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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 29일 수요일

사십대의 절반을 지나보내며 / You Make Me Feel Brand New - Richard Elliot

 




일년에 한번씩 돌아오는 생일이지만, 이번에는 유독 여러 의미가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살던 시카고를 떠나 볼티모어로 이주를 하고, 전혀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역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몇달 동안은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지낸 것 같습니다. 당장 해야 하는 수 많은 일들을 소화하면서, 제 역할을 감당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든 할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능력이 아니라 책임감인 듯 합니다.

가족을 위해서 제가 가장 신경써서 기억하려고 하는 것은, 결혼 기념일 그리고 아내의 생일입니다. 당연히 제 생일은 뒷전입니다. 지난 주일이 제 생일이라는 것도 당연히 몰랐습니다. 그러니 심지어 그날 저녁까지 심방을 잡아 놓았습니다. 어렵게 잡은 심방이라 취소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어머니께서 평생을 그렇게 하신 것처럼, 목회는 나 자신의 것보다 교회를 앞세우는 것이 목회입니다. 

아내와 잠깐 시간을 내었습니다. 둘째가 미술을 배워야하는데 처음 가보는 곳이라 제가 잠깐 라이드를 해 주변서 주변을 살펴 보았습니다. 아주 작은 까페가 있더군요. '같이 커피라도 한잔 할까?' 아주 오랜만에 아내와 데이트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사실 너무 작고 낡은 곳이라 아내에게 미안했는데, 아내의 얼굴을 보니 기분이 좋아 보였습니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마흔의 절반을 지나도록 살아온 저의 삶의 거의 전부가 아내 덕분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아내가 없었다면 과연 내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을까? 대답은 언제나 No입니다. 그래서 요즘에 아내에게 잘 해주어야겠다라는 생각이 더 많이 듭니다. 

생일에 일어나보니 아이들이 카드를 주었습니다. 나름대로 정성으로 그려진 카드를 보니 웃음이 났습니다. 아빠가 된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이고 또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또 그만큼 큰 기쁨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이들을 품에 안으면, 단순히 행복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마음에 차오릅니다. 가족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일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고, 또 저에게 맡겨진 책임입니다. 그저 제가 이 모든 것에서 포기하지 않고 뒤로 물러서지 않고 계속 전진할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제 능력보다 할 일이 훨씬 많은 상황은 아마 평생 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늘 아쉬움과 부족함과 허덕임으로 살아가는 것이 현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 작은 순간들을 누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글을 남깁니다. 저의 생일이 대단한 날도 아니고, 누군가 알아주기를 원하는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하나 밖에 없는 남편으로, 그리고 하나 밖에 없는 아빠로, 조금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결심과 의미를 주기 때문에 너무나 소중한 날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저의 인생을 붙들어주시고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저의 곁에서 언제나 함께 해준 사랑하는 아내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2024년 9월 20일 금요일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은 나의 길 / Time After Time - Jonah Baker

 
















이제 정말 사역을 마무리 할 때가 되었습니다. 요즘에 저의 마음은, 목회자 정진부에서 인간 정진부로 돌아간 기분입니다. 7년 반이라는 시간을 쉬지 않고 달려왔고, 중요한 순간들을 짚어내지 못하고 사역했습니다. 반년동안 심적으로 너무 힘들어 우울감에 덮여 있을 때조차 저를 제대로 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마지막 순간까지 충분히 저를 돌아보지 못하고 다음을 위해 준비합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곳에서의 기억을 남기고 싶다. 기억을 남겨야 하는 좋은 일들이 너무 많았지만 제대로 기록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서는 이 순간만큼이라도 오롯이 제 자신에게 집중하고, 저의 감정과 저의 생각, 제 자신에게 집중하고 싶었습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평소에 제가 산책했던 길들을 마지막으로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수도 없이 걸었던 길입니다. 마음이 답답할 때면, 울적해서 힘이 들때면, 앞이 보이지 않아서 너무 막막할 때면, 그리고 기쁨이 넘쳐서 주체할 수 없을 때면, 그 모든 순간에 걸었던 길입니다. 

대부분 혼자 걸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좋았습니다. 걸을 때에 생각을 정리할 수 있고, 기도할 수 있고, 주님을 찾을 수 있고, 마음을 추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을 먹고보니 벌써 해가 지려고 해서 조급해졌습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해가 이제 뉘엇뉘엇 져가는 이 시간이 제가 가장 사랑하는 순간입니다. 

한참을 걷는데 마음이 평안했습니다. 여전히 덥지만 이제는 제법 가을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그 공기가 좋았습니다. 눈 앞에 펼쳐진 모든 것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어떤 예술가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절정의 아름다움이 시시각각 눈 앞에서 펼쳐지고 다시 흩어졌습니다. 저의 작은 마음에 담을 수 없는 그 모든 순간을, 작은 사진들로 남겼습니다. 

앞으로 걷다 보니 뒤가 보였습니다. 항상 계획하고 걷기 위해 노력했지만, 돌아보니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셨습니다. 예전에도 알던 말씀이지만, 그 말씀이 이렇게 깊은 것인줄 미처 몰랐습니다. 이제 이곳에서 사역을 마무리 하려고 하니, 그리고 제가 걸었던 길들을 다시 돌아보며 시간들을 반추해보니, 감히 가늠하기 어려운 말씀의 무게가 저의 마음을 평안하게 합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아픈 순간들이 많았기 때문에, 잊으려고 많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속으로 되뇌입니다. 잊어야지 잊어야지... 한편으로는, 잊지 못할 것도 같습니다. 마음의 상처는 그렇게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저 설교의 자리에서 용서하라는 말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제 자신을 보면서 알게 됩니다. 그래도 걷는 그 순간, 햇볕이 참 좋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마음을 만지심을 느꼈습니다. 좋았던 순간들이 정말 많았기에, 아픔으로 그것들을 덮고 싶지 않은 간절한 마음입니다.

이제 다시 못 걸을 길을 마지막으로 걸었습니다.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습니다. 저의 고민했던 모든 시간들을, 그리고 그 아픔의 순간들 조차 저의 영혼에 가장 고귀하고 가치 있는 자양분이 되었음을 믿고 붙들고 싶습니다. 앞으로 걸어갈 모든 길 위에서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선하게 가장 아름답게 인도하실 것을 확신합니다. 오직 그 믿음으로, 계속 걸어가겠습니다.

2022년 12월 21일 수요일

5년 간의 청년부를 마무리하며 / 김동률 - 청춘

 


누군나 삶의 한 자락에 가장 소중한 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는 지나간 5년의 청년부를 섬긴 시간이 그렇습니다. 꿈처럼 지나간 시간이라 너무 소중하고,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기억들입니다. 

지금 섬기는 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할 때, 저의 공식적인 포지션은 청년부와 장년 그리고 찬양 인도였습니다. 아내가 참 좋아했습니다. "오빠는 청년들 좋아하니까 사역 잘 할 수 있을꺼야" 부족한 저를 격려해 주는 아내에게 항상 감사할 뿐입니다. 


신학교 전도사 시절에 1년 정도 청년부를 맡았습니다. 그리고 정말 오랜 시간 이후에 청년부를 맡았습니다. 저도 마음이 많이 설래었습니다. 제가 청년 시절에 정말 좋은 목사님을 만났고, 그분과의 만남을 통해서 지금의 제가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스승의 날만 되면 그분이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랬던 것 처럼, 조금이라도 좋은 것이 있다면 청년들과 나누고 싶었습니다. 


청년들에게 무엇을 원하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성경 공부를 잘 하고 싶다는 바램들을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스터디 바이블을 이용한 교제들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제 설교와 연관 지어서 정말 청년들에게 꼭 필요한 것들이라고 생각하고 준비했습니다. 


청년들을 위한 설교와 성경 공부 준비에만 매주 열시간 이상 시간을 사용했지만 힘든줄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청년들은 저의 가족이고 또 저의 사랑의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고 수고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처음에 청년들이 열다섯명 정도였습니다. 사실 처음에 맡을 때 부터 저는 그 끝을 알고 있었습니다. 한 때 백명이 넘는 청년들이 있었지만, 이미 공동체는 쇠락하는 시점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그것을 그저 망연자실 바라볼 수 만은 없었습니다. 공동체의 마지막이 보인다 하더라도,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는 것이 목회자의 당연한 모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음에 항상 청년들이 가장 가까이 있었지만, 실제로 제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는 것이 쉽지가 않았습니다. 쉴새 없이 이어지는 장년 사역과 찬양 인도, 그리고 새벽 예배를 꼭 나와야 하는 저의 자리에서는 항상 육체적인 무리를 감당해야 했습니다. 퇴근하지 않고 교회 사무실에서 종종 밤 잠도 잤지만, 부족한 사역의 시간을 채워 넣기가 어려웠습니다. 


금요일 저녁의 찬양 인도, 토요일 사역과 설교 준비, 그리고 주일날 예배와 찬양 인도, 설교와 이후에 청년들과 늦게까지 시간을 보내고 나면 몸이 다 망가져 버린 듯 느껴졌습니다. 월요일은 구토를 느껴 일어나기가 힘들어서 하루 종일 누워있기도 했습니다. 아마 제 평생에 먹었던 타이레놀 보다, 지난 몇년간 먹은 것이 더 많은 듯 합니다.  


