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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7일 토요일

삶으로 드리는 찬양 (152) - 하나님의 열심


1. 가사 살펴보기

사랑하는 내 딸아 너의 작음도 내겐 귀하다
너와 함께 걸어가는 모든 시간이 내겐 힘이라
사랑하는 아들아 네 연약함도 내겐 큼이라
너로 인해 잃어버린 나의 양들이 돌아오리라 

조금 느린듯해도 기다려주겠니
조금 더딘듯해도 믿어줄 수 있니
네가 가는 그 길 절대 헛되지 않으니
나와 함께 가자 

앞이 보이지 않아도 나아가주겠니
이해되지 않아도 살아내주겠니
너의 눈물의 기도 잊지 않고 있으니
나의 열심으로 이루리라 

하나뿐인 사랑아 네게 부탁이 있다
길 잃어 지친 영혼 돌아보라
나의 품으로 안기어라 

조금 느린듯해도 기다려주겠니
조금 더딘듯해도 믿어줄 수 있니
네가 가는 그 길 절대 헛되지 않으니
나와 함께 가자 

앞이 보이지 않아도 나아가주겠니
이해되지 않아도 살아내주겠니
너의 눈물의 기도 잊지 않고 있으니
나의 열심으로 이루리라
네게 그 땅을 부탁한다

 

2. 곡 소개

곡은, 여성 CCM 듀오 러빔의 “Zeal of God” 싱글 앨범에 수록된 곡이다. 이 곡은 기도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은 어려운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이미 기도를 들으셨고 여전히 그분의 탁월한 계획 가운데 일하고 계심을 고백하는 아름다운 찬양이다. 특별히 신학적으로 깊고 견고한 가사와 섬세하고 감성적인 멜로디를 함께 갖춘 탁월한 곡이다.

* 하나님의 열심 곡 소개
https://music.bugs.co.kr/track/32197182?wl_ref=list_tr_08_chart

 

책 안에 한 마디

아무도 위인으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모두가 다 하나님께서 열심히 열심히 만들어내신 작품이었습니다그래서 저도 드디어 감격과 항복을 외쳤습니다저 같은 것도 하나님의 열심이 이 위대한 반열에 서게 하실 것이라고” – 박영선 하나님의 열심


3. 말씀으로 바라보기

이사야 9: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9:7 Of the increase of his government and peace there will be no end. He will reign on David's throne and over his kingdom, establishing and upholding it with justice and righteousness from that time on and forever. The zeal of the LORD Almighty will accomplish this.

9:7 This messianic heir of David will extend his rule to include all Gentiles, thus bringing to them the blessing of knowing the true God (Gen. 49:10; 2 Sam. 7:8–16). 다윗의 메시아 후계자는 그의 통치를 모든 이방인까지 포함하도록 확장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참 하나님을 아는 축복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J. I. Packer, Wayne Grudem, and Ajith Fernando, eds., ESV Global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2012), 925.

9:7 judgment … justice. Justice and righteousness, key qualities of the reign of the Son of David (2 Sam. 8:15; 1 Kings 10:9; Jer. 23:5; see note at Isa. 1:16–17). no end. In contrast to the quickly passing reigns of earthly kings (1:1; 6:1), this King will reign forever (Luke 1:32–33). zeal of the Lord. God’s burning love for His own glory (42:8; 48:11). 정의와 공의는 다윗 후손의 통치의 핵심 특성입니다. 영원히 : 세상의 왕들의 통치가 빠르게 지나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왕은 영원히 통치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 : 이것은 자신의 영광을 향한 하나님의 불타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Joel R. Beeke, Michael P. V. Barrett, and Gerald M. Bilkes, eds., The Reformation Heritage KJV Study Bible (Grand Rapids, MI: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14), 968.

예레미야 29: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29:11 For I know the plans I have for you," declares the LORD, "plans to prosper you and not to harm you, plans to give you hope and a future.

29:11 I know the thoughts that I think: The Lord here places considerable emphasis on His unchangeable plan to bring peace and not evil. a future . . . a hope: God had not terminated His relationship with Judah; He remembered His covenant promises of restoration (see Deut. 30:1–10).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 주님께서는 여기에서 재앙이 아니라 평안을 가져오실 그분의 변치 않는 계획을 크게 강조하십니다. 미래와 희망 : 하나님께서는 유다와의 관계를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회복에 대한 그분의 언약의 약속을 기억하셨습니다. 

