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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 9일 월요일

The Healer / 민수기 5장 1-4절 주일 설교 (준비 과정)


* "설교 본문"을 어떻게 정했는가?

이번 설교는, 제가 정했다기 보다는 정해진 본문입니다. 함께 섬기는 부목사님과 주일 설교를 돌아가면서 해야 하는 상황인데, "매일 성경" 본문으로 하는 것으로 정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정해진 본문이 민수기였습니다. 거기다가 제가 민수기 본문의 첫 설교자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너무 어려운 처지가 되었습니다.

민수기 본문은 정말 까다롭습니다. 아마 하지 않을 수 있다면, 굳이 정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스토리가 등장하거나 차라리 교리적인 본문이, 준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훨씬 낫습니다. 하지만, 단순한 명령과 숫자, 그리고 지금 시대와 정말 동떨어진 것 처럼 느껴지는 정결 예법이 설교 본문이 된다면, 막막한 것이 사실입니다. 

"빠르게 해결하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저 본문을 계속 묵상하고,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또 그것을 성도님들에게 최대한 잘 들리고 이해되도록 구성하는 방법 뿐입니다. 이미 설교 스케쥴이 나왔기 때문에, 설교 본문을 처음 읽고 준비한 것부터 따진다면, 대략 두주 반 정도 준비한 설교입니다.

* "설교의 전체 구조"는 어떠했는가?

이번 본문을 묵상하면서, 두가지 큰 틀을 잡았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거룩을 요구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과 연결해서, "여호와 자신이 그 진영 안에 있기 때문에 거룩을 요구하셨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그것을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이고 공동체 안에서 실천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유출병이 무엇인지, 그리고 악성 피부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명하는데에만 십분 이상을 쓸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지루한 전개를 사용하면, 성도님들이 졸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그 부분은 아주 간결하게 짚고 넘어가면서, 오히려 "좀 더 도전적인 구조"를 사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요구를 하실 수 있는 분이신가? 그리고 과연 그러한 요구가 합당한가? 에 대한 도전적인 구조입니다. 

이러한 구조는 불신자를 염두에 둔 구조입니다. 팀켈러 목사님이 자주 사용하는 구조입니다. 그리고 신자이지만 믿음이 연약한 이들에게 도전을 줄 수 있는 구조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일종의 답변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설명"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해답으로서 그리스도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 "설교의 서두"를 어떻게 열 것인가?

지금까지 들어본 대략 스무편의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에서는, 설교 서두에 "설교 전체 구조를 제시"합니다. 설교가 전체 구성이 세가지 대지라면, 세가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다고 미리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저 같은 경우는, 그것이 썩 좋은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설교에 대한 신비감 혹은 기대감"을 떨어트리기 때문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아직 제 수준에서는 그렇게 서두에 이야기하고서 설교 본론에 들어가서 기대감을 유지하는 것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그런 방식을 감히 시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번 설교의 경우에는, 민수기로 처음 여는 설교이기 때문에, 적어도 민수기가 무엇인가를 설명은 반드시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부터 출애굽기에 이어지는 스토리를 아주 간략하게 제시하면서 설교를 열었습니다. 이러한 접근이 좋은 것은,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적어도 스토리를 이해하면서 내용을 따라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책"은 어떻게 설교에 인용했는가? 

본격적으로 신앙 혹은 신학 서적을 읽은 것이 스무살 부터입니다. 그리고 이십년이 지난 지금에와서야, 지금까지 읽고 고민한 모든 것이 꽃을 피운다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책들을 함께 읽기 시작한 것이 오년 정도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모든 것들이, 유기적으로 조금씩 연결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설교문을 쓰면서 큰 막힘이 적고, 생각을 풀어내도 신학인 틀에서 큰 오류가 없어 보입니다. 저에게 이런 날이 올 줄 감히 생각하지 못했고, 누구도 이런 결과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지 않았습니다. 저처럼 이해력이 느리고 속도가 느린 사람도, 결국 꽃을 피울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한편의 설교 가운데, 여섯권의 책을 인용했습니다. 굳이 "꼭 이만큼 인용해야겠다" 라고 생각한 것은 전혀 아닙니다. "이번 설교는 이 정도 인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껴서 인용한 것입니다. 세권 정도는 평소에 좋아서 기억하던 부분이고, 기독교 강요와 나를 따르라의 한 부분은 설교를 위해서 의도적으로 찾은 것입니다. 