가끔씩 제가 스토커가 아닌가 생각이 들때가 있습니다. 가급적 일주일에 한번 이상씩 항상 안부 연락을 했기 때문입니다. 목회라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저에게 스토커라고 부른다고 해도, 저는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돌이켜보니 사실 되려 부담을 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다만 그러한 작은 관심과 연락들이, 그리고 안부를 묻는 과정들이 서로의 관계 속에서 조금이라도 견고함을 가져오기를 바랬습니다. 


한때는 거의 스무명 정도가 넘은 적도 있습니다. 참 좋았습니다. 단순히 숫자가 늘어서 좋았다기 보다는, 그냥 그 순간 그들의 행복이 좋았습니다. 청년들이 행복할 때에 저도 행복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저의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함께 찬양하고, 함께 예배 드리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이 좋았습니다. 여전히 수가 적어서 사람들의 큰 관심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저는 좋았습니다. 적어도 이들과 함께라면, 저는 외롭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끔씩은, 여기가 한국이면 어떨까 생각을 종종 합니다. 한국은 서울이 중심이기 때문에, 왠만하면 교회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상황이 완전 다릅니다. 청년들은 일 자리를 찾아서, 그리고 결혼을 하면서 떠날 수 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극히 일부만이 그 자리를 지킬 뿐입니다. 


이미 이런 상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번이라도 교회에 방문한 청년들을 정착시키려고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 과정이 참 여의치 않았지만 적어도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다했습니다. 그러나 들어오고 정착하는 숫자보다, 빠져나가는 숫자가 너무 컸기 때문에 무기력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펜데믹이 닥쳤습니다. 이미 쇠락기에 들어간 청년부에 펜데믹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처음에는 줌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처음에는 설교를 영상으로 만들고, 이후에는 영상 보다는 실시간으로 드리고 싶다는 요청에 혼자서 청년부실에서 카메라 앞에서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그래도 처음에는 괜찮은 듯 했지만, 제 능력 밖의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청년들이 하나 둘 타주로 옮기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집에서 나오지 않는 청년들이 늘어났습니다. 


상대방이 읽지 않는 카톡 메시지가 속절없이 늘어 났습니다. 그나마 믿었던 사람들은 다른 교회들을 찾아 떠났습니다. 예배가 너무 썰렁하고 공동체의 모습을 잃어버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결국 청년부 예배가 장년 예배에 통합되었습니다. 


마지막 남은 청년들도 예배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장년 예배는 그들만의 예배가 아니라고 생각했을까요? 제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펜데믹 기간 중에 제가 한 일은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에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청년들에게 계속 안부를 묻고, 밥을 사주면서 격려하고, 어떻게든 그 마음을 위로하고 돌이키려고 팬데믹 기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빨리 모든 동력이 사라졌습니다. 이제는 공동체라 부르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저는 공식적으로, 청년부 사역에서 장년 사역 쪽으로 완전히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다른 목사님께 사역을 인수인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 그나마 남아 있는 청년도 이사를 간다고 소식을 알려주었습니다. 그 청년이 이렇게 저에게 카톡을 주었습니다. 


“목사님, 단톡방을 지금 봤네요.. 지금까지 진심으로 저희를 섬겨주시고 목사님의 모든 사역에 감사드립니다! 


목사님께서 저희의 믿음 성장을 위해 계획하고 하셨던 여러 일들을 비록 저희는 꾸준히 못따라갔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목사님의 열정과 진심을 보시고 기쁘게 생각할거라 생각합니다. 앞으로의 목사님의 여러 사역에 하나님께서 귀중히 쓰시길 그리고 또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길 기도 드리겠습니다” 


저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고마워 내 인생의 최고의 황금기였고 너무 행복했지, 평생 잊지 못할꺼야. 나는 나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고 멤버들도 또 모두 열심히 했지 후회는 없어, 고마워 큰 위로가 된다. 너가 고생 많았지” 


펜데믹 기간 중에 꿈을 꾸었습니다. 함께 했던 청년들이 모두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꿈 속에서 저는 활짝 웃고 있었고 힘있게 찬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꿈에서 깨어났을 때에 제 마음은 너무나 아팠습니다. 아마 제 평생에 가장 아픈 마음을 느껴본 순간인 듯 합니다. 너무나 행복한 순간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것을 잃어버리는 것이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비록 제가 모든 것을 책임질 수 없었지만,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제 책임이라고 항상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늘 제 마음을 누르고 또 힘들게 했습니다. 저의 상황과 마음을 제 아내를 제외하고 누구도 이해할 수도, 또 이해하지도 않는다는 것이 참 외로웠습니다. 


지금도 가끔 돌아봅니다. “혹시 내가 조금 더 최선을 다 할 수는 없었을까?” 제 자신의 돌아오는 대답은 이것입니다. “진부야, 수고했어, 너 정말 최선을 다했어” 


아마도, 하나님께서도 그 부분은 조금이라도 인정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상황과 시대와 모든 것은 바뀌지만, 그러나 크게 흔들리지 않고 저의 자리를 지키고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이 명예롭게 느껴집니다. 제가 지킬 수 있는, 저의 마지막 자존심입니다. 


저는 늘 지금의 저의 시간이 황금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푼 마음으로 시작하고 이제 끝을 맺은 지난 5년간의 시간이야 말로 진정한 황금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고 확신하는 가장 좋은 것을 소중하게 나누었던 시간, 그리고 저의 가장 큰 열정들을 아낌 없이 쏟아 부은 시간들입니다. 


제가 원하던 대로 결과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그것 역시 하나님의 주권 안에 속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어려운 사역에 매진하고 울고 기도하고 눈물 흘리면서, 어쩌면 가장 연약한 자들을 이해하는 참된 목회를 배운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려운 목회 속에서 저를 격려해주고,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청년들을 환대하고 대접한 아내에게 감사할 뿐입니다.


추억은 누구도 바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과거를 바꾸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행복합니다. 청년들과의 따뜻했던 시간들은 변치 않고 아주 오래 남을 것입니다. 제가 속상하고 아팠던 시간보다, 그들이 저에게 주었던 기쁨과 행복이 크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오늘에 이르러서야 하나님께 정말 감사하게 됩니다. 저에게 소중한 목회의 시간을 주셔서 감사하다고, 하나님께 진심으로 말씀드릴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찬양 받으실 분이십니다. 그래서 제가 경험하는 모든 조차, 하나님께서 선하게 이끌어가실 것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께, 진정한 신앙의 고백을 올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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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24일 월요일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 닐로 - 들려줄게

 

퇴근하고 나면, 두 아들의 하루를 아내가 이야기 해 줍니다. 듣고 있으면 재미있습니다. 저의 어렸을 적 추억도 기억이 나고, 마냥 행복한 마음이 듭니다. 그저 아이들이 자라고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합니다. 

막내가 친하게 지내는 친구가 학교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학교가 끝나면 막내가 놀이터에서 기다린다고 하더군요. 처음에는 의아했습니다. 왜 기다리지? 막내의 친구는 같은 반이고, 인도에서 온 작은 여자 어린이입니다. 아내가 정말 작고 귀엽다고 말하면서 웃더군요. 제가 농담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여보,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됬는데?" :)

학교에 아이들을 픽업하러 아내와 같이 나갔습니다. 역시나 막내는, 오늘도 발걸음을 돌리지 못하고 또 놀이터에서 기다리더군요. 친구가 나온다는 쪽에서 잠시도 눈을 때지 못하고 한참을 기다립니다. 한 곳만 바라보는 막내를 보면서, 괜시리 제 마음이 두근거렸습니다. 십오분쯤 지났을까요? 막내가 한 여자 아이를 보고서 너무 반가워하면서 달려가더군요, 사실은 서로가 서로를 마주보면서 달렸습니다. 그리고 꼭 끌어 안았습니다. 

약간 당황하기는 했습니다. 그렇게까지 친밀한 관계인 것은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 또 한편으로는 마음이 참 따뜻해졌습니다. 우리 막내는 학교 가는 것이 참 행복하겠구나.. 기다리고 싶은 누군가가 있다면, 매일 만나고 싶은 누군가가 있다면, 이미 막내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해본 사람은, 하나님을 깊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고 그 사람을 위해서 노력해본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향하여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질이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한 남자로서 펼쳐질 제 아들들의 삶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지만 웬지 기대가 됩니다. 저의 아들들 역시, 진심으로 기다리는 누군가를 만날 것이고, 또 아름다운 관계를 만들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깊고 순수한 사랑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많이 아플 수도 있는 그 긴 시간들이, 사랑하는 아이들의 마음과 인격을 형성하고,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는 시간이 되기를 아빠로서 바랄 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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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2일 토요일

찬양팀 음악의 아름다움은 어디서 오는가? by 싱어의 역량

 

요즘에 저의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과연 음악의 아름다운 어디에서 오는가?" 입니다. 매주 찬양 커버곡을 녹음하고 믹싱해서 최종적으로 완성해 보면서, 그리고 매주 찬양팀의 리더로 섬기면서, 음악의 아름다운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를 정말 신중하게 살펴보고 있습니다. 

참 흥미로운 것은, 음악을 만들지 못하는 사람도 음악의 좋고 나쁨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지 못한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음악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본인이 찬양을 잘 부르지 못해도, 혹은 악기를 연주하지 못해도, 어떤 사람의 노래가 혹은 어떤 찬양팀의 음악이 아름답다고 분명히 느낍니다. 그 이유는 정확하게 말하지 못하지만, 그러나 어떤 지점에서 분명히 좋은 감정 좋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리고 성도님들은 그것을 은혜를 받았다 라고 말합니다. 