Earl D. Radmacher, Ronald Barclay Allen, and H. Wayne House, The Nelson Study Bible: New King James Version (Nashville: T. Nelson Publishers, 1997), Je 29:11.

예레미야 3:22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 하시니라 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사오니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이심이니이다 3:22 "Return, faithless people; I will cure you of backsliding." "Yes, we will come to you, for you are the LORD our God. 3:23 작은 산들과 큰 산 위에서 떠드는 것은 참으로 헛된 일이라 이스라엘의 구원은 진실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있나이다 3:23 Surely the idolatrous commotion on the hills and mountains is a deception; surely in the LORD our God is the salvation of Israel.

3:22 The Lord did not forget his children. Out of the depths of his being, he called them to come back so that he could heal them. He desired to set aside his anger and pour forth his love (30:17; 33:6; Hos 6:1; 14:4). 주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을 치유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존재 깊은 곳에서부터 그들을 다시 오라고 부르십니다. 

New Living Translation Study Bible (Carol Stream, IL: Tyndale House Publishers, Inc., 2008), Je 3:22.

마태복음 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7:11 If you, then, though you are evil, know how to give good gifts to your children, how much more will your Father in heaven give good gifts to those who ask him!

7:9–11 what man. Comparatively speaking, an earthly father’s love for his children is far less than the love that God has for His children, for the best of fathers is corrupted by sin (evil), but God is perfect. your Father … give good things. God is generous to His children. This, too, underscores the Father’s ability to provide for His people and their freedom from the need to worry (6:25–34). 너희가 : 비교해본다면, 지상에 있는 아버지의 자녀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께서 자녀에 대해 갖고 계신 사랑보다 훨씬 적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장 좋은 아버지조차 죄악으로 부패했지만 하나님은 완전하시기 때문입니다.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이것 역시 자신의 백성을 돌보심으로 그들이 걱정할 필요가 없는 자유를 주시는 아버지의 능력을 강조합니다. 

Joel R. Beeke, Michael P. V. Barrett, and Gerald M. Bilkes, eds., The Reformation Heritage KJV Study Bible (Grand Rapids, MI: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14), 1367.

 

4. 찬양에 대한 묵상

이 찬양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하심에 대하여 탁월하게 그려낸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그분의 자녀 삼으셨고 자녀된 우리를 지금 이 순간에도 기꺼이 인도하고 계신다.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며, 미래의 희망을 부어 주시는 것이다. 비록 우리는 연약하고 넘어지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과 명예를 걸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공급하시며, 그분의 탁월한 계획 가운데 우리를 이끌어 가시고 종국에는 그분의 성숙한 자녀로 만들어 내시고야 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야 말로 인간 아버지를 뛰어 넘는 하늘 아버지의 마음이며 능력인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여호와의 열심이라고 부른다.

이 찬양은, 성도 자신을 위로하는 찬양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아직 아버지께 돌아오지 않은 이들을 염두에 둔 찬양이기도 하다. 그리스도 안에서 품으시는 아버지의 사랑의 계획은 지금의 성도에게만 그치는 것이 아니며, 여전히 주님을 대적하며 멀리 있는 자들에게까지 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자녀들을 통해 그분의 마음이 전달되기를 간절히 원하시고 계신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 우리를 기다리시고 인내하시는 것처럼, 우리 역시 그들을 품고 기다리며 그들을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이 찬양을 부를 때 마다, 우리를 뜨겁게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더 깊이 알아가고 그것을 통하여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발견하며, 더 나아가 다른 이들을 향하여 기꺼이 손을 내미는 우리가 되기를 기대한다.


* 삶으로 드리는 찬양 전체 묵상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06/1_30.html

2023년 8월 7일 월요일

제자 훈련, 기독교의 생존 방식 3장, 느낀 점

 

* 느낀 점

김형국 목사님의 학문적인 수준은 이미 세계적인 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3장에서 구약의 처음부터 신약까지 연결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개념은, 매우 섬세하면서도 탁월하다. 

