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23일 토요일
"교회 갈등의 성경적 해결 방법" 북리뷰
조나단 에드워즈의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 북리뷰
1. 서론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은, 예일대 졸업식 설교를 확대하여 책으로 발간한 것이다. 저자인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미국 교회사 가운데 최고의 신학자 그리고 철학자이며 18세기 부흥 운동의 주역이다.
이 책은 제1차 대각성 운동이라는 역사적인 부흥을 배경으로 하는 것인데, 그
목적은, 부흥시 발생하는 여러 현상들로 인해 부흥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잘못이며, 지금 일어나고 있는 부흥이 성령의 역사 가운데 일어난 참된 부흥임을 논증하는 것이다.
2. 요약
사도 시대에는 하나님의 성령이 엄청나게
부어진 시대였다. 그러나 모조품들도 동시에 많이 나왔다. 그러므로
참된 영과 거짓 여을 분별할 수 있는 어떤 분명한 규칙들과 뚜렷이 구별되는 표지들이 필요했다. 그것이
요한일서 4장의 목적이다.
성령의 역사를 분별하는 데 있어서 증거가
될 수 없는 소극적 증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아주
비범하고 특별하게 일어난 일, 즉 어떤 일이 일상적이지 않고 특이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만
가지고 그것이 성령의 역사인지 아닌지 단정할 수는 없다. 지금까지 비범하게 일하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새롭고 특이한 역사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에 미치는 영향과 작용이
특별하다고 해서,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판단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죄의 본성에 대해서 비범하게 깨닫게 될 때에, 아주
비범한 정서들이 솟아나는 일이 있다고 할 때, 그 일들이 성령의 역사를 분별하는 성경적 표지들을
위반하지 않는다면, 그 역사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는 증거가 될 수 없다.
특이하고 비범한 역사라 할지라도, 그 본질이 성경의 표지들과 일치한다면 성령의 역사라 말할 수 있다. 사도
시대에 일어난 성령의 역사는 매우 새로운 방식으로 일어났다. 만일 매우 특이한 역사는 성령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옳다면, 항상 그러해야 하고 사도 시대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사도 시대의 성령의 역사는 많은 면에서 전적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일어났다. 또한 성경은 마지막 성령의 부으심이 있을 때, 그
방식이 아주 비범하여 새로울 것임을 예언하고 있다.
둘째로, 몸에
일어나는 특이한 증상들에 의해서는, 그 역사가 참된 것인지 판단할 수 없다. 그것이 참된 성령의 표지의 하나로 주어진 것은 아니기 대문이다. 또한
어떤 외적인 모습을 보고서, 그 사람이 성령의 영향력 아래 있지 않다고 결론 지을 근거 또한
없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그런 영향들을 배척하는 영 분별 규칙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고뇌할 때에, 비참함에 대한 인식으로 울부짖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때로는 성도들에게서 신체적 힘을 약화시키면서 천국을 맛보게 하시는 것도 이상한 것이 아니다. 성경과
이성은 진리를 깨달음으로 인해 생기는 신체의 특이한 현상을 반대하지 않는다. 제자들처럼 무서움
때문에 소리를 지를 수도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압도되어 힘이 다 빠지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 열광주의자들이 보통 신체에 큰 영향을 가진다는 이유로, 신체에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을 반박할 필요는 없다.
셋째로, 소동과
종교에 대한 큰 잡음이 나타난다고 해서, 그것이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영적이고 영원한 것들은 참으로 위대하기 때문에 미지근하게 감동 받거나 영향을 받는 것은 인간 존재에
있어서 아주 불합리한 일이다.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은, 세상의
눈에 공개적으로 공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사도 시대에 성령의 부으심을 통해서, 커다란 소요와 소동이 모든 곳에서 일어났음을 기억해야 한다.
넷째로, 성령의
영향력 속에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상상에 커다란 인상들을 받는다고 해서, 그 사람들의 마음에 나타나는 작용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묵상 가운데 수반되는 상상적인 생각 없이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의 사고를 고정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께서 상상력을 주셨기 때문에, 이러한
능력을 적당하게 사용하면 마음의 다른 기능들을 보조하게 된다.
성령의 역사 속에서, 일종의 황홀경에 빠진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성령이 행한 역사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사람의 사고가 집중되고, 정서가 강해지며, 영혼이 몰두하고 황홀케 되며
삼켜질 때는, 모들 체질이 녹아 내리는 것도 가능하다. 상상력을
통한 감각은 무조건 적인 신적 계시는 아니지만, 성령은 상상력을 통해 진리에 대한 생생한 감각을
주시기도 한다.
다섯째, 다른
사람의 모범이 사용되었다고 해서, 사람들의 마음에 나타나고 이루어진 역사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모범을 통하여 영향을 받는 것은
성경에 부합하며 또한 합리적인 일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분발하게
했다고 해서, 그 효과의 선함을 부인할 수는 없다. 모든
사람들은 모범에 의하여 큰 영향을 받는 것은 세계를 관찰했을 때에 명백한 사실이다. 부흥 시대에는
모범에 의해 영향을 받는 일이 많았고, 모범을 통한 영향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영향의 보조
수단이다. 또한 복음 전파의 중요한 수단이 된다.
여섯째, 성령의
역사의 영향력 아래 있는 것으로 보이는 많은 사람들의 행동이, 매우 신중하지 못하고 변칙적인
일들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역사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다양한 군중들이 혼합되어 있는 곳에서, 그들의 마음이 깊은 감명을 받을 때에, 그들 중에
신중하게 행동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예가 고린도 교회이다. 기적적인 은사와 성령의 영향력에 있어서 성령의 축복을 받았지만, 그러나
그들 속에 변칙적인 이들과 혼돈이 있었다. 또한 베드로도 실수를 했다. 신자 속에 있는 어두움과 부패 때문에 실수가 빈번하게 일어난다. 또한
지나친 열심으로 인해 실수를 범하는 수도 많다.
일곱번째, 판단에
있어 많은 실수들이 있고 사단이 그 역사에 어떤 미혹들을 뒤섞어 놓았다고 해서, 그 역사 전체가
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참된 성도에게 있어서도 은혜와 많은 부패가
함께 존재하며, 하나님의 나라와 마귀의 나라가 같은 마음 안에 잠시 동안 함께 있다.
여덞번째, 소위
성령의 영향을 받았다는 몇몇 사람들이 심각한 실수들을 범하거나 불명예스러운 행동을 하였다고 해서, 그
사역 전체를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성령 충만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
중에서도 배교자가 생길 수 있다. 종교개혁 시대, 부흥의
시대, 그리고 청교도의 시대에도 배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므로
마귀가 그러한 가라지를 뿌린다고 해서, 하나님의 성령의 참된 역사가 영광스럽게 수행되고 있지
않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아홉번째,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공포가 강조되고, 격한 감정과 열정의 설교자들을 통해 어떤 역사가 진행되는 것
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 일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커다란 현실적인 재난인 지옥의 위기를 경고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또한
지옥은 무한히 두려운 곳이기 때문에, 냉담한 태도로 지옥을 설교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모순 되는
것이다. 또한 복음의 설교가 헛되지 않기 위해서, 율법은
매우 크게 강조되어야 한다. 겁을 주어서라도 지옥에 대해서 경고해 주는 것이 합당한 것이다.
성령의 역사를 분별하게 해 주는 적극적인
증거를 통해서, 우리가 보게 되는 어떠한 영적인 역사도 현혹되는 위험이 없이 판단할 수 있다. 첫째로, 예수님에 대한 바른 신앙 고백이 사람들의
마음에 더욱 확신하게 되고 공고히 나타난다면, 그것은 그 영이 하나님의 성령이라는 확실한 표징이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촉진시키는 영은 성령이시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인정하게 하는 영은 성령이시다. 반면에 마귀는, 예수님에 대해 적개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절대 높이지 않으며, 예수님을 높이는 영은 오직 성령이시다.
