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은 신학박사 하카드와 탐정인 매튜입니다. 매튜는 교회를 수사해 달라는 사탄의 의뢰를 받고 하카드를 찾아갑니다. 사탄은 교회에 혐의가 있다고 주장하며 탐정 매튜에게 의뢰를 합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 소녀의 모습으로 교회인 에끌이 나타납니다. 에끌은, 바실리카라 그리고 폰티펙스라는 영양제를 매 주 먹고 있다고 하는데 한눈에 봐도 건강이 매우 좋지 않습니다.
에끌은 비유의 도시인
마샬 시티에 살고 있습니다. 원래 에끌은 부활의 성 안에 살고 있어야 하고, 왕의 성인 부활의 성에서 제사장의 자리에서 마샬 시티를 다스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에끌은 늘 먹던 에빵을 버리고, 자신을 찾아온 황금 송아지와 그가 주는 다른 빵에 홀려 부활의
성을 떠나버립니다.
하카드와 매튜는 에끌이 먹고 있다는 영양제를 의심하고 그것을 분석합니다. 먼저 바실리카가 고대 로마의 양식이고, 그것을 에끌에게 준 황금 송아지는 다름 아니라 콘스탄티누스 1세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들은 마샬 시티에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면서부터 직접 세운 최초의 교회 형태인 바실리카를 보게 됩니다.
에끌이 먹던 바실리카는 치명적인 약으로 밝혀지게 됩니다. 바실리카는 테아트룸, 텔루스, 아폴로라는 세가지 원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먼저 테아트룸은 “극장”이라는 의미로, 초대 교회의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에서, 이제는 무대와 관객으로 예배의 구조를 바꾸어 버린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이하 개역개정) 3:16 Let the word of Christ dwell in you richly as you teach and admonish one another with all wisdom, and as you sing psalms, hymns and spiritual songs with gratitude in your hearts to God. (이하 NIV)
3:16 education, Christians—Ideally, in a
congregation of Christians, every person is a teacher, and every person a
learner. Each of us has something to share out of our personal experiences with
God. Each of us has something to learn from brothers and sisters in Christ.
This will happen only where the word of Christ dwells within the hearts of the
people. As we sing hymns of worship and praise with grateful hearts, we teach
one another. 이상적으로는, 기독교인의 회중 안에서
모든 사람이 교사이고 모든 사람이 배우는 사람입니다. 우리 각자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고 그것으로부터 공유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 자매들에게서 배울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 안에 거할 때에만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의 마음으로 예배하고 찬양할 때에, 우리는 서로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Holman Bible Publishers, CSB Disciple’s Study Bible: Notes (Nashville, TN: Holman Bible Publishers, 2017), 1866.
두번째 원료는 텔루스인데, “자기 소유 혹은 땅”이라는 뜻입니다. 콘스탄티누스를 통해서 교회로 막대한 자본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세례를 받는 것이 곧, 지위와 재산을 얻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리고 성직자는 사회적인 특권층이 되었습니다. 죄와 자기 소유 그리고 자아를 무너뜨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의 일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제 기독교의 궁극적인 끝이 자신의 성공을 이루는 것이라고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마가복음 12:28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12:28 One of the teachers of the law came and heard them debating. Noticing that Jesus had given them a good answer, he asked him, "Of all the commandments, which is the most important?" 12: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12:29 "The most important one," answered Jesus, "is this: 'Hear, O Israel, the Lord our God, the Lord is one. 12: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12:30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 and with all your strength.' 12: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12:31 The second is this: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There is no commandment greater than these."
12:30–31 chrysostom: This is the summit of
virtue, the foundation of all God’s commandments: to the love of God is joined
also love of neighbor. One who loves God does not neglect his brother, nor
esteem money more than a limb of his own, but shows him great generosity,
mindful of him who has said, “Whoever did it to the least of my brothers did it
to me” [Mt 25:40]. He is aware that the Lord of all considers as done to
himself what is done in generosity to the poor in giving relief. He does not
take into consideration the lowly appearance of the poor, but the greatness of
the One who has promised to accept as done to himself what is given to the poor
[see Mt 25:31–46]. homilies on genesis,
homily 55.12. 이것이 덕의 정점이며,
하나님의 모든 계명의 기초입니다. 즉 하나님 사랑에는 이웃 사랑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형제를 소홀히 하지 아니하며, 돈을 자신의
팔과 다리보다 중히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형제 중에서 가장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신 그분을 생각하며 크게 배풉니다. 그는 구제를 할 때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대하게 행하는 것을 만물의
주님께서 주님 자신에게 행한 것으로 여기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가난한 자의 비천한 외모를
고려하지 않고, 가난한 자에게 주어진 것을 그분 자신에게 한 것으로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하신 그분의 위대함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James Stuart Bell, ed., Ancient Faith Study
Bible (Nashville, TN: Holman Bibles, 2019), 1209.