아래에서 보시는 것처럼, 심지어 "책의 표지에 저자와 책 이름"을 넣고, 이후에 이어서 "책의 내용"을 본당 화면에 띄우면서 사용했습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 설교자들 중에 누구도 이렇게까지 한 적은 없는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굉장히 조심스러웠습니다. 한편으로는 매우 도전적이고 또 한편으로는 매우 따분하게 느끼실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책을 인용함에 있어서 "그 지루함"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이번에 설교를 준비하면서 새롭게 느낀 것은, 설교자가 책을 인용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어떤 목적으로, 그리고 또 어떤 깊이와 감정으로 그 책을 인용하는가"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인용한 두 권은, 탁월한 책들이지만 모두 기독교와 상관 없는 secular한 책들입니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결론적으로 성도님들의 마음에 전혀 부담이 없어 보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secular 한 책을 인용했지만, 오히려 제가 의도한 것 이상으로 "전체 말씀"을 진중하게 받아들인 분들이 있어서 적잖이 놀랐습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제가 적절하게 "그 책에 대해서 평가"를 한 것이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책의 논리와 비교하면서 "성경의 탁월함을 논증"했기 때문에, 더 성도님들의 마음이 오히려 편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에 인용한 모든 내용들은, 단순히 설교의 논리를 이끌어가기 위한 내용이 아니라, "저의 마음이 완전히 담긴 내용들"이었습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 책들을 인용하면서, 제가 정말 존경하는 분들의 "명예"를 소중히 여기고 싶었습니다. 

탁월한 저자들의 "모든 신학과 삶을 걸고 기록한 책"들이, 조금이라도 초라하게 인용되는 것이 너무나 싫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읽고 느꼈던 마음의 기쁨과 감동"을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제 온 마음을 담아서 읽고 인용하고, 그것이 성도님들의 마음에 남기고 싶었습니다. 

칼빈을 인용한 부분은,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대한 기독교 강요에 나오는 칼빈의 해설입니다. 읽으면서 제 마음에도 너무 마음에 감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설교 때에도, 마치 제가 칼빈 자신이 된 것 처럼 최대한 감정을 넣어서 읽었습니다. 



본회퍼는, "말씀에 대한 진실함과 자신의 신학"을 "자신의 생명"으로 증명한 사람입니다. 나를 따르라를 읽으면서, 그것을 너무나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마음이 숙연해지는 것을 저절로 느낍니다. 그래서 저 역시, "정말 진지한 태도와 마음"으로 인용하였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인용한 마이클 호튼의 언약 신학의 인용은, 수도 없이 줄을 치면서 그 책을 읽고 "제 마음에 가장 깊이 남은 내용"입니다. 호튼의 신학 그리고 개혁주의의 핵심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설교의 마무리에 책을 인용하는 것은 왠만하면 하지 않았겠지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사용한 것입니다.



* 설교에 대한 "반응"들

설교를 마치고 예배 후에 인사를 하는데, 성도님들의 표정이 참 다양했습니다. 많이 당황하신 분들도 계셨고, 제 손을 꼭 붙잡고 너무 좋았다고 말씀하신 분들도 계셨습니다. 너무 감정적이지 않고 신학적인 깊이가 있어서 그런 부분에서 좋았다고 하신 분도 계셨습니다. 어려웠지만 왠지 모르게 좋았다는 분도 계셨고, 위로가 되었다고 아내를 통해서 연락 주신 분도 계십니다. 

또 어떤 분들은 설교의 주제를 정확하게 이해한 분도 계시고, 구조나 책 인용이 상당히 파격적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설교"를 들은 것 같았다고 말씀하신 분들도 계셨습니다. "이제는 정말 어떻게 살아야할지 알겠다" 라고 하신 분도 계셨습니다. 동일한 설교를 듣고, 성령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다양하게 역사하신다고 느꼈습니다. 

물론 어떤 분들은 너무 지루했다고 말씀하신 분도 계셨습니다. 이십분 정도면 딱 좋겠는데 너무 길었다고 이야기하시고, 또 너무 고차원적인 이야기라서 힘들었다는 분도 계셨습니다. 특히 칠십이 넘으신 어르신들이 그랬다고 반응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런데 또 흥미로운 것은, 육십대 어르신 한 분 중에는 "정말 대단하다!"라고 말씀해 주신 분도 계십니다. 제가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그렇게 마음을 느끼셨다는 것이 설교자로서 행복했습니다. 

제가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느낀 것이 정확하게 그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대단하다!, 겨우 40분이라는 시간에 이렇게 아름다운 내용을 이렇게 아름다운 구성으로 이렇게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전하다니!" 존경하는 분의 수준에 아주 작게나마 다가갔다는 것이 기뻤습니다.

* "설교의 매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설교자로서 항상 제가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해야 매력적인 설교가 되는가?" 입니다. 이 질문은, 아마 평생의 고민이 될 것입니다. 물론 기본적인 전략들은 모든 설교자들이 다 아는 것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인 설교는 "무엇인가"가 확실히 다릅니다. 그리고 저는 그 매력 포인트는 결국 "설교자의 어떤 본능적인 감각"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어떻게 일할 것인가?"를 에전에 읽고 내용을 마음에 품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실제로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는 본능에 가깝습니다. 성경을 묵상하다가 제 마음 속에서 거의 저절로 떠오른 것에 가깝습니다. 이 부분이 저는 항상 흥미롭습니다. 

