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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24일 토요일

삶으로 드리는 찬양 (137) - 하나님 나라는

 


1. 가사 살펴보기

하고 싶지 않은 그 일에도 말씀 따르네
하고 싶지 않은 그 때에도 주님의 뜻 따라 갈 때
주님은 흔들리는 나를 사랑하시며 나를 붙드네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주님 그 안에 있네
하나님 나라는 오직 말씀 따라 사는 비밀 아는 자에게 있네 

어둠에 감추인 빛이 드러나고 주님의 뜻이 나타나네
할 수 없는 일에도 할 수 없는 그 때에도
주의 뜻 따라 나 걷네 주의 길

 

2. 곡 소개

곡은, 찬양 사역자인 강찬 목사님의 2020년에 발매된 싱글 앨범에 수록된 곡이다. 이 곡은, 고린도전서 420절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묵상을 담고 있는 곡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내가 주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주인 되시며, 그 말씀에 순종하는 이들의 나라임을 드러낸 아름다운 곡이다.

 

* [좌은혜 X 강찬] 하나님 나라는 [OFFICIAL MV] & 곡 소개

http://kangchan.co.kr/?p=1634

3. 말씀으로 바라보기

누가복음 4: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4:43 But he said, "I must preach the good news of the kingdom of God to the other towns also, because that is why I was sent."

4:42–44 This is the first of more than thirty times that the kingdom of God is mentioned in Luke’s Gospel. A full-blown concept of the kingdom includes: (1) the King (ruler), (2) the rule itself (sovereignty to rule), (3) the realm being ruled (this world), and (4) those ruled (individuals who believe the good news of Jesus Christ). In addition, some passages in the Gospels present the kingdom of God as already present in at least some senses (Mt 12:28) while others speak of it as being still future (Mt 6:10). 말씀은 하나님의 왕국 누가복음에 서른번 이상 언급된 중에 첫번째 입니다. 완전한 왕국의 개념은 (1) (통치자), (2) 다스리는 (통치할 주권), (3) 통치 받는 영역 ( 세상), (4) 통치 받는 자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개인) 포함하는 것입니다. 복음서의 일부 구절은 하나님 나라를 적어도 어떤 의미에서 이미 현존하는 것으로 제시하는 반면, 다른 구절은 그것이 여전히 미래에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A. Boyd Luter, “Luke”, in CSB Study Bible: Notes, ed. Edwin A. Blum/Trevin Wax (Nashville, TN: Holman Bible Publishers, 2017), 1611–1612.

4:43 The Kingdom of God was Jesus’ central concern (see Mark 1:15), and God’s sovereign reign was established through Jesus’ words and deeds. 하나님의 왕국은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였으며,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 Study Bible (Carol Stream, IL: Tyndale House Publishers, Inc., 2008), 4:43.

고린도전서 4:18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4:18 Some of you have become arrogant, as if I were not coming to you. 4:19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4:19 But I will come to you very soon, if the Lord is willing, and then I will find out not only how these arrogant people are talking, but what power they have.  4: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4:20 For the kingdom of God is not a matter of talk but of power.

4:20 words … power. Spiritual character is measured not by the impressiveness of words, but in the power of the life (cf. Mt 7:21–23). 영적인 성품은 말의 감동이 아니라 삶의 능력으로 측정되는 것입니다.

John F. MacArthur Jr., The MacArthur study Bible: New American Standard Bible. (Nashville, TN: Thomas Nelson Publishers, 2006), 고전 4:20.

4:20 kingdom of God Refers to the reign of God expressed in the lives of His people. While the kingdom of God is a present reality, it is not yet fully here. Here Paul urges the Corinthian believers to live according to the value system of God’s kingdom, which prizes powerful deeds more than persuasive speech. 하나님의 나라는 그의 백성의 삶에 나타난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왕국은 지금 존재하는 실제이지만, 아직 완전히 여기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말씀에서 바울은 설득력 있는 말보다 능력 있는 행동을 귀하게 여기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 체계에 따라 것을 고린도 성도들에게 촉구합니다. 

John D. Barry기타, Faithlife Study Bible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12, 2016), 고전 4:20.

4:20 Being a big talker is one thing, but living by God’s power is quite another. Some people talk a lot about faith, but that’s all it is—talk. They may know all the right words to say, but their lives don’t reflect God’s power. Paul says that the Kingdom of God is not just fancy talk, it is to be lived. A person can live only by God’s power when he or she has the Holy Spirit within (see John 3:3–8; 2 Corinthians 5:17). 말을 잘하는 것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에 대해 많은 말을 하지만, 그것은 오직 말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올바른 말을 모두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삶은 하나님의 능력을 반영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그럴듯한 말이 아니라, 삶으로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은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실 때에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 수 있습니다.

Bruce Barton기타, Life Application New Testament Commentary (Wheaton, IL: Tyndale, 2001), 660.

