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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2일 목요일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 마가복음 5장 35-43절 설교

 

예수님께서 어느날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쌓여 있는데 유대인의 회당을 책임지는 야이로 라는 사람이 찾아왔습니다그는 예수님께 아주 간곡하게 부탁했습니다. 그것이 5 23절 말씀입니다.  


5:23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라고 예수님 앞에서 간곡하게 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야이로와 함께 바로 그의 집으로 걷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 속에 오랫동안 병으로 아팠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가진것을 다 써서 의사들을 만났지만 도대체 낫지가 않았습니다. 그 여인이 마음에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옷에 내가 손만 대도 병이 나을 수 있을 것 같다” 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몰래 다가가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댑니다

 

그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몰래 손을 대자 놀랍게도 여인의 몸이 치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을 무리 중에서 굳이 찾으시고 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마음이 바짝바짝 타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입니다. 왜 그런가? 시간이 지체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빨리 본인의 집으로 가셔야 하는데 빨리 가서 치료해 주셔야 되는데 자꾸 늦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들이 달려 왔어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것이 35절 말씀 하반절입니다. 5: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라고 너무나 슬픈 소식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야이로의 마음이 무너졌습니다. 왜 그런가? 사랑하는 딸이 결국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죽은 딸을 누가 어떻게 도와줄 수 있겠는가? 사람들이 마치 그런 야이로의 마음을 대변하듯이 이렇게 말을 합니다. “회당장님 이제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이 오신다고 해도 이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더 이상 예수님을 괴롭게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분이 온다고 해서 바뀔 것이 전혀 없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시점에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반응 하셨을까요? “야이로야 미안하다, 내가 좀더 빨리 갔어야 되는데 벌써 너의 딸이 죽었다니 어떻게 하겠느냐? 나는 이제 너의 집으로 가도 소용없으니 다시 돌아가겠다” 이렇게 말씀 하셨을까요

 

절대로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말을 들은 척도 안하셨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들의 불신의 말을 무시하신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딸의 죽음의 소식으로 인해 충격에 빠져 어쩔 줄 모르는 야이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영혼 깊이 자리 잡고 있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언제 두려움에 사로잡히는가?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일 앞에서 두려움에 사로 잡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이성과 한계를 뛰어넘는 절망 앞에서 인간은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인간도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도 죽음이라는 그 절대적인 운명 앞에서는 그 어떤 힘도 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께서 야이로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시는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분명한 명령의 말씀입니다. 야이로가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잠식당해서 고통스러워할 것이 아니라 지금 자신과 함께 있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믿고 예수님이야 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진정한 구원자이심을 분명하게 믿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야이로와 함께 도착해 보니 딸의 죽음으로 인해 난리가 났습니다. 그 온 집안에 곡소리가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39절 말씀입니다. 5:3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성경은 사람들의 반응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40절 처음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비웃더라”

 

저는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지금 야이로가 처한 이 모든 상황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부터 야이로의 상황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딸의 죽음의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의 반응은 무엇인가? 사실상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위대한 선지자일지는 모르겠지만, 수 많은 기적들을 일으킨 사람일지는 모르겠지만, 죽음 앞에서는 무기력한 인간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 불신의 분위기 속에서 그 참담한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야이로를 향해서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불신의 분위기는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도착하셔서 소녀가 자고 있다고 말씀하셨을 때에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예수님을 비웃은 것입니다. 아마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야이로의 볼이 부끄러움을 붉어졌을 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노골적으로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한 것입니다

 

아마도 야이로는 방금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마음에 떠올렸을 것입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예수님을 믿을 때에 그 모든 두려움과 비웃음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을 야이로는 그 자리에서 더 절실하게 느꼈을 것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비웃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40절 말씀에 보니 예수님께서는 비웃는 자들을 다 내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그분을 비웃는 자들은 그분과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동행할 수 있는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데려가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아이의 부모와 함께 아이의 시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무릎을 꿇고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원래 구약의 율법에 따르면 시체를 만지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하는 행동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것을 전혀 신경쓰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소녀의 시신을 잡고 말씀하십니다. “달리다굼!”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라는 뜻입니다. 그 말씀을 하시니까 죽었던 소녀가 그 자리에서 살아났습니다. 살아날 뿐만 아니라 곧 일어나서 걸어 다녔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랐다” 왜 그런가? 그 자리에 있던 그 누구도 설마 죽었던 아이가 살아날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이라도 죽은 사람은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분은 죽음 조차 다스리시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권능의 말씀 단 한마디로 죽은 딸을 살리심으로 자신은 살아계신 여호와의 아들이시며 생명의 주인이심을 친히 증명하셨습니다. 그분은 죽음을 조차 이기시는 분이시며 생명 그 자체이심을 바로 이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기적의 사건이 일어난지 벌써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지금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쪽은 믿음의 사람들이 있고 또 한쪽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렇게 비웃는 것입니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다, 어떻게 죽음 이후에 생명이 있는가? 어떻게 죽은 이를 잔다고 부를 수 있는가?