둘째로, 죄에
대한 각성과 회개를 불러 일으키는 분은 성령이시다. 성령은 세상을 미워하도록 하며, 마귀는 세상을 사랑하도록 한다. 세상이라는 말은, 죄의 욕심에 속한 모든 것이며, 마귀는 이 세상에
속한 영이다. 반면에 성령님은, 세상을
사랑하지 않도록 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게 하신다. 사단은
사람의 죄와 양심을 깨우치는 일을 하지 않으며, 또한 양심이 각성된 사람일수록 마귀에게 미혹될
확률이 적다. 양심을 깨우치고 죄의 악함을 깨닫게 하시고, 구원을
추구하게 만들며, 하나님 나라의 탁월함으로 세상 욕망을 버리게 만드는 것은 성령님이시다.
셋째로,
성령은 성경을 존중하게 하고, 성경을 사랑하도록 하신다.
반면에 마귀는, 그의 거룩한 책, 즉 성경에
대하여 언제나 치명적인 악의와 증오를 보인다. 넷째로,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서 진리를 드러내 주고, 진리를 깨닫게 해 준다. 즉
영의 작용 방식이 진리의 영으로 작용하는 것을 본다면, 우리는 그 영이 바르고 참된 영이라고 안심하고
판단할 수 있다. 반면에 사단은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비이다.
다섯째로, 사랑은
성령의 역사를 분별할 수 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표지이다. 사람들 사이에 역사하고 있는 영이,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의 영으로 역사한다면, 그것은
그 영이 하나님의 성령이라는 분명한 표징이다. 성령은 사람들을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으로
이끈다. 참 사람의 모조품은, 자기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자기를
부인하고 낮추는 겸손한 사랑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원수들에게까지
향하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사랑과 겸손은, 마귀의
영과 가장 반대되는 성령의 특징이다. 이러한 사랑의 표지들은, 마귀가
하려고도 하지 않고 또 할 수도 없는 것들이다.
지금에 일어나고 있는 비상한 영향력은, 전체적으로 봐서 의심할 여지 없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부터 온 것이다. 그것은
사도 요한이 제시한 기준으로 볼때, 성령의 역사가 틀림 없으며, 또한 많은 이들의 관찰을 통해서, 그리고 직접
그들과 교제하고 관찰한 결과 확신할 수 있는 부분이다.
죄의 비참함을 사람들이 깨달았으며, 그들은 이성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죄와 심판에 대한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큰 신체적인 영향력을 받은 것이었고, 잠시 예배 순서가
중단된 적은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각성케 하심으로 그러한 현상을 피할 수 없다면, 그것은 혼란이나 방해라고 여길 수 없다.
현재의 부흥은 사도 요한이 제시한 표지와
동일하며, 하나님의 역사라도 처음부터 완전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성령의 역사를 경험한 이들은, 예전과 다른 새로운
성격의 기쁨을 느끼고 있고, 과거와 비교할 때에 훨씬 위대한 하늘과의 교통을 누리고 있다.
그러므로 이 역사를 방해하거나 저지하는
어떤 일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았던 자들 그리고 성령의 역사를 방해한
이들은 용서 받지 못할 죄인이 되었다. 지금 일어나는 역사는, 본질적으로
초림 때의 성령의 역사와 동일하다. 이러한 영광스러운 사역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과 은헤가 나타났는데,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서 임하셨다고 증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다.
현재 신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항상 걸림돌을 만나게 될 것이고, 영광스러운 개혁을
위해 사람들은 기도하고 있지만, 그들은 정작 개혁이 온다면 인정하지도 영접하지도 않을 것이
틀림 없다. 또한 신중하게 처신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단순히
의심할 뿐만 아니라, 자세하게 관찰하고 부지런하게 조사해 보는 것이 마땅하다. 현재 부흥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며, 부흥을
찬성하는 편에 서지 않는 것 역시 부흥을 반대하는 편에 서는 것과 동일하다.
성령의 역사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그 역사에
참여한 사람들 그리고 그 역사를 촉진시키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은, 모든 실수와 비행을 피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주의하여야 한다. 겸손과 자기 부인, 그리고
그리스도를 온전히 의지하는 것이 최선의 방어책이라 할 수 있다.
몇몇 사람들이, 충동과 강한 인상에 지나치게 비중을 두었지만, 그것은
성령의 구원하시는 은혜로운 영향력과는 상당히 다른 성질의 것이다. 충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어떤 사람들의 이유는, 다가올 교회의 영광의 시대에 특이한 은사들이 회복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인데,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베푸시는 성령의 영향력은, 성령의 은혜이지 특이한 은사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만약
어떤 은사가, 성령의 평상적이고 거룩하게 하시는 영향력이 목적이 아니라면, 그것은 아무런 유익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신적인 사랑으로 전달하시며, 그것은 언제까지 떨어지지 아니하는 것이다. 교회의
영광스러운 시기의 특징은, 기적적인 은사들의 회복이 아니라 신적인 사랑과 하나님 안에서 겸손한
기쁨을 자아내시는 성령 하나님의 영향력이다. 영감이 아니라 인간적인 학문에 힘을 써야 한다. 지식이 많아지는 만큼, 원하는대로 선을 행하는
것이 쉬워진다. 다른 사람을 함부러 판단하지 말고, 그들의
회심을 쉽게 판단해서는 안된다. 또한 너무 화를 내거나 대적들과 논쟁해서는 안된다. 또한 본질상 상당히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사람들에게
논쟁을 불러 일으키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일반적인 관습에 따라서 하는 것이 좋다.
3. 비평적 평가
이 책의 탁월한 점은, 참된 부흥을 평가하는 기준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강조하는, 단순히 외적으로 보이는 성도들의 순간적인 반응만을 가지고 부흥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소극적인 증거들을 먼저 살펴보고, 그리고 부인할 수 없는 적극적인 증거를 살펴 보았다는 점에서, 정확하게
어떤 현상이 참된 부흥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잘 제시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성경에서 말씀한 영광스러운 개혁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른다면, 그것을 위해 기도하여도 실상 그것은 모르는 것을 그저 추상적으로 기도하는
것일 뿐이다(173). 중요한 것은, 정확한
기준을 이해할 때에, 성령의 역사를 더욱 간절히 사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영들을 시험해야 한다는 저자의 권면은
지금 한국 교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내용이다(46). 흥미로운 것은, 소극적인 혹은 중립적인 기준과 적극적인 기준을 구분하는 것이, 사단이
그 일을 할 수 있는가 없는가, 그리고 성령께서 반드시 그 일을 하시는가 하지 않는가로 구분하였다는
점이다. 즉 사단은 소극적인 9가지 증거들은
일으킬 수 있지만, 적극적인 5가지 증거들은
만들어 낼 수 없으며, 소극적인 9가지
기준은 성령님께서 만들어내시기도 하지만, 적극적인 5가지
증거들은 오직 성령님만이 만들어 내실 수 있다는 것이다.
영적인 일인 부흥을, 영적 존재인 사단과 성령의 역사를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 어떠한 부흥의 역사를 평가할 때에 가장 적합한 판단 기준이라 말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마치, 애굽의 술사들이 어느 정도까지는
하나님의 능력을 흉내내었지만, 결국 물러가고 말았던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나게 한다.
성령의 비범하게 역사하심을 별로 강조하지
않는,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조용한” 역사를 강조하는 보수적인 입장에서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비범하고 특별한 일 그리고 몸에 일어나는 특이한 현상들을 성령의 역사일 수도 있다고 중립적인 기준으로 놓은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을 것이 틀림 없다. 왜냐하면, 어떤 이들의 눈에 이것은 광신도들의, 이성을 잃은 채 황홀경에 빠져서 일으키는, 성령의
역사와는 전혀 상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나단 에드워즈는 분명히, 성령 하나님이 부어지실 때에, 그 역사의 방식이
비범하다고 말한다(56). 또한 지옥의 경고 앞에서 몸에 특별한 현상들이 일어난다는 것도 성령의
역사일 수도 있다고 분명히 말한다(60).
그렇다면 냉담하고 지식 중심적인 교회 가운데
이것을 적용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비록 이 현상이 성령 하나님의 역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중립적인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가운데 이러한 일이 일어날 때에, 무조건적으로 배척하거나 터부시 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하심일 수도 있다는 경각심과 기대감을 동시에 가지고 면밀하게 그 영의 영향력을 관찰하려고 할 것이다. 즉, 이러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기준은, 성령의 역사를
이해함에 있어서 우리에게 좀더 넓은 가능성의 시각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다.
