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같이 허다한
예수의 증인들 있으니 모든 무거운 짐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라 우리 앞에 펼쳐진
삶들은 믿음의 경주니 인내로써 모든 경주들을
힘써 싸워 승리하여라
믿음의 본 되신
예수 십자가 지신 주님 어려움 닥칠 때
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자
2. 곡 소개
이 곡은, 1997년에 발매된 “꿈이 있는 자유 1집”에 수록 된 곡이다. 이
곡은 히브리서 12장의 말씀을 바탕으로 한 곡인데, 성도는
자신의 앞에 놓여진 믿음의 경주를 달려야 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깊이 생각하며 그 길을
정진해야 함을 깨우쳐주는 깊이 있는 찬양이다.
3. 말씀으로 바라보기
히브리서 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12:1 Therefore, since we are
surrounded by such a great cloud of witnesses, let us throw off everything that
hinders and the sin that so easily entangles, and let us run with perseverance
the race marked out for us.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12:2 Let us fix our eyes on
Jesus, the author and perfecter of our faith, who for the joy set before him
endured the cross, scorning its shame, and sat down at the right hand of the
throne of God. 12: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12:3 Consider him who endured
such opposition from sinful men, so that you will not grow weary and lose
heart. 12:12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12:12 Therefore, strengthen your feeble arms and weak knees. 12: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개역개정) 12:13 "Make level paths
for your feet," so that the lame may not be disabled, but rather healed. (NIV)
12:1 여기서 증인은 “순교자”와 같은
말이며 아마도 의도적인 언어 유희일 것입니다. 죄를 벗어 버리라는 것은, 당시 그리스 경기에서 달리기 주자들은 움직임이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 옷을 입지 않고 달린 것과 연결할 수 있습니다.
Joel
R. Beeke, Michael P. V. Barrett, and Gerald M. Bilkes, eds., The Reformation Heritage KJV Study Bible (Grand Rapids, MI: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14), 1801.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83.
4. 찬양에 대한
묵상
이 찬양은, 성도의 삶의 깊은 고난과
어려움,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에 대하여 노래한다.
우리의 삶은 분명한 목적과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믿음의 경주이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기 위하여, 그리고 천성을 향하여 나가는
순례자로서 우리는 이 경주를 감당해야하는 운명으로 부름 받은 것이다.
경주를 하는 선수들은 그 경주를 완주하고 또 승리하기 위하여 자신의 삶의 모든
초점을 맞춘다. 또한 모든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벗어버리고 그 경주에 집중하는 것이다. 믿음의 경주에서 우리가 벗어버려야 하는 것은 죄이다. 성화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불완전한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여 최선을 다하여
죄와 싸우고 그것을 끊임없이 벗어 던져야 한다. 그래야만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름처럼 많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과 순교자들이 우리를 위하여 천국에서 응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어려운 경주를 버티게 하는 영적인 인내를 우리가 가져야 한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꺼이 죄인을, 그리고 나를 참으시고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심으로 경주에서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고 붙들고 그분과의 영적인 교제를 나눔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간절히 바라기는, 이 찬양을 부를 때 마다 우리의 삶의 참된 의미를
발견하기를 원한다. 또한 인내로서 오직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며 힘써 이 모든 경주를 감당하는 분들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기도한다.
김형국 목사님의 실제 강의를 들었을 때에도, "참 이분은 진실한 분이다" 라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정말 자신이 신뢰하는 것을 누군가에게 간절히 알려주기를 원하는 태도가 참 좋았습니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이 "남을 설득 하는 것" 입니다. 사실 귀찮은 일입니다. 듣던지 안 듣던지 그냥 내가 할 말만 하고 가버리는 것이 가장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들, 혹은 신앙에 회의를 가진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이렇게까지 설득하려는 것은 이러한 시도 자체만으로도 그리고 이렇게 탁월한 결과에 큰 박수를 치고 싶고 또 김형국 목사님을 진심으로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번 영상이 참 좋았습니다. 사실 저는, "죄는 깨어짐이며,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 죄이다" 라는 표현이 너무 단순화된 죄의 설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영상을 다시 듣고보니, 충분히 성경적인 설명이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상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내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주신 분을 무시하는 것이라는 논증이 참 좋았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짐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무시함으로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을 받지 못하고, 다른 사람과 남을 비교하고, 삶의 목적을 찾기 어렵고 사명을 찾을 수 없고 자기 중심적으로 살게 된다는 탄탄한 논리적 흐름이 참 좋았습니다. 정말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물론 한가지 약간 아쉬움 혹은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도 있었습니다. 사과 나무 비유로 죄를 설명하면서 "다 잘려버린 본체인 마음이 문제가 없더라도, 뿌리인 하나님과의 관계가 죽어 있다면 그것이 죄"라는 설명은 모순점이 보였습니다. 단 한번도 성경에서는 마음에 문제가 없는 상태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는데, 왜 마음에 문제가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일까? 이 설명의 정확한 의미는 아마 또 다른 내용을 통해서 계속 살펴봐야 할 듯 합니다.
