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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 14일 화요일

삶으로 드리는 찬양 (201) - 더 가까이

 



1. 가사 살펴보기

내 아버지 나를 받으소서
거짓 아닌 진실함으로 주께 나아갑니다
내 아버지 기도 들으소서
입술 아닌 참 마음으로 주께 나아갑니다 

한 걸음씩 더 가까이
주와 함께함이 내게 복이라
한 호흡씩 더 가까이
주를 사랑함이 내게 복이라 

주의 깃으로 날 덮으시니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주의 진실함 내 방패가 되시니
모든 두려움 내게서 사라지네

  

2. 곡 소개

곡은. 예람워십에서 2024년에 발매한 더 가까이 앨범에 수록된 곡이다. 이 곡은, 성도의 진정한 복이신 아버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고자 하는 영적인 갈망을 아름답게 담아낸 찬양이다.

 

3. 말씀으로 바라보기

91:4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시나니 91:4 He will cover you with his feathers, and under his wings you will find refuge; his faithfulness will be your shield and rampart.

하나님은 시편 기자가 그 날개 아래에 피난처로 삼을 수 있는 어미새로 묘사됩니다. 방패와 작은 방패는 모든 해약으로 부터의 완전한 보호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보호하는 방패가 되어 주십니다.

Earl D. Radmacher, Ronald Barclay Allen, and H. Wayne House, The Nelson Study Bible: New King James Version (Nashville: T. Nelson Publishers, 1997), Ps 91:4.

시편 73: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73:28 But as for me, it is good to be near God. I have made the Sovereign Lord my refuge; I will tell of all your deeds.

아삽은 시편 73편을 나는 거의 넘어질 뻔 하였다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고 시편을 끝맺습니다. 이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그는 예배 중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그가 필요로 하던 진리, 소망, 그리고 영적인 힘을 발견한 것입니다. 인생의 혼란이 하나님께로 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께 나아가도록 하십시오.

Tony Evans, The Tony Evans Study Bible (Nashville, TN: Holman Bible, 2019), 652.

에베소서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2:13 But now in Christ Jesus you who once were far away have been brought near by the blood of Christ.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게 된 데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을 경험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러한 영적 연합의 경험이 가능하게 된 역사적인 근거, 즉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음입니다.

R. C. Sproul, ed., The Reformation Stud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2015 Edition) (Orlando, FL: Reformation Trust, 2015), 2094.

4: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히브리서 10: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개역개정) 10:22 let us draw near to God with a sincere heart and with the full assurance that faith brings, having our hearts sprinkled to cleanse us from a guilty conscience and having our bodies washed with pure water. (NIV)

여기서 말씀하시는 참 마음은, 악하고 믿음이 없는 마음과는 반대되는 것으로, 진실함과 진리를 특징으로 하는 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악한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지만, 참된 마음은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새 언약의 약속은 마음의 변화를 요구하였습니다.

John D. Barry et al., Faithlife Study Bible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12, 2016), Heb 10:22.

  

4. 찬양에 대한 묵상

이 찬양은, 성도의 참된 만족이 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 다가가는 간절한 소망과 확신을 담고 있는 찬양이다. 예람 워십팀은 시편 91 4절을 찬양의 설명에 인용하면서, 마치 어미 새가 자신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보호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도를 보호하는 것에 강조를 두고 있다.

또한 이 찬양은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나의 복이라는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데, 시편의 맥락에서는 악인들이 흥하는 것을 보면서 고통스러워 하던 시편 저자가,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소망과 용기를 회복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 찬양은, 고난과 낙심 속에서 살아가는 중에도 오직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영혼이 새롭게 회복됨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탁월한 곡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찬양에서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질문은, 어떻게 우리가 한걸음 더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가 이다. 죄인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하였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또한 주님께서 새롭게 만드신 마음을 가지고,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죄악들을 돌이키며 진실함과 정직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주님께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만나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이 찬양을 부를 때 마다, 우리의 진정한 보호자가 누구이신가를 기억하기 원한다. 또한 우리가 어떻게 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지를 기억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감사가 넘치기를 원한다. 그리고 오직 주님 안에서 진정한 만족과 회복과 소망이 있음을 고백하며, 항상 그분을 가까이 하기 위하여 애를 쓰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기대한다.

삶으로 드리는 찬양 전체 묵상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06/1_30.html   

2023년 10월 28일 토요일

삶으로 드리는 찬양 (155) - 온 땅의 주인


1. 가사 살펴보기

온 땅의 주인 되신 주님이
내 이름 아시며 상한 맘 돌보네
어둠을 밝히시는 새벽 별
방황하는 내 맘 주의 길 비추시네 

주님은 나의 죄를 보시고
사랑의 눈으로 날 일으키시네
바다를 잠잠하게 하시듯
내 영혼의 폭풍 고요케 하시네 

나로 인함이 아닌 주가 행하신 일로
나의 행함이 아닌 오직 주로 인하여

나는 오늘 피었다 지는 이름 없는 꽃과 같네
바다에 이는 파도 안개와 같지만
주는 나를 붙드시고 부르짖음 들으시며
날 귀하다 하시네

나 오직 주의 것

 

2. 곡 소개

곡은 어노인팅 12집에 수록된 곡이다. 이 곡은, 온 땅의 주인 되시는, 그리고 그분의 백성을 변함없는 사랑으로 돌보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풍성한 고백으로 채워진 아름다운 찬양이다.

 

3. 말씀으로 바라보기

신명기 10:17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10:17 For the LORD your God is God of gods and Lord of lords, the great God, mighty and awesome, who shows no partiality and accepts no bribes.