 

그러나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삶의 모든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는 이들에게 그리고 심지어 죽음을 앞두로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을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왜 이 말씀이 중요한가?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우리의 믿음을 지킨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살아가는 이들을 비웃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봐야 아무 소용 없다 도대체 왜 그렇게 어리석게 살아가는 것인가? 왜 굳이 손해를 감수하고 살아가는 것인가? 그래봐야 무슨 이득이 있다고 저러는 것인가? 정말 우리가 진실한 크리스천으로 살아간다면 이러한 비웃음을 당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심지어 때로는 우리의 마음에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내가 굳이 이렇게 까지 해야 하는가? 좀 대충 순종하면서 살아도 괜찮지 않겠는가? 세상의 비웃음과 조롱 속에서 우리의 마음이 약해지면서 우리의 믿음도 연약해진다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 6절에서 9절에 이렇게 말씀하시지 1: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1: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오늘 이 기적의 사건 가운데 예수님 바로 옆에서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비웃던 수 많은 이들의 조롱을 바로 옆에서 함께 받았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을 이렇게 격려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여러 시험으로 잠깐 근심하게 되지만 그러나 진심으로 기뻐하라, 왜냐하면 우리 앞에 영원한 기쁨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험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오히려 연단을 받는 것이다. 주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많은 칭찬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있다는 그 사실이, 그분이 우리의 마음을 감격시키시고 넘치는 행복으로 지금 우리에게 부어주시고 계시다는 그 사실이, 우리가 믿음을 가진 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러한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오심과 그분을 향한 우리의 믿음과, 그리고 그분이 주실 그 칭찬과 영광과 존귀가 왜 그렇게도 중요한 것인가? 그것은 만약 우리에게 그 미래가 없다면 현재의 삶에 대한 의미를 잃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서 마지막까지 살아 남았던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은, 그 안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인간의 본질을 꿰 뚫는 중요한 진리를 발견했습니다

 

강제 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은 그 환경 자체가 그들의 모든 희망을 빼앗아가 버렸습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으니 현재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미래의 나를 보지 못하는 사람은 삶을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말 그대로 이성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미래의 목표를 볼 수 없어서 몸과 마음이 시들어가는 사람은, 과거의 생각에 파묻혀 살게 됐다. 그들은 강제 수용소에서의 시련을 내적 힘을 기르는 시험으로 여기지 않았다. 삶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업신여겼다. 그들은 두 눈을 감고 과거에서만 살려고 했다. 그들의 삶은 의미가 없어졌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그 어떤 인간도 넘어서지 못한 죽음이라는 절망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기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죽은 소녀에게 다시 생명을 주심으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친히 죽음을 이기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불신의 시대에, 그저 자기 탐욕을 채우는데 급급한 이 시대 속에서, 고아와 과부를 돌보며 선을 행하며 손해를 보며 주님의 뜻을 행하며 우리의 삶을 기꺼이 주님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미래에 반드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이루실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모든 눈물을 친히 닦아주시며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고 칭찬하실 그 날을 마음에 흔들림 없이 품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가장 근본적인 원동력이며, 주님의 자녀의 정체성의 전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모든 고난 속에서도 위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고통과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당당하시기를 바랍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붙드시기를 바랍니다. 전능자이시며 역사의 주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기꺼이 오늘도 주님을 위하여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마지막 날에 사랑하는 주님을 뜨겁게 그리고 온전히 만날 것을 사모하면서, 우리의 모든 삶을 주님을 위하여 살아가시는 모든 사랑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시간에 말씀 묵상하시면서 기도하기 원합니다그리스도께서 진정한 구원자이시며 우리 인생의 주권자이심을 믿습니다또한 다시 오실 주님이심을 믿습니다주님을 기대하며 오늘을 살아가기를 원합니다가장 명예로운 주님의 자녀의 모습으로 살기를 원하오니 우리의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주시고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게 하여주시옵소서십자가의 길을 힘써 걸어가게 하여주시옵소서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문" 전체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11/blog-post_4.html 

2023년 12월 3일 일요일

삶으로 드리는 찬양 (160) - 내 삶을 깨뜨립니다


1. 가사 살펴보기

날 위해 십자가에서 깨뜨리신 사랑
오늘도 그 사랑 안에 나 거합니다
주님의 생명 내 안에 있고
주님의 사랑 날 강권하니
나 오늘도 주께 내 삶을 깨뜨립니다 

오 주여 내 삶을 깨뜨립니다
주 머리 위에 붓습니다
내 모든 삶과 생명을 주님 얻으소서
오 주여 내 삶을 깨뜨립니다
주 머리 위에 붓습니다
주님께 라면 아깝지 않습니다 

존귀와 영광을 받으소서 하나님 어린양 예수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을 받으소서
존귀와 영광을 받으소서 하나님 어린양 예수
나라와 권세 영광 모두 주님께 

내 눈을 열어주소서 주의 참된 가치 보도록
내 앞에 계신 주님과 비할 것은 없습니다
내 손에 남은 것 없이 아낌없이 다 드립니다
주님 한 분만을 위하여 한 방울도 남김없이

 

2. 곡 소개

곡은, 어노인팅 예배캠프 2019년 앨범에 수록된 곡이다. 이 곡은, 자신의 소중한 옥합을 깨뜨리고 그것을 예수님께 부은 여인의 아름다운 헌신을 묘사하고 있다. 주님의 십자가 사랑 안에 이미 거하기에,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존귀하신 주님께 드리는 성도의 깊은 신앙의 고백을 담고 있는 곡이다. 