김형국 목사님의 변증은 탁월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법칙을 만드셨고, 그것을 따르지 않으면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은 인간"이라는 것은 팀켈러 목사님의 중요한 논지 중에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 논증이야 말로 세상 사람들 심지어 기독교 인들이 마땅히 말씀을 순종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됩니다. 이미 알던 부분이지만 새롭게 들어서 좋았습니다.
"40대가 되기 전에는 자신이 죄인임을 잘 인정하지 못한다" 라고 말씀하신 것은, 정말 많은 이들과 대화를 나눠본 사람이 할 수 있는 탁월한 통찰이라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젊은 이들 역시 자신의 인생의 유한함을 깨달을 수 있도록 부드럽게 이야기하시는 모습과 태도가 참 좋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생의 유한성을 깨닫도록 어떻게 해야 할까요? 김형국 목사님은 계속적으로 "진실하게 질문을 던지는 것" 그리고 "진실한 각성을 하는 것" 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저도 백퍼센트 동의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렇게 해야 할까요?
이미 자신의 사고가 굳어버린 오래된 신앙인을 변화시키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단순히 일방적인 강의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고, 끊임없이 질문함으로써 그 사람이 생각할 수 있도록 자극하고, 다른 사람의 격려와 수정을 받으면서 스스로 새로운 각성을 만들어내도록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사실 이것이야 말로 크리스천 북클럽의 핵심이고 목적입니다. 그런 면에서, 하나복과 제가 추구하는 크리스천 북클럽의 확고한 연관성을 드디어 제대로 발견하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제가 담임 목회를 시작하게 된다면, 저는 풍삼초 정도는 충분히 적극적으로 사용할 듯 합니다.
풍삼초의 영상과 책을 가지고 북클럽을 계속적으로 진행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열고, 그 이후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또 다른 책들과 제가 경험한 좋은 책들을 가지고 계속적으로 성도의 생각과 마음과 삶을 변화시키는 길을 걸어가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저는 원래 감동을 잘 받는 스타일입니다. :) 저의 이러한 성향이 성경적인 것인지는 깊게 고민해 보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작은 것 안에서라도 큰 행복을 느끼고, 그 안에서 감사를 누릴 때가 종종 있습니다.
팀켈러 목사님 설교를 들으면서 감동 받고 혼자서 눈물을 종종 흘리고 있습니다. 혼자 차를 타고 오고가는 길이 지루하지가 않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렇게 짧은 시간에 이렇게 아름다운 내용을 이렇게 충실하게 설교할 수 있는 것일까요? 심장이 두근거리고 마음이 떨립니다. 아, 은혜 받음의 기쁨,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입니다.
감동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아마 평생 이 부분을 놓고 고민할 것입니다.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자신이 감동을 받아보는 경험은 너무나 중요한 듯 합니다. 왜냐하면, 설교자 자신이 감동을 받지 못했는데, 다른 누군가에게 내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으라고 강요한다는 것은 명백한 논리적인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설교는 평소보다 짧았습니다. 새벽이라 길게하지는 않지만 조금 짧았습니다. 그래도 내용이 너무 마음에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정말 고심해서 준비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한주 내내 머리 속에 본문을 넣고 씨름했습니다.
팀켈러 목사님의 스타일은, 주해적이지만 동시에 철학적입니다. 그리고 본문을 붙들고 있지만 그 본문의 지평을 넓혀주는 그런 느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에서는 아주 엄격하게 말하자면, 신하들이 놀란 다윗의 태도가 더 핵심에 가야하는 것이 맞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번 설교에서, 죄에 대하여 싸우는 것 그리고 인간 아버지의 역설과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에 대해서 준비했고 마음에 흡족했습니다.