10:17 The phrase God of gods does not affirm the existence of other gods; rather, it affirms God’s absolute sovereignty over all powers in heaven and earth. The Hebrew ʾelohim, translated gods, can also refer to angels or other powerful beings (see Ps 82:1). 신 가운데 신이시며 라는 표현은 다른 신들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신들로 번역된 히브리어 엘로힘은, 천사나 다른 강력한 존재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 Study Bible (Carol Stream, IL: Tyndale House Publishers, Inc., 2008), Dt 10:17.

10:17 accepts no bribes. In ancient Near Eastern religion, gods could be manipulated because they had needs. By providing food, clothing and shelter for the god, an individual could win favor. Yahweh here makes it clear that he will not distort justice for personal gain.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 고대 근동 종교에서 신은 무엇인가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조종할 수 있었습니다. 신에게 음식, 의복, 거처를 제공함으로써 개인은 호의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어떤 것도 부족함이 없는 완전하신 / 역자 추가여호와는 자신이 이익을 얻기 위해서 정의를 왜곡하지 않으실 것임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Craig S. Keener and John H. Walton, eds., NIV Cultural Backgrounds Study Bible: Bringing to Life the Ancient World of Scripture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6), 314.

16:2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16:2 I said to the LORD, "You are my Lord; apart from you I have no good thing."

2 The psalmist approaches God as “my Lord” (Adonai) and as “my good” (NIV, “I have no good thing”). The designation “my Lord” reveals the psalmist’s submission to him as “Master” and “Ruler” (see 8:1), in contrast to those who run after other gods (v. 4).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나의 주” (아도나이) 나의 복으로 표현합니다. 나의 주라는 명칭은 다른 신들을 따르는 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시편 기자가 통치자로서 그분께 복종하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Willem A. VanGemeren, “Psalms,” in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Psalms (Revised Edition), ed. Tremper Longman III and David E. Garland, vol. 5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8), 187.

16:2 apart from you The psalmist finds contentment and sufficiency in Yahweh. The psalmist of Psalm 73 makes a similar statement in response to the prosperity of the wicked (73:25). 시편 기자는 여호와 안에서 만족과 충분함을 찾습니다. 시편 73편의 기자는 악인의 형통에 대한 응답으로 비슷한 진술을 합니다.

John D. Barry et al., Faithlife Study Bible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12, 2016), Ps 16:2.

야고보서 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4:14 Why, you do not even know what will happen tomorrow. What is your life? You are a mist that appears for a little while and then vanishes.

4:14 you. These business people think they control events. They fail to recognize God’s authority and the temporary nature of life. Planning and investing are not wrong, but arrogant self-confidence and boasting are. 이 사업가들은 자신이 사건들을 통제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권위와 인생의 일시적인 본질을 인식하는데 실패하였습니다. 계획과 투자는 잘못된 것이 아니지만, 오만한 자신감과 자랑은 잘못된 것입니다. 

J. I. Packer, Wayne Grudem, and Ajith Fernando, eds., ESV Global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2012), 1777.

마태복음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6: 30 If that is how God clothes the grass of the field, which is here today and tomorrow is thrown into the fire, will he not much more clothe you—you of little faith?

6:32–33 the Gentiles seek … seek ye first. Those who do not know God are characterized by their pursuit of earthly needs and pleasures, whether out of fear or greed, but Christ’s disciples must give their highest priority and greatest efforts to their pursuit of God’s glorious reign (kingdom) and obedience to His will (righteousness; v. 10), trusting God to provide for their needs.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두려움이나 탐욕으로 세상의 필요와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특징이지만,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통치(왕국)를 추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필요를 채우실 것을 신뢰하면서, 그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최우선의 순위에 놓고 최대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Joel R. Beeke, Michael P. V. Barrett, and Gerald M. Bilkes, eds., The Reformation Heritage KJV Study Bible (Grand Rapids, MI: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14), 1366.

로마서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14:8 If we live, we live to the Lord; and if we die, we die to the Lord. So, whether we live or die, we belong to the Lord. 14: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개역개정) 14:9 For this very reason, Christ died and returned to life so that he might be the Lord of both the dead and the living. (NIV)

14:8 we die for the Lord Indicates that in all things, the believer’s purpose is to serve and please God.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 이것은 모든 일에서 신자의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고 기쁘시게 하는 것임을 나타냅니다.

we are the Lord’s Paul affirms that neither life nor death can adversely affect the believer’s union with Christ (see Rom 8:35; 1 Thess 5:10).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 바울은 삶이나 죽음 모두가 신자의 그리스도의 연합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John D. Barry et al., Faithlife Study Bible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12, 2016), Ro 14:8.

14:4–9 jesus christ, Lord—As Lord, Jesus Christ not only rules over us. He provides needed strength for our weaknesses. Life is lived in relationship to the risen Lord and his will for us not in relationship to the opinions and judgments of other people. Only he earned the right to be our Lord through his death and resurrection.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으로서 우리를 다스리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위해 필요한 힘을 공급해 주십니다. 성도의 삶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나 판단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과 우리를 향한 그분의 뜻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오직 그분만이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의 주님이 되실 자격을 얻으셨습니다. 