또한 성령의 영향력에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의
행동 속에 나오는 비정상적인 행동이, 중립적인 기준이 된다는 것 역시 매우 놀랍다. 이것을 통해 조나단 에드워즈는 소위 “완전주의” 를 배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린도 교회 그리고 베드로도
실수를 했다는 것을 지적한다(85). 중요한 것은, 그가
이러한 성도들의 완전치 못함이, 반드시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는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새 사람과 옛 사람이 같은 사람 안에 공존한다.(92)
성령께서 역사하시지만 사람들 가운데 실수가
나올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은, 인간의 연약함을 이해하는 것이고, 부흥이라는 것을 때로는 완전한 급진적인 변화로 생각하는 일반적인 부흥에 대한 상식에 경종을 울린다. 그리고 오히려, 그런 무엇인가 불완전하고 부족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성도가 하나님이 역사하심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논리적 근거가 되고, 그런 상황에서 조차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고 적극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동기가 된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성령의 역사의 적극적인 표지를 진술하면서, 그
첫째를 예수님에 대한 존경심이 높아지는 방향으로 영이 역사할 때에 바로 그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제시한 것은 매우 탁월하다(109). 그리고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것은, 존경심과
애정을 나타내면서 선언하는 것이라는 그의 정의 역시 매우 유용하다(110).
이러한 기준은 특별히 최근에 한국에서 급격히
세를 확장하고 있는 이단들을 볼 때에 더욱 그 가치를 드러낸다. 만약 이단이 부흥하는 이유가, 진정으로 성령 하나님의 역사라고 한다면, 그 모임
안에 오직 그리스도가 높아져야 한다. 그분을 향한 독점적인 애정과 사랑과 존경이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아니라, 교주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그가 사랑과 존경과 애정을 독점하고 있다면,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마귀의 역사이다.
또 다른 성령의 역사의 적극적인 표지 가운데, 사단은 사람의 죄를 깨닫게 하고 양심을 깨우치는 일에 힘쓰지 않으며, 오직
성령만이 그렇게 하신다라는 것은, 목회 가운데 나 자신과 다른 이들을 살피며, 우리가 참된 성령의 사람인지 파악할 수 있는 탁월한 기준이 된다(116).
교회에 다니면서 성도라고 말하면서, 거짓과 기만으로 자신의 양심을 덮어버린 사람들이 있다. 그
어떤 가책도 느끼지 못하며 양심에 화인을 맞은 이들이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분명히 사단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이들이 틀림 없다. 오직 죄에 예민하며, 양심이
살아 있는 이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것을, 조나단 에드워즈의 기준을 통해서 확인한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어떤 이에게 역사하는 영이,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의 영으로 역사한다면, 그 영이 하나님의 성령이라는 분명한 표징이라 말한다(128).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 성령의 역사의 적극적인 표지 가운데 들어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굉장히 충격적이다. 물론 사랑이
중요하다. 그러나 소위 “사역”이 훨씬 중요하지 않은가? 부흥이라 부르는 많은 집회들 가운데, 만약 그 결과를 통해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살아나지 않으면 분명히 그것은 거짓
부흥이 틀림 없다.
중요한 것은, 이웃을 향한 사랑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놀라운
것은 그것이 종교적인 그 어떤 외적인 아니라, 우리의 삶의 가장 작은 부분들과 내면의 변화라는
점이다. 다툼을 억제하고, 화평과 우호가
일어나고, 외적인 행동이 친절해 지고, 다른
이들의 영혼의 구원을 열렬히 바라는 것이다(131). 그것은 겸손한 사랑이며,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며,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다(133). 이러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지적은, 어떠한
종교적인 일을 행하는 의미로서의 사역이라는 용어에 익숙한 나 자신이 그리고 한국 교회가, 성령의
역사하심의 확실한 성경적 표지인 사랑을 향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4. 결론
이 책은, 부흥을
실제로 경험했을 때에, 그것이 정말 성령 하나님의 역사인지 아닌지에 대한 탁월한 기준들을 제시한다. 이 기준들은 자기 자신의 영적인 현상에 대하여 또한 공동체가 경험하는 영적인 현상에 대하여 분석적
적용이 가능한 기준들이다.
특별히 부흥이라는 맥락 가운데 외적인 규모와 현상들을 강조해 왔던 한국 교회 가운데, 그리고 이단이 부흥의 모습을 위장하여 급격히 세를 불리고 있는 이 때에, 진정한
부흥은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이며, 죄에 대한 각성과 회개가 일어나는 것이며, 성경과 진리에 대한 관심과,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 충만해
지는 것임을 정확하게 지적함으로써, 부흥을 사모하는 성도가, 그리고
앞으로 한국 교회가 지향해 나아가야 할 바가 무엇인지 그 방향을 잘 제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은, 예일대 졸업식 설교를 확대하여 책으로 발간한 것이다. 저자인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미국 교회사 가운데 최고의 신학자 그리고 철학자이며 18세기 부흥 운동의 주역이다.
이 책은 제1차 대각성 운동이라는 역사적인 부흥을 배경으로 하는 것인데, 그 목적은, 부흥시 발생하는 여러 현상들로 인해 부흥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잘못이며, 지금 일어나고 있는 부흥이 성령의 역사 가운데 일어난 참된 부흥임을 논증하는 것이다.
2. 요약
사도 시대에는 하나님의 성령이 엄청나게 부어진 시대였다. 그러나 모조품들도 동시에 많이 나왔다. 그러므로 참된 영과 거짓 여을 분별할 수 있는 어떤 분명한 규칙들과 뚜렷이 구별되는 표지들이 필요했다. 그것이 요한일서 4장의 목적이다.
성령의 역사를 분별하는 데 있어서 증거가 될 수 없는 소극적 증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아주 비범하고 특별하게 일어난 일, 즉 어떤 일이 일상적이지 않고 특이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만 가지고 그것이 성령의 역사인지 아닌지 단정할 수는 없다. 지금까지 비범하게 일하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새롭고 특이한 역사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에 미치는 영향과 작용이
특별하다고 해서,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판단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죄의 본성에 대해서 비범하게 깨닫게 될 때에, 아주
비범한 정서들이 솟아나는 일이 있다고 할 때, 그 일들이 성령의 역사를 분별하는 성경적 표지들을
위반하지 않는다면, 그 역사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는 증거가 될 수 없다.
특이하고 비범한 역사라 할지라도, 그 본질이 성경의 표지들과 일치한다면 성령의 역사라 말할 수 있다. 사도 시대에 일어난 성령의 역사는 매우 새로운 방식으로 일어났다. 만일 매우 특이한 역사는 성령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옳다면, 항상 그러해야 하고 사도 시대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사도 시대의 성령의 역사는 많은 면에서 전적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일어났다. 또한 성경은 마지막 성령의 부으심이 있을 때, 그 방식이 아주 비범하여 새로울 것임을 예언하고 있다.
둘째로, 몸에 일어나는 특이한 증상들에 의해서는, 그 역사가 참된 것인지 판단할 수 없다. 그것이 참된 성령의 표지의 하나로 주어진 것은 아니기 대문이다. 또한 어떤 외적인 모습을 보고서, 그 사람이 성령의 영향력 아래 있지 않다고 결론 지을 근거 또한 없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그런 영향들을 배척하는 영 분별 규칙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고뇌할 때에, 비참함에 대한 인식으로 울부짖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때로는 성도들에게서 신체적 힘을 약화시키면서 천국을 맛보게 하시는 것도 이상한 것이 아니다. 성경과 이성은 진리를 깨달음으로 인해 생기는 신체의 특이한 현상을 반대하지 않는다. 제자들처럼 무서움 때문에 소리를 지를 수도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압도되어 힘이 다 빠지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 열광주의자들이 보통 신체에 큰 영향을 가진다는 이유로, 신체에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을 반박할 필요는 없다.