이번 본문을 묵상하면서 다양한 스터디 바이블을 참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Faithlife Study Bible 에 대한 짧은 리뷰도 작성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이 이 설교를 준비하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왜 신하들이 다윗에게 아들의 죽음을 말하기를 두려워했는가에 대한 설명들도 보았지만, 특별히 강하게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 설교는 주해를 가지고 와서 설명하는 자리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문맥상 살짝 언급하고 지나갔을 분입니다. 다른자료도신하들의염려를 언급하지만, 기본적으로넷바이블의각주를참조하였습니다.
tnHeb “he will do harm.” The object is not stated in the Hebrew text. The statement may be intentionally vague, meaning that he might harm himself or them!
Biblical Studies Press, The NET Bible, Second Edition. (Denmark: Thomas Nelson, 2019).
그리고 역시나Reformation Heritage KJV Study Bible는실망시키지않았습니다. 설교의앞부분에있어서중요한논리를이끌어가는데큰도움이되었습니다. 말도안되는방종과은혜의남용으로흐를수있는잘못된태도를막아주는역할입니다.
The death of the child indicates that consequences for sin are necessary parts of God’s discipline (Ps. 94:12; Prov. 3:11–12; Heb. 12:5–11; Rev. 3:19). Even sorrow over sin and the resolution to turn from it do not exempt us from all its consequences. Sometimes erring children assume that simply telling their parents they are sorry for a bad behavior will excuse them from any disciplinary action. But learning that sin has consequences and then experiencing those consequences is itself a sanctifying process (Prov. 20:30). The best way to avoid sin’s consequences is to avoid sin. Why is it a mercy that God disciplines His people?
Joel R. Beeke, Michael P. V. Barrett, and Gerald M. Bilkes, eds., The Reformation Heritage KJV Study Bible (Grand Rapids, MI: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14), 447–448.
설교의 후반부는, 최근에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개인적으로 공부했던 부분을 적용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에 대한 설명과 강조가 얼마나 마음에 들었던지, 도대체 잊혀지지가 않았습니다. 마침 오늘 설교 주제와 완전히 맞아 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호칭이 있지만 예수님께서 그분을 아버지라 부르라고 하셨다라는 것은 거의 직접적으로 인용하였습니다. 아래의 글이 이 설교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설교의 전반적인 흐름과 느낌도 팀켈러 목사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가장 작은 것 부터는, 설교 할 때에 상당히 빠르게 발음을 하지만 중요한 문장 혹은 문단 이후에는 충분히 쉬는 것도 그분의 영향입니다. 평소에 저 같으면 중요한 문장 후에 혹은 문단 사이에 약 1초 정도만 쉬었겠지만 이번에는 거의 3초 가까이 pause를 가졌습니다. 성도님들이 그 의미를 음미할 여유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문장 안에서 수식어를 연달아서 설명하면서 감정의 고조를 더하는 것도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 스타일입니다. 저는 수식어를 그렇게 많이 사용해서 연결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거의 처음으로, 완전한 아버지, 거룩하신 아버지, 사랑의 아버지 등등으로 수식어를 연결하고 빠르게 진행함으로써 강조의 느낌을 더 해 보았습니다. 처음이었지만 좋았습니다.
인용 구절도 최소화 시켰습니다. 저는 항상 성도의 인지적인 능력을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짧은 40분 정도의 설교 안에서 인용 구절을 이해할 수 있는 인지적인 한계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아주 흥미로웠던 것은, 성경 구절의 직접 인용을 최소화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설교 중에 설교 본문을 다시 언급하면서 읽어야 할 때에는, 빠르게 약간 대충 읽는 느낌도 납니다. 그래서 저도 인용 구절을 최소화하면서 설교를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설교의 큰 구조와 흐름에서도, 팀켈러 목사님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불완전한 아버지에서 완전한 아버지로 논리적인 흐름을 전개하는 것"도 팀켈러 목사님의 스타일을 차용한 것입니다. 구조에 대한 접근에서는 어떤 의미에서 약간 뜬금 없는 듯한 느낌도 있지만,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정말 괜찮은 논리적인 전개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파악한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의 특징은, 본문 전체를 한 구절 한 구절 다 붙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필요한 것들을 압축적으로 타이트하게 전개한 이후에, 하나님의 은혜와 연결시키는 것이 이분의 특징인데 그것이 너무나 저의 마음에 매력적으로 들렸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저 역시 예전에 종종 시도했었는데, 오늘은 조금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제 스스로 평가할 때에, 과거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내용을 언급하면서 약간 김이 빠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보니, 오히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논리를 전개할 때에 오히려 더 폭발적인 어떤 감동을 주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어쩌면 설교자 자신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확신이 큰 영향을 끼치는 듯 합니다.