저는 재미있는 웹툰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요즘의 웹툰은, "엄청난 내용 전개와 구성력"을 가집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넘나들고, 등장 인물들의 심리 안에서 일어나는 내용을 치밀하게 묘사하고 이 모든 것을 탁월하게 연결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을까?" 감동하면서 볼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팀켈러 목사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를 들으면 들을 수록 매력적입니다. 지루할만 하면 예가 등장하는데, 그 예들은 반드시 논리적으로 들어가야 하는 자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신학적인 자료들 그리고 심지어 기독교에 대적하는 사람들까지 인용하지만 전혀 거부감이 없습니다. 

저는 이 "탁월함"들을 "계속적으로 습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이번주에 있을 좋은 설교를 만들고 싶어 반짝 무엇인가 대단한 기술을 동원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설교자가 "꾸준하게 무엇을 하는가"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고 "가장 탁월한 것"을 "자신의 오감과 영혼"으로 "지속적으로 경험"해 보아야 합니다. 저에게 있어서는 "성경 통독과 지속적인 묵상, 꾸준한 독서와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에 대한 연구"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꾸준하게 고민할 때에, 결국 설교에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 어느 정도로 원고를 "연습"해야 할까?

제가 좋아하는 탑건 메버릭에는, 상징적인 숫자인 "10"이 등장합니다. 영화 초반에서 메버릭은 "마하 10"이라는 벽을 깨기 위해서 도전하고 성공합니다. 그리고 영화 중반을 넘어 주어지는 미션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10G"라는 중력을 이겨내야 합니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10이라는 숫자를 통해서, 인간이 이겨내야할 가장 완전한 목표와, 그것을 이뤄내는 메버릭의 위대함을 보여줍니다. 

설교 원고는 목요일 정도에 90퍼센트 정도 완성이 되었습니다. "실제 설교의 삼일 전" 입니다. 원고를 쓰면서 이미 연습을 하지만, 제대로 연습하는 것이 항상 중요합니다.

원고가 완성된 후에 대략 세어보니, 방에서 일곱번 정도 소리내어서 모션과 함께 연습하고, 실제 본당 강대상에서 세번 정도 연습하였습니다. 도합 열 번입니다. 의식한 것은 아니지만, 세어보니까 그렇더군요. 지금 교회에서 실제 강대상에서 설교를 세번이나 연습한 것은 처음입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는 주일에 도합 세번의 설교를 해야합니다. 두번째가 끝이 나고 세번째 예배에 들어갔을 때에는 이미 몸의 힘이 거의 다 빠진 상태였습니다. 실제로 정신이 거의 흐려진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설교자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버거웠습니다.

그런데 세번째 설교 후반부 중에 참 흥미로운 경험을 하였습니다. "거의 연습한 대로" 한 것입니다. 제 정신은 지쳐서 더 이상 설교의 내용을 따라갈 수 없지만, 여러번 연습한 것이 저의 몸과 근육에 남아서 앞서간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지나칠 정도로의 실전 연습"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이번에 더욱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 "무슨 자료"를 설교에 참조하였는가? 

저는 항상 동일한 패턴입니다. 개역 성경 묵상, NET BIBLE 번역본, 추가 번역본과 원어 참조, 스터디 바이블, 주석, 사전 등의 순서입니다. 그리고 조금 저속한 표현일 수는 있겠으나, "닥치는대로 다 찾아보는 것" 이 저의 전략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우아한 설교 준비를 상상하는 듯 합니다. 그런데 적어도 저에게 있어서 설교는, 혼신의 힘을 다하는 전투에 가깝습니다. 책을 읽고 고민한다는 점에서는 우아해 보일 수 있겠지만, 그 과정은 정말 처절합니다. 

아래의 스터디 바이블들은, 모두 탁월한 내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이해를 보여주고 설교의 큰 흐름을 결정해 주었습니다. 충분히 읽고 고민하면서 설교 내용에 반영한 것들입니다. 

5:3 without the camp. Outside the boundary of the camp (v. 4). defile. To render unclean. whereof I dwell. God’s presence was the reason for safeguarding the purity of the camp. Approaching God requires clean hands and pure hearts (Ps. 24:3–4).

Joel R. Beeke, Michael P. V. Barrett, and Gerald M. Bilkes, eds., The Reformation Heritage KJV Study Bible (Grand Rapids, MI: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14), 203.

1. The expulsion of people from Israel’s camp for ceremonial uncleanness reminds us that “the ungodly shall not stand in the judgment, nor sinners in the congregation of the righteous” (Ps. 1:5). What a solemn matter! Have you been to Jesus for the cleansing from sin found only in His blood? If we are in Christ then we know that we have been made fit to approach the Lord and we can enjoy fellowship with Him.

Joel R. Beeke, Michael P. V. Barrett, and Gerald M. Bilkes, eds., The Reformation Heritage KJV Study Bible (Grand Rapids, MI: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14), 204.

5:2 DISEASE … DISCHARGE. Strict instructions were given to the people in Leviticus 13–15 about diagnosing, treating, and dealing with conditions that God defined as “unclean.” While this probably resulted in many saved lives, it was also God’s way of teaching them the foundations of holiness.