셋째로, 소동과 종교에 대한 큰 잡음이 나타난다고 해서, 그것이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영적이고 영원한 것들은 참으로 위대하기 때문에 미지근하게 감동 받거나 영향을 받는 것은 인간 존재에 있어서 아주 불합리한 일이다.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은, 세상의 눈에 공개적으로 공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사도 시대에 성령의 부으심을 통해서, 커다란 소요와 소동이 모든 곳에서 일어났음을 기억해야 한다.
넷째로, 성령의 영향력 속에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상상에 커다란 인상들을 받는다고 해서, 그 사람들의 마음에 나타나는 작용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묵상 가운데 수반되는 상상적인 생각 없이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의 사고를 고정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께서 상상력을 주셨기 때문에, 이러한 능력을 적당하게 사용하면 마음의 다른 기능들을 보조하게 된다.
성령의 역사 속에서, 일종의 황홀경에 빠진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성령이 행한 역사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사람의 사고가 집중되고, 정서가 강해지며, 영혼이 몰두하고 황홀케 되며 삼켜질 때는, 모들 체질이 녹아 내리는 것도 가능하다. 상상력을 통한 감각은 무조건 적인 신적 계시는 아니지만, 성령은 상상력을 통해 진리에 대한 생생한 감각을 주시기도 한다.
다섯째, 다른 사람의 모범이 사용되었다고 해서, 사람들의 마음에 나타나고 이루어진 역사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모범을 통하여 영향을 받는 것은 성경에 부합하며 또한 합리적인 일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분발하게 했다고 해서, 그 효과의 선함을 부인할 수는 없다. 모든 사람들은 모범에 의하여 큰 영향을 받는 것은 세계를 관찰했을 때에 명백한 사실이다. 부흥 시대에는 모범에 의해 영향을 받는 일이 많았고, 모범을 통한 영향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영향의 보조 수단이다. 또한 복음 전파의 중요한 수단이 된다.
여섯째, 성령의 역사의 영향력 아래 있는 것으로 보이는 많은 사람들의 행동이, 매우 신중하지 못하고 변칙적인 일들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역사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다양한 군중들이 혼합되어 있는 곳에서, 그들의 마음이 깊은 감명을 받을 때에, 그들 중에 신중하게 행동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예가 고린도 교회이다. 기적적인 은사와 성령의 영향력에 있어서 성령의 축복을 받았지만, 그러나 그들 속에 변칙적인 이들과 혼돈이 있었다. 또한 베드로도 실수를 했다. 신자 속에 있는 어두움과 부패 때문에 실수가 빈번하게 일어난다. 또한 지나친 열심으로 인해 실수를 범하는 수도 많다.
일곱번째, 판단에 있어 많은 실수들이 있고 사단이 그 역사에 어떤 미혹들을 뒤섞어 놓았다고 해서, 그 역사 전체가 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참된 성도에게 있어서도 은혜와 많은 부패가 함께 존재하며, 하나님의 나라와 마귀의 나라가 같은 마음 안에 잠시 동안 함께 있다.
여덞번째, 소위 성령의 영향을 받았다는 몇몇 사람들이 심각한 실수들을 범하거나 불명예스러운 행동을 하였다고 해서, 그 사역 전체를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성령 충만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 중에서도 배교자가 생길 수 있다. 종교개혁 시대, 부흥의 시대, 그리고 청교도의 시대에도 배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므로 마귀가 그러한 가라지를 뿌린다고 해서, 하나님의 성령의 참된 역사가 영광스럽게 수행되고 있지 않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아홉번째,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공포가 강조되고, 격한 감정과 열정의 설교자들을 통해 어떤 역사가 진행되는 것 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 일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커다란 현실적인 재난인 지옥의 위기를 경고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또한 지옥은 무한히 두려운 곳이기 때문에, 냉담한 태도로 지옥을 설교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모순 되는 것이다. 또한 복음의 설교가 헛되지 않기 위해서, 율법은 매우 크게 강조되어야 한다. 겁을 주어서라도 지옥에 대해서 경고해 주는 것이 합당한 것이다.
성령의 역사를 분별하게 해 주는 적극적인 증거를 통해서, 우리가 보게 되는 어떠한 영적인 역사도 현혹되는 위험이 없이 판단할 수 있다. 첫째로, 예수님에 대한 바른 신앙 고백이 사람들의 마음에 더욱 확신하게 되고 공고히 나타난다면, 그것은 그 영이 하나님의 성령이라는 확실한 표징이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촉진시키는 영은 성령이시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인정하게 하는 영은 성령이시다. 반면에 마귀는, 예수님에 대해 적개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절대 높이지 않으며, 예수님을 높이는 영은 오직 성령이시다.
둘째로, 죄에 대한 각성과 회개를 불러 일으키는 분은 성령이시다. 성령은 세상을 미워하도록 하며, 마귀는 세상을 사랑하도록 한다. 세상이라는 말은, 죄의 욕심에 속한 모든 것이며, 마귀는 이 세상에 속한 영이다. 반면에 성령님은, 세상을 사랑하지 않도록 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게 하신다. 사단은 사람의 죄와 양심을 깨우치는 일을 하지 않으며, 또한 양심이 각성된 사람일수록 마귀에게 미혹될 확률이 적다. 양심을 깨우치고 죄의 악함을 깨닫게 하시고, 구원을 추구하게 만들며, 하나님 나라의 탁월함으로 세상 욕망을 버리게 만드는 것은 성령님이시다.
셋째로, 성령은 성경을 존중하게 하고, 성경을 사랑하도록 하신다. 반면에 마귀는, 그의 거룩한 책, 즉 성경에 대하여 언제나 치명적인 악의와 증오를 보인다. 넷째로,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서 진리를 드러내 주고, 진리를 깨닫게 해 준다. 즉 영의 작용 방식이 진리의 영으로 작용하는 것을 본다면, 우리는 그 영이 바르고 참된 영이라고 안심하고 판단할 수 있다. 반면에 사단은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비이다.
다섯째로, 사랑은 성령의 역사를 분별할 수 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표지이다. 사람들 사이에 역사하고 있는 영이,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의 영으로 역사한다면, 그것은 그 영이 하나님의 성령이라는 분명한 표징이다. 성령은 사람들을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으로 이끈다. 참 사람의 모조품은, 자기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자기를 부인하고 낮추는 겸손한 사랑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원수들에게까지 향하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사랑과 겸손은, 마귀의 영과 가장 반대되는 성령의 특징이다. 이러한 사랑의 표지들은, 마귀가 하려고도 하지 않고 또 할 수도 없는 것들이다.
지금에 일어나고 있는 비상한 영향력은, 전체적으로 봐서 의심할 여지 없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부터 온 것이다. 그것은 사도 요한이 제시한 기준으로 볼때, 성령의 역사가 틀림 없으며, 또한 많은 이들의 관찰을 통해서, 그리고 직접 그들과 교제하고 관찰한 결과 확신할 수 있는 부분이다.
죄의 비참함을 사람들이 깨달았으며, 그들은 이성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죄와 심판에 대한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큰 신체적인 영향력을 받은 것이었고, 잠시 예배 순서가 중단된 적은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각성케 하심으로 그러한 현상을 피할 수 없다면, 그것은 혼란이나 방해라고 여길 수 없다.
현재의 부흥은 사도 요한이 제시한 표지와 동일하며, 하나님의 역사라도 처음부터 완전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성령의 역사를 경험한 이들은, 예전과 다른 새로운 성격의 기쁨을 느끼고 있고, 과거와 비교할 때에 훨씬 위대한 하늘과의 교통을 누리고 있다.
그러므로 이 역사를 방해하거나 저지하는 어떤 일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았던 자들 그리고 성령의 역사를 방해한 이들은 용서 받지 못할 죄인이 되었다. 지금 일어나는 역사는, 본질적으로 초림 때의 성령의 역사와 동일하다. 이러한 영광스러운 사역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과 은헤가 나타났는데,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서 임하셨다고 증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다.