* 노래와 묵상 : 어노인팅 예배캠프 2019: 내 삶을 깨뜨립니다. 한재호
https://blog.naver.com/anointingm/221815009330

 

3. 말씀으로 바라보기

마가복음 14:3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14:3 While he was in Bethany, reclining at the table in the home of a man known as Simon the Leper, a woman came with an alabaster jar of very expensive perfume, made of pure nard. She broke the jar and poured the perfume on his head. 14:4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14:4 Some of those present were saying indignantly to one another, "Why this waste of perfume? 14:8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14:8 She did what she could. She poured perfume on my body beforehand to prepare for my burial. 14: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개역개정) 14:9 I tell you the truth, wherever the gospel is preached throughout the world, what she has done will also be told, in memory of her." (NIV)

19.39 συντρίβωa; συνθλάω: to break or shatter a solid object into pieces, with the implication of destruction—‘to break into pieces, to shatter.’ 깨뜨려 (순트리보) 단단한 물체를 조각으로 부수거나 산산조각 내는 것

Johannes P. Louw and Eugene Albert Nid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Based on Semantic Domains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1996), 225.

14:3 An alabaster jar was a long-necked perfume vase that was considered a luxury item. A woman (Mary of Bethany, according to Jn 12:2–3) poured expensive perfume of pure nard on Jesus’s head. 설화석고 항아리는 목이 긴 향유 병으로, 사치품으로 여겨졌습니다. 한 여자 (요한복음 12장에 따르면 베다니의 마리아)가 값비싼 순수한 나드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14:6 Jesus rebuked the critics of this woman. What they considered wasteful was actually a noble thing (lit “a good work”). Her act was noble because she did it for the Son of God, who is worthy of great sacrifices.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를 비난하는 살마들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들이 낭비라고 여겼던 일이 실제로는 고귀한 일 (문자적으로는 선한 일)이었습니다. 그녀의 행위는큰 희생을 치르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위하여 행하였기 때문에 숭고한 것이었습니다. 

Ross H. McLaren, “Mark,” in CSB Study Bible: Notes, ed. Edwin A. Blum and Trevin Wax (Nashville, TN: Holman Bible Publishers, 2017), 1586.

14:8 Mary had tremendous spiritual insight when she anointed Jesus. She anointed His body for burial. She,  unlike the disciples, understood that Jesus was soon to die.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었을 때, 그녀는 엄청난 영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분의 장사를 위하여 그분의 몸에 기름을 부은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제자들과 달리 예수님께서 곧 죽으실 것을 이해했습니다. 

Earl D. Radmacher, Ronald Barclay Allen, and H. Wayne House, The Nelson Study Bible: New King James Version (Nashville: T. Nelson Publishers, 1997), Mk 14:8.

14:9 Although Mark does not give the woman’s name, her deed (14:6) is indeed remembered as the story of Jesus is told throughout the world. 비록 마가는 그 여인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그녀의 행위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온 세상에 전해지면서 확실히 기억되고 있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 Study Bible (Carol Stream, IL: Tyndale House Publishers, Inc., 2008), Mk 14:9.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개역개정) Therefore, I urge you, brothers and sisters, in view of God’s mercy, to offer your bodies as a living sacrifice, holy and pleasing to God—this is your true and proper worship. (NIV)

12:1 Therefore points back to the entire argument in 1:18–11:36. mercies of God. Sacrificial language from the OT is used to describe the new life of Christians. Bodies refers to the whole person. Both body and soul belong to God. Christians are a living sacrifice. They enjoy new life with Christ (6:4). “Living” also means that they will not be put to death as OT animal sacrifices were. Spiritual worship means offering one’s whole life to God.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 구약에서 제사에 사용되던 언어는,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을 묘사하는데 사용됩니다. 몸이라는 것은, 사람의 전체를 의미합니다. 몸과 영혼은 모두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산 제물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생명을 누립니다. “살아있다”라는 말은, 구약의 동물 제사처럼 그들이 죽지 않을 것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영적 예배라는 것은, 자신의 전 생애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J. I. Packer, Wayne Grudem, and Ajith Fernando, eds., ESV Global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2012), 1597.

 

4. 찬양에 대한 묵상

이 찬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 가운데 온전히 들어간 한 여인의 모습 그리고 성도의 모습을 보여준다. 기독교는 당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아무 이유 없이 억지로 요구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십자가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죄인을 위하여 기꺼이 주셨기에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모든 것을 드리는 것이다.

우리가 종종 가지는 큰 착각은 내가 주님께 모든 것을 다 드리면 마치 그것이 주님의 은혜를 다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나에게 베풀어주신 십자가의 은혜는 감히 내가 다 갚을 수 없는 것이다. 그분의 은혜는 너무나 큰 것이며, 나의 전 존재를 온전히 감싸고 계시는 것이다. 비록 내가 주님께 드리는 것들은 여전히 흠이 많고 부족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나의 헌신을 기쁨으로 받아주시는 것이다.

신앙이 성숙한다는 것은, 영적인 참된 가치를 깨달아 아는 것이다. 가사의 고백처럼 예수 그리스도만이 가장 존귀한 분이심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 안에서 기쁨과 감격을 발견하고 누리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성숙한 성도는 한편으로는 그리스도를 깊이 사랑하고 그분을 즐거워하는 자이다.