Lyman Coleman, ed., Life Connections Study Bible (Nashville, TN: Holman Bibles, 2019), 203.

Even this process, however, is a means of grace from God designed to purify his people and to encourage all (including the disciplined individual) to cling more tightly to Christ since our clean state is found in him alone. We enter the new Jerusalem not having purified ourselves by our efforts but having been washed in the blood of the Lamb (Rev. 1:5), so that our names are written in his book of life (Rev. 21:27).

L. Michael Morales, “Numbers,” in Gospel Transformation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ed. Bryan Chapell and Dane Ortlund (Wheaton, IL: Crossway, 2013), 176.

거룩을 정의하는데 있어서는, 기본적으로는 LEXHAM 사전을 다 읽어 보았지만, 결국 깔끔하게 몇 단어로 정리한 것은, 넷 바이블의 각주를 참조하였습니다. 인용한 시편 24편 3절에 등장하는 거룩에서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로고스의 원어 검색으로, 거룩이라는 단어가 처음 사용된 출애굽기 3장 5절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그곳의 각주입니다. 

sn The word קֹדֶשׁ (qodesh, “holy”) indicates “set apart, distinct, unique.” What made a mountain or other place holy was the fact that God chose that place to reveal himself or to reside among his people. Because God was in this place, the ground was different—it was holy.

sn (study note)—Includes comments about historical or cultural background, explanation of obscure phrases or brief discussions of context, discussions of the theological point made by the biblical author, cross references and references to Old Testament quotations or allusions in the New Testament, and other information helpful to the modern reader.

Biblical Studies Press, The NET Bible, Second Edition. (Denmark: Thomas Nelson, 2019).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공동체가 실제로 행동한 것이 중요했다"는 것은, 이미 제 개인 묵상으로도 끌어낸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John Crurrid의 주석을 통해서 좀 더 확신있게 적용할 수 있었습니다. 

What is at stake is not merely the people in the camp, but the very sanctuary and dwelling place of God. Nothing unclean is to come near that which sits in the centre of the camp, but it will be thrust outside the camp. The final verse of the passage drives home the importance of the action: three times the text says that Israel did as God had commanded them. This triple emphasis is further heightened by the exact repetition at the beginning and end of the verse: it literally reads, ‘Thus did the sons of Israel … thus did the sons of Israel.’

John D. Currid, A Study Commentary on Numbers, EP Study Commentary (Darlington, England; Carlisle, PA: Evangelical Press, 2009), 87–88.

* 설교자의 "영광"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설교를 잘하는 것" 자체가 저의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시편 84편을 묵상하다가, 제가 설교를 아무리 잘 해도, "하나님의 영광의 지극히 일부분"을 드러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제 인생 최고의 설교 그리고 모든 성도님들이 감동과 은혜를 받은 설교를 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의 일억분의 일도 나타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깨달음이, 오히려 제 마음을 참 편안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감히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감격했습니다. 

저와 같이 초라하고 부족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영광이 드러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것 자체가 이미 구원의 기적이라고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저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의 정말 작은 부분"이라도 드러날 수 있다면, 제 인생에 있어서 이것보다 더 행복한 일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 인생의 최고의 설교"가 되리라고 기대하고 또 어느 정도 예상감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 예상대로 참 좋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설교가 끝이나자 제 마음에는, 제가 잘하고 못하고는 그렇게 마음에 둘 필요가 없다고 느꼈습니다. 

정작 설교를 마치니 정말 좋았던 것은, "성도님들과 함께 은혜를 나눌 수 있었다는 사실" 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서 사용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성도님들의 섬기는 자리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야 말로, "설교자의 가장 큰 영광"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이유이고, 또 앞으로 저의 설교가 더욱 기대가 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그리고 "앞으로 설교를 준비하며 살아갈 과정"이며, "제가 해왔던 일들"을 계속 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다짐했습니다. 

처음 신학교 시절 설교를 배울 때 부터, 마인드맵으로 full text로 원고를 모두 쓰고, 그것이 연습이 되었습니다. 꾸준하게 독서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힘들고 외로울 때에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힘들었지만, 제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평가하고 발전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익히고 배우는 것이 이번 설교에 정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겨우 몇개월의 공부와 훈련과 연습을 통해서, 저는 설교자로서 또 다른 차원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저는 저의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다른 사람의 길을 가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소명과, 그 확신"을 따라서 걸어갈 것입니다. 그렇게 결심 할 수 있어서 행복하고, 또 오늘 하루를 그렇게 걸어갈 수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 "설교문전체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11/blog-post_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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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19일 금요일

복종이 무엇인지는 오직 복종을 통해서 배운다 / 레위기 26장 27-39절 설교

 

모든 성도는 자신의 삶 속에서 변화를 꿈꿀 것입니다. 변화는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요? 사실 성도의 변화의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거룩한 소원을 심으시고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십니다. 우리의 변화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며,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맡겨 드려야 합니다.