현재 신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항상 걸림돌을 만나게 될 것이고, 영광스러운 개혁을
위해 사람들은 기도하고 있지만, 그들은 정작 개혁이 온다면 인정하지도 영접하지도 않을 것이
틀림 없다. 또한 신중하게 처신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단순히
의심할 뿐만 아니라, 자세하게 관찰하고 부지런하게 조사해 보는 것이 마땅하다. 현재 부흥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며, 부흥을
찬성하는 편에 서지 않는 것 역시 부흥을 반대하는 편에 서는 것과 동일하다.
성령의 역사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그 역사에 참여한 사람들 그리고 그 역사를 촉진시키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은, 모든 실수와 비행을 피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주의하여야 한다. 겸손과 자기 부인, 그리고 그리스도를 온전히 의지하는 것이 최선의 방어책이라 할 수 있다.
몇몇 사람들이, 충동과 강한 인상에 지나치게 비중을 두었지만, 그것은 성령의 구원하시는 은혜로운 영향력과는 상당히 다른 성질의 것이다. 충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어떤 사람들의 이유는, 다가올 교회의 영광의 시대에 특이한 은사들이 회복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인데,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베푸시는 성령의 영향력은, 성령의 은혜이지 특이한 은사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만약 어떤 은사가, 성령의 평상적이고 거룩하게 하시는 영향력이 목적이 아니라면, 그것은 아무런 유익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신적인 사랑으로 전달하시며, 그것은 언제까지 떨어지지 아니하는 것이다. 교회의 영광스러운 시기의 특징은, 기적적인 은사들의 회복이 아니라 신적인 사랑과 하나님 안에서 겸손한 기쁨을 자아내시는 성령 하나님의 영향력이다. 영감이 아니라 인간적인 학문에 힘을 써야 한다. 지식이 많아지는 만큼, 원하는대로 선을 행하는 것이 쉬워진다. 다른 사람을 함부러 판단하지 말고, 그들의 회심을 쉽게 판단해서는 안된다. 또한 너무 화를 내거나 대적들과 논쟁해서는 안된다. 또한 본질상 상당히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사람들에게 논쟁을 불러 일으키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일반적인 관습에 따라서 하는 것이 좋다.
3. 비평적 평가
이 책의 탁월한 점은, 참된 부흥을 평가하는 기준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강조하는, 단순히 외적으로 보이는 성도들의 순간적인 반응만을 가지고 부흥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소극적인 증거들을 먼저 살펴보고, 그리고 부인할 수 없는 적극적인 증거를 살펴 보았다는 점에서, 정확하게 어떤 현상이 참된 부흥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잘 제시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성경에서 말씀한 영광스러운 개혁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른다면, 그것을 위해 기도하여도 실상 그것은 모르는 것을 그저 추상적으로 기도하는 것일 뿐이다(173). 중요한 것은, 정확한 기준을 이해할 때에, 성령의 역사를 더욱 간절히 사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영들을 시험해야 한다는 저자의 권면은 지금 한국 교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내용이다(46). 흥미로운 것은, 소극적인 혹은 중립적인 기준과 적극적인 기준을 구분하는 것이, 사단이 그 일을 할 수 있는가 없는가, 그리고 성령께서 반드시 그 일을 하시는가 하지 않는가로 구분하였다는 점이다. 즉 사단은 소극적인 9가지 증거들은 일으킬 수 있지만, 적극적인 5가지 증거들은 만들어 낼 수 없으며, 소극적인 9가지 기준은 성령님께서 만들어내시기도 하지만, 적극적인 5가지 증거들은 오직 성령님만이 만들어 내실 수 있다는 것이다.
영적인 일인 부흥을, 영적 존재인 사단과 성령의 역사를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 어떠한 부흥의 역사를 평가할 때에 가장 적합한 판단 기준이라 말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마치, 애굽의 술사들이 어느 정도까지는 하나님의 능력을 흉내내었지만, 결국 물러가고 말았던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나게 한다.
성령의 비범하게 역사하심을 별로 강조하지 않는,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조용한” 역사를 강조하는 보수적인 입장에서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비범하고 특별한 일 그리고 몸에 일어나는 특이한 현상들을 성령의 역사일 수도 있다고 중립적인 기준으로 놓은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을 것이 틀림 없다. 왜냐하면, 어떤 이들의 눈에 이것은 광신도들의, 이성을 잃은 채 황홀경에 빠져서 일으키는, 성령의 역사와는 전혀 상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나단 에드워즈는 분명히, 성령 하나님이 부어지실 때에, 그 역사의 방식이 비범하다고 말한다(56). 또한 지옥의 경고 앞에서 몸에 특별한 현상들이 일어난다는 것도 성령의 역사일 수도 있다고 분명히 말한다(60).
그렇다면 냉담하고 지식 중심적인 교회 가운데 이것을 적용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비록 이 현상이 성령 하나님의 역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중립적인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가운데 이러한 일이 일어날 때에, 무조건적으로 배척하거나 터부시 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하심일 수도 있다는 경각심과 기대감을 동시에 가지고 면밀하게 그 영의 영향력을 관찰하려고 할 것이다. 즉, 이러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기준은, 성령의 역사를 이해함에 있어서 우리에게 좀더 넓은 가능성의 시각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다.
또한 성령의 영향력에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의
행동 속에 나오는 비정상적인 행동이, 중립적인 기준이 된다는 것 역시 매우 놀랍다. 이것을 통해 조나단 에드워즈는 소위 “완전주의” 를 배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린도 교회 그리고 베드로도
실수를 했다는 것을 지적한다(85). 중요한 것은, 그가
이러한 성도들의 완전치 못함이, 반드시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는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새 사람과 옛 사람이 같은 사람 안에 공존한다.(92)
성령께서 역사하시지만 사람들 가운데 실수가 나올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은, 인간의 연약함을 이해하는 것이고, 부흥이라는 것을 때로는 완전한 급진적인 변화로 생각하는 일반적인 부흥에 대한 상식에 경종을 울린다. 그리고 오히려, 그런 무엇인가 불완전하고 부족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성도가 하나님이 역사하심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논리적 근거가 되고, 그런 상황에서 조차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고 적극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동기가 된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성령의 역사의 적극적인 표지를 진술하면서, 그 첫째를 예수님에 대한 존경심이 높아지는 방향으로 영이 역사할 때에 바로 그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제시한 것은 매우 탁월하다(109). 그리고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것은, 존경심과 애정을 나타내면서 선언하는 것이라는 그의 정의 역시 매우 유용하다(110).
이러한 기준은 특별히 최근에 한국에서 급격히 세를 확장하고 있는 이단들을 볼 때에 더욱 그 가치를 드러낸다. 만약 이단이 부흥하는 이유가, 진정으로 성령 하나님의 역사라고 한다면, 그 모임 안에 오직 그리스도가 높아져야 한다. 그분을 향한 독점적인 애정과 사랑과 존경이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아니라, 교주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그가 사랑과 존경과 애정을 독점하고 있다면,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마귀의 역사이다.
또 다른 성령의 역사의 적극적인 표지 가운데, 사단은 사람의 죄를 깨닫게 하고 양심을 깨우치는 일에 힘쓰지 않으며, 오직 성령만이 그렇게 하신다라는 것은, 목회 가운데 나 자신과 다른 이들을 살피며, 우리가 참된 성령의 사람인지 파악할 수 있는 탁월한 기준이 된다(116).
교회에 다니면서 성도라고 말하면서, 거짓과 기만으로 자신의 양심을 덮어버린 사람들이 있다. 그 어떤 가책도 느끼지 못하며 양심에 화인을 맞은 이들이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분명히 사단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이들이 틀림 없다. 오직 죄에 예민하며, 양심이 살아 있는 이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것을, 조나단 에드워즈의 기준을 통해서 확인한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어떤 이에게 역사하는 영이,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의 영으로 역사한다면, 그 영이 하나님의 성령이라는 분명한 표징이라 말한다(128).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 성령의 역사의 적극적인 표지 가운데 들어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굉장히 충격적이다. 물론 사랑이 중요하다. 그러나 소위 “사역”이 훨씬 중요하지 않은가? 부흥이라 부르는 많은 집회들 가운데, 만약 그 결과를 통해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살아나지 않으면 분명히 그것은 거짓 부흥이 틀림 없다.