세상은 주님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성도를 비웃을 것이다. 그러나 참된 성도는 세상의 시선과 관계 없이 오직 성령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을, 그동안 감춰두었던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도 아낌 없이 주님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다. 또한 성경은 바로 이러한 삶을 영적인 예배라고 부르며 모든 성도가 나아가야 할 마땅한 성도의 삶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찬양을 부를 때 마다, 감히 측량할 수 없는 십자가의 은혜를 묵상하며, 나 자신이 그 안에 있음을 감사하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나를 주님께 드리는 아름다운 성도님들 되시기를 기대한다.

* 삶으로 드리는 찬양 전체 묵상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06/1_30.html 

2023년 3월 11일 토요일

팀 켈러에게 배우다 (8) - The Final Temple / "죽임 당하신 어린양"의 위대함

 



보통 글을 쓰기전에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최소 다섯번 정도 듣습니다. 처음 그리고 두번째 정도까지는 알아듣지 못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하지만 세번째 정도 이상부터는 꽤 많은 부분을 알아듣습니다. 그리고 내용의 전체적인 구조를 대략 알게 됩니다. 

그런데 안 들리는 부분은 끝까지 안들립니다. 대부분 특정 단어를 모르기 때문이고, 그리고 문장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충분히 듣고 고민한 다음에 설교 원고를 읽으면서 공부합니다. 

원고를 읽으면서 눈이 밝아집니다. 아.. 탄성이 절로 나옵니다. 이제야 온전히 보이는 환상적인 논리 전개와 방향 전환, 매력적인 표현들과 논리적이며 감성적인 조화는 마음을 감동시킵니다.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는 속이 꽉 차 있습니다. 말이 상당히 빠른데 최소 35분 정도 이상의 설교이기 때문에, 조금 과장하자면 그 안에 무한대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 한편을 진득하게 제대로 공부하기만 해도 배울 수 있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이번 설교는 완전한 성전이 되시는 예수님에 대한 설교입니다. 

최근에 저의 설교의 변화는, 좀 더 충실하게 내용적으로 그리고 감성적으로 그리스도의 위대하심을 드러내는데 힘을 쏟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했다더라의 방향이 아니라, 그것이 설교에 있어서 정말 가장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저의 표현과 논리는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라는 틀을 벗어난다는 것이 정말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 고민 속에서 팀켈러 목사님의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 그리고 그분의 표현들이 저의 마음을 너무나 새롭게 하고 또 기쁘게 합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두가지의 양립되는 속성들, 예를 들어서 완전한 높으심과 완전한 접근성을 모두 가지고 계신다라는 연속되는 표현은, 마음에 감동을 주면서 혀를 내두르게 합니다. 


특별히 이번 설교는, 장엄한 성경 신학을 배운 정말 좋은 기회였습니다. 보통 설교자의 입장에서 이렇게 설교하면 혹시 근거 없는 알레고리식 설교가 아닐까? 라는 고민을 많이 합니다. 보수적이고 성경 중심적인 설교를 배운 저는 특히 그렇습니다. 

그래서 팀캘러 목사님이 비유나 상징을 풀어내는 방식과 범위는 너무나 큰 도움이 됩니다. 적어도 그분이 그렇게 한다면, 저도 그렇게 할 수 있는 room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에덴 동산이 참 된 하나님의 성전이었는데,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여서 쫓겨납니다. 그리고 거기로 다시 들어갈 방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화염검이 있기 때문입니다. 합당한 죄의 댓가를 치르지 않는다면, 절대로 다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방법이 없습니다. 


평소에는 에덴 동산의 화염검을 그렇게 많이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미 창세기부터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벗어난 인간이 댓가를 치뤄야 하는 인간의 운명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는 것을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절정은, 요한계시록 5장 6절에서 "slaughtered Labm"에서 드러납니다. 팀켈러 목사님은 창세기의 그 하나님의 검과 연결지어서,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검으로 도살당하셨다고 연결합니다. 개역개정은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라고 표현하지만, 원어적으로는 도살된 것을 의미합니다. NASB는 "as if slain"으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잔인하게 찢기고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설교를 듣고 공부하면서 마음에 감사가, 그리고 또 한 없는 은혜가 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저를 위하여 그리고 죄인을 위하여 기꺼이 자신의 몸을 드리셨습니다. 그분은 온전히 찢어지셨고 그리하여 모든 죄의 댓가를 다 치르셨습니다. 그분은 가장 영광스러운 왕으로 또 죽임 당하신 어린 양으로 역사의 마지막에 나타나실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더욱 살아하고 갈망하고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 "팀켈러에게 배우다" 모음
- 성경과 신학, 그리고 목회를 배우기 위하여

https://jungjinbu.blogspot.com/2023/01/blog-post.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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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11일 목요일

책 어디까지 읽어봤니? (15) - 교회를 부탁해 / 교회가 회복하기 위한 본질의 길



* 내용 요약과 말씀에 대한 이해 

교회를 부탁해라는 책은 제목부터 매우 인상적인 책입니다. 교회에 문제가 있는 것인가? 교회를 누가 잃어버린 것인가? 왜 교회를 부탁하는가? 라는 궁금증이 절로 떠오르게 만드는 좋은 제목입니다. 소제목이 내용을 짐작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를 되찾아가는 비밀한 추리 여정이라는 소제목입니다. 이 책의 기본 전제는 현재 시대의 교회는 문제가 있고, 이 책의 목적은 그 교회를 다시 회복하기 위한 여정을 안내하는 것입니다.