그분의 설명처럼 "천국"이라는 번역은 매우 아쉬운 부분이며 나 역시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한다. 사실상 예수님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나라"에 다 들어 있다. 나라라는 개념 자체가 다스림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라는 단어만 집중해도 사실상 기독교의 중요한 진리를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천국"이라는 표현은 너무나 많은 것을 상실하게 만든다. 막연한 혹은 멀리 떨어져 있는, 나와 상관이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상관이 없는 그런 희미하고 추상적인 것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변질시켰다. 

김형국 목사님의 글을 처음 접할 때에는, 마치 하나님 나라 복음과 십자가 복음을 대립적으로 설명하는 것처럼 이해하였다. 그러나 이번 3장에서 가장 좋았던 점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나라 라는 주제 "위에" 십자가의 복음이 있다 라는 설명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목적이고, 그것을 이루시고자 하는 가장 결정적인 방법이 십자가이다. 이 두가지 중 어떤 것도 희생하지 않고 녹여낸 탁월한 설명이다. 

신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설명도 좋았지만, 사실 창세기로 부터 등장하는 왕이신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더 좋았다. 나 역시 설교 가운데 창세기를 자주 인용한다. 보통의 접근처럼 아무런 배경 설명도 없이 막연하게 예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라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오직 왕이신 하나님의 창조와 그것과 선명하게 대조되는 인간의 패역과 반역을 설명하는 것을 통해서, 결국 예수님께서 회복시키시는 분명한 목적,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그분의 나라가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어떤 대가라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설명이 좋았다. 그리고 이것은 상식이며 헌신이 아니라는 표현이 좋았다. 혹시라도 가능하다면, "이것이야 말로 가장 탁월한 지혜"라고 덧붙이고 싶다. 하나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는 것, 그분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야 말로 가장 지혜로운 선택이다. 요즘의 표현으로 치면 "가치 투자"이다. 

사실 기독교 세계관이 추구하는 목표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추구하는 목표는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것이며,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 세계관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나에게 하나님의 나라 복음은 전혀 낯설지 않다.

결국 김형국 목사님이 추구하는 것은, "성경적인 복음" 이다. 본인의 설명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잃어버리면 그저 개인주의 영성에 치우칠 뿐이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없는 사회 참여만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번 3장에서는, 성경이 진정으로 강조하는 핵심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그리고 복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풍성한 것이며 우리의 삶 전체를 아우르는 것임을 생각하였다. 목회적으로는 모든 설교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분에 대한 사랑의 강조", 또한 "그것과 더불어 그분의 다스림을 받는" 이 두가지가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다. 

예를 들어서 박영선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보면,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책임이 아주 공교하게 엮어들어가 있는 것을 발견한다. 어쩌면 마치 모순되어 보이는 두가지가 함께 있는 것처럼 보여서 한동안 곤란하게 느껴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그리스도의 한 없는 은혜와 그 은혜 가운데 그분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야 하는 그 책임은 반드시 동시에 존재해야 하며, 평생의 우리의 삶의 목표로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을 이번 챕터를 통해서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 "내가 생각하는 하나복", 그리고 미래 목회 - 하나복 관련 글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3/08/blog-post.html

2021년 9월 27일 월요일

책 어디까지 읽어봤니? (09) - 인생 (박영선) /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는 성도의 행복과 목적

 

석사 과정 중에, 아내가 출산을 하였습니다. 사랑스러운 첫째가 태어났다는 기쁨도 잠시, 육아의 엄청난 짐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때 당시의 저의 상황을 돌이켜보면, 정말 정신이 다 나갈 만큼 힘들었습니다. 부족한 수면, 감당해야 하는 학업, 요동치는 감정들과 미래에 대한 불안, 모든 것이 혼돈 그 자체였습니다. 

삶이 평온할 때에는, 신앙에 대해서 별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보통의 사람의 모습인 듯 합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적당한 여가도 즐길 수 있으며, 주변에 이야기를 나눌 친구들도 있고, 건강한 상황에서는 신앙이 별로 크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고난이 찾아올 때에, 내 속에서 터져나오는 분노와 억울함에 잠을 못 이룰 때에, 앞날에 대한 걱정으로 삶이 막막할 때에, 그럴 때에 신앙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과, 그 본질에 대해서 새롭게 깨닫게 됩니다.