중요한 것은, 이웃을 향한 사랑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놀라운 것은 그것이 종교적인 그 어떤 외적인 아니라, 우리의 삶의 가장 작은 부분들과 내면의 변화라는 점이다. 다툼을 억제하고, 화평과 우호가 일어나고, 외적인 행동이 친절해 지고, 다른 이들의 영혼의 구원을 열렬히 바라는 것이다(131). 그것은 겸손한 사랑이며,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며,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다(133). 이러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지적은, 어떠한 종교적인 일을 행하는 의미로서의 사역이라는 용어에 익숙한 나 자신이 그리고 한국 교회가, 성령의 역사하심의 확실한 성경적 표지인 사랑을 향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4. 결론
이 책은, 부흥을 실제로 경험했을 때에, 그것이 정말 성령 하나님의 역사인지 아닌지에 대한 탁월한 기준들을 제시한다. 이 기준들은 자기 자신의 영적인 현상에 대하여 또한 공동체가 경험하는 영적인 현상에 대하여 분석적 적용이 가능한 기준들이다.
특별히 부흥이라는 맥락 가운데 외적인 규모와 현상들을 강조해 왔던 한국 교회 가운데, 그리고 이단이 부흥의 모습을 위장하여 급격히 세를 불리고 있는 이 때에, 진정한 부흥은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이며, 죄에 대한 각성과 회개가 일어나는 것이며, 성경과 진리에 대한 관심과,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 충만해 지는 것임을 정확하게 지적함으로써, 부흥을 사모하는 성도가, 그리고 앞으로 한국 교회가 지향해 나아가야 할 바가 무엇인지 그 방향을 잘 제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성령 세례와 충만" 북 리뷰
1. 서론
성령세례와 충만은, 성령의 사역에 관한 설교 내용을 책으로 낸 것이다. 저자인 존 스토트(John R. W. Stott)는성공회 사제이며, 세계적으로 알려진 복음주의 신학자이다. 이 책의 목적은, 성령의 사역 가운데, 성령의 약속, 성령의 충만, 성령의 열매 그리고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서 각각 살펴보는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최근에 영향력을 크게 끼치고 있는 신오순절주의 혹은 은사주의를 염두에 두고 내용을 개정한 것이다.
2. 요약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령 안에서 사는 삶인데,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나 다 내주하시는 성령을 소유하고 있다. 자녀를 삼으시기 전에 그리고 후에 성령을 준다고 성경은 동시에 말하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을 소유한 모든 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다.
또한 성령을 소유한 이가 그리스도를 소유한 사람이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사역은,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것과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시는 것이다. 또한 선한 열매를 맺는 일은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또한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성도를 연합 시키시고, 성령에 의해 드려지는 예배가 되게 하신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시작부터 마침까지, 성령의 사역에 의존하고있다.
하지만 성령이라는 약속된 '선물'은 성령의 '세례'와 동일한 것인가? 이 부분에서 사람들의 확신이 나뉜다. 다르다고생각하는 이들은, 성령 세례를 두 번째요 나중 경험이라고 가르친다. 같다고 보는 이들은, 성령으로 '세례' 받은 것은, 성경을 '받은 것' 을 나타내는 생생한 수사학적 표현이며, 이 '세례'를 모든 그리스도인이 받은 것으로 여긴다.
'부어 주심' 또는 '세례' 는 새로운 시대의 독특한 축복 중 하나이다. 예수님은 '세례자' 또는 '세례 주는 자'로 불렸는데, 그것은 성령으로 세례 주는 것이 그분의 사역의 특징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사역은, 죄를 지고 가는 것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두 가지이다. 이것은 새 언약의 두가지 주된 복이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8장 가운데, 이 두가지를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두 가지 선물로 이해했다. 성령의 세례는 성령의 약속 또는 선물과 동일한 것이고, 구원의 복음에 필수적인 것이다. 성령의 부어주심 또는 세례는, 새로운 시대의 독특한 축복일 뿐 아니라 또한 보편적 축복이다. 요엘 선지자를 통해서, 성령이라는 선물의 보편성을 확인한다. 구약과 비교할 때에, 성령의 사역은 더 넓고 깊어 졌다. 모든 믿는 이들에게 성령의 축복이 있다. 구약 성도들이 알지 못했던 성령의 내주하심이 있고, 본질적으로 성령의 사역은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다.
오순절에 서로 다른 두 그룹이 성령의 세례 또는 선물을 받았는데, 그것은 초두에 나오는 120명과, 말미에 나오는 3,000명이다. 120명은 이미 중생한 자들이고, 3천명은 불신자들이었다가 죄사함과 성령의 선물을 동시에 받았다. 그 일에 대해 기다림 없이 회개하고 믿은 즉시 일어났다. 오늘날의 표준은 첫째 그룹이 아니라 둘째 그룹이며, 120명의 경험이 두 단계에 걸친 것은, 단지 역사적 상황에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순절의 두 가지 의미를 구별하지 못해 현대에 혼란이 있다. 성령의 부어 주심은 예수님이 행하신 구속 사역 중마지막 사건이다. 따라서 그 일은, 반복될 수 없다. 그러나 그 축복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모든 자들을 위한 것이다. 모든 이들은 그 날 이후 새 시대에 참여한 자들이 되었고, 죄사함과 성령의 선물을 받았다. 또한 오순절은 최초의 부흥이다. 그러므로 3천명의 회개는, 표준적이라 볼 수 없다. 그러나 믿음으로 반응한 자들에게 주신 약속은 표준적인 것으로, 그 내용은 죄사함과 성령을 둘 다 받는 것이다.
사도행전 8:5-17절은, 사도들이 파송된 이유는, 이 회심자들이 사마리아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즉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루러 내 증인이 되리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의 성취에 대한 묘사 중 일부이다. 사마리아인들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사도가 그들의 회심을 검토하고 안수하고 확증하기 전까지,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성령의 선물을 보류하신 것이다. 이것은 예외적인 상황임으로, 오늘날의 영적 경험의 표준이 될 수 없다. 빌립이 잘못 가르치거나, 사마리아인들의 믿음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지 역사적 상황 가운데 성령이 나중에 주어진 것이다.
사도행전 19:1-7절에서 바울이 에베소에서 만난 사람들은, 누가의 묘사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 같다. 그리고 바울은 그들의 믿음의 진정성을 의심했다. 그리고 복음을 그들에게 다시 설명했다. 즉 이들에게 바울이 세례를 주었고, 안수 했을 때에 그들이 성령을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들은 그 이전에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회심에 뒤 따르는 성령의 선물 또는 세례의 증거가 될 수 없다.
신약 성경은, '성령의 세례'라는 표현과 '성령의 선물'을 동의어로 사용하며, 성령으로 '세례를 베푼다'고 하거나 '세례를 받는다'고 할 때 사용되는 동사와 동의어로 쓰인다. 성령을 '가진 것', '성령으로 사는 것' 그리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 등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그들의 믿음의 성숙도와 관계없이, 그들이 새롭게 출생하는 바로그 순간부터 똑같이 적용되는 표현들이다.
고린도전서 12:13에서 '다'와 '한'이 반복되어 강조되어 사용되는데, 그 장의 후반부에서 은사의 다양성을 보여주기 전에, 서두에서 영적 은사의 수여자이신 성령의 통일성을 강조한다. 이것은 성경의 선물과 성령의 은사들사이의 차이점이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며 또 우리에게 성령을 마시게 하신 분이시다. 세례받는 것과 마시는 것은 동일한 표현이며, 모든 그리스도 인들은 이 두 가지를 다 경험했다.
성령의 세례는 단회적인 선물이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은, 이 선물이 지속적이며 갈수록 더 많이 충당되어져야하는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세례는 반복될 수도 혹은 잃어버릴 수도 없지만, 충만은 반복될 수 있고 유지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성령 충만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특징이며, 특정한 사역을 위해서 내려 주시며, 위기 상황에서 준비시키기 위해서 주어지는 것이다.