찬양팀에게 있어서 생명과 같은 마이크와, 그 마이크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음악적으로 사용하면 좋을지는 이미 예전에 글로 정리한 적이 있습니다. 읽어보시지 않았다면 꼭 읽어보시고 연구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 현대적인 찬양팀을 위한 마이크 사용법 from 가수 정진운
https://jungjinbu.blogspot.com/2021/09/from.html

물론,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없다면, 찬양팀의 음악은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목소리와 우리의 연주를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성령님의 역사로만 설명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아티스트들도 정말 아름다운 음악들을 얼마든지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않는 자들에게조차 일반적인 은총을 통해서, 그분의 아름다우심을 음악을 통해서 드러내십니다. 

보통 찬양팀을 하게 되면 악기팀에 집중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악기는 정말 중요합니다. 음악적인 악기 연주가 받쳐주지 않는다면 어떤 곡을 완성도 있게 찬양으로 올려드리기는 정말 어려울 것입니다. 물론 음향이 너무 중요합니다. 사실상 어떤 의미에서 찬양팀 음악의 아름다움은 100퍼센트 음향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훌륭한 엔지니어는 찬양팀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양팀을 섬기면 섬길수록 중요한 것은 "싱어의 역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악기가 훌륭하고 싱어가 훌륭하다면 좋은 찬양팀입니다. 하지만 "악기가 훌륭해도 싱어의 역량이 떨어지면", 절대로 훌륭한 찬양팀이 될 수는 없습니다. 싱어들이 어떤 느낌으로, 어떻게 음들을 처리하며, 어떻게 강조점을 넣는가를 통해서 찬양팀의 색깔이 완전히 바뀌기도 합니다. 그리고 제 자신과 찬양팀을 염두에 두고, 음악적인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오는가에 대한 저의 고민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1. "음이 시작되는 바로 그 순간" 목소리가 나와야 한다. 

미국 유학 나오기 전에 음악하는 친구가 Ken Reynolds를 저에게 소개시켜 주었습니다. 처음에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도대체 찬양을 이렇게 세련되게 만들 수 있는가? 요즘에는 한국에도 이런 스타일의 찬양을 하는 팀들이 늘어났습니다. 하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켄 레이놀즈를 뛰어넘는 팀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흑인의 소울에서 나오는 것은 연습에서 나온다기 보다는, 타고난 그 어떤 것으로 부터 나오는 듯 합니다. 물론 연습도 엄청나게 했을 것입니다. 어떤 리듬감의 완벽함에서 오는 감격은, 제 느낌으로는 0.2-3초 어간의 밀고 당기는 수준에서 결정이 됩니다.

이 곡을 잘 들어보면, 드럼과 베이스가 들어가는 모든 지점에서 보컬들이 단 하나도 어긋나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보컬이 한 번도 박자가 밀리지 않습니다. "들어가야 하는 타이밍"에 모두가 다 들어갑니다. 물론 라이브도 앨범을 만들 때에는 나중에 후보정을 모두 하게 됩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역량이 되지 않으면 소프트웨어로 보정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한계가 있습니다. 

위의 찬양은 너무 신이납니다. 듣고만 있어도 어깨가 들썩입니다. 왜 그럴까요? 싱어들과 악기들이 "합"이 맞기 때문입니다. 드럼과 베이스가 완벽하게 리듬을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싱어들이 그 위에 살짝 "올라타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에 싱어들이 박자가 안 맞거나, 처음에 시작음이 안 맞거나, 박자가 쳐지는 것은, 싱어인 본인이 "곡을 지배해야 한다"라는 무의식 속의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음악에 맞춰 부르지 않고 내가 노래를 강하게 부르면 악기가 나에게 맞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야" 합니다. 절대로 보컬이 "악기의 리듬과 흐름"을 방해해서는 안됩니다. "음악은 흘러가는 것"이고, 보컬은 그 음악에 "자신의 목소리를 얹는 것"입니다. 

위의 곡에서 하나 더 눈여겨 볼 것은, 적어도 다섯 명 정도의 메인 보컬들이 "끝음"이 완벽하게 맞아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음악에서 시작음이 같이 들어가야 하는 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만큼 중요한 것인 "끝음"입니다.

제 경험으로는 찬양을 음악적으로 망가지게 하는 것은, "끝음을 길게 처리하는 경우" 입니다. 노래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내가 은혜를 받을 때에 끝음을 길게 처리하는 것이 굉장히 음악적으로 느껴집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떤 음이든 지나치게 길게 끌 경우, 혹은 다른 싱어들은 이미 마무리했는데 혼자서 끝음을 끌고 있을 경우 거의 백퍼센트 "찬양팀 전체 음악을 루즈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모두가 함께 동일하게 시작했다면, 끝음의 처리에 있어서 길게 끌지 말고 딱 좋을 정도로 (보통은 악보의 길이에서 80퍼센트 정도)만 끄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모든 싱어들이 함께 맞춰야 합니다.

위의 곡은 빠른 곡이지만, 동일한 앨범에 들어 있는 또 다른 느린 곡을 들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정말 정말 좋아하는 곡입니다. 특별히 코러스들의 수준이 엄청납니다. 들어가고 마무리 되는 부분들이 마치 한 사람과 같습니다. 이 팀이 가지고 있는 음악적인 역량은, 느린 곡에서 더 대단하게 발휘가 됩니다. 느린 곡 역시 빠른 곡 처럼 리듬감이 뛰어나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들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제 기억으로 켄 레이놀즈는 미시간에서 로컬 처치에서 사역합니다. 혹시 들리시게 되면 꼭 한번 그곳에서 주일 예배를 드려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제가 방문했을 때에는 베이스 기타를 메고 찬양을 인도하더군요. :)

보컬의 리듬감 혹은 보컬의 어떤 음의 시작점의 중요성을 저는 페퍼톤스라는 그룹에서 또한 봅니다. 페퍼톤스 역시 한국에서 매우 지명도가 높은 그룹입니다. 사실 노래 자체를 놓고 보면 그렇게 엄청난 발성을 가진 분들은 아닙니다. 하지만 본인들이 만든 음악에다가, "어떻게 보컬을 리듬감 있게 입혀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아래 곡은 페퍼톤스의 "thank you"라는 곡입니다. 


저는 위의 곡을 너무 좋아합니다. 일단 가사 내용이 너무 좋습니다. 음악적으로도 두명이 함께 노래를 할 때에 너무너무 합이 잘 맞습니다. 처음에 들어가는 시작점이 아주 자연스럽게 완벽하고, 또 끝나는 부분이 타이밍적으로 너무 좋습니다. 밴드의 음악을 전혀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보컬이 완벽하게 음악을 완성해 냅니다. 정말 많이 들었고 따라부르면서 리듬감을 익혔습니다.

2. "발성 자체의 다양함"이 필요하다.

위의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노래의 시작점과 끝점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탑 가수들의 노래를 들어보면, 모두가 들어가는 노래의 시작점과 끝 점에 엄청나게 공을 들입니다. "타이밍을 완벽하게 음악적으로" 맞춥니다. "어떤 음"도 "지나치게" 늘어지게 끌게 부르지 않습니다. "딱 좋을 정도"로 음악을 방해하지 않고 그 위에 얹어서 보컬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음악은 처음과 끝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중간"이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노래의 어떤 음의 시작점과 끝 점 사이의 중간은 어떨까요? 예를 들어서 어떤 음이 세박 정도를 지속해야 할 때에, 도대체 그 긴 공간은 어떻게 채워야 할까요? 이 부분 역시 매우 어려운 부분입니다. 

최근에 라디님의 12 month를 들었습니다. 라디는 한국의 알앤비 장르에서 이미 탑클래스의 가수입니다. 너무 아름다운 노래입니다. 저와 동갑이지만 어떤 미소년보다 더 아름다운 목소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저는 이 곡이 "피아노만으로 반주"한다는 것을 10번 정도 노래를 듣고서야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노래에 완전히 빠져서, 가창력에 완전히 몰입이 되어서, 도대체 다른 악기가 어떻게 등장하는지를 분석할 틈도 없었습니다. 라디님의 노래가 "너무나 변화 무쌍하고 전혀 지루함이 없어서" 피아노 하나의 악기만으로도 완벽한 곡을 만들어 냈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에 기존의 ccm에서 아쉬운 것은, 그리고 일반적인 찬양팀에 있어서 아쉬운 것은 "노래의 변화" 가 "너무 적다"라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너무 밋밋"합니다. 멜로디 하나 하나 사이사이, 그 음의 사이사이에 변화가 너무 적습니다. 

