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 목사가 되기 전에 알아야 하는 Part1은, 교회가 쇠락해져가는 시대에 희망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현실을 충분히 감안하면서 작은 교회로서 살아남기 위한 여러가지 조언들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Part1을 통해서 저는 예배와 소그룹에 대해서 더 고민하게 되었고 그리고 더욱 적극적인 성도들과의 만남의 중요성을 생각하면서 미래를 좀 더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Part2는 설교에 대한 내용입니다. 무려 일곱 개의 짧은 글들이 있었지만, 저에게는 임경근 목사님이 쓰신 “설교, 말씀의 봉사!”라는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먼저 가장 좋았던 부분을 인용하고 싶습니다.
설교는 언제나 교회 예배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1517년 마틴 루터에 의해 시작된 종교개혁 전에는 설교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초대교회 시대에는 말씀이 중요했지만, 4세기가 지나면서 서서히 예배에 변화가 찾아왔다. 예배는 점차 형식적인 성례(주의: sacramentalism)로 전락했다. 예배는 말씀의 비중이 약화되고 눈에 보이고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형식으로 바뀌어 갔다.
평신도는 예배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말씀이 사라지자, 눈에 보이는 예배당 건물과 그림과 장식에 의존해야 했다. 웅장한 건물은 하늘의 영광이 땅에 내려온 듯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비치는 빛의 아름다움은 마치 천국에 온 듯한 착각을 주었다. 이 예배당 안에서는 하나님이 계실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압도할 만큼 높은 천장은 인간을 한없이 작게 만들고 겸손하게 했다. 예배당 이곳저곳에 수많은 성상이나 성화가 걸려 있기에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경건해지고 인격이 거룩해지는 것 같았다…
16세기 종교 개혁가들은 예배에서 설교의 의미를 중심에 놓고 중요하게 여겼다. ‘느끼는 예배’에서 ‘말하는 예배’로 개혁했다. ‘보는 예배’에서 ‘듣는 예배’로 개혁했다. 종교 개혁 교회는 성찬이 이루어지는 성찬대보다도 설교단을 더 높게 놓았다. 예배의 중심이 말씀이어야 한다는 것을 건물에 표현한 것이다. 교회 건물에서 성상과 성화를 가능한 없앴다. 건물은 아주 단순하게 설교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지었다. 종교 개혁 교회는 설교단이 제일 높은 곳에 있다.
임경근, “설교, 말씀의 봉사!,” in 담임목사가 되기 전에 알아야 할 7가지, 초판. (서울시 마포구 양화로 78, 502호:
세움북스, 2016), 66.
제가 이 부분을 인용한 것은, “설교의 변화에 대한 역사적인 인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초대 교회 시절에 그렇게 중요하게 여겼던 말씀이, 중세 시대로 넘어오면서 점점 형식적인 성례로 바뀌었다고 지적합니다.
말씀의 비중은 점점 줄어들고 눈에 보이는 어떤 종교적인 화려함이 말씀을 대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성도들을 무지하게 만들고, 결국 그들이 교회의 잘못된 가르침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종교 개혁가들이 설교를 예배의 중심에 다시 가져다 놓은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런데 제가 우려하는 것은, 요즘 시대의 사람들이 생각할 때에 설교라는 것 자체가 매우 고리타분하고 재미 없는 것이라 여기면서 그것의 비중을 줄여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듣는 것 자체를 터부시하며, 마치 교회의 개혁이라는 것이 예배 중에 설교를 최대한 줄이면서 동시에 뭔가 간증이나 소그룹 모임으로 대체하려고 하는 것이 바른 방향인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혹은 예배의 개혁이, 찬양을 늘리고 설교를 줄이는 것이라고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도들이 설교에 대하여 마음에 어려움을 가지는 것을 이해합니다. 성도들은 설교를 통해서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보다는, 목회자의 주관 혹은 경험이 가득 들어간 어떤 것으로 너무 많이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읽고서도, 본문의 이야기는 하지 않고 다른 이야기로 그 시간을 가득 채운다면, 제가 예배의 자리에 성도로서 앉아 있게 된다고 해도 굉장히 마음이 힘들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설교를 줄이거나 없애는 것이 초대 교회로 돌아가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만약 현시대의 설교가 가장 큰 교회적인 문제가 된다면, 오히려 제대로 설교할 수 있는 목회자를 키워야 하고 또한 좋은 설교가 무엇인가에 대한 교회적인 공감대를 더 만들어내는 것이 진정한 해결의 방향입니다. 그토록 어두운 중세 시대를 지나서 종교 개혁 시대에 다시 복귀 시켜 놓은 말씀의 권위는, 이 시대에도 지역 교회 목회자들의 뼈를 깎는 수고를 통하여 유지되며 더 강화되어야 합니다.