성령 세례에 관련된 신약 성경의 일곱 구절은, 명령형으로 된 권면은 없지만, 성령 충만은 받으라고 하는 명령들의 구절들이 존재한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고, 성령의 은사를 넘치게 받았지만, 성령으로 충만했던 것은 아니었다. 계속적인 성령으로 충만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주 예수님께로 가야 한다.
또한 성령 충만의 증거는, 성령의 은사에 있지 않고 성령의 열매에 있다. 에베소서 5:18-21에는, 성령의 충만을받으라는 단 하나의 명령 다음에, 성령충만의 결과들을 보여주는 네 가지 묘사가 이어진다. 술취함과 비교할 때에 성령 충만은, 억제되고 이성적인 도덕적 품행으로 끌어감으로써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킨다. 그리고 그 결과들은 관계에서 나타난다. 성령 충만의 건전한 결과들의 두 가지 주된 영역은, 예배와 교제이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사람 양쪽과 다 바른 관계를 맺게 하신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그들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믿음으로 붙잡는 정도가 다르다.
보통 수준의 그리스도인들은, 조용하면서도 전혀 극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성령의 '선물' 또는 '세례'를 받았다고할 수 있다. 만약 그들의 수준 낮은 신앙 생활이 문제라면, 성령 충만을 회복해야 한다. 오순절적인 특별한 경험을 가지고, 그것을 성령으로 받는 세례라고 부르는 자들에게는, 그런 경험의 일부가 마귀적이라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또한 많은 부분이 심리적이며, 또 어떤 부분들은 실제의 회심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표준은, 단회적으로 성령의 '세례'를 받은 후, 그 후로 거룩함과 그리스도인의 성숙을 향해 꾸준히 자라가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특정인의 경험이, 매우 다양하며, 타당성을 의심할 필요는 없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예외 없이 판에 박힌 어떤 정형을 강요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 어떤 경험들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첫 번째 은혜의 사역과 그 중요성에서 비교될 수 없다. 또한 모두 불완전한 것이다.
갈라디아서에 등장하는 성령의 열매는, 특질들을 세 개씩 묶어서 나누는 것이 가장 간단한 구분이다. 첫째로 하나님, 둘째로 다른 사람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를 묘사한다. 성령의 열매는, 고르거나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없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모두 함께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 을 이루기 때문이다. 성령은 서로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각각 다른 은사를 주신다. 그러나 그분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같은 열매를 맺도록 일하신다. 치우친 그리스도인은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이다. 반면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이 나타내는 인격적 특성은 언제나 온전하고 성숙하며 충만하다.
어떻게 해야 이러한 인격적 특성들을 개발할 수 있는가? 첫째로, 성령의 열매는 성령께서 맺게 하시는 초자연적인 것이다. 둘째로, 이것은 열매이기 때문에, 조건이 충족된다면 자연스럽게 자란다. 근본적인 원리는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심을 것인지를 결정함으로써 우리가 거두게 될 것이 무엇인지 미리 결정할 수 있다. 사도가 '심는 것' 으로 의미하고자 한 것은, 우리의 생각과 습관, 생활 방식, 삶의 방향과 삶의 훈련 등으로 구성된 전체적인 삶의 패턴으로 보인다.
자연적 성화와 관련해 무엇보다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제대로 된 밭에 제대로 된 씨를 뿌려야 한다는 것이다. 육체를 위해 심으면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해 심으면 '영생' 을 거두게 된다. 또한 성품이라는 것은 일생에 걸쳐 열매를 맺는다. 이 점진성 때문에, 우리가 심는 것에 더 주의를 기울이게 되며, 공적, 개인적 경건의 삶의 습관을 위해 자신을 더 훈련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은 기원이 초자연적이기 때문에, 겸손과 믿음이필요하다. 또한 성장을 위한 조건을 만들기 위해서, 그것을 만족시키기 위한 훈련이 필요하다. 또한 점진적이기때문에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하다.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 종종 교회의 통일성과 다양성을 대조시킨다. 교회는 하나인데, 그 이유는 한 성령이 모든신자 안에서 거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는 다양한데, 그 이유는 한 성령이 모든 신자에게 각각 다른 은사들을나누어 주시기 때문이다. 성령의 은사들은, 사람들이 특정하게 각자에게 맞는 봉사의 일을 하는데 적합하도록 하나님이 그분의 은혜와 능력으로 부여하신 일정한 재능들이다. 그것은 어떤 은사와 그 은사를 발휘할 수 있는 역할을 가리키거나, 아니면 그 어떤 역할과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해 주는 은사를 가리킨다. 신약 성경에는 모두 합쳐서 스무 개 이상의 은사가 나온다. 그리고 다양성을 사랑하시고 후히 주시는 하나님은, 그보다 훨씬 많은 은사들을 주실 수 있다.
영적 은사와 타고난 재능 사이에는 분명히 연관 관계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시작하실 때 부터 마지막을 계획하신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회심 이전과 이후 사이에, 연속성이 없다고 쉽게 결론 짓지 말아야 한다. 또한 몇가지은사는 기적적이지 않고 오히려 지극히 평범한 것이다.
타고난 자질을 영적인 은사로 바꾸어 놓는 요인은 그 목적과 동기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은사는, 그분이 주시는 타고난 재능과 잘 들어맞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영원한 목적을 가지고 계신 성령의 하나님과 더 조화를 이룬다. 어떤 은사들은 무척 평범해 보인다. 가르치는 은사나 권위하는 은사, 구제하는 은사나 긍휼을 베푸는은사는 기적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양 극단을 경계해야 하는데, 기적의 은사가 없다고 대답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하시는 거의 모든 일이 기적적이라는 견해이다. 성경의 기적들은, 성경에서 몇 군데 뭉쳐서 등장한다. 율법, 선지자, 주님, 사도라는 게시의 주된 네 시대이다. 기적들의 주된 목적은, 새로운 게시의 시대의 진정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특별한 계시가 완성 되었기 때문에 기적의 일상성을 믿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기적의 특수한 상황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고 받아들여야 한다.
오늘날 교회에 사도와 선지자가 존재하는가? 고전 12:28-29 그리고 엡 4:11의 목록을 분석 해 볼 때에, 두 곳 동시에 사도라는 말이 목록의 맨 처음에 나타나고, 고린도전서의 목록에서는 사도를 '첫째'로 지칭하여 처음 세 은사가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도의 은사는 열두 제자, 바울 그리고 아마도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와한두 사람이 더 포함되는 그리스도의 사도들로서, 바로 그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의 그룹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선지자는 어떠한가? 그것은 '예언'과 '선지자'에 대한 우리의 정의에 달려 있다. 구약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선지자는 계시가 주어지는 통로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던 자들이다. 그런 성경적 의미에서 보면, 더 이상선지자는 없다고 볼 수 있다. 특별히 '사도와 선지자들' 은 함께 묶여 있고 그 위에 교회가 세워지는 터이다. 즉 기초 자체는 다시 놓여질 수 없으며, 선지자라는 일차적 의미에서는 이 은사는 주어지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성경에서 선지자는, 일차적으로 미래에 대한 예언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계시의 통로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영적 은사들이 열거되어 있는 신약 성경의 네장 모두가 각 절에서 강조하는 단어들은 '파스' 혹은 '헤카스토스' 이다. 은사란 널리 퍼져있는 정도가 아니라 보편적이라는 것이다. 지역교회 전통 이미지는, 많은 일을 하는 목회자그리고 기여하는 바가 없는 대다수 교인들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은사주의적 운동의 성장의 배경이 된다. 그리스도의 몸을 믿는다면, 모든 은사를 각 사람에 주셨다는 것을 고백한다면, 하나님의 은사를 가진 일꾼들을 일으켜 주시도록 간구하고, 활용하도록 사람들을 격려하고 기회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 교회는 은사적 공동체이다. 모든 구성원은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경우에든지 한 가지 이상을 가지고 있다.