마지막 재료는 아폴로인데, 그리스의 태양신 아폴론의 라틴어 발음입니다. 이것은 다신론에 익숙했던 로마인들을 위하여 기독교 내에 이교적인 요소들을 섞어 버린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이 세가지로 인해서 사람들은 회개 없는 십자가를 붙들게 되었고, 막연한 구원의 세례를 얻게 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9:2 그가 무저갱을 여니 그 구멍에서 큰 화덕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오매 해와 공기가 그 구멍의 연기로 말미암아 어두워지며 9:2 When he opened the Abyss, smoke rose from it like the smoke from a gigantic furnace. The sun and sky were darkened by the smoke from the Abyss. 9:3 또 황충이 연기 가운데로부터 땅 위에 나오매 그들이 땅에 있는 전갈의 권세와 같은 권세를 받았더라 9:3 And out of the smoke locusts came down upon the earth and were given power like that of scorpions of the earth.
초기 기독교 이후의 교회는 표면적으로 로마 카톨릭만 있는 것 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동방 서방 곳곳에 숨어 있었고 결국 그들을 통해서 종교 개혁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에끌이 먹던 영양제인 폰티펙스의 정체도 밝혀집니다. 먼저 폰티펙스는 로마 이교 제사장의 칭호였고, 그 의미는 "신과 인간 사이의 다리를 놓는 사람" 이라는 의미입니다. 교회는 이것의 영향으로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말을 쓰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구분으로 인해서 성직자만이 제사장의 역할을 하게 하고 성도들의 삶에서 의가 나타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2:9 But you are a chosen people, a royal priesthood, a holy nation, a people belonging to God, that you may declare the praises of him who called you out of darkness into his wonderful light.
2:9 chosen race. As the
Israelites were once the chosen people of God, now Christians are the new
Israel, chosen by God. royal priesthood.
The priests belong to the King, God Himself. Luth: “Each and all are … equally
spiritual priests before God.… Faith alone is the true priestly office.…
Therefore all Christian men are priests, all women priestesses, be they young
or old, master or servant, mistress or maid, learned or unlearned” (AE 35:101).
holy nation. God’s people,
individually and collectively, are set apart to do His will (Ex 19:5–6). a people for His own possession. Repeats
the truth that God’s people belong to Him. See “portion,” 이스라엘
백성이 한때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것처럼, 이제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이 택하신 새로운 이스라엘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 : 제사장들은 왕이신 하나님 자신에게 속해있습니다.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각 사람과 모든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영적인 제사장입니다. 오직 믿음만이 참된 제사장
직분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기독교 남성은 제사장들이며, 그리고
모든 여성은 여사제이며, 나이가 많든 적든, 주인이든 하인이든, 안주인이든 하녀이든, 학식이 있든 없든 그렇습니다” 거룩한 나라요 : 하나님의 백성은,
개인적이든지 혹은 집단적이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구별되었습니다.
Edward A. Engelbrecht, The Lutheran Study Bible (St. Louis, MO: Concordia Publishing House, 2009), 2151–2152.
라틴어 성경인 불가타역은 천년 동안 사용된 것인데, 이것으로 인해서 일반인이 성경을 읽는 것과 소유하는 것이 힘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피터 왈도와 틴들과 같은 이들의 성경 번역으로 인해서, 이제는 모든 이들이 말씀을 온전히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원래 에끌이 먹던 에빵의 재료는 세가지입니다. 하나는 아드 폰테스인데, “근원으로 돌아가자” 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슬로건으로, 이제는 사람들이 근원으로 돌아가서 성경 원문을 직접 대면하면서 성경적으로 어긋나는 전통에서 벗어나 진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두번째는 엔톨레인데, “하나님의 계명”이라는 뜻입니다. 말씀을 지키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방식이며, 하나님의 빛이 세상에 드러나는 방식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7:24 "Therefore everyone
who hears these words of mine and puts them into practice is like a wise man
who built his house on the rock. 7: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7:25 The rain came down, the streams rose, and the winds blew
and beat against that house; yet it did not fall, because it had its foundation
on the rock.