한편의 설교를 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가장 피곤한 새벽 시간에 두눈이 초롱초롱하게 저를 쳐다보시는 성도님들의 모습이 너무 좋았고 저도 행복했습니다. 앞으로도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할 뿐입니다.
* 사무엘하 12장 15-23절 설교
성도님들께서는 다윗의 무너져 가는 모습을 보면서 어떤 감정을 느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 근처의 본문들을 읽을 때 마다 참 마음이 비통하고 너무나 슬프다 라는 생각을 자주하게 됩니다.
영적으로 탁월한 그리고 하나님이 가장 아끼시는 그 한 사람이 이렇게 무너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한계와 그 연약함을 성경은 너무나 가감없이 드러내기 때문에 읽으면서 함께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범죄는 겉으로 보기에는 간음이라는 그리고 살인 교사라는 끔찍한 형태로 나타났지만, 그것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다윗의 마음 중심에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12장 9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10절에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다윗의 문제의 핵심이었던 것입니다. 모든 죄악의 가장 그 근본에 있는 것은 감히 인간이 여호와를 업신여기는 그 끔찍한 태도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인류 역사의 초기에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 범죄할 때에도 마찬가지였고, 지금 다윗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분을 높이는 마음이, 여호와를 업신여기는 그 마음으로 변질되고 타락하여서, 믿음의 영웅은 가정 파괴범 그리고 살인자로 추락한 것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다윗은 바로 사형을 당해야 마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회개할 때에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의 진실한 회개와 하나님의 용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가 반드시 치뤄야할 댓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오늘 말씀 가운데 등장하는데, 나단은 다윗에게 말할 때에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 라고 말하며 왕궁을 떠난 것입니다. 그리고 나단이 떠나자 마자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여호와께서 그 아이를 치셨다 그래서 심히 앓게 되었다”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분명한 뜻이 다윗의 아이에게 임했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아마 다윗 성은 그 분위기가 최악이었을 것입니다. 누구 하나 감히 입을 열어서 함부러 이야기할 수 없는 너무나 무거운 분위기였을 것이 틀림 없는 것입니다.
자 만약에 내가 지금 다윗의 입장에 선다고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하나님의 분명한 진노를 받아서 아이가 죽어가고 있는데 그 아비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 중에 어떤 분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넋을 놓아 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어떻게 보면 정말 이상한 모습이 아닌가? 하나님의 분명한 진노를 입어서 아기가 죽어가고 있는데 그 아기를 살려 달라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깝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너무나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아들을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충분히 분노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간절하고 또 간절하게 기도를 했는지 그가 무려 칠일 동안 금식하면서 맨 땅에 누워서 지냈습니다. 그는 왕의 자리에 올라가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정도의 다윗의 모습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 아이를 살려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이 정도 정성을 드렸다면 그래도 들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는가?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결국 죽은 것입니다.