또 하나 이 글에서 좋았던 부분은, 설교는 “선포하는 것”이라는 정의입니다. 저자는 누가복음 24장 46-48절,
사도행전 2장 38절, 그리고 로마서 10장 14-15절의 주해를 통해서, 설교는 선포하는 것임을 설득적으로 논증합니다. 그리고 한글 성경은 선포가 전파로 많이 번역되어서 아쉽다고
말합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성경의 설교는 설득이라기
보다는 선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사전적인 의미 역시,
선포의 의미를 드러냅니다.
누가복음 24: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개역개정) 47 and
repentance for the forgiveness of sins would be
proclaimed in his name to all nations,
beginning from Jerusalem. (NET)
33.256 κηρύσσωc: to
publicly announce religious truths and principles while urging acceptance and
compliance—‘to preach.’ πῶς δὲ ἀκούσωσιν χωρὶς
κηρύσσοντος; ‘how can they hear if there is no one to preach?’ Ro
10:14
Johannes P. Louw and Eugene Albert Nid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Based on Semantic Domains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1996), 416.
2784. κηρύσσω kērússō; fut.
kērúxō. To preach, to herald,
proclaim.
(I)
Generally, to proclaim, announce publicly (Matt. 10:27; Luke 12:3; Acts 10:42;
Rev. 5:2; Sept.: Ex. 32:5; Esth. 6:9, 11; Joel 2:1). In the sense of to publish
abroad, announce publicly (Mark 1:45; 5:20; 7:36; Luke 8:39).
(II)
Especially to preach, publish, or announce religious truth, the gospel with its
attendant privileges and obligations, the gospel dispensation.
Spiros Zodhiates, The Complete Word
Study Dictionary: New Testament (Chattanooga, TN: AMG
Publishers, 2000).
저자는 현대 교회의 문제점으로, 설교를 “설득” 혹은 “나눔” 정도로 이해하려 한다고 지적합니다. 저 역시 이 부분에 있어서 동의합니다. 저는 이 부분은 결국 설교자가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선포를 하기 위해서는, 설교자 자신이 먼저 말씀에 대한 엄청난 확신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정작 이러한 확신을 자기 자신 안에서부터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충분하고 넘치는 말씀에 대한 묵상과 이해와 스스로에 대한 적용이 필요합니다. 본문의 주해로부터 시작되어서 결과물로 나온 그 설교는,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이건 양보 할 수 없다라는 그런 확신까지 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이 결국 부족하기 때문에, 설교가 확신에 찬 선포로 설교로 나오기 어려운 것입니다.
물론 저는 설교에 설득이라는 과정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비록 그 형상이 죄로 인해서 망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죄인은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고 자신의 삶의 방향을 정할 수 있는 일반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저는 설교 중에 설득의 과정도 분명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에 이해되지 않으면 전혀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어떤 부분에서는 복음을 설명하고 충분히 그들의 일반적인 이성을 향하여 설득하는 과정은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설득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설교자의 태도입니다. 저는, 설교자가 청중을 설득하는 것을 설교의 최종적인 목표로 삼고 자신도 모르게 비굴해지는 것을 너무나 슬프게 바라봅니다. 설득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나, 설득 자체는 결코 설교의 최종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마치 당신이 이것을 이해하거나 용납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복음이 뭔가 부족한 것이다 라는 식의 설교자의 태도는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설교자는 당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신이며, 진리를 가진 자이기 때문입니다. 설교자가 선포하며 동시에 설득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청중이 설득되지 않는다고 해서 낙심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반응하지 않는다고 해도 설교자가 주눅들 필요도 전혀 없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당당하게 선포하고 당당하게 설득하여야 합니다. 진리는 여전히 진리이며, 어리석은 죄인이 진리를 버리고 짓 밟는 일은 교회 역사 가운데 수도 없이 일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Part2를 읽으면서, 설교의 중요성에 대해서 다시 한번 절감했습니다. 너무나 어두웠던 중세를 벗어나서, 종교 개혁자들이 자신의 생명을 걸고 다시 회복시킨 그 설교의 자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는 모든 수고는, 결코 물러설 수 없는 가장 위대한 것임을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설교야 말로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며, 앞으로 저의 모든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모든 진리가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아름답게 선포 되기를 원합니다.
* "책 어디까지 읽어봤니?" 전체 글 모음 / 당신을 변화시키기 위한 "가장 아름다운 길"
https://jungjinbu.blogspot.com/2023/03/blog-post_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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