펜데믹이 찾아오면서 모든 것이 어려워졌습니다. 물론 어떤 부유한 분들은 기회를 더 잘 타서 더 부유하게 되었다고 소식을 접하지만, 보통의 소시민들은 종잡을 수 없는 미래에 부딪혀 버렸습니다. 그나마 누리던 최소한의 여유와 건강을 잃어버린 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의 인생 전체가 불확실성 속에 던져졌습니다.

목회는 어떤가요? 예배에 오고 싶어도 오시지 못하는 분들이 태반입니다. 예배에 오고 싶지 않아서 오시지 않는 분들도 태반입니다. 온라인이라는 도구로 은혜를 누리는 분들도 많지만, 온라인을 시도조차 해보지 않은 분들이 더 많습니다. 줌이라는 낯선 도구를 붙들고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지만, 화면을 꺼 버리는 분들 앞에서는 속수무책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그 어떤 단체보다 관계성이 중요한 단체입니다. 성도 간의 인격적인 관계는 우리의 신앙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누리던 것들을 너무 많이 상실한 지금, 첫째가 태어난 그 시간 이상으로 현재의 상황이 쉽지 않게 느껴집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박영선 목사님의 책을 읽었습니다. 본격적으로 목사님의 책을 정독한 것이 정말 오랜만입니다. 제목부터 울컥합니다. "인생"이라, 과연 "인생"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쓸 수 있는 저자가 몇분이나 될까요? 너무 큰 주제이고 너무 버거운 주제입니다. 하지만 박목사님이라면 이정도 제목을 사용해도 괜찮은 분입니다.


박영선 목사님은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시고자 하는 자를 반드시 구원하신다는 전제를 확고히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마음에 큰 위로가 됩니다. 지금 시대는, 당신이 열심히 살아서 하나님을 만족시킨다면, 그때에 하나님이 복을 베풀어줄지도 모르겠다라는 자기 개발식 복음이 유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이야기하기는 하는데, 도대체 예수님이 성도의 삶과 영원한 운명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이, 그저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서 죽어주신 분 정도로만 이해하는 단편적인 내용들만 이야기하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박영선 목사님을 좋아합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것을 가감없이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택한 자를 구원하십니다. 택한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길자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죄인을 자녀로 만드시는 그 과정과 목표는, 단순히 그 사람을 통해서 많은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그분의 목적으로 삼으시고, 그분의 사랑에 응답하는 존재로 만들어가시는 것이 목표임을 박목사님은 분명히 말합니다. 

저는 이런 박목사님의 꾸준함이 너무 놀랍고 존경스럽습니다. 세월이 흘러 내용은 더 깊고 풍성해졌지만 한결 같이 하나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분의 성경에 대한 이해와 성도의 삶에 대한 설명은 초지일관 하나님의 주권 중심입니다. 그분 안에, 하나님이 구원하시고자 하는 자를 붙들어가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가시는 것에 대한 확신이 충만합니다.


이러한 확고한 하나님의 주권을 바탕으로 하여 박영선 목사님이 짚어내는 인생의 핵심은 "고난은 하나님이 주신 각자의 컨텍스트이다" 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삶의 어떤 상황들을 허락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각 사람에게 맞도록 설계된 것입니다. 

문제는 이 상황이 애시당초 우리가 기대하는 아름다운 상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반대하고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 사이에 우리를 집어 넣으십니다. 그리고 성화는, 그 안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당당하게 살아나가는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바로 그 긴 시간을 통해, 성도는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라는 것이 하나님이 맡기신 삶이기 때문에,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감이 생깁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당신이 열심히 살아서 하나님의 마음을 한번 감동시켜 보라라는 것은 쉬운 말인 듯 합니다. 그건 그냥 열심히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아무 생각 안해도 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결과물만 만들어내면 됩니다. 물론 우리의 영혼에 참된 만족은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기준에 만족하면 교만으로, 그리고 실패하면 비참한 절망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하지만 박영선 목사님은 전혀 다른 방향에서 인생을 설명합니다. 복음 안에서,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우리 자신을 보도록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손 안에서 우리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구원을 운명으로 확보했습니다. 아, 이런 표현을 얼마만에 들어보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에 전율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하심은 한번의 전율로 쉽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신앙의 고된 여정을 걸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구원을 이루어가시며 그분이 나를 자녀 삼으시고 삶을 맡기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예에 걸맞게 살아가라 라고 말한다면, 이건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돌이킬 수 없는 구원을 운명으로 확보하게 된 사람"은 자꾸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혹시 내가 화 한번 잘못 냈다가 하나님의 명예에 먹칠이라도 하면 너무 큰일이 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방법이 정직해야 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만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 안에 이루신 이 일은 정말 놀라운 일이며, 어떤 의미에서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박영선 목사님은 이 어려운 삶을 살아가야하는 성도들을 반복해서 격려합니다. 심지어 삶은 잘잘못으로 평가될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명예롭게 위대하게 살도록 권면합니다. 