예를 들어서, 위의 곡에서 라디의 발성을 들어보면, 끝음 처리들이 동일한 곳이 거의 없습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직선으로 끌고, 어떤 부분에서는 코에 소리를 집중해서 바이브레이션을 넣습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바이브레이션을 한 음의 처음부터 넣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완전히 끝 쪽에만 사용합니다. 곡의 전체를 비교적 약하게 부르지만, 모든 기교들을 사용해서 보컬 자체를 지루하지 않게 만들기 때문에, 이 곡은 아름답게 완성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부분을 어떻게 찬양팀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저는 "찬양 자체에 대한 편견"이 깨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편견은, "한국 찬양의 편견" 입니다. 한국 사람들의 생각에는, "찬양은 성악 발성으로" 혹은 "찬양은 강하게 부르는 발성으로 부른다"는 일종의 선입견이 있는 듯 합니다. 물론 그런 부분이 일정 부분에서는 당연히 필요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속삭이듯이 부르는 부분은 존재하지 않고" 모든 부분을, 너무 강하게 너무 세게 불러 버린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고 그 마음에 다가가는 곡들은" 부드러운 곡 혹은 부드러운 부분들입니다. "처음에 약하게 시작"되고 또 "변화가 다양한 곡"들입니다. 반드시 모든 음들은 "변화"가 들어가야 합니다. 그 음의 높이를 유지하면서도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찬양팀의 싱어라면 "다양한 발성"을 연구해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스스로 연구를 많이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저 같은 경우도, 어떤 부분에서 어떤 음에서 바이브레이션을 어떻게 얼만큼 넣을 지, 어떤 부분에서 강조점을 둘 지에 대해서 계속 고민합니다. 아래 곡은, 최근에 만든 커버곡입니다. 

이 곡은, 멜로디가 굉장히 난이도가 높은 곡입니다. 도약이 정말 많기 때문입니다. 이 곡을 준비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코러스로 넘어갈 때에 "나의 길" 이라는 부분입니다. 보통은 "길"을 시작부터 너무 강하게 부릅니다. 사실 기본적인 음악적인 이론에서는 맞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4박자 리듬에서 길이 강 박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의 길"이라는 것이 하나의 단위라고 생각할 때에는 좀 더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길"을 처음부터 너무 강하게 부르면 백퍼센트 촌스럽게 들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의 길에서 길에 바로 힘을 주지 않고, "약간 힘을 빼고 살짝 그 음만 짚은 이후에 약 반박자 이후에 힘"을 넣었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음의 시작과 끝의 그 사이"를 "어떻게 처리할지"를 고민한 저의 결과입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생각보다 좋게 들려서 만족하고 있습니다. 

음이 시작되고 마무리 될 때까지, 가장 다양한 변화를 주는 모델이 될 만한 사람은 누가 있을까요? 과연 가장 완벽한 가수가 있을까요? 저는 박효신님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발성, 색깔, 음악성을 모두 갖춘 한국 최고의 가수입니다. 야생화의 뮤직 비디오는 아마 수십번은 본 듯 합니다. 

이 곡은 음역대가 높아서 따라해 볼 수도 없을 정도입니다. 다만 제가 너무 좋았던 것은 "이분이 노래하는 모든 기교들"입니다. 어떤 멜로디의 한 음이 시작되고 끝나는 "그 중간의 순간에 존재하는 그 시간들"을 엄청난 음악성으로 모두 채워 넣습니다. 그저 듣고만 있어도 빠져들어갑니다. 

사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음들의 절대적인 높이를 처리하는 능력"입니다. 보통의 가수들은 음원을 낼 때에 소프트웨어적으로 보정을 합니다. 물론 박효신님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정말 좋았던 것은, 어떤 음이 세박이 지속된다고 할 때에, 처음에 들어가는 음 높이와, 마지막에 끝나는 음 높이를 예술적으로 살짝 튼다는 것입니다. 이건 소프트웨어로 절대 할 수 없습니다. 이건 가수 스스로 느끼고 만들어낸 예술의 영역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음을 라 음에서 시작해서, 마지막 끝날 때에는 라에서 살짝 올라간, 아마도 반에 반에 반음 정도를 살짝 틀어서 부르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노래를 하면 음이 다 맞지가 않습니다. 듣고 있으면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멜로디 자체"를 제대로 못 부른 경우가 허다 없습니다. 찬양팀을 음악적으로 망치는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기본적으로 멜로디를 틀리지 않고 잘 불러야 합니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여기 논의되는 모든 내용들이 무용지물이 됩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때에는 박효신님은 음을 맞추어서 노래를 부른다는 개념 자체를 초월해 버렸습니다. 위의 곡에서 4분 17초를 넘어가면서 하이라이트로 올라 갈 때에 "한 음에서 약간 음을 틀어서 부르면서 타고 올라가는 그 느낌"은, 이미 이분이 인간의 경지가 아니라는 충격을 주었습니다. 잘 들어보시면서 연구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3. "음의 끝음 처리"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내용은, 이것입니다. 어떤 음이든지 정확한 타이밍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정확한 타이밍에 끝나야 합니다. 한가지 오해가 있는 듯 합니다. 특별히 찬양팀 싱어는 "팀 사역"입니다. 절대로 수퍼스타 한명으로 팀이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리더 혼자 혹은 싱어 혼자 만드는 것이 찬양팀이 아닙니다. "팀이 부르는 것"이기 때문에 "혼자서 너무 길게 부른다거나 하면" 결국 음악적으로 "큰 손해"를 가져옵니다. "전체적인 통일성"이 우선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그 음 사이에서 다양한 발성을 개인적으로 연구하면서 다양성을 넣어서 지루하지 않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한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끝 음의 처리" 입니다. 예를 들어서, 세 박의 음을 끌어서 그 음을 마무리하는 방법은 다양할 것입니다. 가장 쉬운 방법은, 끝나는 타이밍에 그냥 입을 다물면 됩니다. :) 하지만 아무도 이렇게 추천하지는 않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성대로 통과되는 공기의 흐름을 적게 만들어서 자연스럽게 fade out 시키는 것을 추천합니다.

하지만 탁월한 가수들은, "자기들만의 끝음 처리 능력"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어떤 음이 끝나는 그 느낌"이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 가수의 개성이 드러납니다. 저는 다양한 가수들의 노래를 분석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제가 또 하나 존경하는 뮤지션은 다빈크님입니다. 한국의 최고의 뮤지션 윤상님과 함께 활동했고 본인이 곡 전체를 프로듀싱하는 가수이며 키보디스트입니다. 

다빈크의 곡을 들면서 너무 좋았던 것은, 어떤 음의 "끝음 처리" 입니다. 사실 제 기준에서는 다빈크 님은 라이브 실력은 라디보다 조금은 밀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음의 처리에 있어서 "굉장히 독특한 처리"를 합니다. 약간 콧 소리를 강하게 넣어서 살짝 끝 음을 꺾어 올립니다. 반에 반에 반음 정도 될까요? 그래서 어떤 애잔함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비슷한 기교가, 이승환님의 천일동안에도 등장합니다.

다빈크님의 발라드들은 주로 건반 위주로 진행이 되고, 강한 일렉기타들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순전히 보컬과 코러스들을 더블링해서 입히면서 다이나믹을 만들어냅니다. 보컬의 활용만으로 이정도 다이나믹을 만들어내는 사람은 다빈크님이 거의 유일합니다. 저는 ccm 커버를 만들면서 제 노래가 너무 밋밋해서 고민하면서 다빈크님을 많이 따라해서 발성을 연습했습니다. 저는 다빈크처럼 모든 음을 꺾어서 처리하지는 않지만 이분을 연구하는 것이 저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위에는 거의 다 남자 곡들입니다. :) 저는 제가 남자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남자 보컬들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정말 노래를 잘한다고 생각하는 여자 가수는 벤 입니다. 가수 거미 같은 경우는 알앤비를 추구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찬양팀에 적용하기는 좀 어렵습니다. 그리고 소향님은 일반인이 접근하기는 너무 어렵습니다. 그리고 발성이 찬양팀과 전혀 맞지 않습니다. 하지만 벤의 경우에는 전형적인 발라드 가수이며 그런 점에서 배울 점이 너무 많습니다. 

벤의 발성과 기교가 너무 탁월하지만, 특별히 끝음 처리에 주의해서 들어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냥 듣지 말고 분석하면서 들어야 합니다. "끝음 처리의 모델"이라고 부를 만 합니다. 왜냐하면 아주 자연스럽게 음의 끝이 사라집니다. 이 부분이 대부분의 보컬들이 실패하는 부분입니다. "그냥 똑같은 크기로 음의 길이를 채우다가 뚝 끊어지면" 절대로 음악적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약해지면서 사라져야 합니다. 벤의 경우는 배에서 부터 공기를 잘 조절해서 음을 끝까지 너무 강하게 부르지 않게 살짝 힘을 빼면서 음들을 처리하기 때문에 너무 자연스럽습니다. 

4. 자신만의 "다이나믹"이 필요하다. 

만약에 위의 내용들이 충분히 이해되고 연습이 되었다면, 결국 "자기 자신만의 다이나믹"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음악의 아름다움은 "다이나믹"에서 옵니다. 음악은 "흐름"입니다. 음악에는 "강약"이 있어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4/4 박자는 "강약 중간약" 이라는 다이나믹을 가지고 있습니다. 찬양팀 리더는 큰 그림 안에서 다이나믹을 제시하고 조정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싱어 본인"이 그 사이에 얼마든지 음악적으로 다이나믹을 만들어낼 수 있고 만들어 내야 합니다. 