성도의 변화라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끌어가시고 완성하시는 것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가 자발적으로 걸어가야만 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우리 자신을 드려야하고, 단순히 생각만 하고 있는 것에서 그치지 말고 실제로 행동으로 나를 바꾸어 나가야 합니다. 책상 앞에서 왜 나는변하지 않지라고 고민하는 것만으로는 삶이 바뀌지 않습니다. 내가 고민하고 힘들어하는 바로 그부분을 실제의 행동으로 공략해야 합니다.

다양한 책들을 동시에 읽어나가는 것은 굉장히 흥미로운 일이며 동시에 위험한 것입니다. 세상에 완전한 책은 오직 성경 밖에 없기 때문에 다른 모든 책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책들을인용한다는 것은 그만큼 어떤 내용을 평가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고 더 많은 수고가 필요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 바로 써 먹는 심리학의 중요한 이론을 제공하는 제임스 윌리엄은, 철저한 무신론자로 보입니다. 그리고 극단적인 경험주의자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참된 진리와 철저하게 멀어져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 심리학 실험들을 통해서 발견한 그의 통찰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단순히 생각을 바꾸는 것이 행동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바뀌어진 사람처럼 행동 할 때에 그 사람의 생각과 마음이 오히려 바꾸어진다는 것입니다. 충분히 성도들에게 적용해볼만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지적인 만족에만 머무르는 수동적인 신앙을 바꾸어줄 중요한 도전입니다.


그리고 본회퍼 목사님의 나를 따르라는 너무 탁월해서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지금까지 그분을 그저 순교자로만 이해했던 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지적으로 탁월한 분이, 자신의 삶을 실제로 그 진리를 위해서 살아내고야 말았다는 사실 앞에서 마음이 숙연해 집니다.



"복종이 무엇인지는 오직 복종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다"라는 본회퍼 목사님의 외침에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습니다. 복종에 대한 고민이 복종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오히려 철저한 복종을 먼저 요구함으로써 결국에는 참된 성도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음을 역설적으로 말씀합니다

결론적으로 제임스 윌리엄은 약간은 수준 낮은 인간의 변화를 추구합니다. 충분히 그 방법은 실용적이며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겠습니다. 이 책을 읽고 저는 더 용기 있는 사람인 것 처럼, 그리고 더 차분한 사람인 것 처럼, 더 꿈을 가진 사람인 것 처럼 행동하고 제 마음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성도의 성숙은,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심리학은 자신의 행복과 성공이 궁극적인목표이며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다 사라질 것들입니다. 그러나 오직 성령님만이, 자신의 생명조차 그리스도를 위하여 기꺼이 드리는 참된 복종으로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오직 주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복종을 통해서 복종이 무엇인가를 배웁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저 이 길이야 말로, 성도인 제가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이라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 레위기 26 27-39절 설교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레위기 26장의 말씀의 맥락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계명을 지킬 때와 지키지 못할 때에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어떻게 상을 받고 벌을 받는지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시는 맥락입니다.