가장 어려운 부분입니다. 박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도 종종 느끼는 부분입니다. 갑자기 논리의 도약이 일어납니다. 어쩌면 완전히 모순되는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연결해서 붙여놓았습니다. 삶을 잘못 살게 될 때가 너무 많은데, 어떻게 명예롭고 위대한 것을 꿈꿀 수 있을까요? 하지만 이것보다 더 신앙을 잘 표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성도는 어떤 실패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승리가 우리의 선택보다 더 크기 때문에 우리는 위대한 삶을 꿈꿀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온통 줄을 쳤습니다. 하지만 아직 저의 실력은 너무나 미천하여, 책을 읽고 감동하는 수준 그리고 어설프게 반박하는 수준에 머무를 뿐입니다. 저는 박목사님을 너무 좋아하지만, 그러나 여전히 제 마음에는 본능적인 반항의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확고히 믿지만, 제 삶과 마음 속에 깊이 들어오기 까지는 여전히 시간이 필요해 보입니다. 

아내는 저만큼 박목사님을 좋아합니다. 아내가 이 책을 추천했습니다. 함께 책을 읽었기 때문에, 저는 오히려 아내를 향해 반박을 많이 했습니다. 박목사님께 대들수가 없으니, 애꿎은 아내에게 연신 반박 질문을 합니다. 

"여보, 이건 너무 모순적인 이야기인거 아닌가? 박목사님처럼 치열하게 살지 않으면 이런 책 쓸 수도 없었을텐데 하나님이 다 하실꺼니까 버티고 살아가라 라고만 말하다면, 너무 안일하고 수동적인 삶을 옹호하는 이야기하는것 아닌가?" 

"여보, 그럼 신앙이 약해진 성도를 그냥 내버려두면서, 하나님이 다 책임지실꺼니까 좌충우돌 많이 해보라고 그러면서 실력이 쌓이는 거고 삶이 다 그런거라고 이야기해주는게 좋은 목회자인가? 정신 차리라고 호통을 쳐야만 하는거 아닌가?"

아주 오래 전 기억입니다. 이제 노회에 갓 들어간 목사로 한 노회에서 참여했습니다. 점심 시간이 한참 넘어서서 배가 고픈데 회의가 끝날 줄을 모릅니다. 박목사님이 손을 번쩍 드시더니 웃으면서 크게 말씀하십니다. "밥먹고 합시다!" 그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역시 큰 어르신은 정말 다르시구나!" 모든 상황 속에서 여유를 잃지 않으시고 웃음으로 후배들을 격려하시는 모습이 그렇게 크게 보였습니다.

저의 목회의 남은 시간들은, 이 책의 내용을 제 삶에서 풀어낼 과정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목회적인 상황들은 앞으로는 더 어렵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저를 바로 그 상황 속에 넣으시고, 그 안에서 버티며 명예롭게 성도로서 행동하라고 격려하십니다. 

이 책을 읽고 정말 위로를 많이 받았습니다. 상황은 변한 것이 없지만, 성도로서 목회자로서 제 자신에 대해서 저의 삶의 컨텍스트 안에서 아주 조금 여유가 생겼습니다. 조금 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명예를 걸고 살아가는 것에 조금 더 마음으로 수긍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대단한 열매를 만들어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현재의 삶 속에서 명예롭게 살아가기를 요구하십니다. 제가 성도로서 수 많은 좌절 속에서도 명예롭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그리고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저를 포기하지 않고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저의 "인생"입니다.