7:24–27 The
adjectives wise and foolish describe a person’s spiritual
and moral state, not his intellect. Whether one is considered wise or foolish
is determined by his response to Jesus’s teaching. Since OT writers described
God’s wrath using the image of a great storm (Is 28:16–17; Ezk 13:10–13), the
storm that destroys the house on the
sand is a picture of divine judgment. Hence, the person who hears and acts on Jesus’s teaching is prepared for judgment. The one who hears but doesn’t act on Jesus’s words
will be destroyed in the storm of judgment. 지혜롭다는 그리고 어리석다는 형용사는 사람의 지성이 아니라 영적이고 도덕적인 상태를 나타냅니다. 지혜로운 사람인지 혹은 어리석은 사람인지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그의 반응에 따라 결정됩니다. 구약의 저자들이 거대한 폭풍의 형상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묘사하였기 때문에, 모래 위에 집을 무너뜨리는 폭풍은 하나님의 심판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심판을 받을 수 있는 준비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심판의 폭풍우에 멸망 당할 것입니다.
Robert H. Stein, “Differences in the Gospels,” in CSB Study Bible: Notes, ed. Edwin A. Blum and Trevin Wax (Nashville, TN: Holman Bible Publishers, 2017), 1512.
세번째 에빵의 재료는
“피스티스 크리스투” 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을 의미합니다. 특히 로마서 3장 22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십니다. 그리고 모든
의미를 이루신 그분의 신실함과 충성이 한 사람의 자아를 채우며 그 안에 들어와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KJV 1900 Even the righteousness of God which is
by faith of Jesus Christ
unto all and upon all them
that believe: for there is no
difference:
NASB95 even the righteousness of God through faith in Jesus Christ for all those who believe;
for there is no distinction;
HCSB—that is, God’s righteousness through faith in Jesus Christ, to all who believe,
since there is no distinction.
NLT We are made right with God by placing our faith in Jesus Christ. And this is true for everyone who believes, no matter who we are.
NIrV We are made right with God by putting
our faith in Jesus Christ. That
happens to all who believe. It is no different for the Jews than for anyone else.
NET 22 namely, the righteousness of God through the faithfulness of Jesus Christ
QUESTION—How
should the genitive construction πίστεως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be understood in the phrase
‘faith in Jesus Christ’?
1. The genitive is objective, meaning
‘through faith in Jesus Christ’ [AB, BECNT, Gdt, HNTC, Ho, ICC1, ICC2, Mu, NAC, NICNT, NTC, SSA,
St, TH, TNTC, WBC; CEV, GW, NASB, NCV, NLT, NRSV, REB, TEV]. Paul is not
drawing attention to Christ’s faithfulness anywhere in Romans [AB, WBC], rather
Christ is himself the manifestation of God’s uprightness and people appropriate
to themselves the effects of his work through faith in him [AB]. Paul indicates
that the object of the faith is Jesus Christ [Mu, NTC]. The emphasis in the
entire section is on the faith of the believer in contrast to ‘works of the
law’ as the means through which God’s righteousness comes to expression; this
faith is directed towards Christ as the object [WBC]. The genitive should be
taken as objective, since the thrust of the entire section is to further
explicate 1:17, and the same construction in Gal 2:16 means ‘believed in Christ
Jesus’ [SSA]. The righteousness in question is that which is received by means
of faith in Christ, who is the object of the faith [ICC2]. The righteousness
that God provides comes by means of faith in Christ, and is received and
appropriated through the faith of which Christ alone is the object [Ho].
2. The genitive is subjective or possessive,
meaning through the faithfulness of Jesus Christ [NET].
3. It could have both objective and subjective meanings, and Paul does not care to limit it to only one or the other; our faith is in Jesus Christ but is based on what he did in his faithfulness [Mor].