 

4. 찬양에 대한 묵상

여호와 하나님은, 단순히 교회의 주인이실 뿐 아니라 온 땅의 주인이시다. 그분은 온 세상을 창조하셨고 지금도 그분의 뜻대로 완전히 다스리고 계신다. 그분은 죄인을 구원하시고 그분의 자녀 삼으시는 분이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분과 영적으로 연합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의로움으로 인하여 성도는 하나님께로 부터 사랑을 받는 것이다. 성도는 예수님으로부터 모든 좋은 것을 공급 받는 것이다. 성도는 너무나 연약하여서 풀과 안개와 같은 존재이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아버지의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안심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성도는 여전히 실패하고 넘어지지만, 그리스도의 은혜와 긍휼로 인하여 다시 일어설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를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늘 기억하는 것이다. 사나 죽으나 성도는 주의 것이며 오직 주님의 뜻만이 삶의 유일한 기준과 목적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또한 성도는, 오직 겸손함으로 자신의 삶의 유한함을 늘 깨닫고 주님을 붙들고 주님의 다스리심을 받기를 적극적으로 추구하여야 한다. 이것이야 말로 인간의 궁극적인 행복이며 기쁨이라는 것이다. 이 찬양을 부를 때마다, 나를 붙드시고 인도하시는 나의 주인되신 주님께 마음을 돌이키고 그분을 따르시는 삶의 변화를 경험하기를 기대한다.

* 삶으로 드리는 찬양 전체 묵상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06/1_30.html

2022년 11월 18일 금요일

진중하게 말씀을 받고, 깨어 기도하는 자가 되라 / 다니엘 8장 15-27절

 



한 주 동안 몸이 계속 좋지 않았지만 무시하고 맡겨진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결국 몸이 고장이 나고 목이 완전 잠겨 버렸습니다.

그래도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이 참 좋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고 묵상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특권입니다. 설교라는 포멧으로 결국 만들어져야 하지만, 저의 개인적인 묵상과 결단이 들어가 있어서 좋았습니다. 저 역시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어려움이 있지만, 그러나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번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또 제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저는 역사 시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전체 그림을 알 수 없는 지루한 세부적인 사항들만 나열하는 것들이 부담스럽고 좋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설교 때에는 필요한 만큼은, 어떤 역사적인 배경은 핵심을 짚어가면서 설명하려고 합니다.

언제나 처럼, When & Where 책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추가로 안티오쿠스 4세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자료들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가 말년에 정신이 미쳐서 죽었다는 것이 정설로 보입니다. 다만 류호성 목사님의 글 쪽에 좀 더 무게를 가지고 설교했습니다.

167 BC Y First Abomination of Desolation Occurs

The first abomination of desolation occurred on December 25, 167 BC. On that date, Antiochus IV Epiphanes, Seleucid king from 175 to 164 BC, ordered that an altar to Zeus be built on top of the altar of burnt offering in the Jerusalem Temple. Antiochus

Sharon Rusten with E. Michael, The Complete Book of When & Where in the Bible and throughout History (Wheaton, IL: Tyndale House Publishers, Inc., 2005), 58–60.

8:25 through his policy. Through his cunning. cause craft to prosper. He will cause treachery or fraud to flourish. by peace shall destroy. Rather, by guile he shall destroy. broken without hand. A shameful end. History records Antiochus became irrational and died insane.

Joel R. Beeke, Michael P. V. Barrett, and Gerald M. Bilkes, eds., The Reformation Heritage KJV Study Bible (Grand Rapids, MI: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14), 1216.

그리고 자신의 군대가 유대에 패했다는 소식을 듣자 낙심하여 시름시름 앓다가 병석에 눕게 되었다. 안티오코스 4세는 자기 병은 회복 불가능하며, 이런 변을 당한 것은 유대를 점령했을 때에 성전을 약탈하고 하나님을 모욕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류호성, 간추린 신구약 중간사, ed. 곽진수 and 이경옥, 초판.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8), 62–63.


설교후 후반부의 적용은, 악에 대한 그리스도의 영원한 승리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분의 속죄에만 포커스를 맞추고 싶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승리가 확정되어 있고, 성도는 그 안에서 온전한 기쁨과 확신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삶의 가장 어두운 순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Bible Themes 사전을 충분히 살펴보고 말씀을 인용하였습니다.

5598 victory, over spiritual forces

In spiritual warfare victory is assured since Jesus Christ has already won it on the cross and in the resurrection. Christians will eventually share in Christ’s complete victory and through him overcome their spiritual enemies.

Martin H. Manser, Dictionary of Bible Themes: The Accessible and Comprehensive Tool for Topical Studies (London: Martin Manser, 2009).


정신을 차리라 근신하라 라는 넷 바이블의 번역, self-controlled 그리고 sober-minded 가 참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지만, 자신을 철저하게 훈련하고 그리고 깨어 있는 영적인 지성과 마음을 가진 사람은 점점 드물어가는 듯 합니다.

사실 다른 사람을 쳐다볼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나에게 주어진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아가는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나의 하루를 충실하게 살아냈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 다니엘 815-27절 설교