4. 찬양에 대한 묵상

이 찬양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말이 아니라 삶의 능력으로 나타나야 한다라는 측면에서 가장 독보적인 찬양이다.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을 매우 추상적인 혹은 개념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고 특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야 말로 성경의 핵심임을 말씀하신다. 나라에는 반드시 왕이 존재하는데, 여호와께서 우리의 왕이 되신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들어가는 것이며, 나의 하루 하루를 마땅히 그분의 백성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단지 경험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리고 우리의 경험이 신앙의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도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신실함과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보이지 않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든지 혹은 심각하게 영적으로 병든 사람인 것이 틀림없다. 기독교는 절대로 말과 개념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에 절대적으로 순종하고자 하는 그 처절한 몸부림으로 존재한다.

성경의 진리는, 그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자 노력하는 자들에게 활짝 열린다. 단지 신앙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는 절대로 신앙이 자라지 않는다. 오직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을 삶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훈련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진리가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는 것이다. 이 찬양을 부를 때 마다, 하나님의 위대한 그리고 존귀한 다스림이 우리의 삶 가운데 풍성하게 드러나기를 기대한다.

* 삶으로 드리는 찬양 전체 묵상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06/1_3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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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13일 토요일

책 어디까지 읽어봤니? (16) - 담임목사가 되기 전에 알아야 할 7가지 Part 2 / 설교는 예배의 중심이며,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

 

담임 목사가 되기 전에 알아야 하는 Part1, 교회가 쇠락해져가는 시대에 희망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현실을 충분히 감안하면서 작은 교회로서 살아남기 위한 여러가지 조언들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Part1을 통해서 저는 예배와 소그룹에 대해서 더 고민하게 되었고 그리고 더욱 적극적인 성도들과의 만남의 중요성을 생각하면서 미래를 좀 더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Part2는 설교에 대한 내용입니다. 무려 일곱 개의 짧은 글들이 있었지만, 저에게는 임경근 목사님이 쓰신 설교, 말씀의 봉사!”라는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먼저 가장 좋았던 부분을 인용하고 싶습니다.

설교는 언제나 교회 예배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1517 마틴 루터에 의해 시작된 종교개혁 전에는 설교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초대교회 시대에는 말씀이 중요했지만, 4세기가 지나면서 서서히 예배에 변화가 찾아왔다. 예배는 점차 형식적인 성례(주의: sacramentalism) 전락했다. 예배는 말씀의 비중이 약화되고 눈에 보이고 감각적으로 느낄 있는 형식으로 바뀌어 갔다.

평신도는 예배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말씀이 사라지자, 눈에 보이는 예배당 건물과 그림과 장식에 의존해야 했다. 웅장한 건물은 하늘의 영광이 땅에 내려온 듯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비치는 빛의 아름다움은 마치 천국에 듯한 착각을 주었다. 예배당 안에서는 하나님이 계실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압도할 만큼 높은 천장은 인간을 한없이 작게 만들고 겸손하게 했다. 예배당 이곳저곳에 수많은 성상이나 성화가 걸려 있기에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경건해지고 인격이 거룩해지는 같았다

16세기 종교 개혁가들은 예배에서 설교의 의미를 중심에 놓고 중요하게 여겼다. ‘느끼는 예배에서말하는 예배 개혁했다. ‘보는 예배에서듣는 예배 개혁했다. 종교 개혁 교회는 성찬이 이루어지는 성찬대보다도 설교단을 높게 놓았다. 예배의 중심이 말씀이어야 한다는 것을 건물에 표현한 것이다. 교회 건물에서 성상과 성화를 가능한 없앴다. 건물은 아주 단순하게 설교에 집중할 있도록 지었다. 종교 개혁 교회는 설교단이 제일 높은 곳에 있다.

임경근, 설교, 말씀의 봉사!,” in 담임목사가 되기 전에 알아야 7가지, 초판. (서울시 마포구 양화로 78, 502: 세움북스, 2016), 66.

제가 부분을 인용한 것은, “설교의 변화에 대한 역사적인 인식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초대 교회 시절에 그렇게 중요하게 여겼던 말씀이, 중세 시대로 넘어오면서 점점 형식적인 성례로 바뀌었다고 지적합니다

말씀의 비중은 점점 줄어들고 눈에 보이는 어떤 종교적인 화려함이 말씀을 대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성도들을 무지하게 만들고, 결국 그들이 교회의 잘못된 가르침으로부터 벗어날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종교 개혁가들이 설교를 예배의 중심에 다시 가져다 놓은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런데 제가 우려하는 것은, 요즘 시대의 사람들이 생각할 때에 설교라는 자체가 매우 고리타분하고 재미 없는 것이라 여기면서 그것의 비중을 줄여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듣는 자체를 터부시하며, 마치 교회의 개혁이라는 것이 예배 중에 설교를 최대한 줄이면서 동시에 뭔가 간증이나 소그룹 모임으로 대체하려고 하는 것이 바른 방향인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혹은 예배의 개혁이, 찬양을 늘리고 설교를 줄이는 것이라고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도들이 설교에 대하여 마음에 어려움을 가지는 것을 이해합니다. 성도들은 설교를 통해서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보다는, 목회자의 주관 혹은 경험이 가득 들어간 어떤 것으로 너무 많이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읽고서도, 본문의 이야기는 하지 않고 다른 이야기로 시간을 가득 채운다면, 제가 예배의 자리에 성도로서 앉아 있게 된다고 해도 굉장히 마음이 힘들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설교를 줄이거나 없애는 것이 초대 교회로 돌아가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만약 현시대의 설교가 가장 교회적인 문제가 된다면, 오히려 제대로 설교할 있는 목회자를 키워야 하고 또한 좋은 설교가 무엇인가에 대한 교회적인 공감대를 만들어내는 것이 진정한 해결의 방향입니다. 그토록 어두운 중세 시대를 지나서 종교 개혁 시대에 다시 복귀 시켜 놓은 말씀의 권위는, 시대에도 지역 교회 목회자들의 뼈를 깎는 수고를 통하여 유지되며 강화되어야 합니다.