제가 생각할 때에 문제는, 보통의 찬양팀은 "찬양을 부르기 시작하면" 다이나믹을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훈련이 되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이나믹이 목숨을 걸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찬양이 "민밋해" 집니다. 민밋한 찬양은 부르는 사람에게도, 듣는 사람에게도 "고통"을 줍니다. 반드시 기억할 것은 "모든 음악"은 약한 부분, 강한 부분이 있습니다. 한곡 전체에서, 그리고 한마디 안에서 그렇습니다. 내가 어떤 감성으로 "어디를 약하게 부를지, 어디를 강하게 부를지"를 스스로 결정하고 연습해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다이나믹은 "감성"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저는 찬양을 덤덤하게 부르는 것은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감성이 부족해서 다이나믹이 살아나지가 않습니다. 남녀간의 사랑 노래도 이렇게 애절하게 부르는데, 진정한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찬양할 때에 덤덤하게 부른다는 것은 너무나 아쉬운 일입니다. "덤덤하게 찬양을 부르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 자체"가 큰 문제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커피 소년님의 모든 곡을 좋아하진 않지만, 감성 혹은 다이나믹이라는 점에서 참고할 만한 곡이 커피잔이라는 곡입니다. 

커피소년은 원래 ccm 가수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일반 가수로 전향하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찾아보니 ccm을 부를 때에는 많이 평범했습니다. 하지만 일반 가수로 전향하면서 훨씬 더 감성적인 가수로 변했습니다. 

위의 곡이 정말 좋은 것은, "클라이막스를 굉장히 뒤에 두면서도"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후렴으로 들어가면서 발성을 강하게" 해서 다이나믹을 냅니다. 곡 전체를 구성하면서 어떤 식으로 다이나믹을 만들면 감동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생각합니다. 

또 한분 소개하고 싶은 분은 이승환님입니다. ccm 영역에서 저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분이 박종호님이라면, 가요 영역에서 저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분이 이승환님입니다. 정말 존경하는 아티스트입니다.

이승환님은 단연코 한국 최고의 발라드 가수입니다. 물론 이 분보다 노래를 더 잘하는 분은 있겠지만, 그러나 이분보다 더 완성도가 높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1989년에 데뷔해서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가수입니다. 이승환님은 워낙 탁월한 발라드를 많이 만들었지만, 그 중에서 손꼽히는 곡이 "애원"이라는 곡입니다. 

이승환님은 아주 작은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부터, 터져나오는 발성으로 부르는 소리까지 모든 것을 다 갖춘 분입니다. 작게 흐느끼면서 혹은 작게 속삭이면서 부르는 것부터, 크게 소리지는 발성까지 완벽하게 모두 소화합니다. 소위 말해서 공기 반 소리 반의 소리, 코로 모아서 내는 비음, 때론 음의 끝을 살짝 올리는 발성, 과하지도 모자르지도 않는 애절한 바이브레이션 등등을 매우 복합적으로 구사하기 때문에, 모든 남자 싱어라면 반드시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승환님은, 모든 앨범이 곡의 구성과 완성도 그리고 사운드라는 점에서 단 하나의 흠도 발견하기 어려운 대단한 아티스트입니다. 특히, 애원이라는 이 곡은 이분의 모든 것을 한 곡 안에 담아낸 엄청난 명곡입니다. 들으면서 이분이 어떻게 노래를 부르는지, 악기가 어떻게 흐르면서 어떻게 싱어가 힘을 더해서 곡을 완성해 나가는지를 충분히 듣고 연구해 봐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이 곡은 수천번은 들었지만 여전히 경이로운 곡입니다. 저는 바라기는 한국의 ccm 영역에서 이승환님과 같은 위대한 아티스트가 나오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자신만의 다이나믹"을 보여주는 가수는 박윤하님입니다. 예전에 케이팝 스타에 등장해서 굉장한 화재를 불러 일으켰던 가수입니다. 저는 박윤하님이 한국 여자 가수 중에 거의 탑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아마도 버클리에서 공부하고 있어서 아쉽게도 앨범 활동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들어보시면, 위에 나누었던 벤과는 좀 더 성향이 다른 가수입니다. 폭발적인 소리를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자신만의 감성과 다이나믹"이 분명합니다. 예전에 박윤하 씨가 첫 소절을 부르는 그 순간, 너무 목소리가 감미로워서 박진영님이 눈을 감았던 장면이 기억이 납니다. 한국 가요사에 남을 가장 위대한 곡인 "그대 내 품에"를 완벽하게 불렀습니다. 

약하게 부르는 듯 하지만 분명한 다이나믹이 존재합니다. 후렴에서 꺽어 부르는 밴딩의 기법(ex) 그~대~ 내~ 품~에)이 굉장히 강하게 들어갔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조차 아름답게 들립니다. 이분도 평범함을 완전히 뛰어넘은 분입니다. 박윤하님의 모든 부분이 너무 아름답기 때문에, 비록 동일하게 못한다고 하더라도 여자 보컬은 들으면서 연구해볼 가치가 충분히 가치가 있습니다.

5. 음악의 아름다움은 어디서 오는가?

제가 좋아하는 찬양과 노래들을 예로 들어, 제 나름대로 분석한 내용을 나누면서 싱어 중심으로 음악의 아름다움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분명한 것은 음악은 "하나님으로 부터"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음악의 창조자이시며 주인이십니다. 음악이 시작되고, 리듬과 화음이 조화를 이룰 때에 저는 늘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생각합니다. 찬양의 절정 속에서,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하늘의 감동을 경험합니다. 이 땅에서 듣는 음악도 이렇게 큰 감동을 준다면, 천국은 하물며 어떨까요? 그곳은, 누구도 들어보지 못한 가장 아름다운 찬양으로 넘치고 또 넘치게 가득찬 곳일 것입니다. 

저는 항상 꿈을 꿉니다. 노래를 잘 하고 싶고, 음악을 잘 하고 싶습니다. 제 노래가 시작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저의 호흡이 마이크로 들어가는 바로 그 순간부터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이 있고, 제 음악을 들을 때에 사람들이 마음에 감격을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제 나름대로 듣고 분석하면서 고민해보지만, 음악의 아름다움은 어디서 오는지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음악을 하고 있고 고민을 하는 부분입니다. 다만, 계속 연구하고 계속 연습하고 싶습니다. 좀 더 아름다운 음악으로, 좀 더 아름다운 찬양으로, 그렇게 평생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와 함께하는 분들이라면, 같은 마음으로 고민하면서 계속적으로 함께 발전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

2019년 6월 12일 수요일

나는 오늘도 타임머신을 탄다(부제 : 찬양팀 교육) / THANK YOU - 페퍼톤스


시간이 빠르다라는 말이 어른들만 하시는 말인 줄 알았는데, 
이제 저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어릴 때에는 소중한 사람들이 늘 함께 할 줄 알았는데, 
지금 이순간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변의 사람들에게 한없이 감사합니다.

기분이 굉장히 이상합니다. 
스무살의 어린 시절, 
차갑지만 기분 좋은 SM58 마이크를 잡고 
흥분하던 젊은 나를 가슴에 품고, 
이제는 찬양팀을 섬기고 이끌어가는 리더가 되었습니다. 
막연하고 순수하던 작은 나는 마음에 그대로 살아 있는데, 
또 다른 시간대를 타고서 또 다른 나는, 
이제 책임을 지고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섬기는 팀이 음악적으로 완성도가 올라가서, 
이제 영적인 부분을 조율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을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가장 접근하기 쉬운 가장 짧은 글에서부터 시작합니다. 
Faithlife Study Bible 에 있는 짧은 글입니다. 


Worship as Practice for Now and Eternity

There are many activities we do in this life as Christians that we won’t do in heaven. However, there is one activity we will continue to do in heaven: worship. We will worship God forever. Given this, we can look at worship in this life as a kind of practice for eternity.

We worship God for who He is and because He is worthy. Revelation 4:8 expresses this in the refrain: “Holy, holy, holy, is the Lord God All-Powerful, the one who was and the one who is and the one who is coming!”

Yet we worship God not only for His character, but also for His conduct—not only for His attributes, but also for His actions: “You are worthy, our Lord and God, to receive glory and honor and power; because you have created all things, and because of your will they existed and were created” (Rev 4:11). God is worthy of worship because He did what no one else could ever do: He created all things, and He continues to sustain them.

But more than that, He also redeemed us through His Son, Jesus Christ. Revelation 5:9 expresses this truth: “You are worthy … because you were slaughtered, and bought people for God by your blood.” That’s what God did for us, and He deserves never-ending praise and worship because of it.

Worship involves the physical and emotional aspects of human personhood, which often finds expression though music and song. But fundamentally, worship is an acknowledgment of who God is and what He has done. Incorporating our bodily and emotional responses, worship is also an intelligent expression that involves the mind. Jesus said we should love the Lord our God with all of our heart, soul, mind, and strength (Mark 12:30). This means our worship should fully engage everything within us as we dwell on the greatness of God.

The story of the Bible illustrates that God can be worshipped in all situations. Praise can happen in the darkest of times as well as times of great joy.

God is worthy to be praised! As the psalmist wrote, “Come in, let us worship and bow down; let us kneel before Yahweh, our maker. For he is our God.”

SKIP HEITZIG


Skip Heitzig, “Worship as Practice for Now and Eternity,” in Faithlife Study Bible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12, 2016).