우리가 오늘 읽은 다니엘 8장의 앞 부분에는 숫양과 숫염소의 환상에 대한 말씀이 있었습니다. 숫양은 매데 바사 제국을 의미하는 것인데 한 때 매우 강대했던 제국이 될 것이지만 그러나 결국에는 헬라 제국에 의해서 꺾이게 될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어떤 나라도 영원한 나라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15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5 나 다니엘이 이 환상을 보고 그 뜻을 알고자 할 때에 사람 모양 같은 것이 내 앞에 섰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8장 앞 부분에서는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다니엘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에 그 뜻을 알고자 하는 분명한 갈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 어떤 분들은 이렇게 오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성경의 인물에게 하나님의 뜻이 계시가 되었을 때에 믿음의 성도는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대로 받기만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수동적으로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무엇을 보여주시는가? 다니엘은 이미 여러번 하나님의 환상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환상을 여러번 탁월하게 해석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말씀이 정말 놀라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환상이 주어졌을 때에 다니엘은 그 말씀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그것을 해석할 수 있다고 해석의 힘이라는 것이 자신의 내면 안에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니엘조차 적극적으로 그 뜻을 알기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6절에 보니 바로 그 때에 하나님께서 가브리엘에게 명령하시기를 다니엘에게 이 환상을 깨닫게 하라 라고 명령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하나님께서 가브리엘을 다니엘에게 보내셨을 때에 다니엘이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어 그리고 18절에 보니 가브리엘이 말할 때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니엘이 어떤 사람인가? 그는 이미 한 나라의 고관이고 산전 수전을 다 겪은 사람입니다. 그는 인생에 어려움과 고난을 이미 아는 사람이고 어떤 일이 일어나도 놀라지 않을 만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가브리엘이 자신에게 나타났을 때에 그리고 미래에 대한 환상을 보였을 때에 그는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깊이 잠들어 버린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니엘에게 있어서 역사라는 것은 단순히 미래에 일어날 어떤 일이 아니라 혹은 자신이 자기 마음대로 자기 손 안에 놓고 해석하는 그런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니엘에게 있어서 미래에 펼쳐질 역사라는 것은 두려운 일이고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고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해서 묵상할 때에, 인간의 교만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인간은 어떠합니까? 마치 자기 자신의 두 손에 역사가 달린 것처럼 생각합니다. 역사학과 통계학과 미래학이라는 도구들을 가지고 자신의 이런 저런 지식을 가지고 미래를 예측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이 보여주는 것은 미래라는 것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고 가벼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인간으로써 혹은 공동체로서 아름다운 미래를 이루어내기 위하여 열심히 살아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미래는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두 손에 달린 것이고 신의 영역에 속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을 두렵게하고 또 겸손하게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 14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존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과 비교할 때에 인간이라는 존재는 안개와 같이 연약하며 점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미래를 생각하며 모든 것을 준비할 때에, 우리를 초월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그리고 역사를 그분의 뜻 대로 이끌어가시는 여호와를 분명하게 인정하고 그분만을 경외해야 한다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서 아주 흥미로운 것은, 두가지의 이야기가 한꺼번에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17절과 19절에 두번 반복해서 말씀하시기를 “이  환상은 정한 때 끝에 관한 것임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이 말씀 자체가 마지막 때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오늘의 말씀은 다니엘의 시점에서 멀지 않은 미래를 다루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두가지 이야기가 한꺼번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20절에 보면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숫양은 메대와 바사의 왕들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21절에 보니 숫염소는 헬라 왕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왕의 뿔이 꺾이고 네 나라가 일어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의미인가? 지금 이 내용은 다니엘의 시점에서는 역사적으로 성취될 일이며, 지금 우리의 시점에는 이미 성취된 일이다 라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역사에 대해서 설명해 드리면 이렇게 역사가 흘러가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포로로 잡혀온 것은 바벨론 제국 때였지만 다니엘은 바벨론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에 걸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위대한 페르시아 제국도 끝이 있었습니다.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에게 패하게 되면서 헬라 제국이 전 세계에 그 이름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헬라 제국도 영원하지는 못했습니다. 헬라 제국의 왕인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이후에 그 나라가 네 조각으로 나뉘어졌습니다.

그 중에 유력한 한명이 셀레우코스 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셀레우코스 왕가의 안티오쿠스 4세가 유대를 통치하면서 엄청난 핍박을 하게 되었습니다. 안티오쿠스 4세 안티오쿠스 4세는 자기 이름을 에피파네스 라고 지었는데 그 이름은 "신의 현현" 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자기가 신이라고 교만한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얼마나 심하게 유대인들을 핍박했는지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조금 바꾸어서 에피마네스 라고 불렀습니다. 설교 시간에 말씀드리기 참 죄송스러운 뜻이지만 그 뜻은 "미친놈" 이라는 뜻입니다.

이 미친 왕은 성전 제단 위에 이방인의 제단을 세우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돼지를 잡아서 이방 신에게 제사를 드리도록 하고 모든 도시와 마을에 그것을 강제로 하도록 했습니다. 유대인 남자 아이들에게는 할례를 금지시켰습니다. 반대하는 이들은 심하게 고문하고 십자가 교수형을시켰습니다. 성경을 소지한 자들도 무참하게 살해했습니다.

이러한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23절에서 25절의 말씀에 대해서 충분히 안티오쿠스 4세를 떠올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형통한 것 처럼 권력을 쟁취한 사람이었어 그리고 놀랍게 파괴를 하고 또 거룩한 백성을 멸하는 자였습니다. 그의 마음은 교만한 자였고 만왕의 왕을 대적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25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가 사람의 손으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깨지리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류호성 목사님이 쓰신 간추린 신구약 중간사 라는 책에 보면 이런 내용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안티오쿠스 4세는 자신의 말년에 병석에 눕게 되었습니다.

그가 스스로 고백하기를 자기의 병은 회복 불가능한 것이고, 이런 변을 당한 것은 유대를 점령할 때에 성전을 약탈하고 하나님을 모욕했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렇게 악행을 저지르고 방자했던 그가, 결국 여호와 하나님의 손에 그의 삶이 끝나게 된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사람의 손으로 말미암지 않고 교만하고 악한 왕이 깨진 것입니다.