다윗이 저지른 죄의 그 댓가는 너무나 큰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는 자신의 죄의 댓가의 전부를 치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죄가 가지고 있는 영향력을 온 몸으로 경험하면서 고통을 받아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자기 합리화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여호와께서는 무조건 용서하신다” 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 말은 백퍼센트 맞는 것입니다. 다윗은 극적으로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죄의 댓가를 경험한 것입니다. 물론 그 댓가는 그의 죄의 무게의 비하면 비교할 없을 만큼 작은 것이었지만, 그는 그 댓가를 어느 정도는 치러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쉽게 죄를 짓고 나서, 하나님께서 다 용서하실 것이라고 쉽게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의 삶을 망치고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망치며 우리의 삶을 망가지게 하는 무서운 것임을 성경은 분명히 경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2장 4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2: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부각되는 두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피 흘리기까지” 그리고 “대항하다” 라는 두 단어입니다. 죄와 싸우는 것은 영적인 것이지만 피가 튀는 것입니다. 내가 거룩하게 살기 위해서 나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서 피를 흘릴만큼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항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것을 향해서 힘을 다해서 맞서 싸우는 것입니다. 그것은 수동적인 태도가 아니라 매우 적극적인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죄를 대하는 성도의 태도는, 마치 전쟁에 나간 전사처럼 피를 흘리며 대항하는 최선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는 그런 모습을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도전이 되기를 원합니다. 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그런 태도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죄의 무서움과 그 영향의 비참함을 깨닫고 적극적으로 죄와 싸워 나가시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다윗의 그 간절한 기도도 하나님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아이가 죽은 것을 신하들이 먼저 알았습니다. 그리고 차마 그 이야기를 다윗에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나 다윗이 그 아이를 사랑하고 아끼고 그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간절히 기도한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충격을 받고 낙심한 다윗이 무슨 행동을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신하들이 수근거리는 것을 보고 다윗이 깨달았습니다. “아이가 죽었구나…”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우리가 다윗의 입장이라면 어떠했겠습니까? 너무나 낙심하고 분노하고 슬퍼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간절하게 생명을 걸고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간절할 수록 그 낙심이라는 것은 너무나 큰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다윗이 자신의 간절한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에, 그가 그 이후에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성경이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0절에 보니, 다윗이 자신이 지내던 땅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씻고 기름을 발랐습니다. 그리고 왕의 새로운 옷을 입은 다음에 어디로 갔는가? 여호와의 전으로 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였습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구약 성경 전체에서 직접적으로 다윗이 경배한다는 표현이 딱 두번 등장하는데, 그중에 한번이 바로 이 구절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삶의 가장 어려운 순간에 심지어 자신의 마음에 가장 낙심하고 하나님께 대하여 실망한 그 순간에, 그의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확인한 그 순간에, 여호와를 찾고 그분께 경배하였습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사실 기도라는 것의 평범한 정의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의 뜻과 소원을 이루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와 전혀 상관 없는 사람들도 기도라는 단어를 거리낌 없이 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신이라는 자신보다 뛰어난 존재를 통하여서 혹은 우주의 어떤 힘을 이용해서, 자신의 소원을 이루는 것을 기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기도는 전혀 다른 기도였다는 것입니다. 그가 간절히 자신의 소원을 아뢴 것은 사실이지만,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너무나 바랬지만, 그의 기도는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참된 기도가 혹은 참된 성도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아들이 죽기를 바라는 아버지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그 소원조차도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맡기면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다윗의 삶의 궁극적인 소원이었다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고 또 묵상하면서, 한 아버지의 깊은 후회와 슬픔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의 어느 장면에서 다윗이 칠일을 금식한 적이 있습니까? 다윗은 틀림 없이 그 금식과 통곡의 기도의 시간 속에서, 자신의 죄의 결과와 그리고 아들에 대한 미안함으로 그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을 것이 틀림 없는 것입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그는 가장 위대한 신앙의 사람이었고 그는 한 나라의 권력의 정점에 있는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아들 한 명을 위하여 제대로 살아갈 수 없었던 사람입니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그 아들이 자신의 죄로 인해서 죽어야 한다는, 정말 어떤 의미에서 너무나 비참한 운명에 다윗이 던져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본문은 인간 아버지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이것은 단순히 다윗만이 그러했던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 모든 아버지가 해결하지 못한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오늘 말씀이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완벽한 인간이었던 아담조차 그가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그의 말씀을 업신 여겼을 때에, 자신의 아들이 또 다른 아들을 살해하는 것 조차 막지 못하는 가장 무력한 아버지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아담으로 인하여 모든 그의 후손들은 본질상 죄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업신여기는 자로 태어났습니다. 그것이 마치 삶의 당연한 방향인 것 처럼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죽음 속에서 지옥을 향해서 걸어가는 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볼 수 있는가?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가장 완벽한 아버지를 꿈꾸고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연약하고 죄로 인해서 무너지는 그 아버지가 아니라, 가장 완전하며 가장 완벽하며 가장 거룩하시며 가장 온전하신 하늘 아버지를 바라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시편 103편 13절과 14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03:13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103:14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정말 놀라운 표현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먼지임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냉정하게 말한다면 우리 인간의 죄성으로 인해서 우리를 거들떠 보지도 않을 것 같은 그런 여호와께서,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인간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를 이해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구약 안에 이미 복음이 나타나 있으며, 인간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시는 그 여호와 하나님 진정한 아버지 되신 그분의 은혜가 풍성하게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9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셨습니다.