David Abernathy, An Exegetical Summary of Romans 1–8, 2nd ed. (Dallas, TX: SIL International, 2008), 262.
결국 에끌은 완성된
에빵을 먹게 되고, 자신의 처소인 광야로 돌아가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에끌에서 말씀의 근원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계명을 가르쳐 지키고, 그리스도의 신실함을
가지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그때서야 교회는 승리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광야 장막에 거하면서 충만하게 될 것을 명령하십니다.
요한계시록 14: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14:12 This calls for patient endurance on the part of the saints
who obey God's commandments and remain faithful to Jesus.
14:12 The threat of persecution
and death was very real to the Christians first reading this letter, so John
calls God’s people to obedience and faithfulness (see 2:10; 3:10; 12:17;
13:10). 박해와 죽음의 위협은 이 편지를 처음 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현실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여 순종과 신실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 Study Bible (Carol Stream, IL: Tyndale House Publishers, Inc., 2008), 계 14:12.
* 내용에 대한 서평
이 책은 마음에 깊이 다가오는 책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자신의 피 값으로 사신 그분의 몸입니다. 교회는 전적으로 예수님께 속해 있습니다. 교회는 그분의 것입니다. 그러나 에끌이 에빵을 던져 버리고 황금 송아지를 따라가버린 것 처럼, 우리는 그리고 교회는 길을 잃었습니다.
첫번째, 테아트룸에서, 초대 교회의 예배의 형태가 극장 형식으로 변질되면서, 그리고 이러한 무대와 관객의 구조가 여전히 지속되면서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잃어버렸다는 것도 일부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저 역시 회중의 입장에서는 마치 예배를 관람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책은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에 저자의 주장은 지나친 논리적인 비약입니다. 이 책의 저자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당장 모든 교회의 극장 형식을 버리고 역동적인 성경 연구, 토론, 강론만 있다면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는가?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록 건물의 형태가 없다 하더라도, 무대와 관객의 구조 혹은 설교하는 자와 설교를 듣는 자는 성경적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군중들을 향해서 설교를 하셨기 때문에 그리고 사도들의 설교 역시 이런 구조를 가지기 때문에, 설교하는 자와 듣는 자의 구조 자체에 모든 문제를 돌리는 것은 논리적인 비약입니다.
저는 오히려 이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성도의 교제 그리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활발한 배움을 끊임없이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많은 목회자들은 성경적인 지식은 오직 자기 자신으로 부터로만 흘러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바로 이 부분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가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적어도 제가 경험해본 바로는 신앙의 연륜이 깊은 분들은 이미 훌륭한 신학자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단지 정교한 신학적인 용어를 구사하지 못할 뿐인지, 그들 나름대로의 깊은 성경적인 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피차 가르치고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역할은, 이들과 부지런히 소통하면서 단순히 강의가 아니라 깊은 토론과 서로 간의 소통을 통해서 성경적인 양육 공동체를 만들고, 궁극적으로 성도들이 좋은 리더로 세워지도록 돕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두번째, 텔루스라는 부분이 크게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저는 교회사를 살펴보면서, 기독교가 공인되었다는 것 자체를 기쁘게 생각할 때가 많았습니다. 이것이 너무나 소중한 것은, 많은 성도들이 자신의 피를 흘린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공인되었을 때에, 모든 기독교인들이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인하여서 오히려 기독교인들이 의도하지 않은 정 반대의 결과가 일어났습니다.
반드시 이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독교가 세상의 성공과 분리되지 못하고 하나가 되어 버렸을 때에, 그리고 기독교가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것과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에서부터 멀어졌을 때에, 교회는 교회의 정체성과 영향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런 면에서 맨 마지막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에끌을 광야에서 만나신 것은 너무나 의미심장한 장면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성공을 추구하기 시작하는 그 순간, 우리는 광야를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셋째로 아폴로라는 부분은 저자는 크게 설명을 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다양한 문화 속에 기독교를 집어 넣기 위해서 지나치게 많은 것을 희생한 듯 합니다. 기독교가 가지는 분명한 도덕적인 기준과 인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러한 기준을 낮추고 세상의 문화와 적당히 섞으면 사람들이 회심하고 성도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저 역시 저자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 처럼, 희석시킨 기독교의 메시지로는, 회개 없는 십자가 밖에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회개가 없는 십자가라는 것은 말도 안되는 어구이지만, 실제로 그것이 우리의 현실에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개탄할 만한 상황입니다.