* "책 어디까지 읽어봤니?" 전체 글 모음 / 당신을 변화시키기 위한 "가장 아름다운 길"
https://jungjinbu.blogspot.com/2023/03/blog-post_6.html

2021년 9월 13일 월요일

이제 신학교로 들어가는 당신에게 / 블로그 글 500을 기념하며

 

블로그 글을 쓴지가 꽤 되었습니다. 대략 10년 정도 된 듯 합니다. 글을 쓰려고 하니 글이 500개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페이스북에 짧은 글을 쓰다가, 글이 사라지는 곳이 아닌 존재할 수 있는 곳에 삶의 기록을 남기고 싶은 마음에 시작한 구글 블로그가 벌써 500개의 글을 쓰게 되었다는 것이 기쁘기도 하고 또 부끄럽기도 합니다. 

한분의 성도님이, 제 글 중에 하나를 출력해서 여러번 읽었다는 말씀을 우연히 들었습니다. 순간적으로 든 생각은 너무 부끄럽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얼굴이 빨개 졌습니다. 제가 쓴 글이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고, 그것이 생각보다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은 사실 기쁨보다는 두려움을 주는 듯 합니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는 시대이기 때문에, 무엇인가 쓴다는 것은 굉장히 조심스럽습니다.

그럼에도 글을 쓰는 것은, 나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삶의 방향을 잡아가는데 있어서 글을 쓰는 것 보다 더 좋은 방법은 아직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탁월하게 자신의 삶을 살았던 분들의 공통점은 끊임없이 글을 썼다는 것입니다.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은, 글을 쓰는 존재입니다. 

네이버의 로고스 까페에서 한 분의 질문을 보았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가서 무엇을 해야하는가?"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늦게 신학을 시작하시고 고민하시는 부분이 참 마음에 와 닿아서 짧게 댓글을 달았습니다. 생각해보니, 어떤 의미에서 그것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없겠다 싶어서 블로그 500개의 글을 기념하며 저의 블로그에 좀 더 자세하게 정리해야겠다 싶었습니다. 

어떤 분야에 논문을 쓰게 되면, 자신이 세상의 모든 분야를 다룰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떤 글이든지 결국 한정된 주제를 한정된 영역 안에서 다루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이 글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보편성을 가지기를 바라고 적어 봅니다. 

처음에 합신을 들어갔을 때가 기억납니다. 벌써 15년도 더 된 일입니다. 참 좋았던 것은, 좋은 학교에 좋은 동기들과 교수님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진실한 사람들이 모여있었고, 그 안에서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신대원 때에 공부를 썩 잘하지 못했습니다. 이미 성경에 대한 기본지식과 개요 정도는 가지고 있었고, 나름 다양한 신학 책을 읽은 상태였지만, 실제로 신학교에 들어가서 수업 시간에 따라가기가 쉽지가 않았습니다. 히브리어 헬라어는 심화 과정까지 해야 졸업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말 그대로 눈물을 흘리며 그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신대원 시절 참 어려웠던 것은, 모든 교수님들이 훌륭한 분들이셨지만, 각자 본인의 관점 혹은 전공에서 모든 것들을 강조하셨기 때문이었다고 조심스럽게 돌이켜봅니다. 예를 들어서 조직 신학 교수님은 조직신학기 없으면 절대로 제대로 된 신학을 이룰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성경 신학 교수님도, 실천신학 교수님도 모두 동일하게 자신의 관점에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목회를 하기 위해 신학을 공부하는 관점에서, 단순히 어떤 한가지 영역만을 가지고 그 분야만을 붙들고서 목회할 수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목회는 종합 예술입니다. 설교, 상담, 심방, 행정, 인간 관계, 사회성 혹은 눈치 등등이 종합된 것입니다. 단순히 한가지 영역에 올인해서만 목회를 잘 할 수는 없는 듯 합니다. 