정말 놀라운 표현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왜 이 땅에 오셨는가? 그분의 고난 그분의 죽으심 그분의 부활 그 모든 것들은 구약에서부터 꿈꿔 오던 진정한 아버지 되심, 여호와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바로 그 놀라운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믿는 자들, 자신을 의지하는 자들, 자신을 붙드는 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을 부를 때에 우리 아버지여 라고 부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을 부르는 많은 호칭들이 있지만, 가장 앞서는 가장 본질적인 것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아버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5절에 말씀하십니다.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갈라디아서 4장 6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이 강조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관계 그 은혜의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 지금 이 시간에 우리를 안아주시고 돌봐주시고 그분의 나라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지금까지 일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말씀이 여기 모인 우리 모두에게 큰 위로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돌보시며 지금도 우리의 삶을 붙들고 계시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변치 않는 사랑으로 인도하심을 믿고 신뢰하며 담대하게 걸어가시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창세기 4장은 형이 동생을 죽이는 인류 최초의 끔찍한 살인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십니다. 도대체 왜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는가에 대한 여러 해석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단순히 제물이 아니라 아벨과 그 제물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의 진심이 담겨져 있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가인은 자신과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분노합니다. 그는 마땅히 회개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죄의 본질이 등장합니다. 죄는 마치 야수처럼 사람을 덥치려고 하며, 사람은 그것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에게 굴복할 것인가? 아니면 죄를 다스릴 것인가에 대한 모든 인류의 선택의 기로가 바로 여기에서 등장합니다.
가인은 아벨을 결국 죽입니다. 너무나 끔찍한 범죄입니다. 무죄한 아벨의 피가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가인의 벌이 너무나 작다고 느껴집니다. 그는 끝까지 하나님 앞에 죄를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겨우 그를 땅에서 유리하는 자 정도로 만드십니다. 가인은 그저 자신의 죄의 댓가가 너무 크다고 호소하며, 하나님은 그가 죽임을 면하도록 보호하십니다.
창세기 4장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가인과 아벨이지만, 사실 가인의 자손의 이야기도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풍성한 예술과 문화를 만들어낸 인류 역사의 기념비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 문화를 만들어낸 사람들의 아버지인 라멕은, 엄청난 폭력의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입은 적은 피해로도 기꺼이 사람을 죽이는 광인입니다. 스터디 바이블은 라멕의 피에 대한 무한한 갈망을 위해서 7이라는 숫자를 적용했다고 해석합니다.
기독교 세계관의 입장에서 세상의 문화의 긍정적인 부분을 바라보고 그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리가 세상에 흩뿌려진 것으로 보는 것을 충분히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저의 개인적인 태도는, 세상은 참으로 악하다는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세상에 선한 것이 참으로 많다고 말하지만, 현실적으로 우리가 접하는 대중의 모든 문화들은 타락한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로서 느끼는 것은, 가급적 세상을 접하기 보다는, 가급적 최대한 많이 말씀을 접하고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인류가 번성할 수록 번지는 죄와 폭력의 비참함 앞에서, 성경은 새로운 소망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아벨 대신에 셋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셋의 후손은 폭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저는 여기에서 죄의 본질과, 그것과 대조되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특징을 봅니다. 폭력이라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폭력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신적인 폭력까지 포함합니다. 누군가를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려고 조작하는 것도 폭력입니다. 언어로 상처를 주는 것도 폭력입니다.
어떠한 형태이든지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 죄인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겨내는 방법은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것 밖에 없습니다. 마땅히 갚을 것을 갚지 않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 안에서 나의 죄성을 발견하고 성령님의 능력으로 억누르며 변화되는 그 모든 과정은 오직 주님을 예배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기적입니다.
In Genesis chapter 4, I see the nature of sin. Here, we see the first murder due to jelousy. God only accepts Abel's sacrifice based on his sincere love and respect for God. Cain should repent about the denial of his worship. God warns that Cain should subdue his sin. However, rather he kills his brother.
In the Christian worldview, we see the beauty of a culture. We see that God's truth is scattered in the world. However, in my opinion, I see the miserable things in our culture. Especially, in mess media, there is full of violence, distorted sexuality, and greed.
However, see new offspring from Adam. Seth's offspring began to worship the Lord. In the immediate context, we see the big contrast the violence and worship. I believe that if we want to subdue our innate violence, we should come to the Lord to worship him.