다니엘 서가 기록된 것을 대략 BC 540년 경으로 생각한다면 안티오쿠스 4세의 경우에는 BC 175년에서 164년까지 통치를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단순히 다니엘의 시점에서 이정도의 미래 만이 아니라 정한 끝에 관한 것이라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말씀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적그리스도에 대한 예언,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일어날 여러 핍박들에 대해서 미리 예언하시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미래를 궁금해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크리스천에게 있어서도 미래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미래의 영적인 분위기와 지형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 분명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적어도 우리가 살아갈 미래라는 것은, 그리스도라 사칭하며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이들이 늘어나며,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버리는 사람이 늘고, 하나님의 나라에 반대하는 세력이 강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 23-24절 말씀입니다. 24:23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1 4 3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3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의미인가? 하나님의 대표적인 대적자인 적그리스도는 나중에 나타날 존재가 아니라, 이미 지금 세상 속에서 악한 영들을 통해서 역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가 다가올 수록 더욱 기승을 부릴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확연한 영적으로 어두운 미래에 대하여서 우리가 전혀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승리하셨고 앞으로 반드시 승리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6 33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의미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사단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가 바로, 성도의 가장 큰 위로와 평안이 된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7 14절에 말씀하십니다. 17:14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의미인가? 정확히 언제인지는 우리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과의 전쟁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그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그 전쟁에서 승리하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승리는 그 누구도 의심을 품을 수 없는 확정적이고 예정된 변할 수 없는 승리 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의 주인이시며 구원자이시기 때문에, 주님의 자녀들인 우리까지도 그분의 승리를 통해서 악한 대적에 대하여 완전한 승리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말씀을 보면서 무슨 교훈을 얻게 되는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항상 말씀을 볼 때 마다 제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겁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신성한 말씀은, 인간의 말이 아니라 인간의 예측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진 신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직접 그 환상을 보고 해석했던 다니엘도 미래에 대한 예언의 말씀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받았다면, 그리고 그것을 해석할 수 있기를 간절히 구했다면, 우리도 당연히 마찬가지로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무겁게 진중하게 받아들이고 그 말씀 앞에서 나를 돌아보고 나를 성찰하고 그 말씀을 이해하고 깨닫기를 더 간절히 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라고 오늘 말씀을 통해서 묵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얻는 교훈은, 깨어 근신하여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 7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정말 흥미로운 말씀입니다. 사실 성경은 성도가 깨어 있으라고 항상 말씀하시고 강조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특별히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 그러므로” 라고 말씀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워오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더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지적으로는 논리적으로는 알고 있습니다. 분명히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워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언제 다시 재림하실 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고, 더 핍박과 어려움이 심해질 것이 명확하게 보이는 시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이러한 현실을 우리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성도 모두가 정신을 차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자신을 진지하게 살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심각한 오류에 빠져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오늘과 같은 말씀을 보면서도 그저 남의 일처럼 다른 사람의 일처럼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처럼 받아들이면서 나의 삶에 아무런 노력도 변화도 추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넷 바이블 영어 성경은, 정신을 차리라 근신하라 라는 부분을 번역할 때에 self-controlled 그리고 sober-minded 라고 번역했습니다. 무슨 의미인가? 마지막 때가 다가올 수록 우리는, 영적으로 훈련하면서 자기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마땅히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가 다가올 수록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세상의 헛된 이야기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꽉 차서 그 말씀이 우리를 다스리고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기는,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 깨어 있기를 원합니다. 영적인 박해와 어려움들이 우리에게 몰려올 때에 그것을 이상히 여기거나 피하거나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오히려 깨어 기도하며 주님의 뜻을 구하며, 이미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붙들며, 최후 승리를 주실 주님을 의지하고 바라며 살아가시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함께 기도 하겠습니다. 이 시간에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함께 기도하길 원합니다. 첫째로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 하나님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고 그것을 읽고 깨닫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시니 감사합니다, 날이 갈 수록 말씀에 대한 더 갈망이 깊어지게 하시고 더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게 하시고, 또 그 말씀을 진중하게 받아들이는 주님의 자녀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둘째로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 하나님 세상의 마지막 때에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는 사람 되기 원합니다, 세상의 헛된 이야기들과 미래에 대한 예측에 흔들리지 않게 하시고, 갈수록 영적으로 어두워지는 이 시기에 기도를 통하여 주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고 단단해 지며 영적으로 온전히 깨어 있고 자기를 훈련하는 믿음의 성도로 살아가게 하여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면 좋겠어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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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30일 금요일

영원한 십자가, 그 안에서 누리는 은혜 / 사무엘하 7장 18-29절 설교

 

요즘에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계속 들으면서, 많은 통찰력을 얻고 있습니다. 특별히 탕자 비유에 대한 연속 설교를 들으면서, 한편의 설교에 본문의 모든 것을 담을 필요는 없다는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탕자에 대한 팀켈러 목사님의 책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그분의 연속 설교 스타일이 매우 탁월하시다고 느꼈습니다. 하나의 본문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하나의 메시지이지만, 그러나 안에서도 굉장히 풍성한 관점들을 연속되는 설교에서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팀켈러 목사님의 시리즈 설교를 들으면서 고민하게 부분은, 저도 모르게 설교의 정석이라는 틀에 갇혀서  저의 설교가 뻗어나갈 있는 어떤 가능성을 막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입니다. 설교는 마땅히 본문이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어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메시지들을 다양한 관점에서 풀어낼 있다면 굳이 설교 안에서 모든 것을 담지 않아도 된다는 조심스러운 생각의 실천을 시도해보고 있습니다.

하나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얻는 통찰은, “설교자는 어느 정도로 추가적인 설명을 해야 하는가” 입니다. 한마디로 성경 구절에 대한 설교자의 설명의 충분함이 어디까지인지를 배우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는 어떤 성경 구절에 대한 설명이 굉장히 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설명 안에는 풍성함이 있습니다. 성경 구절에 대한 이해, 그리고 시대적인 배경을 염두에 변증, 그리고 변증을 추가적으로 풀어내는 성경적이고 철학적인 부연 설명까지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전통적인 강해 설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마치 하늘에서 바라보는 듯한 넓은 시각으로 성경과 삶을 조망한다고 느꼈습니다.

이러한 스타일은 저로서는 상당히 어렵다고 느꼈습니다. 물론 제가 배운 설교의 정석과도 다릅니다. 저는 주로 강해 설교 중심이라면, 그리고 제가 존경하는 존파이퍼 목사님도 그런 방향이라면, 팀켈러 목사님은 완전히 다른 자신만의 장르라고 느꼈습니다. 설교를 풀어나가는 방식 자체가 완전히 다릅니다.