주인공은 신학박사 하카드와 탐정인 매튜입니다. 매튜는 교회를 수사해 달라는 사탄의 의뢰를 받고 하카드를 찾아갑니다. 사탄은 교회에 혐의가 있다고 주장하며 탐정 매튜에게 의뢰를 합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 소녀의 모습으로 교회인 에끌이 나타납니다. 에끌은, 바실리카라 그리고 폰티펙스라는 영양제를 매 주 먹고 있다고 하는데 한눈에 봐도 건강이 매우 좋지 않습니다.

에끌은 비유의 도시인 마샬 시티에 살고 있습니다. 원래 에끌은 부활의 성 안에 살고 있어야 하고, 왕의 성인 부활의 성에서 제사장의 자리에서 마샬 시티를 다스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에끌은 늘 먹던 에빵을 버리고, 자신을 찾아온 황금 송아지와 그가 주는 다른 빵에 홀려 부활의 성을 떠나버립니다.

하카드와 매튜는 에끌이 먹고 있다는 영양제를 의심하고 그것을 분석합니다. 먼저 바실리카가 고대 로마의 양식이고, 그것을 에끌에게 준 황금 송아지는 다름 아니라 콘스탄티누스 1세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들은 마샬 시티에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면서부터 직접 세운 최초의 교회 형태인 바실리카를 보게 됩니다.

에끌이 먹던 바실리카는 치명적인 약으로 밝혀지게 됩니다. 바실리카는 테아트룸, 텔루스, 아폴로라는 세가지 원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먼저 테아트룸은 극장이라는 의미로, 초대 교회의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에서, 이제는 무대와 관객으로 예배의 구조를 바꾸어 버린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이하 개역개정) 3:16 Let the word of Christ dwell in you richly as you teach and admonish one another with all wisdom, and as you sing psalms, hymns and spiritual songs with gratitude in your hearts to God. (이하 NIV)

3:16 education, Christians—Ideally, in a congregation of Christians, every person is a teacher, and every person a learner. Each of us has something to share out of our personal experiences with God. Each of us has something to learn from brothers and sisters in Christ. This will happen only where the word of Christ dwells within the hearts of the people. As we sing hymns of worship and praise with grateful hearts, we teach one another. 이상적으로는, 기독교인의 회중 안에서 모든 사람이 교사이고 모든 사람이 배우는 사람입니다. 우리 각자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고 그것으로부터 공유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 자매들에게서 배울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 안에 거할 때에만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의 마음으로 예배하고 찬양할 때에, 우리는 서로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Holman Bible Publishers, CSB Disciple’s Study Bible: Notes (Nashville, TN: Holman Bible Publishers, 2017), 1866.


두번째 원료는 텔루스인데, “자기 소유 혹은 땅이라는 뜻입니다. 콘스탄티누스를 통해서 교회로 막대한 자본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세례를 받는 것이 곧, 지위와 재산을 얻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리고 성직자는 사회적인 특권층이 되었습니다. 죄와 자기 소유 그리고 자아를 무너뜨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의 일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제 기독교의 궁극적인 끝이 자신의 성공을 이루는 것이라고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마가복음 12:28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12:28 One of the teachers of the law came and heard them debating. Noticing that Jesus had given them a good answer, he asked him, "Of all the commandments, which is the most important?" 12: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12:29 "The most important one," answered Jesus, "is this: 'Hear, O Israel, the Lord our God, the Lord is one. 12: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12:30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 and with all your strength.' 12: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12:31 The second is this: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There is no commandment greater than these."

12:30–31 chrysostom: This is the summit of virtue, the foundation of all God’s commandments: to the love of God is joined also love of neighbor. One who loves God does not neglect his brother, nor esteem money more than a limb of his own, but shows him great generosity, mindful of him who has said, “Whoever did it to the least of my brothers did it to me” [Mt 25:40]. He is aware that the Lord of all considers as done to himself what is done in generosity to the poor in giving relief. He does not take into consideration the lowly appearance of the poor, but the greatness of the One who has promised to accept as done to himself what is given to the poor [see Mt 25:31–46]. homilies on genesis, homily 55.12. 이것이 덕의 정점이며, 하나님의 모든 계명의 기초입니다. 즉 하나님 사랑에는 이웃 사랑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형제를 소홀히 하지 아니하며, 돈을 자신의 팔과 다리보다 중히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형제 중에서 가장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신 그분을 생각하며 크게 배풉니다. 그는 구제를 할 때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대하게 행하는 것을 만물의 주님께서 주님 자신에게 행한 것으로 여기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가난한 자의 비천한 외모를 고려하지 않고, 가난한 자에게 주어진 것을 그분 자신에게 한 것으로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하신 그분의 위대함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James Stuart Bell, ed., Ancient Faith Study Bible (Nashville, TN: Holman Bibles, 2019), 1209.