그리고 이미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앞 부분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하지 않는 백성의 모습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들이 망하게 될 것이라고 충분히 경고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27절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7 너희가 이같이 될지라도 내게청종하지 아니하고 내게 대항할진대 28 내가 진노로 너희에게 대항하되 너희의 죄로 말미암아 칠 배나 더 징벌하리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이 무엇인가? 27절 앞 부분에 “너희가 이같이 될지라도 내게 청종하지 아니하고” 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의 모습을 묘사하실 때에 단순히 너희가 나에게 청종하지 않는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계속된 문맥 속에서 드러나는 것 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죄악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그 길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반복되는 완고함으로 인하여서 문제가 계속 심각해 지고 있습니다. 이쯤하면 돌이켜야 하는데 돌이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하여서 또 다시 하나님의 징계가 내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그치지 않고 계속되는 그 완고함의 결과는 무엇인가? 사실 이어지는 말씀이 너무 끔찍한 내용이기 때문에 별로 언급하고 싶지 않을 정도입니다. 29절에 너희가 자녀들의 살을 먹게 될 것이다 30절에 하나님께서 백성의 시체를 황폐해진 우상 위에 던지실 것이다, 그리고 31절에서는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1  너희의 향기로운 냄새를 내가 흠향하지 아니하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말씀의 이 장면이 눈 앞에 보이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의 마음은 전혀 돌이키지 않은 채로 하나님께여전히 대항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종교적인 행위를 동원해서 하나님을 진정시키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제사라도 성대하게 한번 치뤄서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절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순종을 제사보다 낫다고 말씀하시며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반복적인 완고한 태도로 인하여서 추가로 어떤 결과가 일어나는가? 36절과 37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6 너희 남은 자에게는 그원수들의 땅에서 내가 그들의 마음을 약하게 하리니 그들은 바람에 불린 잎사귀 소리에도 놀라 도망하기를 칼을 피하여 도망하듯 할 것이요 쫓는 자가없어도 엎드러질 것이라 37 그들은 쫓는 자가 없어도 칼 앞에 있음 같이 서로 짓밟혀 넘어지리니 너희가 원수들을 맞설 힘이 없을 것이요” 라고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죄의 결과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단순히 자신의 삶 가운데 닥쳐오는 외부적인 어려움 혹은 징계정도로 이해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정말 더 큰 문제는 무엇인가? 죄를 짓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의 그 깊은 마음과 영혼 속에 더 큰 문제가 생기며심각한 병이 든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표현이 얼마나 생생한지 깜짝 놀랄 정도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람에 날리는 잎사귀라는 것이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이런 잎사귀에 놀라는 일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런데 죄라는 것이 얼마니 치명적이고 무서운 것인지 멀쩡한 사람의 마음과 영혼을 한 없이 연약하고 또 연약하게 만들어서 잎사귀가 날리기만 해도사람이 놀라서 도망을 치고 심지어 쫓는 자가 없어도 두려움과 괴로움 속에서 전전긍긍하게 되는 그리고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위협 앞에서도 완전히마음이 무너져버리는 비참한 형국이 된다는 것을 경고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추가적인 징계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38절에 보면 너희가 여러 민족 중에서 망할 것인데 이어서 39절에주목해서 보아야 하는 부분은 마지막 부분입니다.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쇠잔하며 그 조상의 죄로 말미암아 그 조상 같이 쇠잔하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쇠잔하다 라는 표현은 다른 구약의 본문에서는 "썩는다" 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비참한 모습인가? 물론 이 말씀은 비유적인 표현이지만 마치 요즘 시대에 유행하는 좀비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여기 저기에서 픽픽 쓰러지고 점점썩어져 사라지는 것입니다, 너무나 허망한 모습으로 최후를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 이유를 다시 한번 분명히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 자신을 포함해서 우리 주변의사람들이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지 않고 남탓을 할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망하게 될 결과에 대해서 분명하게보여주시면서 이것은 다른 누구의 잘못이나 심지어 하나님의 탓이 아니라 그들의 죄가 그리고 조상들의 죄가 그들을 스스로 망하게 한다는 것을 분명히말씀하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성도님들께서는 오늘 말씀을 보시면서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저는 굉장히 마음이 무겁다고 느꼈습니다. 말씀을 그대로 읽는 것 조차 힘들다고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이 말씀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며 또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는 것인가를 다시 한번 깊이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가장 가슴 아픈 장면이 29절의 말씀입니다. 29 너희가 아들의 살을 먹을 것이요 딸의 살을 먹을 것이며” 라고 말씀하십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렇게 가슴 아픈 장면이 실제로 역사 가운데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열왕기하 6장에 보면 북이스라엘의 아홉번째 왕 여호람 왕이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람 군대가 사마리아로 쳐들어왔을 때에 성에 먹을 것이 없어서 이런 참상이 그 안에서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예레미야애가 4 10절 말씀에도 보면 예루살렘 성이 적군에 의해서 포위되었을 때에 이런 참상이 일어났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인 레위기 말씀이 주어진 것은 대략 BC 1400년 경에 주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참상이 일어난여호람 왕의 사건은 대략 BC 850년 정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오늘 레위기 말씀을 통해서 과연 무엇을 하시고 계시는가?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에게 닥쳐올 미래를 보시면서 무려 600년 전에 그들에게 미리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이들은 이 경고를 무시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이렇게 끔찍한 일이 실제로 어떻게 일어나냐고 반문하면서 당장 자신의 눈 앞에 일어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이 경고를 받기를 간절히 원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죄로 인하여 스스로 망하기 않기를바라시는 것이고 인간의 시간의 개념을 훌쩍 뛰어 넘어서 무려 600년 전에 미리 경고하시면서 그들을 도우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의 말씀은 참으로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참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다시 한번 새롭게 깨닫게 되는 은혜의 말씀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을 보면서 또 하나 깊이 묵상하게 된 것은 "지속적으로 대항하는 죄인의 태도”입니다. 27절에서 "대항할진대" 라는 히브리어 원어는"적개심을 가지고 걷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오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다루시는 부분이라는 것이 단순히 한 인간의혹은 공동체의 심리적인 부분만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주목해야합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단순히 마음으로 하나님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드러나는 그들의 살아가는 그 삶의 모습과 행동과 태도가 여호와 하나님을 미워하며 반항하는 모습으로 실제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상 오늘의 말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아 죄라는 것이 이렇게 비참한 것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진지하게 받아들여야합니다. 하나님께서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우리가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죄가 필연적으로 가지고 오는 그 끔찍함만 쳐다 볼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결과를 만들어낼 수도 있는 우리의 실제의 삶을 돌이켜 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 삶의 걸어가는 방향을 실제로 바꾸어서 새로운 한걸음을 시작하는 것 바로 그것이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최근에 아주 흥미롭게 보고 있는 책이 "지금 바로 써먹는 심리학" 이라는 책입니다. 저자인 리처드 와이즈먼은 영국에서 심리학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제목만 보면 굉장히 가벼운 책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데 읽기는 어렵지 않지만 내용은 굉장히 탁월한 책입니다. 이 책은 "인간이 어떻게 변화할 수있는가"를 다룬 책입니다. 보통 우리는 사람의 변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의 어떤 행동을 바꾸기 위해서는 생각을 먼저 바꾸어야 한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으로 자신의 삶을 이해한다면 충분히 생각이 바뀔 때까지 그저 공부하면서 내가 변화 되기를 수동적으로 기다리면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심리학자인 제임스 윌리엄의 "가정 이론"을 바탕으로 인간의 변화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변화는 마치 내가 되고 싶은그런 사람인 것 처럼 내가 먼저 행동을 시작할 때에 그 사람의 변화가 시작된다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우리가 보통 가지고 있는 생각과 완전히 반대 라는 것입니다. 생각하기 때문에 행동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하기 때문에 그러한 생각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자는 이 주장을 입증하기위해서 수 많은 실험들을 그 증거로 들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에 이 사람의 주장은 치명적인 오류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정말 좋았던 한가지는 인간의 행동과 정신의 연결된 관계를 매우강조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저자는 우리가 마치 어떤 사람인 것 처럼 행동하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의 마음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과 육체는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비슷한 맥락에서 제가 요즘에 아주 감동 깊게 읽고 있는 또 다른 책은, 본회퍼 목사님의 나를 따르라 라는 책입니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까지 탁월한책은 거의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제가 읽으면서 좋았던 부분은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이것 저것 질문만 하고 있었던 율법 교사를 예로 들면서 본회퍼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던 부분입니다. 예수님을 바로 앞에 있던 율법 교사는 사실상 순종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저 예수님을 시험하고자하는 마음으로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는가? 내 이웃이 누구인가? 이렇게 예수님께 질문만 던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본회퍼 목사님은 바로 그런 율법 교사와 같은 사람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십니다. “매 순간, 모든 상황에서 행동과 복종을 요구받는 자는 나다 다른 사람의 자질을 따져 물을 시간이 남아 있지 않다 내가 행동하고 내가 복종하면서, 다른 사람의 이웃이 되어야 한다 혹여 그대가 깜짝 놀라 “그러면 행동하는 법을 미리 알고 숙고해야 하지 않나요? 라며 다시 한 번 묻는다면, 다음과 같은 교훈만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을 알고 숙고하려면 언제나 행동하고, 그대 자신을 언제나 요구받는 자로 여겨야 한다.” 복종이 무엇인지는 복종하면서 배우는 것이지 질문을 통해 배우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굉장히 놀라운 부분입니다. 완전하게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마치 일반 심리학에서 주장할 때에 행동이 먼저 앞서 나가야만 그 사람의 마음이 변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 처럼, 본 회퍼 목사님의 신앙에 대한 이해는 내가 말씀을 단순히 깨달음을 얻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것을 언제나 행하기로 요구 받는 자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복종이 무엇인지를 오직 복종을 통해서 배우는 것임을 분명히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얻고 무엇을 경험하셨습니까? 또 어떤 부분을 가장 마음 깊이두셨습니까? 간절히 바라기는 여호와께서 경고하신 죄에 대한 끔찍한 결과를 우리가 심각하게 여기며 경외함으로 이 말씀을 함께 받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 가운데 혹시라도 여호와를 대적하며 불신앙으로 걸어가는 부분이 지금 있다면, 그것을 실제로 돌이켜서 복종하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저죄의 무서움에 대해서 생각만 하고 죄의 결과에 대한 지적인 분석이나 질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불순종과 반역을 끊어내고 순종하라 명하시는하나님의 엄위하신 명령 앞에서 오직 믿음의 복종으로 반응하시는 모든 사랑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며 돌보시며 인도하시며 경고하시며 주님의 자녀된 삶을 붙들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앞에서 순종의 삶을 살아가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삶의 방향을 실제로 돌이키는 제가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오늘 이 하루가 주님께 진심으로 복종하며 나아가는 진실한 하루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이렇게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문" 전체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11/blog-post_4.html

