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사 과정 중에, 아내가 출산을 하였습니다. 사랑스러운 첫째가 태어났다는 기쁨도 잠시, 육아의 엄청난 짐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때 당시의 저의 상황을 돌이켜보면, 정말 정신이 다 나갈 만큼 힘들었습니다. 부족한 수면, 감당해야 하는 학업, 요동치는 감정들과 미래에 대한 불안, 모든 것이 혼돈 그 자체였습니다.
삶이 평온할 때에는, 신앙에 대해서 별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보통의 사람의 모습인 듯 합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적당한 여가도 즐길 수 있으며, 주변에 이야기를 나눌 친구들도 있고, 건강한 상황에서는 신앙이 별로 크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고난이 찾아올 때에, 내 속에서 터져나오는 분노와 억울함에 잠을 못 이룰 때에, 앞날에 대한 걱정으로 삶이 막막할 때에, 그럴 때에 신앙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과, 그 본질에 대해서 새롭게 깨닫게 됩니다.
펜데믹이 찾아오면서 모든 것이 어려워졌습니다. 물론 어떤 부유한 분들은 기회를 더 잘 타서 더 부유하게 되었다고 소식을 접하지만, 보통의 소시민들은 종잡을 수 없는 미래에 부딪혀 버렸습니다. 그나마 누리던 최소한의 여유와 건강을 잃어버린 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의 인생 전체가 불확실성 속에 던져졌습니다.
목회는 어떤가요? 예배에 오고 싶어도 오시지 못하는 분들이 태반입니다. 예배에 오고 싶지 않아서 오시지 않는 분들도 태반입니다. 온라인이라는 도구로 은혜를 누리는 분들도 많지만, 온라인을 시도조차 해보지 않은 분들이 더 많습니다. 줌이라는 낯선 도구를 붙들고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지만, 화면을 꺼 버리는 분들 앞에서는 속수무책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그 어떤 단체보다 관계성이 중요한 단체입니다. 성도 간의 인격적인 관계는 우리의 신앙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누리던 것들을 너무 많이 상실한 지금, 첫째가 태어난 그 시간 이상으로 현재의 상황이 쉽지 않게 느껴집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박영선 목사님의 책을 읽었습니다. 본격적으로 목사님의 책을 정독한 것이 정말 오랜만입니다. 제목부터 울컥합니다. "인생"이라, 과연 "인생"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쓸 수 있는 저자가 몇분이나 될까요? 너무 큰 주제이고 너무 버거운 주제입니다. 하지만 박목사님이라면 이정도 제목을 사용해도 괜찮은 분입니다.
박영선 목사님은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시고자 하는 자를 반드시 구원하신다는 전제를 확고히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마음에 큰 위로가 됩니다. 지금 시대는, 당신이 열심히 살아서 하나님을 만족시킨다면, 그때에 하나님이 복을 베풀어줄지도 모르겠다라는 자기 개발식 복음이 유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이야기하기는 하는데, 도대체 예수님이 성도의 삶과 영원한 운명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이, 그저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서 죽어주신 분 정도로만 이해하는 단편적인 내용들만 이야기하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박영선 목사님을 좋아합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것을 가감없이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택한 자를 구원하십니다. 택한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길자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죄인을 자녀로 만드시는 그 과정과 목표는, 단순히 그 사람을 통해서 많은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그분의 목적으로 삼으시고, 그분의 사랑에 응답하는 존재로 만들어가시는 것이 목표임을 박목사님은 분명히 말합니다.
저는 이런 박목사님의 꾸준함이 너무 놀랍고 존경스럽습니다. 세월이 흘러 내용은 더 깊고 풍성해졌지만 한결 같이 하나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분의 성경에 대한 이해와 성도의 삶에 대한 설명은 초지일관 하나님의 주권 중심입니다. 그분 안에, 하나님이 구원하시고자 하는 자를 붙들어가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가시는 것에 대한 확신이 충만합니다.
이러한 확고한 하나님의 주권을 바탕으로 하여 박영선 목사님이 짚어내는 인생의 핵심은 "고난은 하나님이 주신 각자의 컨텍스트이다" 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삶의 어떤 상황들을 허락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각 사람에게 맞도록 설계된 것입니다.