마지막 재료는 아폴로인데, 그리스의 태양신 아폴론의 라틴어 발음입니다. 이것은 다신론에 익숙했던 로마인들을 위하여 기독교 내에 이교적인 요소들을 섞어 버린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이 세가지로 인해서 사람들은 회개 없는 십자가를 붙들게 되었고, 막연한 구원의 세례를 얻게 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9:2 그가 무저갱을 여니 그 구멍에서 큰 화덕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오매 해와 공기가 그 구멍의 연기로 말미암아 어두워지며 9:2 When he opened the Abyss, smoke rose from it like the smoke from a gigantic furnace. The sun and sky were darkened by the smoke from the Abyss. 9:3 또 황충이 연기 가운데로부터 땅 위에 나오매 그들이 땅에 있는 전갈의 권세와 같은 권세를 받았더라 9:3 And out of the smoke locusts came down upon the earth and were given power like that of scorpions of the earth.


초기 기독교 이후의 교회는 표면적으로 로마 카톨릭만 있는 것 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동방 서방 곳곳에 숨어 있었고 결국 그들을 통해서 종교 개혁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에끌이 먹던 영양제인 폰티펙스의 정체도 밝혀집니다. 먼저 폰티펙스는 로마 이교 제사장의 칭호였고, 그 의미는 "신과 인간 사이의 다리를 놓는 사람" 이라는 의미입니다. 교회는 이것의 영향으로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말을 쓰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구분으로 인해서 성직자만이 제사장의 역할을 하게 하고 성도들의 삶에서 의가 나타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2:9 But you are a chosen people, a royal priesthood, a holy nation, a people belonging to God, that you may declare the praises of him who called you out of darkness into his wonderful light.

2:9 chosen race. As the Israelites were once the chosen people of God, now Christians are the new Israel, chosen by God. royal priesthood. The priests belong to the King, God Himself. Luth: “Each and all are … equally spiritual priests before God.… Faith alone is the true priestly office.… Therefore all Christian men are priests, all women priestesses, be they young or old, master or servant, mistress or maid, learned or unlearned” (AE 35:101). holy nation. God’s people, individually and collectively, are set apart to do His will (Ex 19:5–6). a people for His own possession. Repeats the truth that God’s people belong to Him. See “portion,” 이스라엘 백성이 한때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것처럼, 이제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이 택하신 새로운 이스라엘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 : 제사장들은 왕이신 하나님 자신에게 속해있습니다.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각 사람과 모든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영적인 제사장입니다. 오직 믿음만이 참된 제사장 직분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기독교 남성은 제사장들이며, 그리고 모든 여성은 여사제이며, 나이가 많든 적든, 주인이든 하인이든, 안주인이든 하녀이든, 학식이 있든 없든 그렇습니다거룩한 나라요 : 하나님의 백성은, 개인적이든지 혹은 집단적이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구별되었습니다.

Edward A. Engelbrecht, The Lutheran Study Bible (St. Louis, MO: Concordia Publishing House, 2009), 2151–2152.


라틴어 성경인 불가타역은 천년 동안 사용된 것인데, 이것으로 인해서 일반인이 성경을 읽는 것과 소유하는 것이 힘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피터 왈도와 틴들과 같은 이들의 성경 번역으로 인해서, 이제는 모든 이들이 말씀을 온전히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원래 에끌이 먹던 에빵의 재료는 세가지입니다. 하나는 아드 폰테스인데, “근원으로 돌아가자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슬로건으로, 이제는 사람들이 근원으로 돌아가서 성경 원문을 직접 대면하면서 성경적으로 어긋나는 전통에서 벗어나 진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두번째는 엔톨레인데, “하나님의 계명이라는 뜻입니다. 말씀을 지키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방식이며, 하나님의 빛이 세상에 드러나는 방식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7:24 "Therefore everyone who hears these words of mine and puts them into practice is like a wise man who built his house on the rock. 7: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7:25 The rain came down, the streams rose, and the winds blew and beat against that house; yet it did not fall, because it had its foundation on the rock.        

7:24–27 The adjectives wise and foolish describe a person’s spiritual and moral state, not his intellect. Whether one is considered wise or foolish is determined by his response to Jesus’s teaching. Since OT writers described God’s wrath using the image of a great storm (Is 28:16–17; Ezk 13:10–13), the storm that destroys the house on the sand is a picture of divine judgment. Hence, the person who hears and acts on Jesus’s teaching is prepared for judgment. The one who hears but doesn’t act on Jesus’s words will be destroyed in the storm of judgment. 지혜롭다는 그리고 어리석다는 형용사는 사람의 지성이 아니라 영적이고 도덕적인 상태를 나타냅니다. 지혜로운 사람인지 혹은 어리석은 사람인지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그의 반응에 따라 결정됩니다. 구약의 저자들이 거대한 폭풍의 형상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묘사하였기 때문에, 모래 위에 집을 무너뜨리는 폭풍은 하나님의 심판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심판을 받을 있는 준비가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심판의 폭풍우에 멸망 당할 것입니다.

Robert H. Stein, “Differences in the Gospels,” in CSB Study Bible: Notes, ed. Edwin A. Blum and Trevin Wax (Nashville, TN: Holman Bible Publishers, 2017), 1512.


세번째 에빵의 재료는 피스티스 크리스투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을 의미합니다. 특히 로마서 322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십니다. 그리고 모든 의미를 이루신 그분의 신실함과 충성이 한 사람의 자아를 채우며 그 안에 들어와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KJV 1900 Even the righteousness of God which is by faith of Jesus Christ unto all and upon all them that believe: for there is no difference:

NASB95 even the righteousness of God through faith in Jesus Christ for all those who believe; for there is no distinction;

HCSB—that is, God’s righteousness through faith in Jesus Christ, to all who believe, since there is no distinction.