2022년 8월 10일 수요일

책 어디까지 읽어봤니? (14) - 나를 따르라 (본회퍼) /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의 참된 의미

 




저는 굉장히 지적인 것을 강조하는 환경 속에서 신앙 생활을 했습니다. 어렸을 때 부터 보수적인 장로 교회에서 자랐고, 또 대학부에서는 북클럽을 중심으로 신앙을 배웠습니다. 책을 읽고 토론하고 배우는 것이 가장 좋은 신앙의 성숙이라고 배워왔고 또 그것을 저의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축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북클럽을 잘 공부해보고 싶어서 유학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저의 마음에 가지고 있던 깊은 의구심은, "도대체 성도의 성숙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였습니다. 그 누구보다 많은 책을 읽고 공부를 한 분들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지적인 것만으로는 절대로 신앙의 성숙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은 우리의 현실 속에서 너무나 확연하게 볼 수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도대체 우리의 신앙에 무엇이 문제인가?"에 대하여서 의견이 여전히 분분하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저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theme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 입니다. 최근에 진정한 제자에 대한 설교는 사실 저를 향한 설교였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것은 그분의 제자가 아닙니다. 그분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과 열망이 없는 사람은 사실상 성도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은 그저 지식적으로 기독교를 이해한 것일 뿐, 그 마음 안에서 성령의 회심이 일어난 사람으로 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자신의 마음에 불을 다시 붙여야 합니다.