영적 은사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며, 하나님의 영의 선물이며,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주시는 선물이다. 그러므로 어떤 지체도 자신을 경멸해서는 안되며, 동시에 자만해서도 안된다. 은사는, 하나님이 임의로 나누어 주시는 하사금이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가 어떻게 사용 되어야 하는가? 은사는 자신을 위해서도, 혹은 에배를 위해서도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교회에 덕을 끼치는 것, 즉 교회를 세우는 것이며 그러므로 봉사의 선물이다. 세운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돕고, 위로하고, 강건하게 하는 것이다. 덕을 세우는 것에 따라서 은사의 중요성이 다른데, 세우는 역할을 많이 할 수록 가치가 더욱 커진다. 그리고 가르치는 은사야말로 가장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진리야 말로, 그리스도인들을 가장 잘 세워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방언이라 알려진 현대의 현상이, 신약 성경에 나오는 은사와 동일한 것인지는 아직도 의문이 풀리지 않고 있다. 어떤 이들의 방언의 심리적 해방감 혹은 새로운 차원의 자유는 부인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4장에 볼 때에, 바울은, 말하는 자가 자신이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개인적인 방언을 강하게 저지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또한, 마음으로 적극적으로 개입되지 않은 그리스도인의 기도와 찬미란 바울에게 생각하기 어려웠던 것이 틀림 없다. 또한 신약 성경에서 덕을 세우는 것은 언제나 다른 사람을 세우는 사역을 말하기 때문에, 그리고 모든 영적 은사들 역시 봉사의 은사이며, 공동의 유익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바울 사도가 개인적으로 방언을 말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권면한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바울 사도의 마음을 사로잡은 사역의 영광스러운 목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온전한 연합과 성숙을 향해 나아가도록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다. 이것은 진리와 사랑이라는 한 쌍을 통해서 성취될 수 있다. 우리는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해야 한다. 진리는 영적 성숙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진리는 사랑으로 따뜻해지고 부드러워져야 한다. 그러므로 은사들은 사랑 안에서 발휘되어야 한다. 사랑은 가장 높은 은사보다도 더 귀한 제일 좋은 길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사랑, 진리, 은사, 봉사라는 네 측면을 가진끊어질 수 없는 고리 또는 원과 같은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우리 안에서 성령이 사시도록 하신 사실에 하나님께 늘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회개와 믿음, 순종을 통해 성령의 충만함을 더욱더 구해야 한다. 계속적으로 성령을 위해 심음으로써 그분의 열매가우리의 성품 가운데 자라나 무르익도록 해야 한다. 또한 성령은 그리스도인 개개인 뿐 아니라, 교회에 대해서도관심을 갖고 계신 분임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의 통일성과 다양성은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은사는 봉사를위한 많은 다양한 능력들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은 적어도 한가지 은사는 가지고 있다. 그것은 주권과 은혜 가운데 분배되며, 공동의 유익을 위한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교회를 세워 성숙케 하기 위한 것으로 사용한다. 그리고그것을 통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3. 비평적 평가
저자의 주장 가운데, 예수님의 특징적인 사역이 옮겨 버리는 것과 가져다 주는 것으로써 이중적이라는 것은 한국교회 가운데 매우 큰 시사점을 가진다(25). 왜냐하면 일반적인 보수적인 교단에서는,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옮겨버리는 것은 강조하지만, 가져다주는 것 즉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강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사역의 절반만 인정하는 것이며 신학적인 구조적 결함이라 부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서, 성도는 자신이 어떻게 구원 받았는가에 대한 건전한 지식과 이해는 있지만, 그럼에도불구하고 어떻게 자신이 현재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즉 지금 이 순간에, 하나님께서영적으로 부어주신 축복에 대한 인식이 약하다. 그래서 이러한 질문을 필연적으로 가지게 된다. 하나님의 칭의가나에게 있었다면, 도대체 현재의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성도로서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하나님께서나에게 주시는 은혜와 그분의 도우심은 어떤 것인가? 과연 성령 하나님은 나의 삶 가운데 어떤 역할을 하시는 것인가? 이러한 실질적인 질문과 혼란들에 대하여 이 책은 답을 준다.
구원받은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 죄의 용서와 성령이라는 두가지임을 분명하게 하지 않기 때문에, 성도들은 영적인 자만심과 엘리트주의에 빠진다(27). 성령의 세례는 성령의 약속 또는 선물과 동일한 것이다(27).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보편적으로 주신 것을, 특정한 누군가만 누릴 수 있는 그 어떤 것으로 바꾸어 버렸다. 하나님께 받은 성령의 은사들을 자랑하며, 마치 다른 이들은 성령을 받지 못한 것처럼 행동한다.
이러한 영적 엘리트주의를 깨트리기 위한 가장 중요한 첫 작업은, 믿는 자들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을 선물로 주셨다는 것을, 성령의 세례는 곧 하나님의 선물이며 모두가 구원의 과정 가운데 경험하는 것임을, 즉 보편적인 축복임을 성경적으로 가르치는 것이다. 만약에 이것이 흔들리면, 은사주의에서 주장하는 것 처럼, 성령세례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자들에게 부어주시는 축복이라고 받아들일 것이며, 교회는 잘못된 성령론에 사로잡힌 영적으로 교만한 자들로 가득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
성령의 역사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특별히 성령의 은사를 생각할 때에 중요하다. 한국 교회는 기도원을 통해서 많은 성령의 은사들이 나타났고, 그곳에서 소위 은혜 받은 성도들이 지역 교회 가운데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문제는 그들이, 성령의 은사를 마치 자신의 능력으로 노력으로 얻은 것 처럼 특권 의식을 가졌다는 것이다.
저자는 성령의 은사들과 성령의 열매가 익어가는 그 두가지를 철저하게 구분한다. 그리고 성령의 충만이라는 것은 성령의 은사를 충만히 받은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 것임을 논증하는데, 그것은 목회의 현실가운데 매우 중요한 진리이다(65). 성령의 열매를 통해서 성령 충만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저자의 논증은,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 평생동안 힘쓰고 씨를 뿌려야 하는 것은,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라는 것을 정확하게 알려 준다.
저자가 염려하는 것 처럼 나 역시, 사람들이 소위 성령 체험을 하고서는, 그것을 모든 이들이 경험해야 하는 정형으로 강요하는 것을 염려한다(85). 저자의 이야기하는 것 처럼, 그 어떤 경험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이라는 첫 번째 은혜의 사역과 비교될 수 없다(86). 바로 이 부분이 확실하게 지켜질 때에, 사람들은 영적인 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참된 성도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훨씬 내면적이며 관계적인 성령의 참된 열매를 추구할 수 있는 열정을 가질 수 있게 된다.
특별히 최근 한국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심각한 가정 폭력 이후에 안수를 받은 목사의 경우를 생각할 때에, 참된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 사람이 몇가지의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목회자가 될 경우, 그것이 얼마나 큰문제가 되는지를 여실히 보여 준다.
또한 비슷한 맥락에서, 성경 전체를 살펴볼 때에, 성경의 기적들이 전체적으로 네 군데에 몰려서 등장하며, 그것은 새로운 계시의 시대의 진정성을 증명하는 목적으로 나타난다라는 저자의 주장은, 현대의 시대에 있어서 교회가 무엇을 더욱 힘써야 하는지에 대한 탁월한 방향을 제시한다(122).
그것은 비록 하나님께서 지금에도 기적을 능히 베푸실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살아가는 성도들이 힘써야 하는 것은, 외적으로 보이는 기적이 아니라 내적으로 완성되어 가는 성령의충만과 성령의 열매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향이야 말로, 영적으로 미성숙한 성도들의 죄들로 인해 사회로부터 지탄 받고 있는 한국 교회가 힘써 가야할 길이라 할 수 있다.
은사라는 것은 널리 퍼져 있는 정도가 아니라 보편적이라는 저자의 주장은 탁월한 통찰이라 할 수 있다(131). 영적인 엘리트주의를 벗어나, 모든 성도들이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를 가지고 있음을 고백할 때에, 드디어 목회자중심이 아닌,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교회의 지체로서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는 논리적인 근거를 갖는다.
결국 목회자의 역할은, 성도들이 자신의 은사를 발견하고 교회를 위해 세상을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임을 책을 통해서 확신하게 된다(133).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공동의 유익을 위해서 주어진 은사가 원래의 목적대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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