NLT We are made right with God by placing our faith in Jesus Christ. And this is true for everyone who believesno matter who we are.

NIrV We are made right with God by putting our faith in Jesus Christ. That happens to all who believeIt is no different for the Jews than for anyone else.

NET 22 namely, the righteousness of God through the faithfulness of Jesus Christ

QUESTION—How should the genitive construction πίστεως ησο Χριστο be understood in the phrase ‘faith in Jesus Christ’?

1. The genitive is objective, meaning ‘through faith in Jesus Christ’ [AB, BECNT, Gdt, HNTC, Ho, ICC1, ICC2, Mu, NAC, NICNT, NTC, SSA, St, TH, TNTC, WBC; CEV, GW, NASB, NCV, NLT, NRSV, REB, TEV]. Paul is not drawing attention to Christ’s faithfulness anywhere in Romans [AB, WBC], rather Christ is himself the manifestation of God’s uprightness and people appropriate to themselves the effects of his work through faith in him [AB]. Paul indicates that the object of the faith is Jesus Christ [Mu, NTC]. The emphasis in the entire section is on the faith of the believer in contrast to ‘works of the law’ as the means through which God’s righteousness comes to expression; this faith is directed towards Christ as the object [WBC]. The genitive should be taken as objective, since the thrust of the entire section is to further explicate 1:17, and the same construction in Gal 2:16 means ‘believed in Christ Jesus’ [SSA]. The righteousness in question is that which is received by means of faith in Christ, who is the object of the faith [ICC2]. The righteousness that God provides comes by means of faith in Christ, and is received and appropriated through the faith of which Christ alone is the object [Ho].

2. The genitive is subjective or possessive, meaning through the faithfulness of Jesus Christ [NET].

3. It could have both objective and subjective meanings, and Paul does not care to limit it to only one or the other; our faith is in Jesus Christ but is based on what he did in his faithfulness [Mor].

David Abernathy, An Exegetical Summary of Romans 1–8, 2nd ed. (Dallas, TX: SIL International, 2008), 262.


결국 에끌은 완성된 에빵을 먹게 되고, 자신의 처소인 광야로 돌아가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에끌에서 말씀의 근원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계명을 가르쳐 지키고, 그리스도의 신실함을 가지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그때서야 교회는 승리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광야 장막에 거하면서 충만하게 될 것을 명령하십니다.

요한계시록 14: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14:12 This calls for patient endurance on the part of the saints who obey God's commandments and remain faithful to Jesus.

14:12 The threat of persecution and death was very real to the Christians first reading this letter, so John calls God’s people to obedience and faithfulness (see 2:10; 3:10; 12:17; 13:10). 박해와 죽음의 위협은 편지를 처음 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현실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여 순종과 신실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 Study Bible (Carol Stream, IL: Tyndale House Publishers, Inc., 2008), 14:12.

* 내용에 대한 서평

책은 마음에 깊이 다가오는 책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자신의 값으로 사신 그분의 몸입니다. 교회는 전적으로 예수님께 속해 있습니다. 교회는 그분의 것입니다. 그러나 에끌이 에빵을 던져 버리고 황금 송아지를 따라가버린 처럼, 우리는 그리고 교회는 길을 잃었습니다.

첫번째, 테아트룸에서, 초대 교회의 예배의 형태가 극장 형식으로 변질되면서, 그리고 이러한 무대와 관객의 구조가 여전히 지속되면서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잃어버렸다는 것도 일부분 인정할 있습니다. 역시 회중의 입장에서는 마치 예배를 관람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책은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에 저자의 주장은 지나친 논리적인 비약입니다. 책의 저자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당장 모든 교회의 극장 형식을 버리고 역동적인 성경 연구, 토론, 강론만 있다면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릴 있게 되는가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록 건물의 형태가 없다 하더라도, 무대와 관객의 구조 혹은 설교하는 자와 설교를 듣는 자는 성경적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군중들을 향해서 설교를 하셨기 때문에 그리고 사도들의 설교 역시 이런 구조를 가지기 때문에, 설교하는 자와 듣는 자의 구조 자체에 모든 문제를 돌리는 것은 논리적인 비약입니다.

저는 오히려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성도의 교제 그리고 안에서 일어나는 활발한 배움을 끊임없이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많은 목회자들은 성경적인 지식은 오직 자기 자신으로 부터로만 흘러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바로 이 부분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가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적어도 제가 경험해본 바로는 신앙의 연륜이 깊은 분들은 이미 훌륭한 신학자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단지 정교한 신학적인 용어를 구사하지 못할 뿐인지, 그들 나름대로의 깊은 성경적인 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피차 가르치고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역할은, 이들과 부지런히 소통하면서 단순히 강의가 아니라 깊은 토론과 서로 간의 소통을 통해서 성경적인 양육 공동체를 만들고, 궁극적으로 성도들이 좋은 리더로 세워지도록 돕는 것이라고 말할 있겠습니다.

두번째, 텔루스라는 부분이 크게 마음에 닿았습니다. 저는 교회사를 살펴보면서, 기독교가 공인되었다는 자체를 기쁘게 생각할 때가 많았습니다. 이것이 너무나 소중한 것은, 많은 성도들이 자신의 피를 흘린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공인되었을 때에, 모든 기독교인들이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인하여서 오히려 기독교인들이 의도하지 않은 반대의 결과가 일어났습니다.