목회를 꾸준히 한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분야에 몸을 담고 포기하지 않고 계속 정진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지속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자신의 노력만 가지고도 안됩니다. 저는 한 사람이 이루었다는 성공 신화는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삶의 컨텍스트가 모두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평범하지만 신앙이 좋은 가정에서 자란 저는, 부모님의 많은 지원 속에서 유학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제가 사역을 통해 스스로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지만 초반의 유학 기간은 부모님이 도와주셨습니다. 과연 이렇게 환경이 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저는 그래서 제가 공부를 마친 것을 제 자신의 노력도 중요했지만, 사실상 거의 대부분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목사 안수를 받고 10년 정도 되었습니다. 곰곰히 돌이켜보니 제가 지금까지 목회를 하면서 버틸 수 있었던 것을, 신대원의 기간을 "신학의 방향을 잡아가는 기간"으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방향이라는 것은 어떤 관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성경과 신학 그리고 삶을 바라보는 관점을 만들어가는 시간이 저에게 신대원의 기간이었습니다.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읽었지만, 가장 좋아하는 두분이 박영선 목사님과 마이클 호튼입니다. 물론 저는 이 두분이 저의 완벽한 롤 모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박영선 목사님처럼 탁월하게 설교를 하지 못할 뿐더러, 그분의 설교 스타일이 제가 섬기는 현재의 컨텍스트와도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호튼을 굉장히 좋아하지만, 호튼의 모든 논리를 한국 교회에 적용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분이 참 좋았고 지금도 좋아하는 것은, 그분들의 신학과 성경, 그리고 삶을 읽어내는 그 방향성을 좋아하고 또 그것이 성경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 이며, "하나님의 인내"입니다. 

결국 성경과 신학을 공부하다보면, 하나님의 주권에 더 강조를 둘 것이나 혹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더 강점을 둘 것인가의 근본적인 질문에 다다른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한 없이 자유롭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자유를 사용하셔서 그분의 뜻을 반드시 이뤄내십니다. 심지어 인간의 구원과 자녀됨은 이미 창세전에 이루어졌다고 성경은 선포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은, 내가 읽는 성경, 모든 신학책, 그리고 모든 상황 속에 개입을 하게 됩니다. 내가 어떤 글의 의미 혹은 삶의 컨텍스트에 노출되는 그 순간 이 모든 관점은 발동되게 됩니다. 그 순간마다 우리는 어디에 더 강조점을 둘 것인가를 선택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인가? 아니면 인간의 의지인가? 그리고 저는 오랫동안 씨름한 끝에,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더 강조점을 두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성경적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물론 이러한 저의 결론은, 절대로 인간의 열심을 무시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자 하고, 또한 누구보다 성도의 성화에 긍정적입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할 수 있고 또 도전해야 합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삶에서 주도성과 능동성을 잃어버린 것은, 교회의 큰 아픔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확신,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인간을 인내하며 기다리는 그것이 저를 지금까지 버티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모든 부분에 적용됩니다. 제가 말씀을 묵상할 때에, 누군가를 만나서 상담을 할 때에, 교회 안에서 행정을 할 때에, 모든 영역에 이러한 큰 기초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저는 신학교에 들어가는 것은, 너무나 큰 책임을 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영혼의 무게를 젤 수 있는 저울이 없기 때문에 목회자의 역할은 너무나 버겁습니다. 그래서 목회자에게는 일관성이 중요합니다. 신학과 성경과 삶에 대한 일관성입니다. 주권적인 하나님을 신뢰하며 인간에 대하여, 나 자신과 성도에 대하여 포기하지 않는 것 그 일관성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정말 오랜 시간 호수를 걸었습니다. 한 손에는 늘 박영선 목사님 그리고 호튼의 책이 있었습니다. 걸으면서 생각하고, 읽으면서 묵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붙들고 씨름하면서 신대원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 시간들은, 교수님들께 배우고 숙제를 하던 시간을 뛰어넘어, 저라는 목회자를 만들어내는 가장 중요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CFNI에서 Worship and Technical Arts 를 공부할 때에도 학장이었던 조나단은 늘 하나님 중심적인 관점으로 워십을 인도하였습니다. 교육학 Th.M.과 D.Min.을 할 떄에도 제 마음 속에 늘 있던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그분의 포기하지 않는 일하심 그리고 죄인에 대한 그분의 열심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제가 어떤 학위 과정에 들어가서 만들어졌다라기 보다는, 이미 신대원 시절에 흔들릴 수 없이 만들어진 신학적인 방향이며 관점이었습니다. 

신학교를 들어가면 공부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아카데믹한 책들이 쏟아지고, 그 안에서 씨름하며 암기하며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벅찬 일입니다. 힘들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졸업하고 목회로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공부는 끝이 아닙니다. 