이제 교회를 회복하기 위한 방법에 대한 저의 생각입니다. 첫째로, 포니펙스의 문제입니다. 저 역시 평신도라는 말을 참 싫어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역시 많은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성도님들을 세우고 그분들을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는 자들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제사장의 모습으로 세우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저는 저자의 주장에 따라서,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말을 쓰게 된 것이 큰 문제라는 것은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이 하나의 이유만으로 성도들의 삶에서 의가 나타나지 못한다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성도의 삶에서 의가 드러나지 않는 것은 매우 복합적인 문제입니다. 시대적인 문제와 개인적인 문제가 얽혀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교회는 그리고 목회자는 성도들이 마땅히 제사장으로 세워지도록 그들을 존중하고 세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과 병행하여서 반드시 성도 자신이 그 길을 마땅히 걸어가야 합니다.
둘째로, 아드 폰테스입니다. 아드 폰테스를 통해서 성경의 원문을 통해서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현대의 성도들은 성경을 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지도 묵상하지도 않고, 그리고 그것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않습니다. 과연 꾸준히 포기하지 않고 말씀을 평생 읽어나가는 성도가 한 교회에 몇분이나 존재할까요?
라틴어 성경에서 누구도 읽을 수 없는 그것을 다시 자국어로 번역하기 위해서 수 많은 선진들이 피를 흘렸지만, 정작 이 시대 사람들은 성경 자체를 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부분을 거창하게 접근할 것이 아니라 아주 실제적이고 체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본인이 직접 읽게 만들고, 그리고 그것을 습관화 되도록 만들고, 그리고 어느 정도 수준에서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야 합니다. 먼 길이지만, 반드시 가야 하는 길입니다.
셋째로, 앤톨레입니다. 최근에 저의 개인적인 그리고 목회적인 경험을 통해서, 이것이야 말로 신앙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부분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말씀을 듣는 자가 아니라 듣고 행하는 자가 복된 사람이라는 것은 우리의 삶을 관통하는 가장 결정적인 진리입니다.
만약 참된 교회의 모습으로 서고자 한다면, 듣는데 치중하기 보다는, 들은 것을 행하는데 치중해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완전함이 존재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순종하고 따를 수 밖에 없는 성도의 운명적인 정체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참되게 따르고자 하는 이는 행위로 구원 받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자기 자신을 더욱 쳐서 복종할 뿐입니다. 순종 가운데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넷째로, 피스티스 크리스투입니다. 저의 사견으로는, 왜 굳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이라고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크게 납득이 되지는 않습니다. 이미 대부분의 영어 번역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라고 이해하고 있고, 대부분의 주석가들 역시 이렇게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문을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는 점과 그것이 가진 의미 자체는 매우 존중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믿음 조차도 마치 내가 만들어 내는 그 어떤 것으로 이해할 때가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이해한다면, 나의 믿음 이전에 그리스도의 신실함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삼위 하나님의 예정이 계셨습니다. 큰 감격을 경험합니다. 성경을 이해하는 것은, 어떤 거대한 패러다임의 전환과 비슷합니다.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하나님 중심의 사고의 전환입니다. 정확하게 성경이 이것을 이미 이야기하지만, 그러나 이러한 큰 관점의 전환을 경험하는 것은 성령님의 은혜로 일어납니다. 인간이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것을 포기하고, 삼위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역사하시며 이끌어가심을 나의 진심으로 고백할 때에 우리는 성경적인 신앙 위에 설 수 있게 됩니다.
이 책을 통해서 제가 잃어버린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회복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 묵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부르신 그 목적이, 저의 삶을 통해서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저 역시 교회로서 예수님과 함께 광야에서 머무르겠습니다. 그분을 따라 마땅히 가야 할 길을 걸어가겠습니다. 이것이 이 책을 읽고 정리한 저의 생각과 마음입니다.
* "책 어디까지 읽어봤니?" 전체 글 모음 / 당신을 변화시키기 위한 "가장 아름다운 길"
https://jungjinbu.blogspot.com/2023/03/blog-post_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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