문제는 이 상황이 애시당초 우리가 기대하는 아름다운 상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반대하고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 사이에 우리를 집어 넣으십니다. 그리고 성화는, 그 안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당당하게 살아나가는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바로 그 긴 시간을 통해, 성도는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라는 것이 하나님이 맡기신 삶이기 때문에,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감이 생깁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당신이 열심히 살아서 하나님의 마음을 한번 감동시켜 보라라는 것은 쉬운 말인 듯 합니다. 그건 그냥 열심히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아무 생각 안해도 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결과물만 만들어내면 됩니다. 물론 우리의 영혼에 참된 만족은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기준에 만족하면 교만으로, 그리고 실패하면 비참한 절망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하지만 박영선 목사님은 전혀 다른 방향에서 인생을 설명합니다. 복음 안에서,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우리 자신을 보도록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손 안에서 우리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구원을 운명으로 확보했습니다. 아, 이런 표현을 얼마만에 들어보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에 전율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하심은 한번의 전율로 쉽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신앙의 고된 여정을 걸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구원을 이루어가시며 그분이 나를 자녀 삼으시고 삶을 맡기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예에 걸맞게 살아가라 라고 말한다면, 이건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돌이킬 수 없는 구원을 운명으로 확보하게 된 사람"은 자꾸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혹시 내가 화 한번 잘못 냈다가 하나님의 명예에 먹칠이라도 하면 너무 큰일이 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방법이 정직해야 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만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 안에 이루신 이 일은 정말 놀라운 일이며, 어떤 의미에서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박영선 목사님은 이 어려운 삶을 살아가야하는 성도들을 반복해서 격려합니다. 심지어 삶은 잘잘못으로 평가될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명예롭게 위대하게 살도록 권면합니다.
가장 어려운 부분입니다. 박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도 종종 느끼는 부분입니다. 갑자기 논리의 도약이 일어납니다. 어쩌면 완전히 모순되는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연결해서 붙여놓았습니다. 삶을 잘못 살게 될 때가 너무 많은데, 어떻게 명예롭고 위대한 것을 꿈꿀 수 있을까요? 하지만 이것보다 더 신앙을 잘 표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성도는 어떤 실패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승리가 우리의 선택보다 더 크기 때문에 우리는 위대한 삶을 꿈꿀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온통 줄을 쳤습니다. 하지만 아직 저의 실력은 너무나 미천하여, 책을 읽고 감동하는 수준 그리고 어설프게 반박하는 수준에 머무를 뿐입니다. 저는 박목사님을 너무 좋아하지만, 그러나 여전히 제 마음에는 본능적인 반항의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확고히 믿지만, 제 삶과 마음 속에 깊이 들어오기 까지는 여전히 시간이 필요해 보입니다.
아내는 저만큼 박목사님을 좋아합니다. 아내가 이 책을 추천했습니다. 함께 책을 읽었기 때문에, 저는 오히려 아내를 향해 반박을 많이 했습니다. 박목사님께 대들수가 없으니, 애꿎은 아내에게 연신 반박 질문을 합니다.
"여보, 이건 너무 모순적인 이야기인거 아닌가? 박목사님처럼 치열하게 살지 않으면 이런 책 쓸 수도 없었을텐데 하나님이 다 하실꺼니까 버티고 살아가라 라고만 말하다면, 너무 안일하고 수동적인 삶을 옹호하는 이야기하는것 아닌가?"
"여보, 그럼 신앙이 약해진 성도를 그냥 내버려두면서, 하나님이 다 책임지실꺼니까 좌충우돌 많이 해보라고 그러면서 실력이 쌓이는 거고 삶이 다 그런거라고 이야기해주는게 좋은 목회자인가? 정신 차리라고 호통을 쳐야만 하는거 아닌가?"
아주 오래 전 기억입니다. 이제 노회에 갓 들어간 목사로 한 노회에서 참여했습니다. 점심 시간이 한참 넘어서서 배가 고픈데 회의가 끝날 줄을 모릅니다. 박목사님이 손을 번쩍 드시더니 웃으면서 크게 말씀하십니다. "밥먹고 합시다!" 그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역시 큰 어르신은 정말 다르시구나!" 모든 상황 속에서 여유를 잃지 않으시고 웃음으로 후배들을 격려하시는 모습이 그렇게 크게 보였습니다.
저의 목회의 남은 시간들은, 이 책의 내용을 제 삶에서 풀어낼 과정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목회적인 상황들은 앞으로는 더 어렵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저를 바로 그 상황 속에 넣으시고, 그 안에서 버티며 명예롭게 성도로서 행동하라고 격려하십니다.
이 책을 읽고 정말 위로를 많이 받았습니다. 상황은 변한 것이 없지만, 성도로서 목회자로서 제 자신에 대해서 저의 삶의 컨텍스트 안에서 아주 조금 여유가 생겼습니다. 조금 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명예를 걸고 살아가는 것에 조금 더 마음으로 수긍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대단한 열매를 만들어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현재의 삶 속에서 명예롭게 살아가기를 요구하십니다. 제가 성도로서 수 많은 좌절 속에서도 명예롭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그리고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저를 포기하지 않고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저의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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