팀원 각자에게 읽고 소감을 적게 하고 
저는 목회자로서 개별적으로 피드백을 줍니다. 
한 팀원이 이렇게 소감을 적어 주셨네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 즉 천국에서는 우리들의 main job이 worship이 아닐까 라는 생각은 해본적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 중에 음악은 본래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언젠가부터 느껴왔다. 그럼 천국에서는 주구장창 찬양만 하느냐 라는 생각에 빠져 살짝 시험들수도 있지만 생각해보면 지금 사는 세상에서도 하나님이 창조한 아름다운 자연만 다 구경하는것만해도 벅찬데 천국은 이루 말할수 없을만큼 아름답고 우리가 누리고 해볼수있는 일들도 상상을 초월할것이라 생각한다. Main job이 바뀔뿐 그외에 것들은 더 충만하고 풍만하게 누릴수 있게 될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예배드리고 찬양드리는것 만큼 즐거운 것이 없는것 같다. 신앙적으로 차츰차츰 성숙하게 되면서 세상에서 주는 즐거움보다는 예배를 통한 즐거움 그리고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즐거움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증거하고 서로 나누는 즐거움이 내게 조금씩 더 크게 다가오고 있는것 같다.
최근에 찬양팀 싱어로서 join하게 되어 난생 처음으로 예배시간에 사람들 앞에서 찬양팀 싱어로서 예배를 드렸다. 너무나 감사하고 소중하고 은혜로운 시간이였다. 난 악기라고는 한개도 못다루고 소질도 없지만 유일하게 할수있는것은 하나님이 주신 천연 악기인 목소리를 가지고 찬양드리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나의 목소리가 예배에 플라스가 되고 예배에 참석하는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은혜를 느낄수 있게 하고 결국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릴수 있게 되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교회안에서의 또하나의 달란트라고 생각한다. 
본문에서 “Worship is an acknowledgement of who God is and what He has done”이라는 부분이 눈에 확하고 들어 왔다. 우리는 왜 그리고 어떠한 목적으로 예배를 드리는가에 대한 핵심 답변인듯 싶다. 마치 십일조를 내는 이유가 내가 소유한 모든것 그리고 내가 받고 누리는 모든것들이 하나님으로 부터 비롯된 것이며 내것 중 10분1을 드리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10분의 9를 허락하신 것이라는 생각이 맞는것 처럼 말이다. 나 자신에게 계속해서 내가 받은 모든것이 하나님것이라는것을 고백하는것이 바로 십일조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마지막으로 나를 미국으로 그리고 이 교회로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여지껏 그리고 앞으로도 주님만날때까지 내 인생의 주인되시는분은 오직 주님뿐이라고 고백한다.
소감을 읽으면서 참 행복합니다.
목회자이지만, 성도들에게 배울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이 짧은 글 안에서,
영원 이라는 시간에 담겨진 찬양이라는 것이,
결코 지루한 것이 아니라는
아주 귀한 통찰을 얻었습니다.
신앙 안에서 하나됨을 느낍니다.
앞으로도 
아주 오랜 시간 찬양하고 싶습니다. 
목소리가 힘이 없어지고 
손에 힘이 없어질 때 까지
함께 좋은 사람들과,
계속 찬양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감사하고 행복,

2014년 10월 19일 일요일

사랑하는 아들 이든에게 - 인생의 기준 / Hard to say I'm sorry - Chicago





사랑하는 아들 이든에게

이든아 아빠야, 지금은 밤이 깊은 시간이란다. 이쁜 이든이도 자고 있는 깊은 시간이고, 아빠는 너에게 글을 쓰고 있단다. 너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또 아빠의 마음과 생각을 정리하면서, 언젠가 너에게 이 글이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글을 쓰고 있단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의 주장이 있단다. 예를 들어서, 이렇게 살면 인생을 성공한다는 그런 주장들이란다. 한번쯤 그런 것들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하지만, 아빠는 너의 인생 가운데, 중요한 기준들을 가지고 있으면 하는 마음이란다. 그리고 그 기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연약한 이들을 아끼는 마음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단다.

사랑하는 이든아, 인생은 단순하지 않단다. 아빠는 그래도 지나치게 가난하지 않은 삶을 살았고, 감사하게도 밥을 굶은 적은 없지만, 세상에는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단다. 그리고 아빠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또 육체적으로 어느 정도는 병들어 있단다. 세상에는 온전한 사람이 없다는 의미란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고통 가운데 사랑가는 사람들이 있고, 우리는 그들을 향한 마음과 관심을 절대로 잃어버려서는 안 된단다.

아빠는 사실 네가 어떤 직업을 가지는 사람이 될지 보다는, 그 직업 가운데 어떤 사람이 되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단다. 앞으로 너는 하나님께서 너에게 주신 재능 가운데, 사회에서 너의 재능을 하나님을 위해서 또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할 것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너의 마음 가장 근본에, 어떤 마음으로 그 일을 하느냐가 훨씬 더 중요한 것임을 네가 꼭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란단다.

이든이가 아프고 연약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고, 진정으로 품어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단다. 그리고 너의 일이, 바로 그것을 위해서 크게 사용될 수 있기를 바란단다. 네가 버는 돈의 크기보다, 너를 통해서 연약한 이들이 유익을 얻는 그것이 훨씬 중요한 것이란다.

너가 크면서 점점 확실히 깨닫겠지만,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돈이 있고 외모가 잘생기고 이쁘고, 또 힘과 능력이 있는 사람이 대우 받는 곳이란다. 아빠는 어느 정도 공부를 했기 때문에, 남이 아빠를 그렇게 무시한 적은 없지만, 그러나 많은 이들이 인격적으로 모욕을 당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살아간단다. 물론 우리 모두가 병들어 있기 때문에 완전을 기대할 수는 없지만, 사실 그것은 잘못된 것이란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처음부터 기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란다.

하나님께서는 이든이도 아빠도,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못생기고 또 가난한 사람이라도, 모두 똑같이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특별한 존재들로 만드셨단다. 그래서 그 사람의 외적인 것과 상관 없이, 모두가 너무나 소중한 사람이란다. 혹시 그 사람이 병들었더라도, 혹시 그 사람이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이라도, 혹시 그 사람이 화상으로 얼굴과 몸이 망가진 사람이라도, 혹시 그 사람이 지능이 너무 낮아서 공부를 못했다 하더라도, 그것과 상관 없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너무나 소중하고 모두가 동일하단다.

아빠는 그런 생각을 했단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현재의 병들고 아픈 모습을 보시고 우리를 버리셨다면, 얼마나 우리는 비참했을까? 우리의 모습을 보고서는 도저히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오실 이유가 없었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고, 이든이와 아빠를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단다. 그래서 아빠는 오늘 참 마음에 하나님께 감사했단다. 아빠가 언젠가 이든이에게 들려주고 싶은 아름다운 찬양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낭비 하셨고,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을 닮은 사람들로, 그분의 자녀로 우리의 신분이 회복되었단다.

사랑하는 이든아, 아빠는 이든이의 마음 가운데, 그런 하나님의 마음이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단다. 네가 어떤 사람이 되든, 어떤 일을 하든, 너의 주변에 아프고 병들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늘 있고, 그런 사람들이 너를 통해서 친절과 사랑을 받고 행복하기를 바란단다. 아빠가 너를 위해서 준비한 이 노래처럼, 모든 사람들은 그 마음 가운데 가장 순수하고 또 아름다운 사랑을 받기를 원하면서 살아간단다. 당연히 그 사랑의 가장 완전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마음 가운데 있는 것이고,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아름답게 자라나는 것이고, 아빠는 그 순수한 사랑의 마음이 아빠의 마음에 또 이든이의 마음에 가득하기를 바란단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삶을 살아갈 때에, 이 세상에서는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큰 기쁨과 행복이, 우리 마음 가운데 넘친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란단다.

사랑하는 이든아, 누군가가 너의 앞에 다가와 그 어떤 말을 하더라도, 그 사람의 단 한가지의 태도만 보면, 그 사람이 정말로 누군가를 알 수 있단다. 아빠는 사실 그것이 너무나 신기했단다. 왜냐하면, 근사한 말로 자기를 꾸미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란다. 네가 아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아빠에게 주신 목회자라는 직업도, 어떻게 보면 그럴 듯한 말로 자신을 꾸미기가 너무 쉽단다. 그러나 이든아 꼭 기억하렴. 그 어떤 사람이, 병들고 아프고 연약한 사람에게 대하는 그 마음과 태도가, 바로 그사람이 가진 꾸밈 없는 진짜 모습이란다. 누군가의 화려한 말에 속지 말고, 그 사람의 태도를 살펴보렴. 그 사람의 연약한 이들을 향한 그의 태도를 살펴 본다면, 그것이야 말로 네가 누군가를 평가하고 판단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단다.

만약 네가, 연약한 이들을 사랑하고 함께 공감하고 도우기를 힘쓰는 사람을 만난다면, 꼭 그 사람의 친구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단다. 네가 먼저 다가가렴, 아니 어쩌면, 서로가 서로의 마음에 끌릴지도 모르겠구나. 그렇게, 참되고 소중하고 아름다운 사람들과의 관계를 만들어 가렴. 세상이 어둡기 때문에, 작은 빛들이 모일 때에 그것이 더 소중한 법이란다. 아빠는 너의 인생이, 화려한 빛이 아니더라도, 세상을 밝히는 꺼지지 않는 작은 빛이 되기를 바란단다.

이든아, 아빠는 아빠 자신도 그리고 이든이도,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늘 더 들어가기를 원한단다. 우리 같은 사람도 사랑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이 더 깊이 깨달아지고 감사해져서, 아빠와 이든이의 삶 가운데, 세상에서 가장 아프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도,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사람처럼 대하고 아끼고 사랑할 수 있는, 하늘로 부터 온 사랑이 넘치기를 진심으로 바란단다.