그리고 제가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따라하기 어려운 가장 이유는, 일단 실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성경 구절을 놓고, 변증과 성경과 철학을 넘나드는 변증적인 내용을 풀어내기에는 실력이 아직 한참 부족합니다. 다만 제가 느낀 것은, 어떤 신학적인 사고를 풀어내는데 있어서 자유함을 가져야겠다는 결심이었습니다.

역시 설교를 준비하다보면, “꼭 부분은 말씀을 드려야겠다”라는 것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내용이 조금이라도 성경 본문에서 벗어나게 되면 차라리 안하는 쪽으로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어쩌면 아주 약간은 성경의 본문 자체에서 멀어진다고 하더라도, 충분한 신학적인 사고를 펼쳐내서 성도님들과 함께 길을 걸어가보는 것도 굉장히 좋겠다고 판단을 내렸습니다.

이번에 제가 본문을 보면서 가장 묵상한 부분이 “겸손” 그리고 “미래에 대한 약속” 입니다. 물론, “말씀에 근거한 인간의 반응과 기도”라는 주제가 본문의 후반부에 들어있지만 다음을 기약하고 과감하게 생략했습니다. 그리고 여유가 생긴 부분에 대해서는 미래에 대한 약속이라는 부분을 시간이라는 관점으로 집중해서 풀어냈습니다.

아마 예전에는 절대로 이렇게 풀어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일반적인 설교의 방식대로, 과거와 미래에도 여전히 은혜를 부으시는 하나님이라는 평범한 논리로 풀어 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마음으로 새롭게 시도해 보았습니다. 철학적인 논증을 위해서 고민해 보았습니다.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에서 읽었던 시간에 대한 부분이 여전히 마음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 과거와 미래를 함께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며, 안에서 십자가의 영원함이라는 주제를 담아냈습니다.

실제로 설교를 들으시는 분들은 어떻게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다행히 저를 바라보시는 성도님들의 눈빛이 지루해보이지는 않았습니다.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그분의 확신이 너무 좋았던 것처럼, 역시 마음 속에 말씀을 묵상하면서 정말 부분은 반드시 나누고 싶다, 혹은 이러한 하나님을 드러내고 싶다라는 바로 소망을 가지고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본문 해석을 조금 추가해야 하는 부분이 있었지만, 과감히 건너뛰고 포커스를 맞춰야 하는 부분에 집중하고 설명을 추가했습니다. 이번 설교 준비에도 스터디 바이블들이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스터디 바이블은 완벽한 도구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부분에서이든지 생각을 일깨워줄 있다면 충분히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겸손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지만 설교 가운데 충분히 내용을 풀어냈습니다.

7:18 The words sat before the Lord indicate that David was in the tent which served to house the ark. Who am I, O Lord God: David’s rhetorical question reflected his sense of unworthiness to have been extended such a gracious promise (vv. 12–16).

Earl D. Radmacher, Ronald Barclay Allen, and H. Wayne House, The Nelson Study Bible: New King James Version (Nashville: T. Nelson Publishers, 1997), 삼하 7:18.

그리고 시간에 대한 이해 속에서 그리스도의 영원한 다스림은, 아래 스터디 바이블을 염두에 두고 내용을 풀어 냈습니다.

7:16 for all time … forever: God’s promises do not negate human responsibility and accountability (7:14). Wrongdoing requires a just response from God. However, no wayward son of David could move God to withdraw his promise to preserve David’s dynasty. Although the dynasty disappeared for hundreds of years, David’s house and kingdom were renewed in Jesus Christ, the sinless descendant of David who reigns forever. • before me: As in Greek version and some Hebrew manuscripts; Masoretic Text reads before you.

New Living Translation Study Bible (Carol Stream, IL: Tyndale House Publishers, Inc., 2008), 삼하 7:16.

7:19 God’s plan to give David a lasting dynasty stretched well beyond his lifetime. The promise is fulfilled forever in the eternal reign of Christ (Rev 11:15). • Do you deal with everyone this way, O Sovereign Lord? Or This is your instruction for all humanity, O Sovereign Lord.

New Living Translation Study Bible (Carol Stream, IL: Tyndale House Publishers, Inc., 2008), 삼하 7:19.

세상에 힘들지 않은 일이 없지만, 설교를 준비하는 것은 매우 고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영광을 경험합니다. 하나님만이 주시는 기쁨 그리고 그분 자신의 영광입니다. 설교를 있는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저의 설교가 조금이라도 나아지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오직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분의 아름다우심을 가장 탁월하게 드러내기를 원합니다.

* 사무엘하 7 18-29 설교

사울 왕은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그분을 크게 실망시켰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이 다윗을 찾아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셨던 것이 대략 BC 1025 경입니다. 그리고 거의 이십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다윗은 한때 삶이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져서 사울을 피해서 도망하는 도망자로 살았지만, 이제는 유다지파 뿐만 아니라 모든 지파를 다스리는 이스라엘 나라의 왕으로 온전하게 세워진 것입니다.