좋은 설교를 위해서 끊임없이 연구하고 공부를 해야 합니다. 신학교 때에 충분히 소화하지 못했던 책들을 다시 읽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저도 종종 조직신학 책을 다시 꺼내들고 읽어보곤 합니다. 사실 신학교 다닐 때 보다 학교를 모두 졸업한 지금이 더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면에서 저 역시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로고스 프로그램은 효율적으로 다양한 책들을 보고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최고의 도구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신학적인 방향 혹은 관점" 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흔들릴 수 없는 어떤 것이 되어야 합니다. 흔들릴 수 없을만큼 견고하게 만들어져야 합니다.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본인이 그것을 붙들고 씨름해야 합니다. 영혼에 새겨질 만큼 그 관점이 성경적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정말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박영선 목사님도 호튼도 젊은 시절의 그 방향 혹은 관점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박영선 목사님의 젊은 시절의 강의를 들어보면, 목소리가 지금보다 훨씬 힘이 있다는 것이 차이일 뿐, 그 내용적으로는 거의 비슷합니다. 오히려 지금은 더 완숙하게 본인의 신학을 표현하십니다. 

호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호튼의 젊은 시절의 책부터 읽은 저의 입장에서, 요즘에 Core Christianity에서 설명하는 그의 신학과 관점은, 젊은 시절 그 표현과 그 방향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더 따뜻해지고 더 여유가 있어졌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만약 당신이 신학교에 지금 들어갔다면, 당연히 공부를 열심히 할 것을 추천드립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포커스는, "당신의 신학과 성경과 삶에 대한 그 방향과 관점을 만들어가는 시간"으로 사용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신학교의 커리큘럼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무나 중요한 것은, 결국 그 방향과 관점이, 앞으로의 목회의 내용의 사실상의 대부분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교수님이 추천하는 어떤 신학자의 아카데믹한 네임벨류에 압도되지는 말기를 바랍니다. 세상은 넓고, 탁월한 학자는 너무나 많습니다. 내 교단을 뛰어 넘으면 그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납니다. 세상의 모든 학자를 다 공부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학자도 사람입니다. 교수님이 추천하는 어떤 학자 한명이 나의 목회를 책임져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가 설교 때에 어떤 학자를 인용한다고 해서 성도님들이 크게 감동 받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더 딱딱하게 느끼고 더 싫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동안 눈물로 빚어낸 성경과 신학과 삶에 대한 당신의 관점이 설교와 목회 가운데 녹아져 들어갈 때에, 성도들은 당신을 훌륭한 목회자로, 그리고 성도를 이해하는 목회자로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신학은 목회를 위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신학적인 관점과 방향을 만들어가기 위해서, 교단에서 가장 목회를 잘 하시는 혹은 신학적으로 탁월한 분의 책을 붙들고 씨름하시기를 추천드립니다. 그리고 가급적, 너무 아카데믹한 분보다는, 평신도의 삶에 대해서 고민하고 함께 아파하는 분의 책을 읽고 고민하시기를 추천드립니다. 

본인의 목표가 신학교 교수가 되는 것이 목표라면 좀 더 다르겠지만, 적어도 보통의 경우는 보통의 성도님들을 대상으로 목회를 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님들의 고민과 아픔을, 내가 고민한 성경과 신학 그리고 삶의 방향 속에서 녹여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신학 공부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어쩌면 삶의 가장 어려운 시간들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목회자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저는 이원론을 극도로 경계하는 사람입니다. 목회자라는 직업 만큼 성도의 직업 역시 중요합니다. 그러나, 목회자에게만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혹시라도 삶에 실패한다고 넘어진다고, 혹은 목회를 계속 할 수 있겠는가 고민이 드시겠지만 포기하시지 말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누구나 실패하고 넘어집니다. 중요한 것은 다시 일어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도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고민과 눈물 그리고 다시 일어서는 그 시간까지도 주님의 뜻 안에서 아름답게 만들어가시고 당신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처음에 소명을 받고, 신학교에 조심스럽게 발을 들이던 그 시간이 생각이 많이 납니다. 기억력이 안 좋은 저에게 있어서도 신대원 시절은 삶의 황금기였습니다. 다시 돌아가고 싶고, 그만큼 너무 행복했습니다. 당신에게 주어진 신대원이라는 삶의 가장 소중한 바로 그 시기에, 하나님께서 선하게 인도하실 것을 믿고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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