 설교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초대교회 시대에는 말씀이 중요했지만, 4세기가 지나면서 서서히 예배에 변화가 찾아왔다. 예배는 점차 형식적인 성례(주의: sacramentalism)로 전락했다. 예배는 말씀의 비중이 약화되고 눈에 보이고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형식으로 바뀌어 갔다.

평신도는 예배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말씀이 사라지자, 눈에 보이는 예배당 건물과 그림과 장식에 의존해야 했다. 웅장한 건물은 하늘의 영광이 땅에 내려온 듯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비치는 빛의 아름다움은 마치 천국에 온 듯한 착각을 주었다. 이 예배당 안에서는 하나님이 계실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압도할 만큼 높은 천장은 인간을 한없이 작게 만들고 겸손하게 했다. 예배당 이곳저곳에 수많은 성상이나 성화가 걸려 있기에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경건해지고 인격이 거룩해지는 것 같았다…

16세기 종교 개혁가들은 예배에서 설교의 의미를 중심에 놓고 중요하게 여겼다. ‘느끼는 예배’에서 ‘말하는 예배’로 개혁했다. ‘보는 예배’에서 ‘듣는 예배’로 개혁했다. 종교 개혁 교회는 성찬이 이루어지는 성찬대보다도 설교단을 더 높게 놓았다. 예배의 중심이 말씀이어야 한다는 것을 건물에 표현한 것이다. 교회 건물에서 성상과 성화를 가능한 없앴다. 건물은 아주 단순하게 설교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지었다. 종교 개혁 교회는 설교단이 제일 높은 곳에 있다.

임경근, “설교, 말씀의 봉사!,” in 담임목사가 되기 전에 알아야 할 7가지, 초판. (서울시 마포구 양화로 78, 502호: 세움북스, 2016), 66.

제가 이 부분을 인용한 것은, “설교의 변화에 대한 역사적인 인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초대 교회 시절에 그렇게 중요하게 여겼던 말씀이, 중세 시대로 넘어오면서 점점 형식적인 성례로 바뀌었다고 지적합니다. 

말씀의 비중은 점점 줄어들고 눈에 보이는 어떤 종교적인 화려함이 말씀을 대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성도들을 무지하게 만들고, 결국 그들이 교회의 잘못된 가르침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종교 개혁가들이 설교를 예배의 중심에 다시 가져다 놓은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런데 제가 우려하는 것은, 요즘 시대의 사람들이 생각할 때에 설교라는 것 자체가 매우 고리타분하고 재미 없는 것이라 여기면서 그것의 비중을 줄여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듣는 것 자체를 터부시하며, 마치 교회의 개혁이라는 것이 예배 중에 설교를 최대한 줄이면서 동시에 뭔가 간증이나 소그룹 모임으로 대체하려고 하는 것이 바른 방향인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혹은 예배의 개혁이, 찬양을 늘리고 설교를 줄이는 것이라고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도들이 설교에 대하여 마음에 어려움을 가지는 것을 이해합니다. 성도들은 설교를 통해서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보다는, 목회자의 주관 혹은 경험이 가득 들어간 어떤 것으로 너무 많이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읽고서도, 본문의 이야기는 하지 않고 다른 이야기로 그 시간을 가득 채운다면, 제가 예배의 자리에 성도로서 앉아 있게 된다고 해도 굉장히 마음이 힘들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설교를 줄이거나 없애는 것이 초대 교회로 돌아가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만약 현시대의 설교가 가장 큰 교회적인 문제가 된다면, 오히려 제대로 설교할 수 있는 목회자를 키워야 하고 또한 좋은 설교가 무엇인가에 대한 교회적인 공감대를 더 만들어내는 것이 진정한 해결의 방향입니다. 그토록 어두운 중세 시대를 지나서 종교 개혁 시대에 다시 복귀 시켜 놓은 말씀의 권위는, 이 시대에도 지역 교회 목회자들의 뼈를 깎는 수고를 통하여 유지되며 더 강화되어야 합니다.