반드시 이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독교가 세상의 성공과 분리되지 못하고 하나가 되어 버렸을 때에, 그리고 기독교가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것과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에서부터 멀어졌을 때에, 교회는 교회의 정체성과 영향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런 면에서 마지막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에끌을 광야에서 만나신 것은 너무나 의미심장한 장면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성공을 추구하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광야를 벗어나게 것입니다.

셋째로 아폴로라는 부분은 저자는 크게 설명을 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충분히 생각해 있는 부분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다양한 문화 속에 기독교를 집어 넣기 위해서 지나치게 많은 것을 희생한 합니다. 기독교가 가지는 분명한 도덕적인 기준과 인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러한 기준을 낮추고 세상의 문화와 적당히 섞으면 사람들이 회심하고 성도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역시 저자가 그렇게 생각하는 처럼, 희석시킨 기독교의 메시지로는, 회개 없는 십자가 밖에 만들어낼 없습니다. 회개가 없는 십자가라는 것은 말도 안되는 어구이지만, 실제로 그것이 우리의 현실에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개탄할 만한 상황입니다.

이제 교회를 회복하기 위한 방법에 대한 저의 생각입니다. 첫째로, 포니펙스의 문제입니다. 역시 평신도라는 말을 싫어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많은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성도님들을 세우고 그분들을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는 자들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제사장의 모습으로 세우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저는 저자의 주장에 따라서,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말을 쓰게 것이 문제라는 것은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하나의 이유만으로 성도들의 삶에서 의가 나타나지 못한다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성도의 삶에서 의가 드러나지 않는 것은 매우 복합적인 문제입니다. 시대적인 문제와 개인적인 문제가 얽혀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교회는 그리고 목회자는 성도들이 마땅히 제사장으로 세워지도록 그들을 존중하고 세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과 병행하여서 반드시 성도 자신이 길을 마땅히 걸어가야 합니다.

둘째로, 아드 폰테스입니다. 아드 폰테스를 통해서 성경의 원문을 통해서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현대의 성도들은 성경을 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지도 묵상하지도 않고, 그리고 그것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않습니다. 과연 꾸준히 포기하지 않고 말씀을 평생 읽어나가는 성도가 한 교회에 몇분이나 존재할까요?

라틴어 성경에서 누구도 읽을 없는 그것을 다시 자국어로 번역하기 위해서 많은 선진들이 피를 흘렸지만, 정작 시대 사람들은 성경 자체를 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부분을 거창하게 접근할 것이 아니라 아주 실제적이고 체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본인이 직접 읽게 만들고, 그리고 그것을 습관화 되도록 만들고, 그리고 어느 정도 수준에서 그것을 해석할 있는 힘을 길러주야 합니다. 길이지만, 반드시 가야 하는 길입니다.

셋째로, 앤톨레입니다. 최근에 저의 개인적인 그리고 목회적인 경험을 통해서, 이것이야 말로 신앙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부분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말씀을 듣는 자가 아니라 듣고 행하는 자가 복된 사람이라는 것은 우리의 삶을 관통하는 가장 결정적인 진리입니다

만약 참된 교회의 모습으로 서고자 한다면, 듣는데 치중하기 보다는, 들은 것을 행하는데 치중해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완전함이 존재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순종하고 따를 밖에 없는 성도의 운명적인 정체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참되게 따르고자 하는 이는 행위로 구원 받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자기 자신을 더욱 쳐서 복종할 뿐입니다. 순종 가운데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넷째로, 피스티스 크리스투입니다. 저의 사견으로는, 굳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이라고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크게 납득이 되지는 않습니다. 이미 대부분의 영어 번역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라고 이해하고 있고, 대부분의 주석가들 역시 이렇게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문을 이렇게 해석할 있다는 점과 그것이 가진 의미 자체는 매우 존중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믿음 조차도 마치 내가 만들어 내는 어떤 것으로 이해할 때가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말씀을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이해한다면, 나의 믿음 이전에 그리스도의 신실함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삼위 하나님의 예정이 계셨습니다. 감격을 경험합니다. 성경을 이해하는 것은, 어떤 거대한 패러다임의 전환과 비슷합니다.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하나님 중심의 사고의 전환입니다. 정확하게 성경이 이것을 이미 이야기하지만, 그러나 이러한 관점의 전환을 경험하는 것은 성령님의 은혜로 일어납니다. 인간이 무엇인가 있다는 것을 포기하고, 삼위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역사하시며 이끌어가심을 나의 진심으로 고백할 때에 우리는 성경적인 신앙 위에 있게 됩니다.

책을 통해서 제가 잃어버린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회복해야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 묵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부르신 목적이, 저의 삶을 통해서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역시 교회로서 예수님과 함께 광야에서 머무르겠습니다. 그분을 따라 마땅히 가야 길을 걸어가겠습니다. 이것이 책을 읽고 정리한 저의 생각과 마음입니다.

* "책 어디까지 읽어봤니?" 전체 글 모음 / 당신을 변화시키기 위한 "가장 아름다운 길"
https://jungjinbu.blogspot.com/2023/03/blog-post_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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