세상의 모든 것이 완벽했습니다. 그러나 뱀의 등장으로 이 아름다움은 깨어집니다. 창세기 3장은 정말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묵상의 내용들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말로 형용할 수 없을만큼 완벽했던 하나님의 창조를 무너뜨리는 악한 존재의 간교함과, 인간의 처참한 배신 그리고 하나님의 충격적인 은혜를 보여줍니다.
교육학적으로 볼 때에, 성경에 등장하는 첫 질문을 뱀이 사용한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뱀은 결코 억지로 인간에게 선악과를 먹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뱀은 질문을 사용하여서 인간의 마음을 떠 봅니다. 악한 질문에 여자가 걸려듭니다.
뱀은 여자에게 거짓말을 합니다. 사탄은 거짓의 아비입니다. 거짓은 단순한 잘못의 차원이 아니라, 인류의 첫 시작부터 인간을 망쳤던 가장 흉악한 죄입니다.
뱀의 목적은, 하나님을 의심하고 그분의 권위에 도전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모든 사랑을 쏟아 부으심이 너무나 분명하지만, 어리석게도 인간은 하나님을 의심합니다. 단순히 금하신 것을 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버리고 배신하고 그분처럼 되고자 하는 창조물로서의 본분을 잊어버린 것이 바로 타락의 본질입니다.
Grace and Truth 스터디 바이블은, 아주 훌륭하게 3장의 내용을 설명해냅니다. 특별히 인간의 타락과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3장의 내용을, 신약과 충실하게 연결합니다. 여자가 열매를 보았을 때에 그녀의 눈에 비친 나무에 대한 묘사를, 요한일서 2장의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상의 자랑"과 연결합니다.
여인이 열매를 볼 때에, 자신을 지혜롭게 해 줄 것 같았다고 여긴 것은 너무나 충격적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망가진 이성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창조주께 순종하지 않고 어떻게 지혜로워질 수 있을까요? 그러나 인간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가능하다고 여깁니다. 여전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야 말로 지혜 그 자체입니다.
선악과의 의미에 대한 논의는 더 공부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넷바이블의 창세기 2장 9절의 각주는 큰 도움이 됩니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그러나 망가진 그들의 이성은, 그 능력을 지극히 제한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선악을 구별할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선을 행할 의지도 없고, 그것을 완벽하게 이룰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대단한 존재인양 하나님 앞에서 소리치고, 불완전한 옳고 그름을 따지고 들어오는 교만한 인간들의 모습이 이 장 안에서 겹쳐 보입니다.
여자와 남편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을 때에,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수치심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피해야 했습니다.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그들의 관계에 절대적인 벽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도 질문을 사용하신다는 것이 매우 놀랍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질문 속에서 아담을 향한 연민과 슬픔을 느낍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아담과 아내가 하나님 앞에 잘못을 인정하기를 기다리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비난하며, 서로 상대방에게 그리고 뱀에게 책임을 전가할 뿐입니다. 인간 관계에서 흔히 보는 거짓말, 책임 전가, 비난, 이 모든 것들은 죄 그 자체이며 죄로 인한 결과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의심한 그 순간, 사실상 인류의 삶을 끝나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역사는 진행이 됩니다.
하나님의 반응은 즉각적입니다. 뱀은 영원히 저주를 받습니다. 그리고 여인의 후손을 통하여서 여인의 후손은 치명적이지 않은 상처를 입을 것이지만, 뱀은 치명적인 상처를 받을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서 가장 가까워야할 부부 사이에 견고한 관계가 깨어집니다. 갈등이 들어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자 명령이었던 일은, 자신의 삶을 위한 고통스러운 목표가 됩니다. 일은 축복이며 동시에 고통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임을 말씀합니다. 모든 인간은 죽게 됩니다.
처음으로 깨달은 것은, 아담은 자신의 아내의 이름을 바로 이 시점에서 지었다는 것입니다. "하와"의 의미는 "생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담은 이렇게 끔찍하게 망가진 자신의 죄의 결과 속에서도, 죽음을 이기게 하실 하나님의 생명의 약속을 붙듭니다.
자신의 죄로 인해 수치를 받아 마땅한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께서 또 다른 생명을 죽이심으로 그들의 수치를 가려주십니다. 인류는 동산에서 영원히 쫓겨납니다.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을 두심으로 동산을 막으십니다. 그러나 이후에 하나님께서 만드실 성막 안에 그룹이 다시 등장합니다. 스터디 바이블은 이것을 상기시키며, 인류는 동산으로 돌아갈 수 없지만, 하나님은 은혜로 동산을 인류에게 가져다주실 것임을 보여줍니다.