너무너무 사랑한다, 이든아.
너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의 축복이 넘치기를.

- 너의 아빠가, 10월 19일에 -

2014년 8월 16일 토요일

그늘과 같은 사람 / How Deep Is Your Love (The Bee Gees) - Tommy Emmanuel, John Knowles



  존경하는 박영선 목사님의 설교를 오랜만에 듣다가, 설교 마지막에 인용하시는 시의 한 구절이 마음을 칩니다.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요즘 제 마음 속에 가장 중요한 한가지는, 참된 목회자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시 한편 속에서, 그 답을 발견합니다. 평생을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자녀됨, 성도의 성화를 가지고 치열하게 고민하고 설교했던 박영선 목사님의 마음이, 이 짧은 시 한편으로 보여지는 듯 합니다. 사막처럼 뜨거운 세상, 누군가에게 작은 그늘이 되어 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성도로서 또한 목회자로서 저의 삶은 행복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저의 삶을, 그분의 길로, 선하신 뜻 가운데 인도해주시기를... :)


내가 사랑하는 사람 / 정호승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 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2013년 12월 21일 토요일

그리고 한걸음 더, 세번째 학기를 마치며 / Take a Walk - Massimo Varini


언젠가 제가 쓴 작은 글이 어떤 분에게 격로와 도움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 참 마음이 기뻤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글을 쓰는 이유는, 결국 누군가가 저와 같은 길을 걸어갈 때에 작은 도움이라도 되고자 하기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학이라는 것이 결국 공부를 하는 것이고, 그리고 실제로 유학을 오지 않으면, 도대체 어떤 식으로 공부하는지, 어떤 것을 요구받는지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특별히 칼빈의 기독교 교육학은 그렇게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Th.M. 세번째 학기를 마치고 정리하는 것은, 개인적인 유익 이외에도 또 다른 누군가에게 유용한 작은 지도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이번 학기는, 여러가지로 쉽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칼빈의 교육학 담당인 안식년을 마치고 복귀한 글래스포드 교수님과의 첫 만남, 생각보다 훨씬 많은 과제들, 그리고 마지막 학기의 논문을 위해서 자료 조사를 함께 해야 했습니다.

이번 학기는 오직 하나의 수업만 들었습니다. "Foundations of Educational Ministry" 교회 교육에 관련된 전반적인 모든 내용들을 배우는 코스였습니다. 성경적인, 사회학적인, 교회사적인, 그리고 교육학적인 이론들과 실제의 내용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사실, 학위나 학교 수업 자체가 실력이나 성품을 만들어 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학생이 어떤 자세로, 어떤 목표로 임하느냐 입니다. 교수가 제시하는 목표를 넘어, 자신의 인생 가운데 확고한 목표와 의식을 가지고, 그것을 나침반 삼아서 현재의 과정을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졸업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만약 내가 교육쪽으로 잘 준비된 목회를 꿈꾸고 있다면, 그 목회를 준비하기 위한 과정으로 학위를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면에서 교수님이 제시하는 것보다 좀더 많이, 그리고 제가 의도하는 목회의 최종적인 목표를 기억하면서, 그것을 뒷받침 하기 위한 과정으로써의 수업에 임하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이번 학기 해야 했던 과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곳에서의 평가는 아주 세부적이며 구체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00점 만점이 아니라, 1000점 만점입니다.(다른 전공은 어떠신지 모르겠습니다) 다섯개의 주제를 가지고 페이퍼를 써서 전체 500점 입니다. 그리고 다국적으로 이루어진 팀 안에서, 40분 정도의 교회 교육을 위한 워크샵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5분 정도의 영상 입니다. 이 팀 프로젝트는 전체 350점이고, 그 중에 100점은 교수 평가, 100점은 동료 평가, 그리고 150점은 교수님이 초빙한 다른 전문가가 주는 평가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150점은 파이널 시험으로 구두시험입니다.

원래 교수님은 페이퍼에 대해서는, 3장 정도의 간략한 페이퍼를 원했지만,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더 많은 분량의 페이퍼를 작성했습니다. 각 제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The Purpose of The Christian Life", 궁극적인 기독교인의 목적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고, 왜 하필 사랑인지, 그리고 그 두가지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에 대해서 논증했습니다. 둘째로, "The Nature of Reality - The Transition from Modernism to Postmodernism", 근대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넘어가는 현실을 분석하고, 교육학적인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셋째로, "Wealth and Health, Marks of a Christian", 소위 부흥 신학에서 핵심인 건강과 부라는 것이 과연 그리스도인의 표지로 적절한 것인지에 대해서 살펴보고 반박했습니다. 넷째로, "How Do People Learn? -  The Dialogue, the Social Learning, and the Book Club", 비고츠키의 이론과, 파울로 프레이리의 이론에 기초해, 독서 클럽이 가지는 독특성과 한국의 교육 맥락 안에서 독서 클럽의 장점을 드러내면서 그 안에서 어떤 식으로 배움이 일어나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다섯째로, "Ministry Strategy - As the Response for the Current Korean Society", 한국 사회의 특성들을 간단히 살펴보고 핵심 주제로 잡아, 실제 교회 사역 가운데 어떻게 적용될지 구상해 보았습니다.

팀 프로젝트는, 흑인 윌리, 중국인 존, 한국인 저를 포함한 세명이 함께 팀을 이루어 팀 과제를 했습니다. 윌리는 저보다 스무살이 많으시고, 존은 열다섯살, 그리고 제가 딱 중간이었습니다. 다국적이고, 다양한 나이대의 팀 과제 속에서 사실 쉽지 않았습니다. 멤버 개개인은 매우 훌륭했지만, 역시나 조율이라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중간에는 이대로 팀 과제가 실패할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선하게 역사하심으로 무사히 마쳤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굉장히 성공적이었습니다. 나이와 배경과 국적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모여 만들어내는 기적과 같은 시너지를 보았습니다, 저 혼자서는 생각할 수 없고 경험할 수 없는 내용들까지 만들어지고 완성되는 것이 너무 신기하고 즐거웠습니다. 늘 혼자 일하는데 익숙한 저에게 있어서, 평생동안 기억할 만한 너무나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서른 중반에 다가가는 나이에, 이제서야 팀웍이 중요하다는 말을 조금은 이해하고 경험한 것 같습니다. 팀원들간의 오랜 토론 끝에, 각 나라의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상황 가운데, 왜 좋은 신앙을 가진 기독교인이 성품이 안 좋은가? (Good Faith, Poor Character)가 저희의 주제였습니다. 결국에는 이 문제에 대해서, 기독교 안에서 성품교육이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Intergenerational Ministry라는 측면에서 극복 방안을 살펴보았습니다.

마지막 구두 시험은,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글래스포드는, 목회학박사와 철학박사 학위를 둘다 가지고 있는, 매우 현장 중심주의면서 동시에 철저한 이론적인 뒷받침을 요구하는 사람입니다. 오십다섯이지만, 굉장히 캐쥬얼하고,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고, 직접 청소년 사역을 디렉터로 섬기고 있고, 수업 자체가 굉장히 목회적인 관점을 강조합니다. 교수님 밑에서 한학기동안 너무 놀라고 또 유익했고, 속으로 내가 오십이 넘었을 때 이 사람처럼 된다면 정말 좋겠다고 많이 생각했습니다.

솔직히 편안한 대화 정도를 생각하고 교수님을 방으로 갔는데, 그것은 저의 순진한 기대였습니다. 구두 시험은 일종의 인터뷰였습니다. "너는 지금 큰 교회 교육 담당 목회자이고, 지금 내가 너를 인터뷰를 보는 형식이다. 너는 대답을 하기 위해서 교육학의 기술적인, 그리고 성경적인 용어들을 적절히 사용해야 한다." 시험을 시작하면서 처음에 글래스 포드의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여러가지를 물었습니다. "기독교를 따르는 제자란 무엇인가?", "왜 지금 교회에서 청소년들이 이렇게 떠나고 있는가", "교회는 그들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너가 제시하는 것들은 너무 급격한 것이라 교회가 부담스럽다.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등등의, 한학기 동안 배운 모든 것을 소화해서 대답해야만 하는, 어려운 질문들을 다뤄야 했습니다.

한 학기를 달려오고, 저의 부족한 부분을 많이 보았습니다. 제가 얻은 점수를 떠나, 공부는 할 수록 결국 제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아쉬움이 정말 커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제 잠쉬 쉼을 얻으면서 감사한 것은, 그래도 최선을 향해서 달려왔다는 것입니다. 그 부분에서 너무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시고, 매 순간 필요한 지혜를 주셔서, 제가 의도한 그 이상의 것들을 배웠습니다. 이든이를 키우면서 많이 힘들었을텐데, 아내가 최선을 다해서 제가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덧 이든이의 돌도 지나게 되었습니다. 집안의 모든 것들을 살피고 돕는 아내가 있어서 너무 감사합니다. 그런면에서 제 결과의 절반은 아내의 몫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내에게 너무 감사합니다.