본회퍼의 나를 따르라는, 제자도에 대한 설교를 준비하면서 그때 이미 구입했습니다. 하지만 여력이 되지 않아 최근에 읽기 시작했습니다. 적어도 제가 이해할 때에, "책 그 자체"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먼저 진리가 바탕이 되고 그것으로 고민하는 책이어야 하고, 그리고 거기에 더하여 그것에자신의 삶 전체를 걸고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의 삶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나를 따르라는 이 책은, 진리를 담고 있으며, 진리로 고민하는 책이며, 한 사람의 삶을 걸고 달려갈만한 고귀한 책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에, 본회퍼의 가장 탁월한 점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은 절대적"이라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아, 얼마나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씀에 대한 이해인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조금 마음에 안심이 됩니다. 

요즘에 트랜드는, 성도님들이 질문하는 것에 대해서 목회자가 친절하게 답변하는 것입니다. 이런 저런 성경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어려움을 이야기하면, 그것에 대해서 잘 답변하는 것으로 목회자의 역할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해하는 것 자체가 마치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라디오 프로그램 "Core Christianity"도 마찬가입니다. 

그런데 저의 마음에 항상 드는 생각은, "과연 이러한 질문을 하는 사람들의 그 마음 깊이 있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심지어 "주일에 나는 가족들과 자주 놀러다니는데 크리스천이다, 꼭 주일에 교회에 나가야 하는가?" 라고 질문하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마음이 답답하더군요, 성경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단순히 나의 지적인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정말 그 말씀을 잘 알고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바쳐서 하나님 앞에 드리기 위한 것인가? 라는 부분에서 의구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회퍼는 예수님께 찾아온 한 부자 청년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 이러한 현대인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는 어떤 영생에 대한 호기심은 있었지만, 자신의 호기심에 대한 답변이 필요했던 것이지, 절대자에 대한 순종과 그분께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정확하게 이것입니다. 

저는 본회퍼가 말하기를 "그가 위대한 스승에게 기대하는 것은 본질적인 의견 표명이지, 무조건 의무를 지우는 신적 지시가 아니라는 것이다" 라는 부분이 너무나 강렬하게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저는 이 부분이 현 시대의 설교 그리고 설교자 그리고 성도들에게 울리는 경종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설교는 무엇일까요? 설교는 본질적으로 "신적인 지시"입니다. 그것은 "위대한 의무"입니다. 제가 최대한 설교를 무겁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그리고 저의 모습이 무겁게 다가가기를 바라는 것은, 설교는 신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설교가 일종의 권면이나, 훈계나, 혹은 그저 듣기 좋은 가르침에 불과하다면 저 역시 제가 편한대로 해 버리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는 것은 신의 말씀이며, 신적인 지시이기 때문에 한 없는 무게감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는 분위기적으로 내용적으로 압도적이어야 합니다. 

물론 설교는 설득적인 내용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충분히 설득적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설교가 결국 지적인 유희로 끝난다면, 어떤 설명으로 끝난다면, 그리고 설교를 듣는 청중 역시 그러한 것을 기대하고 설교를 듣는다면, 설교자에게도 그리고 성도에게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애시당초 그 누구도 설교에 대해서 그렇게 기대하지 않으면서 삶이 변하기를 기대했다면, 그것이야 말로 가장 큰 모순이 아닐까요?
  


그런 면에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의 계명을 힘써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절대적인 당위적인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그저 행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혹은 나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조차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본회퍼는 믿음과 행위를 그렇게 명백하게 구분하지 않습니다. 그가 보기에는 사실상 믿음과 행위를 구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믿음이 연약해 졌다면, 오히려 하나님 앞에 더욱 한걸음 나아가라고 촉구합니다. 우리의 순종을 통해서 믿음을 새롭게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제 자신을 보면서, 더 이상 기독교를 "나 자신의 견고한 지적인 체계" 속에 가두지 않기 원하는 마음이 가득합니다.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분을 붙들고, 그분께 순종하는 것, 그것이 기독교입니다. 그것 외에는 모든 것이 부차적인 것입니다. 이러한 방향으로 보니 저의 배움과 삶이 새롭게 보입니다. 제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더욱 확실하게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참된 신앙의 길을 힘써 걸어가겠다고 다시 한번 결심합니다.

* "책 어디까지 읽어봤니?" 전체 글 모음
/ 당신을 변화시키기 위한 "가장 아름다운 길"
https://jungjinbu.blogspot.com/2023/03/blog-post_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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