이제 다윗은 나라의 가장 정점에 사람이 되었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가장 권력이라도 그의 마음을 무너뜨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는 생명을 전쟁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성으로 여호와의 법궤를 모시고 왔습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하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사람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기뻐 춤추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모든 것이 형통하여져서 그의 왕궁에서 편하게 살게 되었을 때에, 그의 마음에 여호와의 법궤는 여전히 천막 안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였습니다. 다윗은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마음을 보시고서는 다윗이 감히 상상하지도 못할 계획들을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은 여호와를 생각할 때에 그분에게 성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여호와는 오히려 다윗을 위하여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를 위한 축복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내가 다윗 너의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겠다, 너의 후손을 세워서 나라를 견고하게 하겠다, 너의 아들이 성전을 건축할 것이다, 그리고 왕위를 영원하게 것이다, 사울과는 다르게 하나님의 은총을 거두지 않고 너의 나라의 왕위는 영원히 견고할 것이다,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단 선지자가 모든 말씀을 다윗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그때 다윗이 이렇게 반응하고 있습니다. 18절입니다.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라고 여호와께 고백하고 있습니다. 지금 다윗은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서 여호와를 찾아온 것입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어디에서든 그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임을 알았지만, 여호와께 그의 마음을 아뢰기 위해서 직접 언약궤 앞으로 찾아온 것입니다.

지금 다윗은 과거와 다른 사람입니다. 이미 백성의 위대한 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여호와 앞에 홀로 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왕이라고 여호와 앞에 거들먹거리지도 않았고, 자신이 왕이기 때문에 이정도 축복은 받을만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을 전적으로 가득 채운 것은, 여호와께서 얼마나 많은 은혜를 베푸시는가, 그리고 그분의 은혜를 받기에는 얼마나 자신과 자신의 가문이 턱도 없이 부족한가를 절실하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다윗이야 말로 은혜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호와를 향한 다윗의 기도를 보면 계속 반복되는 표현들이 있습니다. “주 여호와여” 라는 표현입니다. 주라는 것은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여호와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스스로 존재하는 자”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슨 의미인가? 다윗의 완전한 겸손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분명히 인간이며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낮은 모습으로 그가 취할 있는 가장 겸손한 진실함으로, 여호와께서는 저의 유일한 주인이십니다 라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19절부터 등장하는 표현들이 있습니다. 주의 종을, 주의 종에게, 주의 종의 다시 말해서 계속 등장하는 것은 “주의 종”이라는 표현입니다. 어떻게 보면 나라의 왕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표현입니다. 거기다가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자신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때에는 나라의 왕이고 이미 인생의 성공의 가장 정점에 있는 사람이지만, 그의 마음에 교만이 들어갈 틈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다윗의 마음에는 무엇이 가득한가? 하나님 저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저는 절대 순종 밖에 없습니다, 저는 주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입니다, 바로 마음이 그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주 오래전에 이야기입니다. 필립 얀시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책을 함께 읽으면서 청년에게 질문을 보았습니다. “누구누구 형제님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그러니까 형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을 위해서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아주 훌륭한 대답이었습니다. 정말 귀한 고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한가지 너무 아쉬웠습니다. 너무 맞는 이야기였지만 아직 깊은 신앙의 수준까지 들어가지 못한 것이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정말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가 정말 아쉽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그냥 죄인이 아니라 용서 받지 못할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주었습니다. 그때 청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용이 낯설게 느껴지는 처럼 저를 바라 보았습니다.

그런 면에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감동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요? 우리의 가운데 진정한 감격이 없는 것일까요? 우리는 말씀을 보면서 그렇게 감동이 없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들이 내가 받을만한 것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릴 만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것을 누린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만한 생각이라는 것은 우리의 의식 속에 있을 수도 있고 우리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무의식 속에 감추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차원 속에 있든지 간에, 만약에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들이 그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모든 것들이 그저 심상하게 느껴질 밖에 없는 것입니다.