하나 글에서 좋았던 부분은, 설교는 선포하는 이라는 정의입니다. 저자는 누가복음 24 46-48, 사도행전 2 38, 그리고 로마서 10 14-15절의 주해를 통해서, 설교는 선포하는 것임을 설득적으로 논증합니다. 그리고 한글 성경은 선포가 전파로 많이 번역되어서 아쉽다고 말합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성경의 설교는 설득이라기 보다는 선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사전적인 의미 역시, 선포의 의미를 드러냅니다.

누가복음 24: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개역개정) 47 and repentance for the forgiveness of sins would be proclaimed in his name to all nations, beginning from Jerusalem. (NET)

33.256 κηρύσσωc: to publicly announce religious truths and principles while urging acceptance and compliance—‘to preach.’ πῶς δὲ ἀκούσωσιν χωρὶς κηρύσσοντος; ‘how can they hear if there is no one to preach?’ Ro 10:14

Johannes P. Louw and Eugene Albert Nid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Based on Semantic Domains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1996), 416.

2784. κηρύσσω kērússō; fut. kērúxō. To preach, to herald, proclaim.

(I) Generally, to proclaim, announce publicly (Matt. 10:27; Luke 12:3; Acts 10:42; Rev. 5:2; Sept.: Ex. 32:5; Esth. 6:9, 11; Joel 2:1). In the sense of to publish abroad, announce publicly (Mark 1:45; 5:20; 7:36; Luke 8:39).

(II) Especially to preach, publish, or announce religious truth, the gospel with its attendant privileges and obligations, the gospel dispensation.

Spiros Zodhiates, The Complete Word Study Dictionary: New Testament (Chattanooga, TN: AMG Publishers, 2000).

저자는 현대 교회의 문제점으로, 설교를 설득혹은 나눔정도로 이해하려 한다고 지적합니다. 역시 부분에 있어서 동의합니다. 저는 부분은 결국 설교자가 가장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선포를 하기 위해서는, 설교자 자신이 먼저 말씀에 대한 엄청난 확신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정작 이러한 확신을 자기 자신 안에서부터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충분하고 넘치는 말씀에 대한 묵상과 이해와 스스로에 대한 적용이 필요합니다. 본문의 주해로부터 시작되어서 결과물로 나온 설교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이건 양보 없다라는 그런 확신까지 가야 합니다. 그런데 부분이 결국 부족하기 때문에, 설교가 확신에 선포로 설교로 나오기 어려운 것입니다.

물론 저는 설교에 설득이라는 과정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비록 형상이 죄로 인해서 망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죄인은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고 자신의 삶의 방향을 정할 있는 일반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저는 설교 중에 설득의 과정도 분명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에 이해되지 않으면 전혀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어떤 부분에서는 복음을 설명하고 충분히 그들의 일반적인 이성을 향하여 설득하는 과정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설득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설교자의 태도입니다. 저는, 설교자가 청중을 설득하는 것을 설교의 최종적인 목표로 삼고 자신도 모르게 비굴해지는 것을 너무나 슬프게 바라봅니다. 설득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나, 설득 자체는 결코 설교의 최종 목표가 없습니다. 마치 당신이 이것을 이해하거나 용납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복음이 뭔가 부족한 것이다 라는 식의 설교자의 태도는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설교자는 당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신이며, 진리를 가진 자이기 때문입니다. 설교자가 선포하며 동시에 설득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청중이 설득되지 않는다고 해서 낙심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반응하지 않는다고 해도 설교자가 주눅들 필요도 전혀 없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당당하게 선포하고 당당하게 설득하여야 합니다. 진리는 여전히 진리이며, 어리석은 죄인이 진리를 버리고 밟는 일은 교회 역사 가운데 수도 없이 일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Part2 읽으면서, 설교의 중요성에 대해서 다시 한번 절감했습니다. 너무나 어두웠던 중세를 벗어나서, 종교 개혁자들이 자신의 생명을 걸고 다시 회복시킨 설교의 자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는 모든 수고는, 결코 물러설 없는 가장 위대한 것임을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설교야 말로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며, 앞으로 저의 모든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모든 진리가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아름답게 선포 되기를 원합니다.

* "책 어디까지 읽어봤니?" 전체 글 모음
/ 당신을 변화시키기 위한 "가장 아름다운 길"
https://jungjinbu.blogspot.com/2023/03/blog-post_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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