이제 이곳에서의 공부는 마지막 두 과목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계절학기 하나와 논문입니다. 지금까지 잘 해 왔지만, 그러나 늘 마음에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꼭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 그리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부담감, 그리고 혹시라도 실패할 수 있다는 두려움, 그래도 주님께서 인도해주시기를 기도하고 믿음을 가져봅니다. 지금까지 보잘것 없는 저를 인도해주신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저를, 그리고 저희 가정을 붙들어주실 것을 믿고 기대합니다. 유학의 과정이 충분한 준비의 과정이 되기를,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는 과정이 되기를, 저를 위해서,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와 이든이를 위해서 기도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오늘도,
행복 :)


- 저희 조가 프리젠테이션 때 사용했던 Prezi 발표 파일입니다. 팀원들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제가 만들었고, 링크를 클릭하시면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http://prezi.com/alqhyy_yd_sq/?utm_campaign=share&utm_medium=copy&rc=ex0share

- 제가 쓴 페이퍼 중에 두개를 나누고 싶습니다. 하나는 "Wealth and Health, Marks of a Christian" 이고 또 하나는 "The Nature of Reality - The Transition from Modernism to Postmodernism" 입니다. 당연히 완벽한 페이퍼는 아니지만, 작은 나눔이 되기를 바랍니다. 각 링크에서 다운 받으실 수 있습니다.

"Wealth and Health, Marks of a Christian"
https://app.box.com/s/k6x2zqnibtihri3ev7bm

"The Nature of Reality - The Transition from Modernism to Postmodernism"
https://app.box.com/s/y29y2izflhvj47iuzn37


- 이번학기 모든 부분에서 교수님의 평가를 옮겨 적어 봅니다. 읽어보시면 얼마나 상세하게 평가하고 격려하고 또 조언해주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부분이 약점인지, 그리고 어떤 부분을 보완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이야기해 줍니다. 훌륭한 교육 환경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Essay #1: The purpose of the Christian life
Jinbu - Thank you for a thoughtful, engaging and challenging paper. It you engaged the question in a clear manner. Your explored the implications of your answer in a stimulating manner. Well done.


Essay #2: The nature of reality
Jinbu - This is a thoughtful and engaging paper. It clearly articulates the difference between modernism and postmodernism, and the corresponding implications for both our understanding of reality and education.


Essay #3: The marks of a Christian
JIn Bu - this is an interesting and challenging paper. Underlying your discussion is an important question, do we start with what is good for the community or the individual? (What is good for the individual is not always good for the community.) Often we begin with the individual rather than community. If one gives serious consideration to the Old and New Testaments it becomes clear that the primary focus is on community, individuals are see as responsible beings in light of the community. This reorientation requires a significant work of the Spirit and way of being in the world that is truly counter-cultural.


Essay #4: How do people learn
Jinbu - This is an excellent paper. It describes clearly the Korean educational environment, its strengths and weaknesses. Your assessment is thoughtful and respectful. You then do a wonderful job of developing an alternative learning/teaching approach that addresses the weaknesses in a clear manner. As you note, one of the biggest challenges the alternative method faces is it challenges the social norms.
You critically and thoughtfully engage a number of key theorist in your paper.


Educational Foundations Presentation - Outside Reviewer(s)
The presentation was well received. I am sorry the weather deterred others. The following is a summary of Brian's observations. The aim of the presentation did not highlight the need or Christian Education, though you noted it in your introductory comments.
The outcomes for the presentation were not clear. Good content, but the connection between our points was not clear. PPT was clear, good participation by group members.
The introduction was broad, yet thorough. The presentation was heavy on the need for good Christian education, light on the practical steps.


Essay #5: Ministry/Educational Strategy
Jinbu - This is an excellent and challenging paper. It is theologically and practically rich. It paints a vision that is attainable, though challenging.  It draws implicitly on covenant theology and summons the church to live out its theological commitment and the body of Christ metaphor.


Educational Foundations - Instructor Assessment
Thank-you for the workshop provided as pat of the 650 course. The workshop's structure was clear and the parts built nicely on each other. Each presenter did a fine job with her/his portion and responded to questions well. The Prezi complemented the workshop in a helpful manner and reinforced the workshop's primary emphasis, character education.

The focus of the workshop at the very beginning was not as clear as you intended. You assumed a basic understanding of Reformed theology and I a still not sure what you meant by "integritism". I also thought it was a bit odd that you advocated for hands on learning, but did not model it.

Overall, the workshop was clear organized and challenged those present to think in a deeper way about educational ministries as character formation.
Thank-you for the thoughtful workshop.


Oral Final Exam
Jin Bu - Thank-you for the conversation this morning. I appreciate deeply the unique perspective you bring and your insights.

I appreciated your insight on the need for education to be holistic and the challenges presented when it is not. Your desire to create space where dialogue can take place is commendable, it would also be scary for the church. Your illustration using the public repentance revival illustrated many of your ideas well. Your emphasis on the need for change and the role of small changes was good.

There are three areas in which I would encourage you  to consider for further development.
1. You should strive to season your responses with scripture and theological language.
2. Consider how to develop a more concrete description of a faithful Christ-follower.
3. Consider how to strengthen your educational vocabulary.

Overall, you did well and I appreciated your insights.



2013년 4월 7일 일요일

주님 앞에 성역(聖域)은 없습니다/ 특별한 바램- J Rabbit



근래에 있어 한국 교회의 위상을 크게 떨어트린 사건을 보며 생각이 많아 집니다. 사실 가장 먼저 불쌍히 여겨진 분들은, 표절 시비에 걸린 분의 학교 동문들입니다. 어떻게 그분이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는지는 그 전모를 다 알 수는 없지만, 그분과 다르게 정직하게 힘을 다 하여서 자신의 과정을 밟고 있는 분들에게, 그분이 큰 누를 끼쳤다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이제 그분과 학교 동문임을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그리고 자신의 학위가 바로 그 학교에서 얻은 것임을 알게 된다면, 자신의 학위 역시 거짓으로 얻은 것이라 의심 받을 것이 틀림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한동안 그것을 생각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그분에 대한 분노, 혐오, 실망, 좌절를 보고 동감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중요한 것은, 이 문제에 대한 본질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이렇게 이 문제에 대해서 큰 파장을 일으키는 것일까요? 저의 관심사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저의 결론은, 주님 앞에 '성역(聖域)' 을 만든 것, 바로 이것이 문제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죄인입니다.(죄를 감싸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맥락에서 어떻게 목사가 저런 죄를 지을 수 있는가 라는 맥락에서만 비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목사에게 더욱 특별한 도덕적 잣대가 요구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목사가 신이 아니라는 사실도 종종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더욱 큰 문제는, 죄인이 자기 자신을, 그리고 자신의 문제를 '성역화' 시켜버렸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리고 저에게는 이것이 가장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의 직함과 명성이, 성도의 수가, 교회의 규모가, 현재 추진하고 있는 건축이, 누군가의 정체성을 만들어 주는 잣대가 되고, 그것으로 인해서 그 사람에 대해서는 그 어떤 것도 거론 할 수 없는, 그가 죄를 짓든지 말든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그러한 분위기가 바로 가장 큰 문제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계급으로 나뉘어져 버린 사회 속에서, 이러한 사고가 굳어져 버린 듯 합니다. 하나님의 귀한 자녀, 그러나 언제나 회개해야 하는 새로운 피조물에 대한 가장 근본적이고 공통적인 자기 인식이 아니라, 다른 이보다 우월한 지위, 재산, 외모를 가진, 월등한 존재로 인식하는 자기 인식이 교회에 조차 팽배한 듯 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태도는 어디서나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라고 말하지만,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하나님 앞에 평등하다고 말하지만, 자신은 하나님 앞에 특별하게 우월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밝히 드러나야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지 않습니다. 다른 이들은 모르지만, 나 자신만은 이미 누구도, 심지어 '하나님 자신'조차 침범할 수 없는 절대적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인간이 아닌 '괴물' 입니다. 그리고 그 괴물은, 저를 포함한 그 누구라도 될 수 있습니다.

요즘에 자꾸 주성치 영화가 다시 보고 싶어 집니다. 그의 3류 같은(어쩌면 정말 3류 일지도 모르는) 영화가 언제나 행복한 것은, 그는 인생의 아픔을 감추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의 영화 속에서 성역을 가진 인간은 없습니다. 모든 등장 인물들이 인생의 아픔과 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영화 속에서 감추지 않고, '웃음' 이라는 코드로 드러날 때에, 해결의 실마리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때서야 영화를 보는 이의 마음 속에도 기쁨이 찾아옵니다.

성경이 인간의 죄를 감추지 않는 것을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 가장 위대한 인물 들 조차,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드러내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 앞에 자신을 감추지 않고, 설령 자신이 인간들 속에서 가장 뛰어난 존재라 할 지라도, 하나님 앞에 영원히 그분을 경배해야할 피조물임을 인정하고, 회개하고 돌이키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실로 하나님의 역사, 성령의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든지 자기 자신을 성역화 시킬 만한 뛰어난 인물들도,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래서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인 듯 합니다.

결국 오늘도, 저를 돌이킵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성역화 시키고, 다른 이는 몰라도 나는 마치 그런 사람이 아닌 것처럼 행동한, 하나님 앞에서 조차 당당하기를 서슴치 않는 저를 회개합니다. 그리고 그분 역시, 자신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벗어난 성역이라는 어리석은 착각을 하루 빨리 벗어나, 하나님 앞에 엎드리기를 원합니다. 모든 죄인인 인간이 의지할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 밖에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그분이 깊게 받아들이기를 원합니다. 그때서야 추락한 한국 교회의 위상이, 그리고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이름이, 회복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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