또 하나 이 글에서 좋았던 부분은, 설교는 “선포하는 것”이라는 정의입니다. 저자는 누가복음 24장 46-48절, 사도행전 2장 38절, 그리고 로마서 10장 14-15절의 주해를 통해서, 설교는 선포하는 것임을 설득적으로 논증합니다. 그리고 한글 성경은 선포가 전파로 많이 번역되어서 아쉽다고 말합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성경의 설교는 설득이라기 보다는 선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사전적인 의미 역시, 선포의 의미를 드러냅니다.

누가복음 24: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개역개정) 47 and repentance for the forgiveness of sins would be proclaimed in his name to all nations, beginning from Jerusalem. (NET)

33.256 κηρύσσωc: to publicly announce religious truths and principles while urging acceptance and compliance—‘to preach.’ πῶς δὲ ἀκούσωσιν χωρὶς κηρύσσοντος; ‘how can they hear if there is no one to preach?’ Ro 10:14

Johannes P. Louw and Eugene Albert Nid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Based on Semantic Domains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1996), 416.

2784. κηρύσσω kērússō; fut. kērúxō. To preach, to herald, proclaim.

(I) Generally, to proclaim, announce publicly (Matt. 10:27; Luke 12:3; Acts 10:42; Rev. 5:2; Sept.: Ex. 32:5; Esth. 6:9, 11; Joel 2:1). In the sense of to publish abroad, announce publicly (Mark 1:45; 5:20; 7:36; Luke 8:39).

(II) Especially to preach, publish, or announce religious truth, the gospel with its attendant privileges and obligations, the gospel dispensation.

Spiros Zodhiates, The Complete Word Study Dictionary: New Testament (Chattanooga, TN: AMG Publishers, 2000).

저자는 현대 교회의 문제점으로, 설교를 “설득” 혹은 “나눔” 정도로 이해하려 한다고 지적합니다. 저 역시 이 부분에 있어서 동의합니다. 저는 이 부분은 결국 설교자가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선포를 하기 위해서는, 설교자 자신이 먼저 말씀에 대한 엄청난 확신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정작 이러한 확신을 자기 자신 안에서부터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충분하고 넘치는 말씀에 대한 묵상과 이해와 스스로에 대한 적용이 필요합니다. 본문의 주해로부터 시작되어서 결과물로 나온 그 설교는,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이건 양보 할 수 없다라는 그런 확신까지 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이 결국 부족하기 때문에, 설교가 확신에 찬 선포로 설교로 나오기 어려운 것입니다.

물론 저는 설교에 설득이라는 과정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비록 그 형상이 죄로 인해서 망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죄인은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고 자신의 삶의 방향을 정할 수 있는 일반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저는 설교 중에 설득의 과정도 분명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에 이해되지 않으면 전혀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어떤 부분에서는 복음을 설명하고 충분히 그들의 일반적인 이성을 향하여 설득하는 과정은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설득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설교자의 태도입니다. 저는, 설교자가 청중을 설득하는 것을 설교의 최종적인 목표로 삼고 자신도 모르게 비굴해지는 것을 너무나 슬프게 바라봅니다. 설득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나, 설득 자체는 결코 설교의 최종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마치 당신이 이것을 이해하거나 용납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복음이 뭔가 부족한 것이다 라는 식의 설교자의 태도는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설교자는 당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신이며, 진리를 가진 자이기 때문입니다. 설교자가 선포하며 동시에 설득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청중이 설득되지 않는다고 해서 낙심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반응하지 않는다고 해도 설교자가 주눅들 필요도 전혀 없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당당하게 선포하고 당당하게 설득하여야 합니다. 진리는 여전히 진리이며, 어리석은 죄인이 진리를 버리고 짓 밟는 일은 교회 역사 가운데 수도 없이 일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Part2를 읽으면서, 설교의 중요성에 대해서 다시 한번 절감했습니다. 너무나 어두웠던 중세를 벗어나서, 종교 개혁자들이 자신의 생명을 걸고 다시 회복시킨 그 설교의 자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는 모든 수고는, 결코 물러설 수 없는 가장 위대한 것임을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설교야 말로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며, 앞으로 저의 모든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모든 진리가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아름답게 선포 되기를 원합니다.

* "책 어디까지 읽어봤니?" 전체 글 모음
/ 당신을 변화시키기 위한 "가장 아름다운 길"
https://jungjinbu.blogspot.com/2023/03/blog-post_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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