잠언 3 34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34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야고보서 4 6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6 그러나 더욱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겸손한 마음이야 말로 하나님의 복을 받는 가장 중요한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겸손을 통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새롭게 보이는 것입니다. 사실상 이미 넘치게 부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겸손을 통해서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부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넘치게 생생하게 경험하고 느끼고 누릴 있는 것은, 바로 우리의 겸손한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리고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면서, 다윗처럼 마음이 겸손하게 낮아지기를 원합니다. 용서 받지 못할 죄인이 바로 나라는 것을 깨닫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홀로 서기를 원합니다. 다윗처럼 겸손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서 홀로 서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내가 가진 어떤 지위나 재산이나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기를 원합니다. 오직 여호와 앞에서 겸손하여 짐으로 그분의 은혜와 말씀에 대한 감격으로 온전히 새로워지시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다윗의 겸손함에 바로 이어서 나오는 말씀이, 다윗이 그렇게 감격한 이유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19 말씀입니다. 7:19 여호와여 주께서 이것을 오히려 적게 여기시고 종의 집에 있을 장래의 일까지도 말씀하셨나이다 여호와여 이것이 사람의 법이니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표현이 이것이지 종의 집에 있을 장래의 일까지도 말씀하셨나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가장 흥미롭고도 놀라운 부분이 무엇인가? 우리가 기억할 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처럼,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후손과 그의 집에 대해서 영원히 그것을 세우시고 지키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절대로 너의 후손을 버리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을 전해 들었을 때에 상식적으로 무엇에 먼저 놀라야 하는가? 자신의 왕국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놀라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을 놀라게 것은, 자신의 현재 뿐만 아니라 미래를 책임지시는 미래까지 계획하시고 보장하시는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하심에 놀랐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여호와 자신에 대해서 놀라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감히 인간이나 다른 피조물을 초월하시는 분이심을 다윗이 분명히 깨닫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시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시며, 순간의 정점에 불과한 인간을 아득히 뛰어 넘으시는 그러므로 장래의 일조차 가장 확고하게 말씀하시고 복을 주시는 진정한 절대자라는 점에서 가장 크게 놀라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사람도 벗어날 없는 것이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예배를 드리는 순간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습니다. 누구도 시간을 거스를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시간이 흐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을 맞이할 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은 자신의 시간 속에서 정확하게 자신의 인생 밖에 살아갈 밖에 없는 것입니다. 누구도 자신의 시간 밖에 있는 것을 경험하거나 넘어갈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모든 사람은 자신의 후손에 집착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삶이 비록 끊어진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일부분이라 있는 자신의 후손이 세상에 남는다면 자신도 남을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는 어떤 분이신가? 그분은 시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시간의 밖에도 계시며 시간 안에도 계시는 시간의 초월자이시며 주권자이십니다.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는 그분의 이름 그대로입니다. 모든 인간은 시간에 얽매여있고 어떤 것을 의지할 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그러나 여호와는 전혀 다른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인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주관하시는 분이시며 감히 다윗조차 상상해보지 못한 그의 기대와 생각을 완전히 뛰어넘은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다윗은 오늘 말씀에서, 과거의 하나님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는 시간을 뛰어넘으시는 여호와를 깨닫고, 여호와께서는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이스라엘 백성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셨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23절과 24절이지 7:23 땅의 어느 나라가 주의 백성 이스라엘과 같으리이까 하나님이 가서 구속하사 자기 백성으로 삼아 주의 명성을 내시며 그들을 위하여 일을, 주의 땅을 위하여 두려운 일을 애굽과 많은 나라들과 그의 신들에게서 구속하신 백성 앞에서 행하셨사오며 7:24 주께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세우사 영원히 주의 백성으로 삼으셨사오니 여호와여 주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매우 놀라운 점은, 비록 다윗이 자신이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여호와께서 과거 가운데 역사하신 일을 기억하면서 시간을 초월하시는 여호와의 위대하심과 그분의 은혜를 찬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여호와를 향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데 자신의 시간의 영역 아니라 과거조차 지배하시며 역사하시며 구원하셨던 전능하신 여호와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라는 관점에서, 시간을 넘어서는 절대자이신 여호와께서 미래에도 그분의 약속을 반드시 이루실 것을 확신하면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25절과 26절이지 7:25 여호와 하나님이여 이제 주의 종과 종의 집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영원히 세우셨사오며 말씀하신 대로 행하사 7:26 사람이 영원히 주의 이름을 크게 높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 하게 하옵시며 주의 다윗의 집이 앞에 견고하게 하옵소서”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여호와께서 절대자가 아니시라면, 그분이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여호와라는 존재가 마치 인간처럼 시간에 얽매이시며 인간처럼 변덕쟁이이며 변하시는 분에 불과하다면, 우리가 도대체 어떻게 그분을 믿을 있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여호와께서 절대자이심을 고백하면서, 과거에 그분의 일하심을 기억하면서, 이제는 그분을 믿고 나아가서 그분이 약속하신 미래를 붙들고 감사하면서 그분의 말씀을 이루시기를 기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과연 여호와의 약속은 이루어졌는가? 라는 것입니다. 과거로 부터 이어지던 그분의 말씀은 이루어졌는가? 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 32-33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32 그가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하나님께서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1:33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나라가 무궁하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의미인가? 사실 이스라엘 역사를 돌아보면 결국 나라가 분열되고 철저하게 망하게 되었습니다. 남의 나라의 포로가 되었고 돌아온 이들조차 겨우 명맥을 유지하다가, 강대한 제국들의 다스림을 받는 비참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이땅에 보내셨습니다그저 아무 혈통이 아니라, 분명한 그분의 약속대로 다윗의 후손으로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땅에 오심은, 시간을 넘어서 그분의 뜻을 이루시고야 마는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라는 것입니다. 비록 다윗의 왕조는 무너졌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완전히 세우시는 것입니다.

다윗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 자신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친히 시간 안으로 인간으로 가장 낮은 모습으로 땅으로 오신 것이며 그분을 통해서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1 15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1: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이루어질 확고한 미래를 보고 다윗이 놀라고 감사하고 감격했던 것처럼, 반드시 미래를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경험하지 못했지만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반드시 완성될 것이며,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타락한 세상은 완전히 회복될 것이며, 너무나 아름답고 행복한 하나님의 나라가 죄와 질병과 눈물과 고통과 괴로움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가장 완벽한 하나님의 나라가 반드시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무엇이 중요한가? 성도라고 불리는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품과 그분의 계획 안에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8 1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고린도후서 5 17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것이 되었도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의미인가? 저는 이번에 말씀을 묵상하면서, 시간이라는 중요한 속에서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실 때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라고 말할 때에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할 때에, 그것은 단순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감히 인간이 상상할 없는 절대자의 주권과 보호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태초부터 시작하여 이스라엘을 통해 역사하시며, 다윗을 통해 그리스도를 약속하시며 약속을 이루시며, 다가올 미래에 조차 확정적으로 이루시고야 하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사랑의 주권 속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감히 우리를 흔들 없는 것은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 속에서 그분의 은혜에 우리는 붙들려 있고, 은혜 가운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보다 감격과 축복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기는, 오늘의 말씀이 우리에게 용기와 격려가 되기를 원합니다. 시간을 넘어 다윗에게 약속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놀라운 은혜가 하나님의 때가 되어 우리에게 임하여진 것을 없이 감사하며,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넘치게 올려드리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저의 마음 가운데 겸손한 마음을 주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음을 기억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로 살아가기 원합니다. 받을 자격 없는데 받은 용서와 은혜를 감사하며 하나님께 찬양와 영광을 올려드리는 복된 인생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하나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시간을 초월하시는 절대자 하나님 전능하신 여호와의 안에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우리를 품어 주시고 그리스도의 의로 입혀 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안식과 기쁨과 안전을 누리게하시고 영원한 그분과 연합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주님 안에서 없는 기쁨을 누리게 하시고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살아가도록 인도하여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문" 전체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11/blog-post_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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