목회자는 많은 성도님들의 장례식에 참석합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입니다.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아픔과 큰 슬픔을 느낍니다. 비통함을 경험합니다. 인류의 죄가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그리고 얼마나 큰 댓가를 치러야 하는 것인지를 생생하게 체험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붙듭니다. 우리에게 있는 "유일한" 소망이자 생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끔찍한 인류의 배신과 범죄의 그 순간에, 그리스도를 예언하시며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그 황홀한 약속은 우리에게 이루어졌으며, 오늘도 우리에게 그 약속을 적용하시며 인도해 가십니다.
Genesis chapter 3 is the most miserable story in human history. Everything was perfect however, humanity doubted the authority and love of their creator.
I see that some people blame God for the sin of Adam and Eve. But we see the apparent fault of two people. The serpent did not force them to sin. They chose to sin with their own decision.
Actually, when the people chose to betray God, the history of humanity should be ended. However, his grace is abundant and indescribable. God punished the serpent and make the grace covenant for Adam and Eve. God permit the offspring of her to save the world.
We see Jesus as the accomplishment of God's covenant. In Jesus, we walk our daily life in peace even with an enemy. He is true life for the sinners. We overcome the ultimate enemy which is death through Jesus Christ.
창세기를 잠시 떠나 누가복음에 들린 것은, 어제 시카고 할렐루야 대성회 가운데 말씀이 참 좋았기 때문입니다. 만나교회 김병삼 목사님의 말씀을 처음 들었습니다. 아,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마음이 정말 따뜻한 분이라고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 속에 온전히 녹여낸 그 설교가 너무나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다루신 누가복음 17장을 잠깐 묵상해 보았습니다.
Hannah's Bible Outlines를 세로로 보았을 때에는 레이아웃이 완전하지 않았는데, 이런... 가로로 화면을 전환하니 완벽하게 표시가 됩니다. :)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역시, 시도해보지 않으면 알수가 없습니다.
제가 집중하고 싶은 연약한 자를 공격하는 죄에 대한 것, 그리고 믿음에 대한 비유와 종에 대한 비유의 레이아웃을 한번에 볼 수 있습니다. 다른 누가 아니라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고, offences와 forgivenss로 간략하게 소제목이 달려 있습니다.
가장 중요하게 발견한 부분은, 영적인 가족이라는 교회의 문맥 안에서 예수님이 강조하시는 두가지를 정확하게 짚어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죄의 심각성에 대한 경고", 그리고 또 하나는 "죄에 대한 지속적인 용서"입니다.
아, 이 얼마나 두가지가 중요한지요, 교회의 영적 생활의 두 기둥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보통 두가지 중에 하나만 강조합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니 원수를 사랑하라, 그러나 안타깝게도 죄에 대한 경각심을 잃어버린 사람들로 가득찬 교회는 고통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에 대한 경각심,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더 나을 만큼 형제를 실족하게 하는 것이 큰 죄임을 함께 강조해야 합니다. 우리의 죄에 대한 경고는, 하나님의 무한한 용서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향한 용서와 함께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스터디 바이블은, 겨자씨 만한 믿음의 이야기가 무한한 용서와 연결이 되어 있음을 정확하게 짚어 냅니다. 적어도 이 본문의 겨자씨 만한 믿음의 이야기는, 나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한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이뤄가는 문맥 안에 존재합니다. 주여 기적과 같은 믿음을 주셔서, 형제를 용서하게 하소서.
또한 스터디 바이블은 특이하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을 단순히 reward를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grace에 대한 응답으로 하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저는 이 부분도 주님에 대한 믿음의 문맥에서 연결하고 싶습니다. 자세하게 설명은 하시지 않았지만, 김병삼 목사님도 믿음과 순종을 연결하셨습니다.
주님에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 주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미 나를 위해서 자신의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공수표를 날리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전부를 주셨습니다. 온 우주를 통틀어 오직 하나님만이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주님이 이루신 십자가의 역사 때문에, 은혜와 믿음 그리고 순종이 연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에 대한 귀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 그분의 말씀에 절대 순종할 수 있습니다. "종의 가치는 순종에 있다"라는 김병삼 목사님의 말씀이 가슴을 쳤습니다. 주여, 나를 내세우는 똑똑한 종이 아니라, 믿음으로 순종하는 신실한 종으로 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